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한자경
지은이의 말
....아무리 분별하고 분석해도 불교는 여전히 깨달음의 종교이다. 내적 깨달음보다는 외적 감각이, 자증적 확신보다는 객관적 논변이 더 중시되는 오늘날, 이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불교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는 불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이 이 책 전체를 일관하여 내가 묻고 있는 근본물음이다.
불교의 '현대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따라 불교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것은 결국 종교를 과학의 잣대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며, 일체 진리의 기준을 현대과학에 두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불교 교리 가운데 현대과학과 비교적 잘 어울릴 수 있는 무아설은 수용되고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윤회설이나 해탈설은 배제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종교를 현대과학의 기준에 따라서 재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교를 현대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불교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현대의 시대정신에 따라 불교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기본정신에 다라 현대의 시대정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만 우리가 현대 너머에서 현대를 바라보며 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대의 시대정신을 비판하고 넘어설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을 불교에서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불교의 '현대적 의미'가 살아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에서 나는 불교가 우리의 일반상식이나 현대과학의 주장과 일치하는 점을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불교가 일반상식이나 과학지식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통찰이 무엇인지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불교를 서양철학과 비교하는 데에서도 둘 간의 공통점을 넘어서서 둘 간의 차이점을 밝히는 데에 주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6)
1장.불교의 근본사유
1.무아와 연기
나무 한 그루.
나무의 자아의식은 허망한 것
그 나무 한 그루의 경계는 우주 전체로 퍼져나간다.
나무의 인과고리는 무한히 반복된다.(우주 전체 생명의 반복)
나의 존재도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나의 오온은 가유.
경계에 싸여 있는 모든 개별자는 하나의 무한이 허공에 그려놓은
무수한 가상의 원일 뿐. 모든 개체는 경계가 흩어져 무한으로 되돌아갈 운명.
개체가 복귀하는 무한은 어떤 존재?
(찰나생멸하는) 경계.
무한이란(불교의 '공')
.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 유무를 넘어서는 것. 그러면서도 다른 모든 것의 유무를 성닙시키는 터전.
. 모든 개체의 경계가 유동화되고 흩어져 경계너머로 흡수되고 무한으로 해체될 때, 일체를 품에 안은 그 무한은 곧 공이다.
색즉시공 = 개체가 되돌아갈 무한은 곧 공이다.
* 현대과학의 한계
즉 현대과학이 불교와 함께 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치
. 우주의 경계, 물질의 경계, 생명체의 경계, 의식의 경계를 흩어버리는 작업. 그것을 무경계의 공으로 확인하는 작업. 이는 곧 근대의 철통같은 경계들을 흩어 놓는 작업.
* 서영철학에서 근대의 철통같은 경계 즉 뉴턴식의 절대시공간을 부정한 사람은 라이프니츠. 그러한 통찰에 입각해서 초월적 관념론을 완성한 철학자가 칸트.
연기성.
개체의 경계가 무한으로 해체된다. 무한에서 모든 개체가 하나가 된다.
연기성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가를 기술하는 사실명제.(즉 존재론)
연기의 유전문. 그 연기에 따른 개체 생성의 반복.
연기의 환멸문.
. 불교가 연기로써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 현대과학의 한계.
연기의 유전문만 있고 환멸문은 없다.
결론.
연기를 통해 밝혀지는 무아의 진리는 우리에게 고통일 수도 있고 환희일 수도 있다. 윤회와 해탈, 고통과 환희의 분기점은 과연 어느 지점인가?
그 지점은 무한과 공에 있다.
<개념들>
오온
자아의식
개체
연기성. 유전문. 환멸문
무한
공
경계와 무경계
뉴튼식 절대시공간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
무아
윤회
해탈
2. 공과 일심
무한과 공은 물질인가 마음인가?
서양과 불교(동양)의 차이.
1) 서양 : 공은 생명이 없고 의식이 없는 무기물상태, 자기자각성이 없는 순수어둠과 순수물질이다.
* 서양의 불교이해 방식. 고통이 지멸된 불교에서의 열반을 모든 고통의 의식이 소멸된 무기물 상태로 간주함.
서양은 이미 개체가 자기경계를 넘어 되돌아가게돌 개체의 근원을 무로 간주하기 때문.
* 창조론. 신은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으니 무로 부터 나온 것은 무로 돌아간다.
* 구원론. 가독교는 이 무로부터의 구원을 개체 바깥의 신에게서 구한다.
* 이원론. 개체의 근원인 무(순수물질)과 그것 너머의 신(순수정신)을 이원화한다.
** 서양적 사유와 동양적 사유의 차이
서양인들. 동양사상에 대한 몰이해.
개체적 자기의식을 무화시키고 '무의식적 동일성'을 지향하는 자연주의적 전체주의의 사유체계로 간주함. 개체성을 부정하고 몰아를 지향함으로써 발생하는 자기의식의 결여로 인해 결국 개체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나 주체적 인격으로 자각하지 못한다고 보는 이해이다. 이러한 몰이해는 서양식 사유에서는 개체적 자아의식의 부정이 '절대적 무'로 회귀 이상일 수 없기 때문. 그러므로 그들은 무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신을 필요로 한다.
동양적 사유. 경계지워진 개체적 자아의식의 부정은 곧 무경계의 보편적적 마음의 회복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개체적 자아의 자기실현, 진정한 자유의 획득이었던 것. 신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가되고 성인이 되는 것이 동양의 이상이었다.
*** 우리는 서양식 사고에 길들여진 나머지 너무 쉽게 동양적 이상을 망각하고 그들의 틀에 따라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불교
개체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그자리에 드러나는 것은 무한과 공은 순수물질이 아니라 의식성과 자지자각성을 가진 마음이다. 무한의 마음. 공의 마음. = 한마음, 일심
불교는 우리 모두가 공을 깨달아 그 근본자리인 일심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함.
2.무한에 이르는 두 가지 길.
1) 의식의 소멸.
의식이 소멸하고 남겨지는 무한은 의식성이 없는 물질일 뿐. 이 경우 무한은 결코 지각될 수 없다. 결국 무한을 물질로 생각하는 의식은 자기 자신이 의식할 수 없는 무한을 논한다는 점에서 자기부정과 자기모순의 의식이 된다. 이는 유한과 무한, 의식(인식)과 존재를 영원한 대립으로 놓는 관점.
* 유물론의 자기모순.
의식이 없는 순수물질을 의식을 갖고 논한다는 점. 다시말해 우리가 결코 추상할 수 없는 것(의식)을 추상하려 하고 또 추상했다고 착각한다. 빈방의 실재를 주장하는 모순. 데카르트. 사유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연장적 실체를 주장하는 모순.
* 서양의 유신론.
서양철학,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신의 의식을 떠올림. 신은 빈방에 들어가지 않고도 방이 비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무한의 물질을 의식할 수 없어도 무한의 정신인 신은 그 물질을 의식할 수 있디고 봄.
** 그러나 그러한 신을 떠올리는 의식 자체도 결국 인간의 의식, 인간의 마음아닌가? 이 처럼 순수물질의 주장이나 인간 바깥의 신의 존재의 주장에는 동일한 구조의 자기모순이 포함되어 있다. 유물론과 기독교사상은 여러 가지 점에서 상통하고 있는 것
2) 의식의 확장
개체의 경계를 없애면서도 의식은 깨어 있다는 것. 개체적 자기의식을 넘어 무한의 의식, 공의 마음, 한마음이 되는 것. 확산의 궁극 지점에서 무한을 의식하는 마음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 바로 이 지점에서 주관과 객관, 인식과 존재가 이원화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일치하는 무분별지가 성립한다.
이때의 의식의 확장은 단순히 개체적 자기의식의 확장일 수 없다. 개체적 자기의식은 경계를 통해 성립하는 의식으로서 언제나 주객의 대립 속에 있기 때문. 의식의 확장은 의식내용을 따라가서가 아니라 의식을 철저히 비움으로써만 가능하다. 무심법. 적성등지법.
3. 공의 자기자각성 : 공적영지와 일심
지눌의 수심결 인용. 공적영지
원효, 성자신해.
공은 영지의 마음이다.
공적영지의 마음이 모든 유정의 마음이다. 개체의 경계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그 경계가 무한히 확산되어 도달해야 할 한마음이 있는 곳이다. 모든 유정의 마음은 공적영지를 갖고 있다.
* 일심.
원효, 중생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보편의 마음이라는 뜻에서 한마음 즉 일심이라 칭함. 개체 안에 있는 무한은 진망 일체를 포괄하기에 일이라고 하고 그 일 내지 무한은 무정물과 달리 스스로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심이라고 함.
4.일심과 신
불교의 핵심은 이 한마음에 있어.
우주 삼라만상 모든 개체의 경계를 넝어서는 전제, 포괄자, 공, 일자 내지 무한을 유정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객관적 실재, 예를 들어 순수물질이나 신이나 이데아적 관념 등으로 설정하지 않고 바로 유정의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무아의 두 가지 의미.
1.연기적 무상한 존재
2. 그 무상한 현상 자체를 창출해 내는 무한의 힘은 바로 유정 각각의 개체 내면에 개체성을 벗은 하나의 마음으로, 일심으로 진여로 드리워져 있다.
무한의 일심은 모든 유한한 현상적인 것들의 존재와 생성의 근거이다. 우주 존재를 일으키는 공이고 무한임.
기독교의 신과 부처의 마음으로서의 일심은 다를 바 없다. 한마음을 대상화해서 외적 초월성으로 간주하는가 자기자각성 속에서 내적 초월성으로 깨닫는가의 차이.
