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식물의 사유(1)_이리가레(하)

백_일홍 2023. 4. 9. 11:42

식물의 사유

 

로쉬 이리가레, 마이클 마더

 

이리가레 부분(2)

 

10장 자신을 잃고 자연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하기

 

오늘날 시민들이 가장 긴급하게 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생명을 그릇된 담론과 환상에 불과한 약속에 맡기지 말고, 생명을 보존하고 키우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110

 

이제 민주적 지도자가 존중을 요구해야 하는 첫 번째 공공선은 생명 그 자체와 생명의 본질적 환경에 관한 것이다. 

 

그저 자연적으로 생존하는 것에서 사회적 구성원으로 건너가는 것만으로는 생명을 키우는 ㅇ일이 가능하지 않다. 여기에는 한단계가 부족하다. 내 생각에 이 단계는 자연적 가족에서 문화적 혹은 정치적 가족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우리가 이 단계에 이르려면 관계적 차원으로서 우리의 성차화된 정체성을 취함으로써 성숙에 도달해야 한다. 

 

실제로 성적 성숙은 우리가 원래 속해 있던 가족을 떠나도록 추동한다. 이처럼 가족이라는 집에서 떨어져 나오는 목적은 새로운 가족을 꾸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서 우리는 살아 있는 성인으로서 사회적 환경 속으로들어가는 단계를 놓치게 되고, 우리의 자연적 속성으로부터 관계적인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과제도 놓치게 된다. 우리가 꾸리게 되는 새로운 가족은 성차화된 정체성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부모의 역할을 떠맡는 데 전념하게 된다.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연적 에너지가 법이나 규칙에 예속된 무성의 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112

 

분명히 우리는 출산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연결을 만들어 내는 것을 욕망한다. 이러한 연결은 사생활이나 성적 관계에 재한되어서는 안된다. 그 연결은 또한 사회적 직조물을 짜내는 데에도 기여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하이데거는 매우 격렬하고 다면적인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존재의 관계적 측면을 자신의 글에 반여하지 않았다. 이런 관계적 측면이 우리의 전통 형이상학에 물음을 던지며 극복하는 결정적인 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요. 이 점에서 헤갤 변증법은 성적 차이를 사적이나 공적 역할로 흡수해 들이는 것을 역사적으로 해석했다. 이처럼 성차를 사적,공적 역할로 흡수해 들이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전체적 존재로 만나고 공유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헤겔은 상호보안적이지만 대립하는 성적 부분들의 이중성이 나타내는 난국을 타개할 길을 제공하지 않는다. 

 

니체를 따르는 철학자들이 여성 동반자를 찾는 니체의 추구의 진지성을 의식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메를로-퐁티, 샤르트르, 레비나스. 이 철학자들이 수행하는 어떤 작업도, 새로운 인간성을 향한 다리를 건널 힘을 얻기 위해 여성적 동반자를 찾고자 한 니체의 비극적 호소에 대합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성적 차이를 지닌 동반자들 사이의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상호호혜적이고 풍요로운 관계에 대한 이야기나 묘사를 읽으면서 기쁨을 얻거나 위안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다. 기쁨과 위안이 일어날 때는 수잔 플레처의 소설처럼 자연 환경에서였고 또 자연에 대한 사랑의 공유화 함께 할 때였다. 그래서 나는 숲이나 산에서 내 탐구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다. 115

 

11장 숲에서 다른 인간을 만나기

 

크레온은 민중의 지혜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안티고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자연의 가치를 지배하고자 하는 남성적 힘에 맞서 안티고네가 자연의 가치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자연권은 소로 연결되어 있는 세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 모든 생명 존재에게 필요하고 신의 보호 아래에 있는 환경인 우주 질서에 대한 존중. 인간의 가공 너머의 자연 생성에 대한 존중. 우리의 육체적 정체성 차원으로서의 성적 차이에 대한 존중이다. 

