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백_일홍 2022. 12. 28. 15:22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프롤로그 _ 나에게 책은

 

누군가 내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이는 나만의 이유가 아니다. 누구나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상할 때 혹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 직전에도 책을 읽으면 위로 받는다. 기분이 전환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픈 상황에서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덜 아프게 된다. 좋은 책은 세상이 내게 주는 선물, 생명, 세로토닌(행복감을 생산하는 뇌의 화학 물질)이다. 위로는 깨달음

에서 온다. 이 위로가 몸에 습관이 되어 독서의 즐거움에 중독되면 다른 일에는 흥미가 떨어진다.

 

즐거움에 풀잎을 얹으면, 약(薬)이 된다. 책은 즐거움이자 풀잎이자 약물이다. 나의 일상은 외롭고 지루한 노동의 연속이다. 자극이라고 해봤자, 우리 사회 대부분의 서민들처럼 분노와 스트레스가 고작이다. 내가 옴짝달싹 못하고 '을' 이라는 현실에서 비참함을 느낄 때, 푸코를 읽으면 내 상황이 상대화된다. 미련으로 괴로울 때는 <그 남자에게 전화하지 마라> 같은 책도 도움이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후 몇 년 간 상실감에 빠져 종일 누워 지낼 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라는 말은 나를 욕창 직전에서 구해주었다.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과 대화하다가 계급문제를 생각할 때 주디스 버틀러는 명확한 논리를 선사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 때 고바야시 히데오가 한 말, "어머니에게 역사적 사실이란 아이의 죽음이 아니라, 죽은 아이다"를 되새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타자란 없다"라고 했던 마르크스를 읽을 때 그의 깊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 글이 어렵다는 불평과 비판 세례를 받을 때, "쉬운 글은 익숙한 글일 뿐"이라는 스피박의 통찰은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우리가 비판받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역사를 채우겠는가"라고 한 나혜석은, 나를 나대로 살게 하는 용기를 준다.

 

책을 의인화한다면, 그/녀는 정치적으로 치열하다. 그 사람(책)은 자기 내부의 모순까지 껴안는 명확한 당파성의 소유자다. 책은 나를 이룬다. 유려하되 아름답기보다 진실한 문장, 주장의 간절함과 정의감, 정확한 인식을 돕는 기가 막힌 표현력, 글쓴이의 노동이 고스란한 정직한 글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내 삶이 진전한다고 느끼고 세상이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문턱을 넘어서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런 글을 쓴 노동자들에게 감히 동지의식을 느끼고(싶고), 욕심을 다스리면서도 의욕을 다짐한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므로, 좋은 사람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혁명이었다. 백 년 전 당시 유럽 사람들은 인간의 질병은 약물이나 주사, 수술로 고치는 것이지 말로 주고받는 것(상담)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말하기 치료(talking cure)'는 신체적 통증을 정신적 작용인 대화로 치료하거나 경감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 동시에 '나쁜' 언어의 힘은 통증을 증가시키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도 할 수 있다. 온라인 성폭력으로 자살하는 경우가 가까운 예다.

 

핵심은 몸과 마음의 관계다. 마음이 괴롭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아프다. 암, 우울증, 루게릭 병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수도 있다. 억장이 무너져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머리와 심장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마음은 몸 안에 없다. 마음이라는 부위는 없다. 마음은 사회적인 몸(mindful body)이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언어(말)과 물질(신체)의 구분을 무화시킴으로써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근대 이분법의 대표적인 특징인 언어와 현실, 이론과 실천, 물질과 정신, 실제와 환상, 지시어와 지시대상의 이분법은 기반을 잃어 가고 있다.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 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을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멋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과 불행은 사실이라기 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내가 읽는 책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가 읽는 내용을 결정한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권력, 언어, 지식, 고통, 관계, 몸)가 있지만, 소재별로 읽기보다는 관점을 중심으로 선택한다. 남들이 보기엔 엉뚱한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특정한 사고방식에 집중하는 편협한 독자다. 어느 누구도 아무 책이나 읽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독자는 편협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자극적인 책'만 읽는다. 예상 가능한 내용이나 가독성이 지나치게 좋은 책은 읽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아는 이들은 내게 책 선물을 하지 않는다. ...

 

나는 퀴어 이론과 외과 의학을 같은 차원에서 읽는다. 몸, 정상과 비정상, 성별, 적응, 인식 방법 등 여러 지점에서 깊이 관련된 분야다. 책은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무관해 보이는 책들 간의 관련성을 읽는 이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이다. 독자의 생각에 따라 무관한 책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는 방법이 아는 내용을 결정한다. 별개로 존재하는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의 구분도 없고 개별 학문의 구별은 더더욱 없다.

