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본다는 것의 의미

백_일홍 2023. 4. 13. 22:04

본다는 것의 의미

 

존 버거


1부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 

평생선을 그리고 있는 삶으로 인해, 동물들은 인간에게 인간끼리의 그 어떤 교류와도 다른 친구로서의 관계를 제공하게 된다. 다르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에 대하여 제공되는 친구 관계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들어서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서는, 오늘날 20세기의 기업 자본주의에 의해 완성된, 하나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자연 사이를 중재해온 모든 전통의 파괴이다. 이러한 파괴가 일어나기 전에 동물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첫번째 집단이었다. 동물들은 인간과 함께 인간 세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물이 맨 처음 인간의 상상 속에 들장한 것은 전령이난 약속으로 였다. 가축이 된 동물들은 마술적인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서 그것은 때로는 신탁 같은 것, 때로는 희생 제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주어진 종을 마술적인 것, 길들일 수 있는 것,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식품 등으로의 선택은 동물의 습성, 근접성, 그리고 '매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10

동물은 농부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길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동물은 공통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침묵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그것이 인간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는 것, 인간과는 별개의 종이라는 것, 인간으로부터 배제되는 것 등을 확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별개의  종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인간의 삶과 결코 혼동되는 일이 없는 동물의 삶은 인간의 그것과 평행선을 이루면서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그 두 개의 평행을 이루고 있는 선들은 한 점에 모이게 되는데, 어쩌면 죽은 다음에 다시 평행선을 이룰 수 있게 교차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영혼의 윤회에 대한 광범위한 믿음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13

평생선을 그리고 있는 삶으로 인해, 동물들은 인간에게 인간끼리의 그 어떤 교류와도 다른 친구로서의 관계를 제공하게 된다. 다르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에 대하여 제공되는 친구 관계이기 때문이다. 14

인류학
다윈의 진화론
동물에 대한 모든 비밀은 인간과 인간의 기원 사이에서 동무루이 중재를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인간과 인간의 기원 사이에서 중재를 하게 되는 데, 그 까닭은 동물들이 동시에 인간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지평 너머에서 유래한 것이다. 거기에 속해 있으며 여기에 속해 있기도 한 것, 유한한 생명을 지닌 것이기도 하고 영원불멸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에 관한 최초의 이원론, 이것은 동물들에 대한 취급에 반영되어 있다. 동물들은 지배의 대상이면서 숭배의 대상이고 가축이면서 동시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기도 했다. 

오늘날 이러한 이원성의 흔척은 동물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ㄴ서, 그리고 동물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떤 농부는 자신의 돼지를 아주 좋아하게 되고 그리고 그는 그 동물의 고기를 기꺼이 소금에 절여 버린다. 

동물든 최초의 질문들 중 일부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 최초로 회하의 주제가 된 것은 동물이었다. 
. 최초의 은유는 동물이었다. 
루소, "인간의 최초 발화는 비유(은유)였던 것이다. 맨 처음 생겨나게 된 것은 비유적 어법이며, 진정한 의미는 맨 나중에 발견되도록 되어 있었다" 

만약 최초의 은유가 동물이었다면, 그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가 은유적이기 때문이다. 공통과 구별(치이) 그리고 구별지어 주는 것들은 인간과 동물 관계에서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게 된다. 

토템 숭배, 
레비스트로스 "맨 처음 인간은 그 자신과 유사한 모든 존재들과 자신을 동일한 존재로 느꼈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들을 구별짓는 것처럼, 스스로를 구별짓는, 즉 사회적 분화에 대한 개념적 뒷받침으로서 종의 다양성을 이용하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동물로 이루어진 기호들
그리스인, 
황도 12궁도(태양의 괘도를 분할하는 12개 별자리)의 12 동물
하루 중 12시간에서 각 시간을 나타내는 기호가 동물들이었다. 
힌두교도인, 
지구가 코끼리 등에 지워져 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의 등에 올아서 있다고 상상했다. 

