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의 약속: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사라 아메드
목차
서론 왜 하필 지금 행복을 이야기하는가
1장 행복의 대상
2장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3장 불행한 퀴어
4장 우울증적 이주자
5장 행복한 미래
결론 행복, 윤리, 가능성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지금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
서문, 왜 하핗 지금 행복을 이야기 하는가
이 책을 이끌어가는 질문은 행복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 이다.
행복의 역사는 연관 짓기(연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행복을 소망할 때 우리는 행복과 연관돠 것들과 연관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행복과 연관된 것들을 갖게 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약속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목표로 하게 된다.
행복은 하나의 일관된 세계를 형성한다.
행복은 세계를 만드는 형식이다. 행복이 어떻게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돼 왔는가,
행복한 주부상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행복한 노예 신화에 대한 흑인들의 비판, 이성애를 가정의 지복으로 감상화하는 것에 대한 퀴어들의 비판은 내게 행복과 그것이 호소력을 갖는 조건들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14
이런 비판의 배후에는 행복의 불행한 효과들을 폭로한 연구와 운동의 오랜 역사가 있으며, 이는 우리에게 행복이 어떻게 사회적 규범을 사회적 선으로 재기술하는 데 이용되는지 가르쳐 주었다. 14
왜 행복이 문제인가? 왜 지금 문제 인가? 우리는 분명 지금 행복으로의 전회 상황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5
행복으로의 전회
행복학과 행복 경제학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치유 문화와 자조 담론의 인기
긍정 심리학과 동양 전통 특히 불교에 대한 해석에 기댄 행복해 지는 법 강의와 책들, 보다 충만한 삶을 약속하는 자기 개발서와 CD
행복 산업
지구촌 행복지수, 각국의 행복 지수를 조사한 보고서 발표
정책과 통치 체계의 변화
. 부탄 국민총행복지수
. 국내총생산 외에도 참진보지수라는 것이 추가됨.
행복은 진보를 측정하는 더 그럴듯한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행복이 긍극적이 성과지표라 할 수 있다.
행복 연구가 그 자체로 학문 분야로 자리잡게 됨. 각 학문 분과에서 행복으로의 전회를 목격할 수 있다.
신행복학
. 고전적 영국의 공리주의, 벤담,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
. 아덤 스미스, 비참한 평등에서 행복한 불평등으로
공리주의는 분명 행복도가 진보의 척도라는 원칙을 지지한다.
행복의 정의, 행복이란 기분이 좋다는 느깜이고, 고통이란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이다.
행복의 측정, 행복 리서치,
자기-보고에, 주관성 모델에 기반한다.
행복학은 소위 행복 지표 같은 것을 만들어 내면서 행복의 정도와 사회적 지표 사이에 상관관계를 만든다. 20
기본적 행복 지표 중 하나는 결혼이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로 해석되면서 장려의 근거가 된다. 만일 우리가 행복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장려할 의무가 있다면, 이 때 행복은 그 자체로 의무가 된다. 21
놀라운 것은 행복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사회적 이상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정치적 삶에 대한 그 이상들의 지배력을 재활성화한다는 점이다. 행복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그런 사회적 이상으로 되돌아가자는 요구로 표현된다. 마치 행복의 위기가 그 이상들의 실패를 말해주기 보다 그 이상들을 따르지 못하는 우리의 실패를 말해주는 듯 말이다. 22
긍정 심리학
행복이 훈육 기법이 되는 방식.
긍적적 기반은 우리를 불안, 우울 및 기타 부정적 상태에서 벗아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단련하는 기획, 자기 영혼을 통치하는 기획.
기분 유도 기술
개개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 행복해져야 한다.긍정 심리학은 이 기획을 권리라기 보다는 책임이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행복 추구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있다. 25
이 길을 따라가면 당신은 쾌락과 만족이라는 전원지대를 통과해, 힘과 덕이라는 고지대를 지나, 마침내 성취의 최고봉 즉 삶의 의미와 목적에 이르게 된다. 25
행복은 올바른 길을 따라가는 형식이 된다. 25
행복을 낙관주의와 동일시한다.26
행복한 사람이 더 이타적이다.
행복과 낙관주의, 행복과 이타주의 사이의 상관관계가 행복 그 자체의 원인이 되는 인과관계로 전환된다. 즉 행복은 우리를 덜 자기중심적이고 더 낙관적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며, 그러면 다른 사람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식이다. 26
긍정 심리학은 행복을 기술로서 도구화한다. 긍정심리학이 종종 행복을 상품으로 기술하면서 경제학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26
행복 프로필
로렌 벌란트, 행복에 관한 판타지
어리석은 낙관의 형태로서 특정 형식의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에 적응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행복이 보장될 거라는 믿음.28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개념
비판, 세상으로의 몰입에 단순히 심리적 속성만 있는 건 아니라면 어쩔 텐가? 어떤 신체들이 세상을 저항적인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 이유가 세상이 어떤 신체들을 다른 신체들 보다 더 잘 수용하기 때문이라면? 특정 신체들에게는 공간으로의 몰입을 가능케하는 바로 그 삶의 형식들이 다른 신체에게는 스트레스로 느껴진다. 30
불행 아카이브
행복 산업에 대한 비판들, 고전적 덕 개념으로 복귀하자는,
" 오늘날 우리는 나약하고 얄팍한 행복에 정착해버렸다. 이것은 , 단순한 쾌락의 향유에 불과하다."
행복과 선의 연관을 지속시킬 뿐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복이 다른 형태의 행복보다 낫다고 주장한다. 31
나약한 행복과 강인한 행복 개념은 분명 도덕적 구분이다.
고전적 행복 모델에서 눈에 띄는 점은 더 고차적 형태의 행복은 정신과 연결돼 있으며 더 낮은 차원의 행복은 신체와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행복의 위계는 기존 사회적 위계에 상응한다. 31
우리 시대의 행복 문화를 공포스럽다고 표현하는 태도에는 계급적 공포가 어려있다. 31
그리스 고전 철학에서 좋은 삶의 모델은 배타적 개념에 근거함.
. 아리스토텔레스, 좋은 삶이란 관조적 활동에 전념하는 삶. 32
행복 관념, 도덕적 사회적 구별짓기를 포함할 수 밖에
내가 의심하는 바는, 잃어버린 대상으로서 행복에 대한 애착이 단순히 애도의 형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행복하면 안되는) 사람들이 행복해 할 수 있다는 불안, 심지어 올바른(행복해야 되는) 사람들 (아마도 철학을 위한 시간과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행복을 돌려줘야 한다는 욕망을 포함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32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지 생각본다. 행복은 이 세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형식이 아닌가?
철학자들이 철학자의 삶에서, 사상가들이 사고하는 삶에서 행복을 찾는 경향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행복은 좋은 것이다라는 믿음을 유보한다.
왜 행복이 좋은 것이 되는지, 무언가를 좋은 것이 되게 하는데 행복은 어떤 식으로 가담을 하는가?
대린 M. 맥마흔, <<행복의 역사>>, 행복과 좋은 느낌을 연관 짓는 것은 근대적 현상이다.
이 책에서 내 과제는 느낌이란 게 어떤 식으로 어떤 것들은 좋은 것으로 만들고, 어떤 것들은 나쁜 것으로 만드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33
감정과 정서에 관한 페미니즘 문화 연구.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했던 주장들을 발전시켜 나는 느낌이 어떻게 대상에 귀속되고, 그 결과 특정한 대상을 행복의 원인이나 불행의 원인으로 만드는지 탐색해보려 한다. 느낌은 단순히 주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해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함께 머무는 공간에서 대상들이 만들어내는 인상들, 그것이 느낌이다. 33
나는 행복의 약속(이런 저런 식으로 행동하면 행복이 따라온다는 약속)이 우리를 어떻게 이끄는지 살펴볼 것이다. 행복의 약속은 특정 대상들을 더 가까이 하게 만들며 우리 주변을 둘러싼 세계가 형성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34
철학의 역사는 행복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행복은 철학 내부에서 의문에 부쳐지지 않은 유일한 철학적 목적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35
철학에서 행복의 지위는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다. 행복은, 그게 무엇이든,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철학을, 스스로를 철학의 계승자로 자처하면서 철학적 역사들을 다루는 텍스트들 덩어리라고 생각할 뿐아니라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련의 관념, 사유, 서사, 이미지, 인상들을 모아 놓은 '행복 아카이브'라고도 생각한다. 35
이 책 <<행복의 약속>>은 맥마흔의 역사에 특정한 관점에서 본 또 하나의 역사, 일반 역사 안의 특정한 역사를 보충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일반적인 관점을 취하면 무엇이 삭제되는 지 고려해 봄으로써 행복의 지성사 - 한 관념의 역사로서의 - 에 어떤 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인지, 거기서 지워진 것을 봄으로써 기존의 관점을 바꿀 수 있을 것인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행복의 일반적 역사 그 자체를 특정한 것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예를들어 맥마흔의 지성사(행복을 지성사로 취급할 경우)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혹은 나타나지 않는지 주목해 보자. 참고 자료가 하나 발견되는데, 그것은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이다. '여성'이라는 범주에서조차 남성의 계보학으로, 유럽 백인 남성의 유산인 철학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다. 38
내 목표는 불행에 역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침한 자들의 관점에서 행복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까? 이방인의 슬픔은 행복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해줄 수도 있다. 39
나는 단순히 행복의 지성사에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역사에서 추방된 사람들, 단지 말썽꾼, 반대자, 분위기 깨는 자로서만 그 역사에 집입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고려함으로써 대안적인 행복의 역사를 제기해보고자 한다. 39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장에서 내가 인용한 책들은 거의 대부분 1980년대 말에 여성의 글쓰기 수업에서 처음 마주친 책들이다. 이후 나는 늘 이 책들과 함께 했는데, 그것은 그 책들이 젠더를 상실로 의식하게 되면서 느끼는 슬픔을 너무나 절절히 보여 주기 때문이었다. 40
<<조이 메이커>>를 읽고 나자 <<멋진 신세계>>를 다시 읽게 되었고 거기에서 제기한 "불행할 권리"에 대한 정치적 요구를 숙고해 볼 수 있었다. 41
늘 내 마음을 사로잡는 발화 행위 중 하나는 "난 단지 네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라는 말이다. 어릴 적부터 난 이 말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마주치게 될 또 다른 표현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네가 불행해지는 건 못 참겠어",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네가 행복해 하는 걸 보고 싶어", "나 때문에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이런 말들을 따라가 봄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 좋은 것이라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종류의 세계가 형성되는가를 보여 주는 게 바로 내 목적이다. 42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행복과 불행이 시간에 따라 그리고 공간적으로 어떻게 분배돼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좋은 주체가 된다는 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행복 - 원인으로 인식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나쁜 주체가 된다는 건 분위기 깨는 자killjoy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분위기 깨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고 그런 장소에 몸담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말하려는 시도이다. 43
1장 행복의 대상
행복은 항상 우리가 대상을 향하게 한다.
