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자연철학의 이념

백_일홍 2023. 7. 12. 12:16

자연철학의 이념

 

F.W.J.셀링

 

옮긴이의 말

 

철학에서 문제삼게 되는 자연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곧잘 자연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되며, 그 자연 아닌 것과의 대비를 통해 자연에 접근하게 된다. '자연과 사회', '자연과 문화' 또는 '자연과 인위', '자연과 정신' 혹은 '자연과 자아', '자연과 자유' 등의 대비는 모두 우리에게 있어 자연이란 일차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 인간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것, 정신적이지 않은 것 따라서 순수 물질적이고 인과 필연성의 기계적인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자연은 천연 자원일 뿐이고, 그 외의 자연은 인간 손길 밖의 원시림이나 먼 하늘 별나라에나 있는 듯이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자연과 자유', '물질과 정신' 등의 이분법적 도식을 서양 근세 형이상학의 잔재라고 생각하며, 반대로 형이상학의 극복을 시도하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그러한 이분법적 사유의 굴레를 성공적으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 환경 파괴의 심각성에 직면한 현대의 환경론자들이 대부분 그 생태학적 위기의 사상적 근원을 서양의 형이상학에서의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 또는 편향적인 정신 우월주의, 인간 중심주의에서 찾고 있는 것 역시 그와 같은 형이상학의 이해 또는 오해를 부추기는 것이다.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를 자연 불화적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반형이상학적 실재론자를 자연 친화적 환경 보호의 선구자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형이상학의 이해는 과연 정확한 것인가?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에 관한 그러한 진단은 과연 바른 것인가? 그들이 비판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은 서양 근세 형이상학자들의 이원론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철학사를 읽는 그들 자신의 이원론적 관점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실제 철학사에 있어 반형이상학적 실재론자 이외에 어느 누구도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의 철저한 이원론을 주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라는 데카르트식의 분류가 행해진 이후(데카르트도 그 둘을 매개하는 신개념을 통해 엄격한 이원론을 피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신이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바로 그와 같은 이원론 또는 비정신적 물질 자체를 비판 극복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시도였으며, 칸트의 현상론이나 독일 관념론자들의 관념론 역시 그러한 이원론적인 물자체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이 근세 형이상학의 인간 중심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는 현대의 환경론자들에게서 우리는 오히려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이 그 진단 및 대안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진단 위에 그들 중 몇몇은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으로서 '감각 중심주의', '생명 중심주의' 또는 (자연) 전체주의'의 모토를 내걸며 이제 더 이상 정신 또는 이성의 인간을 가치의 중심에 놓을 것이 아니라 동물이나 생명체 또는 무기물의 자연 전체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고, 또 다른 몇몇은 이전의 인간 중심주의에서의 편협한 인간 개념을 수정하여 그 개념 안에 미래 세대에 대한 공동체 의식 및 아름다움이 나 신성함 등의 미감적 가치 판단 능력까지도 포괄하는 자연 친화적 인간관을 확립함으로써 '수정된 인간 중심주의'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두 관점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자연은 인간 정신 밖의 것, 인간 정신과 무관한 것, 인간 정신 너머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인간 중심이냐, 자연 중심이냐라고 하는 중심의 선택만 바뀔 뿐,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과연 정신 밖의 자연, 형상 너머의 질료, 순수 물질 또는 물자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는 역으로 자연 외적 정신, 물질화되지 않은 관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으면, 이런 형이상학적 물음들은 현대의 자연철학자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물음이 되고 만다.

'자연 안의 이념'이나 '인간과 자연의 일치' 또는 '정신과 물질의 동일성' 등을 언급하면 그것은 지양되어야 할 물활론 또는 신비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형이상학적 관점은 현대의 생태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구체적 기술적 방안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형이상학적 전제도 함축하지 않은 자연관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일체의 형이상학적 물음을 배제한 자연 이해가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일종의 독단이다. 그것은 특정한 형이상학의 바탕 위에 있으면서 그 자신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돌아보지 않는 무반성의 표현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전제한 자연관이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들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이원론적 자연관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만연해 있는 생태학적 위기를 야기시킨 근원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또 누구나 그 위기의 심각성을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과학자와 과학 정책자 집단의 과학 및 기술 개발에 의한 대책을 기대하는 것 이외에 실제 각자의 삶의 방식에 있어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게 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물질을 정신과의 연관 안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것으로서 파악한 관념론적 형이상학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 시간, 절대 공간과 더불어 그 안의 순수 연장체 또는 순수 질료를 정신 독립적 실제로서 상정하는 자연과학적 자연 이해와 반형이상학적 실재론 때문이다.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현상 너머에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물자체, 즉 우리의 정신과 무관하고 정신에 대립한 물질 자체가 존재한다는 소박한 실재론은 우리에게 '인간의 활동과 무관하게 자연은 영원하다' 라는 환상과 '자연의 무한한 자정 능력'에 대한 기대를 싶어 준다. 물질 자체는 그 고유한 원리와 법칙에 따라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또는 정신과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정신을 진화론적으로 가능하게 한 물질적 토대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 영역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더 긴 역사 가진 영구적인 것이다. 실체로서의 물질 자체, 물자체는 인간의 한방과 손 밖에 놓인 자연의 변하지 않는 기체이다. 그에 반해 우리 자연에 있어 변화시키는 것은 자연의 표면적인 가변적 속성들일 분이다. 자연의 외적 속성들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조금 변경시켜 이

 

옮긴이(한자경) 해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셀링(1775-1854)는 칸트와 피히테의 초월 철학으로부터 주체 또는 정신의 활동성 또는 자유의 개념을 받아들여 그것을 자연에까지 확대 이해함으로써, 새롭게 자연철학 또는 동일 철학을 전개한 철학자이다. 철학사적으로 그는 흔히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에서 헤겔의 절대적 관렴론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인 객관적 관념론의 주창자로 해석된다. 207

 

그의 자연관의 특징은 당시의 기계론적 자연관과 달리 자연을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성 또는 생산성으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이러한 사유의 단초를 스피노자의 자연관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는데,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개념짝이 셀렝에게 있어 "주체적 자연", "생산성으로서의 자연"과 "객체적 자연", "생산물로서의 자연"의 개념으로서 되살아나고 있다. 

