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와 철학자
인류의 삶에 관한 열흘간의 지적 성찰
장-프랑수아 르벨, 마티유 리카르
목차
여는 글
1. 과학연구에서 마음의 탐구로
2.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3. 육체와 정신, 그리고 명상
4. 마음의 과학
5. 세계와 인간, 구도와 깨달음
6. 행동하는 서양 문화, 성찰하는 동양 불교
7. 불교에 대한 서양의 오해와 진실
8. 자비와 비폭력
9. 본성에 대한 망각, 선과 악
10. 과학의 성취가 남겨놓은 빈자리
11. 세계의 지붕 위에 걸린 붉은 깃발
12. 불교, 몰락과 부흥의 역사
13. 의례 행위, 미신인가 종교 의식인가?
14. 삶의 한단계로서의 죽음
15. 왕으로서의 개인
16. 마음의 본성
17. 어디로 기어 올라가는지 기억하라
18. 진보와 새로움에 대하여
19. 승려가 철학자에게 묻다
맺는 글 하나- 철학자의 결론
맺는 글 둘 - 승려의 결론
옮긴이의 글
1. 과학 연구에서 정신 세계의 탐구로
마티유: 제가 쌓았던 과학적 경력은 '발견'에 대한 정열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연구활동이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결국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과학은 그것이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6
마티유: 저는 자신이 가르친 바를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하는 사람들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게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은 그들이 오늘날 서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범주의 사람들, 즉 성자나 현자처럼 완벽한 존재의 이상에 부합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인간의 차원에서 완벽함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저들이 그런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
마티유: 저는 그들이(철학가와 사상가들, 연극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발휘하는 천재성에 반드시 인간적인 완성이 수반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탁월한 재능을, 다시 말해 지적 혹은 예술적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을 훌륭한 인간적 존재로 만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21
그 여행은 커다란 육체적 혼란이었으며 동시에 내면의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처음 1년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스승과의 만남이 지닌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품성이 계속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스승의 내면에는 제 삶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어떤 특징적 실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겁니다. 24
장-프랑수아: 그런데 네가 깨달음이라고 칭하는 말은 종교적 교리에 입문하는 것을 뜻하느냐?
마티유: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적 변화의 결과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현상 세계의 본질과 정신의 본성을 밝히는 일을 뜻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결국 그것은 무엇보다도 개념을 넘어선 절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명상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근본적인 측면에서의 앎을 뜻하죠. 26
마티유: 주된 학문은 자신과 실재에 대한 앎이며, 본질적인 문제는 '현상 세계의 본질과 사유의 본질은 어떤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27
장-프랑수아: 최초의 동기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냐?
마티유: 고통은 무지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무지는 일소되어야만 하지요. 그런데 무지는 본질적으로 '자아'와 현상의 확고부동함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27
장-프랑수아: 분자생물학 분야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과학사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너는 그러한 위업에 동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두었잖니?
마티유: 생묵학은 제가 없어도 별탈 없이 잘 굴러갑니다. 모든 과학적 지식은 저에게 '보다 덜 중요한 것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바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할 뿐이었던 겁니다. 29
장-프랑수아: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랄 만한 지적이고 과학적인 모험에 동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을 너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티유: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오래되고 낡아 빠진 교리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정신의 탐구는 진정한 내면의 변화로 나타날 때 비로소 끊임없이 새롭고 신선하고 생동적인 탐구가 될 수 있습니다. 불교와 같은 형이상학적 전통은 '늙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흐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낡아 가는 것은 다름 아닌 과학이론들이며 그것들은 끊임없이 또 다른 이론에 의해 대체됩니다.
생물학과 물리학이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형성에 관련하여 놀랄만한 지식을 낳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들로 행복과 고통의 근본적인 매커니즘을 규명할 수 있습니까? 지구의 정확한 형태와 크기를 아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보지만, 지구가 둥글다거나 평평하다는 것이 삶의 의미를 대단하게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30
마티유: 그럼 무슨 이유로 저 같은 다른 문화의 대표자와 토론하기를 원하셨습니까?
장-프랑수아: 우선 그것은 다른 문화인 동시에 같은 문화이다. 극동의 철학은 어쨋든 보편적인 유산에 속한다. 내가 대학 시절에 매우 좋아하던 문학이나 역사가 아닌 철학으로 진로를 잡은 동기는 철학이 문학과 역사, 심지어 과학까지를 포함한 다른 모든 지식을 총괄하는 지식의 열쇠를 가져다 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식인 동시에 지혜가 되는, 다시 말해 도덕과 일치되는 삶의 한 방법으로서의 지식의 열쇠 말이다.
마티유: 그 후 아버지께서는 무엇보다도 정치 저술가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변모를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장-프랑수아: 그것은 변모가 아니다. 정치에 대한 성찰은 언제나 철학의 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정치이론은 항상 철학의 일부를 이루었으며, 18세기 그리고 특히 19세기부터는 정치 이론이 도덕의 주축이 되었다. 사실 18세기의 계몽주의와 그 이후의 과학적 사회주의 지도 이념은, 장차 행복과 정의의 결합이 개인적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 구조를 개편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예전의 사회를 완전히 파괴해야만 했다. 18세기 말 혁명의 개념이 그 현대적 의미를 획득한 이후, 개인의 구원은 집단의 구원에 종속되었다. 34
2.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장-프랑수아: 많은 서양인들이 자신의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이를테면 이슬람교나 불교 등으로 귀의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통적인 신앙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종교적 무관심, 다시 말해 종교적 무중력 상태에서 곧바로 불교로 이행한 것이다.
