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 우리_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뤼스 이리가라이
개인적 기록, 동등한가, 다른가?
시몬 드 보브와르와 장 폴 사르트르는 항상 심리분석을 경계했다. 나는 심리분석가로 훈련받았고, 이 점은 정체성을 성적인 것으로 이론화하는데 중요하다.
또한 나의 철학적 배경에는 의식과 역사의 발달을이해하는 데 있어서, 특히 그들을 성적 결정론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데 있어서 심리분석이 한 단계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 해방에 대한 내 생각이 단순히 두 성간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섬을 의미한다.
단지 어머니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할 때, 비로소 여성들은 이러한 권리를 누릴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제고되고 변형되어야 할, 수세기 동안 계속된 사회, 문화적인 가치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있다. 11
우리 시대의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성이 중성화되도록 귀에 거슬리는 요구를 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중성화는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남녀 양성에 각기 정당한 각 성에 속한 가치들을 정의하는 것이다. 양성을 각기 존중하면서 성의 문화를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공들여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어머니와 아버지 < 창조적인 부부관계
여성의 성욕에 문화적 가치를 두거나 돌려 줌으로써 한 성이 다른 성에 대한 일반적인 이 힘에 균형을 부여하는 것은 순전히 사회 정의 문제이다.
남녀의 평등은 성별화된 성이론 없이는 그리고 사회적 권리와 의무안에서 다른 존재로서 각각의 성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다시 쓰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문제는 문화적인 것 안에서의 자연적인 것, 자연적인 것 안에서의 정신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이행이다. 13
1 여성 족보의 무시
성별화된 정체성, 성적 차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그 이유는,
ㅇ 성차는 인간 종족의 보존을 위해 필요. 단순히 출산의 장일 뿐 아니라 여기서 삶의 재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ㅇ 성차를 규정짓는 것은 우리의 문화와 언어를 결정짓는 것이다.우리의 성의 경제는 모든 미적, 사색적, 윤리적 구상으로부터 단절되어 버렸다. 우리 문명은 성에 따른 질서를 망각한 채 진보해 왔다. 우리 문명의 장래와 인간적 성숙은 위해 필요한 것은 성별화된 문화이다.
ㅇ 성문화의 후퇴는 남성의 세계가 여성의 세계를 장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다른 가치들의 형성과 병행한다. 우리가 완전히 남성 중심의 계보에 따라 살고 있음을 명백히 해야 한다.
여신들에게서 남신들에게로
정신적 족보
담론의 경제
신탁과 진리를 장악한 남성 신들은 지상에 뿌리 내린 육체의 근원으로 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켰다. 이 단절은 법과 정의, 그리고 수사학에서의 변화를 수반했다. 새로운 논리적 질서는 여성의 말을 검열하여 점차 들리지 않게 만들면서 형성되었다.
믿어지지 않는 몰인식과 망각 속에서 가부장 전통은 모계 족보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오늘날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모녀 중심의 계보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주장한다. 이러한 망각이 가부장 문화의 징후다. 세계와 자신이 갖는 관계의 기원에 대해 무지한 현대인의 고독과 방황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17
우리는 여신 없이 어떻게 대지에서 살 수 있는가?
존재한다는 말etre과 살다라는 말habiter의 인도유럽어 어근은 가정의 화덕, 불을 지키는 여신인 헤스티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정에서의 신성은 여성에 의해 지켜진다. 어머니에게서 딸에게 전수된다. 이 불은 여성에 의해 순수성이 지켜지는 것을 뜻한다. 순수성이란 여성의 주체와 여성 족보에 대한 여성의 충실함을 의미한다. 여성의 족보와 그 특질을 존중하는 것은 가정의 신성한 특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지상의 주거 차원을 상실한 것은 플라톤부터 철학에서 천상의 신들로 정의된 남성 신들을 위해 헤스티아를 소홀히 한것과 병행한다. 이들 천상의 신들은, 우리에게 지상에서의 삶을 낮설게 하고 이 삶을 일종의 국외 추방으로 느끼게 한 것 같다.
그녀는 어떻게 그가 아닌 존재가 되었는가?
가부장 문화가 형성된 과정은 언어의 심오한 경제학 안에 나타난다. 문법상의 성의 분배는 의미론적 근거를 지니며, 우리의 감각적 육체적 경험과 연결된 의미를 갖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성차는 단순히 자연적 소산, 언어 외적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 성차는 언어를 형성하는 조건이 되며 동시에 언어에 의해 한정되어진다.