이 장에서 나는 대상이 어떻게 행복이 되는지 마치 어떤 대상에 근접하면 행복이 따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서, 대상 지향성
17 세기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 그는 좋은 것(선)이란 "우리 안에 쾌락을 가져오거나 증가시키는 성향이 있는 것 혹은 고통을 감소시키는 성향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49
좋은 것이 쾌락을 야기하는 게 아니라, 쾌락의 경험이 어떤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로크의 주장은 데카르트의 정념 모델과 스피노자의 정서 모델과 일치한다. 둘 다 대상이 어떻게 신체와의 접촉을 통해 가치를 획득하는지 잘 보여준다.
스피노자, "우리는 우리 존재의 보전에 기여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존재의 보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악이라 한다. 말하자면,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능력을 증가시키느냐 감소시키느냐 촉진하느냐 억제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선 또는 악이라 부른다"
데카르트, 어떤 것이 우리에게 해가 되는지 득이 되는지의 문제는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가의 문제다.
수전 제임스, "마음 바깥에 있는 대상들을 향한 정념에 포함된 선과 악의 평가는 해석되기만을 기다리며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50
행복은 우리와 가까운 영역, 우리 주변을 형성하고 있는 세계를 친숙한 것들의 세계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대상들은 우리의 신체적 지평 안에 둥지를 튼다. 신체적 지평이란 좋아하는 것들의 지평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우리는 거리를 둔다. 거리 두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지평의 가장 자리를 확립한다. 51
행복은 현상학적 의미에서 지향적이고(대상을 향해 있고), 정서적이다(대상과 접촉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행복이란 우리가 접촉하게 되는 대상들을 향한 정향이라 할 수 있다. 52
행복은 근접성을 통해 대상을 생성해 낼 수 있다. 행복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것이거나, 의식 속에 주어진 대상들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53
나는 행복이 특정한 종류의 지향을 포함한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것을 "목적 지향적인" 것으로 설명하려 한다.
행복은 종종 우리가 목표로 하는 "무엇", 종착점, 심지어 목적 그 자체로 기술된다. 54
만약 우리가 도구적으로 좋은 것들을 행복 대상으로 생각하면, 중요한 결과가 따라온다.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들이 좋은 것이 되거나 좋은 것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대상은 '행복 수단"이 된다. 또는 행복 지시자가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마치 그것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수단을 제공하는 대상이 있고, 우리가 이런 대상을 향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어디 다른 곳, 즉 그 대상에 따라 오리라 생각하는 행복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뒤에 따라온다는 시간성은 정말로 중요하다. 행복은 나중에 올 무엇이다. 55
약속
우리가 그 어떤 것에 도착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기 때문, 즉 행복이라는 목적에 대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행복을 지시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아는 걸까?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이 정서와 연관돼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상에 의해 꼭 좋은 방식으로 변용되지 않고도 행복에 이를 수 있다. 56
우리는 어떤 대상을 아직 즐거운 것으로 경험하지 못했다 해도 그 대상을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 이는 결국 아직 마주치지 못한 어떤 것들에도 정서적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인간이 지닌 상상의 힘인 동시에, 사회 세계의 힘이다. 57
니체, <<권력에의 의지>>
인과성에는 회고적 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정서(통증)을 경험해야 못을 알아차릴 수 있다. 느낌의 대상은 느낌보다 뒤쳐저 있다. 우리는 대상을 정서의 원인으로 파악한다. 정서와 대상 간의 근접성을 습관을 통해 보존된다. 57
니체가 말한 정서의 회고적 인과성은 바로 기대 인과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전환된다. 대상이 우리 자신이 경험한 게 아니라 해도 근접성의 가치를 획득하면, 우리는 심지어 회고적이 되지 않고도 어떤 정서를 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는 공포-원인이 도착하기도 전에 대상 근처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 대상 때문에 행복해 지리라 기대하기도 한다.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만나기도 전에 "행복-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행복을 가져오리라 기대되는 사물들을 향해 있다. 즉, 그것이 좋다는 판단이 그것과의 마주침보다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런 대상들로 향하게 한다.
따라서 좋은 것이 쾌락을 유발한다기 보다 쾌락을 유발하기 쉬운 것들에 대해 좋은 것이라는 판단이 이미 선행돼 있다고 말할 수 있다. 58
나는 어떤 특정 대상이 "행복을 준다"는 판단이 그것을 마추치기도 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대상들은 행복 원인으로 여겨진다. 이는 그것이 이미 "마주치기도" 전에 사회적으로 좋은 것(재화)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뜻이며, 우리가 애초에 그것을 마주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말이다. 59
행복은 뒤따라 올 것에 대한 기대이며, 이 기대는 그 대상이 현재 있든 없든 관계없이 그것들을 구분 짓는다.
행복은 특정 대상으로서의 근접성을 통해 약속된다. 59
행복의 약속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한다. 즉 만약 당신이 이것 혹은 저것을 가지고 있다면 또는 당신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면, 행복은 따라온다는 것이다. 니체는 내가 행복의 약속이라 부르는 것을 종교와 도덕의 기본 공식으로 해석한다. 60
만약 행복이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라면, 이때 행복은 로크가 불편함이라고 부는 것을 수반한다. "지금 그것을 즐기면 즐거울 텐데 하고 생각되는 어떤 것이 없을 때" 우리는 불편하다. 단순히 행복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그런 애기가 아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이.... 그것의 결여 속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 우리에게 그것은 좋은 것이 된다. 사실 마음의 불편함이 훨씬 더 강력한 것이라고 암시한다. "더 큰 쾌락에 대한 예상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보다 살짝 데인 느낌이 더 강력하게 우리를 밀어붙인다" 63
욕망과 불안의 근접성 <- 정신분석
행복의 우발성 또한 행복의 성취를 어렵게 한다. 행복은 일의 우연발생을 제거할 수 없다.
욕망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약속해 주는 것,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인 동시에 결여돼 있는 것, 그것이 분명히 실현되는 듯한 바로 그 순간 조차 결여돼 있는 것이다. 63
지젝, 행복은 "본질적으로 위선적"이며 자기기만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 대상으로서 "준비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준비돼 있지 않음 때문에 욕망하는 대상은 그렇게까지 욕망할 만한 것이 된다. 원하는 무엇을 얻지 못함으로서 당신은 "그 무엇"의 행복을 판타지로 간직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준비되면 그것을 가질 수 있기라고 할 것처럼 말이다. 64
이런 이유로 욕망의 장애물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해지리라는 판타지를 지켜주는 심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행복이 좋은 삶을 약속해 주는 것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 또한 행복의 장애물 때문이다. 그것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행복했을 것처럼 만들기 때문이다. 64
행복은 발견해야 할 것이라기 보다는 따라가야 할 것이다. 행복은 "그게 무엇이든" 추구해야 할 것이되고 그 정서 상태는 그것이 주어지거나 발견되지 않아야 성취된다. 행복의 약속은 이 길을 따라가면 거기에 닿을 수 있다는 약속이다. 그 "거기"는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행복은 연기됨으로써만 사회적 약속으로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이 결국에는 우리에게 혹은 우리 후손에게 오리라 상상한다. 행복은 기다림을 견딜 만한 것, 욕망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행복 대상에는 불행한 상황에서도 긍정적 가치가 축적된다.... 부모는 행복에 대한 자신들의 희망을 자식에게 걺으로서 행복의 실패와 더불어 살 수 있다. 65
좋은 습관
대상은 단지 좋은 느낌만 체현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좋은 삶도 체현하게 된다. 좋은 삶은 어떻게 대상들과의 근접성을 통해 상상되는 걸까?
