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고통없는 사회

백_일홍 2023. 10. 5. 14:44

고통 없는 사회:
왜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추방하는가?

 

한병철

 

목 차

고통공포
행복 강요
생존
고통의 무의미함
고통의 간지
진실로서의 고통
고통의 시학
고통의 변증법
고통의 존재론
고통의 윤리학
마지막 인간

역자 후기


인간에게는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과 같다. 인간이 쾌감을 좇으려고 애쓰는 곳 어디서나 쾌감은 막다른 길임이 밝혀진다. 

_발터 벤야민


고통공포 Algophobie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9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
고통에 대한 내성의 급속한 약화 
만성 마취
갈등과 논쟁 -> 일치 강제와 동의 압박
진통 시대의 정치, 대안 부재, 중도
탈민주주의, 진통적인 민주주의 확산 

오늘날의 고통공포는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기인한다.
. 우리는 모든 부정성의 형식을 떨쳐내고자하는 긍정성의 사회에 살고 있다. 고통은 부정성 그 자체다. 11

긍정 심리학의 행복 임무
신자유주의 성과 논리, 회복력 
최대한 고통에 무감각하며 언제나 행복한 성과 주체를 목표함. 

미국의 오피오이드 사태 
. 마약성 진통제를 통칭하는 오피오이드 과다처방, 2016-17년 수만명 사망

진통사회와 성과 사회는 서로 조응한다. 12
. 고통은 약함의 신호, 고통의 수동성은 능력에 의해 지배되는 능동사회에서 숨기거나 최적화를 통해 제거해야 하는 어떤 것. 

좋아요의 사회다. 좋음의 광기에 빠진 사회. 
만족의 문화, 문화의 경제화 및 안락화 - 경제의 문화화 

. 경제 전략으로서의 창의성은 동일한 것의 변주만 허락한다. 완전한 타자는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런 창의성에는 고통을 주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고통과 상업은 서로를 배제한다. 15

아도르노, 예술은 세상에 대한 낮섦이다. 소름은 최초의 미적 형상이다. 

고통은 완전한 타자가 들어오는 균열 이다.
소름은 타자의 침투를 표시한다. 
존재자의 본질적인 다름이 익숙한 것에 맞서 자신을 드러낼 때 고통이 발생하며 경험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이 고통이다.

전율할 줄 모르는 의식은 사물화된 의식, 모든 고통을 거부하는 삶 또한 사물화된 삶이다. 16

동일한 것의 지옥 16


행복 강요

고통은 복합적이고 문화적인 형성물이다. 고통이 지니는 현재성과 의미는 지배형태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 고통이 지배 수단으로 사용됨. 고문 

고문 사회 
=> 
규율 사회, 명령과 금지, 규율이라는 고통, 생산수단으로서 훈육된 몸. 
=> 
자신을 향유하는 쾌락주의적인 몸, 고통에 대한 거부, 성과 주체, 고통은 권력과 지배와의 모든 연관을 잃어버림. 고통은 탈정치화되어 의학적 문제가 됨. 

행복하라는 것이 새로운 지배공식이다. 21
.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 자본으로서 성과 능력이 약화되지 않고 계속 발휘될 수 있도록 한다. 21
. 자기 동기부여, 자기 최적화, 자유는 억압되는 게 아니라 착취됨. 
. 스마트한 권력, 고통과 완전히 분리됨, 전면적인 소통과 전면적인 감시 

모두가 사회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파고드는 대신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자신의 심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도록 이끈다.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고통이 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개선되어야 할 것은 사회 상태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다. 영혼의 최적화. 

이런 식으로 긍정심리학은 혁명의 종언을 확정 짓는다. 22
. 혁명가(불만, 분노)가 아닌 동기부여 트레이너 

대량으로 처방되는 진통제는 고통을 낳는 사회적 상황을 덮어 감춘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과 약학으로만 처리. 
고통이 언어가, 나아가 비판이 되는 것을 막는다. 