생물-무생물, 구체-추상, 남성형-여성형과 같이, 성의 차이는 곧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부권 중심의 문화는 문법상의 여성형의 가치를 "현실과 세계에 대한 그들의 묘사가 부정확하다"고 몰아감으로써, 격감시켰다. 따라서 여성형은 다른 성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프랑스어에서 비남성형 즉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현실이 되어버린다. 문법상의 여성형은 주관적 표현으로 사라지게 되고, 여성과 관련된 어휘는, 여성을 남성형 주어에 대한 목적어로 한정하는 가치 없는 용어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여성은 여성으로 말하거나 들려지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성들은 가부장적 언어 질서에 의해 배제되고 부인된다. 20
정체성을 상실한 중성
중성적인 입장에서 문화적인 발언을 하려는 여성들. 이 입장은 현재 우리 언어로는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생물학적 성 뿐 아니라 문법상의 성을 부정하게 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성적인 장면의 규범과 전형화된 가족에 복종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화적 차원에서 우선 무성 혹은 중성으로 살아간다. 남성 위주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은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주체성과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포기는 의사소통면에서 개인 및 집단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봉착하게 된다. 또한 문화도 그 결과 황폐해지고 성별화된 단일극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고찰의 근본 취지는 성 질서 혹은 성 무질서와 관련해서 사회 조직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분석을 위한 세밀한 도구를 제시해준다. 사회 정의란 우리가 거의 인지할 수 없는 문화적 변동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에게는 거액의 돈을 갖게 하곡 어떤 이들에겐 못 갖게 하는 것을 문화적 퇴폐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우선 필요한 것은 모든 인간이 존엄성의 권리를 갖는 것이다. 이는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모든 주체는 동일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되는 것이 걸맞지도 않다. 사회 정의 특히 성과 관련된 정의는 언어의 법칙과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진실과 가치 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화적 수단의 변경은 물질적 재산의 분배만큼이나 장기적 차원에서 중요하고, 다른 하나 없이는 나머지 것도 얻을 수 없다. 21
2 종교적 신화와 세속적 신화
일상 생활에 미치는 종교의 영향
종교와 정치의 분리 제도, 권력의 분산
문화에서 종교의 영향이 얼마나 의미심장한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는 적어도 그리스, 라틴, 동양, 유태계 그리고 기독교 전통에 젖어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살고, 교류하고 영속화하는 예술과 철학, 그리고 신화를 통해서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부정함으로써 언어질 수 없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해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의 의문이 제기되어 본 적이 거의 없는 부권 중심의 신화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그에 수반되는 남성 지상주의와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냉철한 판단을 결여함으로써 그 자체가 유일하게 가능한 질서라고 믿는 신화이다. 우리가 신화를, 어떤 시대에 무엇이 사회를 조직하는지를 드러내 주는 주요한 표현이 아니라 부차적 현실을 나타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야기와 이미지로 된 역사
막연하게 선사시대라 불리는 것에 대한 무지로 인해 가부장제가 유일하게 가능한 역사라고 오인된다. 서사시대 전문가들은 역사적 사실을 신화의 실제 기능 혹은 설화나 전설의 기능으로 단순화시킨다. 사실 신화적 재현의 의미를 부수적인 장식으로 보는 것은, 특히 성차의 경제와 관련된 문화적 차원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을 수반한다.
역사적 표현으로서의 신화. 야곱 바흐오펜 연구
현재 문화와는 다른 원시 문화를 증명하는데, 그 윈시 문화의 기치들이 검열받고 전도된 채 우리에게 전수되어 있다. 이 가치들이 때로는 가부장적 규범을 거쳐 부상한다. 25
신성한 여성
딸을 안고 있는 여인상
동정녀 어머니와 그의 아들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구원의 모델로 그려지는 진리로 부터 마리아와 그의 어머니 안나를 대변하는 이 조각상 앞에서 나는 다시금 내 몸과 감정,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여사 속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느껐다. 나와 나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여성들의 육체적 구현을 경멸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미적이고 도덕적인 상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25
여성들은 왜 이 모든 것 - 신성, 왕권, 정체성 -을 잃어버리고 말았을까?
바흐오펜은 여성 상위체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가져다 준 반면 부권제로 옮아간 동기에 관해서는 엄밀한 해석을 내리지 못한다. 나는 그가 주장한 대로 - 헤겔과 같이- 부권제가 여성의 통치보다 단순히 더 정신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부권제는 역사상 필요한 단계였으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그것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부권제의 성취를 의미할 수 없게 된다.
부권제 질서는 저 너머 내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태어나기 전과 특히 사후의 세계, 생존하기 위해 발견되고 탐구되어야 할 지구 외의 다른 혹성들 등등. 부권제는 현존하는 우주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불확실한 가상의 세계를 기반으로 지불하기 불가능한 계획들을 끌어낸다. 부권제는 또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의 족보를 없애고 대지와 물질적 우주에 대한 존중을 말살함으로써 부권제 문명은 사회 현실의 한 부분을 억압해 왔으므로 오늘날 합리적으로 사회 현실의 진리를 생각하기가 힘들게 된다. 27
3 여성의 담화와 남성의 담화
담화는 성별화되어 있다.
사회의 영향인가? 언어의 영향인가?
이 구분부터 거부해야 한다. 말하는 주체의 뇌 속에 보편적인 언어학 구조가 항상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시대는 그 나름의 필요성을 갖고 이상을 창출하며 그와 같은 이상을 강요한다. 어떤 것은 다른 것 보다 역사적으로 더 오래 지속되는데, 성에 관련된 이상이 좋은 예다. 이러한 이상은 점차 그틀의 규범을 우리 언어에 부과한다.
프랑스어, 문법상 남성형이 항상 지배한다. 중성이나 비인칭은 남성 대명사로 표현된다.
남성은 마치 자기 자식이나 아내 그리고 지신의 소유물에 자기 고유의 이름을 붙이고 싶듯이 우주에 자기의 성을 직간접적으로 부여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점은 남녀 양성이 세계, 사물, 대상과 갖는 관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성의 해방은 언어학적 변화를 의미한다
주체의 해방은 성차별에 예속되거나 차이를 무효화하는 규칙들에서 벗어난 언어를 요구한다.
