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진리는 자유다

백_일홍 2022. 8. 2. 14:42

진리는 자유다

 

해공

 

 

자유란?


노예제 폐지, 반정부운동, 히피니즘 등
21세기에도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고 찾아 헤매고 있다.
온전한 자유란 외부환경이나 조건의 변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1. 생로병사의 굴레(에 갇혀있음)
붓다, 무상, 고, 무아라는 깨달음.
* 무아 :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와 사건은 주체 없이 연기된다.(무아연기)
=> 생로병사의 굴레에 갇힌 고통-> 무아연기, 자신은 본래 자유임을 깨닫다.

=> 자유는 찾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본성이 본래 자유다.

해공,<진리는 자유다>_머리말

 

 

1장. 왜 구속을 받는가? 

 

 

물음 : 당신은 누구인가?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몸과 마음은 나일수 없다. 몸과 마음은 짧은 찰나 속에 생하고 흘러가다가 결국 멸해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허상이다. '나'라고 매달릴 근거가 없다.

 

 

 

- 몸과 마음은 꿈속의 존재.

 

왜 인간은 몸과 마음에 집착하여 꼼짝달싹 못하는 것일까? 이 몸과 마음을 실재로서의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몸과 이 현상세계가 너무나 생생해서 꿈이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상태라서. 이 우주현상계를 보자. 절대가 의식을 통해 펼쳐내는 거대한 꿈의 세계다. 사람도 그 속에있는 꿈 속 존재다. 그런데 그 꿈을 실상이라고 착각하면서 이 몸과 마음이 실재로 존재하는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 꿈에서 깨어나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해결의 열쇠.

 

 

 

- 몸과 마음은 연극 속 캐릭터.

 

이 현상세계도 연극처럼 별의별 캐릭터가 있고 캐릭터들 간의 다양한 인연 속에서 수많은 현상이 벌어진다. 이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는 오직 하나다. 그것이 절대이다. 절대가 수십억만의 역활을 혼자 다 해낸다. 이 우주현상계는 참나인 절대가 펼쳐내는 원맨쇼 모노드라마다.

 

 

 

현상적 존재는 의식이다.

 

참나인 절대가 자기자신을 현상으로 드러내놓고 그 드러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의식이 됨. 우주 현상계는 실재가 아니고 의식에 의해서 투영된 현상이다.

 

 

 

분리의식은 어떻게 생길까?

 

현상으로 드러 난 것도 절대. 드러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의식화된 절대.

 

현상적으로는 하나인 상태는 인식이 안되므로 현상이 대상이 되고 이를 인식하는 기능은 인식하는 자가 됨. 여기에서 현상적인 나라는 개념이 생성되고 현상적인 내가 인식하는 대상은 너가된다. 이렇게 분리의식이 작동됨. 

-> 의식이 인식하는 자인 '나'라는 틀에 갇혀버리면 그것만 나이고 나머지는 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너라는 인식이 고착된다. -> 하지만 의식이 전체성에 있게 되면 인식하는 자와 인식대상이 통째로 하나인 절대의 현상적인 드러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순수 진리를 이해하고 나아가 깨닫기 위해서는 의식에 대한 올바른 개념정립이 매우 중요.

 

 

 

- 순수의식. 개체의식. 캐릭터의식.

 

현상적 존재는 하나의 의식이다. 하지만 깨닫기 전에는 방편적으로 순수의식과 개채의식이라는 상대성으로 나누어 정리해야함.

 

 

 

개체의식은 이 몸과 마음만 나라고 착각하는 의식상태.= 에고

 

깨닫고 나면 이런 착각이 없어져 이것을 순수의식이라고 함. 순수의식은 전체가 통째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의식. 그리고 절대가 의식화되어 드러날 때 현상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의식이 있는데, 이것을 캐릭터의식이다. 예.해공이라는 캐릭터의식은 처음에 개체의식이었다 깨달은 후 순수의식 상태가 됨. 

-> 해공이라는 주체가 실제로 있어서 해공의식이 주체적으로 깨달아 순수의식이 된 것이라 생각하면 안됨. 단지 캐릭터에 부여된 의식의 상태가 변했을 뿐.즉 해공이라는 캐릭터가 현상이라는 연극속에서 깨달은 자의 역할을 하는 것임.

