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젠더,
성별과 과학에 대한 재반성
제3부
과학 형성의 이론.실천.이데올로기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과학 공동체에게 틀이한 점은, 그들이 연구하는 세계가 직접적으로 근접 가능한 세계이며, 언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논리 와 실험의 요구에 의해 형성되는 개념들로 대변된다는 전제를 넓게 공유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이런 가정 위에서 <자연법칙들>은 언어의 상대성을 능가하며(실제로 이 법칙들은 언어를 능가한다), 이성의 식별력와 실험의 확증만을 요구하는 논리적 구조 안에서 기호화된다. 따라서 과학의 서술적 언어가 투명하고 중리적인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것으 ㄴ검토할 필요가 없다. 이런 가정은 과학 작업의 실제적인 요구에는 편리할 수 있지만, 그러나 고학 작업이 생산하는 대부분의 흥분과 마찬가지로 과학이 진리에 대해 주장하는 특수한 궐지주장고, 과학이 주장하는 특수한 종류의 진리 모두에 의존한다. 이것은 사실상 객관주의자의 이데올로기의 필수 불가별한 부분이다. 실천으로 옮겨졌을 때, 이것은 또한 바로 이런 주장들을 지지하는 데 놀랄 만큼 효과적인 가정이다.149
언어의 투병성에 대한 신뢰는 차례로 우리 자신의 언어가 절대적이라는 신념을 고무시킨다. 이 신념은 언어학적 감정사들을 이용하여 구성원의 자격을 정의하고, 과학의 전문 분야의 경ㅇ계를 보장하는 배타적인 이해를 지지하도록 만든다. 투명하다고 가정되는 언어가 통과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통과하지 못사도록 전문 분야의 경계르 ㄹ폐쇄하는 것은, 우리 언어의 불가피한 자기 강화적인 속성, 자기 충족적인 속성의 불가시성을 보호하는 데 이용된다. 연구중인 과학자들의 언어의 자기 폐쇄적인 성격에 대한 무관심은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연구의 타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기본가정들에 대한 내적 자각과 외적 비평을 모두 배제하도록 작용하므로 뿌리 깊은 변화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149
현대에 들어서는 <자연법칙들>이란 개념 자체가 내성 부재의 산물이며 표현으로 사용된다. 이 개념은 자신의 정치적 기원을 지울 수 없도록 표시해 주는 한 은유를 자연의 연구에 도입한다. 과학적 서술의 중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서술적 법칙과 규범적 법칙 사이의 구분이 야기된다.거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법처럼 자연업칙들은 역사적으로 위에서 부가되고 아래로부터 복종된다. <이 허위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자연법픽들을 신성이 물질에 부과한 명령으로 생각했으며,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작가들조차 자주 자연법칙들을 현상에 의해 복종되는 것으로 말하거나, 아니면 현사을 생산하느 대리자라고 말한다.>분명히 서술적 법칙과 규범적 법칙 사이에는 명백하고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들 차이 중 일부는 이미 전제된 졵론적 위계 질서르 ㄹ단순히 구현할 뿐이다. 예를 들자면, 국가의 법이 합법적인 변화에 열려 있는 반면, 자연법칙에 반대하는 어떤제도적인 의존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법칙들은 (적어도 원리상) 물질이 영원히 복종하는 규칙들이다. 보일이 1665년에 썼듯이 <신의 지혜는.... 피조물을 기존의 자연법칙들에 한정시킨다>. 관찰된 규칙성을 자연법칙으로 변화시키려는 욕망의 극단적인 예는 물론 모든 다른 법칙들을 구체화하는 하나의 <통합된> 자연법칙을 찾는 연구인데, 이때 <통합된> 자연법칙은 결코 수정되지 않는 법칙으로, 베이컨의 말을 따르자면 <자연이 중심이 되는 법칙이며, 신에게 종속되고 복종하는> 법칙이다. 150
과학 연구이 일차적인 대상으로서 자연의 법칙들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견고하여서 언뜻 보기에는 (특히 물리학에서는) 어떤 다른 대상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내성은 이런 대안을 밝혀준다. 법보다 넓은 의미를 지니면서 강제적이고 계급적이며 중앙집권화하는 함의에서 자유로운 질서의 개념은, 우리의 과학 개념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질서는, 자발적이거나 자기 발생적이거나 혹은 외적으로 부가될 수 있는 여러 양식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범주이ㅏㄷ. 이것은 법이 외적인 통제를 함축하는 그 정도만큼 법모다 넓은 범주이다. 역으로, 법이 발생시키거나 혹은 바라생시킬 수 있는 질서의 종류는 관찰할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규칙성, 리듬, 양식의 부분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을뿐이다. 분명히 일부 법개념의 용도는 다른 용도들보다 더 구속적이다. 인과론적, 결정론적 구조들 - 특히 과학법칙들을 - 언급하는 언어를 사용하 ㄹ때 특시 구속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법칙들은 조직원리와 조직된 물질 사이의 연연적인 위계 질서를 함축하는데, 이 위계 질서느 ㄴ독재주의국가의 법과 몰랄 만큼 유사하다. 예를 들자면, 뉴턴의 법칙은 엄격한 인과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우주를 기술한다. 인단 여러 힘이 구체화되면 우주의 상태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서도 시간상으로 처음 순간의 원자배열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이 모델에서 통제는 최초의 창조, 즉 우주시계 장치의 태엽 감기와 시간 맞추기 안에 위치해 있다. 그 결과 발생하는 질서는 뉴턴의 운동법칙에 의해 유지된다. 151
차례로, 결정론적 법칙들을 찾으려는 심적 경향에 의해 발생되는 실제의 이론 구조는 빈번하게 그들 자신이 내적.단일지향성 위계조직을 보여준다. 따라서 통제는 절대권력을 지닌 지배체, 예를 들어 <페이스메이커> 혹은 <주인 분자> 안에 위치할 수도 있다. 분자 생물학의 <중심 도그마>가 절절한 예이다. 즉, 분자생물학의 <중심 도그마>는 DNA를 정보의 단일방향으로 전이시키는 세포조직의 최고 지배자로 기술한다. 151
무엇이 법칙(사회뿐만 아니라 자연에서)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물론 변화하며, 모든 법칙들이 반드시 강제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물론 모든 과학법칙들이 인과론족이거나 결정론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들자면, 이 법칙들은 통계학적이거나 현상학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보다 단순히 단지 <게임의 법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어쩌면 대부분의 과학 분야에서, 이론의 궁극성은 인과론적이고 결정론적인 물리학의 고전법칙과의 유사성에 의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측정된다. 151
법칙이라는 어휘의 가장 넓은 (가장 순수하게 서술적인) 의미에서조차, 법칙이 발생시킬 수 있는 자연의질서의 종류는 언어(일반적으로 수학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질서로 한정되는데, 이 언어들로 자연의 법칙이 기호화된다. 모든 언어들이 규칙성을 서술할 수는 있지만, 지각되고 서술할 수 있는 모든 규칙성들이 현재 존재하는 과학의 어휘들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은 플라톤에서 유래된 꿈 - 이론과 현실간응이 완전한 일치를 꿈꾸는 꿈 - 의 실현 불가능성에 대한 놀랄 만한 예증을 제공한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현존하는 과학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자연현상이 어떤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저녹시킨다.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규칙성들이 현쟁의 (혹은 미래의) 이론으로 표현될 수 잇다고 가정하는 것은 자연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조급하게 한계를 부과하는 일이다. ㅇ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질서의 현시들이 우리가 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보다 심각하게 질어의 바로 그 의미조차 한정시키며, 따라서 우리으이 잠재적 이해력을 한정시키는 것이다. 152