다른 성과 썩이지 않는 전략은 담화 내용에 대한 명백한 문제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보다더 언어 형식과 법칙의 경우에 더욱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여성들끼리를 포함해 모든 교환체계의 차원에서 작용할 수 있도록 이들을 변화시키기위해서는 이러한 전략이 적용되어야 한다. 36
4 모성의 질서
우리는 두 가지 행동양식에 종속되어 있는듯. 다원식 모델과 파블로식 모덜. 과연 우리는 이 두 거대 구조와 변수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 존재의 차원에서 경쟁적인 투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문화적 차원에서 거의 치명적인 반복으로부터? 이 둘의 복잡한 얽힘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성의 정체성, 특히 여성의 정체성이라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공해 주는가? 나의 대답은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다른 모든 형태들과 투쟁하며, 자유로 혼동하는 조건부의 사회규칙에 여전히 묶여 있다. 따라서 둘이 아니라 하나의 성, 즉 하나의 문법상의 성에 길들여져 있어서 우리가 친숙한 가부장제 문화와 다른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주 법칙과 더불어 성차의 구조에서 이 거대한 기존 모델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태반관계는 결정론 즉 생명과 문화의 유폐에 대한, 출구 혹은 여성 신체의 정체성에서 유래한 출구를 제시한다. *어머니와 자궁 내 아이 관계의 특이성 연구.
이 둘의 관계는 정신분석학 같은 가부장적 상상력이 생각하는 것 처럼 융합되어 있지 않고 실제로는 신기할 정도로 질서 잡히고 서로의 생명을 존중한다.40
임신 기간중 태반의 중개 역할.
태반이란?
태아에 의해 형성된 조직의 일종으로 자궁점막에 밀착해 비늘모양으로 덮여져 다른 것과 분리되어 있다. 태반은 태아가 형성한 것이지만 태아와는 거의 독립된 기관이다. 두 차원의 중개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태반은 모쳬와 태아 중간에 위치하며 이는 모체와 태아의 조직이 서로 융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태반이 두 기관사이의 생체교환을 조정하는 체제를 구성한다는 것. 영양물과 배출물의 공급 뿐 아니라 모체의 신진대사도 변화시킨다. 모체와 태아 모두를 위해 물질을 변형시키고 저장, 재분배한다. 그래서 태아는 모체를 탈진시키거나 영양물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자랄 수 있다.
임신 초기, 태반은 모체의 뇌하수체에서 난소의 분비물을 끌어온다. 호르몬 준비를 조정할 수 있는 자동제어체제를 갖고 있는 듯.
태반의 상대적 자율성과 통제 기능은 융합(모체와 태아의 살과 피가 썩이는)이나 침범(모체에서 흡혈귀처럼 모든 영양가를 빨아먹는 이물체로서의 태아)의 형태로 환원될 수 없다.
평화로운 공존
타자를 거절하는 현상과 관련해서, 장기이식, 면역성 문제와 태반 구조의 독자성 간의 차이.
장기이식의 경우, 받아들이는 기관이 이식되는 기관을 낮선 것으로 인식하여 이 물체를 거부하기 위해 방어체계를 개시한다. 이 인식은 각 개인 특유의 항원(자아의 표시로 불리기도 하는) 혹은 표시체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장기제공자를 선택하거나 면역을 저하시키는 방법을 통해 거부반응을 완화시킨다.
태아는 모체기관에 반쯤은 낮선 존재, 항원의 절반은 아버지에서 온 것. 모체는 이 절반을 거부하기 위해 방어체계를 개시하는데 역시 낮선 부분인 태반이 이 방어체계의 활성화를 막는다.
면역의 패러녹스.
패러독스 이상이다. 어머니 자아와 태아인 타자간의 일종의 교섭이다. 모체의 면역반응을 막는 태반 조직은 모체가 이물체에 대해 인식할 때에만 작용한다. 모체의 모든 반응을 억압하는 자동적보호처제가 아니다. 반대로 모체가 타자 즉 비자아를 인식해야만 그 첫번째 반응으로 태반의 구성요소가 만들어진다. 마치 어머니가 태아가 타자임을 항상 알고 있었고 태반에게 이것을 알려 모체기관이 이를 타자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구성요소를 만들게 하는 듯. 이러한 관용체제는 장기이식(타자로 인식된 이식된 기관이 피이식자의 면역 거절반응을 즉시 활성화시킴)과 암종양(타자로 인식되지 않아 아무런 방위기제가 작동하지 않는)의 경우와 구별된다. 43
문화적 기억 상실
불행히도 자연의 질서에서 분리된 우리 문화는 태아의 관계가 갖는 윤리적 성격을 무시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
태반의 구조에 대한 무지한 남성의 문화적 상상력이 초래할 결과, 모국어와의 관계와 관련한 문제들.
정신분석학 비판.
. 태어날 때 아기의 미발달 상태와 타자(어머니)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아기와 어머니간의 상상적인 융합상태를 정당화시킨다.
. 이 융합은 임신중 가졌던 유기적 융합의 연장으로 암암리에 제시되며 아기가 주체로 형성되기위해 받드시 깨뜨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제 3자(아버지, 법, 아버지의 이름 등)에 의해 이 융합을 깨뜨림으로써 아기가 상징계에 들어서고, 언어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제 3자는 이 융합이 정신병의 혼돈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만든다고 흔히 생각된다.