 

시간.공간상의 특정 위치를 점한 연장적 사물로서의 자연, 다른 사물과 기계적인 작용, 반작용의 관계에 있으며 양화 가능하고 측량 가능한 객체로서의 자연은 우리의 감각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며, 자연과학이 자연과학적 법칙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자연이다. 그것은 정신과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물자체를 상정하는 우리의 소박한 실재론 나아가 그런 실재론에 기반을 둔 기계론적 자연관의 자연이기도 하다. 정신적 기능을 가지는 사유적 실체와 연장적 성격을 가지는 연장적 실체, 곧 정신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오직 인간만이 정신이며 인간 이외에 다른 모든 자연 존재는 정신이 배제된 단순한 물질이라고 파악한 테카르트적 자연관은 바로 그와 같은 기게론적 자연관의 대표적인 예라고 살 수 있으며, 이것이 곧 서양 근세 자연과학의 자연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의 형이상학자들,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 그리고 칸트나 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은 하나같이 그와 같은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또는 정신이 배제된 물자체 상정이 실재에 대한 궁극적 이해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자연과학이 객관적 절대 시간.공간의 좌표상에 위치한 것으로서 상정하는 객관적 물질로서의 자연은 그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궁극적 실재가 아니고, 오히려 일정한 활동의 산물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2차적 존재라는 것을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소산적 자연"이다. 연장적 객관적 사물로서의 자연이란 산출된 결과로서의 자연이라는 것이다. 209

 

그렇다면 그것을 산출하는 궁극적 자연이란 무엇인가? 소산적 자연을 산출하는 "능산적 자연"이란 무엇인가? 소산적 자연이 연장적이고 객관화된 사물로 현상하는 물질적 자연이라면, 능산적 자연은 객관화되고 물질화되기 이전의 이념적 활동성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신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물질이란 정신이 외화되어 나타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해서 연장적인 것과 사유적인 것, 실제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물질과 정신을 근원적 동일성으로 이해하는 관념론적 관점이 성립하게 된다. 스피노자처럼 그 근원적 동일성을 신에서 구하든, 셀렝처럼 그 것을 자연 자체에서 구하든, 이제 연장적인 물질은 단순한 현상, "가상 생산물"에 지나지 않고, 그 현상을 현상이게끔 하는 활동성은 비연장적 정신, 이념적인 것이 된다. 209

 

소산적 자연의 근거로서 능산적 자연을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자연관과 생산물의 근거로서 생산성을 주장하는 셀링의 자연관의 차이는 무엇일까? 셀링이 이해한 자연 원리의 핵심은 바로 피히테가 정신의 원리로서 이해한 변증법, 유한과 무한의 변증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생산물은 생산적 활동성의 결과인데, 이때의 결과란 가능성의 현실화라는 긍정적 측면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실현된 결과의 생산물은 곧 생산성의 저지라는 한계 설정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떠한 한계 설정 또는 저지받음도 없이 오직 순수 활동성만이 존재한다면, 그 활동성은 무한의 속도로 진행되어 어떤 공간도 충족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활동성이 공간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한 속도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한한 활동성을 저지하여 유한화하는 대립적 힘이 있어야만 한다. 무한의 활동성이 현상화되기 위해서는 무한을 유한화하는 대립적 저지의 힘이 요구되는 것이다. 210

 

그렇다면 생산성을 저지하는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원래의 생산성 자체가 무한한 생산성이므로 그 생산성 밖에서부터 오는 것일 수 없고 생산성 자체 안의 힘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생산성으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 안에 생산적 활동성과 그 활동성의 저지라는 양극적인 대립적 힘을 함께 지닌 존재이다. 무한을 유한화하는 저지력은 바로 무한 자체 안에 있다. 무한이 유한화되는 것은 그 무한 안에 무한한 힘을 무한히 저지하여 유한화하는 자기 저지적 힘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한 활동성의 현상화는 그 활동성의 저지를 통해 성립하며, 또한 그러한 저지가 있기에 다시 그 저지의 극복으로서의 무한한 활동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한이 무한에 의해 가능하듯이 무한은 유한에 의해 가능하다. 이와 같은 변증법적 구도 안에서 이해된 자연이란 생산적 활동성과 그 활동성의 저지라는 대립적 힘의 종합이며 이러한 자연의 원리 자체가 바로 자연의 이원성 또는 양극성인 것이다. 120 

 

그런데 이처럼 생산적 힘이 그것의 속도에 제한을 가하는 대립적 힘에 의해 저지됨으로써 생산물이 산출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산출된 생산물은 과연 어떤 방식의 존재인가? 생산물이 산출되는 그 자리가 바로 활동성과 그것의 저지력이라는 대립적 두 힘이 마주치는 자리라면, 바로 그 지점에 생산성의 저지로서의 생산물이 생겨나야 되겠지만, 대립되는 그 두 힘의 합이 0이기에 다시 그 생산물은 사라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점에서 셀링은 다시 우리가 고정된 실체로 간주하는 연장적 물질이라는 것이 "가상 생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고정화된 물질, 정지된 자연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물은 무한히 작은 속도로 저지받아 현상하는 활동성 자체이며, 어느 순간도 정지하여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물은 매 순간마다 무한한 활동성과 그 저지력의 종합을 통해 새롭게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지받은 생산력 안에 다시 그 저지를 넘어서는 무한한 활동성이 자리잡고 있기에, 사리지는 각 생산물 안에는 그 다음 순간의 생산물을 생산할 무한한 활동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211

이와 같이 자연을 끊임없는 활동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셀링은 기계론적 자연관을 넘어서며, 다시 그 자연의 활동성을 무한한 활동성과 유한화하는 저지력의 종합, 무한과 유한의 종합, 인력과 척력의 종합이라는 이원성 또는 양극성으로 이해함으로써 변증법적 자연관을 전개한다. 무한과 유한, 정신과 물질, 추진력과 저지력, 생산과 소멸 - 이 모든 대립으로 나타나는 양극은 사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가 되기 위해 다른 하나가 요구되는 관계이다. 211

 

"자연철학의 이념" 

 

1.자연철학의 과제 (21)

자연이란 우리의 "총체적인 경험 세계"를 의미하며, 따라서 자연철학의 근본 물음은 "우리 외부의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자연과 자연에 관한 경험은 어떻게 가능한가?"가 된다. 이 물음과 더불어 비로소 우리의 철학적 반성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자아의 자연 경험의 가능 근거에 대한 그러한 철학적 물음 속에서 우리는 자아와 자연의 합일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일을 추구하는 철학적 반성은 바로 그 반성 이전의 (자연 상태의) 자연적 합일로부터의 일탈이며, 자아와 자연이 분리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철학적 반성은 자아와 자연의 분리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분리를 지양하는 과정이다. 철학적 반성을 거쳐 다시 되찾은 합일과 반성적 분리 이전의 원시적 합일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로서 셀링은 "자유'를 강조한다. 즉 철학적 반성이란 자연적 합일을 자유로서 회복 또는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212

 

이는 곧 철학의 사유 과정에서 나타나는 분리란 궁극적인 것일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간극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셀링은 동일성을 부정하고, 인간과 세계 사이의 분리를 영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정신병" 또는 "악"으로 간주한다. 물자체의 철학을 비판. 

