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식물의 사유(1)_이리가레(상)

백_일홍 2023. 4. 2. 08:44

식물의 사유 _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 마이클 마더

루스 이리가레 부분

당신이 우리의 형이상학 전통을 해체하는 작업에 착수한 철학 트렌드에 속한다는 점에 내가 주목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내가 궁금해하는 질문 중 하나는 니힐리즘의 극복에 관한 당신의 입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초감각적 가치에 종속시키는 방식을 통해 니힐리즘 문화에서 포스트 형이상학적이라고 추정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계합니다. 16

감각성에 불과한 것과 그 감각성이 상정하는 예술적 표현으로 후퇴함으로써 소위 형이상학의 극복이나 초월을 이루려는 시도는 모두 위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일성을 다수성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그런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하나 the one' 혹은 '일자 the One'가 사유와 주체성의 구성에서 제게된다면, 그것은 얼굴을 가린 채 독재자를 가장하고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둘'에서 시작하여 다르게 성차화된 주체들 사이의 관계를 문화적으로 정교하게 가다듬고 윤리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니힐리즘을 극복할 통로이자 기본 구조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문화에서 사유되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성차 sexuate difference 이다. 성차를 사유하기 위해 성차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을 키우는 일에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과 같다. 17

특수한 초감각적 요구 조건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보편적일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 에너지와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우리는 성차가 절실히 필요하다. 실제로 성차는 동일한 성적 정체성을 취하지 않는 두 주체 사이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존중하면서 초월적 차원을 전제한다. 여기서 초월적 차원은 신체적 물질성을 넘어서는 성차화 sexuation가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남아있는 초월성을 말한다. 18


당신은 식물 세계에서 해체론의 한계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날 생명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영리하고 현명한 선택입니다.

서구 문화 비판은 서구 전통이 인위적으로 부과한 중성적이거나 중성화된 모종의 보편적 정체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서, 그리고 생명에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성차화에서 시작합니다. 19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
1. 당신이 식물 세계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니힐리즘 전통을 단순히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 전통과 한몸을 이루고 있는 건 아닌지요?

2. 어떻게 우리는 식물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식물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거나 말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것은 우리에게 철학 언어의 전통을 포기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세와 그런 도전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 책에서 그 위험을 감수하고자 합니다. 다른 사유 방식과 다른 논리. 우리는 어떻게 다른 말하기를 찾아 함께 길을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말의 복수적 의미에 닿을 수 있을까요? 이런 의미의 복수성은 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표현하려는 친밀성을 증언한다. 완전히 다 드러내는 것은 친밀성을 파괴하게 할 테니까요.

3. 당신과 나 모두 식물 세계와 함께 살아왔고 식물 세계와 친밀성을 계속 경험하고 있다... 이 경험은 당신의 생존과 생성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것은 존재의 경험이다. 이런 까닭에 그 경험을 전달하는 것에는 두려움이 있다. 이 두려움에는 욕망이 섞여 있다. 식물 존재 ㅡ 식물적 실존 ㅡ와의 공존은 나를 살아가게 하고 내가 하는 말과 비밀스럽게 어울린다. 나는 식물 존재와 소통할 수 있을까요? 식물 존재와 나 자신을 모두 잃지 않으면서 식물 존재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인간들 사이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어떤 길을 통해 돌아올 수 있을까요?

1장 식물 세계에서 피난처 찾기


내가 대학 1학년 때 내린 결정도 생각납니다. 이 결정은 개인과 담론과 사유의 중성화에 맞서 나의 여성적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 및 생명의 성장과 공유를 마비시키는 문화적 구성에 나 자신을 복속시키는 대신에 생명을 향한 갈망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조건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의 문화는 생명을 돌보고 키우기보다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가치를 택했습니다.

내가 <검경>을 쓰고 있을 때에도 나의 선택은 확고했으며 생명의 윤리적 체현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28

2장 생명을 망각한 문화 

아무도 <검경>이 재현하는 문화적 사건의 객관성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나 자신도 이 사건의 객관성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나는 이 사건을 일종의 역사적 사건 혹은 세기적 사건으로, 다시 말해 각기 객관성을 지닌 두 개의 상이한 주체성이 도래한 사건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나는 새로운 역사적 시각을 열어놓기 위해 투쟁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투쟁하고 있지만...32

<검경>이 야기한 사건을 통해 나는 서구 전통이 무시했던 것, 즉 생명 그 자체로 다시 돌려보내졌습니다. 문제는 내게 생명을 표현할 수단도 언어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생명이 술어적 논리인 표상적 사유 방식의 수단을 비껴가듯이, 생명은 표상(재현)을 벗어납니다. 생명은 이 모든 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 전통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34

나는 문화와 사회적 환경이 빼앗아간 생명 그 자체를 되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매순간 살아남을 수 있는 충분한 숨과 에너지를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개 이 숨과 에너지를 대우주로 부터 즉 공기와 햇살과 식물 세계로부터 받았습니다. 나는 이 생명의 원천을 이해하거나 그것과 관계를 맺을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내 동시대 사람들이 생명에 보인 관심의 부족은 나의 생명을 구하고 나의 사유를 구했습니다. 

또한 나는 그리스 문화의 맥락으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초기 그리스에서 고전 그리스 문화로 넘어가는 이행기로 돌아갔습니다. 이 이행기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가 무대에 올려졌던 시기입니다. ...안티고네에 대한 나의 해석은 하나의 정체성으로서뿐 아니라 거주지이자 환경으로서 자연 세계에 그저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모든 문화적 필요조건은 자연을 극복하고 은폐하며 망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문화적 필요조건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가리고 숨기면서 그 정체성을 우리 각자와 우리들 사이에서 키울 수 없게 가로막는 다소 순진한 장치임이 드러났습니다. 

