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백_일홍 2022. 12. 25. 15:34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with 동의보감 & 숫타니파

 

고미숙

책머리에

<동의보감>과 <숫타니파타> 두 개의 고전을 교차하면서 삶과 문명의 지도를 다시 그려 보고 싶었다. 7

전자가 몸에서 자연으로 이어지는 경로라면, 후자는 마음에서 우주로 연결되는 행로다.... 물론 몸에서 자연으로 가는 여행, 마음에서 우주로 가는 여행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정와 스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온전히 물질이고, 온전히 영혼"이기 때문이다. 8


첫번째 강의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1.우리는 무엇을 모르는가? 
우리는 알지 못하면 살 수가 없죠. 매이매일 무언가를 배워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아는 만큼의 힘으로 사는 거예요.... 동물이나 벌래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 뭘 배워야 먹고 살잖아요. 그렇다면 생명과 앎은 분리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죠. 아주 중요한 테제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앎을 향한 운동, 그래서 이걸 포기하고 외부의 기준에 맟춰 버리면 소외의 연속이 되는 거죠. 19

우리 인생 또한 무지와 소외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왜 노동과 화폐에 바치는가? 내 삶에 대한 탐구는 대체 언제 하는 건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때죠. 

요즘이 청년들이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말을 이상적으로 하더라구요. 청년기에 이미 그런 경지(?)에 도달한 거죠. '이렇게 노동과 화폐를 위해 사는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허무주의가 엄습한 겁니다. 

이게 바로 그 동안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너무 멀었기'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나의 본성, 나의 생명력이 뭔지를 몰랐던 거고요. 우리 몸은 일단 생명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당연히 생명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합니다. 보편적인 생명의 네트워크에서 우리가 태어나고 산다는 것의 의미와 방향을 탐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명에 대한 탐구를 해야 내가 외부에서 강요된 척도들을 대책없이 따라가는 소외의 질주를 멈출 수 있게 됩니다. 22

자기를 탐구한다는 것.
그래서 이런 외적 조건에 목을 매고 그것을 '자기'라고 착각하면 내 몸은 완전히 소외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단 그것부터 자각하게 되면 내 몸이 자연이고, 내 마음이 우주라는 앎의 지평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지평선 위를 한 스텝 한스텝 가다 보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자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요. 26

낮밤이 위바뀌게 되고, 낮에는 소외와 스트레스, 밤에는 충동과 흥분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당연히 면역력이 떨어지겠죠? 이런 왜곡된 리듬을 바로 잡으려면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낮에는 활기 있게, 밤에는 평안하게.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기의몸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몸의 토대인 생명과 자연에 대한 앎의 비전을 가져야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안의 자연성이 회복되면서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삶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거죠. 그러면 예기치 않은 재난이나 고난에 처하더라도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29

욕망과 거리두기.
그런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비전은 '욕망과의 거리두기'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욕과 식욕과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모든 관광, 쇼핑, 이벤트, 이런 평범해 보이는 욕망의 밑바닥에 다 그게 있는 거죠. 예. 야생동물을 먹는 것. 
일단 욕망과의 거리두기를 할 수 있으면 몸과 생명, 마음과 우주의 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어요. 그런 식의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인류의 문명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32

2.동의보감과 숫타니파타: 존재와 우주에 대한 탐구

욕망과의 거리두기를 하려면 생명, 자연에 대한 탐구가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생명, 자연, 우주에 대한 탐구는 결국 시간과 공간 즉 '시공'에 대한 탐구입니다. 

불교에서 명상의 깊은 경지로 들어가면 시공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왜냐? 시간이나 공간도 다 인간의 의식이 창조해 낸 것이라는 거죠. 그야말로 오묘하고 미묘한 세계예요. 그래서 이런 세계를 탐구하다 보면 무한한 지평선이 열립니다. 그런 탐구가 내 삶의 비전이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식의 일상을 살게 됩니다. 노동과 화폐가 주는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거죠. 바로 그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셔야 합니다. 35

<동의보감>, 양생의 기예

먹고살 만한데 타인들과 연결되지 않는 것, 그 마음이 우울증이거든요. 인간에게는 마음의 연결이 정말 중요합니다. 마음은 전 우주의 파동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 파동을 각자의 몸에 내재하고 태어난 거예요. 우주 전체와 연결되는 그 마음정조가 없다면 절대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하에서 자기를 완전 고립시켜 놓고 남들을 이기려는 마음으로만 살게 되면 늘 조급하고 각박해집니다. 41

