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어의 눈: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
발 플럼우드
서론
프레아 매튜스, 케이트 리그비, 데어바 로즈
1970년대에 발과 리처드는 캔버라 남쪽의 플럼우드산에 있는 열매우림에 외딴 돌집을 지었다..... 발에게는 그가 이론화하고자 전념한 생태학적 가치를 따르며 사는 것이 중요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가 머무는 산의 심장부에서 '건축하기'와 '거주하기'로부터 자연스럽게 흐르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삶이라 하겠다. 14
이 기간에 플럼우드를 사로잡은 것은 인간중심주의의 문제였다. 플럼우드는 다른 연구자와 함께 인간중심주의가 하나의 가치 체계로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범주적 차이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이 가정은 인간 존재에게는 나머지 자연에 결핍된 무언가가 주어졌다는 것이었고, 이때 그 '무언가'는 당연히 정신으로 간주된다. 인간 또한 식물과 동물, 바위처럼 물질로 이뤄졌지만, 인간은 물질적 몸에 더하여 정신을 소유하고 있으며 왜인지 이때 정신은 몸과 범주적으로 다른 것이자 몸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진다.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개념적 구분의 기저에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뿌리 깊은 개념적 대립이 자리하고, 이 대립은 이후 서구 전통에서 이성과 자연의 대립으로 다듬어진다. 플럼우드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1992년 <<페미니즘과 자연의 지배>> 단행본으로 출판됨)에서 이성과 자연 간의 이런한 구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나아가 그 구분이 서구 사상의 수많은 근본적 범주에 어떻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지 포괄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15
우리에게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개념적 격차를 좁히는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정신을 물질에 되돌려주고 몸에서는 지능을 복원하며 자연이 행위성을 되찾도록 해야 한다. 16
그는 학계 밖의 독자들에게도 자기 삶의 열정을 게속 전달하고 영향을 미칠 방법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그가 자신의 아름다운 에세이 <돌의 심장으로의 여행>에서 적었듯이, "창의적 글쓰기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글쓰기는 매우 개방적이고 비환원적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해보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그 역할을 수행한다." 17
플럼우두는 숲의 활동가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이야기쪽으로 글쓰기 방향을 전향했다. 그는 생태지향적 문학과 문화 연구라는, 즉 생태 비평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2002년에는 영국 문학환경연구협회의 학술 대회 기조 강연에 초청되었다. 이 경험은 플럼우두가 좀더 서정적 형태의 철학적 글쓰기에 도전하도록 이끌었다. 이 모임에서 기획된 2007년의 책에서 돌에 대한 플럼우드의 아름다운 경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작가들은 우리가 다르게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 자들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존재댜."라고 적었다. 이때 그가 말하는 작가는 이야기꾼과 시인, 그리고 자연의 행위성과 창의성을 생생하게 만들거나 다시 생기 넘치게 할 수 있는 창의적 소통자들이다. 19
1부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
1장 포식자와의 만남
바로 그 순간까지 저는 제가 동물이자 필멸의 존재라는 점을 인식했던 것과 동일하게, 아주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제가 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진실의 순간에 추상적 지식은 구체화됩니다. 당신은 그림자처럼 먼 이방인으로 인식했던 자신의 죽음이 갑자기 눈앞에서 섬뜩하고 입이 쩍 벌어지는 모습으로 떠오르자 차마 말을 잊지 못한 만큼 놀라면서 그것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강력한 생명체가 당신의 특별한 지위를 무시한 채 당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숨이 막힙니다. 33
어쩌다 이런 금찍한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 저 자신에 대해, 제 자리에 대해, 제 몸에 대해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숱한 최후의 순간을 망치는 정말 바보 같은 기분으로 자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실수였을까요? 먹이를 제공하는 물질적 신체로서의 자아와 분리된, 육신을 떠난 의식으로서의 자아가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그리고 그들과 달리 특별하다는 생각이 실수였을까요? 저는 제 잘못된 의식의 문화적 기원에 대해 숙고해볼 진솔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악어는 물속에서 재빨리 뛰어올라 그저 섬광처럼 보일 뿐이었고, 저를 물속으로 끌어내리기 직전에 다리 사이로 저를 움켜잡았습니다. 그날 오후 극심한 상처를 입은 채 홍수의 길목에 누워있는 동안에는 그 문제에 대해 고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저는 이 처참한 환영에 대해 고뇌하고 또 추적하기 위해 수년을 할애했습니다. 34
어찌 되었든 이것이 제가 경험한 방식입니다. 이른바 '진실의 순간'이라 불리는 것이 제가 살았다고 생각한 세계가 기실 환영이며, 세계에 대한 제 관점이 끔찍하고 논라울 정도로 잘못되었다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알았다는 느낌은 저 자신의 생명 가치를 잘못 알았다는 것과 제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한 저의 어리석음 그 이상이었습니다.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생명의 가치를 잘못 알았다는 자책이나 후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6
악어의 강력한 턱이 제 몸을 움켜잡는 순간 무언가 심오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그릇된 정체성이었지요. 36
한 참뒤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는 그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볼 길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곳에 환영은 있었지만, 제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였습니다. 환영이었던 것은 오히려 세계의 '평범한 경험'이었고, 제가 먹이가 된 잔인한 새로운 세계야말로 예상치 못한 현실이거나 적어도 그 현실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순간에 본 모든 것은 먹잇감이 되는 경험과, 정상성을 위해 택한 믿음과 생명 체계 사이의 괴리였습니다. 정상성 체계가 사실이라면 이 괴리는 오직 먹잇감이 된 경험이 환영이거나 꿈이거나 악몽일 때에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는 저와 제 의식을 형성한 문화가 많은 것에 대해서, 특히 인간의 체현과 동물성, 그리고 인간 생명의 의미에 대해서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괴리가 발생했을 가능성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37
