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나는 뇌가 아니다(2)

백_일홍 2023. 7. 3. 08:01

나는 뇌가 아니다 (2)

 

마르쿠스 가브리엘

 

목차

프롤로그
물질 입자와 의식 있는 유기체
뇌의 10년
뇌 스캔 속의 정신적 자유?
USB 스틱으로서의《나》
신경강박과 다윈염 ─ 「파고」의 경우
정신-뇌 이데올로기
자기해석의 지도

1장 정신 철학은 무엇을 다루는가?
우주 안의 정신?
헤겔의 정신
사회적 무대 위의 역사적 동물
왜 모든 사건은 아니더라도 일부 사건은 목적을 향해 일어나는가

2장 의식
나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의식 영화 속의 어지러운 입자들
불상과 뱀과 박쥐
신경 칸트주의의 물결 위에서
자기 경험을 벗어날 수는 없다?
믿음, 사랑, 희망은 모두 다 환상인가?
각각의 자아 속에 이타주의자가 들어 있다
데이비슨의 개와 데리다의 고양이
입맛의 두 측면과 논쟁이 가능한 문제
지능과 로봇 청소기
의식과 데이터 뒤범벅
메리가 모르는 것
수도원에서 발견한 우주
감각은 중국 영화에 달린 자막이 아니다
신의 조감 관점

3장 자기의식
정신사의 의식 확장 효과
풍차 비유에 나오는 모나드처럼
바이오가 테크노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아우구스트는 어떻게 전능을 반박하려 했는가
순환하는 자기의식

4장 《나》는 대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일까?
환상의 실재성
사춘기 환원주의와 화장실 이론
《나》는 신이다
거의 잊힌《 나》 ― 철학의 거장
학문론의 세 기둥
인간 안에서 자연이 눈을 뜬다
〈아빠에게 맡겨〉: 프로이트와 「슈트롬베르크」
어떻게 충동은 엄연한 사실과 충돌하는가
오이디푸스와 우유 포장

5장 자유
우리는 우리가 의지하는 바를 의지하지 않기를 의지할 수 있을까?
《나》는 슬롯머신이 아니다
왜 원인과 이유는 다른지, 그리고 이것이 토마토소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우호적인 목록과 형이상학적 비관론
인간 존엄은 건드릴 수 없다
신과, 혹은 자연과 동등할까?
첨언: 야만인은 없다
인간은 모래 속의 얼굴이 아니다

참고 문헌
찾아보기

 


3장 자기의식

 

의식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사실 하나는, 내가 의식이 있다는 것을 나 자신이 반박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의식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이 같은 통찰은 근대 철학을 통틀어 아마도 가장 유명한 문장,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무수히 인용되는 데카르트의 문장의 뒷배이기도 하다. 197

 

칸트, 피히테, 후설과 그를 계승한 현상학 전통이 제기한 반론은, 데카르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식 있음에 대해서 착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식이라는 특별한 사물에 대한 통찰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혼동한다고 지적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반론이 지적하는 바는, 데카르트가 인식론적 통찰, 곧 우리의 인식 형식을 특징짓는 통찰(우리 자신의 의식 있음에 대한 우리의 오류 불가능성)을 우주의 구조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내가 의식이 있는 동안에 나는 내가 의식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착각을 범할 수 없다. 그러나 이로부터 우주에 또 하나의 사물이 있으며, 그 사물은 내 몸 전체와도 구분되고, 나는 그 사물에 대해서 오류 불가능한 앎을 보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199

 

그럼에도 이 오류 추론은 심지어 신경중심주의의 바탕에까지 은밀히 깔려 있다. 지금도 여전히 신경중심주의자들은 의식이라는 사물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 사물을 더 자세히 탐구해야 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 사물은 우주에 있는 물체들, 특히 우리의 뇌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신경중심주의의 대답은, 의식이란 뇌-사물과 별도로 있는 사물이 아니며 따라서 뇌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 초기의 논쟁을 이어받아 크게 둘로 구분되는 입장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원론은 우주 안에 뇌-사물 외에 추가로 의식-사물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원론은 이 주장을 반박한다. 특히 신경 일원론은 의식-사물이란 뇌 전체 혹은 몇몇 뇌 구역들 및 그것들의 활동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모두 의식이 사물이라고 전제하며, 이것은 결정적인 오류다. 200

 

자기의식이란 한편으로, 우리가 의식이 있으며 우리 자신의 의식을 명시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 자아의 환원 불가능성을 보여 주는 이 사례는 어쩌면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단서가 아닐까? 201

 

인간의 감정 세계의 큰 부분은 자기의식의 형식을 띤다. 그 형식의 본질은 우리가 안쪽으로 향한 시선으로 우리의 내면세계를 살피는 것에 있지 않고, 지향적 의식과 현상적 의식이 원리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에 있다. 우리가 어떤 의식 상태를 가지든지, 반드시 그 상태는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평가된 채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 사실을 바탕에 깔면, 왜 우리의 도덕적 가치들이 우리의 감정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면, 타인들이 의식을 가졌음을 우리가 의식하고 일상에서 이 구조를 끊임없이 재조정해야 할 가치 체계로서 체험하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도덕적 능력을 가진다. 204

 

정신사의 의식 확장 효과.