불교, 마음의 과학

부모가 사랑을 표현할수록 숨이 막힌다는 청년도 많아요. 그건 생명활동이 아니예요. 우리가 가족관계로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일종의 출발지에 있는 베이스캠프 같은 거예요. 우리는 전 우주적인 존재로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태어나는데, 일단 가족이라는 베이스캠프에서 시작하는 거죠. 거기서 성장하고 힘을 키운 다음엔 각자의 길로 가야 합니다. 44

<동의보감>을 통해서는 우리 몸과의 소통을, <숫타니파타>를 통해서는 마음의 심연을 탐사하는 시간을 갓도록 하겠습니다. 

<동의보감>, 사람의 몸이 천지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 몸의 모든 형색과 현상들은 다 자연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겁니다. 

모발을 풀과 나무에 비유하고 있죠. 그럼 풀과 나무가 잘 자라려면 어떻게 애햐 할까요? 땅이 두텁고 물이 잘 공급이 되어야죠. 거럼 머리숲이 풍성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머리까지 물이 공급되어야겠죠. 우리 몸에서 진액의 공급과 유통은 신장이 주관합니다. 그러니 신장이 건강해야 머리털이 풍성하고 윤기가 나겠죠. 54



두번째 강의: 청년의 파토스, 노년의 로고스

1.<동의보감>, 노년의 로고스

동아시아 고대 경전인 <황제내경>
복희씨, 그물을 만든 분
신농씨, 온갖 식물을 다 먹어 보고 독과 약을 구별했다고 하는 농사의 신 같은 인물
황제 헌원씨, 수래와 배를 만듬. 67

2.청년의 파토스, <숫타니파타>
붓다는 청년이다.

다른 종교들은 보통 신, 즉 초월자나 절대자를 상정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네 인간과의 분리된 존재입니다. 인간과 절대자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매달려야 하죠. 온갖 의례와 종교의식 등이 필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에요. 그러니까 종교를 넘어선 종교, 종교를 전복한 종교라고 할 수 있죠.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인간의 내적인 힘을 통해서 자기를 해방하는 종교인 거죠. 

붓다의 가르침은 존재와 세계, 마음과 우주의 다르마를 깨달아서 자신을 묶고 있는 온갖 사슬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92

정리.
동의보감은 생리를 통해서 심리와 윤리의 삼중주를 추구하는 양생술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불교의 핵심은 마음과 우주와 수행의 삼중주인데, 수행을 하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굴레와 멍에로부터 벗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공부는 함께 하는 것.
그래서 주변에 늘 스승과 벗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병증과 결함을 알아채고 질책해 주는! 그게 바로 공동체고 네트워크입니다. 그러니 꼭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삶의 비전을 공유하는 스승과 벗이 잇는가? 아니라면 당장 그 관계망을 향해 나아가셔야 합니다. 102



세번째 강의, 정기신과 탐진치(1): 생명과 존재의 근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충만함.

서양이 주로 유일신이나 초월자에 의존하는 데 반해 동양에서는 자연의 신성함과 우주적 전체성이 다 내 안에 있다고 봅니다. <동의보감>이 몸과 자연의 대칭성에 주목한다면, 불교는 마음과 우주의 활발한 상호의존성을 주시합니다. 우리의 몸은 아주 제한적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전 우주와 온전히 공명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이렇게 마음에서 우주로 연결되는 그 통로를 열어서 '스스로 붓다가 돼라'는 겁니다. 119

붓다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존재한테는 오직 '중생을 구함'이라는 행위만 있는 거죠. 그러니까 뭘 희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충분하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존재의 생을 도운 거예요. ... 그러니까 진정한 이타심은 자기포기가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을 표현하는 셈입니다. 121