악어와의 조우로 드러난 환영은 일상적 경험의 의미에 대한 특이한, 그리고 더 철학적 종류의 환영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그 환영은 사람들이 꽤나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들을 완전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잘못 알고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잘못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그 단순하고도 기본인 것은 먹이와 다른 존재에 관한 우리의 관계, 삶과 죽음의 얽힘, 인간 존재의 육욕적이고 체현된 특성에 관한 것입니다. 몇몇 사람은 지배 이야기에 적합하지 않은 특정 단서와 경험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환영 그 자체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땅이 수평적이라는 환영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포식 관계에서 언제나 '승리의 편'에 위치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서 실제 사물의 기울기, 즉 우리의 동물성과 체현의 진정한 척도를 숨긴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이 환영을 바로잡을 수 있는 단서적 경험이 이제 어떤 이유로 더 희박해진다고 가정해봅시다. 어쩌면 지배 이야기 자체가 그러한 경험이 사라진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 환영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어 누군가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닫기 전에 실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환영의 오랜 지속으로 재앙이 초래될 쯤이면 그 문화는 이미 인간과 다른 존재의 접촉 자체를 대대적인 방식으로 끊어냈을 것입니다. 40
저는 악어의 눈을 통해 평행우주처럼 보이는 곳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곳은 '보통의 우주'와는 전혀 다른 규칙을 가진 우주입니다. 이 가혹하고 생소한 영토가 바로 모든 것이 흐르며, 우리가 다른 존재의 죽음을 살아가고, 다른 존재의 생명으로 죽는 헤라클레이토스적 우주Heraclitean universe입니다. 이 우주는 먹이사술로 나타납니다. 저는 이 평행우주에서 갑자기 몸집이 작고 먹힐 수있는 동물의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이 동물의 죽음은 한낱 쥐의 죽음보다 결코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신을 고기로 인식하게 되어 제가 이 음침하고 매정하고 개탄스러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세계는 제가 얼마나 똑똑하든 간에 그 어떠한 예외도 두지 않으며, 저를 다른 살아 있는 존재처럼 고기로 만들어진, 그리하여 다른 존재에게 영양가 있는 먹이로 간주합니다. 43
먹이와 죽음과 불완전함이라는 강한 느낌을 둘러싼 숱한 지적 수수께끼를 남겼습니다. 어째서 저는 자신을 먹이로 볼 수 없었을까요? 왜 그것이 그토록 잘못된 것처럼 보였을까요? ... 수년간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해온 비평가로서 저는 왜 인간의 분리성에 대한 그리도 많은 환영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제 개인적 혼란을 드러내는 걸까요, 아니면 인간의 우월감과 분리성이 지배 문화에 얼마나 깊숙이 퍼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일까요? 43
수천 년간 서구 종교와 서구 철학은 인간이 동물과 자연의 나머지 부분과 구별되며, 인간은 그들과 달리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 이외의 어떤 종이 구원 받을 수 있다거나 오직 인간만을 위한 신성함과 완전함의 장소인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이단이었습니다. 신은 물질적이지 않고 초월적이며 자연과 구별되고 우리 종만을 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특별한 지위에 엄청나게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다윈에게서 배움을 얻었음에도 우리 문화는 인간이 동물과 함께 자연적 질서에 포함된다는 합의에 이르는 데 처참히 실패햇습니다. 이 점이 환경 위기를 만든 주요 요인입니다. 인간 정체성을 지구 바깥에, 대척점에, 그리고 물질 자체를 초월한 분리된 우주에 위치시키는 문화가 다윈이 전한 새로운 사실, 즉 우리 혈통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를 통해 전해졌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44
다윈의 지식은 오랜 투쟁 끝에 어떤 곳에서는 받아들여졌지만, 매우 피상적이고 주로 지적 수준에서만 수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다른 부분은 관통하지 않았으며 깊이 뿌리내린 문화와 여전히 불화합니다. .. 최근까지 교황의 교리는 우리의 몸은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했을 수 있지만, 인간성의 진정한 기초인 우리의 정신은 신이 주신 것으로 달느 어떤 동물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진화의 정점으로서, 설계된 모든 것을 위하고 모든 것을 이끄는 최후의 종으로서 특별하게 남아 있습니다. 45
세계를 보는 이러한 방식은 우리 문화가 육체에 관한 고통스러운 모순을 만드는 한, 의식적 동물성의 특성을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게 만듭니다. 그 모순은 다름 아닌 육체를 지닌 썩어가는 신체, 생각하는 살, 노래하는 살, 자신의 취약성을 아는 살이 갖는 항성적 정체성 sidereal identity입니다. 먹이가 된다는 것은 체현의 현실, 우리가 먹이이자 살로서 동물적 질서에 포함된다는 점,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과 친족이라는 점을 매우 냉혹하게 마주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의 잔치를 육신이 없는 눈으로 담아내는 구경꾼이 아니라 그 잔치의 일부라는 점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잔치인 것입니다. 겸손하고도 매우 파괴적인 경험입니다. 45
그 이후로 저는 악어의 눈이 악어의 먹이가 되는 존재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말하고 생각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다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환희를 느끼며 살아가고 생물권과 우리가 맺는 현재 관계를 이해하는 세계, 바로 그 세계를 기릴 수 있는 철학을 구축하는 것이 이 세계를 밝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8
또한 악어의 눈은 우리에게 생태학적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 눈은 우리 자신을 다른 종으로부터 분리하고 특별하게 보는 관점을 방해하면서, 철저히 진화적, 민주적 관점에서 우리를 이론화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훨씬 더 생태학적으로 민주적 입장을 택함으로써 환경 위기에 합리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비인간을 향한 배타적 입장을 유지하지 않고도 동료 인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태껏 우리는 자신을 우주의 주인으로 여겨왔습니다. 신학의 시대에는 우리 자신을 신의 관심을 받는 유일한 존재로서 구분했다면, 현대에 와서는 우리의 위치를 진화론적 결실의 정점으로 해석합니다. 49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일은 도약을 수반합니다. 이는 우리가 뒤에 남겨두어야 하는 생각의 틀이 완전히 별개의 것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상당 부분 겹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특정 핵심 개념에 대한 해석이 큰 변화를 맞이하여 이론이 이제 호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죽음은 먹이, 그리고 인간으로 존재하기처럼 변화와 변화에 대한 저항의 근원을 품은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서사는 생태적 정체성과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 개념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50