 

2. 표상의 원인으로 상정되는 물자체 비판 (28) 

"어떻게 외적 사물의 표상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통해 대상과 표상의 동일성을 지양함으로써, 우리의 표상으로부터 독립적인 대상자체, 물자체를 상정해 놓고 다시 그 대상과 표상 관계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해명하는 관점을 셀링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비판한다. (1) 사물을 표상의 원인으로 설정하여 사물과 표상의 분리를 영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물에 대한 우리 지식의 실재성이 설명될 수 없게 된다. (2) 표상에 선행하는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아무런 개념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3) 표상의 가능 근거를 물음으로써 표상의 계열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나의 존재에 다시 원인과 결과 개념을 적용시킬 수는 없다. 213

 

3.경험론적 자아 설명의 한계 (30)

'우리 안의 표상 가능성'을 외부 사물의 작용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나는 사물에 의해 적용받는 수동적 사물이나 객체가 아니라, 그러한 사물 또는 표상 간의 인과 계열 자체를 넘어선 능동적인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표상의 가능 근거에 대한 철학적 물음 자체가 그런 표상의 계열 너머로의 자유로운 비약, 곧 자아의 자유를 증명해 준다. 214

 

4. 상식적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 (32) 

1) 상식적인 실재론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자들의 자유로운 비약

2) 신화와 종교에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의 대립, "플라톤도 여전히 물질을 신과 다른 어떤 것으로서 신에 대립시킨다."

3) 동일 철학의 시도: 셀링은 정신 독립적 물자체를 부정하면서 동일 철학적 통찰을 선취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든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라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사유와 연장을 동일한 원리의 단순한 양태의 차이로 간주한 최초의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이다" "라이프니츠는 어떠한 정신에 의해서도 인식되지도 직관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작용하며 우리 안에 모든 표상을 만들어 내는 그런 물자체의 세계에 관한 사변적 허구로부터 최대한으로 거리가 멀다". 214

 

5.물자체 비판 (36)

1) 인과율은 현상적 물질 영역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 현상화되지 않는 현상 너머의 지적 영역에는 적용될 수 없다. 

2) 자아가 물체로부터 수동적으로 작용받는 결과적 산물이라면 자기 의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즉 현상에 대해 판단하는 활동적 자아가 되지 못할 것이다. 

3) 직관에 있어 외적 직관 대상의 실재성은 확실하다. 반면 오성은 현상 너머 그 배후의 물자체를 상정하면서 사물을 분할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무한 분할을 허용하면 유한한 사물 현상이 설명되지 않으며, 무한 분할이 아닌 궁극적 부분을 인정하면 다시 그런 부분은 경험에서 도달 가능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오성이 생각하는 물자체로서 상정된 "물질은 우리가 아는 것 중 가장 비본질적인 것이 된다"

4) "물질은 힘을 가진다"는 설명의 문제점: (가) "힘으로부터 독립적이며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물질이 있고, 그 물질이 힘을 갖게 된 것이라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물질은 결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물질로부터 힘을 설명할 수가 없다. (나) 힘이 곧 "인력과 척력"을 의미한다면, 그 힘은 이미 충족된 공간인 "물질"을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힘으로부터 물질을 설명할 수도 없다. (다) 힘의 주관성: 우리는 힘을 결코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힘이란 오로지 당신의 느낌에만 알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세계 체계에 대한 경험적 설명 원리의 한계: (가) 경험으로부터 성립하는 최후의 지식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명제는 바로 경험 자체의 한계"이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 단지 하나의 이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 힘들의 일반적 균형은 더 이상....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나) 뉴턴의 물질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세계 힘들의 균형", 즉 "인력체계"나 라이프니츠의 정신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예정 조화"나 둘 다 이념적 설명이다. 215

 

6.물질론에 대한 보다 상세한 비판 (41)

1) 물질을 감각한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 공간을 채우는 실제적인 것으로서 물질을 상정할 때, 그 물질의 실재성은 단지 감각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감각은 외부(물질)로부터의 나에 대한 작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내 안에서 감각하는 것이 물질이라면, 그 나의 외적 작용에 대해 그 외적 물질에만 반작용할 수 있을 뿐, 나 자신에게 반작용하지는(사물을 의식하게 되지는)못할 것이며, 반대로 만일 내 안에서 감각하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면, 그 나(비물질)와 외부 물질 간에 어떠한 접촉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감각은 외적 물질의 작용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2)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물질의 성질일 뿐이고, 물질 자체는 그런 감각을 야기시키는 근거(촉발자)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 : 감각을 야기시키는 것으로서의 물자체, 속성들의 담지자로서의 실체를 "내적인 것, 물질의 내적 속성"으로 상정할 경우, "그것은 단지 단어일뿐이지 사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물체를 분할하고 탐구해 봐도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물질의 속성, 물질의 표면일 뿐이며,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3) 물자체 상정의 문제점: 물질 자체를 상정할 경우 그렇게 감각의 원인으로 상정된 물질 자체와 감각하는 정신과의 연관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4) 물질의 내적 근본 요소 상정의 문제점: 충격받음 없이 그리고 중력과 독립적으로 사물 간에 끌어당김이 발생할 때, 그 끌어당김의 근거를 우리는 물질 내적인 것, 물질의 "근본 요소"라고 주장하지만, "근본 요소란 무지의 피난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것 역시 경험적으로 접근 가능한 물질의 표면적 성질에 지나지 않는다.217

 

7.경험적 지식의 요소들의 분석 (46)

물질의 운동에 대한 경험적 설명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물질의 질량, 즉 양에 따른 운동: 중력에 의한 운동: 정태학의 영역

2) 물질의 내적 속성, 즉 성질에 따른 운동: 화학적 운동: 화학의 영역

3) 물질 외부 충격에 의한 운동 : 기게적 운동: 역학의 영역

 

8. 현상과 현상의 인과 연속, 그리고 그것의 필연성의 인식 (47)

어떤 인과의 연속을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곧 그 연속을 주관적 필연성이 아닌 객관적 필연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 현상의 연속, 그리고 연속의 현상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사물의 연속과 연속적 사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애가 가능다. 