마티유: 제가 어떻게 불교를 발견하고 파악했는지 물으셨지요? 불교는 종교인가 지혜인가, 아니면 형이상학인가? 이는 달라이 라마가 자주 받는 질문이죠. 이에 대해 그분은 흔히 유머스럽게 대답하시곤 합니다. "불교는 참 안됐다. 종교인들은 불교를 무신론적 철학이자 정신의 과학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철학자들은 불교를 종교에 결부시켜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어디에서도 시민권이 없다" 달라이라마는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불교가 종교와 철학 사이의 가교가 될 수 있는 이점이다" 저는 본질적으로 불교가 형이상학적 전통이며, 그로부터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될 수 있는 지혜가 나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종교라는 것이 신자 스스로 그 교리의 참뜻을 재발견해야 할 필요 없이, 맹목적인 신앙 행위에 의해 받아들여진 어떤 교리에 집착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말의 어원이 '잇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불교는 확실히 가장 수준 높은 형이상학적 진리들과 이어져 있습니다. 즉 신앙의 의미를 내적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생겨나는 확고부동한 확신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불교는 신앙과 양립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불교는 '교리'가 아닙니다. 정신의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단계를 거치면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가르침의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거죠.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신의 본성과 현상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노정에서 활용되는 여행 가이드북과 같습니다. 39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들, 이를테면 존재의 본성, 무지, 고통의 원인, 자율적인 실체로서의 자아와 현상들의 비존재성, 인과 법칙 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42
마티유: 아버지께서는 우선 불교가 서양에서 지적을 완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셨습니다. 그 원인은 불교가 그 모든 생명체와 관계된 근본적인 관심에 호소하고 있고,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 이국 취양에 물들어 있지 않으며, 아버지를 놀라게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문화적 요인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43
장-프랑수아: 네가 말하는 '고통'이란 어떤 것이냐?
마티유: 고통은 심원한 불만족 상태로서, 육체적 고통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정신적 체험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자아'가 위협을 받거나 그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43
장-프랑수아: 네 말은 윤회가 불교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냐? 나는 영혼의 윤회가 불교의 근본 교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마티유: 불교에서는 계속적인 삶의 단계들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은 현재의 삶으로 끝나지 않죠. 우리는 이미 현생 이전의 다른 삶의 상태들을 체험했고, 앞으로도 죽음 이후의 다른 상태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50
마티유: 개인이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개인적' 의식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연속적인 실체의 이동이 없다는 것이 기능의 연속과 대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가 고유한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특정한 의식의 흐름이 다른 의식의 흐름과 구별되는 독특한 속성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54
자아에는 기원도 종말도 없으므로 현재에서 정신이 그것에 부여하는 존재 외에 다른 존재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간단히 말해 열반이란 절멸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입니다. 55
마티유: 과학의 영역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직접적인 실험은 하지 않은 채 오직 말만 듣고 수많은 발견들과 수학적 계산들을 믿습니다... 의식의 본성은 형태도 실체도 색깔도 없으며 수량화되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에 의거하지 않는 것은 결국 보다 나은 품성을 만들 수 있는 정신 단련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지식의 영역을 가시적이고 측정 하능한 물질 세계에 한정시키는 꼴이 됩니다. 이는 또한 현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오직 물질적 영역에서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57
마티유: 사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믿음으로 불들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과학적인 진리를 증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믿음들은 - 예를 들어 원자핵 주위를 도는 작고 견고한 입자라고 여겨지는 원자에 대한 믿음이 그렇습니다 - 과학자들이 그것을 포기하고 나서 함참 뒤에도 사람들의 정신 상태에 스며듭니다. 63
장-프랑수아: 나는 네가 말했던 사건들 안에 비합리적인 신앙의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애기하려는 거다.
마티유: 관찰 가능한 요소들의 집합에 근거한 믿음의 요소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스승들 곁에서 여러 해를 지내면서 제가 얻은 가장 위대한 가르침 가운데 한 가지는, 그분들의 정신 세계가 자신이 가르치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64
장-프랑수아: 나는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확신이라는 현상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신봉하는 사람의 절대적 진실성의 문제는 결코 증거를 이루지 못한다. 이는 불교의 한 측면을 뚜렷하게 확인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 그것은 불교가 철학과 합리적 지혜의 분야라기보다는 검증할 수 없는 종교적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검은 상자 안의 유령
마티유: 오늘날에는 여전히 내적 성찰은 유효한 탐구 방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적 성찰의 결과는 지금당장 물리적으로 검출될 수 있는 현상으로 전환될 수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다수의 신경생물학자들은 '검은 상자 안의 유령' 즉 뇌 조직과는 분리된 요소로서 간주되는 의식이나 정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신경세포망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과 전기적 현상 및 신경세포망의 구조와 기능이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정신이라는 개념 자체, 더욱이 비물질적 의식의 개념은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태도를 '환원주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68
장-프랑수아: 그런데 실제로 현대 과학과 신경생리학은 훨씬 더 명확하게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의 총체로 구성되는 신경세포로서의 인간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정신 현상은 다름 아닌 그러한 매커니즘 자체이며, 기껏해야 그 총체에 참가될 뿐, 그것에 절대적인 영향은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다. 69
마티유: 서양에서는 '육체와 정신'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나요?
장-프랑수아: 현대 과학은 오히려 반정신주의적 주장을 승인하고, 인간에게 - 자연 안에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 정신의 법칙과 물질의 법칙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했다. 정신적인 혹은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우주 자체가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전제이다. 그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와 기독교의 오래된 명제이다. 생명체들 중 정신의 법칙과 물질의 법칙이 이렇듯 기적적으로 만나 결합되는 현상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일어나는 듯하다. 서양의 모든 철학은 한편으로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설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빠져 나가 다른 곳에서 더욱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70
마티유: 불교에서는 의식의 갖가지 차원과 양상을 구별합니다. '조잡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양상은 신경세포 체계에 상응하며, 더 미묘한 양상은 아버지 말씀처럼 신경세포의 부대 현상으로 간주되는 '미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본질적인 양상은 의식의 비물질적인 양상입니다. 이 마지막 양상은 의식의 연속체를 구성하면서 이 삶에서 저 삶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이 연속체에는 시작도 종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무나 생명이 없는 것에서 생겨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71
마티유: 불교는 인간을 물질적 차원에서 신경세포로 기술하는 것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식이 육체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한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선택이지 과학적 증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71
마티유: 신경세포적 인간 모델에 따르면, 더 나아가 인공 지능의 모든 매커니즘의 경우에 우리들은 어떻게 의식에게 자기 자신의 본성을 물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신경세포적 인간 모델은 본질적으로 인공 지능과 다르지 않습니다. 뇌의 체계는 우리가 사용하는 커퓨터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인공 지능이 체스 게임에서 사람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은 컴퓨터가 의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이 없이도 산술적 계산이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73
장-프랑수아: 과연 형이상학적으로 물질적 법칙과는 다른 정신적 법칙이 인간에게 존재하는가, 다시 말해 인간이 이질적인 두 실체의 결합인가라는 문제와 인간 행위와 자유 문제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인간이 상당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혼의 존재와 그 불명성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별개 문제니까.