탐진치, 괴로움의 근원

불교는 생로병사를 다 고라고 해석한다고 했죠. 그럼 이 괴로움의 시작이자 원천은 무엇일까요? 바로 탐진치, 삼독이 그것입니다. <동의보감>의 정기신은 윤리적 평가가 들어 있지 않은 개념이죠. 생리와 물리 법칙과 관련된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기신은 조화롭게 작용하지 않아요. 정은 정대로 넘치고, 기는 기대로 막 치달리고, 신은 무명의 늪에서 어후적 거립니다. 늘 넘치거나 모자랍니다. 그래서 늘 질병과 번뇌에 시달리는 거고요. 불교에서도 인간은 이미 이렇게 다 어그러지고 치우친 채로 태어난다고 봅니다. 그걸 심리 혹은 묙망의 차원에서 접근해 보면 탐진치가 핵심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기 위해서는 욕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 자기를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 세계와 접속하고자 하는 욕망 등등. 문제는 이 욕망이 자아에 갇히면서 말할 수 없이 왜곡, 변형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생명활동이 괴로움의 연속이 되는 거죠. 129

탐욕과 갈애는 정기신에서 정이 넘치거나 모자랄 때 더욱 심해집니다. 당연히 성욕과 식욕이 그 밑바탕에 있습니다. 130



네번재 강의, 정기신과 탐진치(2): 업장과 윤회의 원천

1.욕망을 다스리고 정을 보존하라
<동의보감>은 생명과 존재의 원천을 정기신이라고 본다고 했죠. 정기신은 자연철학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우주를 움직이는 게 기고, 기가 나누어지면 음양으로 분화되고, 이 음양이 다시 오행으로 분화되는데, 이런 자연의 기운이 우링 몸에 들어오면 정기신으로 재구성됩니다. 정은 질료 혹은 기름, 기는 에너지 혹은 엔진, 신은 무형의 정신활동 혹은 내비게이션, 이렇게 작용합니다. 

이 정기신이 우리 몸 속에서 순환을 하면서 생명활동이 벌어지는데요. 이 순환과 활동은 원초적으로 불균형을 야기합니다. 그래서 이걸 잘 조율해서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양생의 핵심입니다. 

불교도 <동의보감>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을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노병사를 거칠 수밖에 없는데, 그노병사의 출발은 생이니까 결국 생로병사가 다 괴로움이라는 것이죠. 

양생이건 해탈이건, 신선이건 붓다건,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아간다는 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몸의 차원에서, 불교는 마음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고요. 145

정, 에로스의 원천.
양생의 대원칙도 '정을 잘 보존하고조절하라'가 첫번째입니다. 146

"또 모든 사람은 정의 총량을 타고 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게 다 고갈되면 더 이상 생명활동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거예요. 절제. 147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의 시원인 박쥐, 천산갑, 이런 거죠. 정력에 좋다는 온갖 야생동물을 다 잡아먹죠. 이렇게 보면 펜데믹과 기후재앙의 원천에 바로 이 정력에 대한 집착이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152

기혈이 사람의 몸을 만드는데 그걸 바탕으로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일어난다는 거죠. 근데 기는 양이니까 주로 발산하려 할 거고 혈은 음이니까 자꾸 뭉치려고 해요. 여성은 음기를 주로 쓰기 때문에 혈병도 많고 뭉쳐서 생기는 병도 많습니다. 자궁근종, 위암, 유방 질환 등등, 그럼, 여성의 음혈은 왜 순환이 잘 안 되는가? 그건 감정문제랑 깊은 연관이 있어요. 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죠. 감정을 머무르고 맺히게 하는 경향성이 강한 겁니다. 일단 어떤 사건을 대할 때 굉장히 부정적으로 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이 남성한테는 그냥 지나가는 일인데, 여성한테는 상처가 되는 경우가 많죠. 이런 거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른 기운을 쓰는 데서 오는 건데요. 일단 이런 원리를 알아야 소통과 조율을 할 수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몸과 기운이 똑같다고 전제하면 소통은 커녕 적대와 형오만 커질 뿐입니다. 153

미셀 푸코의 말 인용, 162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혁명은 성혁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혁명을 제대로 수행해 낸다면 인류는 비로소 깨달음의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163

3.신, 삶의 지도를 그리는 정신활동

정기신을 주관하는 건 심장. 심장은 '군주지관'이라고 하는데, 동의 보감에서는 삶 전체의 지도를 그리는 정신활동이 여기서 일어난닥 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뇌에 관한 많은 비밀이 풀리고 있는데, 생각과 인식을 주관하는 게 뇌인 건 맞습니다. 일단 뇌가 잘 운동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기신이 활발하게 순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뇌의 문제를 뇌 홀로 담당하는 게 아닌 거죠. 솔직히 우리가 컨디션만 좀 안 좋아도 감정이나 기억이 상당한 타격이 일어나잖아요? 그게 바로 뇌가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가장 단순한 증거죠. 아울러 뇌만으로 마음의 활동이 다 해석되지는 않아요. 마음의 영역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넓고 큽니다. 생명활동과 연관된 무형의 파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실 온 우주와 연결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안과 밖을 소통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식의 인식과 지도를 주관하는 것이 심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178