나는 살고 싶었고 생명을 키우고 싶었습니다. 생명의 대체물로서의 사유는 나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37

안티고네는 크레온이 시민들에게 부과한 자의적 법이 파괴하기 시작한 자연 질서를 지키기 위해 대항했던 것입니다. 안티고네는 생명이 절대라는 점, 즉 우리가 지키고 구현해야 하는 유일무이한 절대임을 증언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생명이란 것을 키울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생명은 결코 대상으로 취급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문화는 이 질문에 답할 방법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길을 열어야 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면 스스로 숨을 쉬어야 합니다. 내가 속한 문화는 어떻게 호흡을 키울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말과 관념과 이상으로 호흡을 중지시키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숨을 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문화적 배경에 의해 그 배경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더 이상 그 가치를 믿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숨을 쉴수가 없었습니다. 39

나는 바깥에 있었습니다. 나는 숨 쉬기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그 다음에는 생명을 키우는 방법을 찾기 위해 40

3장 보편적 호흡을 공유하기 

식물 세계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함께 모성적 돌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몇 시간이고 앉아 있으면서 다른 식물들은 내게 아무런보상도 요구하지 않은 채 내 호흡을 정화시켜주었습니다. 자연은 나에게 생명과 생명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을 따름입니다. 

자연, 무엇보다 식물 세계는 그것이 제공해준 공간과 공기와 함께 나에게 자율성을 되돌려주었습니다. 자연은 내가 살기위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살아가는 데는 숨 쉬기 하나면 충분합니다. 

더구나 호흡은 식물의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이행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42

나는 조금씩 내 안에 자유로운 호흡의 여분으로 만들어진 빈터를 열어갔고, 그곳에서 나는 지각할 수 있었으며, 내가 지각한 것에 형상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살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진리로 전수되어 왔던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자연적 삶을 사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매개로서 공기와 호흡이 수행하는 본질적 기능은 망각되어 왔습니다. 

공기를 통해서 나는 우리의 전통이 단절시킨 보편적 교환에 참여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보편적 공유에 참여했습니다. 나는 차츰 이렇게 관여하는 경험을 했으며, 이 경험은 나에게 위안과 감사와 책임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공기의 공유에 참여하는 지구의 거주자로서 세계 시민이 되었습니다. 43

경제적이고 사회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주인과 노예의 투쟁에 앞서, 생명에 본질적인 공기를 갖기 위해 생명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투쟁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 문제를 무시하는 쪽을 택합니다.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최초의 음식은 공기입니다. 

우리 사회 시스템의 모순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생명 자체, 그리고 생명의 최초의 몸짓이자 최후의 몸짓인 숨 쉬기에 대한 관심의 부족에 기초해 있습니다. 

헤겔과 마르크스 두 사람 모두 공기와 숨 쉬기가 생명 유지나 정신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의미 심장합니다. 이들의 사상은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습니까? 

공기가 생명에 결정적인 것이라면 공기는 또한 신체적, 정신적 전체의 응집력을 보장해주는 유체로서 필수적입니다. 이 전체가 개인일 수도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공기를 고려하면서 전체를 형성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전체성은 체계적이고 권위주의적 성격을 잃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전체성은 각자가 자신의 단독성을 잃지 않으면서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거나 타자들과 공공체를 형성하기 위해 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숨 쉬기를 돌보면서 우리는 더 유연해지고, 상황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적응할 수 잏게 됩니다. 우리의 전통은 숨 쉬기의 필요성과 잠재력을 무시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허약하면서도 경직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주체성이 어떤 변화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체성은 자신의 윤곽과 형태를 생명 자체로부터 받지 않고 외부 세계로부터 받아왔기 때문에, 자아라고 추정되는 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숲과 정원에서 나는 나무가 취하는 형태에 대해, 다시 말해 나무가 어떻게 자신으로 남아 있으면서 변화할 수 있는지를 성찰했습니다. 나는 인간인 우리가 왜 나무가 보여주는 이런 자질을 무시하고 문화에 동화되기 위해 구성된 현태에 기대는지 의아했습니다. 왜 우리는 계속 살아남아 있으면서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발전시키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존재가 꽃피도록 놔두지 않을까요? 46

 

서구인으로서 우리는 역사의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건너가는 데는 전쟁과 파괴 - 소위 말하는 아버지의 살해 - 가 필연적이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나는 생존을 도와주고 생명을 키우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우리 문화의 다른 전통을 살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새로운 에너지 문화>. 요가, 호흡을 키우는 법. 나는 조금씩 내가 찾고 있던 우주를 발견했습니다. 그 우주에서는 호흡이 핵심적이었으며 생명 자체를 존중하고 키웠습니다. 47

 

나는 치료적, 문화적, 영적 차원에서 동양 문화 전통의 문헌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가 새로운 우주로 진입하는 것을 넘어서 숨과 생명을 키우는 데 적합한 말과 이야기와 이미지와 인물과 신으로 나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우주는 로고스와 코스모스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문화적 전체를 형성했던 초기 그리스 문화에 존재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문화의 분리에 맞섰던 인물, 안티고네

 

왜 이런 분리가 세계 유수 전통에서 일어나야 했으며, 실제로 일어났던 것일까요? 인간은 진화의 어느 시기에 어떤 필요성의 이름으로 자연을 키우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하나의 자연으로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었을까요? 어떤 욕구가 인간이 그런 자세를 취하도록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까요? 