마티유: 그 자유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장-프랑수아: 의식과 두뇌는 어떻게 연결되지?
마티유: 불교에서는 유물론적 관점과 정신주의적 관점 사이의 대립 문제를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많은 철학자들의 생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확고한 물질'을 '비물질적 정신'에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초래할 뿐입니다. 진정한 문제는 물질의 '실재성' 자체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불교에 따르면 원자는 확고하지도 않으며, 고유의 존재를 부여받은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질과 정신의 대립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질과 정신은 자율적이고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의식이 화학적 반작용에 의해 두뇌 안에서 현실화되어 육체에 작용하는 생리적 과정을 발생시키며, 역으로 이러한 과정이 의식에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의식이 육체에 결부되어 있는 한 존속합니다. 과학자들이 비물질적 의식이라는 사고를 거부하는 것은 철학적 선택이며,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불교로서는 형이상학적 선택입니다. 의식은 성질상 물리적 과학의 탐구 양식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79
마티유: 뇌의 특정 부분의 손상이 인간의 사유 능력에 그렇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합니다. 비물질적인 의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함 있는 뇌에서 정상적으로 나타날 수 없을 테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음으로 인하여 의식과 육체가 분리될 때에는 의식이 더 이상 육체에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81
장-프랑수아: 단 하나의 증명은 각종 주관적 체험에서 명확히 독립되어 있다.
마니유: 왜 단 하나여야 하죠? 불교 신앙은 몇몇 교리에 대한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앙드레 미고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햇습니다. "신앙은 이성과 멀어질 때 미신이 되며 이성에 대립할 때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러나 신앙이 이성과 결합되어 있을 때는 이성이 단순한 지적 유희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신뢰의 행위만이 아니라 가장 진실에 가까운 설명입니다. 83
마티유: 우리가 다루어야 할 두 번째 논점은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환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85
마니유: 사람들은 '의학적 유물론'이라는 것을 통하여 종종 이와 같은 증언의 신빈성을 깍아 내리려고 애씁니다. 의학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말한다면,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히스테리 환자이며, 아시지의 성 프란체스코는 유전적인 심리 장애가 있었고, 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90
마티유: 재현될 수 있는 것을 다루는 과학의 목적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지 않고,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게 물질적 세계를 기술하는 데 있습니다. 현실이 물질에 환원되며 의식은 단지 신경 계통의 속성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과학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한 정의입니다. 명상적 삶 또한 자체의 규칙을 갖고 있으며, 그 수련에서 생기는 심원한 확신은 물질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그 어떠한 실험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정신의 본성을 순수하게 명상적인 방식으로 관찰하게 되면 중력의 작용으로 물체가 낙하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만큼이나 완벽한 확신을 낳을 수 있습니다. 94
불교 심리학에 대하여
마티유: 감정은 물론 외부 현실에 의해 가동되지만 그 자체가 현실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한 사람이 어떤 이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혐오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감정의 본성은 우리가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적 감정을 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감정의 노리개가 되지 않고 역경에 흔들리거나 성공에 도취되지 않는 광할하고 평온한 의식을 획득하는 일입니다. 101
마타유: 불교에서 현상적 세계를 꿈이나 환상 혹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결코 잡을 수 없는 흐름에 비유하게 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이 미묘한 비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장-프랑수아: 그러한 관점은 플라톤의 중요한 이론과 대립된다. 그리스의 모든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은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은 결코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현상은 영속적인 변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확고부동하고 확실하며 결정적인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로부터 현상의 이면에서 확실한 지식 대상이 될 수 있는 확고부동하고 영속적인 요소를 찾으려는 모든 서양철학 - 그리스 철학만이 아니라 칸트까지의 모든 서양 철학 -의 노력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안정적 모델이 제시한 것은 서양 사상의 태동기에 개념적 사유에 대한 최초의 완벽한 모델로 여겨졌던 수학적 모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상의 이면에서 이러한 현상을 지배하는 영속적 원리를 찾는다. 이와 같은 영속적 원리가 다름 아닌 법칙이다. 현상 세계의 혼란스러운 변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 이면에 있는 구조의 세계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인과 관계라는 영속적 법칙이다.
마티유: 법칙의 존재가 곧 현상 이면에 영속적인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도 현상 세계가 불가항력적으로 인과 관계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도, 또 그것이 지배하는 현상도 영속적이고 자율적이거나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상황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중력의 법칙도 물제가 없다면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어떤 것에 대해 해체나 소멸이라는 말을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장-프랑수아: 모든 자연 현상 들이 무지개의 경우와 같지는 않아!
마티유: 하지만 실제로 모든 현상들은 순간적인 요소들이 조합된 결과입니다. 영속적이고 독립적인 현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상들의 기초를 이루는 영원한 원리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현상에 대한 지식은 단지 우리의 정신을 통과할 뿐이며, 우리들이 개념의 도움을 받아 개념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상 세계의 궁극적 본질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에서 취한 형이상학적 선택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인간이 지각하는 형태의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6
마티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구조적 인과 관계는, 정확히 말해 실체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현상들 사이에 있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상호 연관 관계라고 부릅니다. 119
마티유: 불교는 현대 물리학의 몇몇 관점과 지적으로 유사하며, 불교가 기여하는 바는 사상사에 틀림없이 기록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 중 한 사람인 앙리 마르지노는 "19세기 말 사람들은 모든 간섭 작용에 물질적 대상이 내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에너지장의 상호 작용 혹은 비물질적인 다른 힘들이 문제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124
마티유: 불교에도 물론 실험적 검증이 존재하지만, 불교의 목적을 염두해 두셔야 할 것입니다. 불교는 2천 년이 넘는 명상적 삶과 정신 공부를 통하여 발전해온 내면의 과학입니다. 특히 티베트에서는 8세기부터 이러한 과학이 국민 상당수의 주요 관심사로 대두되었습니다. 그 목적은 이 세계에 물리적 작용을 가함으로써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내면적 지식을 발전시키게 하여 보다 더 훌륭한 인간은 만듦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었습니다. ... 이러한 분석은 깨달음으로 통하는데, 그것은 비록 내면적이기는 하나 우리가 외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와 우리가 외부 세계에 행사하는 작용에 대하여 엄청난 영향력을 갖습니다. 125
장-프랑수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유익한 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신적 구원의 방식을 세웠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된다.