행복의 명백한 우연성 - 발생한 일의 우연발생 - 도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어디서나 행복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맛(취향)은 단순히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획득되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보여주듯이, 취향은 이미 좋다고 혹은 더 고급이라고 결정돼 있는 것에 의해 형성된, 매우 특정한 신체적 정향이다. 66
그래서 우리는 어떤 취향이 좋고 어떤 취향이 혐오스러운지에 대한 구분을 통해 어떤 대상이 더 고급인지 혹은 저급인지를 감별하는 법을 배운다. 기쁨과 혐오감은 신체적 지향인 동시에 사회적 지향이다. 67
정향된다는 것은 이미 고상하다고, 즉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즐길 만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대상에 끌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대상들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이미 기존의 정서적 가치를 지닌 상태로, 즉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가치가 부여된 채로 우리와 가까운 영역에 들어온다. 신체 역시 중립적 상태로 도착하는 게 아니다. 어떤 성향을 습득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이 아닌 어떤 것들에 대한 지향을 좋은 것으로 습득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 우리는 정서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에 따라 대상을 구별짓는 좋은 취향의 형식으로서 습관을 습득한다. 68
대상과 정서 사이의 연관이 습관을 통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좋은 취향들도 습관을 통해 획득한다. ... 우리는 기쁨을 경험할 때 그것이 기쁨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74
행복은 우리를 좋은 것으로 향하게 하면서도, 그 좋은 것이 당신에게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인상을 만들어 낸다. 74
사교적 행복
행복이란 우리가 어떤 것들을 마주치기도 전에 그것들을 좋은 것(재화)으로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들을 향해 방향 지어진 다는 것은 곧 바른 길로 방향 지어진 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방향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점이다.
펜클럽이나 동호회는 사회적 삶이 내포하는 것, 즉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사회적 결속은 항상 감각적이다. 만약 동일한 대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면 우리는 같은 길로 방향 지어져 있는 것이다. 이미 좋다고 평가된 대상에 의해 좋은 방식으로 정서적 영향을 받는 것, 그것이 정서 공동체에 속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같은 대상을 행복의 원인으로 보고 그것에 몰두함으로써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75
소외의 경험,
우리가 사회적으로 좋은 것으로 유통되는 특정 대상들에 행복이라는 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대상들에서 쾌락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가 되어 똑같이 올바른 길을 바라본다. 소외는 이렇게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들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쾌락을 느끼지 않을 때 일어난다 - 정서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실망, 분노
정서 이방인 affect aliens 82
감정적인 일(감정노동) emotion work
그런 경우 행복은 자기-생산의 기술이 되며,
행복은 불안정하고 심지어 도착적이다. 왜냐하면 행복은 대상이나 주체 내에 (긍정적인 거주의 형태로) 거주하는 게 아니라 사물들이 어떤 식으로 인상을 만드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85
이 책에서 내가 제기하는 주요 질문 중 하나는 그런 전환이 어떻게 일어나며, "누가" 또는 "무엇"이 나쁜 느낌을 좋은 느낌으로, 좋은 느낌을 나쁜 느낌으로 전환시키는가 이다. 우리는 서사를 정서적 전환의 한 형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서사를 통해 행복의 약속은 한 곳에 고정되는 동시에 분배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떤 신체들은 다른 신체들보다 더 많은 행복의 약속을 품게 된다. 86
행복한 가족
가족은 스스로가 결속돼 있고 또 다른 것들을 결속하는 행복 대상이다.
정서적 공명
행복한 가족은 행복의 신화 즉 행복이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신화이자 동시에 강력한 법적 장치로 시간, 에너지, 자원을 분배하는 방법이다. 가족은 또한 유산이다.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건 다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향한 정향을 행복의 원인으로서 획득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집단이 행복 대상들 주변에 단순히 응집한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올바른 것들에 의해 올바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아 우리가 물려받은 것을 재생산해야 한다. 87
가족은 구성원들의 단합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통해 행복 대상이 된다. 함께한다는 것은 식탁 앞에 함께 앉는다 혹은 똑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식탁은 가족이라는 형식을 유지시켜 주는 한 그 자체로 행복 대상이다. 그것은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가족에 사회적 집합으로서의 형식을 부여한다. 88
가족은 결국 아이가 양육되는 "곳", 아이가 올바른 습관을 배우고 그럼으로써 어떤 대상들이 아이에게 행복 대상이 되는 곳이다. ... 만약 부모 노릇이 아이들이 올바른 방향을 지향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아이들은 행복에 대한 자신들의 희망을 부모와 동일한 사물에 두어야 한다. 이 정향을 공유하면 가족은 행복 대상이 된다. 92
여기서 행복은 반복의 편안함, 이미 앞서 주어져 있는 노선을 따라 가는 편안함을 준다. 92
2장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행복한 주부는 행복이라는 기호 아래 노동의 흔적을 지워 버리는 판타지 형상이다. 여성들은 행복하며 이 행복은 그들이 하는 일의 이면에 존재한다는 주장은 젠더화된 노동 형태를 자연이나 법, 의무의 산물이 아니라 집단적 소망과 욕망의 표현으로 정당화한다. 95
행복한 가정주부의 판타지가 행복이라는 기호 아래 가사 노동의 흔적을 감춘 것처럼 가정에서 해방돼 행복해질 가정주부의 판타지도 "거품 가득한 설거지통"을 떠 맡아야 할 다른 여성의 노동을 감출 수 있는 것이었다.96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행복 자체가 어떻게 분배되는가보다는 행복 관념에 대한 상대적 근접성(예,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이다. 혹은 불평등하게 분배된 것은, 행복 자체라기보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느낌, 어떤 느낌의 약속, 어떤 약속의 느낌이 아닐까. 97
행복한 가정주부는 여성들이 욕망이 있어야 할 자리를 나타내는 가주어로서 여전히 그 힘을 유지하고 있고, 나아가 회귀하고 있다고까지 말 할 수 있다. 97
달라 샤인, <<행복한 주부들>>
하지만 행복한 가정주부에 대한 그녀의 판타지는 많은 면에서 과거에 대한 백인 부르주아적 판타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결코 현재로서 주어진 적 없은 과거에 대한 향수다.
여성들이 원치 않는 것의 사례로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을 언급하면서 샤인은 우리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받아들이라고 부추긴다. 98
행복한 가정주부를 자임하는 신세대 블로거들,
그들은 여성에게 페미니즘의 오류와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행복한 가정주부 이미지는 빼앗긴 뭔가를 되찾아야 하는 소수 주체로서의 그녀에 대한 서사 속에서 반복되며 정서적 힘을 축적한다. 이 정서적 힘은 행복한 가정주부 이미지 뒤에 말하지 못한 집단적 불행이 있었다는 페미니즘의 주장을 억누를 뿐만 아니라 거기 대항하는 주장, 즉 행복은 가정주부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녀가 하는 일 그 자체라는 - 가정주부의 의무는 이런 이미지를 수용함으로서 행복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는 - 주장을 수반한다.
<정말적 페미니스트 주부들>,
여성들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욕망을 갖게 된 것은 바로 페미니즘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장에서 나는 페미니즘과 불행 사이의 관계를 다르게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행복이 어떻게 젠더화된 노동 분업을 유지하는 주장으로 이용되었는지에 대한 성찰을 시작해 볼텐데, 그 출발점은 장 자크 루소의 교육에 관한 저작이 될 것이다.