(1) 연속과 현상이 둘 다 우리 외부에서 발생한다. 

(2) 연속은 표상 내부에서 발생하지만, 사물은 표상과 독립적으로 우리 외부에 존재한다.

(3) 연속과 현상이 둘다 우리 안에서 발생한다. 

(1)의 비판: "연속은 표상의 유한성의 제약하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연속은 시간 형식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는 유한한 정신의 표상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일 수가 없다. 즉 연속은 우리의 표상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의 비판 : 연속이 표상 내적인 것인 반면 사물은 표상 독립적인 외적 존재라면, 연속은 사물 자체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연속의 필연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단순한 착각이 되며, 흄적 회의주의가 귀결된다. 이것이 바로 표상 독립적 물자체, 즉 "연속... 원인과 결과의 개념... 공간과 연장의 표상.... 시간을 배제"하는 물자체를 상정할 경우 발생하는 문제이다. 

(3)의 주장: 우리 인식의 필연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 세계 사물이 주관 독립적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연속이 실제로 객관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물자체 역시 유한한 정신 안에서의 연속과 동시에 성립하고 발생한다고 간주하는 것 이외에 더 이상 다른 길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정신 독립적 물자체를 부정하는 관념론적 관점이다. 218

 

9. 관념론 철학 (55)

정신 독립적 순수 질료로서의 물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이넘과 우리 외부의 사물의 연관성"을 구하기 때문이며, 이런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이다. 

1) 스피노자: (가) 그의 관념론적 통찰: "그는 우리의 자연 안에 이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사고와 대상)이 내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하였다" 즉 "실제적인 사물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표상 사이에는 어떠한 분리도 있을 수 없다. 개념과 사물, 사고와 연장은 그에게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며, 그 둘은 단지 하나이며 동일한 이념적 자연의 변양들일 뿐이다" 

(나) 그의 한계: 이념(정신)과 실재(물질)의 통합을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설명하지 못하고, 우리의 정신 너머의 초재적 신으로부터 설명하고자 한 것이 잘못이다. 즉 "그는 자기 의식의 심연으로 파고들어 그곳으로부터 우리 안의 그 두 세계의 발생을 관찰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외부의 무한자의 이념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스피노자를 극복하는 길은 정신과 물질을 통합하는 근원적 동일성을 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신 안에서 구하는 것이다. 

2) 라이프니츠: (가) 그의 관념론적 통찰: 스피노자의 "무한한 실체"의 자리에다 "우리 자신"을 정립한 철학이 바로 개체적 모나드, 즉 "개체성의 개념"에서 출발하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이다. "오직 개체성의 개념 안에서만 다른 모든 철학이 분리한 것, 즉 우리 자연의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 활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이 근원적으로 통합된다". "유한자와 무한자와의.... 근원적 통합은 개체적 자연의 존재 이외에 다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처럼 무한성과 유한성을 통합하는 개체적 존재는 오직 "표상하는 존재', 즉 모나드이다. 단순성과 통일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나드는 지각과 욕구의 영혼이며, 다양성의 외부 세계는 그 단일한 모나드의 활동에 의해 지각된 표상 계열, 현상일뿐이다. "우리 외부의 현실적인 모든 것은 유한한 것이며... 정신적 자연의 표상 방식에 의해서 비로소 현실적인 것으로 된 것이다" 

(나) 그의 한계: 우리 표상의 전체 연속과 우리의 표상 간의 일치를 "우리의 공통적인 자연으로부터" 설명하지 않고 "예정 조화"로 설명한 것은 실제로 단지 그 일치를 인정하는 것일 뿐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정신과 표상의 관계를 예정 조화의 신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은 "세계 전체를 결국 하나의 착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사실 라이프니츠는 개체적 정신에 기반하여 단일한 정신과 다양한 물질 현상 세게의 관계를 이미 해명하였다. 즉 정신을 "그것의 자연에 외부 사물의 표상들의 규정된 체계가 속하게 되는 그런 존재"로 해명함으로써, 물자체를 상정하는 소박한 실재론 또는 독단론을 극복한 것이다. 220

 

10. 기계론적 자연관 비판 (61)

기계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유기체의 특징: (1) 유기체는 스스로 자신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즉 "자신의 현존의 근거를 자기 자신 안에" 지닌다. (2) 유기체에는 하나의 개념이 그 근거에, 즉 유기체 자체 안체 놓여 있다. 이 점에서 자연 작품은 예술품과 구분된다. (3) 유기체는 그 형식뿐 아니라 그 현존도 합목적적이다. 따라서 형식과 물질이 불가분리적이다. (4) 유기체는 그 자체 전체적으며 분할 불가능한 객체이다. 220

 

11. 유기체론 (64) 

1) 유기체의 정신적 통일성 : 유기체에는 물질로부터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의 통일성이 있는데, 이 통일성은 "직관하고 반성하는 정신"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정신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다. 

2) 주관적 합목적성 비판: 인간 오성에서 비롯되는 주관적 형식을 객관 사물에 비로소 전가시킨다는 주장은 자연 산물에 있어 "형식이 물질로부터, 개념이 객체로부터 단적으로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즉 유기체는 "물질에 내재하는 개념에 의해서만 유기화된 물질이 된다" 그러므로 유기체의 합목적성은 객관적.실제적 합목적성이다. 

3) 신적 오성 비판 : (1) 신적 오성이 이념상으로 창조를 기획하고, 그 이념에 따라 실제적인 것을 산출한다는 생각 역시 이념과 물질을 근원적으로 구분하고서 이념을 물질 외적 첨가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 산물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에 의해 합목적적이다" (2) 현실적 사물과 이념을 동시에 생겨나게 하는 신의 창조적 능력의 가정도 문제 해결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자연의 합목적성과 그것을 판단하는 인간 오성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합목적성은 오직 당신의 오성과의 연관하에서만 타당하기 때문이다" 

4) 정신과 물질의 근원적 통합에 대한 예감: 인간의 유한한 정신의 고유한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연 산물의 합목적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외부 사물 자체 안에 인간의 정신과 유비적인 하나의 정신이 지배한다고 전제하게 된다. 즉 "개념과 현실성, 이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을 통합하는 창조적 능력의 정신을 유기적 존재에 내재하는 지배적 정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연에 있어서 직관과 개념, 형식과 대상, 이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근원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예감"을 얻게 된다. 221