 

식물 세계가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종종 인간이 자기 안의 자연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성장과 개화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기술적 논리나 도구를 이용해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로 추상적 정식화와 계산 속으로 헤매들어갔던 시대를 알려줍니다. 49

 

4장 원소의 생생적 잠재력

 

공기

 

우리의 사유 방식에서 공기에 대한 고려의 부족이 사유가 메마르면서 딱딱해지고 불변으로 만들듯이, 대기에 대한 존중의 부족은 유동적으로 흐르는 대기를 단단한 유리지붕으로 바꾸어버립니다. 51

 

어느 때 부터인지 육체와 영혼, 대지와 하늘의 연속성이 끊어졌습니다. 특히 공기의 밀도의 변화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는 것을 보장하는 대신, 이 둘은 우리가 각각을 다르게 돌봐야하는 것처럼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요가 수행자를 식물에 비유. 서양문화가 대체로 망각한 과정을 상기시켜줍니다. 서양 문화는 우리가 영적으로 되고 우리 육체가 영적으로 꽃피우지 않게 하기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합니다

 

식물 세계는 대기의 습도 층위에 작용함으로써 대기가 적절한 밀도와 질을 유지하는데 기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구적이고 불변의 항상성을 지닌 것만을 가치 있게 여기면서? 환경이자 정체성으로서의 자연을 정복한 것처럼 가장해 왔습니다. 그러한 자세는 생명의 나타남을 현상appearance으로 대체해왔습니다. 대기는 나타남에 매우 중요하지만 이제 현상은 대기의 질과 아무 상관없게 되었습니다. 이미지와 관념으로 대체됨. 우리는 나타남의 방식으로만 공기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전원을 걷는 동안 우주에 대한 사랑의 몸짓으로서 공기가 우리에게 주는 향기, 소리, 바람의 애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식물은 자신이 생명을 시작한 곳에서 자연적으로 뿌리내리며 머무르겠지만,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첫 번째 뿌리내림은 관계적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에 의해 잉태되어 어머니에게서 생명을 시작하여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뿌리 문제는 복잡합니다. 우리의 기원에 관한 수 많은 신화들. 54

 

우리 인간에게 뿌리내리기는 스스로 숨 쉬는 것입니다. 이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상상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의 숨결에서 태어났다는 가설로 이 어려움을 보상해 오지 않았던가요?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영혼 그 자체의 물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요? 

 

나는 인류가 아직 자신의 운명과 관련하여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는 인간이 지닌 이런 특수한 측면을 무시합니다. 인간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호흡의 중요성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생명 유지를 위해 공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감사왜 인정을 표시하는 자세는 식물 세계를 돌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숨 쉬기를 통해 생명을 돌보는 우리 신체의 지능을 인정해야 합니다. 56

 

물, 물의 해방을 위한 말은 여성적 여신의 말이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신들의 나타남을 포함하여 만물의 나타남을 개시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한 유일무이한 신은 없습니다. 그 이전에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있습니다. 

 

물은 자기 안에 만물의 씨앗을 숨기고 있으며, 어미니라고 불립니다. 물은 그로부터 세상이 나타난 최초의 황금알이 잉태된 장소입니다. 시원의 물은 그것이 지닌 욕망의 열정 덕분에 빛과 불을 생성시킬 수 있었으며, 아그니 신을 출산합니다. 물이 흘러나오자 태양, 낮, 새벽, 불이 나타났고  태양과 불, 금처럼 빛을 발산하는 황금알이나 배아를 가져왔습니다. 황금알이 깨어진 후 신들, 즉 처음에는 인드라와 비슈누가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해 빈터를 만들어 내야 했을 것입니다. 

 

세계의 기원에 관한 이런 설명,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점은 생성의 힘이 인간이나 하느님 아버지에게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원소들에게 맡겨진다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를 낳은 것은 원소들의 진화, 특히 물과 열정의 결합입니다. 남성 신이 수행하는 역할은 이미 생성된 것을 기술적으로 건설하는 것입니다. 남성 신이 수행하는 주요 행동 중의 하나는 희생지역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희생 지역은 우주 질서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돌보는 장소입니다. 

 

예배에 바쳐진 이 가공의 장소, 빈터 

하늘의 빛이 비치게 하기 위해 숲에 열린 공간.

베다와 하이데거.

두 경우 모두에서 공기의 역할  그리고 공기와 관련된 나무의 역할에 대하니 언급이 없다. 베다와 하이데거 모두 서서히 땅에서 하늘로 옮겨가고 그 사이에 중재 공간을 차지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빛을 전달하는 공기를 망각한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이제 숨 쉬기는 우리가 세상으로 들어오는 최초의  몸짓이라는 사실 외에도, 우리의 외적, 내적 공간이나 장소를 규정할 수 있는 몸짓입니다. 우주 생성론은 숨 쉬기가 생명을 키우는 기본 요소라는 핵심 원리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리그 베다에는 고대 우주생성론을 보여주는 두 판본이 존재합니다.

1.평화적 생성. 물(때로는 어머니라 불리는)은 물 자체가 지닌 간절한 욕망 덕분에 홀로 최초의 황금알을 낳고 이 알에서 세계가 나온다. 

2.영웅은 전사의 신 인드라. 원수(시원의 물)의 수호자에 맞서 남성 신들이 벌이는 호전적 행동에서 세계의 창조가 일어난다. 

 

첫번째 판본에서 두번째 판본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가, 불의 신 아그니의 배신이다. 아그니는 불멸을 얻으려고 인드라 일족에 충성을 맹세한다. 원수의 열정으로 생성된 아그니는 물의 세계에서 자신의 지분을 포기하고, 인드라를 섬기기로 한다. 

 

처음에는 호전적인 남성의 신들이, 그 다음은 인간의 가공 행위가 서서히 원소의 잠재력을 대체합니다. 이와 동시에 물Water은 강이 되고 인드라의 순종적인 배우자가 되어 그를 찬양합니다. 

 

불은 먼저 어머니라고 불린 원수 즉 원소들의 생성적 잠재력에서 훔쳐온다. 불은 자연의 원천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통제력을 상실한다. 인간은 자연 에너지를 다소 인공 에너지로 변형시킨다. 