행복한 가정주부는 매우 오랜 계보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형상으로 등장한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행복한 가정주부의 계보를 통해 우리는 불행한 가정주부 형상과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형상이 출현하게 된 정치적 지형을 되돌아볼 수 있다. 100
의식과 불행
나는 어떻게 페미니즘이 불행을 야기하는 것, 그리고 불행에 의해 야기되는 것으로 재현되는지 살펴보았다. 나는 페미니즘과 불행 사이의 연결 가능성을 외면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다른 사고 방식을 고려해 보고 싶다. 의식화란 불행에 대한 의식화라 할 수 있다. 게일 그린이 주장하듯이 교육을 통해 여성들의 기대치가 높아졌지만, 그것은 많은 여성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했다.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라는 엄격한 가정 이데올로기 때문에 좌절될 수밖에 없는 야망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129
실제 우리는 한계를 한계로서 경험해야 한다.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 사실 삶은 제한이 덜하기보다는 더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세상이 교육으로 열릴 가능성을 잡을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으면, 그런 부당한 제한 훨씬 더 분명하게 인식된다. 그래서 세상을 열어젖히는 것, 즉 자신의 지평을 넒히는 것은 세상에 우리가 불행을 느낄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 더더욱 의식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불행은 또한 우리가 꾸준히 정서적으로 불행의 원인에 관심을 두게 해줄 수 있다. 당신이 불행한 것은 불행의 원인들 때문이다. 의식화가 불행한 가정주부를 행복한 페미니스트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129
페미니스트 아카이브는 자신이 온통 불행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고 의식하게 된 가정주부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을 생각해 보자. 그런 느낌은 마치 두터운 공기처럼 분명히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 "전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가 된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는 존재. 더는 결혼을 할 것도 아니도,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니고, 단지 사람들과 더불어 본드 가를 걸어가는, 이 놀랍고 다분히 엄숙한 행진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야, 클라리사조차도 더는 아니고 그저 델러웨이 부인, 리처드 델러웨이 부인으로서" 130
영화 <디 아워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설 <<델러웨이 부인>>을 계승한다...내가 특별히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1950년대의 불행한 가정주부 로라 브라운이다. 그녀는 <<델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고, 우리는 영화가 불러내는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시간을 따라 여행하면서, 가버리지 않은 역사의 흔적, 머물러 있는 과거의 흔적이 된 목소리다. 로라는 책을 갈망한다. 그녀는 책을 읽고 싶어하고, 이는 갈수록 더 심해진다. 책에 대한 그녀의 욕망은 자신의 삶에 있고 싶지 않다는 욕망, 그 시간과 그 리듬으로부터 유예되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로부터 떨어져 책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139
"...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거기까지가 딱 견딜 수 있는 만큼이었죠. 거기까지가. 아무도 날 용서하지 않겠죠. 하지만 그건 죽음이었어요. 난 삶을 택한 거고" "우리의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전제로 한 삶이 로라에게는 견딜 수 없는 삶이었던 것이다. 그런 행복은 죽음과 같았다. 그녀는 행복을 위해 그 삶을 떠난 것이 아니다. 삶을 위해 이 행복을 떠난 것이다. 141
영화는 행복 관념을 견딜 수 없어 하던 로라가 초래한 불행을 극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녀가 겪는 곤경에 대한 공감을 철회하는 듯 하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공감의 철회를 보면서 우리는 다름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누군가 행복을 버리고 떠나서 남은 사람들이 불행해진 게 틀림없다면, 그녀는 공감 받기를 거부한 것임에 틀림없다. ... 행복을 포기한다는 것은 공감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로라의 행동이 극단적인 것으로만, 심지어 폭력으로, 회복될 수 없는 고통의 원인으로만 서술 가능하다는 사실은 행복 관념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행복 관념이 타인의 행복을 보살피는 충동과도 밀접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불행을 초래할까 두려워, 공감 받지 못할까 두려워, 매정한 사람으로 남을까 두려워 불행한 상황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43
삶을 위해 행복을 떠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행복 관념에 따라 살아가면서 상실한 것들을 의식하는 것과 삶을 위해 행복을 떠나는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이 간극에서 일이 벌어지고, 삶은 살기도 하고 상실하기도 한다. 젠더를 가능성의 상실로 인식하는 데는 슬픔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실을 인식한다고 해서 반드시 상황이 개선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에도 슬픔이 있다. 144
삶을 위해 행복을 떠난다는 것은 가능성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리기"라는 페미니즘 개념은 페미니즘의 제2의 물결에서 행복한 가정주부를 비판할 때에도 아주 중요했고, 이는 어떤 차원에서는 페미니즘적 희망을 행복에 둔 것 같기도 하다. ..... "그러나 행복과 충분히 활용되면서 살아 있음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베티 프리단), 여기서 살아 있음 개념은 행복에 대한 대안적 사회적 가치로 제시되고 있다. 145
의식과 인종차별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 신화로서의 행복이 어떤 일들을 하는지 할 말이 많았다. 그들은 행복을 약속해 주는 것을 가졌기에 행복해야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이미 불행하다고, 삶을 좋은 것으로 만들 자질과 속성이 결핍돼 있다고 상상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글을 써왔다. 146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소설은 사회적 이상에서 벗어난 가족, 동화책에 나오는 "그들은 무척 행복합니다"가 될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가족은 백인도, 중산층도 아니다. 여기서 "무엇이 아니다"라는 말은 불행하다는 뜻이다. 불행은 일종의 결핍이다. 이 소설에서 가족은 결핍으로, 좋고 행복한 삶을 위한 자질이나 속성의 결여로 서술된다. 백인성과 미.덕의 융합이 행복 담론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소설의 묘사는 정말 강력하다. 즉, 행복한 사람들은 푸른 눈을 가진 자들이고, 푸른 눈을 가진 자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좋은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가족이 아닌 가족인 브리드러브 가족은 추한가족이다. 그들의 추함은 마치 저주와 같다. 147
불행을 의식한다는 것은 "무엇이 아님" 혹은 "무엇이 없음"을 의식하는 것, 행복의 자질과 속성이 결여돼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백인성의 세계, 하얀 신체들을 중심으로 응집해 있는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이 아님"에 대한 의식은 자기소외를 수반한다.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타나기만 하면 분위기가 흐려진다면 당신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을 이방인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당신을 향한 폭력을 의식하는 것이다. 151
당신은 고통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로서 인종차별을 보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인종차별을 보려면, 우리가 보고 배운 방식으로 세상을 봐서는 안 된다. 그 세상은 불행의 원인을 덮어 버림으로써 불행을 덮어 버리는 세상이다.
고통을 "덮어버리는" - 고통이 사라지리라는 희망 속에서 고통의 원인들을 명명하지 않는 - 어떤 형태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 입지 않게 하거나, 우리 스스로가 상처 받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보호의 한 형태로 의도된 것이다. 행복이 "덮어 버리는" 방식을 제공해 준다 해도, 늘 우리를 상처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상처의 원인을 숨기거나 다른 사람들을 자기 상처의 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152
오드리 로드, <<암 일지>>
암을 불행이나 생존의 문제로 돌리거나 행복하고 낙천적인 마음으로 대처하라는 의료 담론 앞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상황의 긍정적 측면을 바라보라는 것은 삶의 어떤 현실을 모호하게 하려고 사용하는 완곡어법이다. 그런 현실을 드러내 놓고 숙고하면 현상 유지에 위험하거나 위협적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제일 책무는 자신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라는 관념에 정치적 투쟁을 통해 저항해야 한다고 로드는 말한다. 이 말은 우리의 저항을 행복에 대한 책임 방기로 보는 관념에 저항한다는 의미다. "방사선 치료, 인종차별, 여성 학살, 우리 먹거리에 침투한 화학물질들, 환경오염, 우리의 젊은이들의 약물 남용과 정신적 파멸에 맞선 내 싸움이 정말로 행복해야 만 하는 제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임을 방기한 것이란 말인가?" 153
행복은 말하자면 덥개를 제공한다. 세계를 조화로운 것으로 보는 관점, 세계관에 맞지 않는 것, 반대하는 것은 덮어버리는 방법인 것이다. 154
백인 페미니스트 의식 소설들은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가족의 의무와 관련된 편협한 대본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흑인 페미니스트 의식 소설들은 가족-으로의-자유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추방과 박탈의 역사를 거치며 상실된 것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158
페미니스트 의식은 공손한 말들과 사랑의 언어들 아래 감춰져 있는 폭력과 권력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너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행복의 기호들이 감추고 잇는 것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당신이 뭔가를 알아차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불행이 야기될 수 있다. .. 우리의 페미니스트 아카이브는 불행의 아카이브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이 어떻게 분위기 깨는 일을 수반하는지 인식해야 한다고 하는 나의 요청은 페미니즘의 역사로, 즉 행복에 맞서 투쟁해온 이들의 역사로 돌아가자는 요청이기도 하다. 159
내 바람은 인권으로서의 행복, 정치학에 적합한 언어로서의 행복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을 재활성화하는 데 있다.
