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축의 시대 (1)

백_일홍 2023. 10. 30. 23:17

축의 시대,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1~5장)

 

카렌 암스트롱

 

목 차

머리말 -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1장 축의 시대 문명 벨트(기원전 1600년∼900년경)
조로아스터, 선과 악의 대결
인도에 정착한 정복자 아리아인
요·순·우, 의로운 통치자의 시대
전쟁하는 신성한 신 야훼

2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기원전 900년∼800년경)
암흑의 400년을 견뎌낸 아테네
최초의 유일신 숭배자 엘리야
하늘의 도(道)를 따르는 지상의 삶
아트만, 내 안의 진정한 나

3장 자아의 발견(기원전 800년∼700년경)
분노하는 야훼의 대리자 이사야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 영웅들의 자기 중심주의
춘추시대,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숲으로 간 현자, 영적 탐구의 선구자들

4장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기원전 700년∼600년경)
인간 내면의 정복, 《우파니샤드》
로고스, 그리스 영웅 시대를 끝내다
혼란한 시대 삶의 모델, 군자(君子)
‘책의 종교’ 유대교의 탄생

5장 고난의 시대(기원전 600년∼530년경)
추방당한 자들의 트라우마
아테네의 솔론, 정치를 발명하다
상키아, 인류 최초의 무신론
흔들리는 예(禮), 무너지는 도(道)

6장 공감의 발견(기원전 530년∼450년경)
공자, 인(仁)의 나라를 찾아 떠나다
고난의 길에서 태어난 일신교
그리스 민주주의를 연 이성의 힘
자이나교, 비폭력과 불살생의 극한

7장 사유의 혁명(기원전 450년∼398년경)
에즈라의 닫힌 길, 요나의 열린 길
땅으로 내려온 철학, 삶을 정화하는 비극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혜를 가르친 앎의 교사
묵가, 급진적인 공감의 사상
고타마 싯다르타, 무아의 발견자, 마음의 혁명가

8장 철학의 모험(기원전 400년∼300년경)
혜자의 역설, 장자의 무위, 맹자의 자애
두려움에 떠는 전사들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동굴에서 나온 이데아의 탐구자, 플라톤
로고스의 건축가, 아리스토텔레스

9장 제국의 시대(기원전 300년∼220년경)
한비자·순자·노자의 도덕 군주론
헬레니즘, 문명을 만든 최초의 문명 충돌
《바가바드기타》, 축의 시대 마지막 위대한 노래

10장 축의 시대의 귀환(기원전 2세기~ )
천하 통일과 사상의 통합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
토라의 원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 머리말 |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어느 시대나 자기 시대가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믿겠지만, 우리 시대의 문제들은 특히 다루기 어렵고 미래는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다. 우리의 많은 난관 뒤에는 사실 더 깊은 정신적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에 우리는 전례없는 규모로 폭력이 분출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안타깝게도 우리사 서로 해치고 상처를 내는 능력은 우리가 이룬 특별한 경제적, 과학적 진보에 뒤쳐지지 않고 함께 발전해 왔다. 

우리에게는 호전성을 제어하여 안전하고 적절한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둘 지혜가 부족한 것 같다. 히로니사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첫 원자폭탄은 현대 문화의 찬한한 성취 한복판에서 허무주의적 자기 파괴의 현장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제 우리는 땅을 성스럽게 여기지 않고 단순하게 '자원'으로 보기 때문에 환경 재앙의 위험에 처해 있다.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에 뒤처지지 않는 어떤 정신척 혁명잉 없으면, 이 행성을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순전히 합리적이기만 한 교육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대규모 대학교가 강세수용소와 함께 우리가까이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르완다, 보스니아, 세계무역센터 파괴는 우리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성불가침한 존재라는 감각을 잃어버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지 계시하는 움을한 예이다. 

이런 곤경에서 빠져나오려 할 때, 나는 우리가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라고 부른 시기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시기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세계의 네 지역에서 이후 계속해서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축의 시대는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레미야, <<우파니샤드>>의 신비주의자들, 맹자, 에우리피테스의 시대였다.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축의 시대 현자들이 어떻게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왜 우리가 공자와 붓다에게 도움을 청해양 하는가? ... 실제로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정신적으고 사회적인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은 늘 축의 시대를 돌아보며 길을 찾았다. 

축의 시대의 예언자, 신비주의자, 철학자, 시인들이 워낙 앞서 나갔고 또 그들의 전망이 워낙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뒷세대들은 그것을 희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축의 시대 개혁가들이 없애고 싶어했던 바로 그런 종교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는 근대 세계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본다. 축의 시대 현자들에게는 우리 시대가 귀기울일 만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지만, 그들의 통찰은 오늘날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랍게, 심지어 충격적으로 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 흔히 믿음은 어떤 교의에 속하는 명제들을 믿는 것이라고 여긴다. 실제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흔히 '신자'라고 부른다. 마치 특정 종교의 어떤 조항에 동의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축의 시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교리나 형이상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붓다와 같은 이는 개인의 신학적 믿음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축의 시대에 발전한 전통들은 모두 인간 의식의 한계를 밀고 나아갔으며, 인간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초월적 차원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초자연적이라고 여겼던 것은 아니며, 대부분은 그것을 입에 올리기를 거부했다. .. 현자들은 물론 이런 궁극적 실재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종교적인 가르침을 의심없이 또는 간접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모든 가르침을 경험적으로, 즉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검증하는 것이 필수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는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종교의 핵심은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바꾸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따. 축의 시대 이전에는 제의와 동물 희생이 종교적 탐구의 중심이었따. 오늘날 훌륭한 연극을 경험하는 것처럼 존재의 도 다른 수준으로 안내해주는 신성한 드라마에서 신을 경험한 것이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것을 바꾸었다. 여전히 제의의 가치를 인정했지만 거기에 새로운 윤리적 의미를 부여했으며, 정신적 생활의 중심에 도덕성을 갖다놓았다. 이른바 '하느님' '니르바나' '브라만' '도'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비로운 삶으 사는 것이었다. 사실 종교가 곧 자비였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인 생활 방식을 채택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 또는 '절대자'의 존재를 만족스럽게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생각은 먼저 원칙을 세운 뒤에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훌륭한 과학적 실천이다. 그러나 축의 시대 현자들이라면 앞뒤가 바뀌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먼저 윤리적인 생활에 헌신하라고 말했다. 형이상학적 신념이 아니라, 훈련을 받다 습관이 된 자비심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초월을 슬쩍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전통은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황금률' -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 - 을 정리해냈다. 축의 시대 현자들에게 종교란 정통적인 믿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신성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행동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우리는 축의 시대의 이런 에토스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지구촌에서는 이제 편협하거나 배타적인 전망을 제시할 여구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처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목가적인 환경에서 자비의 윤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전통은 우리사회와 마찬가지로 전에 없던 폭력과 전쟁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발전해 나갔다. 실제로 종교적 변화의 첫 번째 촉매는 현자들이 주위에서 흔히 목격하던 호전적  태도에 대한 원칙 있는 거부였다. 축의 시대 철학자들은 마음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아냈으며, 그 결과 내면의 세계로 뚫고 들어가 인간 경험에서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영역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축의 시대 이전의 고대 종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대 종교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으며, 이 모두가 축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사회는 초기에 하나의 '최고신'을 믿었다. 이 신은 종종 '천신'으로 불렀는데, 이 신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희생은 고대 세계의 보편적인 종교 관행이었다. 이것은 세계의 존재를 유지하는 힘이 고갈되었을 때 그 힘을 재생하는 방법이었다. 이때는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가 뗄 수 없이 얽혀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오직 다른 생물이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자신이 생존할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따라서 자기 몸을 내주는 동물의 자기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고대 종교는 이른바 영속 철학에 의지했다. 이 철학이 어떤 형태로든 대부분의 전근대 문화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철학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인간, 대상, 경험은 신성한 세계에 있는 실재의 복제물 - 창백한 그림자 -이다. 따라서 신성한 세계는 인간 존재의 원형이며, 그것이 지상의 어던 것보다 더 풍부하고ㅡ 더 강하고, 더 지속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영속 철학을 버린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노예처럼 유행으이 명령을 딸고 심지어 현재의 미의 기준을  복제하느라 자기 얼굴과 몸에 폭력으 가하기도 한다. 유명인 숭배는 우리가 여전히 '초인간성'을 체현한 모범을 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축의 시대는 완벽하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은 가장 큰 결함이다.... 우리는 노예처럼 축의 시대 현자들을 따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축의 시대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축의 시대 정신은 그런 종류의 순응이 사람들을 령등하고 미성숙한 자아에 묶어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만인에 대한 보편적 관심이라는 축의 시대 이상을 확대하여 거기에 여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축의 시대의 전망을 재창조하려고 한다면 근대의 최고의 통찰들도 탁자 위에 꺼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1장. 축의 시대  문명 벨트

