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두려움은 소문일뿐이다

백_일홍 2023. 9. 18. 13:01

두려움은 소문일뿐이다

 

최현숙

 

목 차

프롤로그 소문과 속임수에 맞서나가는 이야기

1부 혼돈과 어둠 속에서 _나와 가족을 타협 없이 직면하다
나는 도둑년이었다
냄새나는 존재
아버지를 미워한 힘으로
양반집 규수의 산업사회 분투기
관혼상제―사람 노릇 하기의 고역
엄마의 인지저하증
뒤엉킨 조각들―엄마의 성애, 아버지의 돌봄
여든여섯 할머니의 임종 관찰
그 남자의 자리
일랑과 호랑을 만나며

2부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 _늙어가는 몸의 쾌와 불쾌 사이에서
기나긴 대중교통 이용에 관한 사정
의료산업에 덜 속고 살기
이빨과 틀니의 사정
욕망하는 주체
돌보다가 늙어 미쳐도 어쨌든 살아내는 여자들
이종 간 반려에 대한 이견
섹스 관련 생애 맥락 몇 가지
늙어가는 몸에 대하여
몸소
산업사회형 늙은 여자의 살림 꼬라지
‘자유 죽음’에 관하여

3부 희망 없이, 하염없이 _홈리스 곁에서, 살며 싸우며
선의와 모멸감 사이, 조심操心
홈리스 현장에서
더러워지기 혹은 익숙함
여기는 노숙인 광장이다
희망 없이, 하염없이

 

ㅇ ㅇ ㅇ

 

1부 혼돈과 어둠 속에서

- 나와 가족을 타협 없이 직면하다

 

관혼상제

- 사람 노릇 하기의 고역

 

엄마의 죽음 이후 원가족과 1차 단절하면서, 아버지의 죽음까지는 그를 방문하고 장례에 참여하게다고 했다. 부모는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내 존재의 시작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원가족과의 모든 관계를 끝냈다. 사회적 지위와 가치관 면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내게는 고역이었다. 그들과 함께할 때 내 위치와 가치관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고, 드러낼 때마다 갈등이 불겨졌다. 하여 그 고역을 계속 감당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혈과 단절하는 일은, 심리적으로 한동안 피를 흘리는 일임을 매번 통감한다. 81

 

여든여섯 할머니의 임종 관찰

 

혈연에 관한 건조한 글쓰기는, 특히 죽음에게는 위험하고 혹 폭력적일 수 있다. 부모의 늙음과 죽음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렇다. 그럼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사적인 것 속의 정치사회적 측면을 드러내고자 함이고, 늙음과 죽음에 관한 통념에 딴지를 걸고 싶어서다. 죽음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에 유난히 감정이 과잉되어 있다. 내가 죽음에 대해 유독 건조하게 쓰는 이유다. 남매들 사이에서는 내 글쓰기가 이미 논란이 되어왔고, 나는 이 논란이 더 확장되기를 바란다. 비단 가족 안에서뿐 아니라 바깥에서도 끊임없이 논란되어야 할 의제다. 가족과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는 막강한 고정관념이 작동하면서 다양한 소수자들을 억압한다. 그래서 엄마의 죽음을 독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고자 했다. 부자 노인이어서 내 관심 대상들과는 다르지만 내 엄마여서 최대한 밀착할 수 있었다. 101 

 

그 남자의 자리

 

애 그는 먼저 내게 연락했을까? 큰딸이 아예 망가져버릴 것을 염려한 건가? 망가짐을 막기 위해 나를 족에 다시 귀속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 귀속이 목적이라면 그로서는 약간의 성공이고, 나로서는 또다른 분열의 시작이다. 족의 경계를 들락거릴 때마다 나는 늘 분열했고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속하고 싶지 않고 아예 떨쳐버려야 속이 편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늘 나를 호출하고 환영하고 물질적 제공을 하는 사람들. 그러다가 결국 64세의 어느날, 나는 아버지 이외의 다른 원가족과의 관계를 내 쪽에서 단절했다. 110 

 

일랑과 호랑을 만나며

 