행복에 대한 비판을 재활성화하려면 기꺼이 불행에 근접해 있어야 한다. 페미니스트 의식에는 우리의 불행을 증가시킬 수도 있는, 혹은 최소한 그런 인상을 만들어내는, 불행에 대한 의식이 포함돼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복은 부분적으로는 불행의 원인을 덮어 버림으로써 불행을 덮어 버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덮기를 거부하면 불행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의식화 과정은 단순히 불행을 의식하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행을 이해하는 더 나은 방법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성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행복으로부터의 소외를 인식하면서 연대할 수 있다. 심지어 분위기 깨는 데는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 160
3장 불행한 퀴어
불행 유발하기
당신에게 불행의 원인이라는 속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당신은 불행해질 수 있다. ... 그들이 당신을 언짢아하는 이유는 당신이 그들이 원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 도착한 것 자체가 불행의 원인이라면 정말 힘들 것이다. 퀴어에 대한 슬픈 책이라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들 수 있고, 그 책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려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래드클리프 홀, <<고독의 우물>> 175
이성애 세계의 행복은 일종의 불의라는 것이다. 그의 말인 즉슨, 이성애적 행복은 그들이 가진 차이가 이미 결핍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무심한 배제에 기반을 둔 것으로, 사회적으로 그듯된 것이다. 이탈자의 불행은 곧 정의를 요구하는 외침이 된다. 176
우리는 불행에 감염되리라는 두려움에서 누군가와 가까이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고, 행복에 감염되리라는 희망에서 누군가와 가까워지려 할수도 있다. 어떤 행복의 정서적 지형이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불행은 주변으로 밀려나는데, 이는 불행이 거한다고 간주되는 어떤 신체들이 행복을 위협하지 않도록 주변으로 밀려남을 의미한다. 178
인버트들에게 삶과 사랑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게 바로 이런 연인의 죽음의 애도 불가능성이다. 179
퀴어성이 비참한 것으로 읽히는 세상임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해주거나 그렇게 해주고 싶어 해야 사랑이라는 관념이 퀴어 정치학에서 어떤 문제를 갖는지 볼 수 있다. 퀴어 연인은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애 세상의 거부를 견디지 못한다면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 그래서 나는 시몬 베유의 다음과 같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퀴어적 정의로 제시하려 한다. "행복한 사람에게 사랑이란 행복하지 않은 연인의 고통을 나누려는 소망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사랑이란 연인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이다. 그 행복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는 그러기를 소망하지도 않는다." 퀴어의 사랑에 행복이 포함되려면 그런 행복은 서로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182
행복한 퀴어, 즉 예의를 갖추고 식탁에 제대로 앉아 있을 줄 아는 퀴어는 무례한 세계에 자리 잡는 전략적 형식 가운데 하나일 순 있다. 하지만 전략적 자리 잡기는 현상 유지를 의미할 수 있다. 아니면 자리를 잡으려는 노력 속에서 바뀌지 않는 건 우리일 수도 있다. 퀴어 운동은 식탁이 바꾸기를 희망하면서 "식탁에 자리 하나"를 더 만드는 일이다. 불행 혁명을 위해서는 집 허물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집, 더 많은 식탁의 합법화가 아니라 어떤 신체는 "집에 받아들이고" 어떤 신체는 받아들이지 않는 세계의 불법화가 필요한 것이다. 불행한 퀴어들의 정치적 에너지는 집에 있지 않음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194
행복하게 퀴어 되기
이 절에서는 행복하게 퀴어되기(행복한 퀴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가 꼭 전통적 범주에서 빌려 온 행복 이미지를 촉진하는 것은 아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나쁜 대상 선택"에 의한 퀴어 행복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우리의 아카이브는 "제도적 형태에 들어가지" 않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쾌락 형태들"을 보여 준다. 행복하게 퀴어 되기는 행복하게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우리가 행복 대본에 있는 이성애의 선을 넘어간다 해도 그곳에서 행복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211
나는 행복한 퀴어를 촉진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행을 못 보게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행복하게 퀴어 되기는 그 불행 또한 인식할 수 있다. 행복하게 퀴어 되기는 행복한 정상성의 촉진에 의해 감춰져 있던 불행을 인식하는 것이 될 수 있다. 214
우리는 행복의 약속 없이 살 수 있고, 또 "행복하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에게 불행-원인이 되었다는 결과를 안고 살아간다. 바로 이런 이유로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살아가는 과정이 계속해서 가능성과 투쟁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218
4장 우울증적 이주자
공리주의와 제국
공리주의는 제국의 상대적 비용과 편익을 "재는" 방법, 가늠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예들들어, 제임스 밀은 제국이 치르는 비용이 식민 지배국에 돌어가는 이득보다 크다고 주장했다. 제국에 대한 공리주의적 정당화들은 주로 식민지 주민들이 얻는 이득에 의존했고, 대체로 경제적 근거에 입각했다. 227
제국은 인류의 행복의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정당화된다. 만약 식민지 지배가 "백인의 짐"아라 한다면, 이때 이 짐은 "인류의 행복"을 증진할 의미로 이해되고, 이 의무는 박애의 언어로 서술된다. 228
문명화의 사명은 행복 사명으로 재기술될 수 있다. 행복이 사명이 되려면, 우선은 식민화된 타자가 불행하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제국의 아카이브는 불행의 아카이브라고도 할 수 있다. 식민주의적 지식은 타자를 지식의 대상, 발견돼야 할 진실로 볼 뿐만 아니라, 불행한 것으로, 더 행복한 실존 상태에 필요한 자질이나 속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제임스 밀의 <<영국령 인도사>>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원주민 문화를 비참한 것으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이 불행한 식민 아카이브에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 229
제국 문화의 행복은 행복 공식에 따라 보장된다. 즉 행복이 우리의 목적인 한 우리는 그 목적을 강요할 수 있다. 행복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목적을 그들의 목적이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야만은 간단히 행복이라는 목적으로부터의 이탈로 명명된다. 공리주의에 의해 정의된 행복의 목적은 식민 통치의 목적과 일치한다. 행복의 핵심은 그런 일치의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 지배는 타인들을 행복 목적에 따라 살게 만들어야 할 의무로 정당화된다. 229
식민주의는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원주민에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된다. 그들은 관습 혹은 관례적인 것에서 벗어나 "좋은 습관"을 익혀야 한다. 행복이라는 일반적인 목적이 개인이 추구해야 할 특수한 목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창조가 식민지 교육과 훈련의 목적이 된다. 이에 따르면, 행복해지려면 개인들이 관습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2장에서 지적했듯이, 행복하려면 "방향 전환", 돌려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타자를 개인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그들이 식민 지배자의 규범, 가치와 실천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돌려세우는 것이다. 234
제국의 이상은 제국이 행복의 선물이라는 도덕적 이해를 통해 재편성됨으로써 유지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런 유지의 결과들이다. 241
행복할 자유
제국의 역사에서 행복의 역할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행복, 국민다움, 시민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렌즈를 얻을 수 있다. 영국은 "행복 추구"가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처럼 하나의 권리로 명시돼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행복이 시민권의 기술로, 이주자를 국가적 이상에 구속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241
2장에서 나는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따라 조건부로 결정된다는 "조건부 행복"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또 조건부 말들의 불평등함을 이야기 했다. "우선"하는 사람들의 행복이 "우선"하는데, 그런 식으로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행복의 조건을 정의할 권리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시민권은 누구의 행복이 우선인가를 결정하는 기술을 제공한다. 여기서 핵심은 시민인 사람들과 시민이 아직 아닌 사람들의 구분이다. "아직 아니"라는 것은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약속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만약 시민권의 약속이 행복의 약속으로 제시된다면, 당신은 자신이 그런 약속의 수취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보여 줘야 한다. 242
행복할 자유는 어떤 방향을 지시한다. 어떤 이미지를 취한다는 것 안에는 자크 라캉이 "주체 내에서 일어나는 변신"이라는 말로 표현한 동일시 행위가 담겨 있다. 행복할 자유는 가족과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행복의 약속을 담지한 국가와의 동일시로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국가와 동일시하려면 개인이 돼야 한다. 개인의 신체, 즉 밖으로 나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신체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 개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이미지를 상정하고 있다. 즉, 행복할 자유를 갖게 된다는 것은 신체를 특정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249
우을증과 전환
만약 행복이 조건부로 약속되는 것이라면,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치르는 대가는 불행일 것이다. ... 행복할 자유를 얻기 위해, 적어도 어떤 이들은, 고착에서 벗어나려는 도덕적, 정서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51
우울증과 행복 사이의 이런 전환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내가 말하는 우울증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 <애도와 우울증>
프로이드는 애도를 상실한 대상을 슬퍼하는 비교적 건강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 슬픔의 목적은 대상을 놓아주는 것, 즉 대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주체는 그것을 "극복"해야 자유롭게 새로운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일종의 삶으로의 귀환 혹은 계속 살아가게 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251
우울증자를 상실한 대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 놓아 주지 않는 사람, 대상을 잊음으로써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한, 우을증자는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252
내가 제기하고 샆은 핵심 질문은 대상 자체, 즉 우리가 잊거나 잊지 못하는 "그것"의 지위이다. 252
나는 상실이 누군가의 상실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을 때 상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추상적인 것의 상실이 사랑하는 것의 상실로 전위되어 상상됨으로써 상실로서의 확실성을 빌려 온다는 것이다. 253
나는 사람들이 우울해 하는 이유가 상실한 대상을 놓아주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우울증이 다른 사람들을 "무언가를 상실한" 상태로, 그리고 상실한 것을 놓아주지 못한 상태로 해석하거나 진단하는 방식의 하나라고 생각해 보고 싶다. 타인을 우울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들의 애착을 죽음-소망으로, 이미 죽은 사물에 대한 애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우울증 진단은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죽었다고 선언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그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죽었다고 선언한 대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울증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우울증 진단은 윤리적 명령 혹은 도덕적 의무를 포함한다. 타자는 우리가 죽었다고 선언한 대상을 우리가 선언한 방식으로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포기 해야 하는 것이다. 235
우리는 여기서 슬픔을 공유하는 정서적 형식에 대해 알 수 있다. 정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특정 대상 즉 행복 대상을 향한 정향을 공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실한 것으로 인정하는 대상 역시 같아야 한다. 정서 공동체가 상실의 대상들을 공유함으로써, 다시 말해 대상을 올바른 방식으로 놓아줌으로써 만들어진다면, 우울증자는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 정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상실을 극복하지 못한 실패가 되고, 이로 인해 계속 잘못된 쪽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울증이란, 방향 전환이 필요한 사람, 돌려 세워야 하는 사람이다. 255
하지만 통합은 여전히 국가적 이상, 국가적 행복을 상상하는 한 방법으로 남아 있다. 장래 시민이 될 이주자들은 그래서 점점 더 행복 의무 - 지금의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과거 식민지 역사의 불행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문화 국가의 다양성과는 도저히 조정 불가능한 애착에 대해 말하지 않을 - 에 구속된다. 288
어던 행복 대상 - 터번이나 부르카 같은 - 이 국가적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것이 국가의 행복 대상들과 나란히 존재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불행한 역사로 흠뻑 젖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행복이라는 기호 아래 지워진 제국의 역사인 것이다. 대상은 그것이 행복에 대한 소망으로 사라지게 할 수 없는 역사들의 지속성을 체화하고 있을 경우 불행해진다. 불행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행복이 다양화된다 해도 정치적 기억(즉 국가적 시간에서의 현재)에서 적대가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제거될 수도 없다는 것을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역사들은 뒤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역사들은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역사의 지속성과 함께 하는 우리의 불행을 끈질기게 말해야 한다. 290.