드러난 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나에게서 일어났다고 착각하면 개체의식이고 그 어떤 것이든 나에게서 일어났다는 착각이 없는 의식이 순수의식임.

 

 

 

- 절대와 의식의 관계.

 

절대가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에 의식이 된다. 절대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늫고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위해 의식이 될 수 있지만 의식은 절대가 될 수 없다 절대는 실재고 의식은 방편. 절대가 자기자신을 인식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편이기 때문에 의식은 허상이고 개념임.

 

 

 

참나는 절대다.

 

신, 본래성품, 아트만, 주인공이란 단어가 오해를 일으킬 수 있어. '절대'란 단어를 사용함. (정확한 개념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 절대는 모든 것이다.

'참나는 절대다'에서 절대의 언어적 개념은 대상이 끊어져 버린것을 절대라고 함. 상대적 인식 체계가 끊어진 것을 말함. 통째. 전체일 때 대상이 끊어지는 것임. '모든 것'이므로 절대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원화 될 수 없어. 일원상이 절대를 표현하는 데 매우 적합한 상징이다. 절대는 통째로 전체이며 하나이다.

 

 

 

- 절대는 불생불멸

 

끊없이 도는 원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함. 시작과 끝이 없으니 생도 없고 멸도 없다. 불생불멸인 영원한 생명 그 자제가 절대임. 

 

절대는 통째로하나이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를 무라거나 공이라고 착각함. 절대는 존재 그 자체로 있다. 존재 그 자체로서 절대는 모든 생명체의 생멸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질수 있는 바탕임 그것이 절대의 허공성임. 생멸하는 것은 물질이지 허공성이 아니므로 항상 그대로인 절대는 모든 것의 근원임.

 

 

 

- 절대는 오직 하나다.

 

일원상의 원 안에는 수없이 많은 존재로 가득 차 있다. 이 수십억만의 물질, 정신현상. 그 하나하나의 근원이 제각각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 모든 것의 근원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절대임.

 

이것이 바로 붓다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붓다는 무아연기를 깨달아 오직 참나만이 존재함을 체득함. 절대만이 홀로 존귀하다. 

 

 

 

- 절대자는 절대가 아니다.

절대에 개체라는 의미의 자를 붙이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발상. 개념적 혼란에 빠진 인간들이 대상으로서의 절대자를 만들어 놓음. 그리고 어리석게 스스로를 피조물이라 여기면서 가상의 창조주인 절대자를 경배함.

 

<현상세계는 상대세계다>

 

절대가 스스로 의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것이 현상세계다.

하나인 상태에서는 인식되지 않기에 상대성인 둘로 나누어진다. 현상세계는 상대적으로 존재해야 인식이 가능하고 인식되어야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가 나누어진 것처렁 인식될 뿐 본래 하나인 절대가 둘로 나누어진 것은 아님.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대상은 둘이 아니고 하나인 절대 그 자체임. 현상세계는 근원적으로 본래 하나인 절대의 드러남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인식하지 않으면 없고 인식하면 있는 것이다. 인식하지 않아서 아무것도없는 상태와 인식해서 수십억만의 물질 현상계가 펼쳐진 상태가 모두 절대이다.

 

 

 

- 현상계는 쌍생쌍멸이다.

 

붓다의 연기법칙.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 우주 현상계의 비밀

 

 

1. 스스로 생할 수 없다. 현상세계의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시차적 연기법.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한다.

 

2.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존재해야 인식가능하고 인식가능해야만 존재하기 때문. 동시적 연기법. 생과 멸은 쌍으로 존재하는 한 쌍의 개념. 모든 상대적 존재는 그 존재방식이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쌍으로 생하고 쌍으로 멸하는 개념 뿐임.

 

 

 

육체-영혼, 몸-마음, 나-너, 음-양, 색-공, 남-여, 선-악, 유-무, 원인-결과, 기쁨-슬픔, 시간-공간, 천국-지옥.

 

모든 개념은 이 우주 현상계의 수 많은 현상을 설명하기위하여 필요에 의해 생겼다가 그 필요조건이 없어지면 사라져버리는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쌍생쌍멸하는 개념 뿐이다. 그러므로 현상적 존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고 순간적 존재다 실재가 아니고 허상인 것.