(비고: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고통에 대한 사회역학적 접근
https://greenthumb.tistory.com/m/823)

아도르노, "고통을 거침없이 말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실의 조건이다. 고통이란 주체를 짓누르는 객체성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신의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매개되어 있다. " 24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24

  
생존

바이러스는 고통이 억제된 안락영역으로 침투하여 이 영역을 삶이 생존으로 완전히 얼어붙는 격리 공간으로 바꾼다. 삶이 생존으로 되어갈 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고통 공포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다. 펜데믹은 우리가 꼼꼼히 억압하고 밀어낸 죽음을 다시 가시화한다. 27

생존사회는 좋은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 자체가 목적으로 떠받들여지는 건강을 위해 향유마저 희생한다. 28

생존의 히스테리는 삶을 근본적으로 덧없는 것으로 만든다. 삶은 최적화해야 할 생물학적 과정으로 축소된다. 삶은 형이상학적 차원을 모조리 빼앗긴다. 건강 앱 및 피트니스 앱을 통한 지속적인 자가측정은 삶을 하나의 기능으로 격하시킨다. 삶은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서사를 빼앗긴다. 이제 삶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것, 셀 수 있는 것이다. 29

삶을 단순한 생존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주던 모든 상징과 서사 혹은 의례가 완전히 퇴색한다. 조상숭배와 같은 문화적 행위들은 죽은 자에게도 생기를 부여한다. 삶과 죽음이 상징적 소통 속에서 결합된다. 우리는 삶을 안정시켜주는 저 문화적 행위들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그 결과 생존의 히스테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30

생존의 히스테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좀비의 사회다. 오로지 생존만을 염려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살지도 않으면서 증식하는, 다시 말해 생존하는, 덜 죽은 존재인 바이러스와 닮았다. 31

 


고통의 무의미함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기술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제 고통은 진통제로 제거해야 하는 무의미한 질병이다. 그저 육체적 고통에 지나지 않는 고통은 상징적 질서에서 완전히 퇴출된다. 34

오늘날 고통은 오로지 육체적이기만 한 고통으로 사물화되었다. 고통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예컨데 고통을 신학적 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적 행위로 일면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고통의 의미 상실은 생물학적 과정으로 축소된 우리의 삶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음을 암시한다. 고통이 의미를 지니려면 삶의 의미 지평 안으로 편입시키는 서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 의미를 상실한 벌거벗은 삶 속에서만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다. 38

<<사유이미지>>, 벤야민
고통은 처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이다. 하지만 이 둑은 이야기의 물살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휩쓸어간다면 무너진다. 아픈 아이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은 이야기가 흘러갈 강바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고통은 이야기의 흐흠을 가로막는 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 자체가 이야기의 강물을 불어나게 하여 이 강물이 고통을 휩쓸어가게 만든다.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 때만 고통은 실제로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이 된다. 39

오늘날 우리는 탈서사적 시대에 살고 있다. 이야기가 아니라 계산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서사는 몸의 우연성을 극복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모든 병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벤야민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 주술사들이 이야기의 성격을 갖는 마술적인 주문으로 병과 고통을 몰아낸다. 정신이 뒤로 물러나는 곳에서 몸은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40 

정신이 자신의 무력함을 선언하는 고통의 한계선이 오늘날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서사 능력으로서의 정신은 자신을 빠르게 철거하고 있다. .. 우리의 고통 신경은 점점 더 민감해지는 듯하다. 과민성이 자라나고 있다. 다름 아닌 고통공포가 우리를 지극히 민감하게 만든다. 41 

외부로부터 오는 수많은 고통을 막아내야 하는 훈육된 몸은 둔감하다. 이 몸은 완전히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이 몸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몸은 외부를 지향한다. 반면  우리의 관심은 훨씬 더 우리 자신의 몸에 쏠려 있다. 우리도 강박적으로 몸 속에 귀를 기울인다. 이 나르시시즘적이고 건강염려증적인 내면관찰이 우리의 과민성의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41 

고통을 주는 완두콩이 사라지면 인간은 부드러운 매트리스로 인해 고통받는다. 바로 삶의 지속적인 무의미함 그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42


고통의 간지

융어, 고통의 경제학
고통이 억압되면 은밀한 곳에서 축적되어 보이지 않는 자본이 된다. 이 자본은 이자와 이자의 이자를 통해 증식한다. 
 