법칙의 개념은 확장과 수정이 가능한 반면, 법칙이란 바로 그 단어는 (개념도 마찬가지인데) 정치적, 신학적 기원들로 오여모딘 채로 남아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법칙보다 질서에 관심을 두는 것은 우리의 과학 개념에서 광범위한 변화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통일된 자연법칙의 추구로부터 자연에 실제로 표현된 다양하고 복수적인 질서에 대한 관심으로 과학적 탐구의 초점이 변화하고 있음을 함축할 수 있다. 이전의 관심은 역사적으로 생물학보다는물리학을 더 잘 묘사하였다. 질서에 대한 초점 맞추기는 관심의 모델로 물리학보다는 생물학에 기대를 건다. 그리고 물리학과 생물학 양측에서 모두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정적인 체계로부터 복잡한 역동적 체계의 보다 포괄적이고 상호작용적인 모델로 포괄적이고 상호작용적인 모델로 우성순위가 이동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152
이런 변화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함축하며, 또한 이와 상관하여 과학자으이 역할엥 대한 우리의 이해의 변화도 함의할 수 잇다. 자연의 <법칙들>은 자연을 맹목적이고 복종적이며 단순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와 동시에 <법칙들>은 자신의 창조자를 권위적이며생산적이고, 자원이 풍부하며 족잡한 존재로 명명한다. 역사적으로 창조자는 신이다. 그러나 창조자와 발견자가 접목됨에 따라, 과학자는 권위의 계승자일 뿐 아니라 창조성의 계승자가된다. 이런 틀 속에서는, 과학자들이 상상할 수 잇는 법칙들은 자연 질서를 포함하고 기술하는 데 자연스럽고 완전하게 적합하다. 이와 반대로 단순히 법칙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질서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의 개념은 자연 그 자체를 보다 생산적이고 자우너이 풍부한 것으로, 즉 우리가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잇는 것보다 복잡하고 풍부한 것으로 만든다. 이런 대안적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동등하게 능동적이지만, 전지전능하지 않은 관찰자와의 상호관계에서 적극적인 동료로 보이게 된다. 정신과 자연간의 이런 관계는 다른 양식의 탐구를 요구할 수도 있는데, 이 양식은 명확하게 <스스로를 대변하는> 과학적 데이터를 가정하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물질 자체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겸양과 열린 주의력을 전제로 하는 똑같이 엄격한 탐구 양식이다. 153
법칙보다 질서에 초점음 둠으로써 우리는 우리의자연관과 과학관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자연이 법칙에 구속되는 것도 아니며 무질서하고 제멋대로인 것도 아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제안받게 되며, 과학을 객관주의적인 것이 아니며 특이하지도 않다고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제안받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복종보다는 존경을 전제로 하는 과학을 제안받는데, 여기서의 존겅은 무력하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지만 지식이 항상 그런 것처럼 불가피하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153
과학 언어의 상대적인 불침투성과 이로 인한 외부 영향에 대한 저항에 관한 내가 이전에 설명한 것을 읽은 사람은, 아마도 변화가 - 내가 제시한 종류의 변화나 다른 종류의 어떤 변화도 - 발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과학에서는 항상 변화(모델 안에서, 이론들 안에서, 목적들 안에서조차)가 일어난다. 모든 과학 중 가장 법칙엥 구속되는 물리학은 금세기에 극적인 변형을 겪었다. 나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초래한 명백한 혁명을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물리학자들은 점점 더 복잡한 현상에 주의를 기울임에 따라 시작되었던 뉴턴의 패러다임의 보다 미묘한 -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보다 급진적인 - 약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되어 전통저거인 분석틀(그리고 기술들)이 점점 더 부적당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수학 기술들의 개발을 보기 시작한다. 이런 기술들로 인해, 특별한 법칙에 따라 시간에 맞춰 진화하는 체계들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시간 의존적인 미분방정식 대신에, 체계의 내적 역학이 발생시킬 수 있는 다양한 질서로부터 특정한 종류의 질서의 출현을 설명하는 데 보다 적합한 방정식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엇다.154
생물학 역시 금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중요한 변형을 겪었다. 분자생물학의 출현으로 최고점에 달한 움직임 속에서, 종래의 <자연주의> 전통은 근대의 실험생물학의 상승 이전으로 꾸준히 후퇴하였다. 생물학은, 부분적으로는 단순성을 제1의 가치로 채택함과 동등하게 <합법적 과학>으로서의 위치를 주장했을 뿐 아니라 이런 위치를 획득했다. 그러나 오늘날, 근대 생물학의 최전선에서, 우리는 복잡성에 대한 관심이 부활함을 보기 시작한다. 분자생물학자들이 고등동물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하듯이, 그리고 분자생물학자들이 하등동물의 유전적 성질 안에서조차 기대하지 않던 복잡성을 발견함에 따라, 세퐁의 DNA 속에 상주하는 주요청사진의 단순한 그림이 붕ㅇ괴되기 시작한다. 생물학에서 일어난 가장 최근의 발전은 이런 단순한 설명들에 반발하려는 경향이고, 그 대신에 보다 동적이고 체계적이며 <상호작용주의적> 설명에 대한 새로운(어느 정도는 다시 재생된) 관심을 불러내려는 경향이다. 여기서의 설명은 단순함 속엥서 합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복잡성 안에서 질서정연한 자연의 개념에 적합한 설명이다. 154
과학에서 변화가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므로 - 모델과 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에서도 -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일단 과학적 이데올로기의자기 폐쇄적 경향이 기정사실화된다면, 이런 변화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새로운 모델의개발과 이론의 재공식화로 인해 발생하는것과 같은 변화들은, 과학적 담론ㅇ에 의해 내적으로 허용되고 또한 요구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학은 사실상 폐쇄된 체계가 아니므로 보다 급진적 변화(담론 그 자체 안에서의 변화)가 가능하다. 자연이 - 제한된 자연보다 항상 더 풍요로우므로 - 필연적으로 우리의 법칙을 초월하듯이, 과학의 실천은 - 항상 과학의 이데올로기보다 풍요로우므로 0 스스로의 규범들을 초월한다. 이 두 개의 전선, 과학과 자연 사이의 한 전선과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실천 사이의 한 전선에서, 과학의 자기 정의는 다루기 쉬운 상태로 남아 있다. 실천면에서 과학자들은, 획일성으로 몰고 가려는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같은 분야에서조차 경미하게 다른 방언을 말한다. 우리는 규범에서 벗어나는 자연에 대하 ㄴ시각과 자연과의 고나계를 갖고 있는 개개인들을 거의 항상 발견할 수 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잘 서술된 공동체 안에서조차 여러 다른 질문들이 제된다. 동시에 자연 안에서의 질서는 우리가 만들 수 잇는 법칙들보다 광범위하므로 예기치 못했던, 외관상 변칙적으로 보이거나 현명하지 못하게 보이는 여러 대답들이 기록된다. - 그리고 때때로 들리기조차 하다. 바바라 맥클린톡의 생애와 연구에 대한 이야기는 이 두 종류의 잘못된 생산적 결합을 생생하게 예증한다. 155
