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죽음과 죽어감

백_일홍 2022. 8. 2. 08:41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1장. 죽음의 공포에 대하여

<최근의 커다란 사회변화>(14~)

노인환자들.
쇠약해진 육체 기능, 신체 장애 속에서 살고자 안간힘을 쓰며, 더구나 고독과 격리, 이에 수반하는 온갖 고통, 고뇌를 겪는다. 의사 뿐 아니라 목사나 소우셜워커로 부터 위안을 받을 필요가 있다.
환자는 육체적인 고통 보다는 정동적인 고통이 더 크다.

죽음의 공포를 지닌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동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자가 늘었났다는 것은 이 사회 변화에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애당초 혐오스러운 것이었으며, 아마도 우리가 무의식중에 죽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환자들과 커뮤니케이션 하기 위해 알아할 기본적일 사실 :
1. 우리의 무의식적인 심상으로 볼 때, 우리는 죽임을 당하여 비로소 죽게 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원인으로나, 나이든 탓에 죽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때문에 죽음 하면, 예컨대 사악한 행위라든가, 공포의 사건이라든가, 그 자신 보복과 처벌을 자초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과 관련시켜 생각한다.

2. 우리의 무의식으로는 원망(바램)과 행위에 대한 구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의식 세계에서 누군가를 미워해서 죽이고 싶다는 원망과 실제의 살인행위를 구별하지 못하듯이 유아들도 이를 구별하지 못해. 하지만 유아는 성장해 가면서 우리 인간의 힘이 그다지 크지 못하다는 것, 제 아무리 간절한 바램이라 하더라도 불가능을 가능케 할 능력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했다고 믿었던 공포에서 점점 놓여나며 죄책감도 덜게 된다. 그러나 공포에 관한 관념은 희미하나마 남아 있어서, 몹시 거세게 흔들어 깨우지 않는한 일어나지는 않지만 있기는 있다. 공포의 영향은 병원 복도에서 또한 죽은 사람과 친밀했던 사람들의 언동에서 일상적으로 관찰하게 된다.(17)

<죽은 자에 대한 사랑과 증오>

앙숙으로 지내오던 부부도 일단 한 쪽이 죽으면 남겨진 한 사람은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소리쳐 통곡하고 회한과 공포와 오뇌를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한층 자기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보복이 미칠 것을 그대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슬피 울며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끼니를 거른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져서 예측되는 처벌을 피하거나 가볍게 덜자는 자기 처벌의 시험인 것이다. 이 슬픔, 수치심, 죄책감은 노여움이나 분노의 감정과 그다지 멀지 않다. 슬픈탄식의 과정은 언제나 분노의 성질을 함축하고 있다. 아무도 죽은 자에 대한 노여움을 시인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감정은 흔히 가장되고 억압되며, 그 결과로서 탄식의 시간을 연장하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방법으로 그것은 나타난다. 이와 같은 감정을 나쁘다거나 수치스러운 것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진정한 의미와 기원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
- 우리 내부에 있는 유아성 : 어머니를 잃은 다섯 살짜리 유아는 엄마를 여윈 일로 자신을 탓함과 동시에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자신의 요구를 채워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엄마에게 노여움을 느낀다. 이 때 죽은 자는 유아가 사랑하고 격렬히 그 존재를 갈망하는 대상이 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똑같은 정도로 격렬하게 이 가혹한 박탈자로서 증오의 대상이 된다.

<진통제와 포도주의 차이(19)
죽음의 수용
환자가 그의 생의 마지막을 여태껏 살아온 사랑하는 환경에서 보낼 수 있게 허용한다면, 굳이 환자를 위해 환경을 조정할 필요는 없다. 진통제 대신 그가 좋아하는 포도주 한잔을 따라 줄 것이다.
아이들고 죽음을 지켜 볼 수 있게. 아이들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써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귀중한 경험이 된다.

이와 대조,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죽음을 논하는 것 조차 불쾌한 행위로 여기는 사회. 아이들은 죽음의 자리에서 제외된다. "엄마는 먼 데 여행을 갔단다" -> 어른에 대한 불신감, 해소되지 않은 슬픔을 가슴밑바닥에 찌꺼기 처럼 가라앉힌 채 살게됨.

<과학의 발달과 죽음의 비인간화>(22)

사람이 자기 집에서 평안히 눈감고 죽을 수 있었던 날의 일들은 이제 아득한 과거지사가 되버림. 과학이 발달하면 할 수록, 죽음의 현실을 두려워하고 부인하는 경향이 늘어난 것 같다. 왜 그럴까?