(기원전1600년~900년경)

ㅇ 조로아스터, 선과 악의 대결


축의 시대 영성을 처음 시도한 이들은 러시아 남부의 초원지대에 산 목축민인 아리아인이었다. 아베스타어를 사용한 아리아인과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한 아리아인들이 그들이다. 아리아인은 신들에게  희생물을 바치면서 자신들의 삶이 다른 생물의  죽음에  의존한다고 믿었고 자기 희생없이는 물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어떤  진보도  있을수  없다고 보았다. 여기서 아힘사(불살생) 정신과 자기희생 자기비움의 케노시스인  축의  정신의  맹아를 볼수 있다. 


가축, 부, 안전을 기대하며 간소하게 황소를 제물로 바치고 사제에게 제의를 의뢰했는데 점차 성대해지면서 부를 과시하게 되고 기원전 2000년대 말부터는 죽은 뒤에 내세에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기원전 1500년 무렵 아리아인의 평화로운 삶은 매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와의 교역을 통해 청동무기와 전차로 무장하게 되면서 끝이 났다. 아리아인은 전사가 되어 이웃의 정착지를 기습하고 가축과 작물을 빼앗았다. 아베스타어를 쓰는 전통적인  아리아인(이란동부)의 자기 민족을 구하고자 한 것이조로아스터다. 그는 순수한 것을 불순한 것과 구분하고 선과 악을 구별함으로써 아후라마즈다(신성한 불멸의 존재)를 위하여  세상을 해방시킬수  있었다.신과 인간은 아후라마즈다를 섬기며 영원히 살수 있다. 이제 죽음은 없다. 인간은 신처럼 바뀌어 병,노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수백년 뒤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을때 모두 비폭력에 기초한 영성을 장려하여 자기시대의 잔혹함과 공격성에 맞서려 했다. 조로아스터는 자기시대의 폭력을 신들의 세계에  투사하였고 선과 악의 단순한 범주로 양극화했으며  매우 경쟁적이었다.


조로아스터는 아직까지 비폭력의 아힘사 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선의 입장에서 악을 물리치는 윤리적인 전망을 부여함으로써 축의 시대의 시원이 되었다.


[제의를 지내면서 신께 바친 동물만 먹고 함부로 다른 가축은 죽이거나 먹지  않았다는 부분이  현대에  다시 재조명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명이 있는 존재를 귀중히 여기고 그들의 희생아래 새로운 생명체가 나올수 있다고 본 그들의 지혜는 오늘날 특히 되새겨 볼 점이다.]

아리아인은  '영혼'을 깊이 존중하는 태도를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으며, 이것이 그들의 축의 시대의 핵심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p.27

아리아인들은 희생을 늘 창조적 인것으로 보게 되었고 자신들의 삶이 다른 생물의 죽음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물의 세 원형(식물, 황소,인간)은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도록 자기 생명을 내놓았다. 자기 희생 없이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었다. 이것 또한 축의 시대의 원리 가운데 하나가 된다.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2000년대말에 아베스타계 아리아인은 남쪽으로 이주하여 이란동부에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서 조로아스터는 국교가 되었다.
 
묘한 일이지만 결국 아힘사(불살생)즉 비폭력의 원리에 기초하여 축의 시대의 첫번째 지속적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은 조로아스터가 비난했던 아리아인 가축 도둑들이었다.

 

 

ㅇ 인도에 정착한 정복자 아리아인

산스크리트를 사용하는 아리아인 인더스강의 지류사이에 펼쳐진 비옥한 땅 펀잡지방에 정착했다.


p.42

아리아인은 열심히 살고 열심히 술을 마시는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음악.도박.술을사랑했다. 그들은 영적인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펀잡에 도착한직후 학식있는 엘리트는 베다경전가운데 리그베다 가장 초기에 속하는 찬가들을 편찬하기시작했다. 완성된 리그베다는 1,028편의 찬가로 이루어졌다. 리그베다의 일부 찬가들은 매우 오래된 것일수있다. 아리아부족들이 인도에 이르렀을때, 그 언어는 이미 낡은것이었기때문이다. <리그베다>가 문서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1000년대의 일이다. 글을 쓰고 읽는 능력을 갖추면서 인간의 기억력은 감퇴했다. 베다경전은 고대 산스크리트를 거의 이해할수 없게된 뒤에도 흠 하나없이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아리아인들에게 소리는 늘 신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신성한 텍스트에 귀를 기울일때면 신 이 들어온다고 느꼈다. 찬가를 암기할때면 그들의 마음에는 신성한 존재가 그득히 들어찼다. 베다의 지식은사실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성스러운 홀림으로 경험되었다.


P.56
인간과 가축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눈덮인 산과 거센 바는 누구의소유인가? 신들가운데 누가 하늘을 지탱할수있는가?


이 찬가에서 시인은 인도 축의시대를 여는 초기신화의 하나가 될 답을 찿는다. 푸루샤 (인간)자신이 우주였다.

 


ㅇ 요.순.우,

의로운 통치자의 시대

기원전 16세기 황하유역을 다스려온 중국 商 왕조(은나라)의 왕들은 자신들이 신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기원전 23세기에 지혜로운 두 임금 요(堯)와 순(舜)은 평화와 번영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순임금은 13년간  우禹 에게 운하를 건설하고 습지를 정돈하고 여러 강 이 흐르도록 유도해, 벼 와 기장을 재배했다. 순은 이 치적에 감명받아 우에게 자신의 뒤를 잇게해  우는 하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이 모든 전설적인 지혜로운 왕들은 중국 축의시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주었다.