결혼 제도와 가족의 결속력은 어린 새끼를 돌보아 성장하게 하는 요건이지만, 가족 간 갈등과 상처를 야기하고 사회 불평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 징그러운 궁지의 막강함에 진저리를 치며 나 역시 여러 시행착오를 통과하며 내 길을 만들어가는 할머니로서, 아들네 부부와 랑랑도 관습과 제도 바깥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자신을 열어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즐겁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며 공정과 균형을 위해 늘 흔들리기를, 마음으로 바란다. 140 

 

 

2부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

- 늙어가는 몸의 쾌와 불쾌 사이에서

 

이빨과 틀니의 사정

 

평생 도시 것으로 살아온 여편네의, 남도 아닌 나의 벌어진 대문니와는 아직 친해지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에 대해 내 속 눈이 제대로 입장 정리를 못한 거다. 문제는 정상성이다. 아름다움이니 고상함은 남들의 단어 혹은 남들과 내가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라 치고, 소위 글쓰는 사람의 아우라에 대한 곡해와 허영의 이미지가 내 속에 있는 거다. 벌어진 대문니가 단박에 폭로해버린다고 여겨지는 없어 보임, 관리하지 않음, 온갖 '답지 않음'의 정상성에 관한 이데올로기에 인식으로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심리적으로는 붙들려 있는 것이며, 내면의 눈이 아직 끊어내지 못한 타인의 시선에 감시당하기를 자처하고 있는 꼴이다. 이 시금석은 내 인식과 심리 사이에 끼어박혀, 수시로 내 꼬라지를 꼬박꼬박 보여준다. 남들이 찍어 올리는 내 얼굴 사진을 보며 가장 먼저 대문니에 눈이 갔다가 후딱 그 쪼잔함을 수습해버리기는 하지만, 내가 올리거나 보내는 사진에는 결코 벌어진 대문니가 보이는 사진을 고르지 않는다. 내 몸과 남의 시선 간 각축에서 아직 분열적이다. 처지해버리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점점 더 버러이지거나 최소한 지금 정도를 유지할 테고, 인지능력이 있는 이상 타인의 시선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 알전구를 켜놓고 있을 텐데, 장차 이 2.5밀리미터를 내가 어떻게 할지 자못 궁금하다. 제정신인 체로 신경쓰이지 않는 때가 온다면, 그야말로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게 아닐까 싶다. 다행 하나는, 이런 식으로 글을 써서 공유까지 하고 나면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는 거다. 188

 

나는 치과 의자에 누워 무력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고, 의사는 마취 후 어금니 두 개를 간단하게 뽑아내고는 둥근 손거울을 내밀었다. 누운 채 바라본 내 입속 사정에 대한 감상은 '흉측하다'는 문구가 현재로서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빈곤 판에 가까이 있느라 남들의 듬성듬성 빠진 이빨과 입속 뿐 아니라 아예 이빨 전체가 없는 사람을 보면서도, 흉측하다는 표현은 마음으로도 말로도 글로도 감히 떠올리지 않았었다. '저 사정을 가지고 저토록 거리낌없이 남들 앞에 입을 벌려 말하고 웃는 경지는 대체 어떤 포기의 경로를 통해 닿는 것인가? 하는 자문만 자주 했었다. 그런데 나를 향해서는 흉측하다는 표현이 가차없이 떠올랐다.

 

빈곤한 사람들을 향해 흉측하다고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은 내 사회적 의식 때문이었던 거고, 이제 내 사정을 글로 쓸 작정을 하면서야 흉측하다는 느낌을 수긍하고 있는 거다. 나에 대해서도 다른 빈곤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정리하자. 가난은 사람을 흉측하게 '보이게' 만든다. 이 정리에 머물지 말자. 흉측하다는 문구와 그 표현에 대한 내 심리적 정상성을 계속 더 붙들고 노려보자. 나는 왜 내면이 아닌 외양의 어떠함을 놓고 감히 흉측하다는 혐오의 표현을 사용하는가. 190

 

