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리아 페이- 베르퀴스트, 정희진 외
우리가 그네를 타며 나누던 말
최은영 소설가
당신이랑 커다란 그네를 같이 타고 싶다.
그곳은 넒은 초원일지라도, 잔잔한 파도가 치는 바닷가일지도 모르지. 그곳이 어디든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햇볕은 따뜻할 거야. 우린 그네의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테고. 앞으로, 뒤로 조금씩 흔들리면서 서로를 보고 웃고 있을 거야.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잖아. 그런데도 난 당신에게 말해. 고마워, 이렇게 나와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있잖아, 라고 당신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끔찍한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대.
여긴 평행우주고 아름다운 곳이니까, 그곳과는 무관한 곳이니까 살아 있지. 당신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
난 말이야, 성별 감별 낙태로 죽은 여자아이 몇 백만 명 중 하나였어.
난 말이지, 부모에게 학대당해 죽은 아이였어.
남편과 남자 친구에게 맞아 죽은 여자였어.
남들과 다르다고 괴롭힘을 당하다 죽어야 했던 사람이었지.
그곳에서 나는 죽어야 했어. 살아서는 안된다고들 말하더군. 그들이 날 죽였지. 그곳에선 말이야.
우리는 멀리멀리로 그네를 탔어.
산다는 건 좋은 건데 말이야. 내가 나로 산다는 건 좋은 일인데 말이야. 그래서 살아보고 싶었지.
내가 나라는 게 왜 죽을 이유가 되어야 했지?
우린 여기에 있잖아. 내가 말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아이라는 이유로, 레즈비언.게이.바이.트렌스젠터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몸과 마음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슴 아픈 일을 겪을 일이 없잖아, 여기는. 우리는 서로 다 다른 빚으로 빛나고 있지. 하지만 그곳처럼, 당신이 죽어야 했던 그곳처럼 그 빛을 꺼뜨려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없잖아.
그저 자기 자신으로 빛나고 있을 뿐.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목소리로 노래 부를 수 있지.
정해진 목소리가 아니라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어.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하다면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
그렇지, 이곳은. 당신은 말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 덴데. 차별이니 폭력이니 학대니, 그런 것들을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곳에 태어난 아이들은 배워 나갔겠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를 감춰야 하는구나, 나를 숨기고 나를 고치고 나를 세상에 맞게 바꿔야 하는 구나.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 짓밟아야 하는 구나. 세상이 내 몸에 붙이는 온갖 편견들이 진짜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이들의 몸에도 편견의 딱지를 붙이고 살아가지.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을 섞어 쓰면서 말이야.
응, 저쪽에서는, 저쪽 세상에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외롭고 고달플 때가 많이 있지.
인간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 결코 자신이 바라는 것만큼을 이룰 수 없을 때의 어려움,
아픈 몸, 연결되고 싶은 사람들과 연결되지 못하고 잘못된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괴로울 때가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어려운 것이 삶일 텐데, 불필요한 고통을 지어내는 세상, 세상은 온간 방식으로 당신에게 고통을 안겼어.
더 약한 인간이라는 이유로 학대하고 이용하면서 그것이 모두 당신 탓이라고 말랬지. 당신이 당신의 빛깔로 피어날 수 없다고 말했어.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권력과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협박했지.
당신 가슴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 당신의 진짜 마음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고 살라고 했어.
그렇게 상처받은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하라고 했지.
다 네탓이라고.
당신이 폭력 가해자의 처벌을 통해 일말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을 때 그들은 망각과 용서를 말했어.
당신이 사랑을 말했을 때, 그들은 윤리와 도덕이라는 껍데기로 포장된 혐오를 내밀었지.
당신이 주저앉아 울다 겨우 한마디 한마디,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동안 그들은 당신의 말에 물음표를 붙였어, 들어주지 않았어.
당신의 커다란 귀를 떠올렸지.
당신을 따뜻하게 안아 줄 커다랗고 부드러운 귀를.