고통은 한 방울씩 삶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결국 삶을 가득 채우는 방식으로 인공적인 차단막을 우회한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목적을 달성하는 '고통의 간지' 따라서 우리는 편안함이 넓게 펼쳐진 상태를 보게 된다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곳은 어디냐고 곧장 물어볼 수 있다. 

권태라도는 것도 바로 고통이 시간 속에서 해제된 것이다. 45

오늘날 만성 통증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것은 융어의 주장이 옮았음을 입증해주는 것 같다. 가장자리로 밀려난 무언의 고통이, 의미도 언어도 형상도 없이 지속되는 고통이 고통 적대적인 진통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다. 

고통의 근저에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놓여있다. 
. 부정성의 폭력(억압)
. 긍정성의 폭력(과도한 성과, 과도한 소통, 과도한 자극), 부하로 인한 고통을 낳는다. 

신자유주의,, 심리적 긴장이 고통을 낳아, 성과주체는 자기공격적인 양상,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 자해 

오늘날 우리는 이 치유의 원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치유하는 돌봄을 어루만짐과 말 걸기의 느낌으로 경험하는 일이 점점 더 드물어지고 있다. 48

오늘날 접촉이 드물어졌음을, 치유하는 타자의 손이 우리 곁에서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48

진통제나 마음 연구가 해곃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들은 그저 고통의 사회문화적 원인을 가릴 뿐이다. 49


진실로서의 고통

빅토르 폰 바이츠제커, 고통을 "살이 된 진실", "진실의 육화"라고 부른다. 

결별이 고통을 줄 때, 그 이전에 맺어졌던 결속이 진실했음이 입증된다. 진실만이 고통을 주다. 모든 진실은 고통스럽다. 50 

이런 결별이 고통을 준다면 그 결속은 침된 것이었고 육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겪을 수 있을 때만 진실로 현존하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랑도 했던 것이다. 

고통을 겪을 능력이 있을 때, 존재자는 그저 기계적이고 공간적인 병존을 넘어서서 진실한,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공존을 진실로 실행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도 살지도 않은 것이다.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오직 살아 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공존만이 고통을 줄 수 있다. 반면 생명 없는 기능적인 병존은 심지어 그것이 파괴될 때도 고통을 주지 않는다. 살아 있는 공존을 죽은 병존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고통이다. 51

고통은 결속이다. 
타자를 성적 대상으로 사물화하는 소비로서의 사랑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이런 사랑은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에로스와 대립한다. 52

고통은 차이다. 
고통은 삶을 분절화하여 표현한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고통의 방언을 통해서 비로소 몸의 기관들을 인식할 수 있다. 고통은 경계를 표시하며, 차이를 강조한다. 고통이 없다면 몸뿐만 아니라 세계 또한 무차별성 속으로 침몰한다. 

나의 발가락, 나의 발, 나의 다리, 내가 서 있는 땅에서부터 위쪽으로 내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나는 고통을 통해 알게 되며, 뼈와 허파, 심장, 골수가 지금 있는 거기에 있다는 것 또한 고통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고통의 언어를 갖고 있고, 자신의 고유한 '기관의 방언'을 쓴다. .. 이것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의 이런 법칙이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 및 세상 만물이 내게 지닌 가치를 온전히 결정한다. 

고통이 없다면 구별에 근거하는 가치평가가 불가능해진다. 고통 없는 세상은 같은 것의 지옥이다. 

고통은 현실이다. 53

고통은 자기 지각을 강화한다. 
자상행위는 나르시시즘적이고 우울에 빠진 자아가 자신을 확인하고 느끼려는 절망적인 시도.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고통이 구제책이 된다. 익스트림 스포츠와 모험적 태도는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려는 시도들이다. 