대체로 시각적 느낌은 학습된 것이다. 똥을 더러워하고 벌레를 징그러워하며 일단 피하는 행동은, 갓난아기 때부터 어른들의 말과 표정과 몸짓을 반복 학습해 생긱 즉각적 느낌과 고정관념 때문이다. 갓난 아기 때부터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고정관념이야 상당히 의식의 문제이니 깰 적정을 하고 계속 자기 생각을 노려보면 깨어날 수 있다. 하지만 느낌은 의식보다 훨씬 더 뇌의 밑바닥에 눌러붙어 잠족해 있다가, 의식보다 훨씬 먼저 즉각적으로 튕겨올라와 감각과 삼리를 뒤흔들어, 피하고 찡그리고 움찔거리는 몸의 반응과 증상/병증까지를 우선 만들어내버린다. 부지불식간의 일이어서 벗어나기 어렵다. 191

 

타자의 외모를 비롯해 바깥을 향한 사회적 자아는 소위 정상성에 저항하는 말과 글로 의식을 관리해왔다. 하지만 내 몸을 향한 사적 자아는 정상성에 발목 잡혀 65세 자신의 이빨 사정에 대해서는 흉측하다는 느낌을 냉큼 수용하며 투항해버리는 이율배반. 그 이율배반의 한편에서 의식 말고 감각은 자신의 흉측함을 놓고는 공포감에 몸 반응까지 동원해 멸과 해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보는 자기애. 그 자기애와 이타와 공존을 만나지 못하고 편향성을 띠다보면 이기를 넘어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 적자생존와 인종주의와 종차별주의, 우생학과 파시즘과 전쟁 등 광기의 정치사회로 이어진다. 192

 

그러니 자기애에서 촉발된 두려움이나 공포감을 뒤늦게라도 늘 돌아보아야 한다. 흉측한 치아나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사유는 대부분 빈곤이다. 그 흉측함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빈곤으로 인한 생애 내력과 심리적이고 일상적인 사정들이다. 이를 반복해 돌아보고 가능하며 뒤늦게라도 감수성과 태도를 거듭 계발한다면, 갓난 아기 때부터 생긴 심리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에서 차차 벗어날 수 있다. 그 벗어남이야말로 나의 취약함에서 나아가 다양한 소수자들을 연결하는 끈을 만들고 잇는 일이며, 평화와 공존과 순환의 시작점이고, 우리의 불안과 고착된 감각과 고정관념을 이용해 돈을 갈취하고 권력을 확장하는 세력들에 대한 대항이다. 대항이나 저항까지 못하더라도 온갖 흔해빠진 미용과 성형 산업,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동안은 물론 죽음 후까지 쫓아와 고지서를 내미는 실버산업과 의료산업과 장례산업에 속고 사는 줄이나 알고 속으며, 불가피한 타협 정도에서 멈추자는 거다. 193 

 

만 65세가 되자마자, 대문니 두 개에 임플란트를 하는 수술을 시작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어 80여 만원이 들어가 예정이다. ... 결과적으로 대문니를 놓고 벌여온 타인의 시선과 나 사이의 싸움에서 나는 고스란히 완패했다. 완패를 인정하니 속 시끄러움이 사라졌다. 내 사람됨은 그 정도이며, 나는 노속인이나 빈곤으로 인해 치아가 엉망이 된 주변 사람들과 처지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한다. 그 처지의 차이에 늘 예민하게 서 있자. 198

 

이가 아예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과 입속은 자주 대해 익숙하면서도 내 상태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것은, 이율배반적인 자기애인가 싶다. 200 

 

이종 간 반려에 대한 이견

 

... 그러던 어느 날 그 생각이 들었던 거다. '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창문으로 내다보기만 해도 갖은 나무들과 풀과 꽃과 농작물에 동물 들까지 널려 있고, 조금만 걸어나가면 저멀리 풍경으로건 바로 눈앞에서건 즐길 수 있는 마당에, 나는 뭐한다고 이 화분들을 돈을 들여 사서 집안에 들여 놓고, 그 관리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다가, 이제는 그 관리에 몸이 지치고 마음이 심란스러운 지경에 빠진 것인가? 이는 소유욕으로 인한 존쇄였다. 특히 나로서는 갖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한 소유욕이었고, 그 욕구를 채우고 소유를 확인하기 위해 바깥에 널린 것들을 구태여 사람 살기에도 넓지 않은 공간에 들여놓고야 마는 독점욕이었다. 232

 