 

성차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중성화되어 구별되지 않는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그리고 사후에는 그저 특색없는 물질로 환원되지 않도록 우리를 보존한다. 124

 

우리는 성적 욕망이 일깨운 에너지에 관해서는 지침이 부족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 전통이 성적 끌림을 실수나 죄악으로 여기지 않을 때 오로지 육욕의 불행만을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전통은 육욕이 깨어나는 것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육체적 사랑을 인간적으로 충족시키고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이는 인간성을 성취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지만, 대부분의 동양 전통들조차 육욕의 차원을 경시한다. 예를 들어 자연적 유대의 문화라는 문제를 다룰 경우, 유교는 성적 사랑의 계발은 우리의 '인간 되기' 속으로 숙고해 들이지 않으면서 자연적 유대의 담론을 부모나 다른 가족 구성원들간의 관계에 한정한다. 129

 

13장 몸짓과 말은 원소를 대체할 수 있을까?

 

식물의 세계는 우리처럼 성적이지 않고, 동물 세계도 우리가 하듯이 성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 식물의 성장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식물들사사이에 효과적인 연결이 일어나지 않은 채로 생명의 우주를 이루는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만일 식물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중성일 것이다. 식물 영혼의 생식은 두 식물 사이의 성적 끌림이나 성적 관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식에 필요한 배아나 씨앗을 전달하는 제삼자ㅡ바람이나 곤충ㅡ덕분에, 그리고 흙이 배양의 그릇으로 작용하는 생식의 순환 덕분에 일어난다. 식물은 생식을 위해 자라는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다. 

 

인간은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성장을 결합하여 발전해야 한다. 이는 인간의 성장을 보다 복잡하게 만들고 미래에 도래할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뿌리는 한 개가 아니라 최소한 두 개이다. 뿑만 아니라 인간의 성장은 타자, 특히 자신과 다른 타자들과 뒤얽혀 있다. 132

 

우리에게 공기와 물과 불, 심지어 땅까지 제공해 줄 수 있는 말과 말하기 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 살ㅈ아있는 세계와 병행할 뿑아니라 스스로 살아 있으면서 생명을 키우는 일에 관여하는 언어를 만들 수 있을까? 누군가 나를 보며 미소 지을 때 나는 온기와 빛을 함께 느낀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나에게 온기와 빛을 가져다주는 것과 같다. 아이들이 태양을 그릴 때 웃고 있는 것으로 그리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나를 만지면 나는 육상의 육체적 실존으로 돌아오게 된다. 특히 말을 통해 어루만져지면 가끔 수생적 지각이 동반되기도 한다. 불행히도 우리의 행동 방식과 말하기 방식은 생명을 키우는 이런 측면을 등한시 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라기 보다는 언어적 프로그램에 의해 코드화된 로봇으로서 관계를 맺는다. 

 

어떻게 우리의 성적 욕망의 에너지를 인간 되기의 과제에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인간적 욕망은 인간의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실현해야하는 다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욕망은 원소들에 의해 풍요로워질지라도 우리의 타고난 자연적 본성만으로는 일깨워지지 않고 다른 존재, 특히 다른 인간이 필요하다. 원래는 자연적인 이 부가적 에너지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원천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욕망의 에너지는 그것을 발전시키고 몸으로 구체화시키고, 공유하기 위해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고려하도록 요구한다.

 

욕망을 키우려면 우리는 둘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외부적 원인에 의해, 특히 타자에 의해 일깨워진 직접적인 자극을 따르지 않으면서 우리의 자역적 형태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발전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런 진화로 인해 대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들과 이 원소들을 소우주ㅡ우리가 소우주이다ㅡ속으로 전용해 들이는 것을 존중할 필요가 생겼다. 어떤 문화전통ㅡ예. 요가전통은ㅡ은 우리의 신체적이고 원소적인 속성이 인간적 발전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렇게 키우고 있다. 137

 