 

 

 

- 현상세계는 주체가 없다.

 

주체라는 개념은 혼자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상대성으로 존재. 혼자서는 생각 말 행위하나도 일으킬 수 없어. 현상세계는 쌍방간에 씨줄날줄로 연결되어 연기되면서 펼쳐져 나가는 것. 연기적 존재에 독립된 주체로서 나 너라는 것은 없다. 무아.

 

 

 

- 현상세계는 절대와 하나다.

 

현상세계는 전체적으로 보면 현상계의 존재 하나하나에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자아가 없기 때문에 통째로 하나다. 통째로 하나인 모습이 바로 참나인 절대이다. 바다는 파도가 일어나기 전에도 바다였고, 파도가 일어난 지금도 바다고, 파도가 사라진 후에도 그냥 바다인 것. 그처럼 절대 안에서 현상세계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사라질 뿐, 영원한 존재 그자체로서의 절대는 그대로다. 수십억만 개로 쪼개져 현상계에 드러난 그 모든 것은 본래 하나인 절대가 투영되어 드러난 절대의 모습이다.

 

<분리된 관점이 구속이다>

 

절대는 저리 멀리, 여기와 다른 특별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자체이다. 현상세계 있는 그대로가 절대인데 사람들은 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이 현상세계를 매사에 시비하고 분별하는 마음, 즉 분리된 의식상태에서 보기때문이다. 

->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절대가 아닌 구속과 고통의 세상으로 으로 잘 못 인식함.

 

 

절대는 대상화될 수 없기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에 관한 지식(명상을 포함)은 진리를 깨닫기 위한 방편적 과정에 불과함. 그 방편적 과정이 현상적으로 꼭 필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마지막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그러한 과정들이 모조리 무너져야 함. 개체의식 상태에서 시비 분별하던 과점을 전체성으로 모든 것을 통째로 한 번에 뚫어 볼 수있는 관점으로 전환해야한다. 현상세계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으면서도 모든 것은 이는 그대로 절대인 것으로 보임.

 

- 관점은 어떻게 생기는가?

 

인식의 조건 때문에 상대성으로 나뉘게 된 것. 이 현상세계에 투영된 각자의 의식은 태어나서 세상을 인식하는 첫 순간부터 나와 너는 별개라는 인식이 작동할 수 밖에 없다. 본래 전체가 하나의 의식임에도 불구하고 투영되는 순간에 그렇게 착각할 수 밖에 없어. 우리의 조건화로 인해 자동적으로 분리의식이 주워짐. 절대는 실제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나누어진 것처럼 인식되는 것. 인식작용으로 개체를 실체라고 착각하는 의식이 개체의식임. 이 같은 개체의식의 틀이 형성되면 그 틀 안에서 세상을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분리된 관점을 만든다.

 

 

 

- 의식에 따라 관점이 다르다.

 

개체의식이 갖고 있던 모든 관념은 본래없는 나를 실재라고 착각하는 데서 생긴 것들. 그것을 내려놓는 일이 공부의 첫걸음. 의식에 따른 현상세계의 관점들.

 

. 세속인과 종교인.

 

물질적인 것(돈, 권력, 명예 등) 혹은 정신적인 것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그것을 통해 자기자신이 무언가가 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몸과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 즉 에고의 만족이다. 종교인. 높은 정신의 소유자. 신을 통해 구원받고자. 좋은 인간이 되고자함. 하지만 에고는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자아완성이란 착각이다. 그런 것은 없다.

 

 

 

* 종교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두려움에서 시작되어 신과 같은 경배의 대상에 의지하여 구원과 평안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인들의 관점은 지극히 감정적이다. 더불어 이성적 판단을 배제한 믿음에 의지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믿음의 견고한 틀로 형성된 관점의 벽 또한 두텁다.