 

12.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 (72) 

1) "나 자신이 자연과 동일한 것인 한, 나는 나 자신의 생명을 이해하듯이 생동적인 자연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한다." 즉 자연의 합목적성을 파악하는 나의 정신과 나에 의해 파악된 자연의 합목적적 정신은 동일한 것이다. 유기체는 바로 자연의 산물이며, 그 산물 안에는 합목적적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 개체적 자연 산물에 있어 자연과 정신은 내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2) 자연과 정신, 자연과 자유의 내적 결합을 지양하면, 대립되는 두 체계가 발생한다. 정신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실재론(독단론)과 물질과 정신을 이원화시키는 이원론 철학이다. 222

 

13. 독단론 비판 (73)

1) 정신(사고와 표상과 의지)를 신체를 통해 설명하고, 신체를 다시 화학적 물질로부터 설명하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물질로서의 자연은 죽은 화학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2) 생명력을 포함하여 일체의 힘은 그것을 제한하는 대립된 힘과 더불어서만 존속하는 유한한 힘이다. 그런데 그런 대립된 힘들은 상대적 균형 안에 있거나 계속되는 투쟁 중에 있을 것이다. 전자라면 운동 없이 정지하게 될 것이며, 만닐 자연에 계속도는 운동이 있다면, 자연은 후자처럼 히들 간의 이기고 지는 교체의 투쟁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쟁을 지속하게 하며 자연을 유지하는 제3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다시 그 자체 힘이 아닌 상위의 어떠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이다. 
따라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정신은 다시 일종의 힘, 생명력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 222

 

14. 이원론 비판 (76) 

1) 사변에서는 "운동의 원리를 움직여진 것으로부터, 영혼을 물체로부터 구분하는 것"이 허용되지만, 행위의 순간에는 이 구분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2) "영혼과 생명에 대해서는 오직 직접적 경험에 의해서만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의식과 마찬가지로 오직 내적으로만 표상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외부의 생명과 자기 존재에 대해 나는 오직 실천적으로만 확신할 수 있다." 타인의 자유와 정신의 인정은 단순한 사변을 넘어 도덕적, 신천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3) 물체와 영혼을 구분할 때, 그처럼 "물체와 영혼을 함께 생각하지만 그 자체는 다시 그 통합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더 상위"의 존재인 나, 그런 판단을 하는 나는 무엇인가?

4) 이원론을 고수할 경우, 정신과 물질 간의 연관을 설명하기 힘들다. 정신과 물질 사이에 그 둘을 매개하는 중간 물질을 아무리 계속 집어넣는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223

 

15. 자연의 절대적 합목적성 (80)

1) 자연의 절대적 합목적성은 필연적 이념이다. 그 합목적성으이 근원은 신적 오성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과 자연의 절대적 동일성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자연은 그 자체 필연적이고 근원적으로 우리의 정신 법칙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 스스로 그 법칙을 실현하고 나아가 자연이 그 법칙을 실현하는 한에서만 자연은 자연이 되고 또 자연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2) 이 처럼 정신과 자연은 절대적 동일성의 존재다. "자연은 가시적 정신이며, 정신은 비가시적 자연이어야만 한다" 223

 

16. 칸트 철학의 경험적 관념론 수용 (83) 

"경험적 관념론'의 관점에 머무르는 칸트 추종자들은 "오성에 의한 그리고 오성을 위한 사물의 규정이 결코 물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였는데, 그러면서 그 물자체를 경험적 사물같이 표상하는 자에 대해 촉발의 관계, 원인과 작용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서 이해하였다." 이런 해석은 "조야한 경럼론과 일종의 관념론의 모순적 결합"이다. 224

 

17. 철학의 기본통찰 (84): 이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의 동일성

1) 셀링 철학의 기본 원리는 정신과 물질의 동일성이다. 이는 곧 "절대적으로 이념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실제적인 것이라는 통찰, 그리고 절대적으로 이념적인 것 외에는 오직 감성적인 제약된 실재성만이 존재할 뿐, 절대적이고 무제약적 실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즉 절대적 무제약적 실재성은 감성적 영역이 아니라, 오직 감성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념적인 것 안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2) 철학으로부터의 논증:철학이 그 인식의 원리를 다른 학문으로부터 끌어오지 않는 자체 내에 근거지어진 학문이며, 또 그 대상을 오직 무제약적이고 절대적 방식으로만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학문"이라면, 그러한 철학의 이념에는 이미 절대적 지식과 절대자는 무차별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이념적인 절대적 지식과 실제적인 절대자의 동일성, 사고와 존재의 동일성이 그것이다. 

3) 철학으로부터의 논증에 대한 비판과 그 반박: 그러나 과연 그러한 철학이 존재하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 다른 철학에 의하지 않고는 주장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자기 모순적이다. 또는 철학은 절대적 인식이 아니라, 제약된 인식인 것은 아닌가? 그러나 제약된 경험적 인식은 철학이 아니다. 

4) 수학으로부터의 논증: "절대적으로 이념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실제적인 것이라는 통찰"은 철학뿐 아니라, 수학이나 자연학에서도 전제되는 것이다. 수학에서 이념적 구성 작용에 절대적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 자연학이 수학을 따를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5) "경험적 관념론"의 비판과 그 반박: 경험적 관념론자는 "철학자에게 절대적으로 이념적인 것은 오직 그에 대해서만 그리고 그의 사유에 대해서만 실제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철학자의 이념이란 그 자신의 주관적인 것일 뿐 이라는 반성이 빠졌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그 비판자의 논리에 따르게 되면 그가 요구하는 그 반성 역시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고 따라서 타당성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비판을 타당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 자신 역시 "절대적으로 이념적인 것은 그 자체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고, 그의 사유도 다른 사람의 사유도 아니며, 오히려 절대적 사유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25

 

18. 동일성의 해명 (89)

1) 절대적 인식에서의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절대적 동일성은 순수한 동일성으로서 이를 단순한 비상이성으로 이해하거나, 그 자체 구분되는 두 개의 것의 단순한 결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2) 절대자는 절대적인 순수 동일성이며, 상대적 인식에 있어 주관과 객관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동일성이다. 그렇다면 절대자의 주관객관화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19. 미분적 절대성의 주관 - 객관화 과정 (90)

1) 절대자는 이념 또는 순수 동일성인 그의 전체성으로부터 스스로 실제적인 것인 형상이 되고, 즉 객체화되고, 다시 그 형상, 즉 개게로서의 자기 자신을 존재 또는 주체로 해체시킨다. 다시 말해 질료, 존재, 주관성, 전체성으로부터 형상,객관성으로의 운동이 형상화이자 객관화라면, 그 반대의 운동이 곧 주관화, 형상의 존재로의 해체, 동일성의 회복이다. 전체적 동일성으로서의 무한성과 주관성으로부터 객관성과 유한성이 산출되고, 그 객관성과 유한성은 다시 절대적 동일성으로 복귀한다. 