어떤 의미에서 근대적 자기의식 탐구의 최고봉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획기적인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문학, 어쩌면 대표적으로 서사문학과 서정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식을 더 잘 이해하는 테 특별히 기여해 왔다. 그런 한에서 인류는 정신사를 거치면서 의식이 더 밝아졌다고 할만하다. 심리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19세기 후반기에, 문학에서 자아 탐구가 번성한 것에 뒤이어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니체, 

프로이트

 

이처럼 정신사는 무엇보다도 의식의 확장 및 변화의 역사다. 의식은 과거에도 항상 지금 모습 그대로였던 사물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중성자, 밤톨, 소나기를 발견하듯이 의식을 발견하지 못한다. <의식>은 우리의 자화상에 속해 있는 한 개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식있는 정신적 생물로 서술하고 그럼으로써 특정한 자화상을 그린다. 의식은, 우리가 실재를 어떻게 개념화하는지와 전혀 상관없이 현전하는 그런 실재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감각 인상을 문화적, 역사적 맥락 안에 배치하는 능력은 우리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의식의 교양>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 역시 문학의 커다란 주제다. 이 주제는 교양 소설이라는 장류에서 다뤄졌으며, 이 장르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나왔다. 이 위대한 작품은 의식의 교양을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이를 위해 그 작품은 수천 년에 걸쳐 분화된 다양한 의식 형태들을 자세히 살핀다. 206

 

안타깝게도 현재의 자기의식 형태들을 우리 조상들이 동굴 생활에서 찾으려는 시대착오적인 경향이 널리 퍼져있다. 자기의식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적어도 19세기에 사회학이 등장한 이래로는 누구나 명확히 알아야 마땅한데도 말이다. 자기의식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칸트 이후 철학자들인 피히테, 셀링, 헤겔에 의해 최초로 완전히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자기의식의 역사는 헤겔이 쓴 <<정신현상학>>의 중심을 이룬다. 이 작품에서 헤겔은 인간 정신이 역사를 가졌으며, 우리가 그 역사를 생물학적 상황이 의식을 수단으로 삼아 연장되는 것으로 간주하면, 우리는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 주려 한다. 209

 

자기의식은 단지 개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이미 낯선 의식과 맞물려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체험한 태도(이를테면 무언가에 대한 기쁨이나 부끄러움)에 대한 우리 자신의 평가는 타인들이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특정한 태도를 취하리라는 우리의 예상과 맞물려 있다. 우리는 애초부터 사회적 맥락 안에서 산다. ... 우리는 타인들의 의식을 잣대로 삼아 우리의 의식을 도야한다. 210

 

타인들이 의식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인간 사회의 토대임을 최초로 알아챈 철학자는 아마도 칸트였고, 이어서 피히테와 헤겔이 그것을 더 명확하게 알아챘다. 또한 마르크스와 사회학 및 정신분석의 시조들도 그 통찰을 제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계승했다. 그 통찰은 많은 여성주의 이론들, 특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성 역할 이론의 바탕에도 깔려 있다. 211

 

우리의 정신적 삶은 자연적, 생물학적 조건들에 매여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정신적 삶이 그 자연적 조건들과 동일하거나 그 조건들에 대한 자연과학적 탐구를 통해 완전히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13

 

슈뢰딩거, 독일어권 낭만주의가 발명한 유럽 힌두주의에 빠져 있다. 유럽 힌두주의란 인도인은 유럽인보다 더 위대하고 심지어 더 참된 신비주의적 합일 의식을 가졌다는 생각을 말한다. 219

 

내가 이온 통로들과 뉴런 연결망에 대해서 말할 때 전제하는 생각들은, 내가 자기의식에 대해서 말할 때 전제하는 생각들과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사회적 맥락들 안에 내장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반면에 뇌 과정들에서는 사회적 맥락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뇌 속의 과정들에 대한 서술에 집중하면, 외부로 향한,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의식을 포착할 수 없다. 222

 

프로이트, 자기애적 환상

이와 관련한 프로이트의 견해는, 인류가 오랫동안 모든 우연한 사건을 마치 영적인 맥락의 표현인 양 여기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관점을 애니미즘으로 명명한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철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도 범심론이나 범종설의 형태로 애니미즘을 숙고한다. 범심론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고, 우리 정신은 단지 정신적 근본힘의 복잡한 버전일 따름이며, 그 정신적 근본 힘은 예컨대 강한 핵력과 마찬가지로 실재한다. 범종설에 따르면, 지구에서 생명의 발생은 어쩌면 까마득한 과거부터 씨앗처럼 우주를 떠돌던 생명이 지구에 내려앉음으로써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이트 자신의 세계상도 애니미즘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는 우리를 상당히 원시적인 기계로 본다. 그가 리비도라고 부르는 욕망 흐름에 항상 휩쓸리는 기계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진화를 통해 발생한 욕망 기계인데, 리비도의 통제를 벗어난 의도적 구조들이 존재한다고 우리 자신을 기만한다. 232

 

정신은 모종의 방식으로 모든 것이며 이미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는 - 생각은 전능하다는 - 주장을 즐거운 애니미즘으로 명명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게서 배울 수 있듯이, 이런 즐거운 애니미즘은 완벽한 자기과대평가의 표현이다. 다른 한편 정반대의 생각, 곧 우리는 기껏해야 서커스 공연장의 멍청한 아우구스트일뿐이고 서커스 공연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완벽한 과소평가다. 나는 이를 - 널리 인용되는 헤겔의 용어를 떠올리면서 - 불행한 의식으로 부르고 싶다. 

 

철학의 전문 용어인 <자기의식>은 오늘날 일상에서 <자존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실제로 두 단어는 관련이 있다. 

 

의식과 자기의식은 어떻게 연결될까? 234

우리는 우리의 의식적 인상을 항상 의식적으로 체험하고, 그 인상들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보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진단을 기초로 삼아서 번듯한 이론 분파 하나가 형성되었다. 그 분파는 오늘날 HOT 곧 <상층이론>으로 불린다. 