음陰의 계절은 여성농민의 계절 겨울이었다. 음의활동은 내적이었으며 어둡고 폐쇄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양陽은 남성적 측면으로서 여름과 날빛속에서 움직였다. 양은 외적이고, 밖으로 향하는 힘 이었으며 그 생산물은 풍성했다.


ㅇ 전쟁하는 신성한 신 야훼

P.7

초기 이스라엘의 발전에 관한 그시대의 기록은없다. 성경은 아주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원래 구전되던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최초의 성경 텍스트들은 기원전 8세기에 기록되었으며. 성경 정전은 기원전 5세기 또는 4세기에 결정되었다.

 

축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역사가.시인.연대기기록자 예언자.사제.법률가들은 자신의 역사를 깊이 명상했다. 중국인들에게 요.순.주공이 그랬던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나라의 창건자들인, 아브라함.모세.여호수아.다윗은 영적으로 중요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도의 현자들이 희생제의 의미를 생각했던것과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그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사유했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조직화를 위한 상징이되며 축의시대의 발전은 이 상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2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

(기원전 900년~800년)

ㅇ 암흑의 400년을 견뎌낸 아테네


BC 1200년경 지중해 동부의 위기가 그리스를 강타했다. BC 14C부터 이 지역을 장악한 미케네 사람들은 BC 13C 미케네 왕국이 소아시아의 트로이를 파괴하고, 그 후 미케네 왕국도 붕괴했고, 그리스 400년간 암흑시대로 돌입. 그 전의 크레타 문명(BC 2200~1375)의 사람들은 다정다감하고 평화로웠던 것에 비해 미케네 사회는 호전적이고, 전투적이었다. 최신 군사기술을 과시하고, 대중을 지배했다.(축의 시대 발전하는 그리스 문화와 관계없다)

그리스인은 인도-유럽어족 계열로 BC 2000경 이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스 종교는 불이 중요했고, 경쟁적이었고 모든 것을 시합으로 만들려고 했다. 첨엔 그리스부족들은 크레타 사회주변에 정착했지만, BC1600경 본토에서도 존재감을 강력히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크레타 문명 쇠퇴후 미케네 왕국을 통제하고 확립할 준비가 돼 있었다.

크레타와 미케네 종교는 성스러운 나무를 숭배했고, 신들에게 동물 희생제를 드렸고, 무아경에 빠져 환상을 보고, 묘지는 성스러운 장소였고, 왕은 신들의 동반자였다. 이런제의 일부분 그리스 종교에 살아남았다.(예: 그리스 만신전의 제우스, 아테나, 포세이돈, 디오니소스를 미케네에서 언급)


그러나 지중해 동부가 무너지면서 그리스인은 두 문명과 단절됐고, 문맹과 상대적인 야만 상태로 빠지고, 중앙 권위는 없어지고, 지역 족장들이 여러 지역을 통치했다. 공동체들은 고립이 됐고, 여러 나라와 접촉도 끊겼다. 기념비적인 건축도 없고, 구상예술도 없었다. 장인 정신도 사라졌다. 그들은 미케네시대가 전사들이 활보하던 영웅시대라고 기억했다.음유시인들이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공동체의 전체성과 언어를 고유하는데 도움을 줬다.

아테네 동부의 아테네는 이 위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몇안되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아테네는 미케네의 중요한 요새였다. BC11C 중반에 이르자 아테네 장인들은 원시기하학적 양식인 새련된 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BC10C 말에 아테네 주변의 시골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됐다. 4부족으로 나뉘었고, 아테네인들은 재기하게 된 것은 신화적인 왕 테세우스 덕분이라고 여겼다. 아테네 사람들은 매년 도시옆의 성스러운 언덕 아크로폴리스에서 종교 축제를 열어 테세우스가 그 지역을 통일한 것을 기념했다.

BC 9C 그리스 사회는 농촌사회였다. 지방 바실레우스의 부의 기준은 양,소,돼지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전사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공적을 자랑했으며,찬사와 아부를 요구했다. 매우 경쟁적이고, 개인적이어서 도시 전체보다는 자신들의 가족 씨족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동족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든지 협력했다.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에 무역이 부활했다.

그리스는 생기는 되찾았지만 삶들은 영적인 림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옛 크레타와 미케네 신앙의 요소 몇 가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BC 13C의 위기는 낡은 신앙을 박살냈고, BC 9C 그리스 종교는 염세적이고 음산했다. 종교의 신들은 위험하고, 잔인하고, 자의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인들은 눈부시게 찬란한 문명에 이르렀지만 결코 비극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 축의시대 종교적으로 가장 크게 기여한 점으로 본다.


우리는 그리스신들의 탄생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에서 이런 어두운 전망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세계는 태초에 자비로운 창조주 신도 없었고, 신성한 질서도 없었다. 증오와 갈등뿐.


암흑기가 지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리스인들은 자기 부모를 살해하고 자식을 학대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몰두했고, 이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에는 나름의 독립적인 생명력을 갖춘 독기(미아스마)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아무리 강해져도 절대 자신이 자기운명을 책임진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리스 문명 절정기인 BC 5C에도 사람들이 운명의 여신들에게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강요 당해서 어떤 행동을 하였다. 신들은 인간의 삶에 개입해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원하고, 분노를 자극하는 사람을 파괴하며 결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폭력과 재난에 시달렸고, 올림포스의 신들은 인간에게만 잔인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서로 박해하고 불구로 만들었다.


다른 문화에서는 가족을 성스러운 제도 여겼다. 사람들은 가족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숭상의 가치를 배웠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가족은 죽음의 전장이었다.


사회의 기초인 가족생활이 무너졌고, 문명의 파괴, 양성간의 심각한 반감이 있었다. 그들은 암흑시대에 자신들의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으며, 그동안 참사의 기억을 억눌러 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시기와 관련된 묻어버린 기억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이룬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수도 있으며,죽음,해체, 적대가 언제나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이 제의는 그리스인에게 공포를 겪으며 살고 그 공포와 직면하도록 강요했으며 그런 뒤에야 다른쪽으로 안전하게 나아가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모든 그리스 제의는 카타르시스로 끝이 났다.신은 달래고, 독기는 흩어지고, 새로운 생명,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고난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필수 전제 조건이었다.


축의 시대 4지역에 창조된 종교 전통는 모두 공포와 고통에 뿌리내리고 있었다.(암흑시대 정신세계 반영)

 

 

ㅇ 최초의 유일신 엘리야

지중해 동부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BC9C 말에 북부 왕국의 이스라엘은 이지역의 강국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옛 가나안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폐허가 된 도시의 주민들은 흡수하고, 그들의 기술을 이용했다.