동물들의 이름과 성격을 신비스러운 하나의 특질에 빌려주었다.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구별지어 주었던 것은 인간이 상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능력, 언어의 능력인데, 최초의 표상은 동물이었다.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구별지어 주었던 것은 인간들이 동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동물사> 인간과 동물과의 비교적인 관계에 대한 계통을 세우고 있다. 

19세기까지 인격화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으며, 그 둘 사이의 근접성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인격화는 지속적으로 사용된 동물을 이용한 은유의 잔재였다. 

지난 2세기 동안 동물들은 점차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동물들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롭게 도래한 고독 속에서 인격화라는 것은 우리를 이중으로 거북하게 만들고 있다. 

결정적인 이론전 단절은 데카르트와 함께 찾아왔다. 데카르트는 동물에 대한 인가의 관계에 함축되어 있는 이원성을 인간의 내부로 내면화했다. 육체와 영혼을 완전히 나눔에 있어서, 그는 육체를 물리학과 기계학의 법칙에 넘겨 주었고, 동물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기계적 모형으로 격하되었다. 21

18세기 동물들에 대한 향수, 경험과 비밀을 갖고 있지 않는 천짐함, 동물들이 멀어져 가는 과거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동물들이 무시당하는 존재가 되어 주변으로 밀려나기에 앞서 헤아릴 수 없는 생산적인 발명품들(철도, 전기, 켄베이어벨트, 통조림 산업, 자동차, 화학비료)이 여전히 필요했다. 23

. 산업혁명 첫 단계에서 동물들은 기계처럼 사용되었다. 후기 산업사회 시기에는 원료 취급을 받았다. 식품으로 소용되는 동물들은 대규모로 제조되는 상품처럼 가공되었다. 

경제적 것뿐만 아니라 이론적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물에 대한 이러한 격하는, 인간이 고립된 생산과 소비 단위로 격하되도록 만들어 온 것과 동일한 과정의 일부이다. 
. 이 시기 동안 동물에 대한 접근은 인간에 대한 접근을 예시해주는 경우가 흔했다. 동물의 작업 능력을 기계적인 측면에서 보는 견해가 나중에 인간인 노동자들의 작업능력에 대해서도 적용되게 되었다. * 테일러리즘 24
. 스키너와 같은 행동심리학자, 동물실험결과를 인간에게 적용함. 

동물들이 사라져 버리는 대신에 계속해서 증식할 수 있는 방법, 
부유한 국가 여러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애완용 동물들 

소규모 가족 생활 단위에는 공간이나 대지, 기카의 동물들, 계절, 자연적인 기온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완용 동물은 거세되었거
나 성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운동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거의 모든 다른 동물들과의 접촉을 박탈당한 상태이며, 인공적인 먹이를 얻어먹게 된다. 애완용 동물은 그의 소유자가 가지고 있는 생활 방식의 산물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쌍방의 자율성은 상실되오 왔기 때문에 - 그 주인은 '오직 자신의 애완용 동물에게만 특별한 존재인 인간'이 되어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동물은 자신의 주인에게 몰질적으로 필욯나 모든 것을 의존해 왔기 때문에 - 그들의 독립된 삶이 이루고 있던 평행선이 파괴되었다. 

동물들이 문화적으로 무시당하는 존재가 되어 주변으로 밀려나는 것은, 신체적으로 무시당하면서 밀려나는 것 보다 더 복잡한 과정이다. 대개 동물들은 가족에, 그리고 구경거리에 흡수되어 왔다. 

가족으로 흡수된 동물은 애완용 동물과 같이 물질적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주 인간의 꼭두각시로 변형될 수 있게 된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책에 실린 그림들은 초기의 본보기이고, 동물이 등장하는 디즈니 산업의 모든 작품들은 보다 최근의 극단적인 본보기가 된다. 그러한 작품들에서 현재의 사회적 관행이 동물계에 투사됨으로 인해 보편적인 것이 된다. 