. 그러나 제3자는 이미 임신중에 태반 덕분에 출생시에는 자궁공동으로 나옴으로써 서로 분리되는 구분을 다른 차원에서 반복하고 표시하는 것 외에 다른 무슨 일을 하는가? 어머니 자아와 아이 자아간의 구분은 언어에 의해 언어 안에서 의미를 얻기 전에 이미 존재하며, 이 분리는 천국의 상실 또는 상처를 주는 추방이나 배제와 같이 우리 문화의 상상계가 전하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상상계 양식에 따라 존재한다. 이러한 상상계 양식은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을 사유하는 유일한 방식이 아니다. 이는 임신과정 특히 태반의 특별한 역할에 대한 기이할 정도의 무지에 의한 것이다. 44
모든 인간의 빚, 임신한 여성이 아니라면 누가 자신의 몸을 먹도록 제공하겠는가?
(비고, 그리스도의 육화야 말로 기적이다)
모체와 맺은 관계의 물질성
태반이란 어머니의 몸 덕분에 성장하는 아이의 기관이다. 상징적으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부여한 선물.
5 차이의 문화
여성의 몸은 병이나 거부반응, 생체조직의 죽음을 유발하지 않고 자기 안에 생명이 자라도록 관용하는 특수성을 지닌다. 불행히도 문화는 타자에 대해 존중하는 이 구조의 의미를 뒤바꾸어 놓았다.
문화는 모자관계를 종교적 우상으로까지 맹목적으로 숭배하였으나, 이 관계가 나타내는 자기 안에서 타자를 관용하는 모델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여성의 몸은 실제로 남성 염색체와 여성 염색체가 만나 수태됨으로써 아들과 딸에게 동등한 생명의 기회를 허락한다.
남성끼리의 문화는 반대로 작용한다. 다른 성이 가져온 것을 사회에서 배제해 버린다. 여성의 몸은 차이를 존중하는 반면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몸은 차이를 배제하곡 계급서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자로서 여성은 이러한 사회 구조에서 자연적 기반 즉 관계상의 의미에서 그 중요성이 모호한 채로 남아있는 기반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모자관계ㅣ의 숭배는 분명 여성의 관용을 과시한다. 그러나 딸들 역시 남성의 정액으로 생겨난다. 딸은 어머니에 의해 단성생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47
우리 문명은 두 가지면이 결핍되어 있다. 두 가지 억압, 부정, 혹은 비정상을 드러낸다.
1. 자신의 몸 안에서 타자에게 생명과 성장을 허용하는 여성은 남성들만이 세운 질서로부터 배제된다.
2. 여자아이는 남성과 여성에 의해 수태되었더라도 아버지의 아이로서 아들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지위로 사회에 속하지는 못한다. 여성은 출산을 위한 가치있고 자연스런 신체로 보호된 채, 문화에서 벗어나 있다.
여성이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는 생물학과 문화와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물학이 여성의 착취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생물학적 관점의 설명을 모두 거부하는 것은 곧 이 착취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남성 신의 통치가 확립된 소박한 문화단계에 여전히 머물러 있도록 퇴행하는 것이다. 이때 유일하게 남성의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버지의 신성한 자식이며, 아버지와 직접적인 유사성을 보이는 자만이 가치있는 아들로서 합법화될 수 있다.
기형아, 비정형아, 여성.
남성과 대등한 주체적 지위를 얻기 위해 여성은, 그러므로 자신들의 다른 점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여성 정체성의 모든 틀은 구축되거나 재구축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미개한 영역인 모녀간의 정체성 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가능한 방법 몇 가지. 실제 모녀관계는 가부장제 문화로부터 이중으로 소외되어 있다. 1.여성은 주체로 거부당할 뿐 아니라 2.딸은 딸이라는 주체로서 동등하게 인정받지 못한다.
딸들에게 정신과 영혼의 가능성을 어떻게 부여해 줄 수 있을까? 이것은 모녀간의 주체적 관계라는 존재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모녀관계를 발전시킬 몇 가지 실천 방향.
1.생명과 음식을 존중하는 마음을 다시 배우자. 이는 곧 어머니와 자연에 대한 존중을 회복하는 것. 모든 빚과 영양물을 돈으로 갚거나 살 수 있는게 아니다.
2.모든 가정과 공공장소에서 모녀가 쌍을 이루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야. 성모 마리아와 모친 안나 상. 딸에게 족보의 정당한 형상화를 심어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수적 조건을 부여해줄 것임.
3. 어머니들에게 딸들과 여성 복수형을 사용할 기회를 만들라 권한다.
4. 모녀는 여성으로서 나ㅡ너로 정의되기 위해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상 현실에 관해 의사를 교환할 수도 어떤 것들을 교환할 수도 있다. 자녀, 음식, 외모, 성적인 외도에 관한 화제를 넘어서.
5.어머니는 일찍 부터 성에 따는 계급에서 벗어나 차이를 존중하도록 딸에게 가르칠 것.
6.자신과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공간을 소유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여성이 자신의 내부공간(출산과 성을 위한 공간, 자궁, 질)에서 외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주체로 경험하기 위해 적절한 외부공간을 갖 는 것이 중요하다. 모녀사이에 이 공간을 만들 기회를 마련하라.
6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반사경>은 한 성이 다른 성에 대해 사용.교환.대표 등에서 독점적 권리를 갖는 것을 비판한다. 이 비판은 뤼스 이리가레라는 여자의 자기 몸에 대한 자기애, 자기 표상의 현상학적 발전의 시초와 더불어 이루어진다. 이러한 출발이 의미하는 것은 여성의 몸이 남성 담화나 그들의 다양한 예술의 대상으로 남아있지 않고, 여성 자신이 체험하고 동일시 하는 여성 주체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는 여성에게 그들의 몸에 적합한 형태ㅡ논리를 제시하랴고 시도한다. 또한 남성 주체에게 자신을 주체 사이의 교환의 시점에서 본 신체로 재정의 하도록 귄장하려는 의도이다. 61
7 나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겠다
무엇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현대문명때문에 우리 신체와 정신은 끊임없이 스트레스와 긴장의 공격을 받게되며, 그 공격으로 차츰 면역 조직은 파괴된다. 소음때문에 생긴 지속적인 스트레스.