 

엄밀히 따지면 상층이론 역시 새 부대에 담은 옛 포도주다. 이 이론이 기본 발상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처음으로 서술된 후 그의 후계자들, 특히 피히테에 의해 더 발전되었다. 칸트와 피히테는, 우리가 우리 의식에 대한 더 높은 층위의 의식을 모든 각각의 개별 의식 상태에 동반시킬 수 있다는 점을 우리 의식의 결정적 특징으로 여겼다. 235

 

칸트, 피히테, 헤겔이 모두 발견한 일반적인 문제의 핵심은 의식이 항상 자기의식을 동반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의식 상태가 항상 상위의 평가 담당자에 의해 감시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만약에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면, 그 상위의 담당자도 의식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곧바로 제기된다. ....문제적인 무한 후퇴가 발생한다. 즉 각각의 의식에 대해서 다시금 한 의식이 필요하게 된다. 240

 

이 이론은 실패작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특히 칸트와 피히테의 자기의식 이론에서는) 단순한 자기의식에서 후퇴가 종결된다는 생각을 선호했다. 그러면서 또한 그 단순한 자기의식이 자기 자신을 관찰할수 있다고 여겼다. 자기의식의 자기 관찰이 불가능하다면, 애당초 자가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를 일컬어 순환 문제라고 한다. 자기의식은 자기 주위를 회전하며 오로지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렇다면, 평가하는 담당자 곧 자기의식이 없더라도 자기를 의식하는 의식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애초의 전제, 곧 의식이 상위의 담당자와 맞물려 있다는 전제와 모순된다. 243

 

과연 누가 혹은 무엇이 생각을 가질까? 우리 안에서 과연 누가 혹은 무엇이 생각할까? 칸트의 대답은, 우리가 이 질문의 답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 담당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그 생각 담당자를 표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결론은 칸트의 후계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244

 

피히테와 헤겔이 사회적 상호작용주의라는 해결 전략을 탐구했다. 이 전략은, 자기의식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둘 이상의 의식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피히테와 헤겔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들에서 의식을 지각하기 때문에 의식을 이해하고 또한 자기의식을 가지며, 그러면 타인들은 우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들의 자기의식을 우리 안에 설치한다. 245

 

<양심의 목소리> 곧 우리 안의 평가 담당자는 교육을 통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생각에 따르면, 우리 안의 양심은 우리의 부모와 기타 교육자들이 설치한 것이다. 245

 

볼프강 프린츠, <<거울속의 자아>>, <자아>는 오로지 <타인들을 통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내가 아는 한, 이 생각을 최초로 체계화한 인물은 피히테다. 그는 이 생각을 이런 경구로 표현했다. <사람은 ..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람이다.... 사람이 있으려면, 여러 사람이 있어야 한다> 피히테는 이 구조를 <인정>이라고 부른다. 피히테에 따르면,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하나의 자아로서 살라고 부추기는 요청을 받는다. 그 요청은 조종 메커니즘으로서 설치되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의식에 도달한다. 247

 

그러나 이 생각은 사회적 상호작용주의를 과도하게 밀어붙인다. 내가 이미 나름대로 의식을 보유하고 따라서 자기의식을 보유하지 않았다면, 내가 타인을 하나의 자기의식으로서 알아채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자기의식들의 개수를 늘림으로써 무한 후퇴의 문제나 순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를 최초로 알아챈 인물은 아마도 헤겔이다. 그는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피히테의 문제 해결 시도를 비판한다. 자기의식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통해서 자기의식에 대한 이해가 항상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247

 

더 너아가 사회적 사회작용주의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돌맹이에 자기의식을 집어넣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아 아마도 돌멩이는 자기의식을 가질 잠재력조차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 애당초 의식과 자기의식을 보유하는 법을 이런 식으로 학습할 수는 없다. 이 층위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주의는 좌초한다. 248

 

의식을 의식 자신을 통해 설명할 수는 없다. 자기의식을 일종의 상위 의식으로 이해하면, 타개할 수 없는 상황 곧 아포리아에 빠진다. 의식은 인간 정신의 모든 문들을 여는 열쇠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신적인 생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의식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는 중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한 자아의 후보자 둘은 의식과 자기의식이다. 양쪽 논의 모두에서 핵심은, 우리는 과연 누구 혹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답들, 즉 우리 자화상의 호소들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식 혹은 자기의식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때 의식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관한 서술과 자기의식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관한 서술은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우리가 접한 다양한 아포리아들과 막다른 골목들이 보여주듯이, 그런 서술만으로는 불충분하다. 249

 

 

4장 <<나>>는 대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일까?

 

<<나>>가 환상일 수 있다는 의심은 오랜 전통을 지녔다. 부처, 흄, 니체는 이 의심을 제기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흄의 뒤를 잇는 전통에서 사람들은 <다발 이론>, 곧 <<나>>는 다발이라는 이론을 내놓는다. 이 이론은 <<나>>에 관한 실체 이론과 구분된다. <<나>>에 관한 다발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다양한 의식 상태(생각하기 상태, 느끼기 상태, 의식하기 상태 등)에 처한다는 것은 맞지만, <<나>>는 어떤 상태가 현전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나>>는 변함없이 존속하지 않는다. 요컨대 <<나>>는 의식 상태들의 다발이다. 

 

반면에 <<나>>에 관한 실체 이론에 따르면, <<나>>는 생각하기, 느끼기, 의지하기 같은 의식 상태들의 나타남을 마주하는 놈이다. <<나>>는 <<나>>의 상태들에 불과하지 않다. 오히려 <<나>>의 상태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들을 평가한다. 

 

이 두 이론을 둘러싼 논쟁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뇌 과학은 그 논쟁에 일단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논쟁의 쟁점은, <<나>>를 다발로 간주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가라는 개념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를 뇌와 동일시하면, 우리는 실체 이론의 한 형태를 얻는다. (다른 형태의 실체이론은 <<나>>를 영혼이나 몸 전체와 동일시한다) 258

 

현상학, 이 작업에서 <<나>>는 다른 무언가의 나타남을 마주하는 무언가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 처음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 존 설은 여러 저서에서 현상학의 중요한 기본 발상 하나를 언급한다. 