이들 동물들은 소위 침묵하는 대중silent majortity들에 흡수되어 온 것이다. 구경꺼리로 변형된 동물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사라졌다. 동물이 그려진 그림책. 수족관의 판유리를 통해서 들여다 본 물고기. 이것이 가능한 것은 기술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에 의해서다. 
. 기술적으로는 이목을 끄는 영상을 얻기 위한 장치들-감춰진 ㅏ메라, 망원 렌즈, 전등, 리모콘 등 - 기술적인 천리안 
. 이념적으로는 1) 동물은 언제난 관찰 대상이 된다. 동물들이 우리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의미를 상실해 왔다. 동물들은 우리의 언제나 확장되기만 하는 지식의 대상이다. 우리 권는의 지수. 우리가 더 많이 알게 되면, 동물들은 더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2) 자연은 또한 가치 개념이기도 한다. 인간의 자연적 본질을 박탈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사회적 제도에 대립하는 가치인 것. "따라서 자연은 인간 문명의 인위적 구조와 대조를 이루어 유기적으로 성장해 온 것, 인간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동시에 그것은 자연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또는 최소한 다시 한번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이거나, 혹은 열망하는 인간의 내면성의 그러한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이러한 자연관에 따르면 야생동물의 삶은 하나의 이상, 즉 억압된 욕망을 둘러싸고 있는 반감으로써 내면화되어 있는 하나의 이상인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 회화, 동물에 대한 표현 방법은 이미 동물들의 임박한 실종을 인종하는 것이었다. 그랑빌 <동물들의 공적.사적 생활> 연재물 
. 이 동물들은 사람에 대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차용된' 것이 아니며, 반대로 가면이 벗겨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동물들은 기원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으로써, 또는 도덕에 관한 은유로써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각 상황에 '사람을 거주하게'하는 데 집단적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31

동물들과 사람들은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되어 가는데, 그것은 동물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32

동물원 
일반인을 위한 동물원은 일상 생활에서 동물들이 사라져 버리는 시기가 시작되면서 존재하게 되었다. 
동물원은 동물과의 만남이 불가능성에 대한 경계 표시이다. 인간이 존재해온 것 만큼이나 오래된 관계에 대한 묘비명이다. 

동물에 대해 제기되는 물음이 잣못된 것이었기에 이제까지 동물원은 그렇게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1828 런던동물원
1793 파리 식물원
1844 베를린 동물원 

금으로 만든 식기류, 건축, 교향악단, 연극배우들, 가구, 난쟁이들, 곡예사들, 제복, 말, 미술품, 음식 등과 아울러 이러한 사실 동물원들은 황제들 또는 왕들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어 왔다. 

19세기 일반인들을 위한 동물원들은 근대 식민지 개척국가들의 국력을 보증해주는 것이었다. '탐험가들'은 호랑이와 코끼리들을 사로잡아 고국에 보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했다. 대도시의 동물원들에 이국적인 동물들을 기증하는 것은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34

<초록의 내부> 질 아요드


박물학
동물에 대해 최초로 물음을 던짐, 동물들의 생활에 관한 연구가 자연상태와 거리가 있는 조건에서조차 가능하다고 생각함. 

1세기 이후, 행동심리학적, 생물행동학적 동물학 
동물원의 존재목적은 실험적인 조건하에 있는 동물들의 연구를 통해서 인간 행동의 원천들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라 주장함. 

전세계적으로 아이들의 놀이는 실제의 동물들, 또는 동물을 가장한 것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동물을 본뜬 제품이 중상층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장식하는 일상적 부분이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디즈니사와 같은 광범위한 전시 및 판매 조직의 도래와 함께 그것은 모든 계층의 아이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 되었다. 36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느끼기는 했지만 딱히 표현하지는 않은 질문을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다. 왜 이 동물은 내가 에상했던 것에 미치지 못할까?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 동물들은 자유롭지만, 그 동물들 자신들이나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 그 폐쇄된 감금 상태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를 통하여, 쇠창살 사이의 공간을 통하여, 또는 해자 위의 빈 공간을 통하여 눈에 뵈는 것은 그것들의 실제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 공간, 공기는 상징적인 것으로 전략해 온 것이다. 39

<여우> 질 야요드


동물원들, 실제의 것과 닮은 동물 장난감과 동물 모양을 본뜬 제품의 광범위한 상업적 확산과 같은 것은 모두 동물들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떠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 이 실제와 닮은 장난감들은 새로운 동물 꼭두각시, 즉 도시 지역의 애완용 동물들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던 것이다. 영상을 위한 동물의 복제는 경쟁적으로 동물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한층 더 이국적이고 외롭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 되었다. 