마티유: 객관적 지식이란 무슨 뜻인가요? 미립자의 성격은 우리가 사용하는 측정 체계와 무관하게 인식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적 개념과 무관한 우주는 인간 정신에 의하여 인식될 수 없습니다. 현상의 실재에 매달려 있는 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신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무엇에 작용을 가합니까? 그것 또한 정신입니다. 우리를 끝없는 고통으로 이끌어들이는 생각을, 다시 말해 세계가 확고부동하다고 믿는 태도를 걷어버리는 데 성공하려면 물론 객관적 지식이 필수불가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객관적 지식은 자연 물리학에 관련된 지식이 아니라, 고통의 메커니즘과 정신 과학의 실험적 검증에 대한 지식입니다. 127
내적 성찰을 위해 과학적 방법을 동원했던 서양의 심리학자들은 방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예 내적 성찰을 연구 분야에서 배제했습니다. 그들이 실패한 까닭은 실험에 적절한 도구를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명상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정신의 심원한 본성을 관찰하는 데 필수적인 정신 평정 기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128
불교의 형이상학에 대하여
마티유: 불교가 철학이냐 종교냐를 따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불교는 부처를 깨달음의 상태로 이끄는 구원의 도이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의 강도 높은 수양을 통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자 수단이다. 저는 불교를 가장 단순하게 정의하려면 먼저 그것을 도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의 목적은 이른바 '완성', 궁극적인 앎, 깨달음, 혹은 '부처의 상태'라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130
부처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극단적인 것'으로 불리는 사바 세계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지로부터 벗어난 자는 더 이상 끝없는 환생으로 이끄는 업의 노리개가 아니기 때문에 사바 세계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끝없이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열반의 평화에도 머물지 않습니다.135
불교는 세계에 '시작'이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시간의 시초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발현에는 항상 선행 원인이 필요한데, 발현되기 이전에는 시간의 개념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다만 관찰자에 의해 지각되는 연속적 순간에 붙여진 개념에 불과합니다. 시간은 고유한 실체가 없습니다. 개개의 순간들과 별개인 시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단지 특정한 기준 체계와 우리의 경험에 관련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형이상학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시간을 초월하여 부동의 절대를 구현하는 '제4의 시간'에 대해 말합니다. 149
장-프랑수아: 불교의 우주론은 과학의 발견과 근본적으로 대립하지 않는구나?
마티유: 물론입니다. 불교의 우주론은 역사의 각 시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진리, 관습적 진리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식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이론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의식이 무생물에게서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현재 의식의 순간은 과거 의식의 순간에 의해 가동된 것으로서 나아가 미래 의식의 순간을 가동시킵니다. 세계에 진정한 시간적 시초가 없는 것 처럼 의식 역시 시초가 없습니다.
장-프랑수아: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개념에 따르면 의식에 관계된 것은 의식적인 것에서부터 생길 수밖에 없고, 물질은 물질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대 과학에서는 상당히 유효하고 주목할 만한 실험과 관찰을 근거로 하여 이를 반박하였다. 너의 스승인 자크 모노는 "생물은 물질에서 생겼으며 의식은 생물에서 생겼다. 그러므로 물질로부터 생명체게 탄생한 후 종의 진화를 거쳐 차차 의식과 언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현대 과학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도식이다.
마티유: 신경 계통 조직과 생명의 형태가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지적 능력 또한 발달되어 간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매우 기본적인 형태의 생명체라도 특정한 의식을 부여받는다고 말합니다. 즉 생명체는 아무리 원시적이라고 해도 순수 물질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동물의 등급이 높아질수록 그 의식은 점점 더 유능해지고 깊이를 더해 가며 완성도가 높아져 마침내는 인간의 지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식은 여러 배경과 조건 안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151
장-프랑수아: 그렇다면 극미 동물의 경우는 어디에서 의식이 나온다고 생각하느냐?
마티유: 그 점에 대해 불교에서는 물질계의 에너지 보존과 유사한 '의식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이 선행하는 존재에서 나온다고 답합니다. 151
마티유: 공은 무도 아니고 현상과 분리되어 있는 외부의 빈 공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현상의 본성 그 자체입니다. 절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인 실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양상은 현상 세계이고, 절대적인 양상은 공입니다.
장-프랑수아: 그러나 현상의 양상은 완벽하게 구체적이고 확실하다.
마티유: 공의 개념은 자아의 의식과 현상을 물화하는 우리의 선천적 경향을 거슬립니다.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이 "물질은 에너지고 에너지는 물질"라는 공식과 개념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52
마티유: 한 대상은 서로 다른 1백명의 사람들에게 1백 개의 거울에 비쳐진 1백 개의 영상처럼 보입니다.
장-프랑수아: 그럼 그것은 동일한 대상이냐?
마티유: 동일한 대상이긴 하지만 우리가 앞서 물잔의 예를 통해 생각해보았듯이 서로 다른 존재들에 의하여 완전히 다르게 지각될 수 있습니다. 오직 깨달음에 다다른 사람만이 겉으로 나타나지만 고유한 실재가 없는 사물의 궁극적 본성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최종적 입장은 '중도'입니다. 세게는 인간 정신이 투영된 결과도 아니고 인간 정신과 전적으로 독립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개념과 사유, 그리고 모든 관찰자들로부터 독립적인 실재, 그래서 독자적이며 고정적인 실재는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허무주의나 영원주의에 빠지는 것을 피합니다. 결국 절대적 진리의 직접적인 관조는 모든 지적 개념과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초월합니다. 154
장-프랑수아: 우리가 처음에 말했던 '종교냐 철학이냐'라는 문제로 돌아가자면, 이제는 분명히 그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형이상학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는 철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의 형이상학은 비록 종교적 행위에 가까운 제의적 양상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계시가 아닌 철학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양상들은 고대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신플라톤주의 같은 것이지 156
외적 행동과 내면 성찰
장-프랑수아: 서양 사상은 본질적으로 상호 보완적인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축은 인격의 자율성을 쟁취하고, 의식적 행위자이자 결정의 중심으로서의 개체성, 즉 개인적 판단과 의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두번째 축은 세계에 대한 영향력이다. 서양 문명을 활동의 문명 즉 정치적 기술을 통하여 인간 역사에 작용하고 자연 법칙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세계에 작요하는 문명이다. 서양인들은 그러한 작용에 힘입어 인간의 욕구에 맞게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내 생각에는 이는 '무집착'이라는 불교적 이상과 맞지 않는 것 같다. 두 가지 태도 사이에 본질적으로 어쩔 수 없는 대립이 있다고 생각지 않느냐? 159
불교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식을 모색했다면 서양에서는 그렇게 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 즉 외부 세계와 인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방식을 검토했던 것이 아닐까?