 

자기 자신의 형상에 때라 스스로 자라고자 했던 존재의 생성은 중단된다. 오직 식물 세계(그리고 일부 야생 동물도?)만이 계속 원소적 근원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식물 생명만이 퓌시스 자체의 잠재력을 증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의 지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원소의 에너지는 더 이상 땅 위를 순환하지 않는다. 원소의 에너지는 사실상 상실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무는 살아 있는 과거 에너지를 목격한 특권적인 생존자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나무는 단순히 생존과 새로운 세계의 생성 사이의 연결성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세계의 생성은 인간 존재의 생성에서부터 시작된다. 61

 

 

5장 계절의 리듬에 맞춰 살기

 

자연의 생산이 신의 창조보다 앞선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끝없는 논쟁이 있었다. 여성들은 신의 창조보다 자연이 우선한다는 것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적어도 우리 전통에서 자연의 힘과 신의 권능을 조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우리 전통은 자연적 부분과 영적 부분의 연속성을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우리를 두 부분으로 쪼개놓았다. 그러나 두 영역의 연속성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인간적 삶을 성취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게다가 자연적 부분은 여성에게, 영적 부분은 남성에게 할당되어 자연과 영성은 진정으로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 

 

신성한 결혼, 히에로가미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결혼은 세계의 생성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신성한 결혼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 두 요소들 혹은 신적 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야 한다. 64

 

우리가 우주적 히에로가미에 근접해 있을 수록 결혼은 육욕적이면서 또한 신성하다. 이 두 차원 사이에 찢김이나 균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연인들은 자연적이며 영적인 속성을 나누는 것을 즐긴다. 

 

신성한 결혼은 봄에 일어나는데, 이때 하늘과 땅은 잔잔한 공기와 햇빛을 통해 결합한다. 

 

우리 전통에서 성은 영적 생성과 공유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언제나 위반으로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성적 에너지를 키우지 않는다면 사랑은 어떻게 되며, 또 우리의 몸과 정신은 어떻게 될까요? 인간이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며 순수하게 사랑을 나누면서 신을 모방할 수 있는 전통이 더 신성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째서 감히 성관계에 대해 말하는 철학자들 조차 신성한 욕망의 공유보다는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표현하는 언어로 성관계를 설명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68

 

서구는 육체적 사랑을 아이를 낳기 위한 길로 삼았던 것이지 연인을 꽃으로 만들지 않았다. 실제로 서양이 봄보다 여름과 가을을 선호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문화가 남성적인 문화이고 생산에 강조점이 놓였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인간(man)은 생산을 통해 자연과 경쟁할 수 있다. 그는 자연의 성장과 개화를 축하하고 지원하는 대신에, 자신의 가공행위를 통해 자연보다 뛰어나려고 애쓴다. 남성/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자연의 힘을 대체하기 위해 자연의 잠재력을 정복하고자 한다. 그는 자연이 자신의 리듬과 생식력에 맞춰 자라도록 나두지 않고 자연을 자신의 계획에 맞춤으로써 자연의 생명과 생산을 마비시킵니다. 그는 점점 더 자연의 과정에 끼어들어 자연이 가속화된 인위적 리듬에 맞춰 더 많이 생산하도록 몰아놓으려고 애씁니다.69

 

땅은 위대한 지혜로 매 계절에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감자와 호두와 밤이 가을에 추수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우미 몸이 필요로 하는 것에 반응합니다. 인간은 자연이 아낌없이 베풀어 준 생명을 찬양할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69

 

열매를 따고 추수를 끝낸 후 우리 전통은 마녀의 날이라 할 수 있는 할로윈과 사자의 날을 기념합니다. 10월 말과 11월 초는 악몽의 시기, 마술과 비합리성이 시기, 그리고 죽음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밤이 가장 길고 대지에 거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계절, 겨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는 어둡거나 숨겨진 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우리 문화는 신의 절대 빛이 보이지 않는 것을 엑소시즘이라고 부르지요? 식물의 비밀스러운 발아, 아니 인간 존재의 비밀스러운 배태조차도 그것에 값할 만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발아 혹은 배태는 흙이나 자궁의 어둠 속에 있는 수액의 생식력을 증언한다. 그것으 또한 나타남appearing은 생명 성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생명의 비밀스러운 과정을 비웃는 것은 생명의 나타남을 현상(들)으로 오인할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은 시초부터 우리 전통에 놓여 있던 위험이며, 서양문화를 근절의 문화로 변질시킨 위험이다. 70

 

오랫동안 여성은 뿌리의 세계에 근접해 있었다. 특히 '마녀'로 불린 사람들, 자연 세계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살앙 있는 치유적 속성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지상의 에너지를 공유하고 땅이 때에 맞춰 생산한 뿌리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따아에 충실했던 여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모종의 방식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듣거나 읽었다.(수잔 플래처의 아름다운 소설 <코라그>)

 

자연은 우리에게 거주할 멋진 장소를 제공한다.하나의 고유한 것으로 자연은 또한 계절과 지리적 위치에 따라 늘 변하고 생성하고 있다. 자연은 우리가 매번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자면 우리가 숨 쉬고, 먹고, 감각을 통해 사유하고, 나누기위 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준다. 인간의 달렬과 비교하면 계절의 리듬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71

 

6장 자연 존재의 놀라운 다양성 복원

공기를 통해 보편적 교감에 참여하고, 원소들의 생성적 힘에 몸을 담그고, 계절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면서 나는 조금씩 바뀌었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다른 생명 존재와 만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했다. 나는 혼자서 대라느생명 존재들을 존중할 때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질서에 조정당하지 않았다.