우리는 우회작전을 쓴다. 냉정희 죽음에 직면하지 못하고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
. 현대에서 죽는다는 것은 여러가지 점에서 이전 보다 훨씬 불쾌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즉 죽음은 더욱 고독한, 기계적인, 비인간적인 과정이 되어버렸다. 때로는 임종의 순간이 언제라는 것을 기술적으로 결정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 선의에서 비롯된 질픙과도 같은 능률주의와 스피드를 멈추고, 차라리 환자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어주고 환자의 물음에 귀를 기울여 줘야 하지 않을까?
. 병세가 위중해지면 환자는 의견을 말할 권리가 없는 인간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확실히 한낱 물체로서 취급당하기 시작한다. 이미 인격을 지닌 인간은 아니다. 위대한 과학적 관심과 팽배한 재정투자의 일개 대상물이 되는 것이다.
. 환자는 휴식과 평안과 스스로의 인간적 존엄을 갈구하여 외치겠지만, 받아들여지는 일은 아예 없다. 무조건 주사약이 주입되고, 수혈되고, 심장기가 부착된다. 필요할 경우 트라케오스토미(외부로부터 기관에 구멍을 뚫는 수술)가 실시된다.
. 인간으로서의 그 자신에게는 전연 관심이 없다. 그는 저항하고 싶으나 저항은 무익하다. 왜냐하면 이 모두는 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 처럼 점점 기계화 되 가고 탈 인격적이 되어 가는 접근법은 결국 죽어가는 사람을 다루는 우리네 자아방어기제(불안을 회피하는 심리적 기제)의 발동은 아닐까?

말기 환자 혹은 위독한 환자가 우리들 내부에 환기시키
는 불안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려고 애쓰는 우리들 나름의 수단은 아닐까?

곧 닥쳐 올 죽음을 부인하려는 우리의 절망적인 몸부림은 아닐까?

또 한 사람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보다는 기계 쪽이 그래도 우리들 자신과 멀리 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열굴은 우리들 자신의 결여된 전능의 능력을, 우리들 자신의 역부족과 실패를, 아마도 마지막으로 우리들 자신의 도덕성을,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인식시켜줄 그것이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보다 더 조금씩 인간적이 되어가고 있는가?


2장.죽음과 죽을 때의 태도

 

'사람들'은 잔혹하다, 그러나 '사람'은 온유하다

<사회 변화와 자아 방위기제>(28)

급속한 기술 진보와 새로운 과학적 성과에 의해 인간은 대량 살육의 신기술과 실무기를 개발하였고, 이것이 참혹한 종말관적인 죽음에의 공포를 증대시켰다. 이 죽음의 공포에 대해, 또한 죽음을 예견하고 자기 방어의 무능력함에 대해, 인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심리적으로 자기 방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리적으로 당분간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시인하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남의 죽음은 생각하게 된다. 하여 결투, 전쟁, 교통사고로 희생되는 사람들의 소식은 나는 즉지 않는다고 믿는 무의식의 신념을 뒷받침할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의 마음 한 구석에서
"남의 일이야, 내가 아냐, 난 살아있어"하며 쾌재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직면하는 능력의 저하>(32)

죽음에 대한 부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음에 도전함으로써 이를 극복해 보자는 시도를 하게된다. 국민 전체 혹은 사회 전체가 이러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죽음의 부인을 지향하고 있다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파괴적인 자기 방위 수단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전쟁, 폭동, 살인, 그 외 범죄 건수의 증가는 우리들의 수용적 심정과 위엄을 가지고 죽음에 직면하는 능력의 저하를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무력해진 종교와 미래 사회에서의 죽음>

예전에는 신과 내세를 믿었다. 내세는 그들을 고통과 질병에서 건져준다고 믿었다. 지상에서 고통받는 일이 많더라도 사후에 천국에서 보상받을 수 있었다. 괴로움은 지금 보다 훨씬 일반적이었다.

지상에서의 고통이 천국에서 보상된다는 신앙은 사멸되었다.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은 그 의미를 잃었다. 사후의 생을 실제로 믿는 자가 현저히 줄었다. 사후의 생을 기대할 수 없다면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회가 안겨준 죽음의 부인은 오로지 우리의 불안 만 더 해주고 우리의 파괴성과 공격성(우리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기를 회피하기 위해 남을 죽이는)을 길러주었을 뿐이다.

미래 사회,
냉동인간, 인구 과잉.
죽음의 공포를 이용하여 돈벌이는 하는 것을 방지하는 법률은 없다.
냉동인간의 배우자가 사회보장을 받을 수 있는가? 재혼을 해도 좋은가?

의사와 환자간의 커뮤니케이션 : 환자를 비인간적이거나 식물처럼 살게 둘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살게끔 도와주는 것으로 그들을 돕고, 죽게 해줄 수가 있다.

<암을 선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52)

문제는 환자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의사가 환자와 이 지식을 나누어 가질 것인가?가 이어야 한다. 의사는 이 중대사에서 과잉불안에 빠져드는 일 없이, 환자와 대화할 수 있어야.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환자가 지니고 있는 죽음의 사실에 엄연히 직면하려고 하는 의지를 끌어낼 수 있는 동기를 붙잡아야 한다.