 

"의식의 엄청난 특징은 이것이다. 우리가 의식을 가졌다는 환상을 품었다면, 우리는 의식을 가진 것이다. 통상적인 가상과 실재의 구분을 다른 현상들에 적용하듯이 의식에 적용할 수는 없다." 259

 

우리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무언가에 대해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의식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착각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의식이 무릇 정신에 전형적인 구조를 띤 사례들 중 하나라는 점이다. 즉 의식은 <환상도 일종의 실재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구조를 띤다. 내가 신기루를 체험할 때, 내가 물이 있다고 여기는 그 장소에는 당연히 물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물을 체험하고, 어쩌면 타는 목마름으로 그 가상의 물로 향해 내달릴 것이다. 설령 의식 전체가, 순전히 자기보존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유전자 복제 기계인 우리 몸이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산출하는 환상적 구조라 하더라도, 그 환상은 엄연히 존재할 뿐더러 의식 있는 생물인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260

 

신경중심주의가 철학을 밀쳐 내기 위해 채택하는 전형적인 전략 중 하나는 <<나>>를 일단 <자연화>하는 것이다. 즉, <<나>>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현상들이 속한 대상 영역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261

 

존재론적 환원주의

이론 환원주의 

사춘기 소년의 변덕스러움은 단지 호르몬 요동일 따름이다. 

 

신경중심주의자들은 맹렬한 인종주의자, 여성혐오자였다. 266

 

존재론적 신경 환원주의의 주요 약점 중 하나는, 우리가 심리적, 사회역사적 조건들에 적응된 우리의 언어로 서술하는 행동 변화를 하나씩 그대로 넘겨받아서 뇌 속의 이유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 견해를 본질주의라고 부른다. 본질주의란, 우리의 책임은 아니지만 우리가 바꿀 수도 없는 불변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268

 

아무튼, 이 <<나>>는 대체 누구 혹은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잠깐 정신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어 일인칭 대명사 <나>를 일반 명사화한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는 대개 <마이스터 에카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중세 철학자다. 마이스터는 대충 철학 및 신학 교수를 뜻한다. 그는 이단죄로 종교 재판에 넘겨졌고, 재판 도중 사망했으며, 사후에 그의 주요 이론들은 이단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당대 교회의 권위자들이 그를 그리 탐탁지 않아 했던 이유 하나는 그의 <<나>> 개념을 꼽을 수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 개념에서 계몽주의의 첫걸음을 보았다. 270

 

<<나>>의 발견은, 자연을 탐구했으나 신을 발견하지 못한 어느 무신론자가 교회를 들이받으며 근대를 열어젖히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 짜집기는 자연과학적 세계상의 이데올로기에 확고히 뿌리내려 있다. 그러나 그 짜집기의 정체는 역사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하지만 신경중심주의는 이 문제를 거의 무시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정신사란 존재하지 않고 어차피 생물학적 진화만 존재한다는 것이 신경중심주의의 진정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사는 단지 문화적 진화, 곧 다윈주의적으로 서술 가능한 생물학적 진화가 다른 수단들은 통해 계속되는 것일 터이다. 정신사를 인정하고 꼼꼼히 살핀다면, 우리의 자기서술의 역사에서 큰 도약들은 결코 뇌 신경 섬유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일어나지 않았음. 271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나>>의 근본적 비대상성이라는 논제를 발견했다. 이 논제는 자율, 곧 자기입법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바탕에도 깔려 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바는, <<나>>는 <<나>>가 인식하는 어떤 대상과도 엄밀하게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기초로 삼아서 그는 <<나>>를 <신과 유사한> 놈으로 간주하는 입장으로까지 나아갔다. 274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신에 대한 언급만 배제하면, 모든 것을 아는 <<나>>, 실재 전체를 인식하고 실재의 비밀을 캐내는 것을 순수하게 중립적으로 추구하는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금세 이르게 된다. 뿌리 깊이 신학적인 이 <<나>> 모형은 근대 초기 과학관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사실은 역사학에서 잘 연구되고 밝혀졌음에도 오늘날 아예 외면당한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신과 유사한 수준을 넘어서 단적으로 신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계상에서 신을 삭제한다. 신의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은밀히 다시 신학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고 신을 제대로 삭제하려면, 먼저 정말로 현대적인 <<나>> 개념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으로부터 해방된 창조라는 개념만 남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근대 과학적 세계관은 실은 모든 것을 기독교 - 유대교 - 이슬람교로부터 전수받았다. 즉 근대 과학적 세계관이 자연에서 신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나>>를 세계 광경을 지켜보는 신적인 관찰자의 자리에 놓은 것은 그 일신교들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다. 이 견해는 <세계의 탈마법화>라는 막스 베버의 논제와 맥이 통한다. 275

 

베버가 보기에 세계의 탈마법화는 근대 특유의 현상이 아니다. 베버에 따르면, 그 현상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새로 발견한 <사막 신>의 이름으로, 다신교들을 믿는 마법사들에 맞서고 그럼으로써 자연을 탈마법화한다. 모든 마법은 신의 손아귀 안에 있다. 이런 식으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제거된 자연, 우리는 기껏해야 그 운행을 지켜볼 수 있을 뿐인 그런 자연의 개념이 발생한다. 

 

자연과학적 세계상의 신학적 환상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로, 다큐 <코스모스> 후속편의 한 대목을 들 수 있다. ... 이 장면은 진행자가 신과 똑같다는 생각을 유도한다. 그 장면 속의 진행자는 창조된 세계의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또한 모든 미시적 규모부터 거시적 규모가지 모든 규모의 환경에 마음대로 임재할 수 있는 신을 연상시킨다. 상상의 배는 <생각은 전능하다>라는 환상의 한 예다. 277

 

<<나>> -철학의 거장, 피히테

당시 피히테는 여러 이유로 특히 괴테에게 눈에 가시였다. 예나 대학교를 관할하는 장관이었던 괴테는 <<나>>가 지상의 작은 신이라는 생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신적인 것은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괴테의 견해였기 때문이다. 280

 

피히테는 세 가지 원리를 <<나>> - 철학의 기둥들로 삼는다. 피히테의 기본 생각들은 프로이트와 사르트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의 잔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심리학적 어휘에도 남아 있다. 이런 역사를 간과하면, 우리가 <<나>>를 익숙하게 알며, <<나>>는 이를테면 우리의 뇌과 같은 어떤 자연적 사물이라는 생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학문론의 첫째 원리는 <나=나>다. 