 

나는 이 살아 있는 존재들과 교감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축제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는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누었다. 나는 그런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매일 저녁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는 하루의 기도였다. 이제 그것들은 내가 길을 열고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준 중요한 할주로 등이었다. 

 

실제로 살아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뿌리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한 취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고가 느끼라고 추천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느끼지 않으며 사실상 둔감해진다. 생명으로 다시 돌아오고 난 다음 나는 나의 전 존재를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놀랍도록 풍부한 것이었지만 위험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나는 나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만남의 덧없음에 시달리지도 않으면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한 경험이 다른 경험과의 연관 속에서 평가절하되거나 다두성으로 소멸되지 않으면서 그 많은 경험들을 통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구 문화에서 인간이 그랬던 것과 달리, 만인과 만물을 하나의 전체로, 아니 '나의' 전체로 구부리지 않으면서 그 경험들을 조직할 수 있을까? 나는 감수성과 감각성보다 우리의 전통적인 지성을 택하고 싶지 않으며, 다른 생명 존재들과 더불어 맺는 관계보다 대상과의 관계-그 대상이 이데아든 절대이든-를 택하고 싶지 않다.75

 

나는 하루 중 일정 시간을 자연에 머물렀다. 정원, 공원과 숲, 산과 바다에. 

 

자연이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다양하며, 우리의 모든 감각에 말을 건다. 예술작품들은 자연이 주는 것만큼의 생명과 에너지와 기쁨을 주지 않는다. 오힐 그 작품들은 내가 창작자에 대한 답례로 주기로 한 어네지를 나에게서 가져간다. 

 

자연에 머무를 때 나는 살아 있는 환경에 있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 있는 에너지를 공급받고 공유한다. 

 

이 모든 일은 사려 깊게 일어난다. 이것은 경이로운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빚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을 정상이라고 여기며, 자연의 풍요를 찬양하거나 자연이 아낌없이 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 없이 그저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땅의 열매를 찬양하는 일은, 몇몇 숭배의 장소를 제외하면 너무 빨리 신을 향한 기도로 바뀌면서 포기되었다. 77

 

대지의 열매를 함께 나누고 기념하는 것은 공동의 시간과 공간을 정의하는 적절한 길이기 때문에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매우 유감이다. 

 

동물의 소비를 중심으로 조직된 축제, 그 식사는 자연의 리듬에 따라 결정되는 시공간을 공유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생식력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 식사는 살아 있는 존재의 살해를 전제한다. 희생제의나 기념에 더 가깝다. 

 

인공적으로 구성된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대조적으로 자연 세계의 다양성은 우리를 갈라놓기보다는 통합한다. 이것은 또 다른 미스터리로 보인다. 그 미스터리는 자연의 세계에서 각각의 존재는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 뿌리에 충실하다는 사실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세게에서 개개의 존재는 자신의 실존읗 롹립하기 위해 우리의 생명을 이용하는 대신, 우리를 살게 하고 심지어 우리를 우리의 생명으로 돌려보내기도 한다. 개개의 존재는 자신으로 남으면서 상대의 생명을 침해하지 않고 공유할 것을 제안한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받기로 동의한다면, 모든 지각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에너지를 전해준다.

 

다른 중요한 점은 자연, 특히 식물 세계와의 관계에서 질이 양보다 우세하다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는 양보다 질과 더 많이 연관되어 있다. 생명은 자신의 형태를 가지고 발전한다. 이 형태를 다소 자의적으로 규정된 형태로 대체해 버리는 것은 그 형태를 찢어서 무로 흘러가게 하면서 성장을 마비시킨다. 불행히도 우리 문화 전통은 이런 식으로 작용해 왔다. 

 

우리 문화에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양을 특히 에너지의 양을 추구함으로써 살아남기 위해 서로 맞서 싸운다. 그러나 이들은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무분별하고 사려없이 소비할 뿐이다. 자연은 우리가 에너지를 우리의 목적에 맞추기 위해 전용하는 일을 포기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충분한 양의 에너지를 준다.

 

원소의 세계와 식물의 세계로부터 에너지를 받고 공유하는 일에 동의하는 것은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 자원을 살아 있게 조절하고 규제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 본성적으로 다른 인간들 사이의 사랑하는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80

 

7장 우리의 감각지각을 키우기

 

우리 전통은 우리의 감각지각을 생명을 키우는 일과는 무관한 문화를 위한 전용의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그것은 우리 감각지각을 자연, 타자, 우리 자신과의 소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 전통은 우리 감각의 잠재력을 건너 뛰고 실재를 표상한다고 추정되는 말을 교환양식으로 간주하여 그에 의존했으며, 말을 로고스로 마다 들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의 단독성을 사유하고 그 실재성 속에서 그것을 만나기 위해 나 나무 앞에 머무르는 대신, 기껏해야 이것은 떡갈나무야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지나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들을 우리의 세계로 통합해 들인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종종 나무의 열매나 목재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거나, 꽃을 꺾으며 꽃을 그 뿌리와 그것의 성장에서 떼어낸다. 또한 우리는 다른 생명 존재를 만나지 못하고, 이 만남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혜택을 맞이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게 오직 명명, 관념, 효용 또는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통해서만 나무를 만나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우리 문화는 현재 우리의 시각과 생명 존재 간의 만남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포기했다. 

 

나무는 끈임없이 그것아 나타나는 공간과 형태를 창조하지만, 가공된 대상은 그것이 있을 법한 장소와 현상들을 재창조하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한다. 대상은 자기를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을 자기 용도에 맞춰 우리에게 부과한다. 지금은 대개 우리 인간의 것이 된 주위 환경은, 우리가 창조하고 지배해 온 우주의 주인이 우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주위 환경은 점점 더 자신들의 힘 안에 우리를 가두고 우리의 살아 있는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 주위 환경은 점차 우리 감각의 잠재력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감각을 단순한 인식의 수단으로 축소시킨다. 이 경우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만나는 것이 자율적 생명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부호화된 어떤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감각지각은 인간의 관념이나 계획에 기대게 된다. 인간의 관념과 계획은 감각지각을 살아 있는 뿌리와 성질로부터 단절시키고, 우리의 신체적 속성과 문화적 속성 사이에 다리를 놓는 감각지각의 능력을 제거한다. 