소란스러운 성 권력.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수많은 커플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성적 관계와 유사하다. 남자의 특권.
정치분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자유 시민의 태도를 규제하는 행동, 거액의 자본을 삼켜 버리는 행동, 군사 방어의 명목으로 환경을 오염이키는 행동, 현재 우리의 생명과 심신의 건강을 위협하는 행동, 이러한 온갖 종류의 행동들이 어느 정도까지 남자들간의 기묘한 성적 유희의 소산이라고 상상해보는 일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수세기 동안 우리의 삶의 기본 골격을 짜왔다. 이 체제는 프로이드에 의해 긴장.방출.균형으로의 회귀 3단계로 설명된 남성의 성적 체계와 기이할 정도로 유사하다.
유일하고 남성적인 기껏해야 중성적인 성행위에 부응하는 이러한 문화적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는, 아들을 다른 방법으로 교육시키고 그리하여 남성들의 사회 행동을 수정하는 일에서 찾아야 한다. 호전적인 장난감, 게임, 이미지, 행동의 확산.
성욕을 계발한다는 것은 자식을 낳는 일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성적 에너지를 다른 사람과의 쾌적하고 풍요로운 공존의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일과 관련된다. 사회는 성욕의 억압, 부정, 소멸을 요구해서는 안되며, 또 성욕을 유아기나 동물적 차원에 머물게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성욕은 개인적 집합적 주체성으로 즉 자기 자신, 자신과 다른 성을 지닌 사람들, 국민 전체, 일반 사람을 존중할줄 아는 주체성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이를 달성하는 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떨어쳐 있는가. 병에 호소하여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일, 홧김에 혹은 무력감 속에서 장난감이나 문화를 부수는 식으로 주체성을 파괴하는 일은 지나치게 유아적이고 무책임한 성 행동이다. 68
8 성과 언어의 성
문법상의 성을 중성화하는 작업은 성별에 따라 특이하게 형성된 주체성간의 차이를 없애 버리고 문화가 형성한 성을 점차 배제하는 일과 같다. 엄청난 퇴보를 의미한다. 시급한 것은 남녀가 평등한 주체적 권리를 갖는 것. 여기서 평등은 분명히 이질적이지만 평등한 기치를 지니는 것을 의미하고 주체성이란 교환제도에서의 동등한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언어의 문화적 불공평과 그것에 내재한 일반화된 여성 차별 문제가 언어적 견지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가치가 높은 것은 남성형에, 가치가 저급한 것은 여성형에 할당됨. 단어의 문법상 성으로서의 남성이 암시하는 긍정적 의미는 주로 남성이 신격을 획득함으로써 확립되었던 가부장제 남성 중싱적 권력의 시기에서 유래됐다. 신의 권력이 없었다면 남성들은 모녀관계와 그 관계에 배당한 자연과 사회의 관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 아버지의 언어를 스스로 부여함으로써 신이 되었다. 남자는 말씀으로서 신이 되었고, 말씀은 육신을 창조하게 된다. 정액이 발휘하는 힘이 출산의 과정에 곧장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정액의 힘은 언어적인 코드인 로고스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로고스는 포괄적인 진리가 되기를 원했다. 70
남성들의 이 언어적 코드의 획득은 적어도 세 가지일을 시도한다.
1.남성이 아버지라는 것을 증명하고
2.남성이 어머니ㅡ여자보다 권력이 세다는 것을 증명하고
3.남성이 여자의 난자.자궁.몸이라는 자연의 영역에서 산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문화의 지평을 산출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권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남성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가치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남성의 이미지와 문법상 성에 부응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세계를 창조하고 조직화하는 일에 성별화된 커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은 여성형의 도구와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둘러싸여있다. 남성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성별화된 주체로서의 여성과 함께 세계를 운영하지 않는다. 오직 언어의 변화를 통해서만 이러한 일이 가능해질 수 있다. 73
재산의 평등한 소유를 통한 해방 그리고 동량의 가치를 지닌 주체성을 획득하는 일로서의 해방, 이 두가지 해방 사이에 오해가 요즘 일부 사회 이론과 실천에서 일어나고 있다. 정신분석과 맑시즘이 그 예다. 75
9 생명의 권리
생명보호에 대응하는 민법이 결여돼 있음. 오늘날 생명을 낳고 지키는 자에게 생명의 권리가 없다. 여성은 때로 종의 재생을 위한 인질밖에 되지 않는다.그녀들이 생명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 신체와 주체성에 대한 법적 권위를 갖기 원한다는 것이다. 82
시민으로서 여성 생명을 정의하기 위해 법적으로 써서 드러내야 하는 것들.