이 두 종류의 간격 때문에, 즉 자연의 법칙과 자연의 관찰할 수 있는 질서 사이의 간극과, 과학의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실천 사이의 또 다른 간극 때문에, 의미 있는 질문들과 만족스러운 대답들을 정의하는 전제들 안에서 점차적인 변동이 발생할 수 잇고 또한 발생한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나 혹은 과학 공동체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복수성을 인식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규범에서 벗어난 질문들과 응답들이 가끔 들리지 않는다. 변화의 실현은 항상 내적 저항의 망상 조직에 반대하여 작용한다. 155
내가 지지하고 있는 변화의 경향이 이제는 명백해졋을 것이다. 변화를 위한 어떤 기획도, 현재 진행되는 과학 지식을 산출할 때 일어나는 페쇄성과 개방성 사이의 변증법의 실제 작용에 대해 여러 다양한 관점에서 면밀히 주의를 기울이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변화의 표시들은 매우 깊게 숨겨져 있어서, 이런 변증법의 작용에 대해 알아내기가 힘들고, 그리고 이런 분석들은 기초단계에서는 필연적으로 조용하다. 156
다음에 전개할 논문들은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각 논문은 과학의 창출과 해석에서 행해지는 이론, 이데올로기, 실천의 상호작용의 예증을 제공한다. 마지막 논문은 끝부분에서만 성별이 명확한 논점으로 제시되지만, 그러나 성별은 이 3편으이 논물 전반에 내포되어 있는 논점이다. 성별 이데올로기가 과학 이론으이 형성에서 명확한 힘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은 사실이다. 성별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일반적으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영향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간접적이다. 선호된 목표들, 가치들, 방법론들, 설명들을 형성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각각의 예에서 확인된 이데올로기의 압력들은, 앞에 있었던 논문들의 견지에서 볼 때 남성성의 특수 개념에 현대과학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156
제7장 <현대물리학에서의 인식의 억압>은 <성별과 과학>의 자매편으로 1979년에 집필되었다. 이 장에서 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난 양자역학의 해석에 대한 토론들을 상세히 살피며, 이론 그 자체가 원칙적으로 현실의 완전한 재현을 제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현대 물리학자들의 계속되는 저항을 추적한다. 이런 저항은 한편으로는 자연 질서를 법칙으로 축소하려는 뿌리 깊은 욕망의 증거로 간주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에 의해 부정되어 왔다고 광법위하게 추정될 수 있는 객관주의 철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증거로 보여질 수 있다. 156
제8장 <세포 변형균의 집합 이론에서의 페이스메이커 개념의 위력>은 수리생물학자로서의 내 자신의 경험을 참조하여 쓴 논문인데, 이 장은 20세기 생물학에서 우세했던 <주인 분자>이론에 대한 편애의 구체적 예증을 제시한다. 제7장과 마찬가지로 이 장은 법칙보다 질서에 대한 흥미로부터 출현하는 이론적 서술에 대한 예증으로 읽힐 수 있다. 유전학자 바바라 맥클린톡을 다룬 마지막 장은 법칙보다는 질서, 정복보다는 존중을 전제로 하는 과학관을 가장 철저하게 발전시킨 설명을 제시한다. 맥클린톡의 관점 중심에는, 훌륭한 연구는 무엇보다도 <자료들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기꺼이 주의 깊게 들으려는> 자세를 요구한다는 그녀의 주당이 위치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그녀의 생애와 연구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온 주된 주제들을 개괄하고, 이 주제들과 성별과 과학의 주제와의 연관성을 논의한다. 157
각각의 논문은 여러 다른 관점들 사이의 긴장을 기술한다. 원칙적으로 이런 긴장들이 변활르 이루는 데 아무리 생산적이라 할지라도, 이것들은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개입에 의해 억압된 채로 남게 된다. 양자역학의 의미에 관한 토론은 지금까지 교착상태에 빠져 있고, 세포 변형균의 집합 이론 내에서 페이스페미커의 문제는 아직 미해결 상태이며, 맥클린톡 연구의 중요성은, 비록 현재 그녀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현대과학의 이데올로기적 관심은 탄탄하게 확립되어 있으므로, 이 관심이 발생시키는 변화에 대한 저항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157
제7장
현대 물리학에서의 인식의 억압
양자역학은 이론으로서 50년 이상 놀랄 만한 성공을 얻은 후,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 모두를 계속해서 괴롭히는 해석의 문제들로 포위된 상태이다. 나는 여기서, 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에 적합한 인식적 패러다임을 형성하지 못한 결과로 양자역할의 의미에 대한 토론이 방해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리학자들이 제공하는 관습적 해석들은 자연의 객관성 혹은 인식 가능성이라는 고전물리학의 두 가지 근본신조 중의 어떤 하나를 암암리에 보존하기 때문에, 두 개의 방법 중 한 가지 방법에서 부적당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대신에 한편으로는 인식자와 인식대상 사이의 필수 불가결한 상호관계를 인지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과 현실 사이의 동등하게 필수 불가결한 간극을 존중하는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159
피아제는 과학적 사고의 역사적 발전과 어린아이의 인식 발달을 비교하였다. 이 두 사고는 모두 불연속적인 구조적 조직과의 단계들의 출현을 통해 진행되며, 각 단계는 개념적 통합의 새로운 가능성을 동반하며, 이와 동시에 지각된 새로운 수준의 조직에 대해 말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반한다고 주장되었다. 새로운 개념 구조가 확립되기 이전에, 비언어적 형태(예를 들면, 재현 기획들보다는 감각운동의 형태)로 이미 현존하는 지식은 어떤 표현 수단도 찾지 못하며, 이전에 확립된 구조들과 충돌하는 만큼 인식적 억압을 요구한다. 피아제는 <의식적 개념의 체계로 통합될 수 없는 행동 기획은 삭제되고... 그것이 개념화된 형태로 그곳에 치미투하기 전에는 의식 영역으로부터 억압된다>고 말한다. 각 단계들 사이의 과도기 안에 사로잡혀 있는 어린아이는, 아직 이용될 수 없는 인식 구조들을 요구하는 지각들을 명확히 표현하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 혼란, 거부, 회피를 표현하며, 이런 태도들은 감정적 억압 기제를 놀라울 정도로 연상시키는 불균형이다. 160