14장 자연 속에 혼자 있는 것에서 사랑 안에 둘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는 헤겔이 자연과의 공유에서 느끼는 절대의 경험을 정신의 절대로 변형시키는 대신에 그것을 포기한 점도 궁금하다. 하나의 절대가 다른 절대에서 분리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명 그 자체로부터 우리가 분리될까? 우리의 체화된 존재를 키우는 작업은 방치해놓고 정신적 의식과 시각적 직관에만 맡겨진 길을 만드는 것일까? 과연 이것이 인간적 여정의 목적과 단절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떻게 식물 세계와 나누는 교감으로부터 우리 자신과 다른 인간들과 나누는 교감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이 교감이 일어날 수 있는 매개로 사용될 수 있을 생명의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다. 우리는 생명 그 자체와 살아 있는 환경을 경험하는 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살아 있는 자연적 속성에서 우리는 추방시키는 구성된 코드를 통해서만 생명과 생명의 환경에 다가간다. 

 

특히 모든 존재들을 명명하고 이들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함으로써 이들과 더 이상 교감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우리와 생명의 관계가 대상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 속에 홀로 있다. 더 욱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는 모든  생명 존재를 다른 존재들로부터 분리하였고 존재들 사이의 연결성(들)을 발탁했다. 생명은 시각이나 온갖 유형의 묘사 및 복제와 연관되어 있다기보다 숨 쉬기와 촉각과 더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세계는 죽어 있는 물건들로 가득 찬 박물관 같아 보인다. 우리는 이 죽어 있는 물건들에 우리 자신을 투사해 넣는다. 우리는 우리가 죽은 것으로 경험하고 그렇게 취급하는 세계의 한가운데 홀로 남겨졌다. 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 존재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를 만나는 것과 우리가 만든 물건 -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 을 만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상대의 저항에 부딪혀야만 그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니다. 이는 불행하게도 우리가 살아 있는 존재와 나누는 교감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는 정복해야 할 장애로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와으 만남을 생명을 나누고 키우려는 갈망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물과 우리의 관계를 처리하기 위해 수많은 규칙을 정한다. 생명을 나누고 키우려는 갈망이 남아 있는 경우 그 갈망은 살아 있는 모든 연결성을 깨뜨리는 코드와 도덕적 명령에 의해 마비되어 버린다. 

 

그러나 생명이 살이 존재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관습과 질서보다는 생명의 힘이 더 강하다. 욕망 특히 성적 욕망이 강요된 코드와 관습의 한계를 넘어설 때는 특히 그렇다. 욕구 역시 생명이 존재함을 확실히 증명한다. 대개 욕구는 경쟁과 종속을 발생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파괴까지 일으키면서 모든 생명 존재들 사이의 조화로운 교감을 택하지 않는다. 

 

성적 욕망은 적어도 근원에 있어서는 우리와 다른 생명의 원천이자 체현으로서 타자와 맺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라는 호소이다. 이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생성하는 특성을 요구한다. 실제로 우리는 나타남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현상하는 존재로서 현존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단일한 환경에서 오직 우리 자신의 뿌리에서 출발하여 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뿌리, 다른 세계와 타협해야 한다. 이것은 타자의 실존을 고려하기 위해 성장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제약이다. 욕망이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타자의 존재를 고려하라고 한다면, 욕망은 또한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일깨우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살아 있는 존재 앞에 머무르면서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141

 

다른 인간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종종 무시하는 생명에 대한 관심을 되살릴 수 있다. 생명의 나눔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둘 사이, 자연적으로 다른 두 사람 사이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은 우리가 갇혀 있는 구성된 세계를 떠나 우리의 전체적 존재를 회복할 기회를 준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속성을 회복하고 자연적 속성에서 시작하기 위해 '당신'을, 자연적으로 다른 '당신'을 만나야 한다. 