환자는 거짓없이 알려주든 알려주지 않든 간에, 언젠가는 기어코 그것을 자각하게 되며, 거짓말을 한 의사, 따라서 환자에게 아직 신변정리를 할 시간적 여유가 있는 동안에 그를 도와 병의 위중함을 일깨워주지 않은 의사에 대해서는 신뢰감을 잃게 된다.

갖가지의 가능한 수단이 다 취해지리라는 확신, 환자가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 치료 방법이 있다는 확신이 환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4장. 제2단계 노여움

부인이라는 1단계가 어느덧 유지할 수 없게 되면 노여움, 울화증, 선망, 원한과도 같은 모든 감정이 대신 끓어오른다. "왜 저 사람이 아니라 나인가?"

이 분노의 단계는 가족 내지 병원직원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대처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 노여움은 온갖 방향으로 뻗치고, 이따금은 전연 엉뚱하게 주위환경에 투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환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이 노여움이 어디서 온 것일까를 생각해 보려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이 환자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지 않게 하고 싶다. 목청을 질러 요구하고 불평하고 누가 좀 도와주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걸 잊지 말아 주세요, 나는 아직 내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라고 이 말을 소리내 외치고 싶은 것.

비극은 우리가 환자가 노여워하는 이유를 생각지 않고 그것이 실은 분노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개인적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직원들, 혹은 가족이 환자의 노여움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응하면, 환자의 노여움에 기름을 부어 그 적대감정을 더하게 될 뿐이다.

분개하여 죽은 X
간호사의 반응이 환자의 당연한 분노를 유발한 사례.

침대의 사이드레일이 서 있으면 관 속에 넣어지는 걸 연상하니 늘 내려두라 당부함.
"제가 레일을 내려두었으면 당신은 침대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졌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간호사.
그녀의 말기환자와 죽음에 대한 태도.
이 간호사 약시 회피하고 있어. 그녀는 같은 방에 앉아 있는 것으로써 의무를 다하고 있었지만 정동적으로는 환자에게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었음. 그녀는 환자가 죽어버렸으면 했고 움직이게 도와달라는 환자의 말에 짜증을 냄. 환자에게 움직인다는 것은 자기가 아직 살아있다는 확증인데 그녀는 이 확증을 부인하고 싶었던 것. 그녀는 환자의 임기가 닥치고 있다는데 공포를 느끼고 회피와 자기고립으로 그녀 자신을 죽음의 직시에서 방어했던 것.
-> 그를 가만히 재워두고 싶다.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녀의 바램은 환자의 운동불능과 죽음의 공포감을 조장했다. 환자는 커무니케이션을 박탈당했고 고독해졌으며 고립화되어 그 고뇌와 점점 더 불어나는 분노 속에 도움의 손길없이 방치되어 있었음.
-> 만일 그녀가 자신의 파괴적 원망에 대해 그렇게 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녀의 자기방위는 그토록 심하지 았았을터. 그러면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환자는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게 되어 몆 시간뒤에 일어난 자신의 죽음도 좀더 평안했을 것.

환자의 타당한 때로는 불합리한 노여움을 허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의 사례.

허용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또한 너무 자기 방위적이 아닌 때에만이 가능하다. 환자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때로는 환자의 분별없는 노여움까지 받아주는 아량을 배워야한다.

환자는 노여움을 표출하는 것으로 마음의 해방을 얻고 울적했던 심정을 털어냄으로써, 최후의 몇시간을 보다 잘 수용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의 죽음의 공포와 파괴적 원망을 직시하고 환자의 간호를 방해하는 우리 자신의 자기방위를 자각하는 일이 선결조건이다.

 

6장. 제4단계 우울

우울이 병자의 사랑의 대상 일체에 다가오는 상실에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한 방위기제로서 수용상태를 가능케 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될 경우에는 격려하고 힘을 넣어주려 해도 그다지 효과가 없다. 환자에게 만사 밝은 면만을 보시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지 마시오 하는 소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124)

환자는 지금, 그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모든 사물들을 잃으려 하고 있다. 때문에 환자가 슬픔을 표현하도록 허용해 줌으로써, 그는 최종적인 수용이 훨씬 용이해진다. 이 우울의 단계에서 다만 손을 잡던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가 아니면 그저 조용히 곁에 있어 주는 편이 바람직하다. 환자는 목전에 닥친 일에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방문자가 환자의 기분을 복돋으려는 지나친 간섭 태도는 환자의 정동적 준비에 방해가 된다. (125)

환자가 수용과 화평 속에 죽기위해서는, 이 제2형의 우울이 필요하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고뇌와 불안을 싸워 이겨낸 환자만이 수용과 평화의 단계에 도달한다. (126)


7장. 제5단계 수용


환자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고 앞의 여러 단계를 지나는데 도움이 주워진다면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우울, 노여움 없이 어느 단계에 도달한다. 지금 어느 정도 조용한 기대 속에서 다가오는 자신의 종말을 지켜보게 된다. (144)

수용을 행복의 단계로 오인해서는 안된다. 수용에는 거의 모든 감정이 소멸되어 있다. 아픔도 투쟁도 모두 끝나고마치 '긴 여행을 앞둔 마지막 휴식'을 위한 시간이 온 것과도 같다. 이 시기는 환자 자신보다는 가족이 보다 더 큰 도움과 이해와 힘을 요하는 시기이다.