동물학자 테즈먼드 모리스, <털없는 원숭이>, <인간동물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동물들이 보여주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소비자 중심주의 사회에서 생활하는 것과 관련하여 받게 되는 스트레스를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극복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42
강제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나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모든 장소들 - 빈민가, 판자촌, 감옥, 정신병원, 강제노동수용소 - 은 동물원과 공통적인 점을 가지고 있다. 

<물 속에 들어간 하마> 질 야요드

동물들이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는 것이 뒤를 잇는 것은, 오늘날 전체 역사를 통해 동물들과 여전히 친근한 관계이며, 그러한 친근함에 수반되는 지혜를 지속시켜 오는 유일한 계층 소농 계급의 농부를 주류에서 밀어내고 쫓아내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의 근간이 되는 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의 기원이 되는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하는 이원성의 수용이다. 이러한 이원성을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근대적인 전체주의로 향하는 길을 열어 놓는 중요한 요인일 될 수 있다. 43

채 1백 년도 못되는 시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늘 겪게 되는 것이었던, 동물과 인간 사이에 오가던 그러한 시선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동행이 없이 각각의 동물을 바라보고 있는 동물원 관람객은 혼자인 것이다. 여럿이서 함께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해 보자면, 그들은 마침내 고립되어 버린 종에 속해 있는 것이다. 동물원이 그 경계표가 되는 이러한 역사적 상실은 자본주의적 문화에서 이제는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이다. 45


2부 사진술의 이용

카메라는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처럼 우리를 꼼꼼하게 살피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꼼꼼하게 다른 것들ㅇ을 살펴 주게 된다. 하지만 어제까지 그 어떤 신도 그토록 냉소적인 적은 없었는데 그 까닭은 카메파는 잊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1 신사복과 사진

아우구스트 잔더, <20세기의 사람들>
그의 목표는 1876년 자신이 태어난 지역인 쾰른 주의에서 가능한 모든 유형, 사회적 계급, 하위 계급, 품팔이, 생업, 특권 등을 나타내 줄 수 있는 원형을 발견해내는 것이었다.         

<무도회에 가는 농부들> 1914, 아우구스트 잔더


<마을 악단> 1913, 아우구스트 잔더

           

<개신교 선교사들> 1931, 아우구스트 잔더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그람시가 계급적 패권이라고 일컬었던 것의 시각적 본보기인 것이다. 57

신사복이라는 것은 19세기가 끝나기 전 마지막 30년 동안 전문적인 지배 계급의 복장으로 개발된 것이다. 맨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거의 밝힐 수가 없는 제복으로서 그것은 전적으로 앉아서 일하는 데서 생겨나는 권력을 이상적으로 만들기 위해 최초의 지배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착용하던 복장이었던 것이다. 행정관과 협상위원들의 권력이 그것이다. 본래 신사복은 토론과 추상적인 평가의 동작을 편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새로운 전형에 함축되어 있는 외견상의 그 모든 제약을 가진 신사복이라는 것을 등장시킨 것은 영국의 신사 계급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점점 더 신사복은 도시와 시골 지역에서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대량 생산되었다.