나는 그러한데 다른 사람은 다를 수 있다. 소유나 짐이라는 느낌이 들기보다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을 통해 정서적 위안을 받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비용과 시간과 에너지와 감정을 들여 가까이 두고 보살피며 사는 것이 그 사람다운 삶이려니 한다. 다만 내 경우 두 이이를 키우고, 이후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내가 책임질 돌봄노동으로 인한 긍과 부는 상당히 채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년 이후에 돌봄받기를 전혀 떠올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 목숨의 끝을 개인적, 사회적 자립과 역활이 어려워지는 시점에 자유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두고 있는 나로서는, 돌봄을 받는 것에 대한 구체적 상상이나 기대는 거의 하지 않는다. ... 개인적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과 주변에 지울 짐 사이에서, 자유 죽음의 적정한 시점을 가늠할 작정이다.이는 물론 내 목숨에 대해서일 뿐이며, 타인이 어디까지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각자도생과 고령사회가 만들고 있는 불균형한 세상에서 생명들의 생태적 순환과 돈과 물질의 사회 환원에 관한 개인과 사회의 전환이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인간이 아닌 돈을 목적으로 무책임하게 발전하는 의료과학의 컨베이어벨틍서 내려서는 결정이 확장되어야 한다. 더욱이 코로나 19 팬테믹을 통과하면서 생태적 환대로서의 늙음과 죽음, 그 일면인 생태적 자유 죽음에 대해 더 확신이 깊어졌다. 234

 

다른 한편, '반려'동물을 대체 어떤 동물들이며 몇몇 동물들은 왜 반려동물이 아니라고 분류되는가? 결국 인간 중심의 이유와 판단으로 반려와 비반려가 결정된다는 면에서 여전히 인간 중심의 인식틀에 갇혀 있다. 게다가 나는 반려동물들이 정말 자기 가진답게 살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맞게 선택당하고, 의학적 처리를 당하며, 반려와 돌봄이라는 이유로 가두어지고, 자신의 본능이나 욕망과는 다른 방식, 다른 경로로 사람들이 주는 사랑이나 돌봄 등을 받는 입장에 놓인다.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고 훈련되면서 개체 고유의 자기다움은 점점 제거되어간다. 나는 이종 간 '반려'라는 것 자체가 과연 평등하고 공정한 관계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의식이 있다. 길고양이는 짧게 살고 반려 고양이는 상대적으로 오랜 산다고 하느데, 오래 사는 것이 생명의 목적인가? 235

 

나는 우선 반려 자체에 대해 별다른 욕구가 없다. 그것은 동종인 인간뿐 아니라 이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독거란 내게 외로움이 아닌 내가 선택한 고독과 자유다. 그리고 내 구체적인 관심은 그나마 내가 잘 알 수 있는 동종에 집중되어 있다. 동종인 인간에 대한 태도와 의문의 연장 속에서 이종에 대한 태도와 의문을 가늠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내 문제의식은 이종 간 뿐 아니라 인간 동종 간에도 반려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에 있다. 모든 다른 존재 간에는 자마재적이든 노골적이든 다양한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반려'라는 말의 남발은 관계 속 소수자나 소수자성을 삭제한다. 또 바람직한 관계라고 퉁쳐버리거나 인정받고 싶은 기득권자의 발화일 수 있다. 236

 

늙어가는 몸에 대해서

 

글쓰는 일과 상관없는 일상이나 필요는 최대한 단출하게 하고 산다. 하여 원룸에서의 독거는 최상의 조건이다. 소위 사람 노릇이라는 걸 피할 수 만은 없어 몇몇 역할을 하거나 몇 가지 살림살이를 지니고 살지만, 안 하거나 없어도 그만이라는 주의여서 혹 그것마저 떨굴 기회가 오면 대체로 땡큐다. 글쓰고 강의하며 먹고살 만큼은 돈을 벌어 다행이고, 그 돈이 만지 않으니 돈 쓰는 맛에 대한 유혹도 없다. 목숨 또한 일상 비슷한 것이어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필요사항이다. 차차 질병과 장애가 동반되어 더 늙어가다가 글쓰기를 중심에 둔 활동들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전에 급사나 사고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즈음에 자유 죽음을 선택할 생각이다. 257

 

'자유 죽음'에 관하여 

 