2) 절대자 또는 절대적 인식 행위는 그 두 극단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형상화와 주관화를 통해 "자신을 영원히 자기 자신과 하나로서 형성"해 가는 활동일 뿐이다. "절대자 자체가 바로 영원한 행위이다". 절대자는 행위의 통일성이다. 

3) 특수란 개채란 무엇인가? 개체는 절대자가 특수한 형상으로 상징화되어 나나난 하나의 계기이다. "절대자가... 자기 자신을 단순한 형상으로서, 따라서 상대적 차별성으로 파악하는 한에서만, 그 통일성은 개별적인 현실적 사물들에 의해 상징화된다. 개별적 사물은 존재가 형상으로 변형하는 영원한 행위에 있어 단지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즉 유한자는 무한자의 변양이고 상징이며, 무한자가 개별화하여 나타난 한 계기일 뿐이다. 따라서 일체의 개체가 무한자의 동일성 안에 포함되므로, "물자체는 영원한 인식 행위 안의 이념이다" 

4)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 무한자가 유한자로 개체화되는 행위는 곧 그 유한자를 무한자로 복귀시키는 행위다. "절대자가 영원한 인식 행위 안에서 자기 자신을 특수자로 확장하는 것은 오로지 무한성이 유한자로 되는 절대적 형성 안에서 유한자를 다시 자기 자신 안에 가워들이기 위한 것일 뿐이다." 무한자가 유한자로 확장되어 특수화되는 게기, 다시 유한자가 무한자로 포섭되는 계기, 그리고 이 두 계기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계기에 각각 통일성은 속한다. 227

 

20. 실제적 세계(자연)과 이념적 세계 (95)

1) 무한자가 유한자로 형성된 것이 "자연"이며, 유한자가 다시 무한자로 변형된 것은 "이념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 둘을 다시 통합하는 통일성, 즉 자연과 이념적 세계를 포괄하는 제3의 통일성이 있다. "절대자는 그의 영원한 행위에 있어 필연적으로 두 측면 즉 실체적 측면과 이념적 측면을 하나로서 포괄"하고 있다. 이 각각의 통일성을 "활력"이라고 한다. 

2)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구분 : "자연 자체 또는 영원한 자연은 객관적인 것 안에 탄생한 정신, 형상 안에 인도된 신의 존재이다" 반면 현상으로서의 자연은 "존재가 형상으로 형성되어 특수성 안에 타나난 자연", 특수한 통일성으로 나타난 자연이다. 이처럼 셀링은 스피노자적인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구분을 "절대적 인식 행위 자체로서의 자연"과 "절대적 인식 행위의 단순한 신체 또는 사아징으로서의 자연"의 구분으로 해석한다. 227

 

21. 절대적 관념론과 상대적 관념론의 구분 (97)

1) "철학을... 절대적 인식 행위에 따라 규정한다면, 철학은 관념론이 된다" 실제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은 모두 그 둘을 포괄하는 절대자의 절대적 동일성의 계기인데, 자연이나 이념을 이러한 절대자의 행위로서 파악하는 철학이 "절대적 관념론"이다. 

2) 절대적 관념론과 상대적 관념론의 구분 : 반면 절대자의 동일성은 간과하고 상대적인 이념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은 단지 "상대적인 관념론"일 뿐이다. 셀링은 피히테의 지식학 체계를 상대적 관념론이라고 평가한다. 셀링이 지향하는 관념론은 자연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전체를 절대자로 파악하는 절대적 관념론이다. 

 

22. 자연철학의 내적 구성 (98)

1) 무한자가 유한자로 형성되는 각 단계의 통일성인 세 가지 활력: (가) 무한자가 유한자로 형성될 때의 첫번째 통일성 : 전체적으로 "일반적 세계 건축", 개체적으로 "물체 계열"

(나) 특수자가 일반자로 귀환할 때의 통일성: 전체적으로 "일반적 기계", 개체적으로는 "물체" 

(다) 절대적 합일의 형성 또는 두 통일성의 무차별화: "유기체". 

2) 무한자가 유한자로 형성되어 절대적 무차별화의 지점으로 나가가면, 무한자는 다시 절대적 이념으로 화한다. "이성은.... 유기체 안에서 자신을 상징화하면서 절대적 이념성을 드러내고, 유기체는 ... 이성 안에서 자신을 상징화하면서 절대적 이념성을 드러낸다." 228

 

23, 자연철학의 역사 (99)

1) 지금까지 자연 철학은 "자연과 이념 세계의 통일성"에 관한 학설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점을 통찰하였지만, 자연철학의 보편적 객관저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실패했다. 

2) 자연철학의 과제는 "지적 세계를 현상하는 세계의 법칙과 형상을 통해 완전하게 서술하고.... 다시 현상 세계의 법칙과 형상을 지적 세계로부터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철학은 세계 물체의 운동의 일반적 법칙의 구성을 제시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3) 보일과 뉴턴 이후의 "기계적 물리학"은 "맹목적이고 몰이념적인 방식의 자연 탐구"이다. 그러한 자연 현상의 연구는 현상으로부터 근거를 추론하여 결과에 따라 원인을 설정한 후, 다시 그 결과를 그 원인으로부터 도출하는 순환적 설명이다. 따라서 사태의 가능성 만 설명할 뿐, 사태의 필연성은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 절대자와 이념으로부터 현상을 설명하는 자연철학은 현상의 필연성을 제시한다. 

4) 스피노자의 재평가: 주관-객관성을 절대성의 특징으로 파악하고, 사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를 모두 같은 하나의 실체로 파악한 점 등은 뛰어난데, 그런 절대자 또는 동일성에 대한 학문적 설명이 부족한 까닭에 사람들이 그의 철학을 단순한 객관성의 학설로 오해하게 되었다. 

5) 피히테의 평가: 주관-객관성의 형식을 철학의 유일한 모든 것으로 정당화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그 동일성을 절대자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시 특수성의 주관적 의식으로 제한하며 절대성을 일종의 주관적 과제나 요청 대상으로 만든 것은 문제가 있다.