 

 

 

. 철학과 과학

 

철학은 합리적 이성적 관점. 종교는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받아들이게 됨. 카툴릭 불교 기독교의 고등종교 탄생. 믿음으로 형성된 튿은 여전히 그들만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철학적인 관점이 인간의식의 진화에 따라 진리적인 사고를 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물질세상의 진실을 증명하는 과학이 20세기에 나옴.앞으로 과핰의 발전은 종교적 맹신 비합리적 착각에서 생기는 오류를 상당부분 바로 잡아 줄 것. 하지만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현상 너머의 근원. 현상을 인식하는 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참나인 절대가 그것임. 인간 본성에 대한 이 깨달음은 그야말로 직관적이고 근원적이고 전체적인 통각에 의해서만 가능한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다.

 

 

 

. 순수 구도자와 순수진리

 

구도자가 종교인 또는 세속인과 명확히 구분되는 점은 바로 순수다. 순진과 다르다. 순수의 참뜻은 자아 즉 에고가 바탕이 되지 않은 무아적 차원을 말함. 순수진리는 무아의 진리를 말함. 이 진리의 길을 가는 구도자를 순수 구도자라고 함. 순수구도자의 관점은 상대적 관점이아닌 절대적 관점으로 전체를 한눈에 통각하는 관점이다. 이는 순수진리를 무아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임. 의식이 순수해야 진리를 바로 볼 수 있고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다. 진리의 본래 성품이 순수하기 때문에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의식이 순수해진다. 

 

- 관점의 전환이 어려운 이유

현상세계에 생하는 순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분리의식임. 하지만 진짜로 분리된 것이 아닌 의식의 속임수이다. 속고 있는 의식은 착각을 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모든 허구적 개념들이 쌇여 틀을 만든다. 그것이 나라는 착각을 유지하게 해주는 벽이되고 에고를 든든하게 보호해준다. 그 보호벽을 부수는 것이 나라는 착각을 뿌리째 뽑는 과정이다.

 

순수진리를 만나게 되면 그 이전의 공부들을 다 뽑아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순수 진리 이외의 종교나 명상 단체에서 추구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닦아서 자아를 완성하는 데 있지만 순수 진리는 개체를 갈고 닦아 거대한 존재로 만드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 다른 존재가 되어 보려는 마음' 순수 진리를 만나기 이전의 세월이 헛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들이 가슴을 녹여 순수 진리를 만나게 하는 준비과정인 셈이다. 

 

순수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명확해야 한다. 개체로서의 나를 깨달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꿈을 깨야, 그런 것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을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다. 순수진리는 어떤 목표도 의지할 곳도 부여하지 않는다. 

 

 

- 순수로가는 관점의 변화단계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물질 현상 사건 생명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독립적인 실체로 봄. 눈에 보이는 데로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고 인식하는 것. 이분법적 관점

 

 

 

2.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1의 관점은 본래 하나인 절대가 자기자신을 드러내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착각임을 알게됨. 절대의 투영에 불과함. 산 물 실체가 아닌 허상. 첫번재 관점의 부정.

 

 

 

3.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처음 관점과는 완전히 다름. 절대의 투영체 중 하나의 현상임.

 

이름이 산이니까 산이라하고 물이니까 물이라 한다. 있는 그대로 절대가 드러남. 통째로 진리임.

 

 

 

대부분 공부하다 두번째까지만 감. 절대를 허상세게와 다른 무엇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함. 절대를 적멸한 상태, 공의 상태라고 생각함. 반드시 3의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현상세계에 투영된 것들이 하나 하나 개체로서는 전부 주체가 업는 허상이지만 전체를 통째로 보는 관점에서는 있는 그대로 절대의 드러남이기 때문에 통째로 진리인 것이다.

 

 

2장.구속에서 벗어나자.

 

 

<고통>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붓다의 생로병사의 고)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고통은 자극에 반응하는 각자의 의식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불교, "인생은 고해다"라는 표현은 상대의 반쪽인 고통이라고 하는 한쪽만을 강조한 반 쪼가리 표현이다.-> 채플린,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 두가지를 통합적으로 보는 깊은 통찰.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자기의 삶을 가까이에서 자기 틀에 갇혀서 항상 그 틀 안에서 보기 때문에 비극일 수 밖에 없는 것.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비극 조차도 하나의 코미디, 연극으로 보게된다. 멀리서 보면 온통 부조리해 보이는 인생 그 자체가 비로소 하나의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된다. 