예, 피임과 낙태 인가, 여성에 대한 사적.공적 폭력으로 부터 보호. 광고나 포르노를 목적으로 한 여성 신쳉디 남용, 신체 이미지 언어의 성에 대한 차별적 정의와 사용에서의 차별, 강간 유괴 살인 어린이 착취등등
여성의 정체성은 가정과의 관계 속어서만 유일하게 정의되고 있다. 이 정체성을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라는 정체성으로서 재고해야만 한다. 인류는 실제로 종의 재생산을 행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류는 동등하게 창조자인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지며, 그 가운데 하나는 더욱 스스로 체내에서 아이를 만든다. 이는 자유.정체성.정신의 권리를 갖는 것을 어떠한 점에서도 막지 못한다. 83
우리는 아직 역사의 여명기에 있는 것이다.84
10 왜 성별화된 권리를 정의하는가?
남녀 모두를 위한 타당한 보편이란 자연적인 경제를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보편은 부분적 구축이며, 그 결과 권위적이며 부당하다. 가장 먼저 확립해야 할 보편은 인간 문화의 기본 요소로서 남녀 모두를 위해 타당한 법률을 보편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여성과 남성으로, 이 말은 성별화되어 있다는 뜻이며, 우리의 정체성은 이 차이를 존중하는 수평적.수직적인 시야 없이는 건설될 수 없다.
이러한 질서의 부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인간적인 것과는 다른 정체성의 장을 찾아 헤맨다. 남자는 집, 자동차, 자신이 달릴 수 있는 거리, 할 수 있는 운동, 좋아하는 동물, 유일신 등과 관련하여 자신을 정의내린다. 남성은 인간의 질을 개선하는 데 별반 관심이 없다. 진정한 시민에게 걸맞는 권리와 의무가 결여된 탓. 이것은 곧 무수한 전체주의, 폭력, 빈곤을 낳게 된다. 87
여성의 권리로 정의되어야 할 것은 바로 남성 및 남성들만의 문화가 자기 재산으로 삼고 있는 것들, 즉 여성과 아이 몸뿐 아니라 자연 공간과 주거지, 기호와 상의 체제, 사회.종교적 대표권 등을 의미한다.
여성의 권리로 주장되어야 하는 것들.
1.인간 존엄에 대한 권리
. 여성의 몸과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중단할 것
. 모든 공공장소에서 몸짓, 말, 이미지상으로 정당하게 여성 스스로의 가치를 표현할 것
. 여성의 기능적 부분인 모성을 더이상 착취하지 말 것
2.인간 정체성에 대한 권리
. 여성 정체성의 한 요소로서 처녀성(혹은 육체적.도덕적 순결)을 법에 기재할 것. 이는 소녀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주는 요소임. 소녀의 이러한 자율적 정체성은 성관계에 대한 여성의 자유로운 동의를 위해서, 남성 권력에 의해 여성이 소외되지 않는 결혼 제도를 위해서도 필수적임.
. 모성의 권리, 임신과 임신 횟수를 선택할 권리, 자식의 출생을 신분등기부에 등록할 수 있는 권리.
3.모자상호간의 권리
어머니가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권리
......
여성이 사회 질서를 관리했던 시기에 여성의 권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로 특징지워진다.
1.모년간에 재산과 이름을 상속할 수 있는 권리
2.좀더 늦은 상속의 경우, 자매와 막내에게 주워지는 권리
3.족보에서 신성과 종교적인 것의 중요성
4.태어난 나라는 <모국>으로 표현하는 것
5.토지나 향토신에 대한 존중
6.첫번째로 과일, 다음엔 곡식과 같이 자연적으로 생산된 음식에 대한 존중
7.삶과 리듬.빛.계절.해의 순환을 존중하는 시간관
8.사랑과 평화에 기초한 고양된 도덕관
9.인류의 모든 구성원과 공동체
10.동맹과 분쟁 해결의 문제에 관해 여성에게 위임된 중재
11.예술과 연관된 상징체계 94
11 <남성보다 더 많은 여성>
Sottosopra vert 성명(밀라노, 1985)에서 여성 해방운동의 한 목표로 편안함을 정의내리고 있다. 그 안에는 절절하면서도 힘과 소박함을 보여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1.사회에서는 타협이 항상 존재한다. 이때 타협이 편안함의 장일 경우는 거의 드물다. 남과 함께 한다는 것은 상호간의 존중과 배려를 요한다.
2.여성은 언어와 표현체계의 변화 없이는 편안할 수 없다. 언어와 표현체계가 남성의 주체에 적합하도록 남자들간의 편안함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존중받을 뿐 아니라, 여성들간에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서 언어와 표상의 문맥이 남성과 동등한 주체적 매개와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편안함을 찾았다고 스스로 상상할 때조차도 남성의 정체성에 종속되며, 그들 자신의 주체성이 결여되므로 서로를 끊임없이 침해하게 된다. 100
12 당신의 건강이란 무엇인가, 누구의 것인가?
나로서 자기를 주장하는 장이 없고, 그대신 담화, 이미지, 행위, 특히 자기의 상업적 이용에서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참아내야 할 때 어떻게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일반적으로 딸에게 지참금을 들려 보내는 일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있을지라도 여성의 신체가 예술, 산업, 광고, 매스미디어 시장에서 상거래에 대한 도덕상 및 종교상의 소송이 제기되지 않은 채로 국가의 묵인 아래 여전히 팔려 나가는 것은 변함이 없다.
여성이 출산에서 체험하는 자연적 고통과 사회가 여성에게 밀어붙이는 인위적 고통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여성은 지금 단지 홀로 출산을 체험하고 있으며, 주체로서 이 경험에 대해 말하는 일을 허락받지 않는 대신 어머니로서, 괴로워하는 자로서 늘상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그와 같다고 간주되며,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받아야 한다는,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보복법으로써 견디어 내는 이 정체성을 이어간다.