6) 자연철학의 의의: 현재 사유의 특징은 "관념론"이며, 그 지배적 정신은 "내면으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이념적 세계 안에 놓인 비밀은 자연의 신비가 명시화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실제로 객관적이될 수 없을 것이다" 자연 안에서 이념적인 것을 발견함으로써 유한한 형상을 넘어설 때, 모든 인간이 절대적 동일성의 직관을 통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230

 

 

"자연철학 체계의 제1기획" 

1.무제약자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118)

1) 개별적 존재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가) "무제약자는 하나의 개별적 사물 안에서 찾아질 수 없다"(제1명제). 왜냐하면 존재하는 개별자는 무제약적 존재 자체의 개별적 형상, 특수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존재의 원리에 따르는 정신의 구성"이므로, 존재 자체는 그 "구성하는 활동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활동성 자체는 객체는 아니지만 모든 객관적인 것의 원리가 된다. 

(나) 자연철학에서나 초월 철학에서나 "개별적 존재는... 오직 근원적 활동성의 규정된 형상 또는 제한"일 뿐이다. 

2) 자연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가) 자연과 자유:자연을 무제약자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존재 자체의 개념 안에 절대적 활동성, 즉 "자유"의 "감추어진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 존재 자체가 생산적 활동성이라면, 개별적 존재는 활동성의 절대적 부정성일 수는 없다. 물론 생산적 활동성은 생산물로서의 개별적 존재 안으로 사라진다. 즉 "모든 활동성은 그것의 생산물 안에서 소멸한다" 생산물은 생산 활동이 멈추는 순간의 생산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다) "자연에 관해 철학한다는 것은 곧 자연을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철학이 자연을 그 "최초의 근원"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근원적 의미의 자연이란 "생산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활동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이다. 이와 같이 자연을 "단적으로 활동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연에 무제약성이 귀속된다. 

(라) 그렇다면 자연은 어떤 의미에서 단적으로 활동적인가? "절대적 활동성은 유한한 생산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무한한 생산물에 의해서만 서술될 수 있다"(제2명제) 문제는 절대적 활동성, 그 "무한한 것"을 어떻게 "유한한 것"인 자연 안에서 서술하는가이다. 2324.

 

2. 유한한 것 안에서의 무한한 것의 서술 가능성 (122)

1) 우리가 외적, 경험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것이 유한자라면 무한자는 그런 방식으로는 직관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한자의 직관 안에서 동시에 무한자를 발견한다. 말하자면 경험적인 유한자의 직관이 무한히 이어지는 "경험적 무한자", 즉 경험적인 무한한 계열이 우리의 구상력 앞에서 무화되는 순간, 그 유한한 무한성의 무화와 동시에 비로소 "절대적인 지적 무한성"의 직관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적인 무한한 계열의 무화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그 계열의 이념적 한계"를 설정할 것인가는 "이성"이 결정하는 것이다. 

2) 이처럼 무한자의 직관은 특수한 개별적 계기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과정 안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무한성은 근원적으로 오리 안에 있지만... 외적인 경험적 서술이 없이는 결코 의식에 이르지 못한다" 

3) "무한한 계열은.... 근원적 무한성의 외적 서술"이다. 근원적 무한자는 무한한 계열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근원적으로 무한한 계열은 복합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에 의해 발생한다" 복합은 본래 있지 않던 것이 경험적으로 쌓여서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한다면, 진화란 " 그 시작점에 있어 이미 무한한 단 하나의 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 무한한 크기가 전체 계열을 통과한다고 보는 것이다. 

4) 그 무한한 크기 안에 전체 무한성이 집중되어 있으며, 계열상의 연속은 오직 "개별적 저지"를 나타낸다. 무한자의 자기 확장, 즉 외화에 있어 연속적 제한의 저지가 있지 않다면, "그 크기의 확장은 무한한 속도로 발생하여 어떠한 실제적 직관도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자의 자기 확장으로서의 무한한 활동성은 그 확장에 제한을 가하는 끊임없는 저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경험적 무한성의 본래 개념은 곧 "무한히 계속적으로 저지되는 활동성"이다. 다시 말해 활동성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기에, 무한히 저지되는 것이며, 무한히 저지되는 것이기에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다. 233

 

3. 생산성과 생산물 (125)

1) "자연이 절대적 활동성이라면, 그 활동성은 무한히 저지되는 것으로 나타나야만 한다."(제1결론 명제) 무한한 활동성도 자연 안에 있고, 그 활동성의 저지 근거도 자연 안에 있다. 

2) 자연은 고정된 생산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안의 모든 개별적 생산물은 단지 가상 생산물일 뿐이지, 절대적 생산물이 아니다"(제2결론 명제) 자연물은 그 안에서 생산성잉 완전히 소지고어 버린 절대적 생산물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안에서 생산성이 확장되면서 동시에 저지받고 있는 가상 생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계속 생성 과정 중에 있는 것이지, 더 이상 생성 활동을 하지 않는 결과물이 아니다. 233

 

4.자연의 이원성: 활동성과 그 저지 (125)

1) 활동성과 그 저지라는 "근원적 대립"이 자연을 자연이게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연의 두 가지 특징이 귀결되는데, 그 하나는 자연은 스스로 자신에게 자기 경계를 부여하므로 자연에 어떤 낯선 힘도 들어올 수 없으며, 자연은 그 자신의 법칙 부여자라는 "자연의 자율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은 그 자신의 활동적 원리로부터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자연의 자족성"이다. 이 자연의 자율성과 자족성이 곧 "자연은 무제약적 실재성을 가진다"는 "자연철학의 원리"이다. 

2) "절대적 활동성은 무한히 저지되는 것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무한한 활동적 힘에 대해 그것에 제한을 가해 그 확장 속도를 유한화하는 저지적 힘이 함께 있지 않다면, 활동성은 어느 한순간에도 머물러 있지 않으며 공간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을 채우는 유한한 생산물은 무한한 생산성과 그 저지라는 대립된 두 경향의 구성물이다. 

3) 자연의 "정지"."영속성"."불변성"의 부정: 대립되는 경향들로부터 유한한 생산물의 구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만일 그 두 경향이 한 지점에서 만난다면, "그 둘의 작용은 상호적으로 서로 지양할 것이고, 결국 그 생산물은 0이 될 것"이다. 즉 자연은 생산물로서 존속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자연물도 "그 안에서 대립되는 활동서이 절대적으로 만나게 되는 생산물, 즉 그 안에서 자연 자체가 정지에 도달하게 되는 그런 생산물일 수는 없다." 즉 "자연 안의 영속성", "불변성"은 부정되어야 한다. 