 

학문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관, 사유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련 면에서 문학가와 신학자가 더 가까울 수도 있고, 오히려 동종 분야에서 내부 관점의 차이가 더 크기도 하다. ...<미운 오리 새끼>의 저자 안데르센은 동성애자였으며,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은 동성애 정체성과 정치적 은유로 이루어져 있다. ...

 

여러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한 분야만 공부한 전공자보다 더 깊이, 더 많이 알게 된다. 개인이 축적한 지식의 양 때문이 아니다. 이는 구조적으로 당연한 일인데, 여러 학문을 두루 접하면 지식의 전체와 지식이 구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근대 국가가 탄생하면서부터 인류는 국가 단위로 분류되어, 정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국민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고 국가들 간의 세계, 즉 '국제'라는 말이 생겼다. 지금 우리가 국제정치학(요즘은 국제관계학)으로 부르는 학문 분야는, 다윈주의의 적자생존natural selection 개념을 약육강식으로 오해한 가부장적 시각의 동물행동학에서 시작되었다. 즉 주류 국제관계학이나 국가 안보 논리의 전제는 오독된 다윈주의다. 그러나 이를 지적하면 해당 분야의 학자들은 매우 불쾌해하고 자기 영역을 침범한 침략자, 무식한 사람, "감히..." 이런 태도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진보 진영의 평화학자들에게 그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자기 전공보다 자기가 공부하는 학문이 생겨난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먼저다. 학문이 생겨난 이유와 문제의식에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전공의 전체와 맥락을 모르게 된다. 이때 지식의 목적은 해결로 전락하고 앎이 아니라 정보만 소유하게 된다.

 

독서는 혼자 강을 건너는 것, 대중적인 책은 없다.

 

'도랑'인데 '강'으로 포장된 책도 많고, '강'인데 '개울'로 묻힌 책들도 그보다 수백 배 많다. 물론 그것은 권력의 작동이고 효과이다.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책 읽기는 물은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 강을 건널 때는 온몸이 젖을 수밖에 없지만 작은 개천을 건널 때는 물방울 튀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깊은 강을 건너다가는 몹시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작은 개울이라도 물이 불었을 때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비가 온다면 어느 물가를 건너더라도 온몸이 다 젖을 것이다.

 

인간의 눈은 거만해서 한번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면 다시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소비나 경험 자체가 그런 것이다. 인간은(나를 포함해서) '700원짜리 하드'와 '3,900원짜리 하겐다즈'를 쉽게 넘나들지 못한다. 나는 "눈을 버렸다"라는 표현을 지지한다. 특정 작품을 거론해서 유감이지만, 처음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었을 때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그 후 황석영의 <장길산>을 읽고는 <지리산>에 '분개'했다. 그런데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으니 <장길산>이 '만화책'같이 보였다. 그 다음 <토지>를 읽은 후에는 대하소설을 읽지 않는다. (<토지>가 뛰어난 작품이어서만은 아니고, 작가들이 왜 대하소설에 로망을 품는지 그 보편적 서사를 욕망하는 정치학을 알고 부터다.)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에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다. 통과 전후 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고, 다치고 아프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어떤 책은 읽는 동안 그럭저럭 시간이 잘 가지만 읽고 난 후 별다른 변화가 없다. 대개 '스포츠 신문' 같은 텍스트는 자극이 덜하다. 이런 경우를 킬링 타임용이라고 한다. 반면, 다양한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는 통과 의례도 있다. 여운이 남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며, 괴롭고, 슬프고, 마침내 사고방식에 변화가 오거나 인생관이 바뀌는 책이 있다. 즉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책이 있다. 그것이 자극적인 책이다. 책은 여려 번 읽고 필사를 한다. 번역서인 경우에는 원서를 구해서 역시 필사한다. 필사를 하면, 최소 네 번 정도 읽게 된다. 당연히, 읽을 때마다 다른 주제가 나타난다. 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내 몸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책을 쓴 작가보다 더 '내 것'이 된다.