 

채츨린의 지혜도 무아에는 이르지 못했다. 순수구도자는 고통이 무엇인지 그 고통의 진실을 보고 과연 그 고통을 받는 것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봐야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삶의 내용이 아무리 슬프고 기막히고 가슴아프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허상이라는 사실이다. 소설책이나 영화의 영상처럼. 실재가 아닌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 펼쳐진 모습과 동일시하지 않으므로 고통받지 않는다.

 

 

 

실재가 아닌 것을 실재라고 알고 있는 그 어리석음 때문에 모두가 고통당하고 있다. 그 어리석음의 근본원인은 바로 이 몸과 마음을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데서 기인함. 어떤 대상이나 사건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내가 받고 있다 나에게 일어났다고 보는 착각에서 고통이 시작되는 것임. 고통이란 본래 없다. 고통 받을 내가 본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영원히 끝내려면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죽음>

본래 그 누구도 태어나거나 죽는 것은 없다. 본래 모두가 절대이기 때문에 영윈한 존재이다.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했던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다. 종교의 답은 영혼의 불사이며 사람에게 안정과 위안을 준다. 이는 감정적 접근이며 매신에 기반한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맹신에 기반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고는 하지 않는다. 믿음은 알지 못한 상태를 가정한다. 우리는 진리를 모르니 두려울 수 밖에없다. 우리는 신에게 생사를 맡기는 어리석음을 통해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옴과 마음을 나라고 믿어왔기 때문에 나라는 착각에 갇혀서 스스로 구속받고 있다. 이것이 진짜 나라면 내가 죽는 것은 당연히 둘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현상적으로 분명히 태어나서 죽지만 참나는 태어나거나 죽거나 하는 존재가 아니다. '현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현상적으로 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에 의해서 인식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생과 멸 사이에만 존재한다. 생과 사는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생과 사를 시간적 연기와 동시적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개념이 나오는 순간에 동시성으로 함께 나오는 것이다. 동시에 생했다 동시에 멸하는 것. -> 진리적 관점에서는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하나도 없어.

 

현상적 관점 : 쌍생쌍멸 / 진리적 관점: 불생불멸

 

 

 

<구윈>

 

 

 

창세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고 추방된 이야기. 기독교에서는 이를 인간이 하나님의 명을 어긴 원죄라고 간주함. 이 사건의 참뜻은 인간 세상에 죄라는 것이 어떻게 들어왔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죄라는 것은 인간 세상에 선과 악에 대한 시비분별이 들어와서 죄가 성립됬다는 것이다. 좋고 나쁨, 맞고 틀림의 시비 분별이 작동하면서 세상을 선악의 잣대로 구분지어 인간을 죄인으로 구되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원죄. 인간이 만든 하나님. 신의 완전성과 자기자신을 대비시킴. 신이라는 존재에게 완전히 무릅을 끓을 수 밖에. 신의 자비와 구원을 구함. 선악, 천국지옥. 인간을 신에게 구원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 스스로를 구속함.

 

 

 

선악, 지옥천국은 쌍생쌍멸의 개념. 선악, 지옥천국은 본래 없어. 선, 악은 연극 속의 배역과 같다. 악한 배역이라고해서 그 배우가 진짜로 악한 사람이 아니듯 현상세계의 다양한 모습도 연극 속의 배역과 같다. 현상적으로 착한 사람 악한사람이 인식되지만 각자 타고난 캐릭터가 다 다를 뿐 본래 선한 사람 본래 악한 사람은 없다. 절대적 관점에서는 정반대되는 선과 악의 모습조차도 통째로 하나이기에 일체가 다 진리이다. 살인행위는 선이 아니고 악이다. 개념상 그렇다. 그러나 진리이다 선이 진리면 악도 진리이기때문.

 

 

 

지금 이 모습 있는 그대로가 절대 그 자체인데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말인가?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매우 어리석은 소리. 깨닫고 나면 남이라는 것이 없다. 나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어 통째로 나다. 그러니 구원도 없다. 절대 그 자체는 창조주, 피조물, 성스러움, 속됨의 경계 자체가 없다. 그러니 구원도 없다.

 

 

 

<윤회>

 

 

선악의 개념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요즘은 윤회설이 사로잡고 있다. 

 

사람들은 전생의 업을 가지고 태어난다. 살면서 지은 선업과 악업에 따라서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영혼이 주체로서 나다. 환생. 복. 희망. 참회.