마티유: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외부적 변화가 우리의 내면적 행복에 미치는 효과 또한 어느 정도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외부 조건과 물질적 조건의 향상이나 악화는 우리의 만족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는 결코 기계가 아니므로 결국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정신입니다. 160
장-프랑수아: 불교에서는 세계에 대한 무위를 역설하지 않느냐?
마티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않은 채 세계에 대해 작용하려고 한다면 결국 지속적이고 심오한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세계에 대한 작용은 바람직한 것인 반면 내부적 변화는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죠. 161
동양은 서양에게 의학의 발전과 수명의 연장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처럼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에만 관심을 갖는 문명은 분명히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정신적 가치가 더 이상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지 못할 때, 물질적 진보는 보람없는 삶을 감추는 포장지 역할을 할 뿐입니다. 168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불교의 본질이 '불교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정신의 근본적 매커니즘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172
장-프랑수아: 수도자가 아닌 일반적인 인간에게서 당파적인 시각을 제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75
장-프랑수아: 승려 생활과 수도 생활은 결국 둘 다 불교 지혜의 이상인 것 같다. 이는 불교의 역량이 어느 한 문명의 모든 측면에 용해되는 것을 제한하지 않느냐? 우리 서양 문명 같은 경우는 근본적으로 세속적인데, 앞서 말한 불교의 특징 때문에 서양에서 불교가 부차적인 현상으로 머물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마티유: 속세를 떠난 삶과 서양의 일상적인 삶 사이에는 점진적 단계가 있습니다. 불교 사상은 일상적인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도 우리 정신에 대단한 감화를 주며, 아울러 커다란 유익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하루에 몇 분이나 몇 시간만 명상 수련에 할당하더라도 풍부한 정신적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177
장-프랑수아: 만약 불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세계가 실재가 없는 환상에 불과하고 자아 또한 그와 마찬가지라면, 기업의 사장이 되고 정치가가 되고 과학자가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허위적 환상의 공범이 되는 셈이니 말이다.
마티유: 사실 수도자에게 세속적 활동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쨋든 이 대목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환상'의 의미를 확실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것은 서양이 이해하기 힘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세계는 우리의 환상이 만들어 내는 만큼만 실재적입니다. 자아가 단지 기만에 불과하고 외부 세계가 고유한 실재를 부여받은 실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치유하고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온갖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정당한 일입니다. 178
장-프랑수아: 활동적인 자아와 그 자아가 현실에 대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면 도덕적 책임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거냐?
마니유: 불교의 실천은 세 가지 보완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각'과 '명상'과 '활동'입니다. . 시각은 형이상학적 전망, 사물과 현상의 세계, 정신의 궁극적 본성 등에 대한 탐구에 해당합니다. . 명상은 일단 이러한 시각이 확립된 후 그것이 제 2본성이 되도록 그것에 익숙해지고, 정신적 수련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 의식의 흐름 안에 통합하는 일입니다. . 활동은 시각과 명상을 통해 획득된 내면적 깨달음을 외부 세계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178
마티유: 칸트의 생각을 빌어 표현하자면 "자아는 그 자체의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의 실재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가 없는 의식의 흐름을 나룻배 없는 강물에 비유했습니다. 179
자율적 실체로서 이해되는 개인의 자아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우리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비롯됩니다. 즉 행위에 대한 대가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연속성입니다. 180
불교와 서양
마티유: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불교는 내적인 것 못지 않게 외적인 현상 세계에 대한 궁극적 이해를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열반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존재 전체에 대한 동정심과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 187
장-프랑수아: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불교가 어떤 점에서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가? '초연함의 철학'인 불교는 사회에 무관심하다. 승려들은 산 속에 혼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실상 인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 완성을 위해 전념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마티유: 수행자는 다른 사람들을 더 잘 돕기 위한 정신적 힘을 기르기 위해 일시적으로 세계와 고립되는 것입니다. 정신적 구도는 내적인 변화로부터 시작되며, 내적 변화가 성취되었을 때 비로소 한 개인이 사회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190
장-프랑수아: 그게 바로 유엔의 목표지! 그런데 왜 유엔이 실패하는 걸까?
마티유: 달라이 라마는 외적 무장해제는 내적 무장해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결코 실행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개인이 평화로워지지 않는다면 개인의 결합인 사회도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191
종교인의 구도와 속인의 구도
마티유: 진정한 속인성은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종교 교육수업을 폐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학교에서 모든 종교와 심지어 유물론까지도 포함한 모든 철학적 견해를 가르치고,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이러한 수업에 참석하느냐 마느냐의 선택권을 부여해야 합니다.
마티유: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모든 형태의 고통과 그 원인인 무지, 증오, 탐욕 등을 치유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따라서 자비는 한편으로 고통받는 존재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200
마티유: 서양사회의 경우, 외적 조건들로부터 생겨나는 고통에 대해 일시적으로 대처할 많은 수단들을 갖고 있습니다만, 내적 행복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들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또한 삶과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관련된 기준들 역시 부족합니다. 이는 우리 정신의 빛을 밝혀줄 정신적 원칙들이 점점 더 희미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204
지혜, 과학 그리고 정치
장-프랑수아: 서양에서 실패한 것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은 서양에서 거둔 성공 가운데 하나이다. 문제는 과학으로 충분한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명맥하게 과학으로 충분하지 않은 분야가 있다. 서양의 실패는 우선 비과학적인 서양 문화의 실패, 특히 철학의 실패하고 말할 수 있지.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17세기의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생겨난 이래 철학의 이중적인 차원이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과학적인 차원 또는 과학적인 목표이고 또 다른 차원은 지혜의 추구, 그리고 인간의 삶,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삶 너머에 있는 삶에 주어진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지. 철학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데카르트에게서도 여전히 찾아 볼수 있다. 이 두가지 측면이 동시에 다루어지고 재결합하는 마지막 철학은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현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하고, 이것을 통해 지복과 지선을 깨닫게 되는 현자의 기쁨과 최고의 지식이 동일하다는 생각이 마지막으로 펼쳐진 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었다.