 

우리는 가끔 종교적 절대자나 철학적 절대자를 믿으면서 연대를 회복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는 우리를 상호간의 성적 끌림과 나눔에서 단절시킨 채, 인간적 방식으로 아니 심지어 신성한 방식으로 이런 끌림과 나눔을 발전시킬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마땅히 쓰여야 할 정력적 충동이 쓰이지 못할 때 우리는 생명의 한계에 대한 지각을 잃어버리고 파괴적으로 된다. 이 파괴 속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불행히도 우리의 성적 욕구를 억누르는 이상적 가치들은, 특히 그것이 욕구를 체화하여 만족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고 보편적이거나 중성적인 것처럼 위장할 때는 우리는 선과 악, 옳고 그름 사이에서 헤매게 만든다. 이런 혼란은 우리가 가진 에너지에 대한 절적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욕망과 사랑을 결합하는 것은 우리의 길을 여는 더 나은 방법이다. 그길은 우리 안과 우리 사이에서 성적 욕망이 일어나는 곳에서 출발한다. 성적 끌림 특히 성애적 끌림이 표현하는 근원과 부가적 생명 에너지를 육욕적 결합으로 바꾸는 일은, 우리의 인간적 존재를 성취하고, 모든 생명 존재들과 더불어  행동하고 교감하는 인간적 방식을 습득하는 기리 될 것이다. 

 

어떤 문화 전통에서 세계의 기원이나 새로운 시대에는 사랑에 빠진 두 신이 존재한다고 그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 전통은 이 기원적 토대를 최초의 인간 커플에게 맡기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ㅇ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이 과제를 떠맡을 수 있는 성숙함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143

 

15장 인간 되기

 

우리 서양 전통이 최초의 인간 커플은 자신들의 인간성을 성취하기 전에 신이 되는 것을 염려했다고 상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초의 인간 커플은 인간이 되기보다는 신적 기원을 찾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창조된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상정되었지만 그 지배의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지 몰랐기 때문에 이런 신적 기원 찾기는 더욱 극심하게 나타났다. 이들에게는 만물을 소중히 여기고 만물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전체로부터 자신들이 출현했다는 시각이 부족했다. 144

 

선악의 지식을 전용하고자 하는 이들의 바람은 부모의 미음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닮았다. 이는 스스로의 앎의 길을 만들지 않고 타자-대타자?-의 지식을 자신의 용도에 맞게 장악하는 것과 같다. 이들 지식은 살아 있는 경험으로부터 단절된 지배다. 

 

우리 문화의 대부분이 이런 전용에 기초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우리는 지식을 현재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얻어야 하는 상품으로 간주한다. 문화는 실재를 지배하는 도구인 것이지 우리 존재 가운데서 실재의 부분을 키움으로써 우리가 모든 인간과 사물과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가 아니다. 따라서 문화화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발전시키면서 모든 생명 존재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한 만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 목표는 정의로 세계를 다스리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의 길은 추동력이자 감성이며 도덕일 뿐 아니라, 우리가 모든 존재 - 사람 혹은 사물 - 를 고려하고 그들에게 보이는 행도을 통해 존경 어린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여전히 부족한 것은 사랑와 사유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족의 권위 같은 것에 의존하는 아이로 남아 있는 한 결코 이를 수 없는 인간 되기이다. 146

 

인간으로서 우리가 전용하는 것들은 우리의 생명에 무심한 사회로 통합되는 데 유용할 뿐이다. 우리의 사회적 규칙과 관습은 생명을 존중하고 키우기보다는 중성화하는 데 기초해 있다. 우리 교육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생명 존재에서 생명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릴 때까지 생명에서 멀어지라고 가르친다. 

 

그로 인해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 사이에 오해오아 갈등이 일어나고, 대개 문화와 전통은 모든 사람에게 부과되어야 하는 보편적 진리를 재현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생명만이 보편적이다. 생명에서 출발할 경우에만 우리는 인간의 문화를 만들고, 인간성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문화적 토대,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우리들 사이의 관계 뿐 아니라 우리의 살아 있는 환경과 맺는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언어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요청한다. 