종교적 깨달음은 결국 다 하나로 통할 것. 우리 모두의 마음이 결국 무한의 깊이에서 한마음으로 귀결되기 때문. (35)
< 개념들 >
무
순수물질
순수정신
신
이원론
유한과 무한
인식과 존재
의식과 물질
자기부정
자기모순
유물론
기독교사상
무분별지
공적영지
유정과 무정
일심
* 유정(有情)이란 정(情)을 가진 존재, 지각감정,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존재이다. 영어로는 sentient being.
3. 유식무경
1.식의 심층구조
어떻게 그러한 공, 무한으로 부터 구체적 색의 세계가 형성될 수 있는가? 공즉시색, 진공모유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나? 어떻게 공의 마음으로 부터 물리적인 현상세계가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는가?
* 과학, 일반상식.
마음이나 의식이 물질의 산물이라, 물질세계는 분명 우리 마음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로 여긴다.
불교.
이 세계가 오히려 유정의 마음, 한마음, 공으로 부터 드러난 현상으로서 색이라고, 따라서 마음이 그린 세계라고 논함. 유식의 유식무경, 화엄의 일체유심조.
= 세계는 마음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한마음은 그 세계 속에 자리한 우리의 표층의 식과는 구분되는 마음. 우리 마음은 다층적 구조로 표층적이며 개체적인 마음과 심층적이며 본원적인 무한한 마음으로 구분함.
* 칸트
마음의 작용을 불교처럼 두 차원으로 구분해 논한 서양철학자. 경험적 자아는 시.공간 형식 안에 주어지는 물리.심리적 현상적 자아이며, 초월적 자아는 그러한 물리.심리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로서 현상초월적인 무제약자이다.
경험적 자아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그 자아의
바깥에 그 자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이 점에서 칸트철학은 '경험적 실재론'이다. 그러나 초월적 자아, 순수통각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자아에 의해 구성된 현상일 뿐이다. 이 점에서 칸트철학은 동시에 '초월적 관념론'이다.
표층의식.
. 전5식
. 6식. 대상의식.주객분별
. 7식. 말나식. 개체적 자아식
우리의 표층의식은 깊은 잠이나 기절에서 끊어짐. 만약 우리의 마음이 표층의 의식작용으로만 그친다면 마음의 연속성 내지 마음이 포착하는 세계의 통일성은 유지되기 힘들 것.
그 마음 심층에 더욱 근본적인 하나의 식의 흐름이 있기 때문. 제 8 아뢰야식.
연속적인 말나식 자체가 아뢰야식의 작용에 근거한 것.
2. 아뢰야식의 전변
종자를 남기는 현행식은 의식과 말나식, 이런 의식이나 말나식의 활동을 '업'이라 함. 의식과 말나식은 어떤 주어진 것에 대한 인식작용임.
종자로 부터 구체화된 현행식은 의식과 말나식을 포함한 아뢰야식임. 인식대상 즉 세계를 형성해 내는 존재생성의 식.
3.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
공업종자.
불공업종자
특정 순간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 그 이전순간까지 아뢰야식 안에 심어진 종자틀의 현행결과이다.
우리가 모여 사는 이 공통의 기세간은 공업종자의 현행결과. 그 세계 속에 사는 각각의 유근신은 불공업종자의 현행결과임. 그래서 우리는 공통적인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되고, 또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 의식이 포착하는 관념들도 종자의 현행결과이다.
아뢰야식의 이원화. 객관은 상분이라하고 이는 유근신, 기세간, 종자(관념).
주관은 이 객관을 바라보고 아는 주관. 견분이라함.
아집과 법집.
우리의식에 아뢰야식의 전변활동의 결과물이 주어짐. 이 결과물들이 의식될때, 제6근인 의는 아뢰야식의 견분을 의 자신의 작용으로 여겨서 그 의가 자리한 유근신을 자아로 간주하게 된다. 아집이 생김.
의는 유근신 이외의 기세간과 관념세계를 자기 바깥의 객관세계로 간주하게 됨. 법집이 발생
4. 아뢰야식과 일심의 관계.꿈의 비유.
자아나 세계가 유정 각각의 심층 아뢰야식 내 종자의 변현결과.(유식무경)
나의 의식이 보는 세계는 나의 아뢰야식이 그린 세계이다.
이는 유아론을 의미하지 않아. 그렇게 세계를 그려내는 아뢰야식이 그 근본에서는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 그래서 각각의 아뢰야식이 그려내는 각각의 세계도 결국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공통의 기세간이 될 수 있어.
화엄의 일즉다 다즉일 =
. 개체의식이 경계를 해체시킴으로써 도달하는 공은 바로 심층의 한마음(다즉일)
. 일의 마음이 각각의 유정을 통해 다로 실현되어 있다. (일즉다)
생멸심으로서의 아뢰야식과
불생불멸심으로서 진여심은 어떤 관계?
현실세계도 꿈과 같이 심층의 마음인 아뢰야식이 그려놓은 세계, 꿈의 세계다. 다만 개인적이고 임의적인 꿈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함께하는 꿈, 그래서 같은 결과로서 하나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 그런 꿈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 세계를 그러내는 아뢰야식의 활동이 있음을 우리가 객관실유로 간주하는 이 세계가 아뢰야식의 전변결과임을 결코 알지 못한다. 이 유식성을 깨닫는 순간 나는 현실의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꿈을 깨는 의식은 이 현실이 바로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 식 자체의 본성을 자각하는 마음, 진여심이다.
꿈꾸는 마음과 꿈을 깨는 마음은 서로 다른 별개의 마음이 아니다. 꿈을 꾸며 육도 윤회하는 심인 아뢰야식과 꿈에서 깨어 해탈하는 심인 진여심 서로 다른 별개의 심은 아니지만 완전히 동일한 것도 아닌 불일불이.
??
ㅇ 종자(관념) ㅡ 불공업종자. 상분의 하나. 우리 의식이 포착하는 관념.
ㅇ 료. 견분. ㅡ 상분을 바라보고 아는 주관.
<개념들>
공즉시색
진공묘유
유식무경
일체유심조
칸트철학
경험적 자아
초월적 자아
경험적 실재론
초월적 관념론
아집과 법집
유아론
일즉다 다즉일
유식성
진여심
불일불이
4. 본각과 시각
1. 왜 깨어나지 못하는가
유근신과 기세간을 만드는 아뢰야식이 한마음이고 이 한마음의 작용인 공적영지가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왜 그것을 알지 못하는가(무명)?
나는 왜 한마음의 작용을 나의 개인적인 의의 작용으로 간주하여 아집을 일으켜, 집착의 업을 짓고 그 업력에 따라 윤회를 하는가?
무명의 정쳬는? 어떻게 이것을 걷어낼 수 있나?
2.눈의 비유
지눌의 답.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무슨 방편을 쓰겠느냐?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제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하여 다시 눈을 보려하는 것과 같다. 이미 제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하는가.
우리가 이미 한마음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데 그 보는 눈을 다시 보려하는 것이 적절한가? 보는 눈을 다시 본다는 것은 한마음을 한마음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한마음에 의해 보여진 어떤 것, 세계 내의 사물과 마찬가지 것로서 다시 대상화하여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일심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이기도 하고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본각,
시각의 부재=무명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
3.물고기의 비유.
물고기는 이미 물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물 밖으로 나갔을 때 물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물고기는 무엇을 모른 것인가? 자기가 물은 안다는 사실이다. 그 스스로 자신이 물의 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지 못한 것.
4. 말나식의 그릇된 분별과 집착
무엇을 아는 것과 무엇을 무엇으로 분별하여 아는 것.
우리가 한마음을 아는 것을 구분해야.
. 상대가 없는 절대, 무경계의 것에 대한 인식(본각차원의 앎)
. 상대적인 것에 대한 인식(시각 차원의 앎)
우리가 그 마음의 작용을 하며 산다는 것
우리는 기세간을 보며 자신의 유근신을 알며 종자도 의식한다. 우리는 상분과 견분을 모두 의식한다. 아뢰야식의 전변작용을 우리 마음 스스로 하고 있고 그것을 직접 알고 있다.
다만 그 마음의 작용을 바로 그런 것으로 안고 있지 못할 뿐임. 그래서 아뢰야식의 마음작용을 잘못 분별하게 된다
즉 세계전체를 형성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작용에 의해 형성된 세계 속의 나, 유근신의 나로 간주한다.
세계전체를 보는 아뢰야식의 견분작용인 료를 그렇게 보여진 세계 속의 나인 유근신의 의의 작용으로 간주함.
망분별과 무명.
시각 부재의 상태에서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을 식 독립적 자아와 세계로 이원화하고 실체화하는 것.
망집착. 아집과 법집
그렇게 망분별함으로써 아뢰야식의 작용은 나의 유근신 속에 갇히게 되고, 세계는 유근신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 바깥의 객관 실체로 간주되고 만다. 나와 세계를 주객대립의 것으로 파악되며 결국 우리는 주객을 포괄하는 전체로서의 마음을 잊어버리게 됨. 세계 전체를 보는 보편적 눈으로서의 한마음을 잊는다.
<개념들>
공적영지
무명
본각과 시각
망분별
아집과 법집
5. 윤회와 해탈
1. 왜 윤회하는가
현실의 꿈이 유지되는 것도 내가 한마음(나2)으로 활동하며 세계를 그려내되, 내가 나를 나2로 바르 알지 못한 체 나1로만 여기고 있기 때문. 나1은 개체의식, 말나식이다. 이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작용(나2의 견분)을 자기 자신의 작용으로 잘못 분별하기에 나는 나를 나2로 알지 못하고 나1로만 여기게 되는 것.
2.윤회의 길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그 그림 속에 자기를 그려 놓고 나서, 그것을 자기로 여기면서 자기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나1에의 집착, 나1에 머무르려는 것이 아집, 나를 둘러싼 세계에의 집착, 거기에 머무르려는 것이 법집이다. 이 두 집착에 따라 업을 지음으로써 바로 그 업력, 그 욕망의 힘으로 인해 나는 이 세계로 되돌아오게 된다.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나는 그 업력에 따라 또 다른 나1(새로운 오온)을 형성하여 이 세계로 되돌아 온다. 그것이 윤회다.