죽어가는 환자가 얼마간의 마음의 평화와 수용하는 자세가 되어 갈 동안, 그의 관심의 폭은 좁아진다. 그는 오로지 환자이기를 원한다. 흔히 방문자를 반가지 않는다. 이때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로 하지 않는다. 환자의 손을 잡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우리는 함께 창밖에 들리는 새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거기 있다는 것으로 환자는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 주리라는 확신을 갖는다.

이와 같은 해후에는 저녁의 방문이 가장 적절하다.

최후까지 싸우고 희망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며, 이 수용단계까지 좀처럼 이르지 못하는 환자도 있다. 이런 사람들도 이윽고는 싸움을 그치는 날이 오고, "난 더는 버틸 수 없구나"하고 말한다. 불가피한 죽음을 회피하고자 싸우면 싸울 수록 죽음을 부인하고자 하면 할 수록, 이 평안과 위엄으로 충만한 수용의 초후 단계에 도달하기가 어려워진다.

연명시키고 싶다는 환자가족의 바램이 이젠 이대로 평안함 속에 숨져버리고 싶다는 환자의 희망과 모순되는 듯이 보일 때, 너무 빠른 포기를 어떻게 하여 수용의 단계와 식별할 수 있는가? 이 둘의 단계를 식별하지 못하면 오히려 환자가 죽음을 고통스러운 마지막 경험으로 겪게 된다.
필사적으로 언명 시술을 거부한 중년 부인 W의 사례.(147~153)
- 남편이 아내의 죽음을 수용하지 못해 언명 시술을 강행하려 함, 아내는 일시적인 정신이상 징후를 보이며 이에 방어. 이는 이미 너무 늦어버리 언명 조치를 저지하려는 환자의 절망적인 저항, 일종의 방위였음. 결국 남편은 아내의 임박한 죽음을 용인하여 아내와 그것을 함께 나누게 됨. 아내의 요구는 끝까지 위엄을 지니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음.

<종언적 나르시시즘>

환자 곁에 말없이 앉아 있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리고 그 사람 앞에서 환자가 자신의 노여움을 표현하고 준비된 비탄 속에서 울고 공포와 공상을 표명하도록 격려 받아온 환자가 가장 잘 죽음의 수용에 도달한다.

우리는 환자가 점진적으로 해탈의 경지로 들어가, 이 수용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과정을 지나야 하는 지를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보다 쉽게 이 지점에 도달하는 두 가지 길.
1) 침묵의 이해, 무간섭, 주위 환경으로부터 도움없이 이 지점에 도달하는 사람
자기의 인생에서 책무를 전부 환수한 이른바 인생의 종착역에 닿았다고 느끼는 중.노년 환자. 이들은 일하며 살아온 한 평생을 돌아보며, 자신의 생애에 의미를 찾으며, 충족감을 맛본다.
2) 위 사람처럼 행복하지 못한 사람. 하지만 이들 역시 죽음에서 충분한 준비시간이 주어진다면 이와 같은 심신 상태에 이른다. 앞의 모든 단계를 통과하는데 환경으로부터의 협조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수용의 단계는 젓먹이 아이의 단계와 대조적.
정신분석학은 젖먹이의 단계를 수동성의 시기, 우리가 자신을 전능으로서 경험하는 원시적 나르시시즘의 시기로 본다. 자신에게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자신이 요구하는 전부가 얻어진 시기.

어느 치과의사 부부의 아름다운 수용 사례.
- 죽음의 수용과 종교(기독교에의 믿음)
- 남편과 아내 각자의 수용태도와 동기(바램)

 

8장. 희망


비극적인 소식(죽음에 대한)을 접한 뒤 거치게 되는 자기 방위기제의 여러 단계들을 통해서, 항상 통례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흐름은 희망이다.

아무리 수용적이고, 아무리 현실 직시적인 환자라도 그 어떤 치료법의 가능성을 체념하지 않고 있다. 신약개발이라든지 연구 프로젝트의 막다른 길에서의 성공 같은. 그들이 몇 일간 또는 몇 주간 몇 개월간의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은 오로지 이 한 가닥 희망에 매달려서이다.

현실적인 히망이든, 그렇지 못하든 그와 같은 희망을 안겨주는 의사에게는 최대의 신뢰를 갖는다. 환자가 희망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면, 그것은 흔히 죽음이 임박했다는 징후이다. "이젠 올만큼 다 왔어요.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이런 말을 입에 올렸던 환자는 24시간 이내에 사망한다.

희망과 관련된 갈등의 원천 두 가지
1) 환자는 여전히 희망을 필요로 하는데 의료진 내지 가족 쪽에서 희망이 없음을 전해주는 경우
2) 가족이 환자의 최종 단계를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 환자는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 때. 더구나 환자가 가족의 수용불가능을 감지하고
있는 경우.