아합은 사악함의 대명사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결혼했는데,그녀가 바알(땅을 비옥)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왔다.(BC7C~BC6C까지) 야훼(전사신) 신앙은 수백년간 바알의 찬가와 제의로부터 영양분을 공급 받았다.


BC 9C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의 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예언자들은 대개 왕궁과 연결되었다.


BC 9C 예언자 에리아와 그의 제자 엘리사에 관한 전설에는 더 오래된 구전의 흔적이 담겨있다.“야훼유일운동” 엘리아와 아합의 살벌한 충돌을 묘사한다.


엘리야의 이름은 “야훼는 나의 신” 이라는 뜻이다. 그는 배타적인 야훼숭배를 고집한 첫 예언자였다. 엘리야는 바알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스라엘의 신이 아니기에 페니키아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다.


바알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심한 가뭄이 오자 엘리야는 기회가 왔다고 보고,시합을 하자고 제의를 해서 그 시합에서 이기고,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다. 카르멜산에 올라가서 기도해서 가뭄을 해소시키고, 야훼가 바알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찬탈하여, 전쟁만이 아니라 땅을 비옥하게 유지하는데도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유일신을 섬길 것을 제안하여 전통종교의 새로운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복수를 피해 이스라엘을 떠나 시나이산 야훼신전으로 피신했다. 여기서 에리야는 초월적 순간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초월해야 할 대상인 탐욕, 증오, 자기 중심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초월해서 나아가야 할 목표인 신을 규정하는데 집중하면 공격성과 호전적인 배외주의를 드러낼 위험이 생긴다. 자유는 축의 시대의 핵심 가치였다.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도 않은 영성을 강요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본질적으로 규정 불가능한 초월을 두고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중동 전역에 정의는 종교의 핵심 기둥이었다. 여호수아는 야훼만을 섬기도록 강요했다. 일신 숭배는 예배 협정이었고, 야훼유일운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에게만 희생을 드리고,다른 신들에 대한 신앙은 무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는 용기가 필요했다.신성한 자원이 축적되고,친숙하고 사랑하던 신성한 의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중동의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함의와 단절하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행을 떠나는 길에 나설 참이다.

 


ㅇ 하늘의 도를 따르는 지상의 삶

중국의 축의 시대는 주나라왕들이 시행했던 고대의 제의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주나라의 영향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는 종교가 생활을 지배했다. 종교의 중심은 천자인 왕이라는 인격체였다. 중국의 종교는 제의(예)로 우주의 자연질서를 보전하는데 몰두해 있었다. 이렇게 하면 인간사회와 하늘의 도(천도)의 일치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왕은 신적인 인물로서 지상에서 최고신에 대응하는 존재였다.


하늘과 땅은 상호보완적이었고 신성하고 동등한 동반자관계였다. 하늘은 천자인 왕으로 경험되었으며제후는 각자 자신의 영토에서 천자였다. 하늘의 도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 성스러운 연속성을 보장해주었다.


중국인들은 이 세계를 하늘의 원형과 일치시켜 땅에서 모든것을 하늘의 도와 일치시키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노력을 하면서 신성함을 경험했다. 왕이 왕으로서 천명을 받아 제일의 천자가 되면 지상에서 하늘을 위한 길이 열린다. 그는 도덕 즉 도의 힘이라고 부르는 마법적인 능력을 부여받고 도덕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연현상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강요한다.


기원전 9세기에 이르면 제의는 더 공적인 행사가 되었고 제의에서 경험하는 변화의 힘이 신들을 다루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의를 통해 공동체는 과거와 현재,하늘과 땅이 하나였다.

 

 

ㅇ 아트만, 내안의  진정한  나

기원전 9세기, 인도 제의 전문가들은 인도의 축의 시대를 여는 전례 개혁에 나선다. 제의 전문가들은 브라만 사제계급으로 희생제 의에서 폭력을 없애려고  했다.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이 동물죽음에 책임을 졌다. 후원자는 새로운 제의에서 상징적으로 죽어 신들에게 자신을 바쳤으며 동물처럼 불멸을 경험했다.


그는 인드라처럼 죽여서  불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제의화된  죽음을 겪었다. 제의 전문가들은 희생제의에서 모든 동작,도구,만트라를  우주의  실재와 연결하는 유사상과 관련성을 발견하는 법을 익혔는데 그것은  다양한 수준의 실재를  한데 묶는 집단적 요가였다.


"나는 하늘을 신들을 얻었다. 나는 불멸이 되었다." 이런 연결고리들이 인도 제의과정에서 만들어졌다.희생제를 드리는 사람은 프라자파티와 마찬가지로 그의  자아(아트만)를  재구성한다.

 

고대에 제의는 바깥에 있는 신들에 초점을 맞추고 가축,부,지위 등 물질적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브라민들은 외적인 제의와 신들로부터 해방되어 불멸의 자아를 찾을 수 있고 명상함으로써 내면을 들여다볼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제의에서 희생을 드리는 사람은 혼자였으며 세속사회와 단절했다. 나아가 출가자는 체제 전체에 도전하고 용감하게 새로운 영적인 길을 걸어간 선구자가 되었다.


출가자들은 버림,금욕,신성한 삶의 규율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의 아트만, 즉 내면 깊은 곳에 신비하게 자리잡고 있는 브라만과 통일 될수 있었다. 출가자는 야타부타 즉 깨달음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는 것이기도  했다.


아트만은 서양사람들이 영혼이나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아트만은 신체적인 동시에 영적 이었다. 열과 몸에 내재하는 것이었으며 물질적인 것이건 덧없는 것이건 만물의 궁극적이고 변함없는 내적 핵심이었다. 이것은 오랜 수행끝에 인간존재의 내면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초기의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의 인격화된  표현인 프라자파티는 이제 평범한 구루가 되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는 프라자파티를 지고의 실체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그들 자신의 아트만을 구해야 했다.

 

현자와 신들은 공격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던 에고를  버릴  때에만 효과가  있는 영적 기술을  발견하는 중이었다.


3장 자아의 발견 
기원전 800년 ~ 700년


ㅇ 분노하는 야훼의 대리자 이사야
ㅇ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 영웅들의 자기 중심주의
ㅇ 춘추시대,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ㅇ 숲으로 간 현자, 영적 탐구의 선구자들


ㅇ 분노하는 야훼의 대리자 이사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중동에서 일어난 당대읭 사건들을 분석하면서 그들 지역에서 펼쳐지는 역사가 자신들이 지닌 신에 관한 관념과 많은 부분에서 충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일부에서는 제의를 비판하면서 윤리적 기초가 더 단단한 종교를 원했다. ... 기원전 8세기 말경에 모세오경(구약의 첫 다섯 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일부가 처음으로 글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축의 시대 모든 종교 전통의 핵심이 될 '자기 버리기(케노시스kenosis)'의 씨앗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경우에도 변화의 촉매는 이 지역에서 분출한 폭력이었다. 156