마티유: 왜 철학이 더 이상 삶의 모델을 제공하지 않게 된 것입니까?
장-프랑수아: 최근 300백년 동안 철학은 지혜의 기능을 포기했다. 철학은 지식으로 한정되었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철학은 과학에 의해 점차적으로 자신의 과학적 기능으로부터 밀려나게 되었다. 철학의 과학적 기능은 말하자면 철학의 대상으로부터 빠져 나가게 되었다. 사실 철학은 그 자신의 성공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왜냐하면 철학의 목적은 이러한 다양한 과학을 탄생시키는 것이었으니까.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철학에서 말하는 지혜는 정의의 추구와 행복의 추구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즉 개인적인 지혜의 추구라는 차원에서는 더 이상 주장되지 않는다.
마티유: 그것이 바로 서양의 주요 문제가 아닌가요?
장-프랑수아: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두 번째 측면은 18세기에 들어와 정치의 영역으로 이전되었거든. 정의의 추구, 행복의 추구는 정의로운 사회를 조직하는 기술이 되고, 이 정의로운 사회는 집단적 정의를 통해 그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선과 정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혁명이 될 것이다. 그 순간 철학에서 다루는 도덕의 모든 분야는 정치 체제 속에서 실현되는 거지. 19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사회를 철두철미하게 새로 건설하길 바라는 유토피아의 시대로 들어선다.
이 유토피아들 가운데 중심이 된 것은 사회주의, 특히 마르크스주의였는데, 마르크스주의는 거의 20세기 말까지 정치 사상을 지배하게 되지.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의 도덕적 기능은 제로에서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최초로 시도한 중요한 사례가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다. 혁명의 근대적 개념이 생겨난다.
볼셰비키 혁명과 함께 마르크스, 레닌주의, 중국에서 마오쩌둥에 의해 시도된 혁명, 이 모든 체제들은 하나의 중요한 이념을 공유하고 있는데, 선의 추구와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지닌 유토피아, 사회의 혁명적인 변화를 거치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이상에 봉사하고 사람들이 절대적인 혁명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도덕이지. 그러므로 더 이상 개인적인 도덕도 개인적인 지혜의 추구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개인적인 도덕이란 집단적인 도덕에 참여하는 것이지. 파시즘과 나치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로에서 무한까지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거기에 반대한다고 의심되는 모든 것을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혁신하는 것이었다. 혁명적 행위는 철학, 심지어 종교까지도 대체했다. 225
마티유: 과학 그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급하게 만병통치약으로 규정된 과학이 어떻게 진정한 자혜의 추구를 가로막을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분석이므로 현상의 끝없는 복잡함 속에서 길을 잃을 소지를 갖고 있습니다. 과학은 아주 광범위한 발견의 영역으로 접근해감으로써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두뇌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황금을 향해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처럼 말이죠. 구도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지식과 무지,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의 기초가 되는 원칙들에 대한 고민을 기초로 합니다. 과학은 물질적이고 수학적인 증거들만 고려하는 데 반해, 구도는 명상적 삶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신념의 가치를 인식합니다.
장-프랑수아: 주의해라. 과학과 과학주의는 구별해야 한다.
마티유: 진정한 과학의 위험성은 분석을 하겠다는 정열이 도를 지나쳐 지식의 지평이 흩어져 없어져 버리는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227
장-프랑수아: 고대 과학과 현대 과학의 요람인 서양에서조차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면까지 과학 사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에게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다른 무언가가 아주 최근까지는 종교였고 정치적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은 더 이상 이러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들은 유혈과 조소속에서 무너져 버렸다. 그리하여 공백이 생긴 것이다.
마티유: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게으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번째는 가장 흥미로운 경우인데, 결코 본질에 이르지 못한 채 부차적인 일들로 자기 삶을 고갈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연못이 표면에 일어나는 물결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애를 쓰면서 자신의 시간을 보냅니다. 제 생각에는 지식의 분산은 이러한 게으름에 속하는 것입니다.
장-프랑수아: 너는 사소한 문제들이라고 말하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적절한 구별이 아니다. 정신적 깨달음과 관계가 있는 문제와 관계가 없는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어떤 문제는 중요하면서도 정신적 깨달음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
마티유: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재정적인 파산은 야심 많은 은행가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지만 세상사에 지친 사람에게는 사소한 문제입니다. 230
마티유: 현대 철학의 실패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제게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기준과 원칙들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철학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들은 진정한 내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모든 정신적 도구가 요구하는 실제적 적용과는 분리되어, 지극히 복잡하면서도 거의 쓸모 없는 지적 유희들과 이념들을 아무런 제한 없이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이념과 존재 사이의 분리가 너무 심해서 이러한 철학 체계들을 발표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이 그 철학 체계의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본보기로 삼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은 사람이라도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232
장-프랑수아: 어떤 개인이 실현할 수 있는 지적 또는 예술적 성과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는 도덕적 삶 또는 간단히 그의 도덕의 빈번한 빈곤함 사이에서 생겨나는 불일치, 상충, 모순이다. 그것은 실상 철학이 개인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남게 된 공백을 보여주는 것이다. 233
불교와 죽음
마티유: 자신이 직접 겪는 고통은 무수한 중생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상기시키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되살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은 나쁜 업을 쓸어 내는 '빗자루'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고통은 과거에 저지른 부정적 행위의 결과이므로 정신 수련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동안 빚을 갚는 것이 좋죠.
어떤 이유로도 안락사와 자살은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조리하고 무익한 방법으로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우연, 운명이나 신의 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저지른 과거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죽음 너머로까지 우리의 업을 가져가는 것보다는 그것을 소멸시키는 편이 낫습니다. 안락사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명도 타인의 생명도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안락사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는 슬픈 현실 자체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가치들이 거의 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어떠한 원천도 영감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티베트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티베트인들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성찰했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었던 가르침들에 의지한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지표와 내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과 죽음을 모두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알기 때문이죠.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비추어 볼 때, 자살은 곧 실패를 의미합니다. 자살을 함으로써 자기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 현재의 삶에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변화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허약함과 게으름의 한 형태인 좌절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자살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문제를 다른 상태로 옮겨 놓는 것일 뿐입니다.