이 논문에서 나는 과학의 역사는 이와 유사한 과도기를 보여 주며, 특히 주목할 만한 예를 현대 물리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뉴턴의 세계관이 첫번째 급격한 충격을 받은지 4분의 5세기가 지난 오늘날, 상대성 이론과 즉시 뒤따라 나온 양자역학에 의해 시작된 변혁의 여러 함의들에도 심오한 혼란이 존재한다. 이 혼란은 철학적 대중과 일반대중 사이에서 만큼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분명하다. ...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조차, 특히 양자역학이 요구하는 새로운 통합에 대한 편안하고 안정적 표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표현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명목뿐인 일치와 의견의 동의에 의해 얇게 가려진 해석들과 부분적인 타협의 진열 속에 반영되어 있다. 160
이 마지막 논점에 대해서는 강조점을 두고 보다 상세하게 설명을 해야 겠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의 함의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으려는 일반적 경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양자역학의 지위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믿음을 보인다. 양자역학의 이론적 지위에 대한 믿음은 50년 이상의 실험적 지지에 의해 충분히 정당화된다. 문제가 되는 점은 이 이론의 해석 가능성과 <의의>에 대한 신념이, 해석의 문제들을 논의하지 않으려는 경향과 나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현재 진행되는, 그리고 자주 가열되는 토론들은 철학적 성향을 지닌 소수 물리학자들의 모임에 일반적으로 국학된다. 대다수의 나머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의 의미에 대한 문제들이 소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광범위하게 불리우는 해석에 의해 <이미 다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진정된 연구는 다음과 같은 암암리의 혹은 명확한 이중적 메시지에 의해 좌절된다. 1) 이런 질문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탐구자의 이해의 실패의 명백한 증거일 뿐이며, 2) 이런 질물들은 <단지> 철학적인 질문이므로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
코펜하겐 해석이란 단어는 일종의 우산을 구성하며, 그 우산 아래에는 일군의 서로다른 그리고 가끔은 상호 모순적인 입장들이 공존해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을 인식하게 되면 자기 방어와 회피에 대해 명백히 깨닫게 된다. 불일치의 특수 본질이 드러나면 회피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특히, 기존의 인식 구조와는 전혀 다른 인식 구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회피되고 있다. <고전적 객관주의>라 부르는 기존의 구조는 세상에 대한 계통적 기술과 과학이 탄생한 이래로 과학의 특성을 결정해 왔던, 인지자로서 우리와 세상과의 과녜에 대한 일련의 계통적 기술들로 구성된다. 양자역학을 둘러싸고 있는 혼란은, 고전적 입장을 구성하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구성요소들을 보유하는 기능에 봉사하는 여러 신념에서 유래한다. 161
슈뢰딩거는 과학의 두 가지 근본신조를 자연은 1) 객관화할 수 있고 2)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규정한다. 첫번째 신조는 객관적 실재를 가정한 것으로, 객관적 실재는 관찰자로서 우리와의 완전히 분리되고 완전히 독립된 존재를 지닌다. 이 신조는 고전적 입장의 특징인 주체와 객체 사이의 근본적인 이분법을 표현하는 원리이다. 이 신조는 우리 밖의 실재는 객체들로 구성된다는 암암리의 가정을 그 내부에 포함하는데, 이 추가사항은 비록 논리적으로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실천상으로는 고전적 관점의 전조는 아니더라도 거의 필수적인 부수물이다. 이렇게 결부시키는 이유는 명백하게 윤곽이 그려진 객체들로 구성된 세계는 분열을 야기하고 촉진시키기 때문에, 이 분열 안에서 주체는 자신의 실체를 가진 객관적 존재 자체로부터 분리된다. 코이레의 말에 따르자면 <우리가 세계를 두 개로 분리하는 것>의 책임은 일반적으로 바로 이 움직임이다. 162
그러나 주체로서의 우리와 객체로서의 실재 사이의 완전한 분리를 가정하는 세계관은, 지식을 전혀 허용하지 않기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과학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과학은 슈뢰딩거의 두번째 신조가 추가될 때 즉 매우 객관환된 자연은 진실로 인식될 수 있다고 믿을 때 탄생한다. 인삭자로서의우리와 인식대상으로서의 실재의 관계가 여기서 가정되어야만 할 뿐 아니라, 가정된 이 관계는 매우 특수한 성질을 띤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이것은 과학 정신과 자연 세계 사이의 일치를 암축하는데, 여기서의 일치는 정신과 항상 사이의 유사한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왜곡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그리고 생략하지 않은 채 실재의 법칙을 읽도록 해 준다. 자연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이론과 실재간의 1대 1 대응관계에 대한 믿음을 함추한다. 그 결과로 생기는 지식을 <객관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도 주체와 객체 사이의 명백한 분리 이상의 것으로, 우리 자신 내에서의 분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과학 지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인해 객관적이 된다. 첫번째로는 감정적으로 채색되고 그것으로 인해 오염된 다른 행태의 지식들과 분리됨으로써 객관적이 되고, 두번째로는 자연의 객체들과 초절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객관적이 된다. 과학 정신과 자연 사이의 적절한 결합은 세속적 성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 정신이 독특하게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갖추고 있는 자연 혹은 신과의 직접적 교류의 형태에 의해 정점에 달하게 된다. 162
객관주의의 이 두 구성요소들 안에 내재된 상충하는 충동들은 고전적 뉴턴의 세계관 안에서 훌륭한 해결책을 발견한다. 이들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에 과학적 노력의 명백한 목표인 권력과 초절의 이중 목적을 구분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금욕적이고 엄격하며 감각의 세계에서 제거된 종교 신비가로 간주하는 낭만적 관점이 생겨났을 뿐 아니라, 동시에 과학을 자연의 지배, 통제, 정보 등에 헌신하는 학문으로 간주하는 과학기술적 관점이 생겨났다. 이들의 초기의 근원을 분석해 보면, 이런 충동들이 어떻게 합작하여 과학 연구의 (집합적이고 개인적인) 특성을 생산하는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분석의 가능성들은 상상력을 요구하므로, 이점에 대해서는 후에 좀더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먼저 나는 이 두 구성요소들이 양자역학의 영향 아래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63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런 패러독스를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 다양한 정도와 조합상태로 존속해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잘못을 우리는 도식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첫번째 잘못은 소위 통계적 해석에 있는데, 이 통계적 해석에서는 체계의 상태가 유사하게 준비된 여러 체계의 개념적 집합에 대해서만 기술한다고 주장된다. 이 통계적 해석은 개별 체계에 대한 어떤 지식도 주장하지 않으며, 혹은 사실상 가능하다고 간주하지도 않는다.