기원전 8세기 초반에 북부 왕국 이스랑엘은 승승장구했다. 아시리아는 점점 강성해져, 곧 이 지역 전체를 지배했다. 아시리아의 충성스러운 봉신인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치시에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어느 농업 국가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부는 상층계급에 한정되었다. 지방에서 노동으로 왕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기획에 자금을 뒷받침앴던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과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이런 전체적인 불의는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제이기도 했다. 중동에서 빈자들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하는 왕은 신들의 뜻을 위배한 것으로 여겨져 정통성에 문제가 생겼다. 따라서 예언자들이 야훼의 이름으로 일어나 정부를 공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56

헤브라이의 첫 문서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 
제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구전했으며, 기원전 8세기 말에 그것을 글로 적고 예언적 신탁 전집을 편찬했다. 157

헤부라이 예언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시작한 규율 잡힌 오랜 탐구 끝에 내부로부터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아모스의 경험은 앞으로 볼 인도나 중국의 축의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힘에 사로잡힌 느낌을 받았다. 이 힘은 그의 의식적인 삶의 정상적인 질서를 헝클어놓았다. 이제 그는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야훼가 목적을 가지고 통제하는 엥고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모스를 완전히 다른 세계에 던져버린 것이다. 헤브라이의 예언자들은 신을 파열, 뿌리 뽑기, 박살내는 타격으로 경험하곤 한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적 경험에는 긴장과 고뇌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158

아모스는 충격적인 새로운 메시지를 전했다. 야훼가 이집트 탈출 때와는 달리 이제 반사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시리아 왕을 빌려 여로보암이 가난한 자를 무시한 죄를 벌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159 

이번에는 (야훼가) 이스라엘 편에서 싸우지 않을 터였다. 야훼는 아시리아를 총애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치는 성전을 이끌 것이다.

아모스는 신성한 전사 예훼에 대한 오래된 헌신을 뒤집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에링 사랑하는 제의에 경멸을 퍼붓기도 했다. 159

대신 그는 다만 저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으흐게 하여라"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아모스는 야훼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부심을 무너뜨린다. 이제 야훼는 이스라엘 왕국을 지도에서 없애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160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자존감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는 민족의 에고에 구멍을 내고 싶어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자기 버리기'의 영성 - 축의 시대 이상의 핵심 - 에 대한 최초의 표현 가운데 하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자존감을 강화하는 대신 정의와 공평을 앞세워 개인적 이해 관계를 초월해야 했다. 

예언자는 그리스인이 케노시스 즉 '비움'이라 부른 것의 걸어다니는 본보기였다. 아모스는 자신의 주체성을 신이 차지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예훼의 말을 했다. 예언자는 신에게 열정적으로 감정 이입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버렸다. 

신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불의를 개인적 모욕으로 여겼다. 이것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축의 시대 종교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공감이 기본 조건이 된다. 아모스는 스스로 분노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야훼의 분노를 느낀 것이다. 160 

아모스와 비슷한 시기에 북부 왕국에서 활동했던 호세아는 자신의 비극적 삶을 통해 야훼와 공감하게 되었다. 호세아의 부인 고멜은 풍요를 비는 바알 신앙에서 '신성한 매춘부'가 되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을 쫓아 매춘부 노릇을 했을 때 이스라엘의 신성한 자 야훼가 느낀 것이 바로 자신이 느낀 것임을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은 이스라엘 종교의 내적 결핍 때문에 벌어졌다. 사람들이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은 그들이 야훼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 희생제나 축제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야훼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더 알아다오" 

호세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신이 내 안에 살고 있응을 인식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호세아는 사람들이 오래된 이야기의 표면 밑을 보고 신의 파도트를 알게하려고 노력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둘 다 이스라엘 종교에 중요한 새로운 영역을 도입했다. 그들은 올바른 윤리적 행동이 없으면 제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종교는 공동체의 자부심이나 자존감을 부풀리는 데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도록 권유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특히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내적인 삶을 살피고, 감정을 분석하고, 자기 성찰에 기초한 더 깊은 전망을 갖추어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 이런 점들 가운데 일부는 이 무렵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생산되던 모세오경의 초기 문건에 나타나기도 했다. 163

J와 E에는 모두 케노시스 영성(비움의 영성)의 초기 징표들이 등장한다. 
.  아부라함이 나그네를 맞이하는 모습
.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은 복종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레적 타당성고 관계없이 고통을 안겨준다. 이스라엘의 엘로힘은 단지 다정하고 자비로운 존재일 뿐 아니라, 가끔은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존재로서 자신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무으이미의 벼랑 끝까지 몰고 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어떤 폭력도 성스러운 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관점이 확립되기 전에 신을 경험하는 일에 내재해 있던 파괴적 잠재력을 보여준다. 170

유다 왕가 출신의 새로운 예언자 이사야, 
그는 북부 왕국에서 일하던 아모스나 호세아와는 다른 종교 세계에 속해 있었다. 이사야는 이집트 탈출이나 광야에서 헤맨 세월을 언급한 적이 없다. 유다의 왕국은 이런 북부의 전승이 아니라, 야훼가 다윗 왕과 맺은 영원한 언약이나 예루살렘 성전의 전승에서 위안을 구했다. 야훼는 예루살렘의 왕이었응며, 다윗과 같은 군주는 지상에서 그에게 대응하는 존재였다. 야훼가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는 한 - 이사야는 자기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 이 도시가 정복당할 일은 없었다. 175

최후의 승리를 거두려면 유다의 왕 아하스는 세속적인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야훼를 믿어야 한다. 이제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인간의 힘, 외국과 맺은 동맹, 군사적 우세에 의존하지 말고 야훼에게 의존하라고 말한다. 오만하게 인간의 군대나 요새에만 의존하는 것은 우상 숭배다.... 야훼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수호신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신들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사야의 혁명적인 생각은 도전적인 애국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많은 면에서 이사야는 과거의 종교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는 폭력적이고 경쟁적인 전망을 설교했으며, 그가 내놓은 전망은 당대의 호전적인 정치를 흡수하고 승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마법적인 신학으로서, 신의 힘이 예루살렘을 무적으로 만든다고 믿도록 권장했다. 결국 야훼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외교 정책의 기초로는 아주 위험한 것임이 밝혀진다. 178


ㅇ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 
영웅들의 자기 중심주의


그리스에서 기원전 8세기는 놀라운 시기였다. 아주 짧은 기간에 그리스인들은 암측 시대에서 벗어나 독특한 문화의 기초를 놓았다. 180

그들의 정치는 급진적이고 혁신적이었으며, 여러 형태의 정치 체제를 실험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종교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헤브라이 예언자들이 일신 숭배를 설교할 때 그리스인들은 다신교에 헌신했다. 낡은 형태의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전통을 더 체계화했다. 

기원전 8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전은 작고 독립적인 도시국가 폴리스의 창조였다. ... 경제의 기초인 시골과 사회적 정체성의 핵심인 도심 사이에 차별은 없었다. 농민과 돋시 거주자는 권리와 책임이 똑같았으며, 똑같은 통치 회의에 참석했다. 모든 시민이 공공건물과 아고라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폴리스마다 수호신이 있었으며, 시민들을 한데 묶는 데 도움이 되는 독특한 희생제와 축제를 발전시켰다. 181

폴리스는 평등한 사회였다...노예와 여자를 제외한 모두가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폴리스는 호전적이고 남성적인 국가였다. 여자들은 오히려 암측 시대에 더 나은 지위를 누렸다. 새로운 도시에서는 주변으로 밀려나,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집안 안뜰 쪽에 격리되었으며, 거리에서는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노예의 숫자도 늘어났다. 