 

이를 테면 명명 행위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문화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경우처럼 생생하고 변화하는 것에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일본어 '나무는 나무한다' '구름은 구름한다' 우리 서양인들에게 나무는 참나무, 소나무, 너도밤나무 등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언어적 도구는 생명을 키우고 공유하기 보다는 생명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지배의 과정이 너무나 극심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실재에 대한 우리 관점의 산물을 실재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실상 '우리'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가 학습해 왔던 것을 따름이다. 147

 

관건은 우리의 언어가 생명을 표현하도록 언어를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이다. 만물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시각을 택한 것이 생명의 문화에 기여하지 않았듯이, 동사와 형용사가 아닌 이름을 강조하는 것도 생명의 문화에 기여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제공된 잉여 뉴런은 사랑과 지능으로 생명을 발전시키거나,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자연적 생명에서 출발하여 인간 존재를 창조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우리는 이런 생명 자원에 대한 고려를 무시해 왔고, 생명의 잠재력을 가만히 놔두어 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좌초시키는 문화를 만들어 왔다. 그리하여 생명 세계는 번식 행위를 제외하면 너무나 척박한 곳이 되었다. 이제 생명은 번식 이외의 다른 많은 것들을 위해 풍요로워질 수 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몸으로 구현된 것에 맞서며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자신의 피를 흘리며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를 출산하는 여성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다. 우리 교육은 살, 피, 혈연에 대한 경멸에, 그리고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자의적인 법과 규칙과 담론을 통해 이것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기초해 있지 않나? 이것은 우리 안과 우리 주변에서 생명과 관련된 모든 것을 향해 기껏해야 양면성을 보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우리의 냉혈한 시각은 존재의 숨겨진 실존과 성장을 통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나타나는 것을 통해 존재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 있는 존재 바깥에서 끊임없이 존재의 원인과 기원을 찾는다. 인간이 다른 종들, 특히 생명과 보다 단순하게 관계하는 식물종이나 동물종과 대립적으로 자신을 규정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인간이 번식을 위해서뿐 아니라 생명의 개화를 위해서 생물 속들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과소평가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 존재들 사이에서 살며, 자신이 지닌 부가적 인식과 자유 덕분에 다른 존재들과 더 잘 공유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다른 생명 존재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해 내기 위해 자신을 살아 있는 존재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여겨야 했다. 149

 

16장 만물 사이에서 생명을 키우고 공유하기

 

우리는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로서 생명에서부터 출발하여, 모든 존재를 보호하고 꽃피운다는 생각으로 생명을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이 공동선을 보호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150

 

원소들 - 공기, 물, 불, 흙 - 은 우리가 돌봐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적 구성을 무시하며, 자신들이 살아 있는 세계에서 참여하는 실재로서 이 물질적 구성을 돌보지 않는다. 자신의 생명 만큼이나 자신의 환경을 돌봐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도 환경과 같은 물질로 만들어졌으니. 

 

의사들이 환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놀랍다. 담론과 의료 영역에서 계속 발전하고 있는 여러 기술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기본적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과학과 과학의 산물은 우리의 생존을 연장시킬 수 있지만 생명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데는 기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과학은 부모나 권위적 권력으로 작용하는 지식에 의존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실상 이런 권력은 생성에 필요한 자유를 빼앗아 간다. 

 

우리는 인간이다. 원소들이 우리의 실존에 필요하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개별성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은 원소들과 계속적으로 하나가 되는 상태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자연은 진공을 혐오하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자연적 속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진공을 떠맡지 않을 수 없다. 이 둘을 결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서 이 미결의 과제는 인간 되기를 방해하고 왜곡한다. 헤겔조차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의 작업은 실상 사유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보다는 서구 철학 서사를 요약하고 있다. 헤겔은 우리의 자연적 정체성 뿐만 아니라 부정성을 극복하고자 애썻지만, 자연적 저에성과 부정성이 양립하면서 표현될 수 있는 논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도전은 특히나 인간적인 것이다. 