평소 내 죽음에 대한 작심은, 몸과 정신 능력의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죽음을 집어들겠다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 대한 기준은 '자존 능력'과 '사회적 쓸모'다. 물론 자존에는 타인의 도움도 어느 정도는 포함된다. 건강하든, 병들거나 장애가 있든,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의존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회적 쓸모가 없어진 이후까지 타인에게 의존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 육십이 넘으면서는 구체적 방법이나 장소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좋은 거라면 죽음 자체는 명확히 알리되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찿을 기도조차 할 여지가 없는 방법이겠지만, 그런 방법은 아직 못 찿았다. 280

 

나는 자실(자유 죽음)에 대해 죄는 고사하고 권리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줄 충격을 줄이기 우이해 미리 소신을 설명할 필요는 있겠다. 죽음에 관한 글이나 토론 자리에서, 자유 죽음에 대한 내 소신을 자주 이야기한다. 코로나 19를 지나면서 글과 강의에서 더 확고하게 자유 죽음에 관한 소신을 거론하고 있고, '생태적 환대로서의 자유 죽음'이라는 문과와 함께 남들에게 권장까지 한다. 280

 

내 자식과 그의 배우자는 처음에는 듣기 싫어해씨만 여러 차례 명확히 말해왔고, 2020년부터는 자유 죽음에 대한 동의와 더불어 죽음 의례가 족에게 회귀되지 않을 공영장례에 대한 합의까지 이루었다. 280

 

자살을 무겁고 어둡고 비참한 개인적 사회적 행위로만 일반화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많은 자살에 대해 구조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타살의 여지를 주시해야 하지만, 사회적 타살만을 갇다붙여 설명하고 마는 것은 개인의 자유는 물론 권리를 삭제하는 일이다.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면서 죽음만을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자유 죽음에 대한 내 소신과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생애가 그렇듯 죽음도 각자에게 고유하다. 281

 

나는 죽움에 대고 툭하면 붙이는 '애도'니 '존엄'이니 하는 애매한 치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빈곤운동 진영이 무연고사나 고립사에 대도와 존엄을 일단 붙이고 보는 것 역시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애도의 진정한 의미는 죽은 이의 삶과 죽음의 긍과 부가 후대에게 기억되고 재해석되고 논란되어, 후대가 그 죽음을 제대로 밟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282

 

섣부른 애도와 죄책감은 모든 생애와 죽음마다 연루된 사회와 정치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죽은 자에 대한 사 자들의 몫이라면 기억과 (재)해석과 책임감이다. 283

 

스스로를 궁극적으로 파괴하고자 하는 순간에야말로 인간은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자살은 자유 죽음이기도 하다. 굴욕과 수모에 짓줄리다 죽음을 결단한 타인 앞에서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는 이미 자신과 타인들의 그 비숫한 말에 숱하게 속아왔을 터다. 대체 왜 마침내 죽음이 알아서 올 때까지 일단 살아야 하는가?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대체 누가 감히 더 견디라며 무책임한 조건을 할 수 있는가? 283

 

어떤 사람에게 자실은 마지막 존엄과 자유룰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체적 결단이고 실존적 행위다. 자유 죽음은 자유와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이 최종에 선택하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결단이다. 그들은 자살로 자신들읭 몫을 마치고, 남은 자들은 따로 또 같이 자신들의 몫을 살아낼 뿐이다. 284

 

평생을 산에서 살았던 한 노인은 때가 되면 빈 몸으로 산속으로 들어가 기운이 다할 때까지 걷가 쓰러져 짐승의 밥이 되겠다고 말해왔고, 어느 날 산 속으로 사라졌다. 바다에 투신하는 사람들의 소신도 그와 비슷하다. 바다짐승들의 먹이로 몸을 내어주는 것이다. 