토론은 아곤, 즉 다양한 연설자들이 벌이는 시합이었다. 가장 논쟁을 잘하는 사람이 승자였다. 베다 시대 인도인 일부는 고대 인도유럽인이 지녔던 경쟁을 사랑하는 마음을 서서히 버리기 시작했지만, 그리스인은 그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곤(경쟁)'은 삶의 법칙이었다. 

폴리스 전체가 귀족적인 전사 사회로 바뀌면서, 농부들도 이런 경쟁적인 정신을 갖추기 시작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장군들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디기려는 충동에 내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폴리스에는 자기 버리기 대신 격렬한 자기 중심주의가 넘쳐났다. 또 호전성도 내재해 있었다. 184

그리스인은 또 자산들의 문화적 통일성을 자랑스러워했으며, 범 그리스적 축제와 제도로 이것을 기념했다.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운동 경기는 가장 유명한 행사로 기원전 776년에 처음 기록에 남겨졌으며 그리스 전역의 귀족들이 참석했다. ... 시합은 종교적 제의가 되어 지역의 영웅을 가리는 성소에서 벌어졌다. 울림픽 경기는 포세이돈이 사랑한 전설적인 인물 펠롭스를 기념하여 열렸다. 185

올림피아의 우승자도 펠롭스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죽지만, 아곤에서 거둔 승리가 승자에게 준 명예(클레오스 kleos)는 미래 여러 세대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남았다. 185

영웅 숭배는 그리스 종교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필멸의 영웅은 불멸의 신의 지하 세계적인 대응물이었다. 기원전 8세기 말 대부분의 폴리스에서는 뛰어난 전사의 무덤이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했다. 영웅은 반신반인으로 숭배를 받았다. 이제 영웅은 죽었기 때문에 땅속 깊은 곳에서 어두운 삶을 살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영웅의 무덤에서 여는 제의는 그의 분노를 달래고 그의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각 폴리스는 자기 폴리스의 특별한 자질을 상징하는 영웅을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무덤을 수호신의 신전 옆에 두는 경우도 많았다. 신전의 지하에 있는 어두운 보완물인 셈이었다. 186

델포이에서 음악과 시의 신 아폴론을 섬기는 유쾌한 신앙 <=>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의 비극적 기억 

그리스 종교 형성에 호메로스만큼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메로스는 예루살렘에서 J와 E의 이야기들이 합쳐지던 시기인 기원전 8세기 말에 구전되던 서사시 전승을 기록으로 남겼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일단 기록되자 영구히 고정되었다. 이 두편도 아주 오래된 자료를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호메로스 자신이 살던 시대의 환경을 반영한다. 호메로스는 과도기에 살았다. 암흑시대를 끝내고 그리스에서 등장한 새로운 문명은 이제 겨우 두 세대밖ㅇ에 안 지났다. 트로이 전쟁(기원전 1200년경)이 벌어졌던 미케네 시대 후기를 배경으로 한 호메로스의 긴 서사시는 새로운 문화를 낡은 문화와 결합한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리스 성서라고 부르기도 햇다. 거가 담긴 이상과 가치가 새로운 그리스 문화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189

<<일리아스>>
트로이 전쟁에서 벌어지 작은 사건
미케네 왕이자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과 그 연합군 가운데 한 부대를 지위하는 장군 아킬레우스의 언쟁, 자아의 충돌.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여겨 부하들을 모두 전장에서 빼내 그리스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이어지는 갈등에서 아킬레우스의 가장 친한 친구 크트로클로스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 헥토르에게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한다. 

<<오디세이아>>
트로이 전쟁 후를 배경으로 삼는다. 1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묘사, 오디세우스는 많은 낮선 나라들을 여행하다 마침내 이타카에서 아내와 재결합한다. 

호메로스는 두 시에서 전쟁이 주는 흥분, 동지애의 기쁨, 아리스테이아 - 전사가 '승리의 흥분'에 사로잡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되어 앞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상태 - 의 영광을 찬야야하나 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멸을 얻는 것이다. 190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서로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명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케노시스, '자기 버리기'는 없다.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엑스타시스를 경험할 때뿐이다. 전사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사로잡히면 생명의 엄청난 풍요를 경ㅇ험하며 신과 가은 상태에 이르고, 아리스테이아 속에서 자시을 잃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 따라서 전쟁은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다. '최고'(아리스토스)가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전투에서 탁월하다는 의미였다. 다른 자질이나 재능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양된 아리스테이아 상태에서 영웅은 죽음을 경멸하며 찬란하게 너울거리는 생명의 엄청난 풍요를 경험한다. 191

인도에서 사제와 전사들이 모두 서서히 아힘사(불살생)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갔다. 이것은 다른 축의 시대 영성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결코 영웅적 에토스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축의 시대는 정치적이고 과학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았다.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 같은 전사를 모든 남자들이 갈망해야 할 탁월함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 그와 욱으이 시대의 정신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섰던 호메로스는 영웅적 이상을 비파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전사의 운명에서 지독한 아픔을 볼 수 있었다. 영웅은 자신의 존재 근거인 사후의 영광을 얻기 위해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웅은 죽음과 결합되어 필멸성 때문에 괴로워한다. 영웅 숭배가 어두운 지하 세계 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메로스에게도 죽음은 파국이었다. 191

<<일리아스>>는 죽음에 관한 시다. 등장 인물들은 죽거나 죽임을 당한다는 강박에 지배당한다...

영웅적 이상의 핵심에는 무시무시한 공허가 있었던 것이다. <<일리아스>>에서 전사의 폭력과 죽음은 종종 무익할 뿐 아니라 완전히 자기 파괴적인 것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192

그러나 시의 마지막에 가서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이 아들 헥토르의주검을 돌려 달라고 간청하러 온 특별한 장면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한다. ... 늙은 왕의 완전한 겸손은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통곡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켰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의 아버지에게 바지를 베푸는 과정에서 인간성과 필로테스(사랑)을 회복한다. ...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자기를 비우는 공감을 경험하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성스럽고 마치 신 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신들은 전혀 자비심을 느끼지 않았다. 헤부라이의 예연자들이 하느님의 파토스를 탐사하기 시작한 반면, 호메로스는 올림포스 산의 신들이 인간의 수난에는 전혀 무관심하다고 묘사한다. 신들은 구경꾼일 뿐이다. 195

호메로스가 그린 올림포스 신들의 생생한 초상은 그들의 성격을 영원히 고정시켜놓았다. 그들의 만신전은 처음으로 일관성을 확보했다. 축의 시대의 다른 민족드르이 낡은 신들에게 불만을 느끼거나 신성의 관념을 바꾸고 있을 때, 그리스인은 과거의 종교양식에 더욱더 헌신한다. 그들은 신성을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대신, 전통이 가르쳐주는 대로 자기 신들의 내재성(비초월성)을 다시 확인했다. 신과 만나는 것은 압도적인 충ㅇ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인은 신이 인간과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느꼈다. 모든 뛰어난 성공이나 특별한 성취에는 신 또는 여신이 드러났다. 전사가 전투의 환희에 취하면 그는 아레스가 함게 있다고 생각했다... 197