무감각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생동감을 주려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여전히 자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극들로는 이제 마약, 폭력, 테러만이 남아 있다. 54


고통의 변증법

정신은 고통이다. 정신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식에, 더 높은 앎과 의식의 형태에 도달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의 특징은 "모순 안에, 따라서 고통 안에 ... 머무른다는 것"이다. 정신은 형성 과정에서 자신과의 모순에 빠진다. 정신은 분열된다. 이 분열, 이 모순은 고통을 준다. 고통은 정신이 자신을 형성하도록 이끈다. 형성은 고통의 부정성을 전제한다. 정신은 더 높은 형식으로 발전함으로써 고통스러운 모순을 극복한다. 61

고통이 없으면 기존의 것과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인식은 불가능하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도 고통의 부정성을 전제한다. 경험은 변환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고통을 감수하고 치르는 것이 경험의 한 계기다. 이 점에서 경험은 상태의 어떤 변화도 낳지 않는 체험과 다르다. 체험은 변환시키는 대시 향유한다. 고통만이 근본적인 변화를 낳는다. 62

정보는 경험도 인식도 낳지 못한다. 정보에는 변환의 부정성이 빠져 있다. 63

고통의 부정성은 사유에 필수적이다. 사유를 계산 및 인공지능과 구별되게 하는 것도 고통이다. 지능이란 어떤 것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지능은 구별능력이다. 따라서 지능은 기존의 것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능은 완전히 다른 것을 산출하지 못한다. 63


고통의 존재론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서 출발한다. 존재 덕분에 존재자는 명백함을 갖게 되고, 이해될 수 있다. 존재가 먼저 파악되어야 존재자에 대해 이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의 관심을 어떤 대상으로 돌리기 전에, 나는 이미 성찰 이전에 파악된 세계 안에 있다. 68

고통은 인간 유한성의 근본 기분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서 출발하여 고통을 사유한다. "고통은 작은 죽음임다. 죽음은 큰 고통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고통과 죽음과 사랑이 결합되는" 저 본질의 영역을 추적한다. 바로 타자의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이 에로스로서의 사랑을 일캐워 유지한다. 에로스는 내가 취할 수 없는 타자를 욕망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물학적 과정으로 간주된 삶의 단순한 끝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특별한 존재 방식이다. "존재의 비밀"로서 죽음은 삶 속까지 미친다. 죽음은 "모, 다시 말해 모든 측면에서 결코 단순한 존재자는 아니면서도 존재하는 것, 심지어 존재 자체의 비밀로서 존재하는 것이 담긴 함"이다. 죽음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인간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완전한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71

고통은 인간의 현존재를 떠받쳐준다. 이 점에서 고통은 쾌감과 다르다. 고통은 벗어날 수 있는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인간 현존재의 중력을 형성한다. ".... 고통은 유한자의 정조를 조정하여 유한자가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중력을 얻도록 한다. 모든 동요에도 불구하고 유한자가 자신의 본질 안에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이 중력 덕분이다. 고통이 조응하는 '정조', 고통에 의해, 고통을 향해 조율된 마음이 우울이다." 72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오늘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의 일시적인 중단만을 의미한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새계는 오직 소비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의 총계 이상의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는 아우라를, 나아가 향기를 잃는다. 이 세계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타자의 다름, 즉 타자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타자성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근원적 거리"가 없다면 타자는 너가 아니다. 타자는 그것으로 사물화된다. 타자는 그 다름 속에서 호출되는 대신 소유된다. 75

고통은 다른 가시성을 연다. 고통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지각기관이다. 디지털 질서는 마취적이다. 이 질서는 틀정한 시간 및 지각의 형태를 철폐한다. 하이데거는 디지털 질서가 존재 망각으로 이끈다고 말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점유함은 조급하고 강제는 길고 느린 것을 소멸시킨다. 75

오늘날에는 정신적 태도로서의 인내와 기다림 또한 침식되고 있다. ... 길고 느린 것 안에서 인내하는 기다림은 특별한 의도성을 갖는다.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태도다. ... 포기는 의도 없는 기다림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포기는 준다. 포기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포기해야 함과 내어줌을 슬픔 속에서 견디는 것"이 "잉태"다. 고통은 어떤 결핍을 가리키는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잉태, 나아가 존재의 잉태다. 고통은 주어지는 것이다. 77