신체적인 모순은 명백한 것으로 나타난다. 수고로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정통한 몸들, 쭉쭉 뻗어 휘두르는 움직임에 익숙해 있는 몸들에 앉아서 일하는 것, 추상적인 것, 힘을 쓰는 수고를 하지 않는 것을 이상인 것으로 추구하는 의상이 만나게 된 것이다. 59

누구도 농부들이 신사복을 사도록 강요하지 않았으며, 무도회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선 그 세 사람은 자신들의 신사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신사복을 일종의 장식으로 입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 신사복이 유행을 넘어서는 전통적인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쉽사리 길들여지는 계급적 패권의 본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이다. 60

시골 사람들은 신사복을 선택하도록 설득되었다. 선전에 의해서. 사진들에 의해서. 새로운 대중매체들에 의해서. 판매원들에 의해서. 새로운 족속의 여행자들을 구경하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또한 편의 시설이나 국가의 중심적 조직체들의 정치적 발전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 예를 드러보자. 만국박람회라는 대단한 행사가 열렸던 1900년, 프랑스 각 도시의 모든 시장들은 사상 처음으로 파리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촌락 공동체의 소농 출신 시장들이었다. 거의 3만명에 이르는 시장들이 그 연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어떤 계급의 기준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 그 기준은 세련된 맵시 및 의복의 값어치와 관련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들의 바로 이러한 기준에 대한 수용과, 자신들이 물려받은 것이나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험 중 그 어느쪽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규범에 대한 다름 아닌 이러한 순응은, 그들이 그러한 기준 체제 내에서, 그리고 그들보다 상류 계급에게 뚜렷이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언제나 열등하여, 서투르고, 세련되지 못했으며, 수세에 몰려 잇는 듯한 것으로 비쳐지는 운명이 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문화적 패권에 굴복하는 것이 된다. 61


2 고통의 장면을 보여주는 사진들

지난해 말경 대량 부수를 발행하는 몇몇 신물들이 이전 같았으면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라서 삭제되었을 게 분명한 전쟁 관련 사진들을 싣는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들 신문들이 1) 독자들의 대다수가 전쟁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알아차리고 있으며, 그 진실이 어떠한 것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2) 독자들이 폭력적인 장면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현재 한층 더 폭력적인 흥미 위주의 보도로써 경쟁하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첫번째 주장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두번째 주장은 너무도 빤히 속이 보일 정도로 냉소적이다.

<선데이 타임스> 같은 신문은 정치적으로는 그러한 폭력에  책임이 있는 정책들을 지지하면서 한편으로는 베트남이나 북아일랜드에 관한 충격적인 사진들을 계속해서 게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저야 하는 이유다. 그러한 사진은 어떤 효과를 내게 되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진이 정치적 이론이나 사상자수 통계 혹은 뉴스 방송의 추상성 이면에 가려져 있는 현실을, 생활 속에서 체험했던 현실을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한 사진들이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알기를 거부하기로 작정한 거서에 드리워져 있는 검은 장막에 인화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보도록 만드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사진들은 우리를 갑자기 멈춰서게 한다. 그러한 것들에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직설적인 형용사는 '사람의 이목을 끄는'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붙잡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진들을 들여다보게 되면, 타인이 당하는 고통의 순간이 우리를 집어삼키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은 절망 또는 의분 둘 중 하나로 채워진다. 절망은 타인이 당하는 고통 중 일부를 아주 헛된 것이 되게 한다. 의분은 행동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진 속의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애쓰게 된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서 느끼게 되는 현격한 차이는, 우리의 일장적인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우리가 방금 본 것에 대하여 절망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부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것이다.

맥컬린의 가장 대표적인 사진들은 갑작스런 고통이 순간들 -공포, 부상, 죽음, 바탄의 울음 - 을 기록해 놓고 있다. 이러한 순간들은 실제로 일반적인 시간과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고통의 순간을 격리된 것으로 만드는 카메라는 그러한 순간의 경험이 그 경험 자체를 격리시키는 것 못지 않게 폭력적으로 그것을 격리시키게 된다.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영상은 두배로 폭력적인 것이며, 그러한 두 가지의 폭력성 모두는 사진으로 찍힌 순산과 다른 모든 순간들 사이의 대비를 더욱 강화해 주게 된다.