신들은 한 개인으로서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고립된 인물로 볼 수 없었다. 각각은 전체의 불가결한 구성 요소였으며, 다른 가족 구성원과 비교할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 실제로 오직 한신만을 섬기고 다른 신들 숭배를 게을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스 세계에서 일신 숭배는 금기였으며, 끔찍한 벌을 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어떤 신도 다른 신 숭배를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신을 고르거나 만신전에 소속된 구성원 가운데 단 하나라도 무시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 신 각각은 현실의 진정한 측면을 대표했다. 그런 측면이 없으면 우주가 영구적으로 훼손될 터였다. 다양한 신들 전체를 숭배함으로써 모순들을 함게 끌어안는 통일성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199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형제 사이이며 서로 균형을 이룬다. 아폴론은 형식, 명료성, 규정, 순수를 대표하며, 디오니소스는 해체의 힘을 체현한다. 델포이 신전에서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신비하고 어두운 세계의 짝으로서 찬미되었다. 모든 그리스 신에게는 어둡고 위험한 측면이 있었다. 누구도 전적으로 선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도덕성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역설을 회피하거나 세계의 어떤 부분도 부정하지 않고 함께 삶의 풍요로움과 다양성과 복잡성을 표현했다. 그리스인은 새로운 종교 형식을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과거의 믿음에 만족했다. 이 믿음은 축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700년 동안 살아남았다. 200


ㅇ 춘추시대,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중국에서도 8세기는 과도기였다. 
서기 771년, 오랑캐 견융이 주 왕조의 유왕을 살해 
주 왕조는 약하된 형태로 500년 이상 살아남았다. 왕은 명목상 통치자로 남아 있고 상징적 권위를 유지했지만, 제후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제후국은 꾸준히 커졌다. 점차 군주에 대한 충성보다는 제의가 제후국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했다. 오랜 관습이 왕위 군위를 대체하여, 전쟁, 복수, 조약을 통제하는 일종의 국제법 역할을 했으며, 물자와 용역의 교환을 통제했다. 이것이 역사가들이 충추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출발이다.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런 호사를 비난의 눈길로 보게 되었다. 희생 제물의 대량 살육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고, 죽이는 동물의 숫자도 예법에 따라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기원전 771년이 되자 장례식도 더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과거의 허식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새로운 절제의 정신이 점차 도시 귀족의 생활을 바꾸어 나갔다. 귀족은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전사였으나, 다음 장에서 보게 되듯이, 그들의 전쟁은 전보다 더 제의화되었으며 폭력도 줄었다. 전쟁이나 사냥을 위한 원정도 줄었으므로 군자는 조정에서 전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의전, 예절, 제의의 세세한 면에 점점 더 몰두했다. 202

귀족 계급의 모든 활동이 정교한 의식으로 바뀌었다. ... 주나라 여러 읍성의 귀족은 사회적 조화와 집단의 복지를 장려하기 위해 고안된 관습을 발전시켜 나아갔다. 춘추시대가 되면서 이 관습법이 기록되어 일관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종교도 다시 생각해야 했다. 왕은 과거의 전례에서는 핵심적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무력한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는데, 신민이 어떻게 그의 힘을 계속 숭배할 수 있을까? 궁핍의 시대에 어떻게 과거의 희생 제사를 유지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제의 학문, 서기 가운데 일부는 중국의 고전이 되는 선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서경>> <<시경>> <<역경>> <<약경>> <<춘추>>

지식 계급 '사' 가운데 일부는 귀족 가문의 의식적이고 관습적인 관행들을 성문화했다. 이 제의 전문가(유)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귀족 생활의 원리를 정리했다. 군자는 ~~~~~~

주나라 초기에 왕실의 제의는 자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제 군주제가 쇠퇴하자 유는 대평원 지대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활 전체를 정교한 제의 수행과 다름없게 바꾸어놓았다. 204

귀족의 제의화되니 생활 양식은 귀족들에게 겉으로는 서로를 존중하며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쳐지만, 보통의 경우 예의 특징은 자기 이익이었다. 모든 것이 위신의 문제였다. 귀족은 특권과 명예를 선망했으며, 예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였다. 205

가장 유능하고 권위 있는 제의 학파, <<예기>를 만들어 나가는데, 이 제의 규약은 중국의 여섯번째 고전이 된다. 노나라의 제의 전문가들은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정리했다. 첫째는 의식의 효력은 그와 관련된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완벽성은 참가자 모두가 전례의 가치와 의미를 완전히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출발점으로 삼아 중국의 축의 시대를 열었으며, 이로써 이 이기적이고 잠재적으로 무의미할 수도 있을 규율에 숨어 있던 영적인 힘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이전인 초기 단계에도 노나라의 제의 전문가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 버리기'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의 성군 요와 순을 숭배했다.. 

요와 순은 오로지 카르스마만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이것은 군사적 우월성으로 다스리는 전사들이 읻는 지배권과은 크게 다르다. 206

요와 순은 자신의 지위와 위엄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들이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보다 백성의 유익을 앞세웠다. 그들은 예가 계발하고자 하는 절제, 겸손, 자제, 경의의 원형적 모범이 되었다. 중국의 저어치 생활이 점점 더 이기적이고 무자비해짐에 요순 전설은 계속 영감의 원천이 된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모든 인간에게 이런 위인이 될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208


ㅇ 숲으로 간 현자, 
영적 탐구의 선구자들

가정을 가진 남자가 사회의 대들보가 되었다. 남자가 결혼을 하여 가장이 되면 자신의 집에 신성한 불을 두고 매일 전례를 거행할 수 있었다. 그의 가정을 개인적인 희생제의 영역이되어, 이곳에서 죽음을 이겨내고 신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남자들은 가족을 떠나고 사회에 등을 돌리고 숲으로 물러나는 특별한 걸음을 내디덨다. 가족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대신 일부러 가정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들은 초라하게 살았으며, 소유를 거부했고, 음식을 구걸했다. 이 '출가자(삼야신)'들은 인도의 영적 탐구에서는 중심이 되었다. 인도 축의 시대의 다음 단계를 규정산 사람은 브라민 사제가 아니라 출가자였다. 209

제의 전문가들은 전례에서 폭력을 없애고 더 내적인 영성을 계발하기 시작했는데, 어울리지 않게도 고대 전사 무리가 탁발승 비폭력 공동체의 모델이 되었다. 그들은 선조가 새로운 영토를 열었던 곳에서 내적 세계를 탐험하고 옛 전투를 깨달음을 위한 내적 투쟁으로 바꾸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 동안 전쟁의 규율은 영적으로 해석된 평화로운 관행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것은 가족을 떠나 스승의 집에서 살며 베다를 공부하는 젊은 브라마카린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브라마카리아 ('신성한 생활')는 베다의 삶에 입문하는 것이었다. 