양자역학의 해석들에 침투한 두번째 발못은 파동함수 자체에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실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 잘못은 양자역학 상태가 체계에 대해 완전하고 철저하게 묘사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관점들 안에 내재한다. 165
많은 저자들이 관찰행위가 파동함수의 수축을 <야기>했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이런 축소를 유발시킨 관찰행위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다 심층적인 토론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위그너는 체계에 물리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현재 지각된 것을 행사하여 그 체계로 하여금 명확한 위치, 운동량, 혹은 입자의 각을 지닌 상태가 되도록 강요하는 것이 바로 인식행위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는, 물리학에서는 모든 작용에 반작용이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이 현상에 강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도 현상이 우리의 의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 아니라고 논한다. 그러므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바로 그 인식행위에 의해 명확하게 살아 있거나 죽은 상태로 귀납될 수 있을 것이다. 166
이것은 때때로 양자역학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라 불려지는 가장 극단적인 일련의 입장인데, 이 입장은 모두 광범위하게 코펜하겐 해석과 관련된다. 이 해석들에서 주관적이란, 주체와 객체의 독립을 믿는 고전적 신념이 포기됨을 의미한다. 경험은 고전적 이분법의실패를 증명한다. 객체와 주체는 필연적으로그러나 미묘하게 서로 엉켜 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만족할 만하다. 어려움은 이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데서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이론적 묘사에 포함되지 않은 실재의 여러 측면들을 기꺼이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체계 그 자체, 예를들면 전자가 우리의 관찰에 반응하여 굽어지거나 비틀리거나 혹은 붕괴되어야 한다. 이런 체계는 고전적 입자일 수 없다. 고전적 입자들은 <확산되지도 않으며>, <붕괴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고전적 설명을 포기하고실재에 우리의
이론적 묘사의 설명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체계가 이 특이한 객체, 파동함수라고 암암리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주체-객체의 이분법은 포기했지만, 실재와 이론 사이의 1대 1 대응에 대한 집착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해석들에서는 자연의 <이해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객관화 가능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보유된다. 그러므로 실재는 이론에 스스로를 순응시키려는 노력을 하다가 만족하는 사람을 거의 남겨놓지 않은 채 필연적으로 다사 이상한 속성을 띠게 된다. 167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이론가들은 점점 더 기이한 대안을 제기했다. 여러 인식적 패러다임들 사이에 갇힌 어린아이처럼 물리학자들이 제시한 기발한 차가상은 아주 인상적이다. 167
이 모든 혼란은 모든 문제들을 없애야 회피될 수 있다. 현대과학을 둘러싼 강력한 실증주의적 에토스는 몇몇의 아마도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실재의 정의를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이론적 경험주의적 지식체에 제한하고, 또한 연구되고 있는 체계들의 실제의 본질과, 이 체계와 우리의 관계에 관한 모든 질문들을 의미 없는 것으로 선언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이런 태도에 대해 비판하려 들지 않으면서, 나는 단지 명확한 사실만을 지적하고 싶다. 즉, 이 태도가 비범할 정도로 편리한 덮개를 제공하며, 이 덮개 아래에서 세계와, 세계와 과학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종류의 이전의 신념들이 비밀스럽게 거주할 수 있고 거주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단순히 "네 질문은 의미 없는 것이야"라고 말함으로써 피앙제의 힘든 질문들(현재 존재하는 인식적 패러다임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질문들)에 대답하려는 어린아이에게 이와 유사한 허럭을 해주지 않는 것은 매우 나쁘다. 168
이 지점에서 왜 고전적 패러다임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일이 어려운가를 질문해야만 한다. 피아제는 인식의 억압을 보다 오래된 기존의 구조들의 친숙함과 성공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며,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그가 옳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확실히 과학의 고전적 신조들은 이상할 정도로 성공적이라고 판명되어 왔응며, 대부분의 과학 영역에서 계속해서 그렇게 판명되고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관한 토론들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증명되어 왔던 혼돈들, 그리고 이런 토론들이 야기할 수 있는 강렬한 감정은 종래의패러다임의 안락함과 성공 이상의 것이 위험체 처해 있음을 시사한다. 파아제의 발달 이론 체계의 최대 약점은 발달과정에 끼치는 감정적 요소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점이다. 자기 중심성, 전능성, 객체의 연속성은 모우 인식관계뿐만 아니라 감정관계의 영역에서 심오한 의미를 지닌 허위들이다. 비록 피앙제의 인식 발달에 대한 이해와 감정 발달의 정신분석적 이해를 통합하려는 어떤 시도가 있었지만, 이것은 보다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주석을 차례대로 서술하고자 한다. 168
우리는 피아제와 정신분석으로부터, 객관적 사고와 지각의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다소 정신적 자율을 - 다의성과 긴장에서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를 - 얻으려는 고통스럽고 오랜 투쟁의 일부분으로 습득된 것임을 알게 된다. 자아를 다른 타자와 구분하려는 내적 압력(에고의 자율성에 대한 역사적 강조로 인해 한층 격화된 압력) 때문에 우리는 이 구분을 위협할 수도 있는 여러 소원이나 경험들에 대한 근심으로 심하게 상처받기 쉽도록 방치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런 근심이 때때로 우리의 감정적, 인식적 환경에 극도로 구분된 구조를 부과함으로써 완화딜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과학에서 객관화는 이와 관련된 기능을 도와 줄 수도 있는 듯이 보인다. 과학이 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전제의 주장뿐 아니라 객체와 주체의 분리는 감정이 잔뜩 실린 분리의 동기에서 유래된 것일 수도 있으며, 그래서 자율감각을 지지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의 객관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 계속적으로 집착하는 일은 이런 믿음이 도와주는 감정적 기능들에 의해 보조를 받게 될 것이다. 169
이와 유사하게 자연이 <인식 가능>하다는 전제에 대한 고수는 심리학적 어휘로 조명될 수 있다. 인식자와 인식된 객관적 실재 사이의 완벽한 일치라는 이상은, 어린이들 사이에 편재하는 마법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사상들을 놀라울 정도로 상기시킨다. 이 이상은 현재 마법의 영역에서 벗어나 과학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전능성에 대한 계속적인 믿음을 표현한다. 자연과의 초절적 연합의 비전에 기초를 둔 이 이상은 다른 영역에서 거부된 연결관계에 관한 원초적 필요를 만족시킨다. 이와 같이 이 이상은, 객체와 주체의 경계가 결코 엄격하다고 인정되지 않으며 또한 어떤 종류의 지식도 결코 완전하지 않은 세계와의 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성숙한, 보다 겸손한 관계를 수용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런 틀 안에서 나는 양자역학의 모순은 더 이상 그렇게 문제가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169
인식 가능성과 객관화 가능성이라는 이 두가지 신조는 사라질 필요가 있다. 양자역학에 대한 증언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이런 신조들이 과거에 아무리 성공적이었다 할지라고 이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증언은 고전저거 패러다임의 어떤 잔재를 보유하려고 암암리에 시도하는 해석들로 인해 불분명해진다. 해석의 지배적인 두 학파인 통계적 확파와 코펜하겐 학파는 각각 상대방의 지지자들에게 명백해 보이는 부적당성으로 고통받으며, 그래서 이 두 학파 사이의 토론은 계속된다. 이 논쟁을 해결해 줄 해결책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양자물리학자들이 고전물리학의 두 기본전제 중응이 하나에 집착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때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을 반영한다. 양자역학에 내재된 비전은, 여러 관습적 해석들이 우리에게 제공했던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인 인식적 패러다임 내에서의 표현을 기다린다. 170