다섯번째 강의: 칠정을 조율하라, 감관을 수호하라

기쁨은 감정의 속성 자체가 흩어지는 거라서 슬픔과 분노와는 좀 다릅니다. 오래 끌고 갈 수가 없어요. 그런 상태를 지속하고 싶으면 더더욱 강도를 높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중독이 되는 거죠. 이 회로를 타면 큰일납니다. 기쁨은 원래 몸을 릴랙스해 주는 감정인데, 이렇게 중독이 되면 '쾌락'이리고 부르죠. 그때부턴 정기신을 엄청나게 소모하게 됩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역시 지나가게 하면 됩니다. 기쁨에 붙들려 있으면 슬픔이나 외로움을 견디는 게 더 어렵습니다. 197
마음의 행로를 탐구하라.
그런데 사실 <동의보감>을 포함한 중화문명권에는 감정에 대한 정교한 탐구는 부족한 편입니다.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음양오행에서 육십갑자, 오운육기 등으로 이어지는 굉장히 정교한 논리체계가 있지만, 마음을 미세하게 분석하는 건 불교가 압도적이죠. 199

불교는 일찌감치 소위 감각, 감정에서 의식, 무의식의 심층까지 탐구했던 겁니다. 의식의 저변 정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윤회를 거쳐 오면서 누적된 미세한 정보들까지 총망하고 있죠. 프로이트를 비롯한 서양심리학이 마음을 개체적 자아 안에 있는 심리적 행로로 한정한다면, 불교의 마음은 온 우주에 흘려넘치는 의식 혹은 정보의 파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행로를 추적하다 보면 우주의 모든 현상과 마주치게 됩니다. 마음에서 우주로 가는 여행이 시작되는 거죠. 200

2.칠정의 조율과 양생
<동의보감>은 희로우사비공경, 칠정이 질병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감정 자체는 죄가 없습니다. 살아가는 데 다 필요한 것들이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머무르지 않고 흐르면 돼요. 196

하루의 금기와 평생의 금기.
감정훈련을 위한 기본 지침이 있을까요? <동의보감>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메뉴얼입니다. 
"섭생을 잘 하려는 사람은 하루와 한 달의 금기를 어기지 말고 일 년 사계절에 맟춰 살아야만 한다. 하루의 금기는 저녁에 포식하지 않는 것이고, 한 달의 금기는 그믐에 만취하지 않는 것이고, 일 년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여행하지 않는 것이고, 평생의 금기는 밤에 불을 켜고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 203

2.감관의 수호와 청정함

청각. 
그래서인지 정작 자연의 소리,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습니다. 대화의 능력, 스토리텔링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있는 거죠. 귀는 신장의 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죠. 청각이 이렇게 편향되면 정의 소모로 인한 다양한 병증이 일어나게 됩니다. 212

그런데 여기 함정이 하나 있어요. 내가 어떤 것을 즐거워하면 그게 아는 것들은 괴로움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집착과 혐오는 동시적인 것입니다. 217

바라문의 타락.
해탈이나 열반, 이런 표현은 왠지 좀 고원하고 아득한 느낌이 있어요. 영겁의 시간 동안 구도를 해야만 가능할 거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 반전이 있습니다. 그 출발은 실로 단순명료해요. 감각기관을 길들이고 제어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구축된 감정들, 감각적 정보를 바탕으로 한 온갖 명분과 가치들이 세상만사를 다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219



여섯번째 강의, 몸, 타자들이 공동체 vs 나는 '내'가 아니다!