1) 우리는 말기 환자이든 아니든 어떤 환자든 간에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와 같은 환자를 돌보지 않는다면, 환자도 또한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되어 '한번 더 견디어 보자'는 의욕도 용기도 잃게 된다.
"제가 아는 한에서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을 다했습니다만, 그래도 당신을 더욱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을 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환자는 방치, 혹은 포기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누가 아기를낳을 것 갔다는 말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하듯이, 생의 불가결한 본질적인 부분으로서의 죽음과 죽는 것에 대해 대화한다면 그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우리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면 그들의 기분은 회복되고 식사도 하게 되었다. 환자들은 자신의 관심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지고 싶어한다. 이러한 대화에 그들은 해방감과 희망을 지니고 반응을 나타낸다.
죽어가는 환자들이 말하지 못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의욕
* 20년동안 악성 피부염으로 시달린 흑인 환자 J의 희망
노여움의 단계를 나타냄과 동시에 상재하는 희망(때때로 위장된 형태를 취한다)이라는 심리현상을 보여줌.
- "나는 이처럼 선량했다. 그런 나를 하필?"
- 경쾌기 이후 다음의 경쾌기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끊지 않고 있다. 또한 어떤 새로운 치료법과 새로운 약의 발명되어 그가 구제되고 이 고통에서 구조되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유지하고 있다. 이 희망을 마지막 날까지 버리지 않았다.

 

9장 환자의 가족

환자 가족에게도 숨 돌림 휴식이 필요하다.
말기 환자가 줄곧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나가기가 어렵듯이, 가족 역시도 환자와 항상 같이 있기 위해 기타의 모든 활동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그것만이 굳이 옳다고 고집할 일도 아니다.
가족 구성원도 또한 때로는 슬픈 현실을 부인하거나 회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임상의 자리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가 슬픈 현실에 보다 잘 직면하기 위해서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제 문제
가식 게임과 중개자.

죽어가는 환자에 대한 모든 문제는 언젠가는 정리되지만, 가족의 문제는 마냥 계속된다. 문제 가운데 몇 가지는 가족 구성원의 주검 이전에 대화로도 해결되며 줄일 수도 있다. 불행히도 환자의 눈과 귀로부터 가족들의 감정을 숨기고, 짐짓 웃는 얼굴을 만들어, 명쾌한 분위기를 꾸미려는 경향이 있으나, 그런 것은 결단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환자, 가족 모두 최악의 사태를 당할 각오를 서로 터 놓고 이야기할 용기가 없는 경우. 눈 가리고 아옹 식의 게임을 더 이상하지 않고 서로 이야기를 하면 어느 쪽도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신변 처리를 함께 할 수 있어.

나는 죽어가는 환자 자신이 가족이나 친척들을 자신의 죽음에 직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방법 중 하나는 환자가 그 생각이나 감정을 가족들에게 알려 같이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환자가 자기 자신의 슬픔을 정리하여 사람이 어떻게 순종하며 죽을 수 있는가를, 몸으로써 가족들에게 보여주게 된다면, 가족들도 환자의 강인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 자신의 슬픔을 보다 냉정하게 이겨낼 수 있게 된다.(195)

근친의 죽음과 가족의 죄책감

아내나 남편 등 근친의 죄책감 속에 있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를 끌어낼 수 있어야. 근친자가 환자에 대해서 심각한 노여움이 함축된 바램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환자의 죽음을 당하여, 깊은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경우가 흔히 있다. (12장의 83세 노인의 사례)

배우자에 대한 퇴적된 노여움을 토해 낼 기회를 갖지 못해 비탄과 죄책감에 시달리다 그 자신도 무거운 병에 걸린 경우, 만일 그들이 배우자가 죽기 전에 배우자와의 사이에 얽힌 문제를 중개자를 통해 조정 받았더라면 이와 같은 고뇌와 그 결과로 얻어진 병의 태반은 해소되었을 것이다.

중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독신의 딸
- 죽어가는 사람과 가족 사이에 결여된 커뮤니케이션의 예

말기환자, 이제는 말도 할 수 없는 엄마 곁을 독신의 딸이 일주일 동안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져, 나가던 일터도 그만두고 낮이든 밤이든 죽어가는 어머니 옆에 말없이 지켜 앉아 있음. 하루 세 시간만 자면서. 외부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의 결여가 극심함.
그녀는 어머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짓눌려, 병실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제 몸이 쓰러질 걸 겁내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어머니와 나눈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머니는 근래와 와서 말도 할 수 없어서, 도무지 대화가 없다.
인터뷰를 마칠 때 그녀는 죄책감과 함께 애증병존, 분만 같은 몇 가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분만은 이런 단절된 생활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데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를 먼저 잃게 되는 데서 오는 허망감에서 였다.
-> 우리는 그녀에게 좀더 빈번하게 감정을 표출시키라는것, 병실 밖의 세계와 유대를 지니고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파트타임의 근무처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말기 질환의 경우, 가족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206)