 

무책임한 의료과학과 실버산업의 확장 속에서, 자유 죽음은 자신과 세상을 마지막까지 직면하고 대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부조리에 저항하는 삶과 생태 순환을 위해 자유 죽음은 더 활발하게 토론되어야 할 의제다. 286

 

3부 희망없이, 하염없이

- 홈리스 곁에서, 살며 싸우며 

 

홈리스 현장에서

 

듣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어떻게 질문하며 어떻게 경청하느냐에 따라 생애 이야기와 느낌과 해석은 아주 달라진다. 가난을 상수로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빈곤은  밑천이자 해결해야 할 일상이다. 빈곤에 따라붙는 고통과 질병과 못 배움 역시 현실이자 밑천이다. 빈곤을 바라보는 빈곤하지 않은/덜 빈곤한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과 느낌과 해석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빈곤을 밑천으로 전략하며 몸소 갈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말을 얻어드는 일은 개인적으로 '더 추락해도 살아지겠구나'하는 안심을 얻고, 사회 속 저력(밑바닥 힘)을 확인하는 탐문이기도 하다. 334

 

여기는 노숙인 광장이다

 

서울역 광장에서는 매년 12월 22일 동짓날, 거리와 쪽방에서 살다 죽어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홈리스 추모제'가 열린다. 돈과 가족이 최고라는 세상에서, 공리를 위해 그들을 삭제하려는 힘에 맞서 홈리스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저항의 추모제다. 344

 

노숙인 광장 사람들은 미래에 희망을 걸 여지도 가능성도 없고, 그 김에 미래 따위에 삶을 저당잡히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다가 어느 날 죽음으로 들어간다. ... 미래없음이라는 그들의 상시적 내난 상황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오늘을 살게 하는 동력이며, 그 재난 공간의 작은 구석에서 조건 없는 호혜와 자유의 실천을 오늘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344

 

광장 안 사람들은 바깥사람들과는 다른 욕망을 품고 다른 질서와 다른 관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동류와 모인 곳이니 남들의 시선에서도 한결 자유롭다. 누구는 이 광장을 노숙자들의 소굴이니 서식지니 부르지만, 뒤집으면 점거와 점령이기도 하다. 돈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가족과 집에서도 떨려난 이상하고 불온하며 일탈적이고 비정상적인 잉여들, 차우로도 더 모이고 확산될 잉여들의 비규범성이야말로 노숙인 광장의 특성이자 힘이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끼리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배우고 알려주며 '함께 모여 사는 곳'이다. 서울역 노숙인 광장은. 345

 

희망없이, 하염없이

 

우선 개인 차원의 꿈이 없다. 67년이나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좋고, 언제 집어들거나 도착할지 모를 죽음끼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돈은 있다고 여겨져, 생존에 대한 불안도 더 갖고 싶은 욕망도 없다.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먼저 추락한 사람들 덕에, 더 추락해도 그럭저럭 살아지겠구나 싶다. 그러다가 죽음이 오면 마침내 끝이어서 나름 또 좋은 거다. 348

 

개인을 넘어 사회에 대한 꿈도 없다. ... 내 생애 동안 제대로 된 진보 정치가 안정적으로 제3당의 자리를 잡으리라는 꿈도 접었고, 그러니 국가에 대한 일마의 희망도 접었다. 349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벌거벗은 존재들에 대한 정책은 없이 거짓말만 해대며 재벌들을 위한 정책부서 역할에 더 노골적으로 충실한 테고, 그 대가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잡아넣으며 번갈아 정권 재창출이든 탈환이든을 위한 돈과 인물의 카르텔을 확장할 거다. 

 

제도정치에 희망을 접고 탈당한 후, 나는 남은 인생이 아주 간단해졌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회대한 즐기다 죽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고 싶다. ... 지난 35년여의 사회운동과 특히 최근 10여 년의 구술생애사 작업 과정에서, 어둡고 지저분하고 위험하다고 분류되는 사람과 장소에 대한 끌림이 나를 이루는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점점 더 그 촉과 정체성이 확실하고 중요해졌다. 게다가 그 촉의 출발 지점이 내 속 상처와 어두움과 혼돈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헐벗은 존재들과 장소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두터워졌다. 사실 이제는 떠날 돈도 관계도 없어졌다. 

 

믿을 거라곤 돈과 가족밖에 없다고 아우성들인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 사회에서 맨 끝자리로 밀려나 몸도 마음도 망가져, 이젠 근로자로도 가족으로도 회복가능성이 없고 의지마저 잃어버린 사람들과 그들이 모이는 장소야말로, 페미니스틘 내가 장차 5년의 내일을 떠나 늘 다시 쫓아가 함께 뒤엉켜 즐겁게 놀며 질문을 이어갈 곳이다. 

