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백_일홍 2022. 12. 30. 17:12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

 

 

머리말

융합, 아는 것에서 탈출하기: 독창적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목적 의식적인 융합이 필요하다

 

이 책은 모든 지식이 이미 융합의 산물임을 상기한다. 이 책은 또 독창적인 글쓰기를 위해 자신이 아는 바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어떻게'는 글쓴이의 가치관과 위치, 당파성, 이동, 다시 태어남 따위를 의미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왜 쓰는가"와 동격의 물음이다. 나의 삶과 글쓰기와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 나의 글쓰기 태도는 어떤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가, 비슷한 말 같지만 조금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글을 쓰닌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나의 글쓰기는 어떤 사고 방식 때문에 가능했는가"

 

나는 이른바 "맨스프레인"이 불편하기보다 쓸모가 적다고 주장해 왔다. 가르치러는 태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맨스플레인'에 가르칠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언어가 쓸모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언어를 모든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존의 제도 교육은 그들의 -오래된- 이야기를 맥락 없이 반복하고 가르친다. 공부가 사유 방식을 배우는 과정, 창조의 과정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불행은 바로 옆에 있다. 교육이 고용과 연결되지 않으며 실업이 만성화된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에, 동기도 흥미도 없는 공부는 학교를 붕괴시키고 폭력을 낳는다. 정권을 초월해 그들만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스펙 비리에 우리는 지쳤다.

 

새로운 지식, '나'와 지구를 살리는 지식을 생산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 글쓰기는 그중 한다. 융합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가치관, 연결 능력이다. 평화학, 여성학, 환경학은 하나의 분과가 아니라 가치관이다. '정의로운' 가치에 맞지 않는 융합이라면,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지구 파괴에 쓰일 융합이라면, 모든 정보를 끌어모으는 박식한 누더기 공부가 융합이라면, 그런 융합이 왜 필요한가. 무조건적인 융합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내 상식으로는 2022년 대선에서 노동 문제와 기후 위기가 주요 공약으로 등장하고 주요한 논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당시 벌어진 논란 중에 공동체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었던가. 사람들은 '비호감' 선거에 넌덜머리를 냈다. 왜 필요한 지식이 논의되고 생산되지 못하는가. '여성, 서울 지역 밖에 사는 이들, 몸이 아픈 사람, 나이 든 사람, 외로운 사람, 계급의 양극화가 교육기회 박탈로 이어진 이들, 직장 생활이 힘든 사람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분단 체제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 수면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 가족주의에 매인 사람들... 우리 사회 그 누구도 여기에 속하지 않는 이는 없다.

 

언어와 물질은 대립하지 않는다. 물질은 언어에 의해서(만) 물질, 곧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인식 행위가 존재를 가능케한다. 탈식민주의나 여성주의가 '비가시화된 약자'의 현실을 그토록 문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이미 배제된' 영역이 있다. 해방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질문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축복이다.

 

우리의 일상은 앞에 열거한 사람들이 속한 상황의 연속이다. 우리는 모욕당했을 때 자기를 보호할 언어, 더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 대체 불가능한 언어가 필요하다. 대안적 언어는 '내로남불' 경쟁이나 '여혐/남혐, 진보/보수'의 대립 구도와 완전히 다른 길을 연다.

 

대립적인 상황이 아닌데 대립으로 문제를 풀려니 해결될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특징이 된 엉뚱한 대립 구도나 이분법은 큰 문제이고, 이 문제에 약자들이 대응하는 양상이 우려스럽다. 특히 약자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에 저항한다고 해서 남성을 혐오한다? 우성 여성이 '구사할 수 있는 혐오 언설'과 남성의 그것은 양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시작부터 지는 게임이다. ....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은 독자가 적더라도 최선을 다해 다른 세계를 만들고 싶다. 자본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많은 글 쓰는 이들의 고민일 것이다.

 

 

나는 내 글이 '보편적인 초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내 글은 당파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그 또한 쓸 이유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융합으로 '대응'해 왔고 이 책에서 독자들과 공유를 시도해보조자 한다.

 

공부에는 왕도가 있다. 물론 그 왕도는 지름길이 아니다. 왕도는 공부 방식과 태도, 동기와 관련되어 있다. 글쓰기에도 왕도가 있다. 내 상각에 글쓰기는 공부보다 좀 더 복잡하다. 장르도 다양하고 쓰는 행위 자체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읽기나 생각하기라기보다는 '쓰기

라고 답할 것이다. 공부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은 쓰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왕도가 있아면, 역시 요령이나 기술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결국 가치관의 문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돈이든 명예든 자기실현이든 고통의 승화든 추구하는 바가 있다. 다시말해 모든 글쓰기는 왜 쓰는가에 따른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모든 언어는 이미 융합의 산물이다

 

글쓰기를 내가 몸을 타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그런 슬쓰기의 핵심적 방법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용합'이다.

 

융합은 흔히 말하는 "학문간 대화, 통합, 절충, 비교, 더 하기, 혼합...."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융합의 세계에 살고 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융합이라는 단어가 주는 '더하기'의 이미지를 버리자, 대신에 다른 세계로의 여행, 즉 전환(trans~) 혹은 의미의 도약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을 가져보자. 해석은 언제나 현실보다 늦다. 그러므로 새롭지 않은 언어는 언어로서 임무를 다한 것이다.