장-프랑수아: 바드로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여러 가지 단계들은 무엇이지?
마티유: 바르도는 '전이', 다시 말해 중간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구별됩니다. 1. 삶의 바르도, 탄생과 죽음 사이의 중간 상태 2.죽는 순간의 바르도, 의식이 육체와 분리되는 순간, 두 가지 국면의 해체가 존재 즉 육체적.감각적 능력의 외적 해체와 정신 과정의 내적 해체.
육체적.감각적 해체. 우주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가 소멸되는 것에 비교된다. 흙, 물, 불, 공기, 호흡. 마침내 호흡이 멈추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죽음이고 육체와 의식의 흐름과의 분리이다. 이때 이 의식의 흐름은 점점 오묘한 일련의 상태들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이 두번째 분리이며 내적 분리입니다. 짦게 나마 절대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그 다음에는 '생성'의 바르도가 옵니다.
왕으로서 개인
마티유: 고대 불교의 우주론은 부처의 제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기원전 5-6세기 인도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우주론이 진리로 생각되었는데, 이것은 '상대적 진리' 혹은 '관습적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불교가 현상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경직된 '교리'가 아닙니다. 현상적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존재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죠. 우주에 대한 현대 이론은 우리 시대의 우주에 대한 이해에 상응하는 것이고, 불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굳이 사실과 자연의 법칙을 기술하는 과학을 거부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반면에 과학이 물질과 비물질의 모든 차원에서 세계와 정신의 본성을 궁극적으로 해명하게 되었다는, 거의 형이상학에 가까운 과학의 주장만큼은 불교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과학적 발견이나 변화에 따라 불교가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한 발견은 정신적 삶의 원칙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니까요. 285
불교와 정신분석학
장-프랑수아: 프로이트의 주요 명제들. '무의식' 심리적 형성물과 충동이 존재하며, 우리가 의식하거나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작용을 가하는 억압된 기억들이 자기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기억들을 밝혀 내고 잠정적으로나마 해소시켜 우리로 하여금 그 기억의 주인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기법이 바로 정신분석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기억들을 무의식 속에 가두어 두는 억압의 벽을 범상한 자혜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마티유: '억압의 벽'을 극복할 수 없다는 말은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와 같은 결론은 정신의 본성에 대한 내적 성찰과 직접적인 관조에 대한 지속적인 체험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300
불교와 프로이트 이론의 커다란 차이점은 무의식의 특성을 인식하는 방식과 그것을 순환시키기 위한 수단에 있습니다. 인간은 과거의 성향들에 접근할 수도, 정신적 방법으로 그것들에 반응할 수도 없다는 프로이트의 단정적인 주장에 불교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정신적 삶의 목적은 이러한 성향들을 해소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애정과 반감들은 과거의 조건들로부터 잉태되기 때문이죠. 정신과 관련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성향들의 근원에 이르러 그 성격을 검토하고 그것들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순화 작용이라 칭할 수 있으며, 강물의 깨끗함과 투명함을 방해하는 침전물이나 오염들을 제거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정신적 성향 내지 무의식에 대한 등가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감광은 되었지만 미처 현상되지는 않은 필름의 영상처럼 잠재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 분석학에서는 이 필름은 현상하려 애씁니다. 반면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불로 그것을 소진시켜 버리는 것이 더욱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의 불은 정신의 궁극적 본성 즉 공을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모든 성향들의 흔적을 지워줍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정신분석학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작용합니다. 과거에 안고 있었던 몇몇 문제들의 정체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과거의 사건들을 다시금 체험하는 것은 장애를 감소시켜 주긴 하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까지는 제거하지 못하는 제한된 치유책일뿐입니다. 끊임없이 막대기로 연못 바닥의 진흙을 휘저어 대는 것은 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죠. 302
마티유: '리비도' 즉 성적 욕망의 에너지를 예로 들어 보죠. 우리가 리비도를 제거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그것은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출하기 위해 왜곡된 길로 접어듭니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리비도를 그 당사자에게로 다시 이끌어 가서 그것이 정상적으로 표현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반면 불교의 명상 과학에서는 그러한 욕망을 제거하려고도 정상적인 상태에서 분출시키려고도 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을 욕망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불교는 여러 단계로 나뉜 일련의 수단들을 홀용하죠. 이 수단들은 해독제를 써서 욕망을 약화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욕망에 잠재된 공을 인식하게 하고 마침내는 욕망을 깨달음으로 전이시키게 됩니다. 결국 욕망은 더 이상 정신을 노예화하지 않고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영원히 변치 않는 내적 지복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불교가 매연 가득한 도시를 떠나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숲을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소모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면, 정신 분석학은 오히려 생각과 꿈을 격화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생각들을 말입니다. 환자는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 적당히 그것을 통제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결국엔 그 세계를 통제하기는 커녕 그곳에 사로잡혀 있는 꼴이 되고 맙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뭉의식에 빠지는 것은 뱀들을 깨워 가장 위험한 녀석들만을 골라 몰아낸 후 여전히 나머지 뱀들과 함께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304
불교에서는 정신분석하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무지와 내적 노예화의 근본 원인들을 식별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의 갈등을 비롯한 정신적 외상들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라 상황적인 원인일 뿐입니다. 근본 원인은 자아에 대한 애착에 있습니다. 이로부터 애정이나 반감, 자기애, 자신을 지키려는 욕망 따위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305
진보와 새로움에 대하여
장-프랑수아: 약 2백년 전부터 서양은 역사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해결책을 통해 인류가 구원받기를 고대해왔다. 이와 같이 완강하고 교조적인 태도, 다시 말해 역사의 단순한 흐름에 수반되는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해결책들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태도야말로 현재 우리가 도처에서 느끼고 있는 불만족의 원인일 것이다. 불교가 서양에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결핍, 윤리와 개인적인 지혜의 부재가 남겨 놓은 공백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317
서양에서 불교가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불교는 맹목적인 신앙 행위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두 번재 조건은 아직까지 완전히 충족되지 못했다. 그 조건이란 서양이 과학적 지식과 정치적 성찰, 그리고 정치 활동에 쏟아 부었던 2,500년 동안의 어마어마한 투자와 불교의 영향력이 양립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투자는 현상 세계 안에서 인간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들기 위해 사회 및 그 내부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들였던 모든 노력을 뜻한다. 318
승려가 철학자에게 묻다
마티유: 비록 고통이 환상일지라도 실제로 괴롭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므로, 그 고통을 없내는 것은 정당하고 바람직하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이렇게 비난합니다. "존재의 항구적 성격을 대표하고 존재를 거쳐 살아 남은 실체라고 생각되는 자아라는 것이 결국 환상에 불과하다면, 무엇 때문에 행복에 관심을 갖는가?"라고요.