 

예를들어 서울역 노숙인 광장은 생명의 군본 욕구이자 필요불가결한 조건인 먹고 잠자는 일 자체가 매일매일 재난인 사람들이 모인 장소다. 게다가 사회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빈곤이 유일한 밑천인 사람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적어도 21세기 정치가 그들으 거리에서조차 쓸어내 사회 바깥에 가둬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전국 곳곳에서 점점 더 모이고 확산될 것이고, 그들이 모이는 광장의 수도 늘어날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가족중심주의가 이 사회의 근본 문제라면, 그 대열에서 쫓겨나 회복가능성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이는 노숙인 광장이야말로 근본적 변혁의 살마리를 엿볼 수 있는 장소다. 352

 

그곳은 광장 바깥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합의 되고 통용되는 가치관과 욕망과 규범과 질서가 깨져버린 재난 공간이다. 내일도 꿈도 희망도 없이 늘 위험하고 불온하며 지금 당장의 불행과 다행만으로 삶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공간이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견지할 태도는 '희망 없음'과 '하염없음'이다. 어떤 실패나 실패들의 반복에도, 애초에 희망이 없었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 있는 것 털고 생기는 것 받아 함께 즐기며 놀다보면 다시 힘이 날 테고, 기회 봐서 가진 자들을 향해 한번 더 싸우면 된다. 성취를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없고, 요행히 어떤 성취가 오면 달콤하게 즐기면 된다. 어떤 실패에는 신경질도 나고 쌍욕도 내지르겠지만, 그건 사느라 싸우느라 그런 거다. 재난의 와중에도, 아니 재난이어서 오히려 더, 소위 하느님 나라니 유토피아니 하는 것들이 문득문득 보인다. 재난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 재난에서 재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러라고 하자. 그들 역시 자기들 몫의 재난을 살다 결국 죽을 거다. 어차피 피할 수 없고 닥쳐버린 재난이라면, 그 안에서 불행을 뒤지며 불안해하느냐, 다른 가능성을 보고 즐기느냐는 생애를 털어 얻어내는 관점과 태도의 문제다. 353

 

홈리스, 정신장애인,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들과 함께 놀려면 경계를 넘어 내 길을 벗어나야 한다. 우선 내 삶의 터전과 언어를 떠나야 하고, 계급에 대한 관점과 페미니즘도 찢으며, 양심이니 윤리니 상식 따위는 물론 질병과 장애에 관한 규정과 구분도 의심하면서 처지에 주목해야 하고, 법과 사회질서가 누구를 위한 질서이고 보안인지를 노려보아야 한다. 여성다움이 학습된 거서이라면 어떤 피해자성 또한 학습된 것이라는 의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여성 홈리스 영주에게 몸과 성은 좀 나은 잠자리와 한끼 밥을 얻기 위한 협상 수단이기도 했다. 임신을 그저 재수에 맡길 수밖에 없었고, 그 재수는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다. 꼭 한 번 낳을까를 고민했는데 자신이 없었고, 여러 차례의 임신중단을 거쳐 요즘은 피임시술을 하고 있다. 성폭력이나 성매매라 할 것도 없는 하룻밤들에 대해 낙인이나 자괴 따위도 없다. 자유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생존 존략이다. 살아내느라 생긴 힘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353

 

모든 '비정상'에는 우울과 분노, 도발과 저항이 뒤엉킨다. 삿대를 단단히 쥐고 마음과 삶의 향방을 최대한 주도할 일이다. 불온함과 변태야말로, 돈과 가족이 최고라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재난을 즐겁게 통과하고 다음 재난을 맞이 할 힘을 키우는 잉여들읭 가오다. 불온함이란 사상이나 태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향을 말한다. 진정한 인간의 길은 불온한 잉여들이 만들어 낸다. 하염없이 희망 없이, 때론 전략적으로 좀 쉬면서, 우리들의 놀이판을 벌이며 싸우자. 즐겁게 놀며 싸누는 것이 사는 맛 중 최고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 끝에 죽음을 만나거나 적당한 때에 죽음을 집어 들면 된다.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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