그 섬광의 순간 제 의식이 자신의 확실하고도 쓰라린 최후를 깨달아야만 했을 때, 저는 처음으로 모든 문장이 '나로 시작할 수 있는 자아 서술의 바깥에서, 그 '바깥으로부터의 ' 세계를 흘끗 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실 데버라 버드로즈가 '반서술성 denarrativisation'이라고 일컫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서구 문화는 이 세계가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기를 멈추고 세계를 이야기 없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란 인간 주체만을 배타적 중심으로 삼는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여전히 계속된다는 사실을 이제 저는 압니다. 50
우리 자신을 먹이로서 이해하는 것은 공포의 주제이거나 유머의 주제입니다. 공포 영화와 무서운 이야기는 다른 생명 형태의 먹이가 되는 것에 대한 이 뿌리 깊은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52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먹이이고 동시에 먹이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멋진 삶에서 우리 음식의 재료가 되는 이들과의 친족 관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먹이를 얻어야 합니다. 이 방식은 우리가 각각 먹이 그 이상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다른 존재의 먹이로서 호혜적으로 위치시킵니다. 우리 자신을 생태학적 측면에서 다시 개념화하는 일에는 여러 측면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을 생태계의 다른 구성 요소와 같은 방식으로 유용성 측면에서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 가장 기본 방식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도 다른 존재의 먹이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53
이제 먹이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급진적으로 수정해봅시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고 먹이가 되기에는 너무 우수하다고 믿는 지배적 문화의 신념에 반대하여 우리 자신이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되고 또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생태학적 관점에서 다시 그려보고 다른 동물과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 방법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이다. 이때 그러한 상호적 쓰임이란 우리가 그들을 정복하고 파괴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들에게 정복 당하고 파괴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장소를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다시 그려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54
우리 자신이 다른 존재를 위한 억이라는 점을 부인하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의 죽음 관습과 매장 관습 곳곳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튼튼한 관흔 흙에서 서식하는 동물의 활동 범위보다 훨씬 아래에 묻히고, 무덤 위 석판은 그 무엇보다 우리 몸을 파헤치지 않도록 보호합니다. .. 존엄성은 우리 자신을 빈틈없이 지키고, 우리 자신을 다른 존재와 분리시키며, 우리를 먹힐 수 있는 존재로 개념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심지어 우리를 키운 벌레와 땅에게조차 무언가를 되돌려주길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55
죽음에 이르면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질은 우리를 키워낸 지구적 타자들에게 돌아가 그들을 보살피기보다는 육체가 없는 비세속적 영역으로 향한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인간 정체성 개념은 인간을 먹이 그물의 외부와 상위에 둡니다. 인간은 호혜성의 사슬에서 잔치의 일부가 아니라 그 사슬과 분리된, 외부의 조직자이자 주인으로 위치합니다. 죽음은 생명의 공동체를 키워내고 공유하는 장소가 아니라 분리와 지배와 개인적 구원을 위한 자리가 됩니다.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지배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뒤흔듭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의 포식자로서 그들로부터 취하기만 하고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우리는 잡아먹을 수 업승며, 우리 또한 우리를 먹히는 자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정사에 세운 합리적 능력주의의 질서에 의해 합당하게 부여된 인간의 권리로 지구적 타자를 사용하고, 그에 대한 서구 전통의 견해를 따라 그 일방적 배치를 정당화합니다. 55
저는 생태학적으로 인간을 급진적 평등과 상호적 양육과 지원을 누리는 더 큰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다시 상상하는 데 있어 우리가 손을 놓은 먹이/죽음에 대한 상상을 중요한 열쇠로 제안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상실한 것은 지식과 우리 자신, 세계에 있어 겸손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유 방식을 상실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구 공동체의 맥락에서 위안과 연속성, 의미와 희망을 찾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구 공동체의 맥락이라는 이 중요한 장소에서 우리는 종종 지구에 적응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좌절시키는 위계적이고 예외적인 문화적 틀을 대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56
근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우리가 우리의 생명과 몸을 소유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생명과 몸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이자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쓰며, 연기하고 읽어내는 한 편의 극입니다. 우리는 초개인적 존재로서 그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에게도 빚지지 않았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저 막연한 지구 공동체로부터 우리 자신을 동떨어지게 만듭니다. 종과 개체 차원에서 모두 예외적인 인간은 다른 동물과 같은 방식으로 먹이사슬 내에 위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잡아먹는 포식은 이례적이고 괴물 같은 것으로 치명적 보복의 대상이 됩니다. 57
서구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서구는 본질적 자아란 육신을 떠난 영혼이라고 바라보고, 잘못된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그 선택지 중 하나는 정신 영역에서의 연속성과 영원성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란 물질적이고 체현된 자아의 이야기가 끝맺음하는 곳이라고 보는 환원적 유물론의 개념이지요. 죽음에 대한 딜레마의 양극은 끔찍한 대가를 치룹니다. 전자의 경우 지구로부터 소외되고, 후자의 경우 자아에 대한 서술적 연속성과 의미를 상실합니다. 57
자아와 죽음에 대한 원주민의 애니미즘 개념은 이 치명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깨고, 지구와 함께, 그리고 지구를 통해서 반응하는 생태적 소통 형태를 제안합니다. 생명을 순환이자 선조 공동체가 전하는 선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죽음을 재생하는 것으로, 곧 생명의 기원을 이루는 선조 공동체와 생태 공동체로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서구가 죽음에 맞서 생명 전쟁을 일으킨 전쟁터는 영혼과 동일시되는 사후세계이자, 환원되고 의료화된 물질적 생명입니다. 반면 원주민의 상상력은 어느 정도는 서사를 통해 또 어느 정도는 죽음이 생명을 키워내는 (극히 서사화된) 땅으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죽음을 생명의 일부로 바라봅니다.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은 땅을 생명을 키워내는 영토로 상상하게 만들고, 죽음이란 특이 이 땅의 지형과 생명과 영양을 공급하는 생태적 타자와 물질적 연속/재결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상상하게 합니다. 특히 이 땅의 지형과 삶에 그러한 전망을 제시합니다. 58