장-프랑수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나는 그저 어떤 실재의 흐름이 스쳐 지나가는 장소일뿐이다"라는 신념에 이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평온함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아 학파와 스피노자의 모든 추론들이 그렇다. 하지만 체험은 이런 추론에 거역하니 어찌겠느냐.
마티유: 우리 고통이 원인이 바로 그러한 거역에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스토아주의자는 수동적인 체념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교도의 경우 무아는 곧 해방의 체험을 의미합니다.
장-프랑수아: 그렇지 않다. 이미 벌어진 일을 그저 참아내는 일종의 숙명론이 아니라 세계의 첫번째 원인, 다시 말해 신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시금 취한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이다. 범신론자인 그는 '신' 또는 '자연'이라고 말했다. 지혜에 접근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우주의 필연성에 대한 수동적인 노리개가 되지 않고, 자신의 주제적인 의지로써 이러한 필연성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티유: 대락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 말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업에 대한 이해와 상통하군요. 즉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이상적인 방식은 우리에게 지워진 운명을 저항 없이 완전히 받아들이는 거라는 말이죠.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이와 다릅니다. 불교는 현재를 인정합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은 자신의 과거 행위에 대한 결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미래는 자기 자신에게 달여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교차로에 서 있는 셈이죠.
자신의 비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을 스토아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극히 애지중지하고 자신을 영원하고 확고불변한 존재로 생각하여, 결국 애증의 끝없는 연쇄를 만들어 내는 '자아'에 의한 구속에서 벗어나 보다 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24
장-프랑수아: 서양 문명의 출발점은 그리스 문명의 탄생 이해,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물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대답이 있다. 첫 번째는 종교적인 대답으로, 특히 유일신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지배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궁극성을 내세나 신의 초월성에 속하는 진리, 다시 말해 불멸의 영혼이라는 개인적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 방식들과 지켜야 할 법칙들의 총체 속에 설정하는 것이다. 불멸의 영혼은 이승의 삶에서 이룬 가치들에 따라 내세에서 영생을 이루게 된다. 326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두 번째 길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철학적 길이다. 지혜와 내적 평화의 추구.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생각이다. 플라톤,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몽테뉴. 이 두번째 철학적인 길은 17-18세기 들어 전체적으로 포기되었다. 17세기에 태어난 근대 과학과의 교류를 통해 철학은 점점 더 순수 지식에 눈을 돌려 역사의 해석에 골몰했고, 대신 인간 존재를 관리하고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소홀해졌다.
과학의 탄생을 계기로 사람들은 객관성이라는 것, 말하자면 단지 현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지식이 존재한다는 신념에 접근하게 된다. 서양 사람들은 믿음의 문명에서 증거의 문명으로 이행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18세기부터 과학에 대한 믿음이 지혜에 대한 믿음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첫번째 단계인 계몽 철학이다.이성의 계몽이지. 그 이후로 개인적인 지혜의 추구는 객관적인 지식의 길을 거치게 된다.
18세기에 태아나 19세기를 거쳐 앞으로도 계속될 새로운 이념은 진보가 이성에서 비롯되며, 이성이 우리에게 세계와 인간 기능의 감추워진 동인들을 설명해줄 거라는 생각이다.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이성.진보의 이중항이지. 329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문제에 답하려는 서양의 시도 가운데 18세기부터 시작된 세번째 측면은 사회의 개조, 즉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그 가치가 치솟은 '혁명'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유토피아의 엄청난 남용에 속한다. 335
결국 20세기의 역사는 사회적 유토피아라는 것이 최후 몰락으로 대표된다. 그렇다면 남는 건 과연 무엇일까? 그건 오래되고 유익한 비법에 따른 지혜로의 회귀지.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몇몇 젊은 철학자들의 저서가 성공한 이유이다. 그들은 아주 겸손한 태도로 삶의 방법에 대한 가르침의 문제로 되돌아감으로써 상당히 많은 독자를 사로잡게 되었다.
장-프랑수아: 나는 존재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모든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 가장 큰 한계는 죽음이다. 나는 지혜에 대한 교리들 중에서 내세나 죽음 이후의 세계, 특정 형태의 영원성 등을 믿는 교리와 죽음이란 한 존재의 완전한 무화이며 내세란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하는 교리를 서로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쪽을 믿는다. 그 틀 안에서 지혜의 추구는 항상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다. 340
철학자의 결론
이번 대담을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 지혜로서의 불교에 대해서는 더 많은 감탄을 하게 되었고, 형이상학으로서의 불교에 대해서는 더 많은 회의를 품게 된 것이다. 또한 최근 서양에서 불교 열풍이 불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불교가 삶의 기술과 도덕의 영역에서 황폐화된 서양 철학의 공백을 채워 준다는 데 있었다. 343
나의 아들 마티유가 이번 대담에서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부분은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불교가 갖는 타당성 문제이다. 단언하건대 불교적 지혜의 이론적 배경은 아직까지 여전히 증명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증명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쾌락주의나 금욕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실용적인 행태로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를 지복과 도덕성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을 때, 형이상학적 배경의 도움없이 순전히 경험적인 한계들에 갇여 있는 상태에서 지혜에 따르는 삶을 이끌어가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그러한 한계들을 인정해야 한다. 지혜란 언제나 추측에 바탕을 둘 것이다. 부처와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은 지혜를 과학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또한 도덕과 삶이 기술을 증명 가능한 지식으로부터 도출해 내고자 하는 것도 헛된 일이다. 지혜는 어떠한 과학적 확실성에도 근거하지 않으며, 과학적 확실성은 결코 지혜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둘은 실제로 존재하고, 영원히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영원히 보충적인 요소로서 필수 불가결하다.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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