 

책이 주는 자극은 마음의 문을 노크하는 것에서부터 쿵쾅거림, 다소 욱신거리는 자극, 격렬한 대화 등등 다양하다. 그래서 여러 권의 책을 한 권으로 읽는 사람과 한 권의 책을 여러 권으로 읽는 사람의 차이가 생긴다. 수량으로는 전자가 많이 읽고 시간을 더 쓰는 것 같지만, 실질적인 수확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

 

나는 '베스트 셀러'를 읽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데, 잘 팔리는 책에 돈을 보태고 싶지 않은 '쪼잔한 정의감'이 가장 큰 이유이고, 대게는 별다른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는 특성상 지적 자극을 주기 어렵다. 통념과 달리 대중은 균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대중은 한 덩어리가 아니다. 대중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에 탄생한 신생용어다. 집단이나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통분모가 없는, 각자 다른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려면 책 내용이 절충적이거나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베스트셀러를 '시대의 흐름'이라고 보는 이 들도 있지만, 이 흐름은 출판 산업 구조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쉽다. ... 그래서 나는 많은 삶이 읽는 책을 읽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한다. 책을 무조건 많이 읽기보다 생각하기를 권한다. 한 권의 책을 여러 권으로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지적 자극을 주고, 한 권을 읽어도 여러 차례의 통과 의례를 제공하는 책일까? 어떤 책이 개종에 이를 만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일까? 물론 모든 앎이 그렇듯이 여기에는 대가와 고통이 따른다. 독서는 간접적인 삶이 아닌가, 나는 페미니즘 이론서나 소설가 정찬의 책을 읽을 때면 한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만큼 기운이 없고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밥을 먹고 나서 읽을 때도 있다. 감당하기 힘든 생각과 몸의 고통이 따르는 텍스트들이 있다.

 

우리가 접하는 책들은 대개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이 쓴 책이다. 사회는 모두 이들 '주류' 시각 안에 포섭되어 있다. 간혹 협상하는 저자들이 있다 해도, 획일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대개 독자는 이 사실조차 모르고 읽는다. 사실, 나는 저자가 특정 인구 집단에 속하는 책은 거의 읽지 않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진부한 관점의 지당하신 말씀으로 종이를 낭비하는 책은 킬링 타임을 넘어 지구 자원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다.

 

나는 '주류'의 관점 밖에서 쓰인,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주로 읽는 편이다. 대단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책들이 내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읽는 책에 줄을 서기보다는 한가한 길을 걷고 싶다. '모난 돌을 둥근 돌로 만드는 대열'에 동조하고 싶지 않다. 나는 생각하는 이들을 질식시키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을 매우 싫어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가 가장 문제적인 사회다. 모난 돌들이 둥글어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모난 돌들의 대화가 가능한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모든 책은 정치적이다

 

정치적 입장이 없는 책은 없다.

 

그 입장이 간접적이나 직접적으로 드러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무색무취처럼 보이는 책도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과학이나 철학 책이라고 해서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고, 육아책이라고 해서 간접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부분 정치색이 없어 보이는 책들은 자유주의나 가능주의적 시각에서 쓰인 것들이다.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적 사고 체계에서는 입장, 관점, 시각 같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향한다. 이런 탈정치적 주장이 가장 정치적인 법이다. 게다가 정치성을 표방하는 경우보다 정치적 효과도 크다.

 

'자극적인' 책은 표현의 수위가 높거나 내가 몰랐던 소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몰랐던 세상도 의미가 없진 않다. 성매매, 군대 문화, 조직 폭력, 장기 매매의 현실, 조선 공학의 세계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려는 지적 자극의 본질적 측면은 요동하는 세계관이다. 아는 방법을 질문하는 책. 건물(사물, 세계, 인식 대상)이 있다면, 조감도는 글자 그대로 하늘에서 새가 날면서 본 모습이다. 하늘에서! 전체는 존재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인간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 한 하늘에서 전체를 볼 수 없다. 아니 비행기를 타도 전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조감도는 전경을 볼 수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체를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뿐이다.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책은 피사체를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건물 옆에서. 지하에서, 건물 뒤에서, 아주 멀리서,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배경에서 있는 사람이 찍은 것이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즉 피사체, 문제 대상(사회)를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그 안에 있으면 자신을 알 수 없다. 교회의 문제점은 교회 안에서는 볼 수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외부에서만 보인다. 사회 밖, 틀 밖, 궤도 밖에 서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모든 책은 각각의 위치에서 쓰인 것이지, 조감도는 없다. 따라서 책의 내용은 진리도 진실도 아니다. 아니, 사실이나 진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독자는 사용자가 되었다. 원래 지식은 쓰고 없어지는 소비재지, 간직해야 할 보물이 아니다...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지식을 몸에 구조화하는데 사용하면 된다.

 

... 글에는 그 글의 정치적 효과가 있을 뿐이지, 내용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내용의 진위는 인식자의 입장, 과학의 발전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습득한 책 읽기 습관을 요약해본다.

1. 눈을 감아야 보인다.(in/sight)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판단 정지)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논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