2장 스톤컨트리의 건기
웅덩이의 부름을 견뎌봅니다. 그저 잠시 앉아서 웅덩이의 푸른 색 물 아래 모래의 가장 깊은 부분을 바라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내 시간과 장소가 합쳐져 종을 가로지르는 연극에 관한 쓸데없는 추측을 부추깁니다. 어쩌면 넌지시 말하는 걸까요? 만약 제 주변에서 보는 자연의 순환이 웅덩이 주변 극장을 배경으로 삼는 극적 주체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의 정반대라면 어떨까요? 거기거 펼쳐지는 드라마는 인간과 비인간 배우를 요구하지 않을까요? 줄거리는 정신과 물질 또는 자유와 정의 대 필연성과 카오스 사이에서 투쟁을 겪는 등장인물을 그러내지 않을까요? 잔인성에 대한 인식과 자연 작용에 대해 생각하는 순환적 방식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이 긴장은 동물해방론자들의 욕망과 생태학적 관점 사이에서 나타나는 대조와 거의 상응합니다. 주피터와 주노처럼 아마도 불행한 결혼을 한 주재하는 신 사이의 갈등과도 같은 걸까요? 의식과 체현의 불행한 결합은 불가피한 일일까요? 통발과 도마뱀이 응덩이 아래에서 극적 포식 투쟁을 벌인다면 연단의 상층부 중심은 누구를 위해서 또는 무엇을 위해 그 자리를 내어줄까요? 제가 연단 위 바위 사이에서 본 그림자, 악어의 크기와 행태에 딱 들어맞는 그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저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오래된 그루터기와 바위, 쓰러진 나무만을 보는 곳에서 이러한 무시무시한 형상을 발견한다는 점을 애써 떠올려야만 합니다. 67
채식이 건강한 식습관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확신할 수 없지만, 저는 채식주의자의 건조한 저녁 식사를 고수할 것입니다. 일부 현대 도시 지식인들과 달리 물왕도마뱀의 풍부한 육즙을 즐기는 식사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제가 택한 방식은 사냥하는 삶이 아닙니다. 물론 제가 그러한 삶을 일반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조건 아래에서는 사냥하는 삶이 오만함 없이 진실성과 정직함을 간직한 채 쇠상위 포식자에 위치하는 인간 상태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존재를 먹는 일에 관한 윤리는 괘나 복잡하고 상황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를 채식주의자로 만든 것은 살에 대한 금욕적 혐오라기보다는 포식에 대한 현대 자본주의의 해석이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동물 범주에 가하는 끔찍한 상처 때문입니다. 설령 야생동물보호 규정이 저를 막지 못하더라도 저는 이제 동물을 죽이고 먹는 것을 자제하는 감수성을 키웠습니다. 이 감수성은 물왕도마뱀에게도 유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저로부터 안전합니다. 71
웅덩이 아래 통발 부근에서 작은 수중 식물인 쿤박을 보았습니다. 길게 갈라진 쿤박의 멋진 초록빛 잎은 야유크 야우크 자매의 머리카락 같습니다. 야우크 야우크는 스톤컨트리의 넓은 지역에 물을 흘러보내는 이 작은 개울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유영하는 물에 삽니다. 카카두 지역의 일부인 서부 안헴랜드의 쿤윙크주 부족 이야기에 따르면 이 자매는 다리 대신 물고리 꼬리를 가진 작고 영적인 인어입니다. 자매를 둑 아래 구덩에 살고 판다누스가 자라는 곳에서 노래하고 놀면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수영하는 여자들을 물밑에서 지켜보고 세심히 살피면서 그들의 어머니가 될 준비를 마친 자, 그리고 그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할 준비를 마친 자를 찾아다닙다. 74
안헴랜드 원주민들은 그들 자신을 비닛지라는 용어로, 정착민들을 발란다라는 용어로 이릅니다. 야우크 야우크는 저 같은 발란다 여성을 자매처럼 맞이하고, 이 풍경을 함께 여행할 비닛지 동반자를 내어줍니다. 그리고 이 풍경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 세계 사이에 건설하고자 한 높은 장벽을 넘어서라고 유혹합니다. 우리는 분명하고 가까이 있는 인간 동반자와만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동반자와 여정을 함께 합니다. 야우크 야우크 자매는 많은 사랑을 받은 발란다적 인물인 앨리스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녀는 여행자이자 형태를 바꾸는 자입니다. 제 유년 시절, 시드니 사암 풍경을 통과하는 여행을 풍요롭게 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는 비닛지와 발란라 자매의 즐거운 동반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저도 형태를 바꾸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와틀이 되고 싶습니다. 74
비닛지 부족의 이름 짓기는 대부분 야우크 야우크의 이야기와 같은 서사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들은 그 의미를 교모하고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으로 표현하며, 통상 생명과 이론이라는 반대 범주에 두는 두 영역을 풍부하고 만족스럽게 결합하도록 기능합니다. 하나는 영적 실천과 공동체 정체성이고, 다른 영역은 식물학적, 경험적, 실용적, 철학적 지식입니다. 비닛지의 이야기는 그들 땅에서 일어나는 여정을 서사로 포장하여 길을 떠나는 자가 땅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여행하게 합니다. 말하는 땅은 이제 소통하는 파트너인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신이 이 주변에서 마주치는 주요 발란다 문화의 이름 짓기는 땅에 대한 독백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브로크만산'과 같은 이름 짓기는 이 특별한 장소 도는 이 장소가 지닌 힘과 행위성에 전혀 주목하지 않습니다. 고대 원주민이 머문 장소이자 암석 갤러리로 특징지어지는 이 놀라운 급겨사면의 가치에 문외한인 유럽인들은 당혹스럽고 무의미하며 유럽 중심적 이름을 지으면서 그저 유럽인 '발견자'를 기념합니다. 그들은 식민지 귀족의 일원 한 명이 추락하여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만 이 장소를 눈여거보는 것이지요. 그러한 독백의 이름 짓기는 그 장소를 정신과 의미가 없는 공백으로 여기고, 마치 식민지 관청이나 광산 회사의 자원 활동을 통해 그 빈 곳을 채워야만 하는 장소로 취급합니다. 이토록 뿌리 깊이 식민화된 이름 짓기 관행은 여전히 호주 지도를 너무 많이 훼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공화주위와 같은 공식적 탈식민화 운동도 이러한 이름 짓기 기저에 깔린 유럽중심주의와 식민 권력의 서사를 어떤 방식으로도 제재하지 않습니다. 호주인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진정 문화적으로 속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 땅의 고유성과 힘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교류 방식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우리가 지금 취해야 하는 태도는 바로 그러한 문화적 실천입니다. 76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원주민)에게 황무지(야생)은 불경한 대지와 대조조적으로 신성하게 분리된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모든 대지는 신성하며 사용과 존중 사이에 분열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85