멍들고 부어오른, 진물이 흐르는 당신의 말을 흘려보낼 수 있는 귀를 떠올렸지.
당신은 멀리로 발을 구른다.
이곳도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고통은 상대의 존재에 대한 감응에서 발생하잖아.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감응하며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 말이야.
이곳에서 고통은 차별이나 착취, 학대, 온갖 종류의 인간이 만들어 낸 폭력에서 기인하지 않아.
그리하여 당신은 여기에 살아 있네.
당신의 모습 그대로 반짝이고 있어.
아름다운 당신.
저쪽 세계에서는 이미 소거되어 버린 당신
이곳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 어떻게 차이가 위계가 될 수 있는지,
사람 사이의 높낮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위계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해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심지어 타고난 성별과 성적 지향으로 인간을 차별할 수 있다는 개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지.
우리는 겨우 저쪽의 세계를 상상해 봐. 생명과 존엄조차도 공평하게 다뤄어지지 않는 곳. 당신이 흘리는 눈물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자기가 저지르는 일들이 반동이 되어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그 때문에 그 세상에서 사라져야 했던 당신을.
우리는 멀리멀리로 발을 구른다.
유쾌하게 웃는 당신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것들뿐이네. 나란히 앚아서 그네를 탈 수 있는 시간,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빛으로 마음껏 빛날 수 있는 시간, 서로에게 커다란 귀가 되어 줄 수 있는 시간 말이야.
당신, 내가 그곳에서 잃어버린 당신.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p.87~
건너가는 힘
이진송 작가
소설을 쓰고, 시를 읽는다. 처녀작이 아닌 첫 작품을 내놓고, 여류 작가가 아닌 작가로서 아무에게도 등단 여부를 질문받지 않는다. 내가 결혼했는지, 연애 중인지, 어디 출신인지, 섹스 경험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소설에서 집요하게 '여자 냄새'를 맡으려던 이들은 멸종한 지 오래다. 때때로 시를 쓰고 소설을 자주 읽는다. 누구든 쓰는 순간 시인이고 소설가다. 쓴 사람의 명성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메시지 쪽으로 무게를 두어, 누구든 지면을 얻을 수 있다. 쓰레기 같은 작품은 쓰레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수만큼 읽히고, 욕을 먹을 부분은 욕을 먹고, 좋은 작품이 반드시 많이 읽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당한 평가를 받고 매장당하지 않는다. 알아보는 이들 사이에 가능한 공명이, 수십 년 전부터 위기라는 문학을 눈길의 썰매처럼 느리고도 고요하게 끌고 간다.
엄마의 자궁으로 기어들고 싶은 욕망도, 가족을 위해 희생한 늙고 수수한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자기가 먹은 자리를 스스로 치우긴 싫은 자아도취적 연민도, 아내나 여자 친구를 때리고 상류층 여자를 강간한 주제에 하층민이나 소시민으로 코스프레하는 범죄자도, '창녀'와 '처녀'와 '누이'라는 단어도, 제 욕망대로 살다가 단죄당하는 여성도, 임신을 중단하려다 태아의 움직임에 갑자기 모성이 샘솟아 배를 끌어않고 "아가야, 엄마가 미안해" 하고 울어버리는 여성도, 어린 여자를 훔쳐보며 구원을 갈망하는 늙은 남자도 없는 문학의 세계. 때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연민하는 아름답고 철학적인 문장을, 보편을 특정 조건의 인간에게만 허용하는 기만을 기꺼이 내리치는 망치. 타인을 착취한 결과물에 예술 대신 범죄라는 라벨을 붙이고 관심을 한 방울도 주지 않는 단호함. 진짜 예술에 이르려면 독한 술이나 파격적인 섹스, 금기를 깨는 연애가 필요하다고 강요하는 목소리를 비웃고 따돌릴 줄 아는 사람들이 진하고 뜨거운 차를 나눠 마시는 시간. 문학을 가르치고 배울 필요도 없지만 한두 마디의 조언에 목마른 이가 스승을 찾으면, 그 간절함을 눈덩이 속에 숨긴 돌 같은 흑심으로 내려찍지 않는 상식. 이 풍경 속에서, 당연한 것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전혀 칭찬받을 필요가 없다.
