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시스터 아웃사이더

백_일홍 2023. 10. 19. 18:30

시스터 아웃사이더

 

오드리 로드

 

성애의 활용,

성애의 힘에 대하여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힘이 있다. 그중에는 활용되는 힘이 있는가하면 활용되지 못하는 힘이 있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힘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힘이 있다. 성애는 우리 안의 깊숙한 곳, 여성적이고 영적인 차원에 위치한 자원으로, 우리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감정, 혹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감정의 힘에 굳게 뿌리 내리고 있다. 억압을 지속하려면, 억압받는 자들의 문화 내에 존재하는 (변화의 에너지를 공급해 줄) 다양한 힘의 원천들을 타락시키거나 왜곡해야만 한다. 여성에게 이것은 바로  우리 삶의 힘과 앎의 원천인 성애의 억압을 이미한다. 69

 

서구 사회는 이런 성애라는 자원을 의심하고 비난하고 오용하고 그 가치를 비하하도록 가르쳤다. 한편으로 천박하게 해석된 성애가 여성의 열등성을 나타내는 기호로 조장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여성은 성애적인 조재로 경멸과 의심의 대상이 되고 고통받았다. 69

 

여성들이 삶과 의식에서 성애를 억눌러야만 강해질 수 있다는 그듯된 믿음 역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런 강함은 남성적 권력 모델 안에서만 작동하는 환상일 뿐이다. 70

 

우리 여성들은 우리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그런 힘과 비합리적인 앎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남성 세계는 우리에게 일생 동안 성애의 힘을 믿지 말라고 경고해왔는데, 이는 여성이 이런 깊은 감정적 힘을 남성을 위해서만 쓰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 여성들이 스스로 내면에서 보다 큰 가능성을 찾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은, 마치 주인 개미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진딧물들처럼, 가슴으로 젖이나 공급하는 열등한 지위에 머물도록 한 것이다. 70

 

하지만 성애는 그것이 주는 계시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또 그저 감각적 만족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에 굴복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에너지를 재충전해 주는 도발적 힘의 원천이다. 70

 

남성들은 종종 성애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며 여성들을 공격하는 데 이용해 왔다. 그것은 혼란스럽고, 사소하며, 정신병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감각이라고 폄하되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애를 힘과 앎의 원천으로 여기고 탐구하는 대신, 그와 정반대인 포르노그래피 같은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포르노그래피는 성애의 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한 감정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포르노그래피는 감정 없는 감각만을 강조한다. 70

 

성애는 우리 자아감의 출발점과 우리가 느끼는 강렬한 감정의 혼돈 사이에 위치한다. 그것은 내적인 만족감으로 한번 경허머해 보고 나면 그것을 열망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깊은 감정이 주는 충만함을 경험하고, 그 힘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경외감과 자기 존중 속에서 이보다 부족한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된다. 71

 

스스로에게, 그리고 자신의 삶과 일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끌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조장하는 능력주의의 수준을 넘어선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관심이 없고 최선을 추구할 뜻이 없는 사람들만이 진실한 감정을 두려워하고 적당히 능력에 맞게 일하는 데 만족할 뿐이다. 71

 

우리가 성애로부터 습득한, 탁월함을 향한 이런 내적 요구는 우리 스스로나 타인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런 요구는 모든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성애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느냐의문제만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강렬하고 충만한 는낌을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까지 그런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지 알게 되면, 우리가 살면서 시도하는 다양한 것들 가운데 무엇이 우리를 그 충만한 느낌에 가장 가깝게 데려가 주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71

 

우리가 하는 일들의 목적은 우리의 삶과 우리 아이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보다 많은 가능성을 개척하는 데 있다. 우리가 매사에 이런 성애적인 만족감을 추구한다면,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도 의식적인 결정이 될 것이다. 마치 간절히 기다리던 침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가 새로운 힘을 충전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72

 

 

 

물론 [이 사회에서] 그와 같은 힘을 기른 여성들은 위험하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애적 요구를 섹스에만 한정시키고, 삶의 다른 중요한 영역과 분리하도록 배웠따. 우리에게는 우리 일의 성애적 뿌리와 그것이 줄 수 있는 만족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하는 일들의 상당 부분에 대해 좀처럼 애정을 갖지 못하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예컨데,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72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으로만 재화를 정의하는 체계, 또 인간의 필요를 정의할 때 심리적, 감정적 요소를 배제하는 체계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 중 하나는 우리 일에서 성애적 가치, 성애적 힘, 그리고 삶의 활력과 성취감을 빼앗아 간다는 점이다. 이런 체계에서 노동은, 그저 빵을 얻기 위한 의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망각으로 축소된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화가에게 눈을 가린 채 그림을 더 잘 그려 보라고, 그림 그리는 걸 즐겨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불가능한 동시에 지독히 잔인한 요구이다. 73