지식의 영역 안에 자기 자신과 동일한 놈이 적어도 하나 존재함을 보증한다. 그놈은 <<나>>다. 만일 내가 지금 런던에 비가 온다는 것을 알고 또 2+2=4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두 놈으로, 즉 비가 온다는 것을 아는 놈과 2+2=4를 아는 놈으로 쪼개지거나 하지 않는다. 

 

학문론의 둘째 원리는 <<나>> =/<나-아닌-놈>이다. 이 원리의 배후에 바로 절대적 객관성의 이념이 숨어 있다. <<나>>가 아닌 놈은 <<나>>가 아니다. 무언가를 아는 누군가가 아닌 모든 놈, 돌, 풀밭, 중성미자, 은하 등을 <나-아닌-놈>이라는 개념 아래 포괄할 수 있다. 피히테는 이 범주를 <자연>으로 칭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특히 괴테의 비판을 받았다. 괴테의 입장은 <<나>>를 자연에서 배제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역사 속에서 일단 승리를 거둔 쪽은 피히테였다. 왜냐하면 그의 두 번째 원리는 <나-아닌-놈>으로서 자연의 이념, 곧 절대적 객관성의 이념을 축약해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나-아닌-놈>의 총체로서 자연의 개념은 <<나>>의 추상화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자신을 자연에 근본적으로 맞세웠다. 다음 단계에서 <<나>>를 완전히 제거해버리고 싶다는 유혹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바로 이것이 신경중심주의가 느끼는 유혹이다. 신경중심주의는, <<나>>-형식을 띤 모든 것을 신경화학의 언어나 진화 생물학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외견상의 <<나>>를 해소하려 한다. 

 

절대적 객관성의 관점 자체는 결코 절대적 객관성의 관점에서 탐구될 수 없다는 것. 객관성의 이상은 우리의 관점이며 우리의 관넘으로 머무른다. 즉 <<나>>가 자신과 <나-아닌-놈>을 구분하며, 무엇을 <<나>>로 취급하고 무엇을 <나-아닌-놈>으로 취급할지에 대한 이론들을 <<나>>가 구성한다. 이 이론들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288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예컨대 중성미자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직 절대적 객관성만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다하는 결론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 안에 <<나>>가 등장하지 않는 포괄적 세계상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학문론의 세째 원리는 <나는 나 안에 공유 가능한 나와 공유 가능한 나-아닌-놈을 맞세운다>이다. 

 

앎과 표상 사이의 중대한 차이를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최소한, 참인 무언가를 충분한 근거에 입각하여 상당히 확고하게 참으로 확신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앎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이 아주 간단한 일이라는 점이다. 앎은 전달하기를 통해서 공유 가능하다. 피히테는 이런 앎을 <공유 가능한 <<나-아닌-놈>>>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내가 아내와 공유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가진 집안 광경의 표상이다. 그녀의 특정한 관점에서 개를 보고, 개에 대해서 특정한 감정을 느끼고, 나라면 전혀 주목하지 않을 대상들을 지각한다. 왜냐하면 그녀와 내가 배경으로 가진 견해들과 경험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다른 누군가로 사는 것을 표상할 수 없다>라는 말에 암묵적으로 담긴 의미다. 하나의 표상이란, 우리가 감각 인상들을 처리하거나 처리된 감각 인상들을 상상력의 도움으로 회상할 때 펼쳐지는 심리적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표상은 전달할 수는 있지만 공유할 수는 없다. 반면에 앎은 전달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또한 공유할 수 있다. 즉 타인과 나는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두 사람이 동일한 사실을 참으로 인정하고 그 인정의 충분한 근거를 동일하게 가진다면, 우리는 동일한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똑같은 앎-상태에 처한다. 그러나 나와 타인이 정확히 동일한 표상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러면 내가 그 타인이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294

 

피히테는 이미 당대에 다음과 같은 견해에 반발한 것이다. 즉, <우리 감각 수용기의 신경 말단이 자극됨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표상을 가지는데, 오직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견해에 반발했다. 앎과 표상을 혼동하는 것에서 나온다. 

 

셋째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즉, 무언가를 아는 누군가는 공유 가능한 상태에 처한다는 것이다. 피히테가 말하는 <<나>>는 앎의 일반적 차원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바꿔말해 그 <<나>>는 일반적인 앎 - 주체다. 반면에 <공유 가능한 나>는, 무언가를 아는 놈이 여럿일 수 있음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공유 가능한 나-아닌-놈>은 우리가 절대적 객관성의 양식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나>>란 앎의 주체다. <<<나>>다>라는 말은 <무언가를 알고 전달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나>>-철학은 <그럼 <<나>>와 자연은 대체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무너진다. 최초로 셀링이 이 질문을 앞세워 치명적인 반론을 내놓았다. 그 반론은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현대 심층심리학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반론은 이른바 자연 철학으로 이어졌다. 297

 

자연철학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자연의 진화를 파악할 수 있는 놈이 자연의 진화 과정에서 언젠가 발생할 수 있으려면, 자연은 어떠해야 할까? 

인간 원리라는 열쇠말. 