1.사대오온이 다 공하다? 
지수화풍, 색수상행식
연기적 조건에 따라 생성소멸하는 과정, 그 프로세스 자체가 공입니다. 235

만약 '비어있다'라고 하면 공을 '비어 있는 상태'라고 고정시켜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공 자체가 다시 실체화되어 버리죠. 이게 언어가 부리는 마술이예요. 언어는 우주의 파동을 다 고정시켜서 입자화한 것이거든요. 양자역학에서 입자는 주관과 객관이 마주쳐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원래 전자는 파동으로 존재하는데, 관찰자 즉 주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그 파동이 순식간에 입자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동시성 같은 것이죠.... 양자역학에 갔더니 입자를 쪼개고 쪼개서 최소단위까지 쪼갰지만, 고정된 입자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쿼크라고 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쿼크 자체가 요동을 치는 흐름인 겁니다. 이 흐름이 입자로 구성되려면 관찰주체가 있어야 하는 거죠. 주체가 어느 입장,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입자가 결정되는 겁니다. 양자역학의 원리를 알면 알수록 신비롭지만, 일단 이 사실만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요. 크리슈나무르티와 데이비드 봄이 말한 바,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하나다'라는 테제는 '마음과 우주가 하나다'라는 다르마로 이어질 수 있고, '실체가 따로 없다'는 논리는 연기법과 공으로 통한다고 할 수 있죠. 237

색수상행식, 이런 식으로 인간이 마음활동을 하고 살아간다고 본 거예요. 문제는 이것들은 기본적ㅇ로 다 꿈이자 환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내 눈앞에 리얼한 세계가 있는데 왜 없다고 하지?' '이게 가짜라고? 미친 거 아냐?' 등등. 서양철학사, 과학사가 그렇게 세상을 파악해 왔고 우리도 20세기 내내 '주객 이원론', '물질의 합법칙성', '변증법적 발전' 등을 수도 없이 들어 왔기 때문에 그런 식의 사유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맞아, 세상만사 다 마음먹기 달렸잖아', 이런 수준으로 퉁치고 넘어갑니다. ... 하지만 이런 수준에서 불교를 이해하시면 안 되고, 시선을 훨씬 더 깊이, 그리고 광대무변학 확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 입문하려면 의학은 물론이고 물리학, 양자역학, 생물학, 철학과 종교학 등 전 분야의 지식과 접속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총체적 지성이 필요한 겁니다. 239

2.몸, 타자들의 공동체

내안의 타자(1) _ 꿈.
<동의보감>의 꿈 해석은  아주 심플한데요. 간심비폐신이 목화토금수, 오행의 기운에 다 배속되니까 그것과 연결해서 꿈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이 안 좋으면, 간이 목에 해당하니까, 숲이나 나무와 관련된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242

프로이트, 꿈의 해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서양인들한테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 비극의 온상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죄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강렬햇던 것 같고요. 아담과 원죄라는 이야기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거죠. 생성과 창조보다는 부정과 파괴, 상실과 허무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렬한 겁니다. 인류학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런 배경에서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했고 그게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문제는 가족의 문제고 돌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 가족은 정말 너무나도 숨막히는 공간이 되어 버렸어요. 저는 이 가족, 스위트 홈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가족이 구원된다고 생각합니다. 68혁명 이후 서양에서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있었어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쓴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이 대표적인데, 이 책에 바로 가족으로 환원되는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분열분석이라는 새로운 모험과 시도가 등장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적 판타지이 역동적인 현장인데, 그걸 왜 가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느냐고 따지는 거죠. 244

내 안의 타자(2)_목소리와 언어.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목소리를 정직하고 정확하고 투명하게 내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뼈도 튼튼해집니다. 당연히 허리도 곧추설 테고 그러면 당연히 사람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인복이죠. 무슨 일이든 인복이 있으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감이당에서는 낭송이나 암송, 그리고 연극이라든가 요가같이 신체를 같이 움직이면서 하는 공부법을 많이 개발했어요. 248

그래서 <동의보감>에서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가 병증을 진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을 계속하면 그건 지금 어디가 아픈 거예요. 계속 욕을 하고 있다면, 그건 심장이 뜨거운 겁니다. 젊었을 때 조용하게 살았던 할머니가 나이 들어서 하루종일 남편 욕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그건 정기신이 소모되면서 그동안 쌓인 울화가 과격하게 치솟는 것이죠. 249

3.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불교는 이 문제를 궁극의 영역까지 밀고 갑니다. 결론은? '무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입니다. 254

그럼 변하지 않는 나, 영원히 존재하는 나는 무엇일까요? 내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죽은 다음에는 몸이 해체되니까 거기에 의탁해 잇던 정신작용도 같이 해체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영혼이 잇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걸 확인할 수가 없는 거죠. 아무튼 이야기할수록 헷갈립니다. ... 분명한 건 나의 고유성, 동일성, 지속성을 보증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256