고통 없이 여자가 되는 길
대다수의 여성은 이 시련(출산의 고통)의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여성은 조금 혹은 대단히 마음에 상처를 입고 그 길에 들어선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대가를 지불케 한다. 원래 대개의 경우, 여성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나 서로 만날 수 있을 뿐이며, 딸과 어머니는 우리들 문화에서는 어머니가 되는 시련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서로를 재발견하게 된다.
고통이 여성이 되기 위한 유일한 규범이 된다면, 출산의 고통은 육체관계의 고통이나 여성의 정신적 고통 등을 정당화한다. 이들 모든 고통은 여성들의 <마조히즘>과 인내 능력을 보증한다. 오늘날 문화가 여성들에게 다른 많은 해결책을 남겨 주지 않고 있다. 마조히스트란 타자에게 향해진 공격을 자기에게 돌리는 사람이다.
출산의 괴로움은 만약 여성 자신이 그것을 선택하고, 여러 의미에서 어려운 이 경험을 말하도록 다른 여성들이 돕는다면 비교적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모성이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 원죄와 같은 결과로서 강요받게 되면 출산은 여성에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불공평해진다. 여성의 주체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106
나는 여성 건강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스스로에 의해 혹은 스스로를 위해 주체와 객체로서의 자기 정의가 금지되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져지고 있다고생각한다. 여성은 신체의 생명력을 통합하기 위한 주체적 질서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신체는 그것을 조직하고 활기를 부여하는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계획 혹은 목적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신체 치료법에만 의지하는 것은 조금의 참된 회복 기회마저 잃게 될 위험조차 있다.
건강하기 위해 여성은 여성으로서 성별이 있는 정체성의 특징을 스스로 발견할 필요가 있다. 인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주체적 정체성과 그것들의 고유한 대상 내지 목표로 이루어진다. 주체적 및 객체적 관리가 이만큼 불평등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은 지극히 병적이며, 병의 요인이 된다. 치유되도록 여성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주체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여성을 위해 일하는 임상의(페미니스트 심리요법사) 양성이 필요하다. 107
13 우리들의 미를 어떻게 창조해야 하는가?
여성 작품을 보고 있다가 그녀들이 표현하는 갈라져 찢겨지는 것과 같은 고뇌, 공포로까지 이르는 그 비통한 생각을 접하고 나는 자주 슬픔을 느낀 적이 있다.
1.고통을 해명한다는 것은 여성 쪽에서는 정당한 행위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 및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작용이기도 하다. 자기들의 체험에 대해 침묵할 것을 강요당하는 여성은 종종 실어증이나 마비 등의 신체증상을 보인다. 개인적 극단적 고통을 굳이 공표한다는 것은 몸을 편하게 해주고 별도의 시간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치료 효과가 있다.
2. 여성의 이 경이로운 작품(아이의 출산)은 어린아이, 그것도 먼저 남자아이를 낳는 의무로 바귀고 말았다. 따라서 우주의 가장 위대한 창조자인 여성은 남자의 사회질서 재생에 봉사하는 하녀가 되었다. 자신들의 걸작에 주어지는 명예 가운데 여성에게는 대개 출산이라는 <일>의 고통과 어머니 노릇을 하는 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다 부권제 문화의 질서는 모든 창조를 여성에게 금지하고,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여성을 출산이라고 부는 것에만 가두어 놓았다.
3.여성인 우리들은 자기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형태의 질서 속에 갇혀다. 우리들이 존재하려면 이들 형태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강요된 규범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몸짓은 다양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 우리들의 신체나 정신을 숨박히게 하는 것을 벗어던지고 싶다면 우리들고 자멸한다.
. 형식적인 감옥, 족쇄를 부순다면 우리들에게 남겨진 육체가 어떤 것인지 발견하게 된다. 색은 형태.진실.신앙.습득된 기쁨과 고통을 타고 넘어 생명 가운데 존속하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색은 또한 우리들이 성을 갖는다는 본질, 우리들의 육화라는 이 환원될 수 없는 차원을 드러낸다. 감각에 관한 온갖 것이 벗겨질 때 우리들에게 남은 것은 색, 그것도 우선 우리들의 성과 일치하는 다양한 색이다. 돌과 같은 중성의 단조로움이 아니라, 우리들이 여성이기게 갖는 다양한 색이다. 색은 또한 자연 가운데, 특히 식물 가운데 잘 드러나며, 생명과 그리고 날, 계절, 해에 따른 성장과 변화를 표현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색은 생명이 유성임을 이야기 한다.
. 이미 코드화된 형태를 부숨으로써 여성은 자기 본질과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자기들의 형태를 발견하고, 자기가 어떤 자인가에 따라 꽃을 피울 수 있다. 원래 이들 여성 형태는 늘상 미완성이며 끊임없이 성장한다. 왜냐하면 여성은 자신의 몸 안에서 성장하고 개화하며, 수정하고 스스로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처녀성이라는 남자가 만든 이미지에 의해 단 하나의 꽃으로만 될 수 없다. 여성은 그녀 자신의 처녀성에 의해 하나의 형태 가운데 완성되는 법은 결코 없다. 만약 여성이 자신과 생물계와의 친밀함을 유지한다면, 여성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꽃을 피운다>.