 

융합은 우리가 아는 지식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공부의 즐거움과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실천이자 내 생각을 분명히 알고 더 필요한 앎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경계 넘기다.(rootingandshifting)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앎밖에 없다.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언어는 약자와 지구에 봉사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융합의 다른 이름은 인문학 자체다. 흔히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 여성주의, 탈식문주의, 유목적 사유,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

 

융합을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자연과학의 발달이 어떻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사상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연구하는 과정이 융합이다.

 

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 때, 말문이 막힐 때, 표현할 언어를 찾지못할 때가 있다. 이런 곤란은 '작가'의 일상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의 경우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관심사가 아니다. 내가이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쓰는 것이 관건이다. 글이 내 몸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래서 '잡념'이 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이런 순간이 가장 괴롭다.

 

어떻게 하면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할 수 잇을까? 지금 내개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 어떤 기존의 언어가 새로운 관점을 방해하고 있을까? 이 과정을 내 몸은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용기를 내서,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을 할 수 있을까.

 

융합은 몸의 환골탈태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호소할 때 '뼈를 깎는 아픔'이 이것이다. 독자와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과 자기 검열과 좌절에 시달릴 때, 윤리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글을 불태워야 마땅하다.

 

융합의 번역과 한국 사회의 지식 권력

 

융합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 '아니다'. 융합은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 생산을 위해 필요하다. 보편적인(uni/versal) 사고방식은 사회적 약자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성의 윤리로 작동할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기준을 각기 다른 상황에 무차별하게 적용하는 보편의 폭력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보편의 폭력에 문제 제기하며 등장한 사유가 다양한(poly/versal) 사고, 다시 말해 차이를 인정하자는 배려와 관용의 사고다. 그러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현실은 별로 없다. 문제는 기준 자체이기 때문이다.

 

흔히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도그마와 다양성을 대립하는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다양성을 옹호하지만, 각각의 다양성이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틀린 생각을 다양성이나 취향으로 옹호한다는 점에서 다양성처럼 탈정치적이고 무의미한 말도 없다. '너도 올고 나도 옭고, 여혐이 있으니 남혐도 있고, 구타당하는 여성이 있으니 구타당하는 남성도 있다"는 말은 논리도 현실도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립항들의 공통점은 '변화하지 않는 객관성이 있다'는 논리다. 융합은 객관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사유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을 트랜스버설이라고 하며, 횡단으로 번역한다.

 

융합은 계급,젠더, 인종, 성 정체성 등을 동시에 고려하는 상호교차성과도 다르다. 계급, 인종, 연령, 지역, 종교를 통한 여성들 간의 억압은 교차하고 겹치는 더 커다란 구조의 매트릭스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융합이다. 즉 융합은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고 재구조화이자 자유주의 사상의 질적 전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융합의 가장 정확한 번역은 '횡단의 정치'이다.

 

서구 백인 중심의 지식에 의심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 사회에서 생산된 서너행 지식을 고려하거나 연구하지 않는다. 특히 여성의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물론 페미니즘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1970년대 에이드리언 리치가 '제도로서 모성'과 '경험으로서 모성' 개념을 구분한 50년도 더 전에 나혜석이 이와 유사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공부를 '거꾸로'하는 연습을 했다.

 

우리가 지향하는 융합은 통섭인데, 영어권에서 쓰는 용어로 하면 '트랜스'다. 트랜스의 가장 쉬운 예로 독도 분쟁이나 군 '위안부' 이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문제 모두 국가주의적 방식으로 접근하면 갈등은 커지고 통치권자들은 그 갈등을 이용한다. 이때는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트랜스내셔널'의 관점이 필요하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선 연대, 여성의 입장에서 국자주의를 넘어선 연결을 고민할 때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횡단의 정치가 가장 절절하다. 그리고 여기엔 이미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축적한 지식이 있다. 하지만 남성도 여성도, 여성이 쓴 '학문적'인 글은 잘 읽지 않는 듯하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글쓰기의 목적이 분명한 편이다. 당연히 내가 쓴 글의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즉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 글은 폐기한다. ... 자신이 쓴 글을 향한 사랑을 버리지 않으면 '엣 사랑의 그림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처럼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자기 연민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도 최악으로 이끈다.

 

이 책이, 개인의 독서취향을 정치학으로 발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그래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여정journey, 변화

meta-morphoss, 프레임 조정framing, 변환transform, 횡단trans-verse, 문턱 넘어서기threshold, 경계선 안팎 넘나들기bordering, 협상tuning, 직면facing, 온몸의 재구성(사지의 재조합re-membering), 거리낌 없는 수용embracing, 매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re-flection의 과정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의 다른 제목이 있다면 '공부란 무엇인가'이다. 아는 것을 버리자, 자기 입장에서 출발해 경계를 넘어서자, 우리 모두 트랜스포머가 되자!

 

1장 생각대로 살지 않으려면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다. 애초부터 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 하면 백적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자기 과점에서 기존 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괘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40

'통섭'에서 '섭'으로
에드워드 윌슨, <통섭>, 백인 남성은 언제나 그들의 역량 이상으로 크게 주목받는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이론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통섭의 학문이었다. 이 사상들이 백인 남성 중심의 지식을 향한 질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 실존주의와 여성주의를 융합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프란츠 파농, 이블린 폭스 켈러, 도나 해러웨이 

섭, 잘 들리지 않으므로 귀에 손을 대어 끌어들이는 일이 통섭. 소수자의 목소리, 가시화되지 못한 진실, 보이지 않은 현실, 특정한 시각에서만 발명되는 사실 등으로 해석 가능하다.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