윤회, 끝나지 않는 죽음

그래서 신구의 삼업을 닦는 공부는 어차피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는 그걸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어차피 해야 되는 공부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이번 생에 다 못해도 괜찮구나, 라는 여유가 생겨요. 다음 생에 또 하면 되잖아요. 261

이런 태도를 적극 계발한 것이 티베트불교의 환생 개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회가 무명 속에서 끝없는 죽음을 되풀이 하는 거라면 환생은 다음 생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끌려오는 게 아니라, 기꺼이 이 생으로 되돌아 오는 거죠. 262

부처님의 발바닥.
명리학이나 음양오행을 함께 보면 우리 몸이 태어날 때 태과불급으로 세팅이 되니까, 생각을 외곬으로 한다든지, 말을 제멋대로 막 한다든지, 이런 괴로움을 안고 태어나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태과불급의 몸이 아니라 서른 두가지 호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263



일곱번째 강의, 음양오행론과 연기법

자연의 운행과 음양오행
동양에서는 자연의 운행을 관찰하여 물리적 법칙으로 세팅한 다음 그 원리를 오랫동안 정치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사용을 햇습니다. 그걸 음양오행론이라고 합니다. 음과 양은 원소나 요소가 아니라 파동 혹은 운동의 흐름이죠. 두 기운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상태가 태극인데, 태극이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음양으로 나뉘고, 그 음양의 기운이 다시 오행, 즉 목화토금수로 분화디는 겁니다. 이 오행으로 우주의 모든 질서를 설명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가 바로 그렇습니다. 봄은 목, 여름은 화, 가을은 금, 겨울은 수에 배속되는데요. 봄여름은 양의 기운인 목과 화, 가을겨울은 음이 기운인 금과 수에 대응하는 거죠. 봄여름은 발산하고 가을겨울은 수렴하고, 이런 식으로 변화해 간다는 겁니다. 그럼 토는 어디에 있죠? 봄여름에서 가을겨울로 넘어가는 중간에 그 두 개의 기운에 매개하거나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발산에서 수렴은 천지의 기운이 방향을 거구로 바꾸는 것이어서 조정 국면이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이게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찾아 낸 물리적 법칙이예요. 

이런 오행의 원리는 오장육부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데요. 봄의 기운을 가진 목은 간담의 기운과 상응합니다. 생리뿐 아니라 감정도 그렇죠. 목에 해당하는 감정은 분노죠. 
여름의 기운 - 화, 심장과 소장.
토 - 비위(비장과 위장)
가을의 기운 - 금, 폐와 대장
*금화교역: 여름의 화가 가을의 금으로 변화는 것. 이건 일종의 혁명에 해당함. 발산하는 힘이 정반대의 힘으로 바뀌니까 천지의 기운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 
겨울의 기운 - 수, 신장과 방광

상생과 상극, 그 어울림과 맞섬. 
봄이 되면, 나무의 기운이 땅의 기운을 뚫어야 하는 겁니다.(목극토). 나무랑 훍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이대로 살자, 이러면 씨가 흐믈흐물해서 솟아나지를 못해요. 싹이트고 자라려만 땅을 뚫어야 하는 겁니다. 

나무는 늘 불에 탈 준비가 되어 있잖아요. 연소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불이 붙으면 형체가 바뀌어 버리잖아요. 글너데 불은 목이 그러건 말건 자기의 길을 가는 거죠. 불꽃이 자기가 태워버린 나무를 그리워하고 그러지 않습니다.(목생화)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자연에는 사계절이 있고 열두 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달은 반씩 나누면 24절기가 되고 그걸 다시 5일 단위로 나누면 72절후가 됩니다. 그리고 또 간지가 있죠. 천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10개)
지간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12개)
이렇게 10개(5개)와 12개의 기호가 짝을 지어 흐르면 60번째에서 한 바퀴를 다 돌게 되죠. 그래서 60번 돌아간 걸 '환갑'이라고 하는데, '갑(자)이 돌아온다'라는 뜻입니다. 이게 동아시아 문명의 역법입니다. 277

<주역>이 '주역하는' 까닭?
<주역>의 체계와 음양오행론이 분회되어서 따로 발전했다는 점. 동아시아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이 <주역>이다. 279

<주역>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건에 대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점성술이에요. 어떤 문명권이든 인류의 지성과 영성은 점성술로부터 시작합니다. 늘 천지를 관찰하고 동시에 마음의 심연을 탐사하면서 과거와 미래,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정신활동을 계발했던 것. 280

중화문명권의 기본 사상은 유교와 도교라 할 수 있는데, 유교와 도교의 원천은 공히 <주역>입니다. 