사진으로 찍힌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될 때, 우리는 이점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러한 단절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으로 촬영되는 그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게 되는 것처럼 그 순간을 보지 못하게 되며, 그들이 보여주게 되는 반응은 전적으로 다른 등급의 것이다. 그 누구도 그러한 순간에 처하여 생각에 잠긴 듯이 보이거나, 더욱 강해진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66

전쟁과 관련된 장면을 찎은 사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순이 이제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진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한 순간들은 그밖의 다른 모든 순간들과 단절되어 있다. 그것들은 그것들 혼자의 힘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진에 눈길을 준 적이 있는 독자들은 이러한 단절을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도덕적 무능함으로 느끼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자마자 충격에 대한 그 느낌마저도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즉 그 자신의 도덕적 무능함은 이제 전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범죄만큼 그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이러한 무능함에 대한 생각을 단지 너무도 흔한 별 것 아닌 것으로 무시해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속죄를 행하는 것 - 옥스팜이나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등 - 에 대해여 생각해 보는 것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러한 순간이 생겨나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던 전쟁이라는 문제에서는 사실상 정치적 측면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 사진은 일반적인 인간 조건의 증거가 된다. 그것은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모두를 비난하는 것이다.

사진으로 촬영된 고통의 순간과 대결하는 것은 한층 더 광범위하고 시급하게 대결해야 하는 것을 덮어쒸워 감춰 버리게 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과같은 정치 제제 안에서는 우리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있는 전쟁 행위에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점을 깨닫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사진에 나타나 있는 것에 반응하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사진에 찍힌 순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의 폭력성은 사실상 이러한 자각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것이 그러한 사진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발표될 수 잇는 이유다. 68


4 사진술의 이용, 수전 손택을 위하여

나는 수전 손택이 <사진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카메라는 1839년 폭스 톨벗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 1888년 최초의 값싼 대중적인 카메라가 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사진이 외양을 가리키는 지배적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 되었던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이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을 거치고 나서다. 사진이 직접적 증거로서 세상을 대신하게 되엇던 것도 그때였다. 사진 촬영이 실재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직접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 때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사진술의 가장 자유로운 순간으로서 사진은 순수미술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민주주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대중적인 매체가 되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매체가 가진 '박진성'이 사진을 고의적인 선동 수단으로 이용되도록 부추겼던 것, 조직적으로 사진을 동원한 선전술에 이용한 최초의 단체는 나치였다.

"어쩌면 사진이라는 것은 우리가 근대적인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환경을 구성하고 복잡하게 만든 모든 대상물들 가운데 가장 신비스러운 존재다. 실제로 사진이라는 것은 포착된 경험이며, 카메라는 무언가를 얻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식의 이상적인 무기가 되는 것이다" (수전 손택) 80


"사진을 통해 세계는 일련의 서로 관련되지 않은 채 독립되어 있는 입자들로, 그리고 역사, 과거와 현재, 한 벌의 일화들과 잡다한 사건들이 되는 거서이다. 카메라는 실재를 극히 작으며, 다루기 쉽고, 불투명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상호 관련성, 연속성을 부인하는 세계관이지만, 그것은 각각의 순간들에 신비로운 사건과도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수전 손택)

1936년 최초의 대중 매체 잡지 <라이프> 창간
두 가지를 예언함, 전후의 텔레비젼 시대에 이르러 완전하게 실현됨. 1) 광고를 싣어 재정을 충당함 2) 삶에 대한 사진을 싣는 게 아니라 사진이 곧 삶 자체임을 약속하는 듯. 82

카메라는 해닐 수 있지만 눈 그 자체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은, 그 사건의 외관을 그대로 고정시켜 놓는 일이다. 그것은 계속 변화하는 외양의 흐름으로부터 그것의 외양을 훔쳐내어 그것을 보존하는데, 그것은 영원히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그 필름이 계속 존재하는 동안까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83

회상과 달리 사진들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보존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 억지로 비틀어 떼어내 버린 외관을 제공한다. 의미라는 것은 이해하는 기능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기능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시간 속에서 설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진들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필름의 노출시간과 그것이 인화되었을 때 지니게 되는 생명력을 비교해 보면 (인화된 사진이 10년 동안 보관된다면) 그 비유을 대략 2백억 대 1이 될 것이다. 그것은 카메라에 의해 외관이 그 기능으로부터 분리되는 분열의 폭력성을 일깨워 주는 것으로 작용하게 될 수도 있다.