 

사물에 대한 지각,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 존재에 대한 지각은 감각지각의 구체적인 특이성과 감지할 수 잇는 자질에 주목하는 것을 통해, 감각적 자질을 명칭으로 대체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관심을 단순한 물질적 단계에서 영적 단계로 이끌 수 있게 한다. 장미를 응시하면서 나는 많은 말이나 담론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었던 집중을 얻는 데 도움을 받는다. 꽃의 감각적 자질의 조합은 그것이 다양한 수준에서 내게 일깨운 관심 덕분에 내가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집중에서 명상으로 옮겨간다. 이런 상태로 사는 데 시간이 소요된다면, 그 시간은 일종의 황홀경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황홀경은 에너지의 집중에서 나온다. 84

 

감각지각을 키웠을 때 생기는 정신적이고 에너지적인 혜택. 그러나 파탄잘리의 경우 에너지가 정점 - 이른바 삼매의 상태 - 에 이르도록 지각을 개발하려면 주체와 대상의 이중성이 사라질 때까지 지각되는 것을 영적으로 내면화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나의 경우, 삼매경은 다른 생명 존재와 나 자신 사이에 이중성을 보존하되 나의 지각 방식의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잇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 이상 나무나 꽃을 그저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응시한다. 말하자면, 나는 나무나 꽃에 생기를 불어넣는 수액을 응시한다. 이 수액으로부터 시작하면 내 쪽에서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전용을 하지 않고도 나무와 꽃이 나에게 나타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과 나무와 꽃 사이에 존재하는 환원될 수 없는 이중성이 생명에 대한 사랑에서 피어나는 삼매경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84

 

삼매경에 이르는 길은 내가 지각하는 존재가 다른 인간일 때 더욱 중요해진다. 더욱이 나는 그런 삼매경을 다른 사라마과 공유할 수 있는데, 이는 보다 완성된 욕망의 충족을 의미한다.이런 삼매경의 공유는 성적 사랑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우리의 성적 매력을 영적 생성으로 이끄는 길로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삼매경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두 사람 안엥서 일어나는 깨달음이다. 두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은 한 사람한테서 일어날 수 있는 깨달음보다 더 강렬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연에 홀로 있습니다. ... 그러나 삼매경의 가능성은 나에게 먼저 식물 세계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생명 존재들을 지각하는 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이제 삼매경에 이를 가능성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모든 원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이 원소들과 공존할 수 있는 인간으로 나를 바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원소들과 함게 살고, 원소들과 공유하며, 원소들과 교환할 것이다. 이제 우리들 각자는 우리 존재의 단독성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을 다른 존재와 전체에 건네 줄 뿐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받는다. 85

 

인간은 더 이상 자신과 자신의 언어에서 출발하여 만물과 만인을 하나의 전체로 모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 존재 사이에 있는 생명 존재이다. 개개 존재는 다른 존재를 정복하거나 융합하지 않으면서 자신읭 뿌리와 자연적 속성(belonging)에 충실히 남아 있다. 모든 생명 존재의 장소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은 체화된 개개 존재의 특수성과 그 특수성이 타자들에 의해 존중받는 것이다. 86

 

보기.

나무를 정신적으로 표상하고 명명을 통해 고정시키기 위해 나무의 현재 형태를 보아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살아 있고 변화하는 것으로서 나무의 존재를 봐야 한다.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작나무에 같은 이름을 부여한다. 우리는 자작나무에게 동일한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자작나무의 생생한 현존presence으로부터 자작나무를 지워버린다. 또한 자작나무와 함게 현존으로 들어가려는 우리의 감각지각을 스스로 박탈한다. 86

 

듣기. 

나와 함께 존재하는 생명 존재와 더불어 그 생명 존재와 맺는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듣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한 듣기에 이르려면 우선 침묵이 무엇인지 경험해야 한다. 침묵은 우리가 다른 생명 존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근원이자 매개이다. 우리 전통은 침묵을 해치는 말하기를 선호해 왔다. 여기서 헤겔과 붓다를 비교할 수 있다. 

. 헤겔에게 도의 목표는 가능한 모든 담론을 하나의 전체로서 모아들일 수 있는 것

. 붓다에게 도의 목표는 침묵에 이리는 힘을 갖는 것이다. 우리 전통에서 침묵은 과소평가되고 경멸받으면서 자연과 자연에 동화된 여성에게 남겨졌다. 여성이 침묵을 지키거나 교감적 언엉를 사용하여 태아나 신생아가 존재하고 자랄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간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여성은 다른 생명 존재의 말을 듣는데 익숙하다. 여성들은 부호화된 메시지만이 아니라 몸짓도 듣는다. 식물 존재으이 경우라면 몸짓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은 필수적이다. 87

 

다른 존재의 고유성을 듣고 나 자신의 고유성과 연관하여 그것의 환원불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은 진리와 담론, 혹은 전체를 안다고 가정되는 주인에 대한 의존을 극복하는 길이다. 

 

이것은 다른 생명을 나의 생명과 나의 세계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생명을 듣고, 이 생명이 내가 조작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무언가로 존재하고 성장할 수 있게 놔둔다. 

 

다른 생명 존재와 나 사이에 시공간의 침묵을 남겨놓는 것은 각자의 경계를 지킴으로써 나 자신으로, 내 자신 속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다.내가 내쉬는 숨결은 식물의 생명에서 전적으로 ㄷ독립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식물과의 관계에서 내가 인간이라는 점에 충실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식물에게 물을 주어 식물이 나에게 깨끗한 공기를 줄 수 있게 한다. 