이 관점의 다른 측면은 체현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걷기를 통해 얻어지는 대지와의 강렬하고 친밀한 육체적 지식의 유대는 대지의 광할한 몸과 나누는 대화라는 형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형식은 오직 인간 자신의 몸으로 대답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습니다. 황무지 여행가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자신을 한계를 지닌 동물이자 단지 절반 정도 강인한 동물로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 여정을 통해 당신은 수동적이라기보다는 능동적 목소리를 가진 다양한 행태의 자연을 접하게 됩니다. 당신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사랑을 받으며 소통하는 몸을 지닌 연인의 모습으로 땅을 알게 됩니다. 85
정신성에 관한 서구의 이원론적으로 젠더화된 이야기는 남성을 내부적이고 금욕적인 '영원한' 정신성과 동일시합니다. 이 정신성은 몸과 물질 세계를 외면하지요. 반면 여성을 '내재적' 물질에, 정신성의 반대편에 놓인 일상적 문제에 동일시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어쩌면 우리 생존에 중요할지도 모를 많은 것을 표현될 수 없게 합니다. 그중 물질주의적 영성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신이 연인의 몸을 속속들이 육체적으로 아는 것처럼 세계의 몸을 이해하고 탐험하고 탐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에는 영성의 가능성이 있으며, 영성이란 천산의 것이나 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영양분을 공급하는 대지의 능력을 충분히 찬양하고 지금 여기 매일매일의 신성함과 속세나 일상의 신성함을 충만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86
걷기가 이 땅의 힘과 만나는 기회는 제공한다면, 그리고 그 기회를 독백적 관계가 아니라 대화적 관계로서 경험한다면 걷기는 땅에 쓰인 시간과 다양한 층위에서 영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후기 자본주의 노동 문화는 시간에게 이익의 적 역할을 맡겼습니다. 시간은 자본주의 체제의 영생을 돕는 묘약인 셈입니다. 왜곡된 체제는 우리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았습니다. 그 속에서 대개 시간은 특정 목표를 달성하거나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수단으로서의 도구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시간은 적이고 억압자입니다. 종국에 우리를 파괴할 고양하고 고통스러운 작업 반장입니다. 스톤 컨트리를 걸으며 가로지르는 이 강렬하고 친밀한 여정은 강력하고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하도록 안내합니다. 그것은 비범한 사암 페허를 형성하는 지질학적 시간이고, 우리 주변의 동물 생명을 창조하는 진화적 시간이자 암석 갤러리에 남겨진 인간의 시간ㅇ입니다. 사적인 '시간 외 시간'이자 모래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 오색앵무를 부러워하는 그 령험을 반추하며 통합하는 시간입니다. 여기 이곳에서, 그리고 그러한 조건 하에서 시간은 스승이자 함께 여행하는 동반자가 됩니다. 우리를 저 멀리 이끄는 친구입니다. 시간은 수단이 아니라 메시지입니다. 87
3장 균형잡힌 바위의 지혜: 평행 우주와 먹이의 관점
저는 악어의 눈을 통해 지금에 이르러서야 팽행우주라고 생각되는 곳, 즉 완전히 다른 규칙을 가진 헤라클레이토스적 우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곳에 만물은 계속 흐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살며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죽습니다. 이곳은 먹이사슬로 타나나는 우주입니다. 이 우주의 논리는 관용의 감각을 완전히 다르게 나타내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뒤흔듭니다. 헤라클레이토스적 관점을 취하는 관용이 이곳에 널리스며들어 이 우주를 조직합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몸은 먹이사슬과 함께 흐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고 오히려 만물에 속합니다. 다른 종류의 정의가 먹이사슬을 다스립니다. 먹이사슬은 게리 스나이더가 "생명의 성스러운 에너지 교환, 진화적 상호 공유의 측면, 다시 말해 문자 그대로 서로먹음으로써 에너지를 나누고, 그 에너지를 이곳저곳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칭한 것처럼 에너지와 물질이 제공한 것을 나누고 전달하는 한 방법입니다. 95
그러나 개체적 정의의 우주에서 개별 주체의 우주는 마치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성곽 마을처럼 주변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지속적 포위 상태에 놓인 이 이주는 먹이로 만들어진 몸을 필사적으로, 강박적으로 다른 존재와 떨어트려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으로만 남겨두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벽과 해자 위에 새운 성이 종국에는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포위를 가능한 한 최대한 뒤로 미루고자 고분분투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에워싸는 상태로 계속 유지해줄 수 있는, 더 나은 그리고 더 많은 포위 방어 기술을 추구하면서 분투합니다. 96
개체/정의의 우주에서 당신은 당신 몸이 지닌 에너지의 양을 절대적으로 소유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상당부분을 당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들로부터 당신의 몸을 필사적으로 지켜내는데 소비합니다. 당신의 몸과 에너지를 나누려는 그 어떤 시도도 모두 불의와 격분을 일으키므로 그에 맞서 저항해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만 헤라크르레이토스적 우주에서 당신의 몸으로 존재하는 것은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을 소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책은 언제든지 다른 대여자가 회수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면 이야기 전체가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97
이 두 우주를 연결하는 통로는 없습니다. 두 우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체계이고, 각 체계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결코 비교될 수 없습니다. 개체적 정의 세계에서 벗어나 먹이사슬 세계로 나아가는 멋지고 질서정연하며 차분한 방법은 없습니다. 아니 헤라클레이토스적 우주에 들어가려면 다신은 사력을 다해서 용맹하게 도약해야만 합니다. 저는 황금테가 빛나는 악어의 눈을 통해 뛰어올랐습니다. 97
악어의 눈은 우리 모두가 먹이인 세상이 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악어가 저를 보통의 우주에서 끌어내어 물이 흐르는 평행우주로 배려보냈을 때, 저는 그곳에서 이 세계가 끔직한 부당하모가 무관심, 그리고 암울한 필연성의 일면을 드러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 일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먹이 사슬 세계가 놀랍도록 급진적 평등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잉 세계는 만물을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97
에스키모 무속인에 따르면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영혼들로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는 다른 존재를 먹이로 보면서 동시에 영혼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점이 혼란스러운 부분이며, 균형잡힌 바위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 두 세계를 모두 보아야 합니다. 균형 잡힌 바위의 지혜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 두 세계를 모두 살아가고 두 세계 모두에 거주지를 가졌다는 점을 깨우치게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점을 모은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98
급진적 평등을 유지하는 교환의 관점.