음양오행론과 <주역>은 앎의 체계가 달라요. 음양에서 출발하는 건 동일한데, 음양호행론이 음양에서 오행으로 간다면, <주역>은 음양에서 사상으로 갑니다. 태양, 소양, 태음, 소음. 거기서 한 단계 더 가면 8패가 되죠. 건,태,리,진,손,감,간,곤 이라고 하는 기운이 등장하는데, 이 여덟 가지가 우주 생성의 기본이라는 겁니다. 하늘, 땅, 물, 불, 번개, 바람, 솓아남, 푹파임(연못). 이렇게 8괘가 형성되면 창조의 기본 세팅이 이루어진 거죠. 그다음엔 이 8괘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납니다. 64괘가 됨. 천지의 모든 운행, 모든 사건들의 스텝이라고 할 수 있죠. 세상만사 모든 것이 이 알고리즘 안에서 움직입니다. 인간도 이 시공간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이 겪게 되는 사건들도 이 64괘의 프로세스를 통과한다는 것, 이것이 <주역>의 연기법이죠. 283

2.연기법, 마음과 우주의 상호작용

무명과 윤회.
생명이 탄생하려면 정자랑 난자가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신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정자, 난자 안에 들어 있나요? 있다면 어떻게? 정자, 난자는 분명 물질적 요소잖아요. 그럼 이 물질적 결합에서 어떻게 그토록 어마어마한 정신활동이 나올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우주가 다 의식이라고 하는 '양자의학'Quantum Medicine이 있더라구요. 그 이식의 파동이나 흐름이 결합을 해야 생명의 탄생이 가능하라 수 잇다는 거죠. 295

고에서 해방되려면?
12지 연기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무명에 대한 해석.
"무명에서 탐착을 없애면 무명은 남김없이 사라진다..." 298

유튜브에서 네팔에서 한 제자가 자기 스승의 환생자를 찾아 다니는 다큐(<환상을 찾아서>)를 보고 가슴이 뭉클했던 적이 있어요. 299

우리의 입장에서는 윤회를 벗어나는 건 고사하고 탐진치를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만 있어도 좋겠죠. 그러기 위해선 매일매일 우리 뇌에 새롭고 신선한 지식을 공급하고, 새로운 사유를 창안해 내고, 말을 산만하게 하지 않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글 쓰기 말고 생각과 언어를 바꿀 수 있는 훈련이 없어요. 글을 쓰면 발표를 해야 하고 발표하면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언어를 훈련할 때 비로소 마음의 장을 바꾸고 삶의 동선을 바꿀 수 있습니다. 301



여덟번째 강의, 수승화강과 니르바나
음허화동.
불의 기운이 언제나 넘친다.
그러다 보니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대가로 우리는 자신이 왜 이러고 사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원래 출발했던, 생명과 존재의 베이스인 자연과 우주를 망각하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거죠. 320



아홉번째 강의, 사주팔자와 카르마

사주팔자는 내가 태어난 연/월/일/시를 갑자력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렇게 여덟 글자를 가지고 오행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겁니다. 

사주팔자의 동그라미는 가장 먼저 그 사람의 오장육부를 표현합니다. 일간이 무토잖아요. 이러면 이 사람은 비위의 활동성이 아주 강합니다. ... 그런 식의 기초적 해것을 바탕으로 나머지 일곱 글자와의 관계를 읽어 내면 체질적 특징 및 정신적 지향성, 그리고 욕망의 패턴이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결국 운명의 토대는 내 몸이라는 겁니다. 353

자가 필자를 구하는 것은 자기뿐
명리학에는 타고난 팔자를 바꾸기 위한 용신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용신은 말 그대로 정신, 마음을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몸에 들어붙어 있는 심리적 구조, 감정이나 욕망의 패턴이 있잖아요. 이걸 잘 제어하고 변환하면 더 심층에 있는 무형의 잠재력이 작용하게 되고, 그때의 마음은 전 우주와 연결된다는 이치입니다.  예. 헬렌켈러

팔자 자체의 구조적 외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부모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용신을 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그런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내부, 내적인 역량을 바꾼다는 의미가 있죠. 핵심은 선업과 수행, 두 가지죠. 자아에서 벗어나 외부와 공명하는 장을 더더욱 넓혀 가는 것이 선업이라면, 자신의 운명을 그 자체로 충만하다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수행이죠. 