5장 행복한 미래
퀴어 비관주의는 여전히 이방의 정서로서 중요하다. 아이의 형상이나 재생산과 생존에 관한 여타의 비유들을 중심으로 행복에 대한 희망을 조직하기를 거부하는 퀴어 정치학은 이미 현재로부터 소외돼 있다. 퀴어 비관주의는 특정한 종류의 낙관주의에 대한 비관주의라는 점,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것들"에 대해 낙관적이기를 거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치적 부정성의 어떤 형식들은 고집이나 고착으로 읽힌다. 인종차별을 지금도 진행 중인 일로 알아차리는 바로 그 행위가 이미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행위로 읽히는 우울증적 이주자 형상을 두고 우리는 이런 역학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실제로도 핸재의 불의를 깨닫는 행위가 낙관주의의 강탈로, 즐거움의 살해로, 특정 역사를 극복하거나 뒤로 하지 못하는 실패로 읽힌다. 퀴어 비관주의는 이방의 정서로서는 흥미롭지만, 비판적이 되는 것이 원칙의 문제가 된다면 비관주의 그 자체에 낙관적일 될 위험이 있다. 296
긍정 혹은 부정의 대상에 대한 다른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긍정적 혹은 부정적 정서들을 긍정하기보다는, 그것들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그리고 이런 분배가 얼마나 교육적인지를 읽어 내는 것이 이 책에서 내가 할 일이다 - 우리는 정서의 분배 방식을 읽어 냄으로서 정서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소위 "혁명 의식"을 성취함으로써 정서의 재분배가 어떻게 가능한지, 이런 재분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그리고 그런 재분배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활성화하는지 생각해 보려 한다. 297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출발점으로 하는 정치의 형식 내에서 우리는 희망과 절망,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기묘하게 왜곡되고 혼합되는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298
이 장에서 나는 디스토피아의 형식들을 분석해 보려 한다. 특히 미래가 이미 우리가 상실한 무언가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 디스토피아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는 단지 불행한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미래가 전혀 없을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다. 여기서 미래가 없다는 것은 단지 불행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연발생도, 기회도, 가능성도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에 나타난 미래에 대한 정서적 경향을 분석하면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와 관련된, 철학의 고전적 표현들(쇼펜하우어와 라이프니츠)를 재해석해 보려 한다. ...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미래가 상실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경우 정치적 투쟁이 어떻게 미래와의 투쟁, 행복을 둘러싼 투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290
영화의 주인공은 습관적인 비관주의자 테오다. 그의 삶은 끔직하고 그는 그 어떤 것에도 무신경한데, 이는 바로 미래없는 세상의 정서적 상황 그 자체를 보여준다. ... 나는 이 영화를 해석하면서 "내일"을 위한 투쟁에서 절망과 희망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오늘"이 너무나 절망적으로 보일 때 내일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려 한다. 300
소외와 혁명 의식
정서 이방인들은 그들이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 혹은 그들이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 때문에 소외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소외는 어떻게 혁명적 의식의 가능성과 연결되는 걸까? 오늘날 혁명적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긴 한 걸까? 300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해 둬야 할 것은, 의식이 바낀다고 사람들이 갑자기 혁명가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의식의 실패, 즉 세상에 대한 허위의식이 어떻게 다른 가능한 세상들을 막는 장애물이 되는지, 허위의식이 어떻게 가능한 것들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어 가능한 것들이 경험되고 상상되기도 전에 상실되게 하는 것인지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해 둬야 할 것은, 허위의식은 마르크스가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허위의식"에 대한 최초의 문서화된 언급은 엥겔스가 쓴 편지에 등장한다. 여기서 허의의식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동기를 모른다는 것,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우연히 일치함을 알지 못하는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의식적인 믿음들은 이데올로기다. 사람들은 의식으로부터 그런 믿음의 이해관계적 성격을 탈각함으로써 이해관계를 유지한다. 우리는 "혀위의식" 관념이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허위/진실의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은 너무 지배적이어서 "혀위의식"이라는 말 자체가 구시대적인 말처럼 들릴 정도다. 하지만 내가 2장에서 지적했듯이, 의식을 개인 주체에 속한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면, 이 개념을 다시 살려 낼 근거가 있다. 의식이란 주체들의 도착보다 선행하는 기만들이 공유를 통해 사회적인 것을 배열하는 방식에 대한 것일 수 있다. ... "부르주아 사회의 본성에 드리운 베일"은 질서의 재생산을 은폐함으로서 사회질서를 재생산한다. 302
핵심은 진실과 허위의 구분이라기 보다는 진실의 재생산에서 허위가 담당하는 역할이다. 다른 말로, 의식이 허위인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와 결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런 상태가 이해할 수 있는 것 혹은 참인 것의 지평을 규정하면서 특정 질서의 재생산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재생산은 이런 불일치에 대한 인식의 실패에 기대고 있다. ... 혁명가란 단순히 일치의 실패를 목격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의식의 불일치를 인정하는 것은 그것의 허위성을 의식하게 되었음을, 그리고 사회적 믿음이 가지는 이해관계적 본성을 의식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이런 인정의 형식들은 소외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302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으로 돌아가 보자.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 속으로 불어넣는다. 그러나 그 생명은 이제 더 이상 그가 아닌 대상에 귀속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이 과정이 "대상의 상실"이면서 동시에 "대상에 대한 속박"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노동자들은 상실한 대상에 매여 있다. 즉 자본주의 자체가 우울증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 소외란 자기 노동의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 일종의 자기소외 - 인 동시에 노동자가 세상에 몸 담는 방식을 형성하는 감정-구조, 즉 고통의 형식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곧 자신의 연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유당함으로써 자신과의 연계를 상실하고 고통받는다. 304
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불운과 불행을 야기된 것이다. 고통을 깨닫는 것 - 자신이 이방인으로 만들어졌음을 깨닫는 것, 또 자신이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것 - 은 여기서 그 원인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고통의 원인을 깨달음으로서 고통을 깨닫게 되는 게 혁명의 원인 중 하나다. 그에 반해 허의의식은 정서적 상황(노동자들과 원주민들이 겪는)은 지속시키지만 그 원인을 오인해 그 원인이 고통의 "원인"이 되게 만든다. 306
혁명가는 이런 특정한 의미에서 정서 이방인이다. 당신은 몰입할 수가 없다.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당신이 세상에 저항할 때는 당신이 경험하는 세상도 저항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다. ...실제로 혁명 의식은 기꺼이 스트레스를 감수하겠다는 의욕, 기꺼이 현재를 내 피부 아래 두겠다는 의욕으로서만 가능하다. 반란이란 거슬리는 현재를 "피부에서 도려내는" 경험이다. 307
이 영화의 에너지는 테오의 비참이 방향을 바꿔 어떤 목적을 향하게 되는 데 있다. 그 목적은 테오의 고통으르 덜어 주는 건 아니지만 그를 다른 가능한 세계 쪽으로 돌려세운다. .... 방향이 바뀐다는 것이 늘 행위를 향해 돌아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 돌아서는지에 대한 것일 수는 있다. 312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낙관주의는 진실에 대한 관계라기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관점에서 대상을 지각하는 방법이자,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봤을 때 대상에 대해 갖는 정향이다. 314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결국 현재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에 대한 평가(어떤 것이 좋다 혹은 나쁘다. 행복 혹은 불행을 야기한다)인 동시에 미래 지향적이다. ...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둘 다 약속의 시간성과 관련돼 있다. 즉 둘 다 미래를 그것이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무언인지의 관점에서, 현재의 잔에 마실 것이 안아 있는지 아닌지의 관념에서 보는 것이다. 315
비관주의, 쇼펜하우어
행복을 불행의 원인으로 예상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행복의 비어 있음은 노골적으로 쾌략의 부정성과 연결된다. "우리는 고통은 느끼지만 고통 없음은 느끼지 못한다. 근심은 느끼지만 근심 없음은 느끼지 못한다. 두려움은 느끼지만 안전함은 느끼지 못한다", 결국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과 결핍뿐이다"
우리의 정서적 상황, 우리의 "주변부", 배경 처럼 존재하다 강도가 세지면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어떤 일이 발생해 자신이 짜증이 나있는 상태임을 의식하게 되면 당신은 짜증을 그 일 탓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느낌을 무엇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우리는 그 느낌을 어딘가로 향하도록 그 느낌이 어딘가를 "가리키도록" 할 수 있다. ... 이렇게 짜증이 배경처럼 존재하다 어딘가로 향하게 되는 상황은 <칠드런 오브 맨>이 택하고 있는 정서적 풍경과 흡사하다. 317
행복은 그것이 깨달은 느낌에 형식을 부여한다. 쇼펜하우어의 작업은 이 형식에 대한 비판, 그 형식 속의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 " 이 종족의 어떤 유토피아로 이주해 살게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곳은 모든 것이 저절로 자라고, 구운 칠면조가 날아다니고, 연인들이 지체없이 서로를 찾아내 아무런 난관도 없이 관계를 유지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권태로 죽거나 목을 맬 것이고, 어떤 이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면서 자연이 내린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 낼 것이다" 행복이 나쁜 느낌을 극복하리라는 기대 바로 그것이 행복이 불행을 야기하는 방법이다. 318