 

여성으로서 우리는 이 세계가 진정으로 달라질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 삶과 일을 구성하는 모든 측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돌파해 나가는 방식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73

 

성애라는 말은 그리스어 에로스에서 온 말로, 에로스는 카오스로부터 태어난 창조력과 조화등 사랑의 다양한 측면들을 의인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성애는 여성의 생명력 - 우리의 언어, 역사, 춤, 사랑, 일과 삶 속에서 우리가 지금 복구하고 있는 창조적 에너지 -을 행사하는 것이다. 73

 

에로티시즘과 포르노는 성적인 것을 활용하는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이 둘을 등치시키려 한다. 이 때문에 영적인 것(심리적,감정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하고, 그 둘을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것으로 여기는 풍조도 생겨났다. 시적인 혁명가, 명상하는 투사는 마치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영적인 것과 성애를 분리해, 영적인 것을 밋밋한 정서의 세계로, 무욕의 경지를 추구하는 금욕주의자의 세계로 축소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에서 가장 동떨어진 것이다. 금욕이란 공포심과 부동성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일 뿐이다. 금욕가가 욕망을 혹독하게 절제하는 것은 집착의 한 방식에 불과하다. 자기 절제가 아닌 자기부정의 한 방식이다. 74

 

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이분법 역시 우리가 가진 성애적 앎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 허구이다. 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이어주는 다리는 바로 성애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 안의 가장 깊고 강력하고 풍요로운 것을 신체적, 감정적, 심리적으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즉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사랑을 향한 열정이 바로 성애이다. 74

 

피상적 수준을 넘어 깊은 숙고로부터 나온 표현, 즉 "내 느낌이 맞아"라는 표현은 성애의 힘을 진정한 앎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 느낌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등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저 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 안의 저 깊숙한 곳에서 태어난 앎을 기다릴 수 있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74

 

 

내게 성애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첫째는 다른 사람과 어떤 일을 깊이 나눌 수 있게 해줌으로써 힘을 준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기쁨이든, 감정적인 기쁨이든, 심리적인 기쁨이든, 지적인 기쁨이든 간에 그 기쁨을 우리가 서로 나눌 때, 그 나눔의 행위는 서로를 잇는 다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고, 그 차이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다. 75

 

성애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내가 기쁨을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향유할 능력을 열어주는 것이다. 음악에 맞추어 내 몸이 반응할 때, 강렬한 리듬에 귀 기울일 때, 그리하여 내가 춤을 출 때건, 챙장을 조립할 때건, 스를 쓰거나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건, 감각을 느끼는 모든 층위에서 성애적으로 만족스러운 경험이 가능하다. 75

 

자기 자신과 온전히 연결되는 경험을 나누는 것은 내가 느낄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기쁨을 표현하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살아 있음을 되새겨 준다. 내가 기뻐할 수 있음을 깊이 깨달을 때 ,나는 이런 만족감을, 결혼이나 신이나 내세 같은 것을 통하지 않고서도, 내 삶의 모든 측면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75

 

바로 이런 까닭에 성애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가끔 그 존재를 일정받을 때조차 침실로만 영역이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단 우리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깊이 느낄 수 있게 되면, 우리 자신과 우리 일에서도 우리가 가능하다고 알게 된 그 기쁨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애적 앎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을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렌즈가 되어, 그것들이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해 상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직하게 평가해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이는 우리 각자의 내면에 깊은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며 우리가 그저 편리하거나 관습적으로 가대되는 것, 위험하지 않을 뿐인 것들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준다. 76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는 투명한 비닐로 포장된, 하얀 마가린을 사곤 했다. 투명한 포장지 안쪽으로 보이는 마가린에는 노오란 알갱이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우리는 마가린이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기다렷다가 그 작은 알갱이들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떠뜨려 그 선명한 노란색이 부드럽고 하얀 마가린 전체에 스며들게 했다. 76

 