4.여성에게서 태어난 어린아이는 움직이고 변화하는 많은 이미지로서 눈에 보이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추상적 기호도, 자의적인 기호도 아니다. 우리들 여성에게 감각은 의연하게 구체적이며 또한 친밀하며, 자연적인 것이나 지각할 수 있는 형태와 연결된다. 감각도한 우리들 신체, 우리들이 어린아이나 성적 파트너의 신체와 같이 또 생물계에 속하는 신체와 똑같이 변화한다.
여신의 신성은 여신이 모친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여신의 여자로서의 정체성에 대응하고 있으며, 약간 열려진 음순은 여성 정체성이 결정적으로 표현된 장소의 하나이다.
감성적 표현이 우리가 가진 형상화와 커뮤니케이션의 특권적 방법인 만큼, 신성한 표현을 잃게 됨으로써 더욱 커다란 고독감이 여성에게 주어졌다. 우리들은 자기를 명명하는 수단, 자기를 표현하고, 우리들 사이에서 서로 생각을 펼치는 수단을 부여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상호 존경하는 가운데 표환이라는 매개를 빼앗겨 어머니와 딸을 서로 분리시켰다. 그리고 남성에 의해 상징적으로 관리되는 재생산 -정신적 및 자연적 - 질서에 어머니와 딸을 복종시켜 왔다.
우리 작품의 아름다움은 곧 자연에서 정신으로 옮겨가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매체인 것이다. 우리의 특질은 거기에서야말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아닐까? 114
14 몇 살이십니까?
나이가 곧 노화를 의미하는 우리 문화에서 이 질문은 두렵게 느껴진다. 나이에 대한 이러한 사고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적어도 거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
1. 나의 나이와 우주 시간과의 관계.
식물계가 보이는 시간 개념...
사람은 생장력 이외에 의식을 갖고 있다. 사람은 정신적으로 커지며, 성숙할 수 있다. 계절의 힘을 빌려 사람은 그전 해의 생성과 연속하고는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생성을 해마나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한 살을 먹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생성의 노정을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도시풍경 가운데 살아간다는 사실은 식물계가 보이는 시간개념을 우리들에게 망각시키니다. 변화없는 되풀이는 권태, 피로 및 질적 저하를 가져다 준다.
2.한 여자의 인생이 갖는 시간은 특히 불가역적이라는 사실의 망각, 그리고 반복성이 강하고 누적이 잘 되고, 균질적인 구조, 더군다나 대부분은 오늘날의 환경을 변화도 파괴도 하지 않는 이 구조에 남성의 시간보다 일치하는 경우가 적다는 사실의 망각, 실제로 오늘날의 환경 속에서의 시간의 리듬은 크건 작건 남성 섹슈얼리티의 전통적인 모델과 일치한다. 이 모델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 속에서 거의 유일한 것이되며, 프로이트는 이를 남녀 양성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모델로서 기술한다. 이는 열역학의 두 가지 원리에 따라 작용한다. 즉 긴장(축적에 의한).방출.균형을 유지하려는 항상성으로의 회귀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같은 구조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성에 더욱 닮아 있으며, 우주의 시간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한 여성의 인생이 덧붙여지거나 삭제되는 일련의 사실이나 행동에 귀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한 여성의 인생은 나이의 다양한 단계를 명확하게 하는 불가역적인 사건으로 특징지워진다.
사춘기.처녀막 파열.수태.임신.출산.수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이들 사건들은 리허설 없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 결과 신체와 정신은 변화하고, 신체적.정신적 성숙이 이루어진다. 또 어머니 노릇이나 그 이상으로 여자가 관여하게 되는 유아교육이 있으며, 그로 인해 여성은 끊임없이 성장 문제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동안 줄곧 여성은 우주의 시간성, 즉 달.태양.조석간만.계절과 늘상 연관된다. 생리 혹은 월경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갱년기가 여성의 신체와 정신의 생성에 또 하나의 단계, 서로 다른 호르몬의 균형에 의해 특징짓는 단계, 우주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과의 또 다른 관계를 드러낸다. 여성으로서의 생명의 끝으로 종종 정의되는 것이 여자에게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생활을 보내기 위한 자유로운 시간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117
나이 먹는 것을 노화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여자로 태어난 이 기회, 다양하고 복합된 정신의 형성을 분명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이 기회를 망각하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내 인생 가운데 정신적 진보를 유지하려면 가장 필요하다고 발견한 것은,
1.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나는 나이다. 이 신체의 정신 혹은 영혼을 생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신체를 꽃피게 하고, 형태나 언어, 자기 인식, 환경과의 관계에서 우주적 및 사회적 균형을 자기 몸에 부여하고, 자기 몸에 어울리지 않는 인위적인 유혹에만 의하지 않는 타자와의 교환방법을 자기 신체에 가르쳐야 한다.
2.처녀성과 모성은 내게 속하는 정신적 차원을 포함한다고 생각하라. 이들 차원은 남성 문화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왔다. 즉 처녀성은 부친과 남성 신의 화신이라고 하는 남편과의 거래대상이 되어 왔다. 오늘날의 처녀성은 여성의 재산, 여성의 권리와 책임을 갖는 자연적, 정신적 재산으로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여성은 처녀와 어머니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인생의 각 단계에서 키워야만 한다. 처녀성은 단순히 태어나면서 부여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물론 처녀로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들은 또한 처녀가 되어야 하고, 가족이나 문화, 그 밖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들 신체와 정신을 해방해야 한다. 처녀가 된다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여성에 의한 정신적인 것의 정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언가 부족한 대로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예. 자기의 공포나 타자의 환영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느끼거나 쓸모없는 지식이나 재산,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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