12지 연기
3.해탈의 길
해탈은 현실세계가 가상이라는 유식성을 깨달아 현실의 꿈을 깨는 것. 꿈은 어떻게 해야 깨게 되는가?
내가 더 이상 나1로 머무를 수 없을 때 즉 나1이 무화되고 있을 때 나는 나1이기를 멈추고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우리가 이 현실세계에서 이 꿈속에서 불교로 부터 무아의 소리는 바로 우리의 꿈을 깨우는 소리다.
해탈한다는 것은 마음이 더 이상 자아나 세계의 생멸상을 그려내지 않는다는 말. 일체의 표상, 감각표상, 지각이나 의식의 표상, 말나식의 표상이 다 사라져 마음은 공이 된다. 공으로 들어난 본성을 진여라 함.
해탈한 자가 아라한
4.보살의 길
그렇게 해탈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리 꿈이라 해도 이 세계안에 모든 중생이 다 함께 살고 있지 않나? 내가 해탈해서 나아간 자리가 중생을 외면한 자리라면 그게 무슨 의미기있단 말인가?
꿈에서 깨어난 후 아직도 꿈꾸고 있는 중생의 고통을 아파하면서 다시 그 꿈의 세계로 되돌아와 고통을 함께하는 자가 바로 보살이다.
꿈을 꾸되 좀 더 아름다운, 인간적인, 행복한 꿈을 꾸자는 것이 보살의 원이다. 보살은 이 꿈이 각자의 꿈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이 꾸는 꿈이므로 모두가 행복하지 않으면 나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심.
하나의 우리
한울
한울님 하늘님 하느님 한마음 부처심 하늘(천) 태극.
6.상대와 절대
1.꿈과 환상
이 헌실(나 자신을 포함하는 현실)이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세계 또한 인간의식이 만든 가상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세계는 실재와 비실재, 참과 거짓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 거대한 환상체계이다.
2.환상의 종류
1) 개인적 환상: 경험적 환상
인간은 누구나 환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현재의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환상의 힘.
현재라는 공간 자체는 시간적 전후로서 주어지는 각 순간의 얼룩과 반점(감각자료)들을 좌우, 앞뒤, 상하의 3차원 공간으로 펼쳐냄으로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현재의 공간 속에 이미 과거와 미래의 환상이 스며들어 있으며, 현실을 사는 것 자체가 이미 환상을 사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되는 현실을 그냥 객관적 실재로 전제하면서 그 현실을 벗어난 것을 환상이라고 간주할 경우, 그렇게 현실과 대비된 환상은 경험적 차원의 환상, 즉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환상이다.
신경증과 정신병. 환상과 망상
2) 종적 환상: 선험적 환상
개인적 차원에서 실재 내지 현실로 간주되는 것이 실은 그 개인이 속한 종족 모두가 갖는 보편적 선험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세계인 경은 그것을 인식하는 유정의 기관인 근에 상응해서만 그런 것으로 존재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다,
세계는 그 종에게만 그런 헝태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종의 근을 떠난 자쳬 존재가 아니다.
주관이 그린 세계일 뿐 주관을 떠나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 세계는 환상이다. 종 전쳬가 공통적으로 그리늗 세계, 이를 종적환상이라 할 수 있다.
3.환상의 구조: '꿈꾸는 의식'과 '현실의 의식'의 동일구조
1) 꿈의 의식 구조
꿈 속의 나(나1)는 꿈꾸는 의식(나2)이 그려놓은 나일 뿐이고, 나와 대면한 너 또한 꿈꾸는 의식(나2)이 그려놓고 투사한 대상일 뿐이다.
꿈 속의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너와 세계를 내 밖의 실재로 간주하고 있는 것.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꿈에서 깨어나면서이다.
그렇다면 꿈에서는 왜 그런 점을 모르나?
꿈에서 나2의 의식활동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 꿈은 나2의 의식활동에 의해 유지된다. 나는 꿈꾸는 의식, 나2로 활동하면서도 그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 축소하여 나를 세계 속 일부인 나1로만 의식하고 있기 때문.
2) 현실의 의식구조
현실세계 또한 현실의 마음(나2)이 그린 가상세계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나의 바깥에 실재하는 객관적 현실세계의 일부분인 나(나1)로 만 의식한다.
* 자아존재의 두 차원.
1. 경험적 자아. 세계 속의 나(나1)
2. 초월적 자아. 세계를 구성하는 나, 세계를 보는 나(나2)
내가 현실세계를 의식산다는 것은 곧 내가 현실의 마음(나2)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
현실의 꿈을 깨서 세계 속 일부인 나1의 자아의식에서 벗어나서 나를 마음(나2)으로 자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 나를 보여진 세계 속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으로 자각한다는 말.
나, 너, 세계가 곧 우리 모두가 한마음(나2)으로 함께 그리는 영상세계,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마음(나2)은 어떤 존재인가? 그것도 환상인가?
4. 환상의 역설
1) 일체는 환상이다.
세계를 보는 눈과 보여진 세계의 관계.
세계를 보는 눈은 곧 세계를 그리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앞으로 어떤 형태의 세계를 그리게 될 것인가는 이미 그려진 세계 속에서 그 마음이 현재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에 집착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보여진 세계와 보는 눈은 서로 의존적, 상대적임.
보여진 세계가 보는 눈에 의해 그려진 비실유, 환상인 것 처럼 보는 눈 또한 환상을 그리는 환상의 눈일 뿐.
불교는 현상세계 속의 자아(나1)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를 그리는 식 (나2, 아뢰야식)인 윤회하는 자아에 대해서도 역시 무아를 설함.
일체는 환상이다. 일체는 상대적이다.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실유인 것. 일체는 가이고 공이다.
2) 환상을 깨는 의식: 해탈의 순간
그렇다면 일체가 환상이라는 이 앎 또한 환상인가?
일체가 상대주의라는 이 인식 또한 상대적일 뿐인가?
존재의 역설
사유의 역설
거짓말쟁이의 역설
.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나는 거짓말장이가 아닌 것.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환상이다라고 말 할 때 이 말은 그 상대적인 것, 환상 속에 다시 포함되지 않는 절대의 시점, 환상 너머의 시점에서 말해지고 있다.
☆ 상대 너머의 절대, 환상 너머의 실재는 상대의 바깥이나 환상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환상을 환상으로 아는 의식 안에, 일쳬의 환상을 환상으로 성립시키는 위한 절대의 조건으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또 다른 실재로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도 공하다.
공: 신이나 물질로 관념이나 언어로 실체화되거나 객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세계 만물의 경계, 그리고 선악, 유무, 음양 등 모든 이원화의 경계를 흔들고 녹여 사라지게 만드는 절대의 시점.
진여 = 한마음 = 공을 공으로 아는 각자의 마음.
깨닫는 길은 마음이 실제로 공이 되는 길.
환상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부터 깨어나는 것. 그래서 불교의 존재론은 수행론이다.
눈이 눈을 보는 순간 !
<개념들>
경험적 환상
선험적 환상
종적 환상
공간과 시간
상대와 절대
존재론
제2장 불교와 서양철학
1. 불교와 독일관념론 - 공적영지와 지적직관
1. 본성의 자각에 관한 물음
세계와 관계하여 인간마음은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객관으로서의 세계와 대면하여 수동적으로 인상을 받아들이는 주관적 마음=마음a
2) 주관과 객관, 나와 세계 둘 다를 자발적 능동적으로 산출해 내는 주객포괄의 마음=마음A
불교나 서양 형이상학(독일관념론)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마음a가 아닌 마음A로 밝히고자 한다.
이런 마음A의 활동성을 불교는 공적영지라고 하고 독일관념론은 사행이라고 한다.
* 각주. 근원적 활동성(마음A.심)과 그것의 결과(현상세계.묘)와의 관계에서 본다면 공적영지는 그 둘사이의 불잡에, 사행은 그 둘사이의 불리에 치중한다. 그럼에도 둘 다 일체의 차별적 현상세계를 그러한 절대적 무차별성의 마음활동 위에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둘다 차별적 현상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 근거를 외적 신이나 객관적 물질에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마음이나 정신의 활동성에서 구한다는 점에서 즉 절대적 마음 내지 정신을 현상세계인 가의 구성주체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심론이며 관념론이다.
본성이 이미 영지이고 각이라면 본성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 아닌가? 견성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영지와 본각이 있어 우리 마음의 활동성을 의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 인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무명.
우리는 마음A로서 현상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마음A와 세계를 의식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세계가 자신 마음A가 만든 가의 현상임을 알지는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이다.
법집
독단, 도그마
외부세계실재론
자연주의 혹은 물리주의
--> 아집
무명이란 마음A에 대한 완전한 무지가 아니라 마음A의 작용을 개체 오온인 마음a의 작용으로 잘 못 아는 것.
자신의 본체는 공적의 법신이지 색신이 아니다.
법신과 색신
2. 마음의 본성. 성
1) 불교, 공적영지
공적영지는 경험적 차원의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존재, 정신과 물질, 나와 너, 나와 세계의 이분법을 넘어선 절대평등의 무분별지이다.
인식과 존재, 정신과 물질, 마음과 몸 등 우리의 일상적인 이원적 분별은 공적영지의 마음 안에 그려진 상들의 차별상, 거울 안에 비쳐진 상들의 차별상일 뿐이다.
차별적 색상들을 지우고 나면 비로소 드러나는 무색의 바탕이 실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듯이, 차별적 상들을 여의고 발견되늗 거울 자체의 비춤이 처음부터 비추던 바로 그 마음었듯이, 공적영지의 마음은 주객분별의 대상의식에서도 언제나 함께 하고 있던 마음이다.