사탕과 과자를 마련하고 책방을 연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언제든지 배를 깔고 엎드려 무엇이든 읽고 어떤 것이든 쓸 수 있는 오후. 공주가 칼을 들고 용과 싸우러 갔다가 볼에 화상을 입지만 기어이 이기고 인질들을 구출하는 동화 옆에 뜨개질을 좋아하는 왕자가 지구를 덮을 수 있을 만큼 큰 레이스를 뜨는 동화 옆에 치마를 입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입을 수 있고 다리를 오므리거나 속바지를 챙겨 입을 필요가 없는 동화 옆에 치마를 입은 애들끼리 사랑하고 뽀뽀할 수 있는 동화 옆에 선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날개 옷을 훔치는 대신 꽃을 꺽어 두고 자리를 피할 줄 아는 나무꾼이 나오는 동화 옆에 몸집이 큰 여자아이가 자신의 양감을 사랑스러워하는 동화 옆에 휠체어를 탄 아이가 숨쉬듯 자연스럽게 외출해서 돌아다니다가 주인 잃은 강아지를 찾아 주는 동화 옆에 남자로도 여자로도 살기 싫은 아이가 두려움 없이 화장실에 갔다가 마법의 거북이와 마주치는 동화 옆에 책이 가득한 서재 앞에 앉아서, 얼마 안된 옛날에는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기 전에도 죽이고 태어난 뒤에는 죽으라고 찬 바닥에 밀어 두고 젖도 안 주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입을 모아 거짓말을 한다며 순허풍쟁이라고 깔깔거린다.
나는 쓰고, 그것은 전혀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다. 여성이 누군가의 엄마나 여자 친구나 여동생이 아닌 주인공이 되는, 가슴과 엉덩이가 아니라 욕망과 서사의 역사를 갖고 움직이는, 여성이기 때문에 더 따뜻하거나 보호 본능을 발휘하기는 커녕 시퍼렇게 분노하고 세상을 손에 넣으려고 탐욕을 부리는, 풍만한 설덩이와 무성한 털을 출렁이며 달리는, 허리가 살짝 구부러진 할머니가 거침없이 총을 쏘는, 아무렇지 않게 질에 생리컵을 밀어 넣고 바다에 뛰어드는, 어쩌다 옷에 생리혈이 묻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 이런 이야기는 이미 너무 뻔하고 진부하다는 말을 듣는다. 여성주의 문학이라는 말은 이제 옛날 자료집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서재의 풍부한 스펙트럼 속에서 죽순처럼 자라난 여자아이들이 나를 향해 혀를 찬다. 지금이 좋은 시절이라니, 이 꼰대! 아직 혁명할 것투성이인데!
처음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나는 고민했다. 이것은 '미래'일까, '장소'일까, '관계'일까, '제도'일까, '정체성'일까?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완결된 비전 하나로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꼭 내 그릇만큼 좁은
'당신들의 천국'은 아닐까? 유토피아 자체가 불가능성을 안고 있는 개념이라면, 이를 꿈꾸고 추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근 몇 년간 나는 남루한 권태에 시달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다른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이 문학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살아온 나에게 한국문학의 여성 혐오적 요소나 문인들의 성차별적 언행, 유명세를 이용한 성폭력 등이 시차를 두고 물 위의 기름 처럼 둥둥 떠올랐다. 명확한 가해가 어렴풋한 풍문으로만 존재할 수 있게 한 집단적인 은폐와 공모까지 낱낱이 보였다. 사랑하는 것들, 그리하며 내 인생과 내 존재의 척추처럼 자리 잡은 무언가를 부정하고 나에게서 떼어 내는 작업은 만만치 않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에 좌절했지만, 그와 동시에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았다. '문학은 원래 그렇다'거나 '문인들은 원래 개새끼'라는 말을 넘어서서 이제까지 존재한 적 없는 문학을 꿈꾸고 실천하는 것,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 그 과정에서 싸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참여하는 것, 썩은 것을 욕망하는 대신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면서 그 뒤틀린 구조에 벽돌을 단 한장도 더하지 않는것.