가족들도 역시 환자에 대해 기술한 것과 같은 몇 가지의 다른 적응단계를 거친다. 이런 단계를 거치며 점차로 다소간의 중대 변화를 체험해 나간다. 변화의 양상은 환자의 태도, 자각,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의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가족에게 공통의 근심을 나누어 지닐 능력이 있다면 보다 빨리 중요문제를 처리할 수 있고, 절박한 시간에도 허등대는 일없이 정동적 압력에도 이겨낼 수 있다. 만약 가족 구성원이 서로 비밀을 만드는 성격이라면 상호간에 인위적인 장벽을 쌓게 되어, 환자나 가족을 위한 준비적 비판의 기간을 마련하지 못하여, 그 결과 이따금 서로 상의하고 함께 우는 가족에 비하여 훨씬 비극의 폭이 넓어진다.(206)

환자 자신의 떼어놓기와 가족의 별리 수용

근친자도 환자와 같이 노여움의 반응을 보인다. 의사와 간호사 등에 대해.
분노와 죄책감(과거에 놓친 기회에 대한)을 청산하고 나면, 다음으로 죽어가는 환자의 경과와 마찬가지로 준비적 비탄의 단계에 이른다. 죽음 전에 이 비판이 표출되면 그 만큼, 나중의 그것은 견디기가 훨씬 수월하다.

우리는 흔히 환자의 근친들이, 자기네는 환자를 대할 때 언제나 웃는 낯으로 대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걸 듣는다. 그러나 그들도 어느 날엔가는 어느새 그런 가면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가족 구성원이라면 위선의 가면보다는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정동을 표출하는 편이 훨씬 용이하다는 것을 거의 모른다. 위선의 가면은 환자에따라서는 얼른 알아 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위장에 지나지 않으며, 슬픈 정황을 나눠주는 인정은 못된다.

가족이 이러한 정동을 환자와 같이 나눌 수 있다면, 그들은 현실로서 다가올 이별에 서서히 직면하게 되어 환자와 같이 이별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환자가 이제는 몇몇 친구만 문안 와 주길 바라게 되고 다음에는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하고 마지막에는 아내만 만나보기를 원한다. 이것은 환자가 서서히 스스로를 이 세상으로부터 떼어놓기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를 자기들을 거절하는 걸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죽음까지의 몇 단계인가를 통과해낸 환자만이 이렇게 평안한 가운데 조용히 자기 자신을 떼어놓게 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가족이 최대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환자가 지원이 없어도 되는 때는 이 시점이다. 이 떼어놓는 단계에 들어선 환자는 인간관계라는 것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용과 데카섹시스(정신 에너지를 대상물에서 떼어놓는 것)의 단계.

고령자의 죽음에 대하여(209)

심신이 건강하고 자립할 경제력이 있지 못한 상황에 놓인 노인들.
가족들로서는 문득문득 속히 고통 없는 임종이 되어 주기를 바라게도 된다. 더구나 이런 말은 입밖에도 내지 못한다. 이리하여 그와 같은 원망이 죄책감을 낳게 됨은 명백한 일이다.

남의 욕을 겁내는 늙은 여인
막대한 입원비용, 딸은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옮길 것인가? 어머니가 희망하는 대로 이 병원에 놔둘 것인가로 골머리를 앓고, 남편과 언쟁을 함. 노모가 두려워하는 것은 누가 자기를 뒤에서 자꾸 욕하는 것 같다는 것때문임.
"그런 것 땜에 어머니가 죽지도 못하신다면, 제가 태워(화장) 드리죠"라고 딸이 대응함. 이 말 속에는 딸의 억눌린 분노가 함축되어 있었다.

저자는 엄마와 딸과 따로 이야기를 나눔. 엄마에게는 딸의 감정을 얼마간이라도 이해하고 나눠 가지라고 말함. 그러면 딸도 자기 감정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안정이 될 것이라고 말해줌. 딸에게는 어머니가 이해하고 있다는 말을 해줌. 어머니와 딸은 겨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고 장례 절차와 화장을 할 것 까지 결정을 하고 서로 위안을 주고 받음.

중병의 자식을 무능력하게 한 어머니 사례.
- 어머니의 파괴적 원망, 자기 자신의 증오감
젊은 아들을 둔 어머니, 의사들은 다소 운동을 허용하고 있으나 어머니는 아들이 일체 운동을 금하고 있다. '이런 약해빠진 아들'(그녀는 그것을 쓸모 없는, 출세 하나 못하는 남편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을 두고 있다는 데 대한 분노를 우리들엑 쏟아낸 뒤에도, 그녀는 자기 자신의 증오감에는 조금도 깨닫는 바가 없었다. 그녀가 품고 있는 아들에 대한 파괴적 원망, 아들 탓에 자기가 사교적으로나 전문 직업가로서의 생활에 제약을 받고 있고, 또 자기가 아들 탓에 남편과 똑같은 쓸모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면서 이 원망을 합리화시키고 있음.