사진의 두 가지 사용방식의 차이.
. 사적인 경험에 속하는 사진들
. 공적인 목적의 사진들

현대의 공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건은 대개 우리들,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들, 또는 그 사건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어떤 사건, 포착된 한 벌의 모습을 제기하게 된다. 그것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것은 시리제로 경험했던 모든 것과는 별개의 것이 되어 버린 정보인 것이다. 만약 공적 목적의 사진이 기억을 되살리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은 불가지의 그리고 전적으로 낯선 기억에 대한 기여인 것이다. 그 폭력성은 그러한 낯설음 속에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낯선 존재가 보라고 외쳐 온 한순간의 광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낯선 존재란 누구인가? 사진촬영자라고 대답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사진이라는 영상의 전체적인 사용 체계를 생각해 본다면 '사진 촬영자'라는 대답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 사진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할 수도 없다. 까닭은 그 사진들이 어느 용도에나 이용될 수 있는,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영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미에가 그린 <나다>라는 만화, 나다는 기구를 타고 파리의 상공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카메라로 아래에 보이는 도시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다.

카메라가 신의 눈을 대신해 온 것일까? 종교의 쇠퇴는 사진의 발흥과 일치한다. 자본주의 문화는 신을 사진 속에 끼워넣어 왔던 것일까?

초자연적인 눈으로 목격된 것은 정의의 원칙과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었다. 인간의 윤리 속에 존재하는 정의로부터는 탈출이 가능하지만 그 어떤 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감춰질 수 없는 이 한 차원 더 높은 정의(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 주는)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구원의 행위임을 함축하고 있다. 기억이 되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것으로부터 구제되어 온 것이다. 잊쳐지는 것은 버림받아 온 것이다. 만약 모든 사건들이 그 거서이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순간에 초자연적인 눈에 의해 시간을 벗어나 목격된다면, 기억하는 것과 잊혀지는 것 사이의 구분은 상과 비난이라는 심판하는 행위로, 정의의 판결을 언도하는 것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인간이 시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오래된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낸, 그러한 예감은 거의 모든 문화와 종교에서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교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보로수 있다.

19세기 내내 자본주의 세계의 세속화는 신의 심판을 진보라는 이름하에 역사의 심판이라고 은폐했다. 민주주의와 과학은 그러한 심판의 행위자가 되었다. 그리고 짦은 기간 동안 사진이 이러한 행위자들의 보좌 역할을 한 것이다. 진리로서 사진이 갖고 있는 윤리적 명성은 여전히 이러한 역사적 계기 덕분이다.

20세기 후반 내내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은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았다. 과거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고, 미래를 알아차리는 안목을 갖지 못한 산업화되고 '발전된' 세계는, 정의의 원칙을 모든 신빙성에 털어넗어 없애 버린 편의주의 속에 살고 있다. 그러한 편의주의는 모든 것 - 자연, 역사, 고통, 타인들, 재앙, 스포츠, 섹스, 정치 - 을 구경거리로 바꿔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된 도구는 - 조건지워진 상상만으로도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게 될 정도로 그 행위가 너무도 습관적인 것이 될 때까지 - 카메라이다. 89

사진에 의해 표현된 장면은 직접적인 예상의 영원한 현재를 창조해내게 되며, 기억은 필요한 것, 혹은 매력적인 것이기를 그치게 된다. 기억의 상실과 더불어 의미와 판단의 연속성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된다. 카메라는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처럼 우리를 꼼꼼하게 살피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꼼꼼하게 다른 것들을 살펴 주게 된다. 하지만 어제까지 그 어떤 신도 그토록 냉소적인 적은 없었는데 그 까닭은 카메라는 잊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89