 

침묵은 지배나 종속 없이 더불어-존재하는 일being-with에 핵심적이다. 침묵은 차이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최초의 장소다. 침묵은 우리가 기계처럼 메시지를 등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장소이자 그런 장소를 만들어낸다.

 

맛과 냄새

우리 전통은 그것들이 지닌 인간적, 정신적인 잠재력으 ㄹ고려하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자연의 속성아지 우리의 요구 차원에 남겨놓았다.  중요한 점은 많은 음식과 술을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우리가 그걸 멋진 맛을 경험하도록 해준 신을 찬양하면서 정말로 좋은 음식과 음료를 골라서 향유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미각을 영적 생성에 이르는 도가 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후각을 무엇보다 동물적 감각으로 여긴다. 우리의 코는 무엇보다 숨 쉬기를 통해 자연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건너가는 특권적 감각이다. 

 

촉각

내가 인간들 사이로 돌아오는 위험을 무릅쓰도록 복돋아 준 것은 아마도 초각일 것이다. 90

 

8장 인간 동반자에게 향수를 느끼기

 

인간 동반자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정원과 숲에서 닫시 한번 일어났다. 91

 

인간 동반자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것은 모성적 돌봄이나 의료적 돌봄의 욕구로 대체될 수 없다. 동반자에 대한 욕망은 자율성을 얻고 건강을 회복한 후에 생길 수 있다. 성적 끌림은 단순한 성적 본능이나 충동과 혼동될 수 없다. 인간 동반자를 향한 욕망은 우리가 홀로 자연에서 느끼는 충만함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 - 사람 혹은 사물 - 를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욕망에는 새로운 상태,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관계 바깥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인간성 성취의 또 다른 단계에 다가가는 것이 들어 있다. 

 

동반자를 향한 갈망이 참으로 순수하고 강렬했던 두 순간이 기억난다. 두 번 모두 내가 자연과 교감을 나누며 충만함을 느꼈을 때 일어났다. 지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다 완전한 나눔에 대한 갈망을 일깨웠던 것은 내가 온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에덴 동산에서 우리의 삶이 이랫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선악에 대한 지식을 전용하는 척 가장하기 전에 우리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신의 선물로 찬양했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만물을 판단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행복을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판단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생명을 꽃피게 하지 않고 자신을 한낱 자연의 생명에 불과한 것으로부터 잘라냄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길이다. 서구인이 차이를 유지한 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걸어간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자연이 주는 초월성에 다가가려면 이와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전자의 관점에서 인간이 되는 것은 구성된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자연적 에너지를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후자의 관점에서 인간이 되는 것은 자연의 에너지를 인간화하고 그것을 다른 생명 존재와 공유하기 위해 키워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 작업은 서로 다르게 성차화된 인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93

 

나는 자연의 충만함에서 시작하여 그 충만함에 대한 감사 위에서 미래를 건설하여 했다. 어떻게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자연에서 경험했던 행복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매일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런 시작의 습관은 나의 일상을 바꾸었다. 나 자신을 느끼고, 내 삶이 지고의 행복이라는 실타래를 따라 흐르는 것에 감사를 느끼는 쪽으로 나의 일상이 바뀌었다. 그러자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자연에서 는낀 행복은 내가 사랑에서 느껐거나 사랑 속에서 살고 싶어했던 것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나는 자연에서 느끼는 행복과 사랑에서 느끼는 행복이 서로 얽혀 들어갈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이 둘을 결합시킬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감각적 초월sensible transecndence이라는 말이 갈망과 직관을 동시에 가리키면서, 나의 인간적 여정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전체적이며 체화된 지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94

 

복음의 전수 방식은 예수가 표상할 수 있는 감각적 초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인간이 된 신성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인간성 안에 초월성이 존재할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문제는 기독교 유산이 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전승되어 온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담과 이브가 인간성을 성취하기 전에 신성에 도달한 것처럼 가장해 왔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 다시 말해 신성이 우리의 육화된 상태를 키우는 것을 건너뛰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독교 유산을 잘못 이해해왔던 것인지 여부입니다. 94

 

예수의 신성한 속성이 전승되는 데 있어서 부계 계보를 강조하는 것은 내가 감각적 초월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나지 못하게 방해했다. 나는 감각적 초월의 경험은 무엇보다 먼저 수평적 차원에서 서로 다르게 성차화된 두 신체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각적 초월이 일어나려면 물질적 신체가 존재해야 하고, 또한 신체에 생기를 불어놓고 한 신체를 다른 신체와의 관계 속에 놓는 성적 속성이 존재해야 한다. 이와 함께 두 신체가 같은 성이 아니면서 자신의 자연적 속성에 충실할 대 초월이 일어나야 한다. 

 

성차화는 우리 존재와의 관계에서 경험적이며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구체적 형태아 개별성을 부여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숙물 세계와 공유될 수 없는 추상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정체성은 모종의 성적 행위를 하기 전에 이미 성차화되어 있다. 나의 인간적 조건을 취하며너 식물과 생생한 교감 상태에 머무르려면 성차화된 속성의 초월을 체화하는일이 필요하다. 인간 동반자를 갈망한다는 것은 초월을 몸으로 체화할 필요성뿐 아니라 그것을 갈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96

 

내가 정원이나 숲에서 느낀 행복감은 여러 이유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해가 지면 땅거미가 질 것이고 소나기가 내리면 몸을 피할 곳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또 우리가 언제나 초봄이나 한여름에 있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다행히도 인간 동반자에 대한 ㅇ욕망은 자연에서 느기는 행복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애석함을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자연에서 느낀 행복을 기억하고, 자연이 내게 준 것을 잊지 않으면서 인간 동반자를 향한 여정을 계속하는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 그 행복의 의미를 내면화해야 했다. 96

 

시를 쓰는 일은 자연에 머무는 것만큼 충만함을 가져다주었지만, 나느 ㄴ여전히 더 많은 것을 갈망했다. 나는 내가 갈망하는 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을까? 내가 이 질문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간단한 첫 번째 대답은 상호성을 살망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촉각의 상호성이었다. 