나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의 상상과 달리 물질적으로 풍부하지도, 정서적으로 평화롭지도 않다. 물질적 풍요는 경제학이나 경영 쪽으로 완전히 문외한인 나의 상상력 바깥에 있을 뿐 아니라 모어처럼 자연을 무한정 착취하는 데 동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읽고 싶은 책을 살 수 있고,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저녁을 가지고, 권위나 인정에 대한 강박 없이 저만의 이야기와 문장을 쓰고 공유할 수 있기를 꿈꿀 뿐이다. 나는 예술, 특히 문학이 폭력을 정당화할 만큼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기를 꿈꾼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인 동시에 여성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순간순간 내가 느껴야 했던 분열감과 위화감 없이 여자 아이들이 자유롭게 읽고 상상하고 쓸 수 있기를 꿈꾼다. 여자가 써야 하는 이야기와 여자가 쓸 수 없는 이야기의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몸에 대한 수치심이나 굴욕감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공포와 자기 분열 없이 자란 여자아이가 쓴 책을 읽기를 꿈꾼다. 그런 순간을 당기기 위해서, 내가 지치지 않고 꿈꾸고 쓸 수 있기를 꿈꾼다. 이와 동시에 이런 나의 유토피아가 또 다른 이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은, 여전히 뛰고 소리치고 춤추면서 싸워야 할 미완 또는 불완전한 세계이기를 꿈꾼다.
유토피아는 그 자체에 현실의 결핍과 부재가 필요하다. 이름도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한다. 나는 유토피아를 고정된 장소나 구체적인 세계로 표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토피아는 그 결핍과 부재를 동력 삼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동적이고 유연한 순간들의 총합 또는 가능태여야 한다. 사람들이 선하다는 모호한 기준에 매몰되기 보다 여전히 부족하기를 바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야 인간이고, 그래야 계속해서 꿈꿈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상상하는 유토피아는 갈등이 없는 곳이나 고정되고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어떤 갈등이 권력관계에 따라 매장되거나 은폐되지 않고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운동성 그 자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유토피아와 여성운동이 만나는 지점을 사유한다. 이제까지의 지배적인 흐름에 반하여 새로운 구도와 방식을 창출하고 그를 통해 궁극적인 차별의 무화, 완전한 평등을 꿈꾸는 여성 운동 내에는 이미 작은 유토피아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토피아는 '계급없는 사회'가 실현되었을 때 참정권이나 직업을 고를 자유 같은, 부분적이고 기만적인 권리에 만족하지 않고 최종적인 해방을 꿈꿀 때 구체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가능태로서의 유토피아가 이러한 맥락이다. 현재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계속해서 다른 가능성을 꿈꾸는 힘, 그 힘을 발판 삼아 기꺼이 건너갈 수 있는 유연성이야말고 유토피아의 속성인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건너갈 것이다. 잠깐 빛났다가 사라지는 '유토피아적 순간'들의 접합부에 기꺼이 매혹되며, 유예되는 이상에 조바심치거나 좌절하지 않으면서, 쓰는 일이 나에게는 뗏목이다. 그리고 이 건너가는 힘 안에서, 유토피아는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350-356
▶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책을 반납하며, 그 책 내용을 다 읽지 못한 점이 아쉽고, 나의 게으름을 자책하면서 다시 빌렸다. 그러면서 내가 페미니즘 책을 다시 찾아 읽기로 맘먹은 이유를 잠시 생각해본다. 영화 82년 김지영, 지인의 심리적 고통, 메스컴에 화자되는 20여년전 여성강간 연쇄살인 사건과 그와 같은 성폭력 사건들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더 나아가 지금까지 인류가 일구어 온 세계의 현실은 한번도 폭력을 넘어선적이 없었고 차별과 위계 급기야 폭력의 피해자중 제일은 여성이다.