제9장
차이의 세계
만약 우리가 과학이 달라질 수 있는 방식들에 관해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바바라 맥클린톡 보다 더 절절한 안내자를 찿을 수 없을 것이다. 복불장군이며 몽상ㅇ가로 동료들에게 알려진 맥클린톡은 유전학사에서 중심적인 위치와 동시에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는 매우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러나 매번 그 위치는 이질성으로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179
맥클린톡의 초기 경력을 예리하기 묘사하는 성공과 주변성이라는 이중적 주제는, 그녀의 전체 직업 인생 내내 셰속해서 주동기가 되고 있다. 동료들의 충심어린 존경과 경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장 중요한 연구는 최근까지 대부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날로 발전하는 생물학적 사로 속으로 완전히 통합되지도 않았다. ... 맥크린톡은 오늘날에도 자신을 여러 결정적인 면에서 현대 생물학계의 국외자로 간주한다 - 그녀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철학적 방법론적인 괴짜이기 때문이다. 180
그러나 유전자 전위의 의의는 아직 상당한 토론의 여지가 남아있다. 맥클린톡은 전위 가능한 요소들을 발생적 통제의 비결로 간주한다. 오늘날의 분자생물학자들은, 비록 20년 전 혹은 10년 전보다는 이런 가능성에 훨씬 동정적이지만, 여전히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전위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유기체가 이용할 수 있는 생존장치로 간주하는 맥클린톡의 의견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완전한 이단인 듯 보인다. 181
여기에서도 나의 관심은 누가 <옳은가>라기보다는 이런 의견의 불일치의 배후에 있는 인식의 차이들이다. 맥클린톡의 경력의 변화는 이런 차이점을 예리하게 부각시킬 뿐 아니라 특별히 중요하게 만든다. <<유기체에 대한 느낌: 바바라 맥클린톡의 삶과 연구>>에서 나는 성공과 주변성이라는 이중성 때문에 그녀의 경력이 과학사와 과학철학에서 주요한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녀의 성공은 과학자로서 그녀의 정당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반면, 그녀의 주변성으느 과학 지식이 성장할 때 행해지는 이단자의 역할과 운명에 대한 검토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 이중성의 가치, 방법적 양식, 목표 등의 다양성, 다시 말하면 다양한 정도로 과학에 항상 존재하는 다양성을 예증한다. 동시에 이 이중성은 그 다양성을 포함하기 위해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작용하는 압력들을 예증한다. 182
이 논문에서 나는 관심의 초점을 명확히 차이에 두고 있다. 나는 맥클린톡의 자연관, 과학관, 인간 정신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을 격리시키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관점들이 보다 관습적인 관점들로부터 출발하였음을 보여주고, 또한 그 관점들의 내부적 일관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만약 우리가 이 세계관 안에 ㅇ있을 수 있다면, 그녀가 제기한 질문들, 그녀가 추구한 해답들, 그리고 과학 지식을 추구하면서 그녀가 사용한 방법들이 이 세계관 밖에서 얻기 어려운 명확성과 이해 가능성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83
복잡성과 차이
맥클린톡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의 상상력을 내무 능가하는 선험적 복잡성의 특징을 지닌 존재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어떤 것이나 모두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그녀의 반복되는 말은 발견자로서의 우리들의 천재성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능력이 아닌 자연의 능력에 대한 진술이다. 적응성의 의미라기보다는 거대함과 풍부함의의미로 의도된 것이다. 유기체들에게는 과학자들이 겨우 추측만 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삶과 질서가 있다. <모든 것을 기존의 도그마에 맞추려고노력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적합할 중심 도구마 같은 것은 없다>라는 말은 당연하다. 184
만물에 질서가 있다는 그녀의 생각 때문에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자연의 복잡성이 우리 자신의 상상적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험이 당신에게 무엇을 할지 말하도록 해야 한다>. <이미 연구된 업적은 주로 그 업적에 어떤 해답을 강요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이미 준비된 해답을 가지며, 대상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말하기를 원하는가를 알며, 그러므로 대상이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은 지니실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실수라고 생각하고 그 연구를 중단한다... 대상이 당신에게 말하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될덴테.> 184
개인적인 차이에 대한 존경은 그녀의 과학적 열정의 중심에 위치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것과 차이가 나는 옥수수의 한 낱알을 바라보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개발하는 일이다. 만약 어떤 것이 적합하지 않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으며, 당신이 바로 그 이유를 발견해양 한다.> 그녀는, 종류와 숫자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태도는 연구자들로 하여금 차이를 간과하도록 고무할 뿐 아니라 <그것을 예외, 이탈, 오염된 것으로 부드도록> 고무한다고 믿는다. 185
차이를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차이가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을 으미하지 않는다. 맥클린톡의 세계관에 따르자면, 자연의 이해는 차이에 의존할 수 있다. <예외들은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예외들은 자신들 안에 그리고 자신에 관해 의미를 지닌다. 이 점에서 차이는 이분화된 원리(주체-객체, 정신-물질, 김정-이성, 무질서-법칙)와는 다른, 세계를 질서화하는 하나의 우너리를 구성한다. 이런 대립들은 특정한 쌍의 짞 하나를 전형적으로 배제하거나 삼켜 버리는 우주적 통일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통합된 법칙을 향해 나아가는 반면, 차이에 대한 존경은 목적 그 자체로서 복수성에 만족한 상태로 남는다. 185
그리고 차이가 의미하는 지식의 귀착점이, 구분이 의미하는 지식의 귀착점과 구별될 수 있듯이, 지식의 출발점 역시 구별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세계관에서 차이는 구분을 인식론적인 필요조건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 차이는 자연, 혹은 정신, 혹은 정신과 자연의 관계에서 명확하고 확고한 구분의 필연성을 함축하지 않는다. 구분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저리를 강요한다. 차이의 인식은 연관성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차이의 인식은 자연 안에 있는 새로운 연관성의 양식들에 대한 열쇠로 사용되며, 또한 자연에 직접적인 관심을 쏟도록 존재한다. 그녀에게 차이에 대한 존경은 확실히 이런 기능들에 이용된다. 적합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것은, 그녀에게 그것이 적합하게 되는 보다 거대한 다차원의 양식을 발견하도록 고무시키는 도전이다. 옥수수의 돌연변이 낱알은 무질서나 무법의 증거가 아니라 더 큰 질서의 체계, 즉 단일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질서 체계의 증거이다. 186
그러므로 차이는 개개인의 특성을 보존하도록 허락하는 한 형태의 이해와 관심을 불러낸다. 양식을 만들려는 우리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각 낱알의 완전성은 살아 남는다. 자연 질서는 질서화하려는 우리의 능력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 초월은 각 유기체의 영속적 독자성안에서 증명된다. <어떤 두 개의 식물도 똑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다르며, 그 결과 당신은 그 차이를 알아야만 한다.> <나는 어린 묘목부터 시작하여 계속 그 식물을 지켜본다. 만약 내가 그 식물을 주곧 지켜보지 않는다면, 그 식물의 이야기를 정말로 안다는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밭에 심어 있는 모든 식물들을 안다. 나는 그것들을 아주 잘 알며, 그들을 아는 것에서 굉장한 기쁨을 느낀다.> 여러날, 여러 주일, 여러 해 동안 끈질기게 관찰을 하면 특권적 통찰력 같은 것이 생기게 된다. <만물을 바라볼 때, 나는 그것들을 즉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녀가 연구한 모든 식물의 <자서전>을 쓸수 있을 정도의 분명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186