인간원리란 <관찰 가능한 우주는 그 우주를 관찰하는 생물들이 진화하기에 명백히 적합하다>라는 통찰을 말한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그렇게 관찰 가능한 우주 안에서 진화하여 그 우주를 관찰하는 놈들이니까 말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자연이 인간 안에서 눈을 떠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에 도달한다고 말이다. 297

 

우리가 자연을 이해할 능력이 있다는 점은 실제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297

 

정신적 생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필연적이지 않은 듯하다. 즉 우리 지구에서 생물들의 진화가 다른 식으로 진행되어, 자연과 자연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쓰는 정신적 생물들이 끝내 발생하지 않게 되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298

 

진화는 어떤 결과도 산출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특정 종의 생물들의 외적인 모습이 바뀌는 결과가 발생할 따름이다. .. 종들의 발생을 다루는 기존 이론들에 비해 진화 생물학이 결정적으로 진보한 점은 어떤 의도도 전제하지 않고 종들의 발생을 설명해 낸다는 것에 있다. 299

 

셀링의 자연 철학은 피히테의 <<나>> - 철학에 맞서서, 자기가 <<나>>임을 알아챌 수 있고 그런 식으로 자연에 관한 앎에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 생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나>>로서 알아챌 수 있기 위한 생물학적 필요조건들이 존재한다는 것 뿐이다. 

 

<<나>라는 열쇳말 아래 진행된 인간 정신의 자기탐구의 틀 안에서 자연이 발견되고 그것이 19세기의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 것은, 자연이 <<나>>를 말하자면 덮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과 이를 계승한 -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을 포함한 - 19세기 사상들은 <<나>>가 온전히 자율적이라는 생각에 반발했다. 자연은 실은 추상화의 산물일뿐이라는 피히테의 주장과 정반대로, <<나>>-유형이 전혀 아닌 눈먼 자연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런 자연이 어떤 의식적인 의도도 없이 의식적인 생물들을 산출했다는 인상이 우리를 덮칠때가 분명히 있다. 괴테와 셀링은 피히테의 침묵을 비난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301

 

우리는 타인들도 각각 하나의 관점을 가졌음을 이해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관점을 도외시할 능력이 있다. 이 통찰은 <<나>>로서의 정신의 자기서술과 짝을 이루며, 바로 이것이 피히테 철학의 핵심이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개별적인 놈(바로 나 혹은 당신)이면서 또한 보편적인 놈이다.(우리는 누구나 하나의 <<나>>다). <<나>>는 뇌나 유전자일 수 없으며 하나의 유전자 풀에 불과할 수도 없다. 

 

오히려 진실은 이것이다. 우리가 특정한 유형의 뇌를 보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나>>라는 차원을 역사적으로 형성해 가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뇌는 <<나>>가 관여하는 실천들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다. 그러나 <<나>>의 발견은 역사적 자기인식의 과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329

 

우리가 정신적 생물이기 위한 생물학적 혹은 자연적 필요조건들을 역사적으로 성장한 우리의 자기서술의 요소들과 혼동하는 것, 이 혼동이 이데올로기의 근본 형식이다. 이데올로기의 배후에는 자유를 모면하고 마침내 사물로 되어, 자기서술이라는 휘청거리는 다리, 타인들이 시비 걸 수 있는 그 휘청거리는 다리로 서야 하는 부담을 벗으려는 시도가 매번 새롭게 숨어 있다. 330

 

 

5장 자유

 

<우리의 의지는 정말로 자유로울까?>

그러나 수많은 과정들 덕분에 우리가 주의 문턱 아래에서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이 대관절 왜, 어째서 우리의 자유나 자유 의지를 위협한다는 말일까? 

 

순박한 결정론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대안 없는 자연법칙들에 따라서 일어나며, 매순간 그 자연법칙들은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을 확정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뇌의 기본 배선들을 통해 확정 혹은 결정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자연법칙은 오직 우리가 이런저런 이상화를 수행했을 때만 예외 없이 타당하다. 자연법칙은 매순간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 혹은 심지어 일어냐야 하는 일을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화된 조건들을 서술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법칙들에 대한 지식에만 기초하여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40

 

순박한 결정론을 자연에 관한 영화이론으로 명명하기로 하자. 결정론은 현재 우리가 보유한 물리학 지식에서 결코 도출되지 않는다. 결정론은 기껏해야 형이상학적 사변이지 물리학적으로 입증되었거나 입증 가능하기라도 한 가설이 아니다. 341

 

오히려 우리 자신의 (원리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의지를 통해 확정되는 듯 하다. 345

 

우리는 의지하는 바를 행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바를 의지할 수는 없다. 우리가 대는 이유들은 핑계인 듯하다. 우리의 의지가 그 이유들을 꾸며낸다. 346

 

신학적 결정론.

 

물리적 결정론.

 

뉴런 결정론. 

 

자유의지에 관한 어려운 문제의 핵심은, 자유 의지라는 개념이 과연 일관성이 있는가, 혹시 가장 큰 자연수라는 개념처럼 부조리한 것은 아닌가? 349

 

유일무이하며 아주 긴 인과 사슬, 모든 것을 결정하거나 조종하거나 규제하는 인과 사슬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필요조건들과 그것을 통해 결정되 사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합, 결코 한눈에 굽어볼 수 없는 집합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행위의 필요조건들 중 다수는 엄격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다. 또한 우연이 들어설 자리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슬롯머신이 아니다. 모든 사건은 충분조건(다 합치면 그 사건을 발생시키기에 충분한 필요조건들의 집합)을 가진다. 어떤 사건도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371

 

나의 충족 이유율 버전은 세계 전체를 거론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무언가를 주장하지도 않고, 오히려 단지 사건들을 서술한다. 나의 충족 이유율 버전이 말하는 바는, 자신의 발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 없이 발생하는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조건들의 공통분모가 존재한다고보지 않는다. 조건들이 모두 엄격한 원인들인 것도 아니고 모두 다 이유들인 것도 아니다. 조건들의 목록은 열려 있다.우리는 개별 분야들 안에서 그 조건들을 탐구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리얼리즘의 한 귀결이다. 373

 

핵심적이 논점은 이것이다. 인간 행위의 모든 동기와 모든 외견상의 호의 혹은 자유를 보편 포괄적인 고약한 모곩으로 대체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충분히 근거 있는 보편적 의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심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비관론일 텐데, 이 입장을 특히 뚜렷하게 내놓은 인물이 쇼펜하우어다. 그는 이 세계의 구조 속에 자유를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비관론을 주창했다. 그는 모든 외견상의 호의적 행동을 적나라한 생존 의지 혹은 번식 의지로 이해하고자 했다. 377

 

이런 유형의 - 배후에 조종자가 존재한다고 결론짓는 - 오류 추론을 일컬어 사물화라고 한다. 