그렇다면 제 몸을 먹이로 삼는 악어를 거부한 '나'는 누구였나요? 헤라클레이토스적 우주에서 먹이로서의 제 몸, 에너지 물질로서 나타나는 몸은 결코 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생태계에 속하는 것입니다. 소유권이 전적으로 제게 있다는 생각은 근본적 환영으로, 다른 우주에서 헤라클레이토스적 우주로 가져온 환영입니다. 이 환영은 제가 방금까지 붙잡혀 있다가 빠져나온 개체적 정의의 세계에서 온 것으로 제 불신과 분노의 기저를 이룹니다. 100
오로지 인간에게 국한된 개체 정의 우주의 관점에서 고기는 곧 비참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정말로 머지 않아 '변화의 세계'를 뒤로하고 초월과 신체 공포증과 소외라는 낡은 주체가 제공하는 위한으로 되돌아가도록 자신을 설득할 것입니다. 100
제가 개체/정의와 먹이/생태적 체제라고 부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와 경계가 실재합니다. 저는 그곳에 가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먹이인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났고, 마치 플라톤의 동굴 밖으로 나온 누군가처럼 이 세계가 진짜라고 당신에게 말해주기 위해 그 여정에서 되돌아왔습니다. 이 두 세계는 결코 같은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고 이 점때문에 서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분명 두 세계는 서로 다른 차원의 평행 우주로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세계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두 세계는 사람들이 잘못하여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 환원하거나 인간의 오만으로 다른 실수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런 점들이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세계에서 당신은 개체 정의적 관점에서 사람 주체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다른 세계, 더 오래되고 충격적이며 전복적이고 부인 당한 세계에서 당신은 먹이로 존재합니다. 101
병원에서 회복 중일 때, 저는 종교인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어떤 목적을 위해 구원 받았다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건이 제게 선사한 임무가 이제 명확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임무를 제 개인적 구원의 목적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제 임무는 균형 잡힌 바위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각가가의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서로를 어떻게 제한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우주의 관계를 알아내고, 정의와 생태적 틀 사이에서 우리가 어떻게 개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밝혀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동물 정의와 생태 관점 사이에서 벌어진 중요한 갈등으로, 많은 환경철학자들을 성가시게 했습니다. 102
당신이 고기에 담긴 비참함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직 이 세계 중 한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다른 세계에서 그 생각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에서 비참함은 실상 무의미한 개념입니다. 비참함의 관점에서만 논쟁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먹이라는 생태학적 틀을 명백히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든지 다른 동물 또한 먹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의-속의-인간'과 '자연-속의-동물' 틀이라는 이원론에 인밀히 호소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03
두 우주 간의 경계를 야생과 길들여진 세계 사이의 경계와 동일시하는 것 또한 잘못된 인식입니다. 도시와 길들여진 곳/일궈진cultivated 영역에서 사는 것의 생태계 틀 안에 존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야생은 개체적 정의의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논할 수 있습니다. 악어의 눈을 응시하면서 제가 자신과 나눈 포식자/먹이의 대화는 정확히 이 두 세계 사이의 경계와 전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03
포식에 대한 무조건적 긍적은 오직 한쪽에서만 세계를 바라보게 합니다. 양쪽 세계의 현실을 직시하는 긍정이 필요합니다. 103
당신이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하고 두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을 깨닫기 전까지 자아에 대한 엄밀하게 체현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두 세계에서 살아야 하고 두 세계를 횡단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104
우리가 먹는 먹이의 영혼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와 우리가 먹는 것이 양쪽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삶을 도덕적으로 어루만지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또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먹이를 공정하게 대하고 그것이 제공하는 관용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차례가 오면 먹이는 우리 역시 관대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취하는 모든 생명으로부터 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것을 뽑아내려는 옹졸한 자기 극대화의 욕망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먹이는 우리에게 늘 다른 존재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존재를 존중함으로서 우리 자신과 모든 다른 생명 존재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배우라고 요청합니다. 이 존재들이 배푼 관용은 우리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우리 차례가 되면 우리를 먹이로 취합니다. 106
자연과 문화를 서로 침범하지 않는 상태로 분리하는 일에 어떤 형태로든 정상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자연을 구하겠다는 인간의 욕망과 , 이빨과 발톱이 붉게 물든 부정한 불의의 영역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옛이야기를 고수하겠다는 욕망에 반대합니다. 저는 오히려 당신과 다른 사람들의 냉담함을 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의미한 고통에 대한 비판을 문화 영역에 국한하고, 고통을 자연 선택의 필수적 측면, 즉 종의 생존에 필수적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화 영역에서의 연민 윤리와 유사한 윤리가 자연에는 적절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영역에서의 고통은 유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인간이 이제 야생에 사는 종들과 같은 방식으로 자연 선택에 시달리고 있지 않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106
동물/먹이 세계에서의 비침함과 고통이 인간/정의 세계에서의 고통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을 지라도 인간/정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모든 생명 존재와 공유하는 일종의 연대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 연대감은 동물/먹이 세계가 자아내는 필연적 고통의 관점만큼이나 유효한 관점입니다. 107
저는 우리 문화가 두 체계를 그토록 조화롭지 않다고 가정하고 또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현한 이유를 연구해야만 합니다. 108
꼴풀과 자신이 껶는 분홍색, 흰색, 푸른색의 수련에 둘러싸여 꿈을 꾸고 항해하는 앨리스처럼 저는 어린 소녀가 꿈꾸는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은 동물과 식물이 말을 하는, 심지어 돌맹이조차 말을 할 수 있으며 모든 생명에 활력이 넘치는 세계였습니다. 이 세계는 연인이었습니다. 자연은 현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풍요로운 관점이지만, 어쩌면 경솔한 관점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배경은 제가 왜 악어를 마치 이 시계의 악을 이제 막 알아차리게 된 아이처럼 만났는지 아주 부분적으로 설명합니다. 다른 존재에게 가한 어떤 큰 잘못이 날카로운 악마적 경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14
초기 청교도 시대에 자연은 밀려났습다. 자연은 막대한 방종을 선호하여 문명화된 규칙과 실천을 버린 곳, 다시 말해 사악한 동물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관점에서 자연은 정원에서 통제 받고 묶여 있어야 하는 야만적이고 위협적인 여성 타자였습니다. 정원은 의심스럽고 교화적인 십자군 문화에 의해 부역자의 영역이자 집 주위에서 길들여진 것들로 묘사되었습니다. 정원은 야생의 영역과 정반대 위치에 놓였습니다.