고통의 윤리학

우리 시대에는 시각의 규율화가 더 이상 실행되지 않는다. 디지털 매체는 규율의 매체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규율사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소비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폭력 영상에 대해서도 포르노프래피적인 태도를 취한다. 영화와 컴퓨터 게임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폭력의 포르노에 자신을 맡긴다. 폭력의 포르노는 살인조차 고통 없는 사건으로 만든다. 포르노그래피적인 폭력 영상은 진통제처럼 작용한다. 이런 영상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둔감해지도록 한다. 79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음적 태도를 취한다는 흔한 인간학적 가정은 공감 능력이 급속히 줄어드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갈수록 공감이 상실되어가는 것은 타자의 소멸이라는 근본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통사회는 고통으로서의 타자를 제거한다. 타자는 대상으로 사물화된다. 대상이 된 타자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 80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고통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노출하는" "노출됨"을 전제로 한다. 이 노출됨은 고통이다. 이 시원적인 고통이 없을 때, 자아는 다시 고개를 들고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며, 타자를 대상으로 사물화한다. 노출됨의 고통이 있을 때만 타자는 자아에 포획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고통은 윤리적이고 초육체적인 고통으로서 내가 나의 고통으로 지각하는 고통에 선행한다. 그것은 타자를 향한 고통이며 근본적인 노출성으로서 자아의 어떤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이다. 연민보다 더 앞에 놓여 있는 노출됨의 고통은 자신으로의 안력한 복귀를, 자신 안에서의 만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82

엘리아스 카네티, 나를 상처 입을 수 있는 자로 만드는 타자에 대한 무방비성을 "영혼의 나체성"이라고 부른다. 타자가 내게 안겨주는 불안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 불안은 타자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게 만든다. .... 영혼의 나체성은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이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83

오늘날 영혼의 나체성, 노출됨, 타자로 인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 타자로 인한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도 전혀 접근할 수 없다. 84

마지막 인간

후쿠야마(《역사의 종말》)의 예측 또한 오류로 나타났다. 역사는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다름 아닌 우파 포플리즘과 독재가 지금 크게 유행하고 있다. 생존사회로서의 진통사회는 반드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전제하지는 않는다. 펜데믹에 직면하여 우리는 생명정치적 감시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양의 자유주의는 바이러스 앞에서 분명히 실패하고 있다. ... 개인에 대한 이 새명정치적 감시는 자유주의의 원칙들과 모순된다. 

이제는 전체주의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디지털 감시권력은 이미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념을 궤멸시키고 있다. 88

빅데이터는 심리정치적 도구로서 인간의 태도를 예측하고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우리를 자유의 위기로 몰아 넣는다. 89

지금 우리는 내밀한 개인적 데이터들까지 자발적으로 내놓고 있다. 강제가 아니라 내적 욕구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 우리를 구석구석 철저히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한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여기서 자유의 변증법이 일어난다. 자유의 표현인 무한한 소통이 총체적 감시로 변한다. 89

생명정치적 감시정권은 자유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게 될 것이다. 

마지막 인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는 자유보다는 안락함을 더 높은 가치로 간주한다.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념을 궤멸시키는 디지털 심리정치는 마지막 인간의 평안함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직막 인간의 건강 히스테리는 그가 자신을 영구적으로 감시하도록 한다. 그는 자기 안에 내면의 독재를, 내면의 통제정권을 구축한다. 내면의 독재가 생명정치적 감시와 일치할 때, 이 감시는 더 이상 억압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감시가 건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지막 인간은 생명정치적 정권하에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잠시의 즐거움 후에 지루함이 찾아 온다. ... 마지막 인간 또한 그의 지루함과 함께 극복될 포스트휴먼 시대가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 데이비드 피어스, <<쾌락주의의 명령>>
고통없는 미래를 선포한다. ... 트랜스휴머니스트는 지루함 또한 생명공학적 수단으로 제거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92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을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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