자고 싶다. 그저 에젠 자고 싶다!
잠이 유일한 구원입니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일각 일각이 고뇌입니다.. . p씨는 육체적인 고통이나 불쾌감 같은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그의 번민은 가족의 기대에 따르지 못한 자기는 '실패자'라서 오는 후회때문이다. 잠들고 싶다는 압도적인 욕구와 그의 환경에서 끝없이 흘러오는 기대 사이에 끼여 번민하고 있다. 가족이 좀체 환자를 "보내 줄"마음이 되어 있지 않아 환자가 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놓으려 하는 것을 유형 무형으로 방해하려들 때, 환자가 다가오는 죽음을 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보여줌.

평화와 위엄 속에서 죽을 권리(217)

환자는 평화와 위엄 속에서 죽을 권리가 있다. 환자의 바램이 우리의 그것과 반대될 때, 우리 자신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 환자를 이용할 수 없다. 병이 중하지만 정신은 건전하고 자신의 의사결정을 할 능력을 갖춘 환자에 한해서 그들의 희망과 의견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죽음 뒤의 가족

우리가 누군가를 잃었을 때, 더구나 마음의 준비도 없이 훌쩍 보냈을 때, 화가 나며 절망의 몸부림을 친다. 이러한 감정은 마음껏 쏟아내게 허용되어야 한다.
허무감과 적막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때는 바로 장례식을 마치고 모든 친척들이 돌아간 뒤다. 가족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의 내방을 가장 반기는 때가 바로 이 시기이다. 특히 그 사람이 고인과의 막역한 친구이고, 임종의 날까지 있었던 일화나 즐거웠던 일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족들은 얼마나 위로를 받을까. 이런 도움을 통해 가족은 충격과 당초의 슬픔에서 헤어나, 최종적인 죽음을 수용하기 위한마음 준비를 해나간다.

슬픔과 분노의 해소로.

유족을 가장 도울 수 있는 일은 죽음 앞에 그들의 감정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비록 그것이 아무리 부조리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토해내게 도와주는 일이다.

 

3장 부인과 격리

병의 초기이든 이 정보를 뒤에든 훨씬 나중 단계이든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늗 환자가 부인을 행한다. 적어도 부분적인 부인을 행한다. (69)

계속 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뒤꼍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않됨

나는 부인이 이들 환자가 오랜 기간을 그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불쾌하고 처참한 사태에 대한 그들의 강한 대처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부인은 예기치 않은 충격적인 소식을 들을 때의 완충장치로서 역할을 해낸다. 부인함으로써 환자는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수습하고 이윽고 다른 보다 그긋한 자기방위법을 동원시킬 수 있다.

환자가 부인기제 보다도 고립화 혹은 격리기제를 사용하는 것은 흔히 말기에 훨씬 더 가까워졌을 때 부터다.(73)

꽃으로 뒤덮인 병상의 환상
ㅡ 28세 k부인

그녀가 제 정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부인이 절대 불가결했음이 드러남. 병원직원들은 그러를 정신병자로 볼 정도. 직원들의 태도가 그녀를 점점 격리(고립)시킴.

아름다운 것, 꽃, 실제의 삶 속에서는 소유하지 못했던 사랑의 손길을 몽상 속에 그려보는 것으로 그녀는 일시적인 도피처를 발견함. 이 위기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만한 건전한 종교적 배경을 잃고 최종적으로 자살기도 없이 정신병으로 시달리지 않고 죽음을 수용하기까지 수주간 수개월간의 이야기 상대를(가끔 말 없이 앉아만 있어도 되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11장. 죽음과 죽는것에 관한 세미나예의 반응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닞고 지성면에서 뒤떨어지는 그래서 사회적 유대나 직업상의 의무가 적은 단순한 사람 쪽이 물질적인 풍요, 쾌적한 생활환경, 많은 인간관계를 잃게 되늗 부유층 사람들보다도 이 최종위기에 곤란 없이 직면할 수가 있었다.

일생을 고된 일과 고생 속에서 보낸 사람, 아이들을 다 길러놓은 사람, 자기가 해 온일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 쪽이 평안과 위엄을 지닌 속에서 죽음을 수용하는데 보다 용이했던 것 같다.

일생을 야심적으로 주위환경을 지배해 온 사람, 물질적으로 재물을 축적해 온 사람, 사교적인 대인 관계는 다수를 점유하면서 막상 생의 종말에 이르러서는 도움이 될 만한 뜻있는 인간관계가 적은 사람 등은 용이하게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4장.통제욕이 강한 남성환자의 분노) (291-2)

환자관리에 방해가 되는 의료진 자신의 내부 항쟁.

현재와 같은 한냉사회에 대신하여, 죽음과 죽는 것에 대한 문제를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따뜻한 사회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장려해 모든 사람들이 숨을 거두기까지의 마지막 며칠 혹은 몇시간 두려움을 보다 적게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295)

 


 

▶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을 읽고.