4) 주체로서의 자연과 객체로서의 자연의 구분: 자연 안의 불변성이란 "자연 자신의 활동성의 제한"일 뿐이다. 즉 "자연의 활동성의 저지점이 객체로서의 자연 안에서 불변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지속"은 "객체로서의 자연" 안에서만 발생하며, "주체로서의 자연"은 끊임없는 활동성일 뿐이다. 235

 

5. 자연 안에서의 무한성의 직관(128)

1) "지금 자연 안에 고정된 것처럼 나타나는 각각의 생산물은 오지그 그 한순간에만 그렇게 존재할 뿐이며, 연속적인 진화 속에 포함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단지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것일 뿐이다" 즉 객체로 나타난 저지된 생산물일지라도그것은 활동성의 절대적 부정이 아니며, 그 자체 단적으로 활동적이다. 자연은 그 자체 안에 저지받음과 동시에 저지를 넘어서는 "무한한 발전의 충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각각의 개체 안에 전체-무한자-가 반영되고 있다"

2) "어떻게 대립된 활동성이 서로를 상호 지양함이 없이 유한한 것의 직관 안에서 만나게 되는가? 정신은 "개별적 생산물 안에서가 아니라 - 즉 통합 안에서가 아니라 - 오히려 대립되는 활동성의 무한한 분리 안에서 정신 자신의 직관을 갖게 된다" 대립된 두 활동성의 통합으로 나타나는 저지된 개별적 생산물에 대한 개별적 직관은 "오직 가상적으로 개별적일 뿐이며, 본래 모든 개별적 직관 안에 전체 우주의 직관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235

 

 

"자연철학 체계의 기획 서설"

1.이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의 동일성 (제1장.133)

 

1) 무의식적 활동성이 자연 산물의 맹목적인 실제적 활동성이라면, 의식적 활동성은 자유로운 의식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이념적 활동성이다. 우리는 흔히 이 둘을 구분하여 무의식과 의식, 물질과 정신, 실재성과 이념성이라는 대립의 관계로 이해한다. 

2) 그러나 철학은 "무의식적 활동성을 의식적 활동성과 근원적으로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대립을 지양한다" 이 대립을 지양한다는 말은 곧 그 둘을 근원적으로 하나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적 물질 차원에 속한느 실제적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의식화 가능한 이념적인 것이 내재해 있다고 보고, 의식적이인 이념적인 것 안에도 무의식적인 실제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3) 이처럼 이념적 활동성과 실제적 활동성을 근원적으로 하나로 볼 경우, 정신과 물질, 이념과 실제의 이원론적 대립을 지양하는 일원론적 시도가 있게 된다. 그 중 자연을 정신으로, 즉 "실제적인 것을 이념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가 "초월 철학"이라면, 정신을 자연으로 환원시켜 "이념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자연철학"이다. 

 

2. 자연철학의 특징 (제2장, 136)

1) 자연철학은 "자연을 자립적인 것으로 정립"하며, 유기물이나 이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연력으로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자연학의 스피노자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2) 이런 의미에서 자연철학은 관념론적 설명 방식의 초월철학과 구분된다. 

 

3.사변적 자연학 (제3장, 137)

1) "사변적 자연학"의 제1과제는 "운동의 절대적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론적 또는 원자론적 방식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계론적 자연학에 따르면 운동은 운동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2) 사변적 자연학은 "동역학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 동역학에 따르면 "운동은 정지로부터도 나올 수 있으며, 따라서 자ㅏ연의 정지에도 역시 운동이 있다는 것.... 기계론적 운동은 근원적인 유일한 운동으로부터 도출된 이차적 운동이라는 것... 근원적 운동은 자연 일반을 구성하는 제1요소들로부터 이미 발생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3) 기계론적인 경험적 자연학은 이차적 운동만을 다루며, 사변적 자연학만이 자연의 궁극적 운동 원천을 해명한다. 이는 경험적 자연학이 자연의 객관적.외면적 표면만을 탐구하는 데 반해, 사변적 자연학은 비객관적.내면적 충동 작업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4.사변적 자연학의 가능 조건은 무엇인가? (제4장, 139)

1) "엄격한 의미의 지식"은 우리가 어떤 것이 어떻게 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는가의 원리를 통찰할 수 있을 경우에만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원리를 앎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산출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기계를 발명한 자는 그것에 관한 가장 완벽한 지식을 가진 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그 "작품의 영혼'이며, 그 기계는 실제적이기 이전에 이미 이념적으로 그에게 선재했기 때문이다. 

2) 마찬가지로 "자연의 내적 구성"의 지식은 "자유에 의한 자연으로의 침투"가 가능해야만 얻을 수 있다. 자연으로의 팀투는 곧 "실험"을 의미하며, 실험이란 일종의 "예견"이며, "현상의 산출"이다. 그러므로 자연학의 첫걸음은 "우리가 그 학문의 객체를 스스로 산출하기 시작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물론 "실험을 매개로 한 구성은 현상의 절대적 자기 산출이 아니다"

3) 그러나 "모든 현상이 단 하나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법칙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는 것, 그 법칙으로부터 현상들이 모두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실험이 그런 지식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연 현상의 궁극적 원인은 그 자체 현상이 아니므로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전제(가설)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필연적 학문은 자연 현상에 대해 임의적이 아닌 필연적 전제를 찾아냄으로써만 가능하다. 

4) 셸링이 제시하는 자연과 자연 설명에서의 필연적 절대적 전제: (가) 절대적 동일성의 부정: "절대적 동일성은 생산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으로부터 생산물로서의 자연으로의 절대적 이행, 즉 절대적 정지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자연에 절대적 동일성은 없다. 

(나) 보편적 이중성의 원리: 생산성과 생산물 사이의 자연의 유동. 활동성과 활동의 저지라는 자연의 대립은 원리의 보편적 이중성(양극성)을 말해 준다. "이 이중성을 통해 자연은 끊임없는 활동성 안에 유지되며 그것의 생산물 안에 소진되어 버리지 않게끔 저지된다"(64)

5) 사변적 자연학의 이념: 그러한 "절대적 전제로부터 모든 자연현상을 도출함으로써 우리의 지식은 자연 자체의 구성, 즉 자연의 선험적 학문으로 바뀌게 된다." 그 학문이 바로 "순수 사변적 자연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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