 

우리가 우리 안에 <<나>> - 사물을 보유했다고, 혹은 우리는 우리 눈구멍 뒤에 거주하는 <<나>> - 사물(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후문쿨루스)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383

 

신경중심주의는 우리가 사물들 사이의 한 사물이라는 것, 그리고 오로지 사물들만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는 하나의 뇌 - 사물이며, 당신도 하나의 뇌 - 사물이다. 우리 주위에는 역시 사물들인 기본 입자들이 있다. 이 모형을 채책하면, 우리는 오직 사물들만 생각할 수 있고 오직 사물들만 존재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오직 사물들만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사물로 간주되지 않는 가치들, 바람들, 수들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384

 

근본적인 오류는,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며, 그 세계가 보유한 가구는 우리에 대해서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통념에 있다. 우리는 신체 사물로서 다른 모든 사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터이다. 그렇다면 의식, 수, 가치, 열린 가능성 등의 실존은 당연히 수수께끼로 느껴진다. 그것들 자체가 수수께끼여서가 아니다. 철저히 사물화된 우주의 관념이 길을 잘못 든 형이상학적 환상이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385

 

칸트, 유명한 구분, 곧 존엄과 가치 사이의 구분

칸트는 무언가 목적 그 자체일 수 있기 위한 조건을 거론한다. 이 같은 칸트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항상 사물과 조건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건은 한 사물을 그 사물로 만든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엄격한 원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 인간에게 존엄이 귀속하는 것은 우리가 <목적들의 나라>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목적들의 나라는 우리가 우리 인간의 행위들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그 조직 안에 우정, 사기, 선물, 연방 대통령, 저작권, 착취, 소외, 이데올로기, 혁명, 개혁, 역사 같은 개념들이 속해 있다. 이 개념들은 우리가, 우리의 기여가 없어도 저절로 일어나는 자연 과정들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들과 다르다. 388

 

우리는 오직 목적론적 행위 설명을 허용해야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 한에서 목적들의 나라의 거주자로서 실제로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있다. 

 

자연적 사건은 어떤 목적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 문명의 큰 부분은 우리가 인체를 둘러싼 자연적 사건들을 억누르거나 최소한 치장하는 것에 존립한다. 

 

인간 존엄에 걸맞는 삶은 <목적들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삶이다. 우리가 병들거나 심지어 죽을병에 들면, 자연적 사건들이 우리 삶의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오직 병들었을 때만 우리는 엄격한 원인들과 우리 몸속 배선들에 의해 조종된다. 390

 

인간 존엄은 건드릴 수 없다(불가침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특정 종의 동물에 불과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다름 아니라 목적들의 나라 안에서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 존엄은 불가침하다. 물론 우리도 목적들의 나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한눈에 굽어볼 수 없을 만큼 많은 개인들과 기관들이 그 나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그 나라를 자유의 표출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연 폭력으로 느낀다. 

 

문명과 정신사 덕분에 우리는 이제 더는 엄격한 원인들에 의해 원시적으로 조종되지 않기 위해 능동적이며 자기 의식적으로 노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동물 종들보다 더 자유롭다. 391

 

내가 보기에 인간 존엄이라는 내재적 가치의 근거는 우리의 행위들은 자유롭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 행위의 필요조건들중 다수는 엄격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들은 자유로우며, 그 자유가 인간 존엄의 근거다. 393

 

신과, 혹은 자연과 동등할까? 

인간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인간적인 것은 없다.(스탠리 카벨)

 

인간 행동의 큰 부분은 자신을 자신의 자유로부터 사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샤르트르), 사르트르의 선언에 따르면,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신이 되려는 욕망이다>. 나는 이를 상향 야만화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자기신격화를 통해 비인간적으로 된다. 

 

사르트르, 그-자체임과 자기를-마주함을 구분한다. 그-자체인-놈은 그놈의 개념적 기여가 없어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 그놈은 절대적 본질을 지녔다. 그놈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그놈 자신에 대한 그놈 자신의 견해를 바꿈으로써 변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놈은 어떤 견해도 없기 때문이다. 돌맹이는 그-자체인-놈이며, 몇몇 생물도 확실히 그러하다. 우리가 자기를-마주한-놈이라는 점은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인간적 실재>의 일부다. 이것은 <우리의 자화상은 (설령 거짓 자화상이라더라도) 우리에 관해서 무언가를 말해준다>라는 생각을 샤르트르가 나름대로 변주한 버전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람들이 신이라는 관념을 고안한 것은, 신은 그-자체임과 자기를-마주함의 완벽한 조합일 것 같아서였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그-자체임(우리의 몸, 기원 등)과 자기를-마주함 사이에 간극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다. 우리가 그 간극을 은폐하기 위해 아무리 다양한 전략을 개발하더라도, 그 간극은 절대로 메워지지 않는다. 그런 전략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으로 본질주의가 있다. 여기서 본질주의란, 한 사람(혹은 집단)이 그의(그 집단의) 본질을 통해서 겉보기에만 자유로운 특정 행위 패턴을 나타내도록 확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는 본질주의적이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행위들에서 드러나는 본질을 가졌다고 여기는 민족주의도 마찬가지다. 