인류의 절반인 가히 엄청난 수의 집단,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단 하위의 범주, 차별과 폭력의 대상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의 문명에 무슨 발전이 있었을가 참 회의적이다.
여성의 문제를 두 가지 방향에서 확대해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피해자로서 여성이고 또 하나는 '성'이라는 분별과 차별의 잣대(젠더)이다.
피해자 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을 넘어 폭력사회의 약자를 대표하는 보편적 약자이며, 사회의 다른 약자들(장애인, 이주민, 노인, 동성애자 등)을 만들어내는 여러 기제는 여성차별의 기제들을 학습 모방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성'이라는 기준으로 나누고 그것도 남성과 여성으로만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남성을 곧 인간을 대표하는 인간의 중심으로 보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사회의 엄격한 이분법적 성구분(남성과 여성 즉 젠더)으로 인해 억압과 구속,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여성과 게이, 레지비언,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이다.
페미니즘은 사회의 이분법적 성기준을 중심 문제로 제기하고서, 이로 부터 해방되기 위한 실천을 모색하는 행동과 이론이다. 페미니즘 깃발 아래에는 여성과 성소수자 뿐 아니라 이 사회의 다양한 약자들이 모인다. 이들은 어떻게 이 억압체제부터 자유로운 삶,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가를 꿈구며, 사회의 억압적 성체제를 철폐할 것을 외친다.
이렇게 페미니즘의 문제를 새삼 정리하는 이유는 무얼까?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 무엇에 깨어 있지 못하고 있는가? 자타 양면으로 내 정체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젠더, 그 젠더라는 잣대가 이미 치명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나, 너, 사회, 세계에 관한 내 관점과, 내가 너와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 모두가 젠더와 무관하지 않게 젠더화되었는데,
나는 내가 곧 여성으로 규정되는 몸을 갖고 일상을 사는 게 아니라 마치 추상적인 한 인간으로 온전히 살고 있다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나와 너, 세계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고 사는 건 아닌지?
내가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특히 <페미니즘 유토피아>책을 잡은 이유는 64명의 페미니스트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꿈꾸기까지 그들의 삶은 얼마나 어떻게 디스토피아였을까를 보고 싶었기때문이다. 젠더라는 차별과 폭력으로 짜여진 세계, 그것의 디스토피아의 면면들을 모아서 그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바로 그 속에서 몸을 갖고 숨을 쉬며 살고 있고 너, 세계와 관계 맺고 있는 그 세계를 가급적 제대로 이해하고 싶고, 깨어있는 삶을 살고 싶기때문이다. 무아의 길, 고해를 넘는 길, 그 길로의 첫 발은 무엇보다 먼저 현재의 나, 내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는 일, 해석의 언어를 얻어 내 말로 풀어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다른 나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은 차제의 일. 이 책을 읽으며, 일단 나에 국한된 질문을 열거 해본다. 내가 감히 해보려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은 무엇이고, 내가 그것이 구속인지도 모르고 자승자박한 것은 무엇인지? 해보지 못하고 지레 포기한 일은 무엇일까? 내가 살면서 격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불쾌한 일, 아니면 내 안에 꼭꼭 숨겨져 있어 나오지 못하나 감정 덩어리로 있는 것들이 순간 스칠 수도 있을까? 나도 이것쯤은 꼭 해보고 싶다는 희망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외에 다른 입장의 사람들의 경험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몸, 섹스, 밥, 노동. 경제, 신화, 법, 사랑과 연애, 가족, 교육, 예술, 여행 등 여러 측면에 대한 질문과 답들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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