성애란 이처럼 내 안에 숨어 있는 핵심적인 알갱이다.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기만 한다면, 그것은 내 모든 경험을 고양시키고 더욱 섬세하게 자각하도록 해주며, 활기찬 에너지로 내 삶을 선명히 물들일 것이다. 76

 

 

우리는 우리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열망, 그것에 대한 긍정을 두려워하도록 교육받았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은 그 힘을 잃고 변화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한 두려움은 그런 내면의 욕방들을 의심하게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욕망이 무분별하게 강력해지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진실을 억압한다는 건 진실에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왜곡한 우리의 모습을 뛰어넘어 우리가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온순하고 충직하고 순종적인 모습으로 외부의 인정을 구하며 여성으로서 겪는 억압의 수많은 양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77

 

우리가 우리 밖에서 삶의 방향을 찾으려 할 때, 즉 우리 내면의 앎과 필요에 따르지 않고 외부에서 주어진 명령만을 따를 때, 그래서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성애의 안내를 따르지 못한 때, 우리 삶은 외부의 낮선 형태들이 부과하는 제약을 받게 되며, 우리의 개인적 필요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적 필요조차 고려하지 않는 구조의 필요에 순응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솔직하게 우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를 따라 삶을 꾸려가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성애의 힘과 접속하여 그 힘으로 우리 주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면, 비로소 우리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책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감정들을 인식하게 되면, 고통과 자기부정,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그런 것들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이는 무감각 상태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억압에 대항하는 우리의 행동은, 이렇게 내면에서 힘을 얻은 자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78

 

성애와 깊이 연결될 때, 나는 무력감이나, 체념, 절망, 자기비하, 우울, 자기부정처럼, 내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게 부과한 상태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78

 

물론 성애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 뒷마당의 울타리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다른 일이지만, 그 차이는 단순히 양적일 뿐이다. 나에게 좋은 시를 쓰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여성의 몸에 쏟아지는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함께하는 것은 아무 차이가 없다. 78

 

바로 이 점이 성애에 대한 고찰의 마지막 측면이다. 서로의 감정에서 나오는 힘을 공유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일회용 휴지조각처럼 소비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의 경험을 외면하는 것은, 그것이 성애적 경험이든 아니든, 그 경험을 함께 공유했던 타인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상대방의 동의가 없었다면 이는 악용이다. 78

 

성애적 감정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깊은 감정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서구 전통에서 이 같은 욕구는 특정 방식의 금지된 성애적 합일을 통해 충족돼 왔다. 이는, 신부-수녀 놀이를 하든 집단 폭행을 흉내 내든, 의사-환자놀이를 하든, 거의 항상 서로의 눈길을 피하고, 서로를 뭔가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위장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욕구와 행동을 잘못된 이름으로 부르다 보면, 포르노그래피나 외설물 속에서 발생하는 왜곡, 즉 감정의 악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79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계발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성애의 중요성을 외면한다면, 또는 우리가 성애적 필요를 타인들과 충족시키면서 스스로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서로를 만족의대상으로만 소비하는 것이다. 그래서는 성애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기쁨을 제대로 공유할 수 없고, 서로의 동일성과 차이를 연결시킬 수도 없다. 우리가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에 언제나 충실하지 못한다면, 그게 아무리 우리를 편안하게 할지언정, 이는 우리가겪는 경험의 상당 부분을 부정하는 짓이자, 스스로를 포르노화하고 학대하며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79

 

성애는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잇는 것이 아니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나는 내가 이제껏 함께 춤추고 즐기고 싸웠던 자매들에 대해 특별한 감정과 앎,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공동 행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같은 깊은 경험을 나누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79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서구 남성 중심적 전통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과는 이런 성애적 에너지를 쉽게 나눌 수가 없다. 나 역시 그런 방식의 삶가 감각 경험에 내 의식을 끼워 맞추려 할 때에는 이 에너지를 느낄 수 없었다. 79

 

지금에 와서야 나는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용기를 내어 서로를 마주하며 성애의 강렬한 에너지를 나누고, 그 나눔에서 오는 강력하고 창조적인 힘을 온전히 활용하는 것을 본다. 우리가 살면서 성애의 힘을 인식하는 것은, 지루하기 짞이 없는 드라마에서처럼 단순히 등장인물이 바뀌는 선에서 만족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이다. 80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심오한 창조적 원천에 가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성애를 부정하는 사회에 맞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여성적 힘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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