공적영지로서의 마음활동을 바로 그런 것으로 확인해기 위해 의식에서 의식대상을 없애어 능소의 분별을 넘어서면서도 잠들지 않고 의식의 깨어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불교는 각자가 수행을 통해 자신 안의 그 공적영지를 확인하는 견성에 이를 것을 요구한다.
2) 독일관념론.사행
서양철학에서 능소, 주객분별을 넘어선 절대를 인간마음의 심층활동성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는 초월적 관념론에서 발견된다.
* 각주 9)
근세 이전 서양철학 - 인간존재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으로, 인간의 의식활동은 주관 영역의 심리적 작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객포괄의 절대는 상대적 주객 너머의 제3자적 존재로 간주됨. 예. 스콜라철학에서의 기독교적 신.
-> 근세 이후 서양철학 - 무분별적 절대를 외적인 신에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초월적 관념론'이 시도된다.
예. 데카르트의 인식주체의 사유활동성
라이프니치의 미세지각,
칸트, 마음의 능동적 활동성을 현상구성의 절대적 활동성으로 체계화함. -> 그 체계를 완성한 것이 독일관념론이다.
칸트, 초월적 통각, 순수통각, 초월적 자아
경험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를 구분해야.
. 초월적 자아. 현상세계를 구성하고 현상세계를 바라봄.
. 경험적 자아.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주관)이라고 간주하는 것
피히테의 질문.
" 주체인 나와 나의 앎의 대상인 사물과의 끈은 무엇인가? "
피히테의 답
" 나 자신의 본질이 바로 이 끈이다. 나는 주체이며 객체이다. 이 주체-객체성, 앎의 자기 자신에로의 귀한이 곧 내가 자아라는 개념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자아는 주체와 객체의 필연적 동일성, 즉 주체ㅡ객체이다. 자아는 어떤 매개도 없이 단적으로 그것이다."
> 이 끈은 주체 - 객체성 또는 주객 동일성으로서의 자아로 간주함. 주객동일성으로서의 자아는 주객대립으로 주어지는 경헝적 자아와 구분되는 초월적 자아이다. 초윌적 자아를 주객동일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소위 객관세계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유가 아니라 정신의 작용에 의해 구성된 현상임을 밝힘으로 가능한 것
각주 11) 칸트 이후, 독일관념론을 완성한 피히테, 셸링의 철학요지.
주관과 객관, 인식과 존재, 사유의 원리와 존재의 원리가 동일한 이 자아의 활동성 = 사행, 행위와 사실의 결합.
3. 본성에 대한 무지. 무명
1) 마음의 활동성의 자기의식
본각이 이미 각이라면 다시 시각이 필요한 이유는?
자아의 자기활동성에 대한 자기의식성을 독일관념론에서는 지적 직관이라 함.
2) 자기의식(본성)과 자기인식(견성)의 구분
칸트는 인간이 인간 자신의 정신의 활동성을 직관적으로 확인하여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인간에게는 그런 지적 직관이 없다. 그것은 신적 존재에게나 가능한 직관이라고 본다. 인간은 지적 직관의 결여로 인해 자기인식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은 곧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의미다.
각주 26)
특별한 수행의 선정을 고려하지 않는 한은 인간에게 지적 직관. 자기인식은 불가능하다는 칸트식 주장이 오히려 더 정확할 것임. 불교가 지적 직관.견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을 위한 수행론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
무엇을 아는 것과 무엇을 바로 그러한 것으로 아는 것을 구별해야 함.
무엇을 그 무엇으로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 무엇과 더불어 그 무엇의 부정을 함께 알아야. 마음의 활동성을 의식하되 그것을 바로 그러한 것으로 의식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마음의 활동성을 벗어나거나 멈추어 볼 수 없기 때문.
어떻게 중생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바로 그러한 것으로 자각하는 견성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피히테,
마음을 마음으로 의식하는 길은 마음이 스스로 마음 아닌 것을 설정하는 것, 즉 자아가 자아 안에 비아를 반정립하는 것이다. 무한, 절대가 스스로 한계를 긋고 스스로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아는 세계를 산출한다. 그렇게 산출된 반정립된 헌상세계(비아)를 다시 부정함으로써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 아닌 자아로 확인하게된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마음으로 자각하는 길은 공적의 마음A가 자기 자신 안에 등장하는 주객대립의 현상세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마음 A를 바로 그런 것으로 알지 못하는 무명 -> 자아와 세계를 실유로 집착하여 업을 짓고 -> 업력에 의해 다시 분별적 자아와 세계가 형성되어 윤회가 계속됨.
주객, 능소의 망분별인 현상세계는 무분별적 마음A가 자기확인에 이르기 위해 형성한 가상이고 현상이다. 가상을 형성하는 것은 다시 그것을 부정하여 그것아닌 것으로서의 무분별적 마음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유한을 부정하고 무한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있어 독일관념론과 불교에 차이가 있을 뿐.
4. 본성의 확인. 견성
1) 독일관념론.실천적 행위의 길
피히테, 마음A(절대자아)는 스스로 자아의 자기정립에 이어 자아 안에 비아를 반정립한다. 절대자아는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로 불할되고, 그 둘 사이에서 하나가 다는 하나를 규정하는 대립과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다.
인식과 실천
실천행위에서 자아가 비아를 규정하고 부정함으로써 비아를 자아화하여 자아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비아를 부정하는 실천과정을 통해 자아는 자기 자싡을 비아가 아닌 것으로 즉 자아로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실천적 행위를 통해 확인되는 자아는 비아와 대립해있는 가분적 자아(마음a)이지 절대자아(마음A) 자체가 아니다. 가분적 자아의 확장일 뿐.
절대자아는 가분적 자아의 무한한 확장이 지향하는 긍극 지점으로서의 이념으로만 작용할 뿐. 추구해야 할 이상일 뿐 실현가능한 현실이 아닌 것.
독일관념론 역시 칸트적 의미의 지적직관을 부정한다.
우리는 마음A의 근원적 활동성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 활동성을 직접직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사유 속에서 추론하여 반성적으로 아는 것일뿐. 이것이 일상적 의식의 한계이다.
2) 불교. 종교적 수행의 길
불교의 견성은 추론적 사유가 아닌 직적적 직관임.
공적영지는 주객을 포괄하는 '마음 자체의 자기활동성' 내지 '식 자체의 자기의식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증분이라고 한다면 견성은 다시 자증분을 바로 그러한 것 자체로 확인하는 증자증분이 됨. 그것은 수행을 필요로 함. 어떤 방식의 수행인가?
적성등지법
의식이 늘 대상의식 차원에 머물러 있고 공적영지가 직관되지 않기 때문으로, 그래서 그 동일성은 의식이 아닌 존재, 마음이 아닌 몸의 차원으로 간주되고 만다.
*각주 32) 마음 a의 활동이 표층의 의식활동이라면 마음A의 활동은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심층의 마음활동으로서의 미세지각임. 지각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지각 차원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시 무의식적으로 지각된 것에서 의식적으로 지걱된 것에 이르기까지 단절적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이런 무의식적 마음작용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만 표층적 의식 차원의 앎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그것을 단지 몸의 작용이라고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존재와 인식을 이원론적으로 분별하는 마음a의 관점이다. 다시 말해 마음(마음A)을 의식(마음a)와 동일시하고, 마음a와 구분되는 마음A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관점이다. 세계에 대해서는 사유주체의 내가 아는 것보다 내몸이 더 많을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게됨. 현대의 '몸의 철학'이 이런 관점에 있다.
적성등지법은 존재와 의식, 생명과 사유와 같은 분열을 넘어서려는 시도. 이미 무의식으로 화해 버리 존재와 생명을 다시 의식화하여 마음
A의 활동성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 각성 상태를 유지하면서 깊은 내면의식으로 나아가 무의식으로 까지 들어거는 것. 깊은 내면의식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되고 무의식에서는 나와 너, 나와 세계의 이원화된 분별의식을 초월하게 된다.
의식이 각성된 채로 꿈의 세계에 들어가니 깨어 있음과 꿈이 둘이 아님을 알게되고, 의식이 각성된 채로 죽음과도 같은 무의식 세계에 들어가니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
5. 윤리적 실천과 종교적 깨달음의 두 길
독일관념론과 불교가 비아의 현상세계를 부정하는 방식, 비아 이닌 것으로 자아를 확인하는 길은 서로 다르다. 하나는 자아확인의 길을 구체적 삶의 실천과정을 보며, 다른 하나는 마음 자체의 직관 즉 깨달음의 과정으로 본다. 따라서 하나는 현상세계 변혁을 위한 변증법적 실천윤리에 주목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내적 깨달음을 워한 수행론에 주목하게 됨. 하나는 비아를 부정하고 자아를 확장함으로써 절대자아에 이르려고 하고, 다는 하나는 자아와 비아의 구별 자체를 없앰으로써 절대일심에 이르려고 한다.
다는 길을 따라 확인 된 것도 서로 다르다.
독일관념론.
역사는 자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다. 비아어 현상세계를 자연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자연을 부정하고 극복하여 그것을 자아화, 인간화, 문명화하는 자연과의 투쟁 과정이 된다. 그리고 자아의 완전 승리, 즉 비아가 완전히 부정되어 자아의 절대적 동일성에 이른다는 것은 인류역사의 끝을 의미하는 것.
불교.
보다 인간화된 현상세계의 건설, 보다 아름다운 꿈의 기획이 아니라, 현상으로부터의 초월, 꿈으로 부터의 깨어남을 지향한다. 진정한 견성이 있지 않다면 현상적 자아의 무한한 자기확장과 비아의 부정은 아집에 가득 찬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
독일관념론자들은 왜 초월적 자기확인을 인정하지 않고 수평적 자아확장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왜 의식의 절대적 비약, 수행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지를 추구하지 않는 것일까?