비관주의는 현대 세계에서 우리에게 계승된 낙관주의에 대한, 낙관주의가 어떻게 중립성과 혼동돼 왔는지에 대한 비판을 제공할 수 있다. 318
고전적 낙관주의자, 라이프니츠는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의 완벽함에 대한 믿음을 포함한다.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들은 최선의 것임에 틀림없다. 신은 완벽하기 때문이다. ... 라이프니츠는 나쁜 느낌들 - 고통, 근심 등 -이 쾌락의 강도를 증가시키고 심지어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319
나쁜 느낌의 핵심은 진보다. 고통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더 높은 쾌락을 위해서인 것이다. 320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좋은 느낌의 약속은 나쁜 느낌(실망, 비어있음)으로 전환되고,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나쁜 느낌(고통, 불운)은 좋은 느낌(진보, 더 높은 쾌락)으로 전환된다. 비관적이라는 것은, 불행을 인간 행위의 종착점, 모든 행복의 약속이 우리를 이끄는 곳으로 보고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다. 낙관적이라는 것은, 행복을 인간 행위의 종착점, 모든 나쁜 느낌의 경험이 우리를 이끄는 곳으로 보고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다. 320
비관주의는 여기서 실망에 대비하는 방법으로, 반복을 통해 그 힘이 축적되는 일종의 습관이다. 비관주의는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함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해줄 수 있다. 다른 말로, 실망에 대비하는 행위들이 주체 형성의 양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성적 냉소주의는 실망의 가능성을 가장 열심히 방어하는 사람이다. 322
하지만 테오의 세계가 아무리 엿 같을지라도, 거기에는 비관주의 정신에 입각해 발화된 "너무 늦었어'라는 기표를 넘어서는 고통의 형태들이 존재한다. 그가 슬픔으로 무너지는 단 한 지점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줄리안이 죽었을 때다. 그의 몸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는 땅으로 주저앉는다. 슬픔으로 무너진다. 영화에서 이 지점을 기점으로 그의 나쁜 느낌은 무엇을 안 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 방식, 특정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 322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한 것은 비관주의가 주체 형성의 양식으로서 어떻게 고통을 피하는 데 고통을 이용할 수 있는가이다. 앞으로 다가올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예상함으로써 비관주의는 아무것도 없기를 바라는 이 욕망 안에 위태로운 뭔가를 감춘다. 323
이 영화는 낙관주의적 형식의 믿음("그것은 정말 존재한다")이 가능한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비관주의를 지혜의 형식("그건 단지 고통 앞에서 당신을 기분좋게 하려고 존재하는 거야")으로 이상화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의 테크놀로지를 넘어선 뭔가가 여기서 드러난다.
불행할 자유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제임스 건, <<조이 메이커>>
어슬러 르 귄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디스토피아 소설의 하부 장르를 우리는 "행복 디스토피아"라고까지 부를 수 있다. 이런 책들의 악몽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헉슬리, 행복의 문제란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예 상태를 사랑하게 만드는" 문제라고 말한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좋아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다. 사람들이 불가피한 자신의 사회적 숙명을 좋아하게 만드는 훈련, 모든 조건화 훈련의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야"
<<멋진 신세계>>의 혁명가는 행복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이는 단지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348
행복이 의무가 되어 버린 세계에서 불행은 권리가 된다. 만약 불행할 자유가 없다면, 행복할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때 불행은 자유가 될 수 있다. 350
《멋진 신세계》와 《조이 메이커》 둘 다 행복에 대한 공리주의적 접근법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소위 행복의 과학이라 불리는 공리주의는 행복의 극대화가 사회적 선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건의 소설에서 쾌락론에 대한 공포는 행복이 종착점이 되는 것에 대한 공포다.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배아로 변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자궁에서 시작해 자궁에서 끝나는 삶, 출생과 죽음의 구분이 유보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것이다. 인간은 "직접 삶의 마지막 도피처를 건설해 느리고 행복한 죽음을 위해 그 안으로 후퇴했다" 350
어슬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이 이야기는 그런 거래의 불의, 즉 한 아이의 비참한 고통에 의존하는 집단적 행복의 도착에 대한 것이다. 만약 다수의 행복이 한 사람의 불행으로 가능해진다면 , 그 행복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다. 351
오멜라스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의 약속이 얼마나 고통의 국지화에 의존하는지 알 수 있다. 특정한 "우리"가 좋은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아야 하는 구조인 것이다. ... 그런 행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통에 감화돼야 한다. 감화를 위해 타인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느낌을 비슷한 느낌으로 되돌려 주는 공감은 거의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 접촉 방식이다. 행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그저 무관심을 거부하고, 우리 자신이 변용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불행에 근접해 있겠다는 의욕만 있으면 된다. 352
불행이 미치는 영향을 기꺼이 받겠다는 정치적 의지는 정치적 자유로서 재구성될 수 있다. 우리는 불행할 자유로서 자유를 급진화할 수 있다. 불행할 자유가 비참해지거나 슬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352
불행할 자유란 불행한 것에 의해 변용될 자유,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지 모르는 삶을 살아갈 자유다. 불행할 자유란 행복의 길에서 이탈한 삶을 살아갈 자유다. 그 이탈이 우리를 어디로 데러가든 말이다. 결국 그것은 이탈 행위에 의해 불행을 야기할 자유를 의미한다. 353
불행이 우리의 목적인은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가 더 이상 행복을 우리의 목적인으로 상정하지 않는다면, 불행은 길을 막아선 방해물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길을 막아서고 있는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다면, "길" 자체가 문제가 된다. 불행할 자유는 행복을 인간 행동의 합의된 종착점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 행동의 목적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해줄 새로운 정치적 존재론의 기반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행동의 목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353
이 장에서 논했던 디스토피아 영화들로 다시 돌아가서 그것들이 다가올 혁명을 상상하는 지 혹은 상상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자. <칠드런 오브 맨>에도 <아일랜드>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혁명이 없다. 영화가 암시하는 바는 남은 세계 - 우리의 세계 - 가 파괴됐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어딘가에서 창조될수 있다는 정도다. 우리 주인공의 임무는 인류를 해방시키는 게 아나라 한 명의 임신한 소녀를 구하는 것이다. 356
방향성 없는 감정이라 해서 무의미하거나 헛된 것은 아니다. 그건 단지 그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향해 있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배가 자유롭게 표류하도록 한다면 혁명적 행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행복은 우연에, 우연의 도착에, 어쩌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뭔가가 발생하기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기다린다는 건 우연발생이 제거된 유산을 받아들임으로써 우연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런 유산을 거부한다는 것은 일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 길을 잃으면 다른 길이 보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을 것이다. ... 행복한 미래란 어쩌면의 미래다. 358
결론
행복, 윤리, 가능성
행복은 소위 "희망찬 수행성"을 제공한다. 362
긍정 심리학,
"난 행복해"와 같은 긍정적 자기-선언을 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것.
내 질문은 행복을 향한 욕망은 애초에 어떤 종류의 욕망인가? 주체가 행복의 효과를 생성할 책임이 있다거나 그 말을 전파할 의무가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361
"난 단지 네 행복을 바랄 뿐이야" 라는 발화 행위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해 질 것"임을 함의한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네가 저것을 하면, 넌 불행해질 것이고, 그래서 나도 불행해질 거야"
-> "도착적 수행성" 363
행복은 비어 있음으로써만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다양한 것들로 채워져 있어야 그 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릇이다. 행복은 다양한 대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며, 그안에서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형식도 담을 수 있다. 행복 대상 선택에 있어서의 각자의 독특한 특성, 서로의 선호를 알아차리는 것이 가져다주는 친밀함 등을 통해 우리는 어떤 지평을 공유하게 된다. 행복의 무질서에는 질서가 있다. 행복 대상들의 다양성은 행복을 선택의 장으로, 자유의 환영으로 창조하는 데 기여한다. 365
행복은 우리가 쓸 수 있는 최선의 마술이다.
행복은 멈춤점이 된다.. ..행복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욕망한다.367
행복은 우리의 방어책이 된다. 어떤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공격할 수 있다.368
우리 주장을 제대로 방어하려면 우리는 행복을 우리의 기반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행복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인지를 드러내야 한다. 369
행복을 떠올리지 않고 삶의 핵심, 삶의 의미, 삶의 가치, 윤리 그리고 잠재성을 생각하기는 정말 어려워 보인다. 행복이 묵직한 이유는 그 의미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무언가를 열망하는 그 양식 속에서, 지평선 너머 다른 어딘가의 어느 지점을 환기하기 때문.