수전 손택은 역사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이 신의 위치를 찾아 낸다. 그 신은 독점자본주의라는 신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는 문화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구매를 자극하고, 계급과 인종 그리고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상처를 마비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여흥이 공급되어야 할 필요성을 지닌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천연자원을 보다 잘 이용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관료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 무한한 양의 정보를 그러무아야 할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실재를 주관하하고, 실재를 객관화하는, 카메라의 양대 능력은 이러한 필요성을 이상적으로 충족시키며, 그러한 필요성을 강화시키게 된다. 카메라는 진보된 산업사회의 작동에 본질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실재를 규정하는데, 하나는 구경거리(대중을 위해)로서, 하나는 감시의 대상(지배자들을 위해)으로서이다. 이미지의 생산은 또한 지배 이념을 공급해 주기도 한다. 사회적 변화는 이미지에 있어서의 변화로 대체된다." (수전 손택) 90

시진이 기존의 인식방식과는 다른 실제적인 이용방식이 존재하는가? 오늘날에는 인습적인 방식과는 다른 전문적인 실제적 이용이 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와 문화에 대항하여 투쟁, 저항을 계속할 수 있기 위해 현재 우리가 필요로 하는 희망, 그러한 미래를 위한 실제적 이용방식이 가능하다.

1955년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기획한 <인간 가족>
세계 구석구석에서 촬영된 사진들로 전세계적인 가족 사진첩을 만들어내고 있기라도 한 것 처럼 각지의 사진들이 소개되고 있다. 사진의 사적인 이용이 그것들의 공적 이용의 본보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

사진들은 과거의 유물들이며, 일어났던 일들의 흔적이다. 만약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 과거를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만약 그 과거가 사람들이 자신들 스스로의 이력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절대 필요한 부분이 된다면, 그 다음 모든 사진들은 포착된 순간으로서 존재하는 대신에 살아 있는 맥락을 다시 가질 수 있게 되며, 계속해서 시간 속에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사진술이 아직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인간의 기억에 대한 예언이 되리라는 것은 아주 가능한 일이다. 사진의 사적인 이용방식과 공적인 이용방식 사이의 구별은 초월되게 될 것이다. 인간 가족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93

기존과 다른 사진술의 이용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사진술을 그러한 기억을 위축시키게 되는 하나의 대체물로 사용하는 대신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기억의 일부분이 되도록 통합시키는 것이다. 이 과업은 촬영된 사진의 종류와 그것들의 사용 방식 모두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93

사진작가에게 이것은 자신을 그밖의 세계에 대한 보고자가 아니라, 촬용된 사건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위한 기록자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진들을 그토록 비극적이며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것으로 돌려지는 영상임을 확힌사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피사체가 되는 주제에 대하여 이러한 고결함이 주어지면서, 그러한 사진들은 나중에 그 전쟁에서 사망한 2천만 명의 러시아인들을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기념물이 되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대안이 되는 사진의 용도는 우리를 다시 한번 기억이라는 현상 및 능력으로 이끌어 간다. 그 목적은 사진에 대한 맥락을 구성하고, 그것을 언어로 구성하며, 그것을 다른 사진으로구성하고, 그것을 그것 대신에 지속되는 사진이나 이미지라는 텍스트로 구성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사진들은 아주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용되는데, 그것들은 하나의 주장을 입증하거나 또는 하나의 생각을 증명하기 우해 사용되며 이렇게 진행된다.  또한 사진은 언어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되도록 동어반복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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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전혀 단선적인 것이 아니다. 기억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모든 관념 연합들이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통하게 되는 것인 방사형으로 작용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진을 경험, 사회적 경험, 사회적 기억이라는 맥락 속에 다시 집어넣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기억의 법칙을 존중해야 한다.


* 서술된 시간,
서둘된 시간은 그것이 사회적 기억과 사회적 행위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역사적 시간이 된다.

수없이 많은 방식들과 자극들이 기억을 향하여 모여들거나 기억에 이르게 된다. 이야기들, 비교들, 기호들이 거의 동등한 방식으로 인화된 사진들을 위한 맥락을 창조해내는데 필요하다. 사진이 동시에 개인적, 정치적, 경제적, 극적, 일상적 그리고 역사적 측면에서 보여질 수 있도록 사진을 둘러싼 방사 체계가 구성되어야만 한다. 100

<야생화> 1937, 로드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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