운명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스텝.
어떤 인간이든, 언제 어디서 태어나든 인간으로 태어나는 한 이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닥 보는 겁니다. 왜냐면, 자연이 음양오행으로 순환하는 한 그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활동도 극 범주 안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 비겁 - 자존감 - 형제, 동료
. 식상 - 내가 세상에 내놓는 활동, 에너지, 소질, 끼, 식욕, 성욕 (여성에게는 자식)
. 재성 - 구성력, 뭘 하든 잘 해낸다는 것. 일복, 돈, (남성에게는 부인과 아버지, 여성에게는 아버지)
. 관성 - 책임감, 리더십, 통솔력.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끌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여성에게는 남편, 남성에게는 자식운)
. 인성 - 통찰력, 나를 근원적인 것으로 인도하는 것, 내적 통찰, 공부, 지혜 (엄마)

이렇게 명리학은 인간이 밟아야 할 삶의 가장 중요한 스텝 다섯 개를 지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그든 자존감을 가지고 활동과 내능을 표현하고, 그걸로 뭔가를 구성해 내서 경제활동을 하고, 그러다 나이가 들면 사회적장으로 나아가 통솔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다 노년이 되면 생사에 대한 통찰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까르마와 업의 지도

붓다가 보기엔 삶의 괴로움을 끝장내는 길은 천국에 가는 것도,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기대나 열망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운명을 가두는 어떤 그물, 어떤 구속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이쯤 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의미가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379

명리학적으로 말하면 팔자에 새겨진 업장을 덜어 내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이라는 지평선이 있다는 것은 지금 나의 삶을 충만하게 해줄뿐더러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비전입니다. 384



열번째 강의, 통즉불통과 고집멸도

<숫타니파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통하면 아프지 않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은 태과불급을 타고나죠. 예외가 없습니다. 설령 태과불급이 최소화되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태어난다 해도 나이가 들거나 어떤 사고를 당하면 역시 마찬가지예요. 결국 태과불급에서 오는 불통은 인간의 근본적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태과불급을 벗어나서 통즉불통의 상태를 위해 노력해야겠죠. 넘치는 기운을 계속 더 넘치게 하고, 모자라는 기운은 더더둑 후탁리게 해서 태과와 불급의 간극을 넓혀 버리는 짓을 하지 말아야겠죠. 390

성인과 신선'
유교와 도교
유교 - 인의예지신,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성인(군자)
도교 - 도교의 비전은 '신선' 생사의 경계를 넘고 싶다는 염원. 우화등선, 단전호흡(내부에 있는 양기를 고도로 순환을 시켜서 경락을 다 뚫고 마침내 머리 꼬고대기에 있는 백희혈이 뚫리고, 그래서 천지와 감응하는 신체가 되고, 그렇게 되면 호흡을 피부나 발뒤꿈치로 하고, 핵심은 자유자재로 기를 순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런 수련에 몰두하려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데는 많은 제약이 있겠죠. 

물론 양생술의 궁극적 목표는 인격적 완성, 다시 말해 대자유에 이르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요. 404

지헤와 자비는 함께 간다.
<숫타니파타>의 자애의 경
인용, 411

 

진리가 무엇이냐 하면, '우주의 파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 진리는 그 파동만으로 사람을 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한 번 부르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나무아미타불'을 온 마음을 다해 단 한 번만 염송해도 아미타불이 바로 구해 준다고 하죠. 이게 바로 진리의 파동에 담긴 자비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집이 있는 곳에서 집이 없는 곳으로.
연애건 결혼이건 오직 애착관계 안에서만 사람을 만나는 것, 정말 위험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숙하고 현명해질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길을 떠나야 합니다. 혈연 아니면 애착, 소유 아니면 쾌락이 지배하는 집을 벗어나야 비로소 나를 성숙시켜 줄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겁니다. 좋은 벗의 기준은 간단해요. 친구면서 스승이어야 하고 스승이면서 친구여야 하고, '우정'과 '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