 

실존주의적 동기들을 조합하여 두 가지 위험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상향 야만화의 위험, 또 하나는 하향 야만화의 위험이다. 상향 야만화의 위험은 우리가 신을 <<나>> - 이상으로 선택할 때, 곧 우리가 신처럼 되고자 할 때 들이닥친다. 반대로 하향 야만화의 위험은 우리가 다윈염에 걸려서 모든 인간적 행태를 진화 생물학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들이닥친다. 

 

오늘날 사회에서 상향 야만화의 위험은 종교와 연결된다기보다 오히려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의 전능 환상, 그리고 실리콘 벨리의 신들이 좌지우지하는 디지털 혁명이 모든 것을 삼킨다는 통념과 연결된다. ...사후에 우리를 온라인 플랫폼에 업로드하는 기술이 개발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우리가 흥미진진한 인터넷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리라고 장담한다. 

 

점진적 뇌화, 곧 우리 문화가 뇌로 환원되는 현상

허무주의 

 

이 같은 상향 야만화는, 의식 혹은 정신은 단지 기능적 구조일 따름이며 그 구조를 다양한 재로료 구현할 수 있다고 보는 기능주의에서도 작동한다. 398

 

첨언: 야만인은 없다

 

브뤼노 라누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야만인>과 <문명인> 

대칭적 인류학, 인류를 전근대적(야만인) 집단들과 근대적(문명화된) 집단들로 세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재하거나 추정된 모든 타자들의 눈에 비친 우리는 우리 눈에 비친 그들과 마찬가지로 다르게 보인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타자들과 우리 사시에 대칭이 성립한다. 우리는 예컨대 고도의 기술을 갖췄지만 그렇다고해서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403

 

인간 존엄은 우리에게 자연으로서 주어지거나 이식된 것이 아니라 과제로서 우리 앞에 높여 있다. 그 과제를 이행하려면, 우리는 아직 한참 더 나아가야 한다. 408

 

인간은 모래 속의 얼굴이 아니다.

이 책에서 21세기를 위한 정신 철학의 기초를 간략하게 제시했다. 나의 의도는 정신적 자유의 개념을 설명하고 환원 및 제거 프로그램들에 맞서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 프로그램들은 우리가 정신이나 자유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설득하려 든다. 내가 맞선 적의 이름은 이데올로기이며, 내가 보기에 이데올로기의 주요 의도는 인간의 자기 제거다. 그 제거의 시도는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오늘날 그 시도 중 일부는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둘레를 돈다. 즉 우리가 미래의 사이보그들로서 우리의 생물학적 자연을 능가하게 될 것이므로 이제 인간의 시대는 종말에 이르렀다는 생각의 둘레를 돈다.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한 문제를, 인문학이 꽤 오래전부터 정신을 포기하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410

 

한마디로 근대는 부담 벗기의 환상을 품는다. 하지만 그 환상에 맞서 우리는 정신적 자유의 이름으로 저항해야 한다. 참된 진보는 정신과 인간의 극복이라는 환상적인 이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통찰들에 비추어 도덕적, 법적 질서를 향상시키는 것에 있다. 410

 

정신과 인간을 인문학에서 추방하는 작업은 수상한역사를 가졌다. 그 작업의 주요 출발점은 하이데거의 <인본주의에 관한 편지>다.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에 반발하여 이 글을 썼다. 그는 실존주의가 근대적인 대도시 철학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실존주의를 경멸했다. 그는 실존주의에 맞서서 오히려 나치즘을 옹호하고 독일인의 본질에 관한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옹호하려 했다. 하이데거는 정신의 개념을 본질의 개념으로 교체한다. 즉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자화상을 개념적, 윤리적 요구들에 비추어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유의미하게 그리는 것에 존립한다고 알려 주는 정신의 개념을, 우리를 은밀히 우리의 향토에 옭아매고자 하는 본질의 개념으로 교체한다. 411

 

인간을 극복하자는 논의의 또 다른 원천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 철학자인 푸코의 저서 <<말과 사물>>이다. 이 책은 인간의 개념이 근대 생명 과학들과 인간 과학들에서 어떻게 발생하여 변천했는지 서술한다. 책의 결말을 이루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몇백 년 전부터 비로소 존재한다. 푸코가 이런 주장을 내놓은 것은, 그가 인간을 단지 다양한 학문적 담론들이 만나는 지점(인터페이스)으로, 즉 하나의 구성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푸코는 인간의 시대도 종결될 수 있다고 결론 짓는다. <<말고 사물>>은 다음과 같은 전망으로, 아니 명시적인 내기 걸기로 마무리된다. <인간은 바닷가 모래 속의 얼굴처럼 사라질 것이다.> 나는 반대똑에 내기를 걸겠다! 412

 

당연히 인간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언젠가 우리의 태양이 꺼질 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우리의 태양이 부풀어 우리를 삼킬 때. 

 

21세기의 중요한 과제 하나는, 정신적 생물로서 우리의 처지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오로지 (엄격한 익명의 원인들로 이루어진 물질적-에너지적 실재를 뜻하는) 우주 안에 현전하는 것만 존재한다고 가르치는, 그래서 정신을 의식으로 또는 의식을 신경 활동으로 환원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정신관을 갈구하는 유물론을 우리는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세계들에 속한 시민이며, 자유의 조건들을 제공하는 목적들의 나라 안에서 활동한다. 413

 

실재를 저주할 원리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적, 정치적 진보를 추진할 이유들이 수두룩하게 존재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 존엄에 걸맞은 삶을 명백히 어렵게 만드는 조건들 아래서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복지 사회에서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명상 센터에 다님으로써 이 문제를 치워버릴 수 없다. 유럽 힌두주의는 단지 도피이며, 진짜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미래를 상정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것이 전부다. 414

 

철학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인간 정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다. 공허한 포스트휴먼 시대의 약속에 맞서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기능할 수 있는 그런 자화상을 말이다. 그리하여 철학자 셀링의 지당한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친구 헤겔에게 보낸 편지, 1795년 2월 4일에. 

<모든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는 자유다>.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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