 

고유한 생성이 일어날 수 있도록 보장하고 타자로서의 타자와 적절히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려면, 이 도전은 대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관계를 맺으려는 타자가 우리와 자연적으로 다른 타자일 때는 특히 그러하다. 사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외부적 원인에 의해 일깨워진 자극을 단순히 따를 수만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태양의 존재를 식물이 새잎이나 꽃으로 찬양하거나 새가 노래로 찬양하듯이, 혹은 충동적 성행위를 통해 찬양할 수는 없다. 인간이 너무 자주 무심하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이미 하나의 찬양 방식이다. 다른 생명 존재들과 공존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인간의 운명이 성취한 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키우고 형성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육체적 성장에 불과한 것을 유예하고, 깨어난 에너지의 일부를 우리 자신을 변형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변형은 즉각적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을 만나고 공유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물질적 속성을 그것과 무관한 추상적 형태와 규범에 예속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신체적 물질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의 생성을 인간적 특성과 잠재력에 맞춰 형성하고 추구하려면 우리의 즉각적인 성장을 미뤄야 한다. 이런 자세는 자연적 연속성 및 인접성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공백을 직면하라고 요구한다. 153

 

내 생각에 관건은 헤겔처럼 경험된 것의 직접성을 인식을 통해 부정함으로써 지양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은 절대에 도달하면서 최종적으로 지양된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공백을 떠맡고 우리의 생성을 대체할 수 없는 계기로서 이 공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발전에 불연속이 필요하다. 불연속성은 우리의 개별성과 다른 생명 존재들 사이에 존중하는 관계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이 플라톤적 형이상학, 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과거 형이상학적 모델이 우리의 자연을 키우는 데 부적절하며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적인 또 다른 이유이다. 형이상학적 모델을 공백을 인간적 개별성과 발전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이상(이데아?)을 통해 이 공백과 부정성을 세계에서 추방시키는 방안을 그려내고 있다고 가장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살아 있는 존재들 사이에 소통과 교감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구성된 양식을 실재에 부과한다. 생명 존재들의 역설은 공유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 있는 존재들은 자신의 수액에, 자신의 피와 활기의 자연적 차원에 충실하지 않으면 나눌 수도 없다. 

 

하지만 욕망은 우리가 우리의 자연적 속성에 충실하면서도 혈연적 유대관계를 초월할 수 있는 관계로 들어가는 다른 방식이다. 욕망, 다른 무엇보다 먼저 성적 욕망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속성과는 다른 개별화의 수준에 부합한다. 욕망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생존과 비교할 때 생존 너머와 연관되어 있다. 욕망은 보다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성취에 이르기 위해 생물학적 욕구에 예속되는 것을 넘어서도록 추동하는 힘이다. 그러나 욕망은 이미 우리의 정체성과 지상에서 우리의 거주 방식을 구성하는 형태ㅡ원래는 물질적인 신체적 형태ㅡ에 의존한다. 욕망은 영토에 불과한 것을 세계로 바꿀 수 있다. 

 

1) 욕망은 기본적으로 성적이다. 성적이라는 것이 꼭 좁은 의미의 성애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적 욕망의 내용과 형식은 중성적인 것도 우리 신체의 구성어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또 성적 욕망이 언제나 성교를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우리의 관계ㅡ세계, 타자들,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ㅡ가 성적으로 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서양 전통은 이 사실이 지닌 중요성을 잘 못 판단했다. 이런 오류는 우리의 인간적 성취와 우리가 모든 생명 존재들과 관계 맺는 행동방식에 해악을 끼쳤다. 또 다시 공백, 무, 부정적인 것은 초감각적 이상에 의해 중단되고 전멸되었다. 초감각적 이상은 우리 에너지가 커지고 우리 사이에서 에너지가 공유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은 채 우리 에너지를 이용해 왔다. 155