 

 

 

육체와 영혼을 진짜 나라고 착각한 상태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자신의 자유의지로 일으컸다고 믿고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하면 업이라는 개념에 매일 수밖에. 그러 면서 지금까지 형성된 선악 개념으로 시비분별을 일삼으며 윤회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함

 

 

 

석가의 무아연기설은 이런 윤회설은 허구라고 증명해준다. 

 

무아연기와 개체윤회는 공존할 수 없어.

 

육체와 영혼은 상대적 개념쌍. 동시 생멸함. 현상에서 돌고 도는 것은 연기이지 윤회가 아님.사람들이 믿고 있는 윤회는 개체가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돌아간다는 것, 연기는 전체가 통째로 끊임 없이 시차적 연기법에 의해 생멸, 이어서 도는 것임. 우주현상계에는 개체성은 없고 연기성만 있다. 

 

 

업. 윤회라는 것은 개체를 나라고 착각한 개쳬의식 상태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개념이다. 진리를 개체의식으로 상대성의 어느 한쪽에서만 보면 다 속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식이 무아연기라는 근원(전체로서 본래절대)에 있으면 윤회나 업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 

 

 

 

<시비분별>

 

 

상대세계에서는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세가지 유형의 사람.

 

1.가장 어리석은 사람. 매사 남탓만 하는 이.

 

2.조금 어리석은 사람. 매사 내탓 하는 사람.(종교적 관점, 그러면 이 세상은 평화로워져)

 

3.지혜로운 사람. 남 탓도 내탓도 아닌 연기법칙에 의해 저절로 일어난 현상으로 보는 사람.

 

 

 

주체적 자아가 없으므로 나나 상대방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거기에다 네 탓, 내 탓이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2번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지만 순수진리는 인간적인 윤리 도덕 공부가 아니다.

 

 

 

마음공부하는 곳. 시비분별이 끊어지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배움. 하지만 순수진리에서는 시비분별을 하지 않는 것은 공부의 중간단계 의식이다. 시비분별을 안하는 것과 그 근거를 없애는 것은 이 공부과정에서 경험하는 의식의 변화일 뿐. 시비 분별을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세계, 현상세계는 좋다, 나쁘다,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이 다 있다.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것이 시비 분별이 되기도 하고, 저절로 일어난 현상이기도 하다. 네가 했다는 착각하지 않고 모든 것은 연기법을 따라 저절로 펼쳐지는 것이라고 보면, 그것은 시비분별이 아닌 것이다.

 

개체의식 상태에서는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라고 구분되는데 근원으로 들어가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 절대다. 결국 시비 분별이라는 문제의 열쇠는 '누가'에 있다. 주체로서 '나'라는 개체의식이 작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시비분별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고 참아서 시비분별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비분별을 하지 않는 개체로서 내'가 있으면 그것은 시비분별인 것. 그러니 '시비분별하지 않는 나'라는 착각을 없애야 한다.

 

 

 

모든 것은 현상적으로 나투어져 보이는 것일 뿐 그것은 참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명확히 본다. 진정한 의미에세 시비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가 어떤 생각 말 행위를 하든지 거기에 대한 작용으로 어떤 생각 말 행위가 일어났든지 둘다 시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즉 시비분별하는 개체로서 내가 없는 것이다.

 

 

<자유의지>

 

현상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것 처럼 착각하지만, 이 우주 전체는 사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그 결정된 흐름으로 우주는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하 우주 안에서 하나의 티끌로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나'라고 하는 개체인데, 이 개체가 어떻게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무엇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그냥 이 전체 흐름에 더불어서 가는 것을 뿐이며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케릭터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다양한 힘에 의해서 결정되어왔다는 것은 연기 법칙을 뜻한다. 여기서 정해져 있다는 말은 누군가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다라는 의미가 아님. 절대의 동시성 차원에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예정론이 아니고 연기법칙에 의해서 저절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우주 현상세계는 전부 연결되어 전체가 하나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 현상세계는 나 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나 하나의 주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전 우주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다. 개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뭔가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한지 앞을 모를 뿐 우주는 생하는 순간 이미 정해진 자기 길을 가고 있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는 유전적으로 주어진 유전자, 그리고 태어나 살아가면서 환경과 교육 등을 통해서 축적된 정보, 이런 것들이 마치 컴퓨터처럼 뇌에서 작용하여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가장 알맞은 생각과 말과 행위로 변환될 뿐이다. 현대과학,생각과 말과 행위 그 모든 것은 1조가 넘는 뇌의 종합적인 연기 현상의 작용으로 판단하고 결정되고 일어난다. 붓다의 무아연기론을 뒷받침해준다. 우주를 하나의 몸으로 생각하고 나 인간은 그 몸의 간세포 하나이다. 간세포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자유의지로 독소를 분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세포에게 주어진 캐릭터로서의 역활이다. 하는 일이 제각각이지만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마음과 몸은 한 쌍의 개념. 쌍생쌍멸하는 개념이다.