행복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좋은 것의 척도다. 그래서 행복은 좋은 것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기호가 된다. 행복과 윤리의 친밀성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370
행복의 계보
니체가 도덕의 계보라고 불렀던 것에 행복이 어떤 식으로 내포돼 있는지 재고함으로써 소박한 행복의 계보를 제시해보고자 한다.370
이 도덕의 계보의 한계는, 행복을 행운에 위치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운을 창조성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니체는 운을 출신 좋은 자들이 행복과 행위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주는 느낌이라고 말한다.372
내가 도전하고자하는 관념은 즉 행운으로부터 행복을 선언하는 것이 긍정 행위이며 심지어 능동적 행위라는 관념 그것이 아주 시초부터 부정(비능동적인, 불행한 자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관념이다.
우리는 불운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는다는 가정에 도전해 볼 수 있다. 원한과 같은 그들의 불행도 마취제와 같은 그들의 행복도 수동적이라는 가정에 도전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불행을 정치적 행위의 한 형식으로 살펴보았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행위, 상처를 진행중인 현재로 지적하는 행위는 처음부터 무언가를 긍정한다. 인간의 능동성과 가치를 나타내는 기호로 인정받고 긍정돼 온 행복이 마취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어떤 것에 의해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이나 의지의 상실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373
행복의 역사는 행복에서 우연을 제거한 역사로도 기술될 수 있다. 374
우리는 행운의 영역 너머의 행복이라는 서사를 그것이 약속하는 바 ㅡ 그것은 우리가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ㅡ 와 관련해 탐색해 볼 수 있다. 행복에 대한 이 같은 환상은 자기-통제에 대한 환상이다. 행복에 대한 의망을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것에 두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행복을 통제할 수 있을 것 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지혜와 덕을 갖춘 사람은 그의 행복이 자신의 지혜와 덕에 달려있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불안, 실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375
행복, 수동성, 능동성
애초에 모든 행태의 정념은 수동적이라 간주돼왔다. 실제로 정념 passion이란 단어와 수동적이라는 단어는 모두 고통받다, 라는 뜻의 라틴어를 어근으로 한다. 능동/수동은 아주 단순히 행위와 정념.감정을 구별짓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형식의 감정은 다른 것에 비해 "능동적"이라 읽힌다. 행복은 부정적인 감정들과 대조를 이루며 능동성의 형식이 된다. 행복하다는 것은 당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결정한다는 뜻이지만, 불행하다는 것은 당신의 운명을 고통스럽게 겪어 낸다는 뜻이다. 이 구별은 점점 더 뚜렷해진다. 376
불운한 자는 감정적인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들이 행복을 느낀다면 그 행복은 마취제처럼 허약하다.
닭이 길을 건너는, 이 건너기 사건에서 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걸까? 우리는 능동/수동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에 붙들려 있기보다는 도전해야 한다. 이는 수동적이라고 간주돼 온 것,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거기에 있다고 간주해 온 것이 뭔가를 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나아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마련해 주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가능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재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성이 다른 종류의 행위를 수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378
이 책의 기획 가운데 하나는 고통을 겪는 것이 일종의 활동임을, 뭔가를 하는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좋은 것으로 판단돼 왔던 것에 불합치를 느낀다는 뜻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고통은 행위 역량을 고양해줄 수 있는 수용성이다. 378
능동성과 수동성은 마주침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주침을 구조화하는 방식이다. 384
헹복에 대한 내 해석은 마주침을 재구조화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분위기 깨는 자의 사회적 위협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쓸 수 있다. 분위기 깨는 자는 서로 합치하거나 합치해야 하는 신체들 사이에 끼어든 자다. 분위기 깨는 자는 유기적 연대를 방해하는 자다. 혹은 연대가 유기적이 되려면 불합치를 마주침을 방해하는 것으로 위치시켜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384
만약 윤리학이 불합치할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좋은 마주침 또는 행위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긍정에 대한 것 혹은 긍정을 위한 것일 수 없다. 결국 나는 행복에 대한 내 비평을 "긍정으로의 전회"라고 하는 것까지 포함할 수 있도록 확장하고자 한다. 긍정으로의 전회는 행복으로의 전회로 환원되지 않는다. 384
우리가 나쁜 느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 의해 우리가 어떻게 변용되는지 알기 위해서이다. 이는 우리가 원하거나 원치 않는 모든 느낌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를 윤리적 자원으로 성취하게 된다는 뚯이다. 나는 긍정의 윤리가 특정한 형태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 - 그리고 그 관심을 유지하는 것 -이 얼마나 어려운지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화해를 위해 고통은 넘어 서려는 욕망,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극복하라" 함으로써 "그것을 덮어 버리려는" 의지는 자신의 불행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다수의 불행의 원인으로 만든다. 그들이 겪는 고통이 우리의 집단적 실망으로 변모되면 우리는 그런 역사들을 덮어 둘 수만은 없다. 윤리가 고통을 넘어 행복이나 즐거움을 향해 가는 것이 되면,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거나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부과하게 된다. 389
긍정으로의 전회는, 나쁜 느낌이고 후진적이고 보수적이며 좋은 느낌은 선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구별을 만들어 낸다. ... 이런 가정은 불의의 역사를 사라지게 한다. 우리가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그런 역사들을 사라지게 한다. 우리가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그런 역사들을 우울증의 형식으로(마치 이미 사멸한 것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을 사라지게 한다. 이런 역사들을 사멸하지 않았다. 389
나쁜 느낌들은 끝나지 않은 역사들에 대한 창조적 반응들이다. 우리에게 불행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는 느낌에서 로맨스나 의무를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단지 불행을 극복해야 할 느낌 이상의 것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불행은 행복의 약속이 지닌 한계에 대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390
더 뜻밖의, 더 행복한 행복
나는 "삶을 위해 행복을 떠남"으로써 어떻게 위기 국면이 해소될 수 있을까를 질문함으로써 행복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다. 391
우리가 옹호하고 있는 그 행복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삶에 대해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이 되기를 원하는지 물을 수 있다. 가능성은 가능해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식돼야 한다. 가능성에 대해 배우는 것은 계보학을 하는 것, 현재의 도착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현재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에 대해 배우는 것에는 현재로부터의 일정한 소외가 수반된다. 익숙한 것이 물러나면 다른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정서 이방인들은 창조적일 수 있다. ... 우리가 행복에서 멀어져야 일이 벌어진다. 우연 발생이 생겨나는 것이다. 392
가능성을 지향하는 태도란 순간의 우연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일 수 있다. 순간의 우연에 대한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발생할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가능성으로, 우연에 의해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393
어리석은 형태의 행복을 재평가하려는 시도는 영화 <해피 - 고 - 럭키 Happy - go -lucky>(2008)에서 볼 수 있다. ... 시간이 흐를 수록 영화는 포피가 주변의 고통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녀와 동일시하도록 한다. 그녀는 괴롭힘을 당한느 학생에게 손을 내민다. 폭력적이고 늘 화가 나있는 인종차별적 운전 강사의 말에 귀 기울인다. 홈리스 남성과도 기이할 정도로 쉽게 대화를 튼다. 이 모든 사례에서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거부한다. 이 영화는 수동성이 윤리적 역량(우리는 타인들에 의해 변용되는 데, 즉 그들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396
우리는 좋은 삶을 열망하면서, 그런 삶에서 치러야 할 각종 의례들에 매달리면서 옳다고 하는 것들을 함으로써 우리가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포피가 자기 삶에 대해 행복해 하는 것은, 행복 대상들을 따라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행복 대상들을 따라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 흥미, 호기심이 데려가는 곳은 어디든 간다. 그런 방식으로 삶을 살면 자신의 대상 선택에 창조적이고 독창적이 된다. 사실 이 영화는 여성들의 우정의 지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이 영화는 관습적 형태의 친밀감 바깥에 있는 애착 관계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한다. 397
이제 우리는 행복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긍정의 제스처로 제시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삶에 대한 긍정적 접근을 요청하거나 윤리로서의 긍정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일에서 삶의 가능성을 긍정하려 한다. 올바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요구에 의해 부정된 가능성을 열어두려 한다. 어리석음은 그래서 유익할 수 있다. 399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불행한 퀴어, 우울증적 이주자 형상이 천하태평과 퀴어적 친족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의에 대한 분노, 불의로 인한 불행은 걱정 없고 어리석다고 간주되는 좋은 느낌과 연속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어리석음을 포용하는 것은 보통 긍정의 윤리 혹은 행복의 윤리에 가담하려 하지 않는 정서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399
우리의 목적은 우연발생을 행복 안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필연성으로서의 행복에 맞선 투쟁은 가능성으로서의 행복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행복 운동이 아닌 우연발생 운동으로서의 정치 운동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비참한 자들에게는 우연발생이 가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복의 경로에서 이탈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간극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발생의 정치학이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가능성, 어쩌면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우연발생의 정치학은 발생하는 일을 포용하는 동시에, 대안적 방식으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한다. 우연발생을 만드는 것은 곧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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