죽어가는 사람을 놓고 정작 그리고 마냥 자신의 슬픔, 두려움, 걱정, 그 사람에 대한 증오, 원망, 후회, 죄책감에 빠져 있는 가족과, 오로지 비정상의 육체, 병만을 통증만을 치료, 처치하는 의료진과 의료체계 속에서 저자는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환자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실존적.정동적 고통, 그것에 관해 알고자 결국은 그것을 덜어주고자 그들에게 말을 거는 시도를 한다.

미국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6년 - 2004년)가 이 책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을 낸 게 1969년이다. 이 당시 병의 치료가 아닌 순전히 '인간적 목적'에서 그것도 병원 안에서 말기환자와 소통하는 장을 마련하여 죽음이 입박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준비된 죽음을 맞도록 한  그녀의 시도는 가히 획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 책 출판 이래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미국에서 호스피스 활동과 임종연구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더 대중적으로 읽히는 책 <인생수업>은 그녀가 2004년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낸 책이다.

저자는 물론 불치의 말기환자가 겪는 심리적 변화과정, 즉 부인-분노-협상-우울-수용, 희망의 과정을 깊이있게 알려주지만 내가 더 눈 여겨 보게되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곁에서 보고 있는 의사, 간호사와 가족이 내보이는 감정과 태도다.  아직은 내가 내 죽음 보다는 부모나 나이든 주변인의 죽음에 관해 생각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고, 솔찍히 말하면 아직 난 죽음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자는 나를 구성하는 외부이고 나의 거울상이라 한다면 부모나 나이든 지인의 병듦과 죽음을 대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  죽음이라는 그 긴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죽음을 둘러싼 온갖 감정과 태도, 그리고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의료체계의 밑 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렇게 묻고 있다.

" 현대에서 죽는다는 것은 여러가지 점에서 이전 보다 훨씬 불쾌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즉 죽음은 더욱 고독한, 기계적인, 비인간적인 과정이 되어버렸다. 때로는 임종의 순간이 언제라는 것을 기술적으로 결정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병세가 위중해지면 환자는 의견을 말할 권리가 없는 인간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확실히 한낱 물체로서 취급당하기 시작한다. 이미 인격을 지닌 인간은 아니다. 위대한 과학적 관심과  팽배한 재정투자의 일개 대상물이 되는 것이다.

환자는 휴식과 평안과 스스로의 인간적 존엄을 갈구하여 외치겠지만, 받아들여지는 일은 아예 없다. 무조건 주사약이 주입되고, 수혈되고, 심장기가 부착된다. 필요할 경우 트라케오스토미(외부로부터 기관에 구멍을 뚫는 수술)가 실시된다.

인간으로서의 그 자신에게는 전연 관심이 없다. 그는 저항하고 싶으나 저항은 무익하다. 왜냐하면 이 모두는 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선의에서 비롯된 질픙과도 같은 능률주의와 스피드를 멈추고, 차라리 환자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어주고 환자의 물음에 귀를 기울여 줘야 하지 않을까?

이 처럼 점점 기계화되 가고 탈 인격적이 되어 가는 접근법은 결국 죽어가는 사람을 다루는 우리네 자아방어기제(불안을 회피하는 심리적 기제)의 발동은 아닐까?

말기 환자 혹은 위독한 환자가 우리들 내부에 환기시키는 불안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려고 애쓰는 우리들 나름의 수단은 아닐까?

곧 닥쳐 올 죽음을 부인하려는 우리의 절망적인 몸부림은 아닐까?

또 한 사람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보다는 기계 쪽이 그래도 우리들 자신과 멀리 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열굴은 우리들 자신의 결여된 전능의 능력을, 우리들 자신의 역부족과 실패를, 아마도 마지막으로  우리들 자신의 도덕성을,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인식시켜줄 그것이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보다 더 조금씩 인간적이 되어가고 있는가? " 

요는 죽음을 당면한 환자와 가족, 의사는 모두 제 각각 자기 나름의
"죽음에 관한 공포와 불안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하고 있고 다만 그 작동하고 드러나는 양태가 다를 뿐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죽음은 모두 나름데로 자신 만의 고유한 경험이다. 하지만 저자가 죽음에 직면한 환자가 격게 되는 정동적 고통을 심리적 발전과정으로 상세히 일러주는 것은 죽음에 당면한 환자, 그의 웰다잉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내 죽음이 아닌 타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이해하라고 촉구하며, '사랑과 헌신을 이유로 어찌되었든 살리고 보자'는 선의와 효도라는 명분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심중을 오인하고 도리어 평화릅고 인간다운 죽음을 방해하는 우리의 무지에 관해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결국은 타자의 죽음을 겪는 우리의 태도와 예의에 관한 책이 아닐까?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고독한 길을 떠나는 이의 손을 그저 잡아주고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것 보다 더 큰 예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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