그런데오늘날 정신세계에서 마음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혼동된 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라 하며, 마음이 주체인 것 처럼 말하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를 깨달음이라고 한다. [본래 더러운 것은 없다. 다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항상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려야한다고 말한다. 약수를 마셨든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셨든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항상 마음이 여여하게 => 마음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연기적으로 변할 뿐. 그런데 그 마음을 왜 한결같이 만들어야 하는가? 순수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을 다스릴 이유가 없다.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마음은 상황에 따라 연기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진리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려도 현상적 개체가 여여할 수는 없다. 이 현상적 존재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다. 여여한 것은 오직 절대뿐.

 

 

 

육조단경. 혜능의 깃발.

 

주체에 관한 것. 깃발. 바람. 마음.

주체라는 것은 변합없이 존재해야한다. 연기적으로 변화와 생멸을 거듭하는 현상적 상대개념인 마음은 주체가 될 수 없다. 절대의 관점에서 보면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모든 것은 연기법칙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서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인식하는 모든 과정에 주체는 없다. 

 

 

 

<인생>

 

 

인간중심주의, 인간, 동물, 생물, 무생물 모두 그 근원은 모두가 같다는 것이다. 드러난 모습은 다르지만 기본입자는 원자다. 그런데 인간은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아주 심각하게 삶을 고민하며 인생이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 처럼 살아간다.

 

우주를 연구하면 할 수록 우주라는 것은 어떤 의미, 이유, 목적 없음을 의미한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안의 인간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을 비롯한 그 모든 것은 절대가 펼쳐낸 현상적 존재일 뿐이다. 

 

현상적 존재인 인간은 우주 현상계 안에서 투영된 개체 하나를 나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꼼짝없이 우주 현상계가 품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 안에 메이게 된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과 공간적으로 여기 저기라는 개념을 정해놓고 그 방식대로 이해한다. 절대차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는 물론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필요에 의해서 개념화하고 인식하도록 한 것이지만 의식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개념의 작용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인생이 보내 있는 것처럼 믿고 확신하고 살아가다. 꿈속의 시간과 공간은 실재하지 않아. 우리가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이 상태가 바로 절대가 의식화되어 꾸는 꿈이다.

 

 

의식수준에 따라 현상세계를 보는 관점

 

1. 창조론 즉 점진론: 이 세상은 각자 자기가 믿는 신념대로 창조되었고 점진적으로 진화 발전하며 계속 변화하면서 펼쳐지다가 언젠가는 끝난다. 

 

2. 동시론: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이 세상도 존재한다.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의식이 인지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동시론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이 있을 때에만 이 우주도 있는 것. 내가 인식할 때에만 이 우주라는 것도 나타난다. 이 육체가 태어나서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태어나는 것은 오직 의식이다. 참나인 절대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에 이 우주 전체가 통째로 오직 하나의 의식으로 투영된다. 이 세상의 다양한 만물이 결국은 전부 하나의 의식이다.

3. 무인론: 이 세상은 창조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도 태어난 적이 없다. 곧 무아론이다. 무인론은 초점을 우주 현상계에 둔것이고 무아론은 개체에 둔것이다. 나라고 생각했던 이것은 실체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적으로 무인론과 무아론이 맞다. 이 세상은 창조된 적도 없고 나라는 것은 태어난 적도 없으니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3장.깨달음의 착각에서 벗어나자.