서양 형이상학 전통에서 초월은 오직 신의 몫이기 때문일 것. 삶과 죽음의 분리, 마음과 몸, 영과 육의 갈등은 인간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며 운명으로 간주된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추구는 그러한 인간 운명에 대한 도전이다. 견성하여 성불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 신이 된다는 것이다.
<개념>
유심론
관념
무명
도그마
아집
법집
자연주의
물리주의
법신
색신
공적영지
초월적 관념론
존재와 인식
주객동일성
몸의 철학
삶과 죽음
마음과 몸
영과 육
2. 불교와 마르크시즘 ㅡ 종교성과 소외
1. 유한과 무한의 관계
유한한 존재, 상대적 존재, 우연적 존재가 그래도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그 거능근거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가? 아니면 무한과 절대적이며 필연적 존재는 단지 유한하고 상대적이며 우연적인 인간존재가 생각해낸 가상이고 허구일 뿐인가?
기독도가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의 서양, 철학자들은 무한과 절대와 완전성의 존재 곧 신을 유한하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한 현실의 근거로 간주함.
그러나 헤겔이후, 사람들은 그러한 이해가 전도된 이해임을 자각함. 무한자, 절대자, 완전자는 유한하고 상대적이며 불안전한 인각이 만든 관념적 산물로 전락하게 됨.
헤겔이후의 사상가들은 왜 유한하고 결핍적인 인간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의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가? 그 기제와 역할 등을 탐구함.
하나같이 종교를 부정적으로 규정함.
프로이드, 니체, 마르크스.
2.마르크스의 종교비판
1)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적 소외이론
포이에르바하.
종교에서의 신이란 인간의 유적 본질일 따름이다. 개별자로서 인간은 한계와 제한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자신의 한계를 의식한 개체적 인간은 다시 그런 한계를 넘어서는 완전한 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한 자로 표상된 존재란 결국 인간 자신의 유적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즉 개체로서 인간은 유한하지만, 그런 개체적 한계를 넘어서서 표상된 인간 유적 본질은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나 개체적 인간은 그 존재를 자기 자신들로 부터 추상된 바로 자기 자신의 유적 본질로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존재를 자신을 넘어서는 별도의 실체적 존재로서 객관화하고 실체화한다.
-> 인간 자신에 의해 객관화된 인간 자신의 유적 본질이 바로 신이다.
이점에서 종교는 인간 본질의 소외로서 성립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자신 아닌 것, 자신을 넘어서는 것으로 객관화하여 파악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본질을 이원화하여 분리, 대립시키는 것.
인간은 인간 자신의 본질을 외화시켜놓고 그 외화된 것을 자기 아닌 것으로 신격화하여 찬양함.
2) 노동에서의 인간소외
포이에르바하가 종교의 원천을 인간의 유적본질을 통해 추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면, 마르크스는 그러한 종교적 의식을 산출하는 인간 삶의 실제적인 물질적 토대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제시함.
마르크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제관계의 총체.
종교는 인간의 추상적인 유적본질의 개관화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구체적 사회관계로 부터 발생된 산물, 이데올로기라는 것.
* 이데올로기란 전도된 사회관계를 감추고 위장하여 그 관계를 지속되게끔 만드는 의식이며, 이데올로기가 감추려하는 전도된 사회관계란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면 일차적으로 사회경제적 관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동하는 존재. 이 노동을 통해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의 사회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엽사적으로 인간이 형성하는 사회관계는 점점 더 인간 소외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발전 해왔다. 문제가 되는 소외는 인간이 자기노동의 산물을 소유하지 못하고 영주, 자본가에게 바쳐야 된다는 것. 이 때 실제로 인간은 그 노동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행위 자제로부터도 소외된다.
이러한 소외현상, 변질되고 왜곡된 비본질적인 사회관계를 자연적 필연적 관계인 것 처럼 위장하는 관념적 틀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예.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상응해서 그 내적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것.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논리에 따라 생겨난 후 다시 그 현실의 모순을 덮어서 그 헌실을 존속하게 하는 역힐을 한다.
3) 민중의 아편으로서의 종교
피지배층이 가장 심각하게 소외를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비지배층으로 머므르게끔 하는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종교다. 종교는 현실의 모순을 가리고 그 헌실이 지속될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나아가 종교 자제가 바로 그 모순적이고 소외된 현실로부터 파생된 산물이다.
소외된 현실에서 고통받으면 받을 수록 인간은 그런 소외가 없는 세계를 갈구하게 된다. 소외된 현실로 부터 소외되지 않은 이상에의 꿈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꿈이 종교적 환상을 불러일으킴.
이렇게 생겨난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다시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게끔 하는 보수적 역할을 하게 됨. 현세의 고통을 잊게 하는 위로제, 아편.
이중적 의미로 현실을 긍정하는 역할을 함.
1. 이데올로기로서 현실 자체의 바른 이해를 가로 막아
2. 이상을 현세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로막아.
사회개혁, 혁명을 기회하지 않고 종교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세의 고통을 잊으려 함.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3. 마르크스 종교비판의 문제점
1) 절대자가 단지 허구적 관념일 뿐인가?
포이에르비하가 신을 인간 유적 본질의 소외현상이라고 설명하였을 때 인간이 개체의 차원에서는 자신의 유한함을 의식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유한한 개체 안에 그런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의 이념, 절대의 이념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말해줌. 문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질인 무한과 절대를 그러한 것 자체로 바로 알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것으로 객관화시킨다는 것, 따라서 스스로 자기소외를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인간 유적 본질로서의 무한과 절대의 이념을 추상적이라 비판, 그런 이념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구조 속에서 형성되는가를 설명하려 함. 그렇게 함으로써 무한과 절대의 이념을 유한한 현실세계로 부터 경험적으로 형성된 허구적 관념, 이데올로기로 해석하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소외 비판을 통해 인간은 자기 지신 안에서 바로 그러한 무한과 절대와 완전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자 함. 바하의 관점에서 마르크스를 보면 자기외화나 지기소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자기부정, 자기망각일 수 있다.
마르크스.
무한과 절대는 더 이상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오로지 유한하고 상대적인 경험적 존재일 뿐이다.
-> 과연 무한과 절대의 이념이 유한과 상대로부터 이끌어져 나온 추상적 관념일 뿐인가?
인간이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의식한다는 것,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고 그 죽음으로 한계지어진 생 전반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이 수단과 목적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상대적 가치연관에 절망하여 모든 상대를 뛰어넘는 절대에 대한 동경을 가진다는 것, 이런 것들은 곧 인간의 본질이 유한과 무한, 상대와 절대, 불완전함과 완전함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 우리 안에 무한의 본질, 무한의 이념이 들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자신을 유한한 존재, 결핍의 존재로 자각할 수 있나?
유한한 생을 살면서 그 유한성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생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죽음, 공 또는 무한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무한자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자신 안의 무한성을 객관화시켜 신으로 이해하든지 할 수 밖에 없다.
인간 자신의 내적 본질로서의 무한자를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무한자의 우상화가 발생한다.
기독교적 신, 돈, 자본
인간의 본질 안에 무한성이 들어 있음을 간과한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결국 죽음의 문제를 도외시한 불완전한 비판일 뿐.
2) 종교가 단지 현실긍정적일 뿐인가?
종교가 인간으로 하여금 헌실 너머에 대한 기대를 겆게 함으로서 현실변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감소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종교는 현실에 실현되지 않은 이상적 가치들을 일깨워줌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게 만들어 주고, 나아가 이 현실이 궁극적 실재가 아님을 알려 줌으로써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자각해줄 수도 있다.
예. 기독교의 신앞의 평등 사상이 시민혁명의 이념의 맹아로.
** 절대의 가치는 현실 자체로부터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 우리 안에 자유와 부정의의 이념이 있기에 현실의 부자유함, 부정의함을 의식하게 되는 것. 그런 가치를 이상으로 삼아 현실의 문제를 바로 보게 된다.
4.불교와 소외문제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 무한과 절대를 객관적 신으로 실체화하여 이해함
- > 헤겔 이후의 비판, 무한은 인간의 추상적 관념에 불과.
이러한 비판이 가능한 것은 무한과 절대가 인간 외적인 객관존재로 외화되고 타자화됨으로써 인간소외가 발생했기 때문.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이 불교에 대해서도 타당한가?
1) 인간 본질의 자각으로서의 불교
불교는 흔히 자력신앙이라 불림.
불교 역시 유한한 인간의 삶을 넘어서는 초월적 가치로서 구제와 해탈, 열반을 말한다는 점에서 분명 종교임. 모든 초월적 가치는 긍극적으로 인간 자신 안에 자리잡은 내재적 가치. 오직 스스로 부처가 됨으로써만 구원받는다.
- > 포이에르바하가 비판하는 식의 종교적 자기소외늗 발생하지 않아.
2) 불국토의 현세적 실현
궁극적으로 부처와 중생, 열반과 현세, 진여와 생멸을 둘로 구분하지 않고 중생 안에 부처가 있고 생멸을 통해 진여가 드러나며 이 헌실세계 안에서 열반을 증득해야 한다. 현실세계 안에서 불국토를 완성해야 할 과제를 지님.
미륵하생신앙.
5. 적극적인 헌실참여의 길은 무엇인가
기복종교, 주술종교로서 불교.
<개념>
유적 본질, 종적 본질
이데올로기
노동소외
3. 불교와 현상학ㅡ유식의 아뢰야식과 후설의 초월철학
2. 현상학.
후설, 자연적 태도, 세계의 일반정립
-> 구성작용 :
우리가 소박하게 객관세계로부터 얻어 온 객관적 인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반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 주관에 의해 부여되고 첨가된 주관적 산물이다.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생각되고 종합되며 의미 부여되는 것, 그러한 주관의 작용과정을 말함.