 

2) 우리는 성적 욕망을 공유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서로 다른 우리들 사이의 공백과 무와 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자세는 성적 관계가 일어나기 전에 개입해야 한다.그렇게 해야만 성관계가 단지 성욕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의 만족이 아니라 인간적 욕망의 만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을 열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성욕의 문제 특히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는 남성적인 성적 욕구는, 우리의 성적 속성이 우리와 자연적으로 다른 타자를 존중할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체화된 만족에 이를 수 있도록 키우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리하여 성적 매력이 자극하는 에너지는 그 에너지를 다듬고 표현할 수단도 없이 남게 되어 관계에 참여한 상대를 참작하여 방출하려고 한다. 155

 

우리는 우리의 관계적 삶의 근원에 욕망의 형태로 놓여있는 것을 인간 발전의 결정적인 측면이자 조건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누락은 다른 인간 및 생명 세계 전체와 관계 맺는 방식을 왜곡시켰다. 그것은 또한 실재의 지각, 진리에 대한 평가, 진리에 이르고 진리를 공유하는 방식에 대한 평가를  왜곡했다. 생물이 만물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도록 키우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 유지와 성장뿐 아니라 우리 안의 관계적 잠재력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이런 작업은 우리의 모든 관계에 들어 있는 성적 속성에서 발원하는 에너지 자원의 틀을 형성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적 에너지는 사적 맥락에서 협소한 성애적 관계를 위해 유지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무시되거나 억압되어서도 안 된다. 성적 에너지는 사적 맥락에서는 대개 문화적으로 변용되지 않고 출산을 위해서만 쓰인다.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우리는 마지 무성적 개인 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자연의 공백 과 무를 떠맡으려면 우리의 인간 되기가 필요하다. 타자들과 더불어 타자들과 맺는 관계에서 공백과 무를 떠맡으려면 타자성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렇게 공백과 무를 떠맡는 것은 사유할 자질이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유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일에 관여한다. 사유는 단지 직접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거리 두기의 필요성은 다상화를 통해 실재를 정복하늗 것으로 잘 못 이해된다. 이와 거의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회문화적 구성물을 실재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더 바르고 생생하게 지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157

 

3) 사유는 사회문화적 배경이나 이미 우리 것이 된 지식에 잡착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공백과 무를 떠맡으라고 요구한다. 그것을 넘어서려고만 하지 말고 대면하라고 요구한다. 실제로 이런 경험은 생명의 실재로부터 반드시 분리될 필요가 없는 관점을 제공한다. 

 

호흡을 키우는것은 허무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공백을 마주하고 공백을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호흡은 살고 사랑하고 사유하는데 핵심적이다. 호흡의 경계는 우리가 우리 존재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숨을 쉬어야 한다. 생명 세계, 사랑하는 사람, 인간 타자 혹은 비인간 타자들과 공유하는 일은 우리의 호흡을 키우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 호흡에 대한 배려.

 

호흡함으로써 우리는 생명과 욕망과 사랑과 문화의 새로운 성장과 지평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열고 다시 연다.

 

때로는 식물세계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매개자이고, 때로는 우리와 다른, 사랑받고 사랑하는 인간이 매개자이다. 때로는 과거의 사상가들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한다. 

 

그러나 별의 도움으로, 은총의 도움으로, 나눔을 통해 생명과 사랑을 키우고자 갈망하는 다른 인간을 만나면서 생기는 풍요로움의 도움으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마음으로 우리의 길을 홀로 열어야한다. 158

 

 

 

 

 

 

 

 

 

 

  

 

'2023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생의 위로  (0) 2023.04.11
승려와 철학자  (0) 2023.04.10
식물, 국가를 선언하다  (0) 2023.04.07
나, 너, 우리  (0) 2023.04.05
식물의 사유(1)_이리가레(상)  (0) 202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