이 관점은 다소 불편한, 심지어 모기에 물리는 것처럼 무서운 일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굳이 대처하기보다는 안전지대 안에 머물면서 나어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야생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115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자연의 영역, 즉 자연으로서의 죽음 영역에 다시 한번 반환됩니다. 우리가 자연의 포식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때 특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영역에 속하지 않는 다고 주장해온 다른 생명 존재들처럼 우리는 자연에 반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우리의 문화적 이해를 통해서만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화는 아주 중요하고 책임이 큰 역할 을 수행합니다. 116
먼저 우리는 흰 수염을 기른 한 현자가 우리 손을 잡고,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것을 얻는 세계를 그가 보장해줄 것이란 기대를 반드시 멈춰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악의 문제에 대한 그토록 우수꽝스럽고 정교한 이야기를 그만 멈추어야 합니다. 어떻게 악이 우리를 시험하고 구원하기 위해 보내졌는지 혹은 어떻게 악이 우리를 보살피고 우리의 모든 욕구를 달래줄 더 나은 세계로 우리를 데러가서 이 모든 부당함을 보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어야 합니다. 이런 관념들은 우리가 사는 실제의 생태 세계와 조금도 닮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며, 두 세계를 더 큰 합치와 균형으로 이끄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했습니다. 116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해야 악어의 서사를 정의의 서사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것이 핵심 질문입니다. 두 세계를 함께 모으기 위해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오리-토끼 그림의 두려운 이중성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를 볼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한쪽이 보이면 다른 한쪽은 보이지 않는 일종의 눈먼 상태를 넘어 우리는 동시에 양쪽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117
두 세계를 지각하는 제 의식의 결핍을 설명해야 했기에 저는 서구 문화에서 일어나는 물질성 혹은 육체성에 대한 거부를 다시 검토해야 했습니다. 인류는 다른 모든 영장류와 동일한 유전적 자원에서 진화했고 모든 생명체와 긴밀한 관계라고 알려져 있지만, 우리는 우리와 다른 동물 사이의 연결을 최소화하려는 듯한 활동과 신념에 끊임없이 매달립니다. ...우리는 사실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죽음과 부패에 취약한 물질적 존재라는 점을 아주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 다른 우주에 대해 무지한 상태를 유지하고 이 우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합으로써 우리는 인간이 겪는 필멸의 삶, 그리고 우리가 가정한 인간의 우월할 지위에 대한
뿌리 싶은 불안을 잠재웁니다. 우리는 우리가 오롯이 문화 안에서만 살아간다는 상상을 통해 우리의 생명은 다른 물리적 존재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신에게 허락합니다. 그 기저에서 우리가 문제로 여기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 정신과 달리 우리가 지닌 동물적 한계를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118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우리와 자연이 맺는 관계들을 훨씬 더 투명하게 만들어줄 이야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이야기의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가이아라고 불리는 위대한 생명과 우리 생명을 연결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떄 만물은 자신이 고안한 이름으로 불리어야 합니다. 문화/자연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두 문화 만나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생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문화 영역에 대한 담론으로 우리를 설명하고, 그로부터 분리되어 멀리 떨어졌다고 진술된 자연 영역에 대한 담론으로 그들을 설명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 속에 살고 '그들'은 자연 속에 산다는 확신은 너무 강해서 이제 남은 것은 자유와 역사, 의식에 대한 열정적 이야기뿐입니다. 120
소외와 물질성 부정이라는 기독교/서구의 이원론적 틀은 우리와 자연을 연결하는 서사를 주요 만남의 여러 지점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죽음과 먹이의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과 먹이의 문제 외에도 죽은 영역이나 공백과 무감각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문제에서 자연과 만날 접촉의 구조도 우리를 안내할 유용한 이야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121
... 이는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을 때, 윔뱃같은 동물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비판과 애도를 부정할 수 있게 합니다. 121
우리는 모든 먹이가 영혼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영혼이 담기지 않은 먹이만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혼이 담긴 먹이를 없애고자 하는 채식 제국주의자의 사례를 따르는 것은 제 생각에는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먹이사술의 바깥에, 죽음과 먹이에 담긴 호혜적 교환의 바깥에 두고, 이를 다른 문화에 강요하려는 것은 위험한 부정입니다. 이처럼 소외된 비거님즘은 데카르트의 이원론, 그리고 도덕 질서 구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화를 의식과 동등한 것으로 대하고, 자연을 감정 없이 오로지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시계 장치와 동등한 것으로 대합니다. 123
우리가 두 세계에 살고 있다는 생태의 핵심 메시지가 있는데도 환경 운동가 사이에는 이 문제를 둘러싼 수많은 갈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 갈등이 우리가 두 영역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제거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연과 문화 이야기가 합쳐지는 인간 생명의 주요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제거한 것입니다. 124
생태의 영역을 정의의 영역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제국주의적 일면에 저항할 수 가 없습니다. 우리는 감정과 특수성에 중요한 자리를 내어주는 윤리를 풍부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짐 체니는 은유의 사용이 이론과 자아, 앎과 아는 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 데 적합한 수단이 된 이야기를 보여주며, 이를 통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생태 영역에서의 정의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고, 우리는 그 규칙을 수용하는 데 격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 규칙은 아주 급진적 평등주의의 틀로 이뤄졌습니다. 다른 존재가 당신을 원하지 않는 동안에 한해서만 당신은 그 작은 생명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몸이 당신에게 소유되지 않은 헤라클레이토스적 규칙입니다. 124
2부 비인간 생명 존재와의 소통
4장 윔뱃 경야: 비루비를 기억하며
기본적으로 야생동물이자 자유롭고 경계심이 강함 윔뱃을 이토록 친근하고 풍부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야생적인 것과 길들여진 것, 숲과 집, 비인간과 인간, 자연과 문화 사이의 통상적인 경계를 가로지릅니다. '문화' 세계는 정체성이 인간에게 동화되고 인간의 의지와 관심사와 기준에 순응하는 인간화된 세계로 이해됩니다. 이 세계에서 '좋은 개'는 인간 문화의 일부고, 개는 지신만의 방식을 유지하는 동등한 일원으로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인간의 지배와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훈렵됩니다. 반면 서양에서 우리는 주로 '멀리 떨어진' 과학의 도구적이고 환원주의적인 틀을 통해 '자연' 세계를 보려하고, 이러한 과학은 개인의 고도로 발달한 돌봄 관계에 담긴 풍부한 개인적 지식의 정당성을 박탈하려 합니다.