세계는 주관의 구성작용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지향된 대상임.
주관의 구성작용은 어떤 작용인가?
의식의 종합의 층들.
1. 객관화 작용(객관세계의 구성)
2. 객관화된 지각세계와 그 지평(생활세계)
3. 생활세계와 초월적 자아
의식의 가장 기초적 작용은 표상작용, 객관화 작용임.
객관화 작용은 감각과 지각의 구분을 통함.감각자료를 객관사물의 속성으로 대상화시켜서 인식하는 방식.
이러한 지향적 객관화 작용에 의해 의식에 대한 지항적 대상이 구성된다.
-> 지각된 세계를 주관에 의한 구성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각에서의 파악 작용이 객관사물로 부터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는 감각내용들을 넘어서는 것들이기 때문. 개콴적으로 주어진 소여 이상의 것이므로.
이런 지각의 객관화 작용은 다른 모든 의식작용의 기초가 됨. 객관적 표상을 떠올리지 않고는 어떤 것도 판단, 의심할 수도 없고 원하거나 후회하지도 못해. 실천활동뿐 아니라 욕구와 정서에 대해서도 그 기초가 됨.
후기에 후설은 지각의 객관화 작용이 심층에 있는 어떤 작용에 의해 근거지어진 것임을 발견함.
생활세계가 객관화하는 파악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임. 객관화 작용 이전에 우리는 이미 세계를 그 한 사물이 그 안에 녹아 있어 두드러져 나타나지 않는 지평으로 이해함.
인간의 감정, 정서, 원망과 후회는 모두 특정 대상을 객관화하여 표상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행위를 규정짓는 전체적 삶으로 선소여되어 있다.
생활세계는 객관화되지 않은 질료들의 세계. ~객관화란 결국 그 선소여의 지평 중의 한 특정 부분을 추출하고 분리하여 주목하는 것. 각주8
자아의 의지와 감성이 함께하는 생활세계를 객관화 작용에 선행하는 것으로 밝힘.
생활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주관성의 지향작용에 의해 산출된 걸과인가?
의식의 가장 근윈적 지향작용으로서 시간의 구성.
생활세계 :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 습관의 세계. 이러한 시간의 연속성은 바로 의식주관성의 지향적 구성 작용을 통해 시간적 연속체가 구성됨으로서 가능해짐.
우리가 일상에서 현재라고 생각하는 시간은 과거 및 미래와 단절된 순수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예상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일상적 객관적으로 보아 이미 없다고 해야할 과거를 붙잡아 두는 지향적 의식 작용을 파지라 함.
아직 있지 않는 미래를 불러오는 지향적 의식 작용을 예지라함.
생활세계의 근본틀이 되는 시간성이 바로 주관의 지형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 생활세계는 그 궁극적 가능근거로서 그것을 지향적으로 구성하는 초월적 주관성을 지시해 준다.
초월적 주관성.
객관대상 구성 뿐아니라 그 근거가 되는 생활세계까지도 구성하는 지향적 활동주체임. 탈세계화된 자아, 무관심적 관망자.
후설은
개인적 영혼으로서의 심리.물리적 자아와 간주관적 주체로서 초월적 자아의 구분을 강조함. 세계를 구성하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아가 초월적 자아.
3. 유식철학
아뢰야식의 이중적 측면.
말나식과 의식의 대상인 자아와 세계가 이처럼 경험적 내용을 지니는 가의 현상임에 반해, 아뢰야식은 그들 경험적 내용이 변화해도 뭇 식을 하나의 식 내지 인격으로 통합하고 유지하는 초월적 주관성의 역할을 한다. 즉 전변주체로서 아뢰야식은 전변된 결과로서의 경험적 현상과 구분되는 것이다. 후설 현상학에서의 초월적 주관성의 위치와 상응함.
그러나 유식에서 다시 강조하는 것은 아뢰야식의 현상구속적인 측면이다. 아뢰야식의 종자는 바로 이전의 식소변인 현상과의 경험으로부터 훈습된 결과이므로 아뢰야식 자쳐는 이미 의식과 말나식의 집착에 의해 물들어 있다는 것. 따라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해.
현상학과 유식철학의 비교.
구성결과의 현상과 전변결과의 가.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 차이가 있음.
현상 속에서 후설이 찾고자 한 것이 세계의 본질이라면 가 속에서 유식이 드러내려고 한 것은 세계의 공성이다.
현상학은 세계가 초월적 주관성의 구성임을 밝힘으로써 세계의 질서와 아름다음과 기치의 근원을 인간 주관으로 옮겨와서 자아의 크기와 경이로움에 감탄하고자 하는 데 반해, 유식은 세계가 아뢰야식의 전변결과임을 밝힘으로써 세계의 혼란과 고통과 번뇌의 근원을 인간 주관으로 옮겨 놓고 자아의 자기부정과 자기극복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 (155)
현상학에 있어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자유란 곧 초월적 주관성의 자유로서, 이는 바로 구성된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반면 유식에서의 자유는 구성된 세계로 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구성하는 자아로부텨의 자유까지를 함축한다. (157)
서양과 동양의 차이
근원적 창조로서의 구성을 지향하는 현상학적 사고는 생지향적인 서양적 태도.
전변의 극복으로서의 무위를 지향하는 유식적 사고는 현상초월적인 동양인의 태도.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넘어 죽음의 의미를 체험함으로써 삶의 참의미를 체득할 수 있다는 동양적 초월주의의 표현이 곧 유식적 사고가 아닐까? (159)
유155페이지
3장. 불교와 현대윤리
1. 불교의 생명관 ㅡ 욕망과 자유의 갈림길
욕망과 자유, 이 두가지가 불교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얽힘이 우리의 삶에 어떤 긴장과 갈등을 야기하는가?
불교에서 해탈이 그토록 어려운 과제로 등장하는 것은 극복되어야 할 욕망 자체가 무척이나 극복되기 힘든 무한한 힘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생명관은 욕망이 그처럼 무한한 힘이라는 것을 밝힌다. 생명이란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개체적 생명의 살아있음이라면 불교는 그러한 개체적 생명체의 존재 자체를 욕망의 산물로 간주하고 나아가 그들 생명체가 깃들여 사는 세간까지도 모두 생명체의 욕망으로 간주한다.
현대적 생명관 : 우주적 물질이 먼저 존재하고 그 물질로부터 생명이 발생하여 그로부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의 발생이 있게 된다.
각주 1
근현대 서구의 자연관 : 유물론적이고 기계론적이며 요소주의적이다. 각각의 개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무관한 요소적 실체로서 그 각각은 다른 것들과 기계적인 작용반작용의 관계에 있을 뿐이다. 세간의 무아설, 연기설을 중심으로한 불교의 자연관에 대한 관심은 제한적임. 연기설은 생명이 드러나는 구체적 현상의 모습만을 말해 줄 뿐. 불교가 생명 그 자체를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지 물질 또는 정신, 몸 또는 마음과 연관하여 생명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는지를 말해주지 않음.
욕망은 욕계에 사는 또는 욕계를 형성하는 생명체의 의지. 불교식으로는 사랑과 집착의 업이다.
윤회 : 현생의 남겨진 업력에 따라 내생의 개체적 신체와 공동의 세간이 형성되는 것.
해탈 : 현생에서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아 내생으로 윤회하지 않게 되는 것.
윤회와 해탈 두 길이 정말 서로 상반된 길일까? 중생과 부처, 무명과 명, 욕망과 자유 그 둘이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일 수 있을까?
2.윤회의 길 :업력
1) 우주발생론
상식적 생명관은 *자연과학적 생명관임. 각주2
생명은 물질로 부터 발생하여, 그 물질적 기반 위에서 존속하다가 그 물질이 분해되면 끝나고 마는.
우주발생학 ㅡ 우주 내 무기물질
개체발생학 ㅡ 정자와 난자, 물리화학적 물질인 유전자
이 생명관은 서양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완성됨.
빅뱅. 지구생성. 박테리아 생성, DNA의 자기복제상의 실수인 돌연변이에 의한 생명체의 진화( 박톄리아 생명체. 어류와 포유류. 인류 진화발전)
우주적 물질이 존재하고 그로부터 생명체가 만들어진 후, 그 생명체의 신체적 호르몬 분비에 따라 욕망이 발생한다.
불교, 생명은 빅뱅과 같은 폭발의 힘 또는 폭발 이후 요소들이 생겨나게 하는 힘이다. 곧 업력.
우주를 생성시키는 이 업력은 유정의 업력. 유정은 무생물이나 식물과 달리 정을 가진 존재,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존재, 즉 동물적 생명체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무한수의 우주 중 하나. 한번 생성된 우주는 성주괴공한다. 새로운 우주를 생성해 내는 힘은 그 이전의 우주에 살던 유정의 업력이 바람처럼 밀려와 작용하는 업력임.
무시이래로 존재해온 유정의 업력이 우주를 형성한다. 비고. 신
이 우주는 각 유정이 머물러 사는 기세간. 유정들 공통의 업 즉 공업에 의해 만들어진 공통의 기세간임.
이 공통의 기세간은 오직 그 공업을 가지는 유정에 대해서만 그런 모습으로 존재한다.
* 다른 인간들 역시 이 세계를 나와 동일한 방식으로 보기에 우리는 이 세계가 그 자체로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기세간은 오직 인간에 대해서만 존재할 뿐이며 인간을 떠나서는 없는 것.
2) 개체발생론
기세간 안에 살고 있는 각 개체의 몸과 정신 역시 업력에 의해 형성됨. 그 업이 개체적 업이기에 불공업임.
업력이 개체를 형성하는 방식, 12지 연기의
삼세양중인과설.