 

 

 

<성불>

 

 

 

내가 열심히 갈고 닦아서 부처를 이룬다는 뜻. 성불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건 누구인가? 바로 개체인 '나'다. 해탈도 마찬가지. 진짜 진리는 나라늗 것은 본래없다는 것, 본래무아이다. 내가 열심히 수행해서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성불할 내가 없는 것이다. 깨달음은 개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본래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며, 성불할 해탈할 주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구도자들은 본래무아의 참뜻을 모르기에, 자기는 욕심과 집착이 가득한 어리석은 중생이기 때문에 그런 나를 죽이고 버리고 없애서 오점없는 휼륭한 자아완성자를 만들려 함. 어디에도 걸림 없는 여여한 모습의 자기를 만들려고 한다. 그것이 해탈, 성불하는 방법으리고 생각함. 

 

 

 

내가 열심히 버리고 비우고 죽이고 내려놓아서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업다. 깨달을 사람도 없고 깨닫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깨달음도 없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개체적 자아의 완전한 포기이다. 순수진리 공부가 그래서 어렵다. 열심히 갈고 닦아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

 

 

 

<본래무일물>

 

무아는 '나는 없다'이지 '나를 없애자'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공을 깨달음으로 본다.본래무일물도 절대를 깨달으면 분리의식의 반쪽임을 알게 됨.오늘날 한국불교는 공사상에 완전히 빠져 있다. 왜 한국 불교의 엄청난 근기의 수행자들이 깨닫지 못하는가? 절대륻 공으로 보기 때문. 절대는 무의 텅빈상태가 아님 색과 공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성이다. 깨달음은 본래무일물이 아니라 본래절대임.

 

 

 

<우주의식>

 

 

온갖 영적체험. 중요한 것은 그 체험을 누가 했는가?임. 나라는 개체가 우주라는 본체와 합일했다고 표현한다. 우주가 된 내가 있다는 것 이점이 잘 못 된 것. 개체의식이 도달할 수있는 최고의 상태가 우주의식이다. 나는 우주 전체다. 이것은 엄청난 에고다. 깨달음은 그 우주 의식 조차도 벗어나는 것. 깨달음은 틀이 없다.

 

 

 

<범아일여>

 

 

 

아트만이 브라만과 합일. 브라만 아트만이 별개의 실체.

 

참나인 절대를 육체를 초월한 신성하고 영적인 상태로 오해. 기독교의 절대자 하나님.

 

4장. 구속은 없다

 

<나는 자유다>

 

너는 본래 자유다

너를 구속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영원하고 무한한 절대다

너는 자유 그 자체다

 

위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지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걸리고, 일상생활에 갇혀 있는 삶의 연속이다.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착각으로 인해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내가 했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행위와그 결과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진다. 이러한 어리석음이 구속이다. 

 

개체가 자유롭기를 꿈꾸지 마라. 그건 불가능하다. 개체에는 본래 자유가 없다. 나의 원함과 무관하게 각자에게 주어진 각본만 있을 뿐 그 각본대로 펼쳐져 가는 것이다. 희노애락의 쌍곡선을 그려가며 그렇게 펼쳐질 뿐이다.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가는 것이다. 그 구속에서 벗어남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어리석게 현상적 캐릭터가 자유인이 되기를 꿈꾼다.

 

그럼에도 모든 스승이'너는 본래 구속이 없다. 너는 본래 자유다'라고 하는 것은 개체가 아닌 참나인 절대를 말함이다. 지금 얽어매고 있는 수없이 많은 구속과 조건들은 내가 본래절대라는 것을 아는 순간, 더 이상 구속이 아니다. 개체는 구속된 것 처럼 보이지만 절대는 구속된 적이 없다. 나는 한순간도 개체인 적이 없었다. 구속된 적이 없는데 무슨 자유를 찾는가?

 

우주 현상계 자체가 개념이므로 그 개념으로 이루어진 우주 현상계에서 지금 벌어지는 구속은 개념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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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유인

 

대자유인은

너와 나의 분별이 없고

옳다 그르다 시비가 없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지

세상사 크고 작은 모든 일이

한 찰나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거품이니

마음에 흔적조차 없네

오고 감이 없으니

발자국 남지 않는 발검음으로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니

그야말로 대자유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