그녀가 기술한 식물들과의 관계에서, 차이에 대한 존경은 인간관계에서처럼 우리의 관심뿐만 아니라 감정이입의 능력에 대한 주장일 수 있으며, 요컨대 지고한 사랑의 형태, 즉 차이를 소멸시키지 않는 친근함을 허용하는 사랑에 대한 주장일 수 있다.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폭넓게 감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한 행태의 관심, 실제로는 한 형태의 사고를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한 언어에 충실하게 사용하였다. 그녀의 어휘는 끊임없이 애정, 친근감, 감정이입의 어휘이다. 186
그녀가 자신이 연구한 대상들에게서 경험한 친숙함은 - 일생 동안 닦은 주의력에서 생긴 친숙함인데 - 과학자로서의 그녀의 힘의 원천이다. 187
인식과 지각
이 차이의 세계에서는, 혼란을 야기하지 않고서도 구분을 포기할 수 있다. 자아와 타자, 정신과 자연을 상호 소외, 혹은 공생융합 상태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완전함 상태로 생존한다. 그녀가 출륭한 연구의 필요조건으로 지지하는 <유기체에 대한 느낌>은 <신비적 참여>로 읽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모든 과학자가 추구하는 우리 주변의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지식의 한 접근 양식으로, 이 접근 양식은 과학 내에 널리 퍼져 있는 관습에 의해 공격받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인간 경험에 의해 공경받는다. 이것은 스캑텔이 개발한 <초점적 관심>의 개념을 강력하게 상시시키는 주의의 형태로, 스캑탤은 개념으로 객체에 완전히 자신의 주의를 집중시켜 <가능한 한 많은 측면에서 객체를 지각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나타냈다. 시캑텔의 언어로 <초점적 관심>은, 객체 그 자체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관심과 협력하여 우리가 단순한 소망과 갈망에서 사고와 인식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는, 그 나름의 관점으로 실재에 대해 가장 완전하게 가능한 지시기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주요한 연장이다. 이와 같이 <객체 중심적> 지각은 <모든 지각자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노력의 일시적 실추, 자아와 자존에 대한 모든 전념의 일시적 실추, 객체로서으이 완전한 전향의 실추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 다음, 이 전향은 자아의 상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고양된 느낌으로 이끈다.> 객체 중심적 지각은 <완전하고 독특한 존재 안에서 타자들을 인정하기를 원하는 사랑... 즉, 인간이 일부분을 구성하는 똑같은 세계의 일부분으로 객체들을 인정하는 사랑>에 이용된다. 188
스캑텔과 맥클린톡의 차이점은, 스캑텔이 과학자의 지각 양식과 대비하여 시인의 지각 양식이라고 인정한 것을 맥클린톡은 동등하게 과학의 지각 양식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모든 과학자들에게 공통적인 폭표를 추구하면서, 다시 말하면 자연 질서에 대한 믿을 만한(공유할 수 있고 재생산할 수 있는) 지식을 추구하면서, 살아 있는 유기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의를 완전하게 요구하는 모든 객체에 대한 느낌인 <유기체에 대한 느낌>의 협력을 얻는다. 188
이 차이점은 스캑텔의 과학관의 한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이 차이는 맥클린톡과 같은 과학자들의 관찰로부터 끌어낸 것이 아니라, 보다 틀에 박힌 과학자, <한 가지 혹은 여러 종류의 가설을 염두에 둔 채 객체를 바라보고... 그리고 가설을 확증하거나 논박하기 위하여 객체를 이용하지만 그러나 완전하게, 객체 그 자체의 상태로 완전하게 대면하지 못하는> 보다 틀에 박힌 과학자로부터 단지 끝어낸 것이다. 189
맥클린톡에게 과학은 다른 목표를 가진다. 예언 그 자체가 아니라 이해이다. 조정하는 힘이 아니라 힘의부여, 즉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종류의 힘,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반영하고 동시에 인정하는 종류의 힘이 목표인 것이다. 189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
그녀와 진부한 과학자들 사이의 이런 차이의 근원에는 자연의 명령이라는 아직 검사되지 않은 과학의 출발점이 존재한다. 모든 과학의 토론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토론의 기저에는 이런 토론이 일어나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보다 큰 전제가 존재한다. 이 보이지 않는 기반의 힘은, 과학내의 어떤 특별한 논쟁에 끼친 이 기반의 영향력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 기반이 논쟁의 어휘들을 주조한다는 사실인, 과학의 무언의 목표들과 목적을 이 기반이정의한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내가 제3부 서론에서 밝혔듯이, 과학자들은 근본적인 철학적 논지들에 대해 사고하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은 채 놀랄 만하게 성공적인 예언력을 가진 자연 이론을 정립하면서 성공적인 생애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성공에 대해, 자연에 대한 대안적이고 과학적 묘사의 가치에 관해, 그리고 성공의 대안적 기준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아직 이의가 제공되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가정ㅇ들을 고찰함으로써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190
비록 모든 과학자들이 지식이라는 공통된 야망을 공유한다 할지라도 무엇이 지식으로 간주되는강 대해서는 공통적인 의견의 일치에 이르지 않앙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과학의 역사는 제기된 질문들, 추구된 설명들, 자연 세계의 지식에 대한 이 공통적 추구에 사용된 방법론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다양성은 그 다음 차례로는, 습득된 여러 종류의 지식 그리고 실제로 지식으로간주되는 것에 반영된다. 우리가 제기한 모든 종륭의 질문들과 우리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한 설명들은, 상당한 정도로 연구의 객체아 우리의 선험적 관계에 의존한다는, 특히 우리가 ㅇ유사함을 느끼는객체들에 과냏 제기된 질문들은 우리가 변함없이 이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객체들에 대해 제기된 질문들과는 다른 듯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맹목적이고 단순하며 말이 없다고> 존재론적ㅇ로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자연 세계에 관한 만족스러운 설명들은, 복잡하고 그 자체로 풍요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자연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분명히 불만속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개인적 자연관과 공동의 자연관은 모두 인과적 결정인자로서가 아니라, 개발된 모든 과학 프로그램들의 틀로서 그들이 과학사 내에서 한 역할 때문에 검토될 필ㅇ요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는 캑클린톡의 자연과고가 그녀 주변의 공동체 안에서 우세햇던 자연관 사이의차이가 그녀의 살뫄 연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주용한 열쇠가 된다고 주장한다. 190
예를 들자면, 이 차이점은 유전학자로서의 맥클린톡 관심과, 역사적으로 고전유전학과 분자유전학 양측 모두의 제한적인 관심의 초점이었던 것 사이의 차이, 즉 그녀가 택한 특별한 연구방향에 중요했던 차이를 검토하는데 필요한 컨텍스트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유전학자들에게 유전의 문제는 유전자의 구조와 메커니즘을 이해함으로써 해결된다. 그러나 많은 다른 생물학자들에게서처럼 멕클린톡에게도 매거니즘과 구조는 <유전자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의 관심의 초점은 기능과 유기적 기구라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적절한 이해는, 정의상 유전자들이 그 세포의 나머지 부분과 관련하여 어떻게 기능하는가, 그리고 물론 유기체 전체와 관련하여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포함해야만 할 것이다. 191