비고. 유물론적 태아발생론. 난자와 정자의 결합.
불교. 직접적 인은 이전 생의 유정이 남긴 업력. 보조적 연이 난자와 정자. 이 업력의 총체를 식이라함.
식의 형태로 존재하는 중유의 존재.
각주7. 삶에 있어서의 모든 구체적 특성들, 예. 동물성이나 인간성, 여성성이나 남성성 등은 헌상적이고 경험적인 속성일 뿐 그 어는 것도 개체의 본질적 속성인 자성이 아님. 무자성의 공.
* 여성성불불가설은 사회관습적 사유틀을 벗어나지 못한 승가집단 내 승려들의 무비판적 사고의 표현일 뿐.
무자성, 공, 개체의 경계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을 끝까지 가로막는 마지막 경계는 아마도 성의 경계일 것. 모든 것이 다 자성이 없어도 남성성과 여성성만은 그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끝까지 자기 경계 밖의 타인,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임.
다시 생하게 되는 것은 이전 생의 유정이 집착적 업을 짓기 때문. 공을 모르는 무명으로 인해 아집과 법집이, 이에 의한 행때문에 식이 윤회를 거듭하여 다음 생으로의 태어남이 있게 되는 것
느낌.
근이 기세간과 접촉하여 느낌이 발생. 이 느낌의 발생은 이전 업의 자연스러운 결과. 이것은 업력으로부터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보에 해당.
사랑.
새로운 업을 짓기 시작하는 지점.
사랑으로 인해 집착이 일어난다. 뜻으로든 입으로든 몸으로든 애착으로 부터 나온 일체의 행은 자신의 보를 이끌어 올 능동적 업이 된다. 사랑과 집착의 힘이 바로 다음 생의 신체와 세간을 형성할 업력이다.
우리의 삶은 결국 사랑과 집착. 애착, 애욕, 욕망의 삶인 것.
나와 세계에 대한 집착에 기반하여 존재에 대한 애욕을 갖게 되고 그 애욕으로 인해 존재의 연기적 상호연관의 회뢰 속에 끌려들어가 결국 회로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함으로써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써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윤회다.
3. 윤회를 벗는 해탈의 길
1) 공의 깨달음
이러한 공의 자기자각을 마음 또는 한마음, 일심이라고 함. 나와 세계를 형성하는 근원적 힘, 업력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다.
공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 무경계의 경지에 이르는 길, 해탈의 길은 어떤 길인가?
2) 깨달음에 이르는 길 : 욕망 밖에 서기
자신의 업력을 자각하되 그 업력을 따라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것, 자신의 욕망을 뿌리 속 깊이 자각하되 그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 밖에서 욕망을 바라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욕망을 느끼면 곧 그 욕망에 사로잡혀서 욕망이 마음을 이끌고 욕망이 마음의 주인이 되고 만다.
그러나 마음이 욕망을 바라보고 있는 한 마음은 욕망을 의식하되 욕망에 의해 이끌리지 않는다. 마음은 욕망 밖에 서서 욕망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 근원에서 그 근원에서 욕망의 힘, 업과 연기의 원리, 자아와 세계의 공성을 자각할 수 있다.
사념처관, 비파사나 수행법.
욕망은 의식에 드러나지 않고 심층에서 작용할 때만 직접적 작용력을 가질 수 있어.
희로애락의 감정, 삶에의 욕망을 포함한 자신의 삶 전체를 일종의 연극으로 간주하면서 자기 자신을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 관람자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다. 무대 위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열망하거나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
4.윤회를 완성하는 해탈의 길. 불이법문
1) 보살의 자비정신
윤회와 해탈이 대립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의 삶은 구원받을 길이 없다. 왜 공이 공으로 남아 있지 못하고 일심이 일심으로 머무르지 못한 채 욕망을 따라 다의 색으로 변현하게 되는지, 왜 우주는 성주괴공을 반복하고 왜 유정의 윤회를 이끄는 무명의 바람이 불어오는지에 대한 대한 물음은 대답될 수 없게 된다.
해탈은 이 세계가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미 올랐다고 해서 지나간 길을 무너뜨린다면 무엇을 딛고 올라갈 수 있나? 해탈의 길이 곧 윤회의 길이다.
우리가 내려가는 만큼만 올라갈 수 있고 고통스러운 만큼만 즐거울 수 있으며, 절망한 만끔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두 길이 한 길이기에 높이 올라갈 수록 추락할 수 있는 더 깊은 심연이 드러난다.
불이법문. 열반이 곧 생사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부처의 깨달음은 중생 안에서만 구현되며, 열반의 환희는 생사의 고통 속에서만 실현된다.
세간이 윤회하는 중생들의 공업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므로 기세간에 사는 모든 인간은 공업에 의해 서로 묶여 있다.
윤회를 벗고 해탈한다는 것은 윤회하는 다른 인간들을 남겨둔 채 홀로 무대 밖으로 비상해가는 것이 아니라, 무대 전체를 해탈의 무대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해탈은 윤회의 완성이지 윤회의 부정이 아니며, 윤회적 삶 역시 해탈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로서 긍정되어야.
불이법문. 보살정신
업력에 의한 윤회가 아니라 자비의 원력에 의한 환생이다.
2) 보살의 자비와 중생의 사랑
일심은 시선 속에서만 확인된다. 무한은 왜 무한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고 유한화하는가? 일자는 왜 다자가 되는가? 일자는 일자 자신 만으로는 의식되지 않고, 다자안에서만 일자로 확인될 수 있기 때문. 그래서 일은 다가 되어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데, 그 확인의 순간은 바로 환희이다.
무한과 영원, 신과 심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환희. 우리 마음이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확인하는 것, 생명 속에서 느끼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라는 환희이며,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욕망의 궁극적 지향, 힘든 욕망의 파행을 거쳐 궁극적으로 얻고자하는 것도 결국은 동체의식, 일심의 느낌, 그 하나됨의 환희일 뿐. 중생의 욕망 또한 핵심에있어서는 보살의 자비정신과 다르지 않아.
욕망의 확산으로 표현되는 중생의 집착적 사랑 안에도 욕망의 수렴으로 표현되는 보살의 동체적 자비가 그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음.
5. 인간의 원
무대를 떠나지 못하고 무대 위에 머무려는 우리의 욕망, 이것이 보살정신으로 승화될 수 있으려면 우리 삶의 무대가 해탈적 삶의 무대가 될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우리가 함께 어떤 꿈을 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무대 위의 삶에 대한 긍정. 존재긍정의 정신,
무대 위 일체 존재를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끌어안고 감싸려는 그런 강렬한 존재긍정의 정신만이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가 둘이 아닌 하나로 되게 하는 불이법문의 정신 일 것. 그것만이 해탈의 소망과 애착적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삶을 구원해 주는 마지막 자비의 손길일 것이다.
욕망이 강한 자만이 욕망으로 부터의 탈출, 해탈을 꿈꾼다. 추락하면서 비상을 꿈꾸고 비상하면서 추락을 경험하는 것, 무대를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무대에 시선을 집중하는 것, 욕계에 사는 우리 모든 인간의 운명이고 한계이며 소망일 것.
▶ "불교의 근본사유"의 장을 읽고
- 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이 책의 1장의 내용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용어도 생소하고 내용도 압축적이다. 그리고 저자가 서양과 동양 철학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의 큰 그림 안에서 불교의 근본사유를 기술하므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절대와 상대, 유한과 무한, 관념론과 유물론 등과 같은 거대한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어, 더욱 어렵게 느켜질 수 있다.
이 책 1장은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와의 만남>의 책 제목과 같이 불교철학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고 이후의 2장과 3장에서 불교철학이 서양철학을 만나서, 다시 한번 불교철학의 특징과 핵심을 벼리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지금 시대에 당면한 윤리적 과제들과 만나 불교적 실천론을 벼리게 된다.
우리가 개인적 괴로움때문에 수행을 하든 이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봉사를 하기위해 수행을 하든 나와 세계(나가 아닌 너, 사회, 자연, 우주 등)에 관한 올곧은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파고 내려가면 위의 거대한 철학적 문제를 만나게 되고 그것에 관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불법을 믿고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삶을 살기로 한 불자이기에 불법이 이러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갖는지를 공부하고 자기 나름으로 관점을 확립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튼튼한 기초공사 같은 것이다.
발췌정리하는 글에서 개념들을 쭉 열거해두었는데, 읽어도 내용이 안들어 오거나 나중에 이 내용을 복기할 때 이 개념을 중심으로 머리 속에 내용을 정리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철학 걔념이나 용어는 사유의 틀 같은 것이라 복잡한 내용을 교통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장을 읽고 내게 관심이 가는 주제는 세 가지이다. 1) 세가지 길, 윤회, 해탈, 보살의 길 2) 유, 공, 가, 즉 실재론, 중관의 공론, 유식론. 3) 환상, 개인적 환상과 종적 환상, 일체는 환상이다. 지금은 각 주제에 대해 내 문제로 내려않은 글을 쓸 수 있는 깜량이 안 된다.
여기서는 왜 이 주제들이 흥미로운지 간략히 적어둔다.
세가지 주제를 관통하는 큰 줄거리는 이렇다. 내가 가야할 길은? 일체 고통으로 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해탈의 길일까? 아무런 표상도 색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밝은 빛으로 존재하는 길, 이것은 아니다. 물론 무시이래 무지 속에 반복되는 윤회의 바다에 휩쓸려 가는 길은 더 더욱 아니다. 다채로운 존재가 살아 있는 이 속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아웅다웅 살아갈 이 속제에서 살고 싶다. 단지 너가 바로 남이 아니기에 나도 너도 고통없이 살 수 있기를. 그래서 고통스런 이 생에 대한 보상으로 다음 생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 껏 여기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길. 그러기 위해서 나와 너는 나와 너라는 존재도 우리가 보는 세계도 모두 실재가 아닌 가유라는 것을, 환상이라는 것을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에, 고통받는 중생이 사는 세상에 살되, 고통받늗 이들을 위로하고 세상을 치유하고자, 이 세상이 꿈인 줄, 환상인 줄 알지만 보다 아름다운 꿈을 함께 꾸고자 이 가유의 세상을 선택한, 보살의 길, 이것이 내가 가고 싶은 길이다.