제인 구달과 같은 여성들에 의해 혁명적 형태의 동물행동학이 우리에게 적확학게 새로운 통찰력을 선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연'과 '문화'의 틀은 우리의 방식만 인정하고 동물과의 깊은 개인적 접촉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비루비는 접촉과 우정에 대한 자신의 조건을 정립한 '야생에 친숙한' 존재였습니다. 자연/문화 경계를 넘는 그리하여 우리 문명을 구성하는 접촉의 형태를 탐구하는 것은 엄청난 설렘이었습니다. 숲길을 따라 비루비와 나란 히 걷고, 제 책상 앞에 앉아서 숲에 거주하는 윔뱃이 난로 옆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매혹적이었습니다. .. 너는 그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와 자유를 보여주었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142
3부 생명과 죽음의 생태적 순환
7장 무미: 먹이로서 죽음에 접근하기
무신론, 예외주의, 천국론
죽음에 대한 개념을 흐트러트린 두 번째 경험은 제 아들을 시골의 작은 공동묘지에 매장한 일입니다. 이곳은 실로 놀라운 식물공동체의 피난처이기도 햇습니다. 저는 이 경험으로부터 급진적 애니미즘의 관점에서 정체성을 다시 개념화하는 것이 죽음을 상호 양육에 담긴 호혜적 윤리의 측면에서 다시 상상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241
천국론에 따르면 지구는 기껏해야 임시 거처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집은 지구 너머 천국에 잇습니다. 6피트 아래 묻힌 틀튼한 나무 관이나 강철 관은 천국에 묶인 몸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지구와 다른 생명 존재로부터 분리하고, 몸이 고귀한 집을 향해 떠날 수 있게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죽음과 연속성 문제에 대한 초월적 해법은 우리를 육화되고 소멸되는 부분과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정신' 부분으로 나눕니다. 전자는 땅에 속하고 후자는 천국에 속합니다. 몸은 부패하지만, 진정한 자아인 영혼은 따로 떠러진 영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정체성과 연속성 문제에 대한 이러한 초월적 해법은 우리가 다른 형태의 생명과 친족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우리 존재가 공유하는 결말, 즉 우리가 다른 존재를 위한 먹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데 매달립니다. 243
이 생명없는 영역은 인간과 자연을 극도록 분리하고 죽음을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자 반대되는 것으로 여기는 초월적 이상을 현대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초월적 이상의 매장 관습은 내세에서의 종교가 아닌 자연에 맞서는 현세의 기룰, 의료 전쟁으로 인간의 유한성을 물리치고자 한 데카르트적 계획과 인간예외주의를 표현합니다. 제가 환원적 유물론에서 밝혔듯이 현대 서구 정체성은 연속성의 내세적 기반과 의미를 거부했지만, 연속성이나 인간 생명의 체현성에 대한 다른 만족스러운 맥락이나 결정적인 의미를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근대성은 과거의 환영을 벗어던졌다는 점에 심취했지만, 정작 천상적 환영을 대체할 생태적이거나 지구적인 정체성 또는 서사를 제공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245
이 분석에 따르면 환원적 유물론과 이에 연관된 무신론적 유형은 천국론의 문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절단된 형태로 유지하고 심지어 긍정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정신과 물질의 분리는 유지되지만, 앞서 평가절하된 쪽(즉 몸과 물질성)이 이제 긍정되는 역전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원론적 문제를 진정으로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질성에 대한 온전한 재고 없이 일어나는 역전입니다. 현대 무신론과 인본주의, 유물론의 상당수는 그저 일부가 잘려나간 이원론과 환상이 깨진 천국론을 표현할 뿐입니다. 따라서 자아와 몸에 대한 의미와 위안, 연속성을 대안적으로 구성하는 서사를 제공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생태적 이해가 바로 그러한 서사와 관습의 재구성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잇다는 것입니다. 246
정신 혹은 물질처럼 전통적으로 이원화된 선택들이 죽음에 대한 주요 딜레마의 틀을 만들고 잇습니다. 오늘날 서구에서 목도되는 바가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소외된 연속성과 환원적, 유물론적 불연속성 사이의 (서사) 선택 같은 딜레마입니다. 246
환원적 무신론과 유물론의 내재적 선택에서 인간 몸은 정체성에 있어 여전히 본질적이지 않고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죽음을 넘어서는 어떤 연속성도 몸에 기초할 수 없습니다. 환원적 유물론은 특히 죽음이란 이야기의 최종 결말이라는 최종성 테제Finality Thesis로 나타납니다. 근대주의자의 침묵하는 거대 묘비에는 바로 이 이야기의 상실과 서사 없음의 서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247
애니미즘적 죽음 : 또 다른 이야기
최종성 테제는 종래의 유신론적 입장과 무신론적 입장이 물질에 대한 이해에 있어 어떻게 협력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두 입장은 물질을 자아에 꼭 필요하지 않고, 죽음으로 대표되는 결말에서 전적으로 뒤에 남겨진 환원적 영역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뭄은 그저 '끝'난 것이 아니므로 부패하거나 분해됩니다. 비록 몸이 이전의 조직 형태를 잃지만, 물질과 생명력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취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통합됩니다. 이 과정에는 연결과 죽음 이후의 서사가 아주 풍부하게 존재합니다. 248
최종성 테제는 자아를 영혼과 동일시하는 천국론을 은밀히 이어나가고, 정신과 물질 이원론에서 비롯된 몸과 물질성에 대한 환원주의적이며 비서사화된 이해에 의지합니다. 최종성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 요소는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이 끝나면 '우리'도 최후를 맞이한다는 이원론적, 데카르트적 명제를 미묘하게 수용합니다. 이 명제에 따르면 의식이 최후를 맞이하면 우리 또한 자아의 최후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자아와 자아의 경계에 대한 조금 더 유연하고 체현된 개념을 적용하여 연속성의 서사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서사는 계속됩니다. 이제 인간 주체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248
생태적, 애니미즘적 유물론에 따르면 내세는 긍정적이고 생태적인 현존이자 다른 종의 생명에 남겨진 분명한 흔적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또 다른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을 순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우리의 죽음을 다른 생명을 위한 기회로 이해한다면 특권적, 기술적 지배와 초월성으로 영원한 젊음을 움켜쥐려 하는 인간의 탐욕과 배은망덕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ㅈ구음을 개체 수준에서 생명의 찰나성을 확정하지만, 생태적 수준에서는 지속적이고 탄력적인 순환 또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제가 처음 방문했던 묘지는 죽음을 향한 환희의 전망으로 슬픔을 치유하는 길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죽음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경치로 흘러들어가고, 더 정확히 말하면 여정을 떠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249
애니미즘 혹은 생태적 유물론이 꿈꾸는 상상의 측면에서 죽음과 성스러운 것을 다시 개념화하려면 우리 문화에서 규범화된 죽음에 대한 다른 철학과 감상, 도상학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묘지를 앞서 지구에 거주한 신성한 존재와 그들을 따로 떨어트리는 장소가 아니라 그들과 결합하는 장소로서 추앙하고, 인간을 이간 이상의 것으로 변화시키는 해체의 과정을 기립니다. 서구 의식에 그토록 깊이 뿌리박힌 인간예외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애니미즘, 유물론적 영성이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가능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결정적 전제 조건입니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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