그녀의 언어에 따르자면, 세포는 그 자체가 유기체이다. 사실 <유기체의 모든 구성요소는 모든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유기체이다.> 그러므로 <유전자를 가장 중요한 존재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 전체적인 유기체가 보다 중요하다>라고 그녀가 말할 때, 그녀는 전체로서의 게놈, 세포, 세포 집합체, 유기체 자체를 의미한다. 유전자는 <실에 꿰인 구슬>도 아니며, 기능적으로 분해된 DNA의 단편들도 아니다. 유전자들은 조직화된 기능적 단위들이며, 그들의 기능은 전체로서의 유기적 기구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의해 규정된다. 그녀가 말하듯이 유전자들은 <그들이 발견되는 환경을 받드시 고려하면서 기능한다> 191
그녀에게 발생은, 기능과 대등한 것으로 유전학에서 절대 필요한 부분이다. 191
성별의 문제
이 지속적인 (그녀와 그녀 동료들의 관심과 연구 사이의 차이)차이점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맥클린톡이 여전히 남성이 지배하는 분야엥서 활동하는 여서어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가? 196
성공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적당히 사회화됭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여성 과학자들과 그들의 남성 동료들 사이에 예리한 차별을 기대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며,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여성 과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들으면 경악할 것이다. 197
이런 의미엣 맥클린톡은 예외가 아니다. ... 그녀에게 과학은 성별의 문제, 다시 말하면 여성 혹은 남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 반대로 과학은 <성별의 문제가 사라지는> 장ㅇ소이다. 더 낭아가 과학에 대한 그녀의 몰두는 성별을 완전히 초월하려는 그녀으이 일생의 소망과 일치한다. 197
나는, 맥클린톡의 동료들이 그녀의 과학관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실제로 자가당착적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녀는 과학자로서 주변적 지위조차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197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 있으나 남성이 아니므로, 성별로부터 자유로운 그녀의 과학은 구속을 받았다. 성별의 개념이 과학의 근본범중에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 참여는 변형을 겪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이야기에서 맥클린톡과 성별의 관련성은 개인의 사회화에서 성별이 한 역할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추구에서 하는 성별의 역할 바로 그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198
과학자 대부분은 남성이다. 그리고 남성성과 과학에 대한 남성 과학자 개개인의 태도가 아무리 다양하다 할지라도, 정신과 자연의 결합에 대한 은유는 필연적으로 여성들에게 보이는 것과 똑같이 남성 과학자들에게 비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주요점이다. 198
객체(자연)을 여성으로 명명하고 이와 동일하게 주체(정신)를 남성으로 명명하도록 주조된 과학에서, 우연히 여성이 된 과학자는 누구나 어휘면에서 선험적인 자가당착과 대면한다. 이 대면은 정체성에 대한 주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남성이 아닌 과학자는 누구나 한쪽은 가짜라고 경게가 그어졌고, 다른 한쪽은 전복이라고 경계가 그어진 길을 걷는다. 가짜라는 것이 여성혐오자의 농담에 남성들과 함께 동참하면서 여성이 겪는 대가인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전복은 가부장적 남편을 모델로 삼은 과학자의 이미지와 자기를 동일시하려면 여성이 겪는 대가이다. 먄약 여성이 자아로부터 급격히 분리된다면, 그녀는 수동적이고, 활발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의 이미지 안에 던져진 자연을 지배하는 데서 남성적 쾌감을 공유할 수 있다. 그녀의 대안은 어휘들에 대한 급진적인 재정의를 시도하는 것이다. 자연은 여성이 아닌 것으로 다시 규정되어야만 하며, 혹은 적어도 소외된 존재가 아닌 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여성 과학자가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저어신은 필연적으로 남성적이 아닌 것으로 다시 명명되어야 하며, 따라서 보다 포괄적인 주체성으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은 남성 과학자가 이와 유사한 재정의를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과학자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정체성이 이와 유사한 재정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199
인격적 통합에 특수한 열의를 지닌 맥클린톡에게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 그렇지만 정체성은 손상되지 않은 채 - 과학자가 되는 것은 정신, 자연, 그리고 정신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전과 다른 의미를 그녀가 주장해야만 함을 이미했다. 그녀 스스로가 느낀 주체와 객체의 관계 그리고 이들 어휘 자체에 대해 규정해야 할 필요성은, 페미니스트 의식의 발로가 아니며 또한 여성 의식의 발로도 아니다. 이 필요성은 과학자가 되려는 자신의 권리주장의 발로이며, 남성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고 과학을 주장하려는 그녀의 결심의 발로이다. 이런 주장에서 차이는 구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시킨다. 이 차이로 인해 그녀는, 다른 과학자들의 모든 전제들을 공유하도록 강요받지 않은채, 그들과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199
맺음말
급진적 페미니스트 비판의 한 갈래는, 과학 전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과학이 급진적으로 다른 과학으로 완전히 대체되기를 요구하는, 과학 내 깊이 뿌리박힌 남성 중심주의의 가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나는 과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 중의 첫번째 움직임을 옹호할 수 없다. 이 움직임은 또한 자살적이다. 다른 곳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움직임은 <객관성을 남성적 이상으로 거부함으로써, 적의 합창대에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줌과 동시에 여성들로 하여금 현실정책적인 근대분화 밖에 존재하도록 운명짓는다. 즉, 이 움직이미은 자신이 해결하려는 바로 그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202
두번째 제안은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는 듯이 보인다. 과학이 새롭게 대체될 수 있다는 전테는, 과학을 외부로부터의 도덕적,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는 순수한 사회의 사물로 간주하는 시각을 반영한다. 이런 극단적인 상대주의에서 과학은 이데올로기로 분해된다. 다시 말하면, 근대과학의 해방의 기능은 부정되고, 진리의 준재는 정치적 영역으로 물러난다. 나의 과학관은 -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에서 적어도 인식적인 것을 부분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지하는 나의 관점은 - 보다 낙관적이다. 이 논문들의 목적은 과학이 남성적 기획이라기보다는 인간적 기획이라고 과학 내부에서 재천명하는 것이요, 과학은 남성적 보고라고 주장하는 감정적이고 지적인 노력의 갈래를 단념하는 것이다. 202
성별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과학관은 남성적 시각과 여성적 시각들의 병치 혹은 상호 보충도 아니며, 또한 한 형태의 편협을 다른 형태의 폅협으로 대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의 과학관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 또한 이와 대응하여 정신과 자연의 범주의 변형을 전제로 한다. 202
동시에 나는 맥클린톡의 사례에서 읽었떤 차이의 철학 안에 있는 여러 교훈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 철학은 나에게 성별이나 혹은 양성성에 의해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종류의 명명화로 이름지어지는 과학을 추구하도록 가르쳤다. 건전한 과학은 정신과 자연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이 생산적 생존, 그리고 이에 따른 다양한 책략들의 생산적 생존을 허락하는 과학이다. 나의 과학관은 자연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패권주의를 길들일 것을 촉구한다. 203
과학사를 아는 것은 보편적 진리에 대한 어떤 주장도 사라질 운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적 진리에 대한 모든 과거의 비전, 자연 현상의 모든 모델은 조만간 그것의 고수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한정적임이 증명될 것이다. 과학에 생산적 차이가생존하게 되면 우리에게 지저거인 주도권들에 대한 모든 주장들은 적절한 위치에 배분하도록 요구한다. 즉, 우리에게 이런 주장들이 바로 그 자체의 성질들로 인해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임을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