 

하지만 자연은 그/그녀의 팔로 나를 안을 수 없다. 상호관계에 도달하려면 나는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상호성에 이르기 위해 타자를 타자로 존중하고 싶다면, 이 초월은 가장 먼저 촉각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초각을 포함해야 한다. 나의 전통은 여전히 인가이 지닌 이런 잠재력을 무시하여 몸으로 체현된 관계를 본능적인 욕구 차원이나, 기껏해야 아이를 갖기 위한 변태적 행동 차원에만 남겨좋는다. 이런 대안들 중 그 어느 것도 내가 자연에서 느낀 행복 너머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너머로 나아가려면 나는 나 자신에게 돌아와 나 자신 안에 있어야 했으며, 나의 인간적 개별화를 취하고 별개의 신체로서 나의 한계를 존중해야 했다. 게다가 나는 나의 자연저 속성이 그 자체로 나 자신에게, 그리고 타자와의 고유에서 행복의 원천이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나는 자연과의 교감을 느낀 무한을, 나의 인간적 욕망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내가 떠맡아야 하는 무한으로옮겨야 했다. 이런 무한의 느낌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기려는 행위가 내가 다시 인간들 사이로 돌아가도록 독려했다. 98

 

9장 인간들 사이로 돌아가는 위험을 무릅쓰기

 

자연에서 만난 모든 것들은 진리를 따르고 있었지만, 도시에서는 모든 것들이 인공적으로 코드회된 것처럼 보였다. 자연에서 만난 진리를 나를 나 자신의 진리로 돌려보냈다. 사람들은 자기 외부에서 규정된 진리, 자신의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점점 더 멀어지 ㄴ진리에 맞추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자신으로 돌아가야 진리에 빛을 던질 수 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자기 바같을 떠돌아다니느라 함께 나눌 생명의 에너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생명에 충실하지 않은 문화적 작업에 예속되어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망명 상태에 빠진 채 다른 사람들이 존중하는 진리를 찾아 해맸다. 102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공간과 관련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망명 중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보에 기댔다. 정보는 이들이 인위적인 가족적 거주지로 기능하는 사회로 통합해 들어가는 하나의 통로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습관과 관습과 기존 규칙을 유지하는 일은 전 층위에서 도시의 통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주요 역할이었다. 이런 습관과 관습과 규칙들이 가족 구성원들을 묶어주는 자연의 유대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의적으로 구성된 이런 연결의 특성을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자연의 층위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다. 사람들은 생명의 에너지를 걸러내는 부호화에 예속된 체 간헐적으로 다른 사람과 교감하는 순간에 이른다. 그러나 이 교감의 순간은 여러 형태의 부호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서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키워질 수도 없다. 우리가 이런 교감의 순간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더욱이 두 사람이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런 순간은 하이데거가 말한 '밝힘'처럼 우리의 삶에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은 극히 예외적으로 일어나며, 좀처럼 '공동이 빈터'가 될 수 없다. 

 

아마도 나는 이런 종류의 경험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경험은 나무 잎사귀와 기둥을 거쳐 숲의 심부를 밝히는 햇살이나 빛과 관련이 있다. 하이데거가 이런 현상을 사유의 차원으로 옮겼다면, 나는 그것을 내 존재 전체로 살아내면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 태양을 가급적 연결시키고 싶다. 욕망과 사랑은 우리 내면의 태양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두 태양의 빛을 서로에게서 갈망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건이 우리의 자연적 속성과 영적 속성 사이에 가교를 만들어 우리의 인간성을 실현시킬 수는 없을까? 

 

내 생각에, 우리 사이의 욕망과 사랑은 언제나 신비한 경험에 관여하고 있으며, 언제나 부정적인 경로에 직면한다. 우리는 타자를 만날 수 있게 되기 전에 타자를 타자로서 지각하고 있다는 환영을 얼마나 많이 포기해야 할까? 진정한 공유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신처감각과 느낌, 직관과 사유를 얼마나 많이 변화시켜야 할까? 

 

이런 문화 영역은 두 사람, 무엇보다도 같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공유를 허용하지 않는 규칙과 규범에 종속된채 제대로 키워지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은 그들의 감수성을 살아내거나 표현하는 양태에 의해, 또 타자의 타자성을 고려할 수 없는 다른 본능적 에너지 때문에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본능적 에너지는 고유보다는 소유나 전용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타자의 타자성을 고려할 수 없다. 이렇게 잘못 구성된 주관성을 다시 건너가는 일은 신성의 본질을 지각하기 위해 신비주의자들이 걸어갔던 부정적인 길과 공통점이 있다. 불행히도 우리 전통은 신에게 닿기 위해 우리의 인간적 조건을 너무 빨리 건너뛰었다. 이는 은총보다는 고통을 안겨주고,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경험한 행복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원죄를 영원히 지속시킨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우리 안의 서로 다른 부분 사이에서 찢겨진 채 - 처음에는 우리의 신체와 정신 사이에서 - 자신을 찾아 헤매고 다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으거나 온전함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작업은 우리의 자연적 속성을 키우는 일 바깥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절대는 자연의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다. 자연의 경험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들로서 만날 수 없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자연적 속성을 대체해 온 여러 문화의 구성물들 사이에서 찢겨져 있으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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