▶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을 읽고(1)
장장 세 달에 걸쳐 이 책 한권을 모두 읽었다. 짧게 내용을 짚어보면, 1장에서 불교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방법은 어떠한 것인지(불교의 근본사유)를, 2장에서 불교를 보다 일반적인 철학적 지평에서 논하기 위해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현대철학을 비교하는 글들(불교와 서양철학)을, 3장에서 현대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생명과 윤리 그리고 생태학의 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논하는 글들(불교와 현대윤리)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읽고 이 책을 끝내면서, 크게 보아 우리가 짚어야 할 문제, 혹은 함께 논의해봤으면 하는 점을 적는다.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그리고 예상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사회)에 당면한 커다란 문제들에 대해 불교는 어떤 대답과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불자인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보다 상세히 나눠 적어보면 이렇다.
1.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와, 이와 관련된 주류담론(철학적 바탕)
. 생명의 문제와 자연과학적 생명관(우주발생학, 개체발생학)
. 생태학적 위기와 진화론, 체계이론
. 성문제와 성윤리
2. 주류담론의 한계와 불교의 대답
3. 수행자인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이 책을 찾아 읽고, 이 책을 이 모임에서 함께 읽고 싶었던 이유는 2500년전 부처님의 깨달음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삶과,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사회 그리고 예상되는 미래의 문제들에 대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알아가면서 함께 실천할 방도를 찾기 위함이다. 내 삶과 너와 사회의 문제들, 현재 우리와 미래의 세대,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자연, 생계와 일과 봉사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님을 알기때문이다.
단지 이 책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한줄 한줄 읽으며 내가 바라는 점은 내가 귀의한 불법(불/법)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고, 당면할 문제들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얼마만한 보배인가를 여실히 깨치는 것이며, 나 또는 우리가(/승)가 밟아 갈 보살의 길은 어떤 가닥의 길일까를 가능하다면 보다 상세히 정치하게 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쓴 한자경님의 의도와 우리가 이 책을 읽을 때 가져야 할 관점을 상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책 서두의 지은이의 말을 인용한다.
" 오늘날, 이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불교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는 불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불교의 '현대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따라 불교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2500년 전에 석가가 설한 진리가 현대의 자연과학적 진리와 일치한다는 것, 이것을 밝히는 것이 불교를 살리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 이것은 결국 종교를 과학의 잣대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며, 일체 진리의 기준을 현대과학에 두겠다는 것이다. 종교를 현대과학의 기준에 따라서 재단하는 과연 정당한가?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교를 현대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불교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날까? 불교의 기본정신에 따라 현대의 시대정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만 우리가 현대 너머에서 현대를 바라보며 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대의 시대정신을 비판하고 넘어설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을 불교에서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불교의 '현대적 의미'가 살아나지 않겠는가?" (지은이의말, 6)
▶나, 세계 그리고 나의 길
: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을 읽고(2)
위와 같은 제목을 잡아 책 내용을 재구성해 보았다. 아직? 이 주제에 관해 체화된 글을 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I. 나
: 한 생명인 나, 나에 대한 이해
생명이 자기를 표현하는 두 가지 길이 욕망과 자비라고 한다. 하나는 현상구성의 차원이고, 또 하나는 현상초월의 차원이다. 생명인 나는 이 두 차원을 넘나드는 존재다. 무수한 중연에 의해 얽힌 일체의 관계망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끔 꽉 짜여진 삶을 산다. 나와 다른 것, 좋아보이는 것,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쫒고, 나에게 있는 것, 싫어하는 것을 밀쳐냄으로써, 나는 결국 이 세상에 고통을 보태고 또 그 만큼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는 일을 반복하는 존재다.
또한 나는 속박과 같은 온갖 정체성들로 엮인 관계 속에서 행과 불행에 일희일비하는 개체적 인간 그 이상의 무엇이다. 나는 내 심층에 깨어 있는 마음 안에서 모든 유정의 마음과 공명하는 생명이다. 내가 감각하고 사유하는 일체는 바로 이 심층의 마음이 그려낸 것, 내 마음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무외의 마음이 바로 내 본래면목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 버겁던 관계망과 세계 밖에 서 있다. 이와 같은 자유의 순간은 그야 말로 순간이라 지속될 수 없는 것이지만 순간에 내가 본 것은 '그 어느 것도 나 아닌 것이 없다'는 진리이다. 이와 동시에 찾아오는 느낌은 만물일체의 느낌, 동체대비의 감정, 자비심이다. 시간이 지나 자비심이 내 주된 정서로 자리 잡을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수행이 깊어지면 그럴 것이다. 나는 여전히 욕망과 자비, 생명의 두 가지 자기 표현이 내 안에서 존재하며 순간 순간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 가를 다툰다. 욕망과 자비는 어떻게 화해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
한자경님은 " 이러한 화해는 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 욕망과 자비, 중생심과 진여심이 본래 불일불이의 관계이기에. 업에 따라 윤회하는 중생의 욕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마음의 하나됨에서 오는 환희라고 본다면, 중생이 갖는 욕망의 핵심도 사실은 보살과 마찬가지의 자비이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유, 색, 차이, 욕망은 궁극적 존재, 공, 실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무엇, 진리의 자기 표현인 것 같다. 현상 차원(욕계)을 사는 나는 마음이라는 내 안의 진리의 자락을 잡고 있고 언뜻 진리의 빛 한 조각이 비침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진리가 진리를 알아보는 순간의 느낌이다. 내 눈에 들어오는 유정의 고통과 그의 고통스러워 하는 마음을 내 안의 심층마음이 포착했을 때, 연민과 자비심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욕망이라는 생명의 외길은 내 마음 속 이 진리의 빛을 놓쳐버리고, 자기 본래의 목적을 망각한 채, 차이와 색을 쫒느라 수 많은 생을 되돌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 중생이 불법을 만난 일대 사건이 일어난 이번 생은 좀 다를까?
II. 세계
: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 전지구는 이미 자연, 경제, 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우두머리 강자의 무한한 쾌락에 봉사하기 위해 하나도 빠짐없이 차별화와 서열화의 상호관계관계로 들어서고 있다. "
이 세계를 선도하고 지배하는 정신은 현실의 논리, 과학의 논리, 자본의 논리이다. 오늘과 미래를 지배할 정신의 다른 이름은 유물론, 진화론, 진속이원론, 유기체론, 체계이론, 자연과학적 생명관 등 무수하다.
어떤 생태학자의 주장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는 " 디오니시우스의 존재의 4단계, 즉 무기물-식물-동물-인간 그리고 그 최상층의 신이라는 계층적 위계질서를 제시한다. 자연의 진화과정을 가장 아래 단계의 것(물질)으로부터 끊임없이 질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보며, "더 높은 단계에 있는 존재의 도움을 받아.... 바로 위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
'신이 죽은 시대'인 현대는 종교와 철학이 오늘날 '유일한 진리의 기준'이 된 과학의 시녀가 되었고, 과학은 무엇보다 자본의 시녀가 된 시대이다.
과학은 개체적 생명을 일즉일체의 존재가 아니라, 오직 유기체적 전체의 일 부분으로, 물질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개별 생명체 "각자가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각각의 특성과 상이한 역할에 따라 상호 보완하며 조화로운 하나(일체)를 이룰 때, 정말 그 부분들이 모두 평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이루어진 하나가 정녕 누구를 위한 하나이고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진 하나인가? "다 같은 형제자매요, 다 같은 한국인이요, 다 같은 인간이요, 다 같은 생명체"라고 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여 조화를 이루자고 말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들이고 너는 딸이니까" "나는 교수고 너는 시간강사니까, 나는 사장이고 너는 직원이니까, 나는 신부고 너는 수녀니까, 나는 한국인이고 너는 외국인이까, 나는 백인이고 너는 흑인이니까, 나는 인간이고 너는 동물이니까" 등등의 온갖 차별이 뒤따르게된다. 누구를 위한 조화이고 공존이란 말인가?
....
그렇다고 일체의 관계를 타파해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혁명으로 관계를 뒤집자는 것도 아니다. 차별적 위치와 차별적 역할에 기반한 모든 관계에는 이미 권력과 불평등이 스며들어 있으므로, 그 관계 속에서 내가 얻는 기쁨만큼 반드시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불교는 이 점을 통찰하고 있다. 그래서 연기로 발생하는 이 세상 인연의 얽힘을 고통이라고 본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누군가의 고통을 먹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
III. 나의 길
: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
내가 얻고 있는 기득권과 기쁨만큼 누군가는 불평등과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 내가 경험하는 억압적 현실에는 항상 나의 도장이 찍혀있음을 기억해야 " 한다.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누군가의 고통을 먹고 사는 것이다. 육식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개고라는 진리를 일찌기 깨닫고, 전륜성왕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길, 즉 사회개헉이나 혁명의 길을 가지 않으셨다. 절대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무엇을 찾고자 출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내가 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일 자체가 곧 다른 생명에게 고통이 된다면, 어떻게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부처님이 출가하실 때 가슴에 품었던 의문이 아닐까?
다른 생명이 곧 나라 여기면 되지 않을까. 내가 있다는 의식도 내가 느끼는 다른 생명과의 차별성 모두가 허망분별이고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은 본래 하나의 심층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진리. 이를 믿고,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지만 내가 먹는 고기가 내 몸이라고, 혹은 내 아이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먹어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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