브라마카린은 신성한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의 중간 지대에 살면서 신성한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기원전 8세기에 이르면 브라민 사제는 '눈에 보이는 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베다 학문을 아는 자였기 때문에, 제의 동안에 나타나는 브라만의 힘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스승은 산파가 되어 매일 제자의 새로운 자아(아트만)가 태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입문식을 마쳐 완전한 브라민이 된 제자는 세상으로 돌아가 아내를 얻고, 신성한 불을 밝히고 자기 계급의 의무를 이행하고,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212

그러나 기원전 8세기의 어느 시점에 견습을 오랜 전에 마친 성숙한 브라민들이 스승없이 혼자 므라마카리야를 수행햐애 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성한 삶을 살려고 다시 숲으로 물러났다. 출가자들은 이렇게 다시 세속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늘 브라만의 영역에 남아 있고 싶어했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더는 살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희생을 바치는 사람은 제의가 지속되는 시간 동안만 사회에 등을 돌렸지만, 출가자는 사회를 영원히거부한 것이다. 212

출가자는 자신이 행하는 부라마카리야를 희생제의 더 높은 형태로 보았다. 그의 신성한 불은 내부에서 타올랐으며, 그가 들이마시는, 생명을 주는 모든 숨에 나타났다. 그가 먹는 모든 음식은 보이지 않는 내적인 불에 바치는 제물이었다. 이제 믈리적인 불에 땔감을 던져 넣을 필요가 없었다. 

제의 개혁가들은 인간의 아트만, 즉 내적인 자아가 바로 프라자파티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바로 희생제인데, 왜 외적인 시늉을 하는가? 진정한 희생제란 무엇인가? 누가 진정한 부라만인가? 외적인 제의를 거행하는 사제인가, 아니면 어디를 가나 신성한 불을 운반하는 출가자인가? 

출가자는 외적으로 표현하는 종교에서 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종교로 이행한 셈이었다. 출가자는 축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종교의 내면화를 처음 성취한 사람들로 꼽힌다. 그는 아트만을 발파능로 우주를 통합하는 힘에 다가갈 수 있었다. 버림, 금욕, 신성한 삶의 규율을 발판으로 삼아 출가자는 자신의 아트만, 즉 내면 깊은 곳에 신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브라만과 통일될 수 있었다. 214

출가자의 엄격한 금욕주의,
금식, 금육, 타파스는 이제 과거의 베다 종교와는 달리 단순히 제의의 준비 과정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제의 였다. 금욕은 타파스의 불로 사람을 희생 제물처럼 '태웠다'. 침묵의 현자는 영적인 재부의 제물로써 내저거이고 왜적인 데바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 데바들은 사실상 하나였다. 215

새로운 영성은 과거의 영성으로부터 유기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자라났다. 첫째로 제의 전문가들은 제사 구역에 참가자들이 가득하던 과거의 혼란스러운 희생제 시합을 개혁했다. 새로운 제의에서 희생을 드리는 사람은 혼자였으먀, 제의 동안 세속 사외와 단절했다. 이제 출가자는 이런 외로움을 한 단계 더 밀고 나아갔다. 훗날의 문헌이 출가자를 이상적인 브라민으로 제시하고, 그를 베다의 정통성 안에 통합하려하지만, 사실 그는 체제 전체에 도전했다. 사람들은 출가자가 용감하게 새로운 영적인 길을 걸아간 선구자라고 찬사를 보냈다. 출가자는 마을에서 자신의 독립을 선포했으며, 자신이 만든 세계에 살았고, 어떤 제의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사회적 으이무는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근본적 자유를 끌어안았다.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생활방식을 출신 계급에 따라 결정된다고 손포하던 시대에 출가자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가장은 사회적 네트워크, 부양 가족, 자식의 규정을 받았지만, 출가자는 자신의 힘으로 혼자 존재하는 개인이었다. 

축의 시대의 새로운 영웅은 자신의 무예와 용맹을 자랑하는 영웅적인 전사가 아니라, 자기 내면을 탐구해 스스로 절대적인 것을 발견하겠다고 결심하고 아힘사에 헌신하는 수도자였다. 출라자는 야타부타(산스크리틍어, 있는 그대로라는 뜻), 즉 '깨달음'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는 것'이기도 했다. 216

 


4장. 앓을 향한 기나긴 여행
(기원전 700년-600년경)

ㅇ 인간내년의 정복,《우파니샤드》

 

 [축의시대의 우파니샤드는 생소하고 어려웠지만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정리해 보지만 깊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우파니샤드
가까이 다가앉는다  는 뜻이며 신비주의경향의 현자가 발치에 앉은 영적인  재능이  있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주던 신비의 지식.


기원전 7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나온  해설서중 마지막 마지막시기에 나와 베다의 끝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파니샤드 는 맹목적  의례대신 삶의 지혜를 추구하는책.


담긴 초점은  제의를  외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제의에 내적인  의미에 맞추다(아트만).아트만은 브라운관 동일하며 우주의 근본원리인  브라만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이 궁극적으로  같다. 현자가  자기존재의 내적 핵심을 발견한다면. 실제로 들어가  어떠한  공포로부터 해방될수 있다.


오랜기간의  훈련  명상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성찰을 개발하면 파악할수 있다. 삶은 변하고 변화된 환경에 대응할 영상을  찿을 필요가 생겨났다.

우파니샤드에서 두 사람

1.여지나발키아

종교의 외적의식을 논하지 않고 진정한  자아 내적  안간를 밝히려고 노력하며 나를 넘어  정상적인 지식은 감각에 지각 상식 합리적 사고의 지배를 받으며 마음안에 내적인 빛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수 있다. 자아를 안다는 것은  그앎를 가지고 죽어 내적 자아를 가지고 브라만에 이른다.

2.우달라카 아루니

유명한  소금물 실험을 통해 소금덩어리는 녹아서 보이지 않았지만 소금물은 짜 여전히 그곳에  물의 모든부분에 있다  모든강물이 바다에서 합쳐지면  모두 바다가 된다. 자신에게 가장 진실한것이라는 해방을 아껴주는 심오한 지식을 얻을때 오랜 수행에 인간존재의 내면에 발견될수 있음.

용어
ㅇ 브라만(바라문)
    인도의  카스트 계급장 가장 최상위 계급
ㅇ 아트만(자기자신 초기 베다굥전)
   인간존재의 핵으로 줏은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거나  존재의 굴레에서 해방 

[우파니샤드 글을 같이  읽으며 마칩니다.]
깨달은 자가 "이 말을 하겠다 "고 말한다.
그것이 자아다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그 능력이 자아다  깨달은 자가  "이것을 듣겠다 " 고 말한다.  그것이 자아다.
그가 들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자아다.
깨달은 자가  "이것에 관해 생각하겠다"
고 말한다  그것이 자아다,
정신은  볼 줄 아는 신성한 능력이다.
이 자유는 정신으로 그 신성한 능력으로 브라만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욕망의 대상들을 인식하면서 기뻐한다.
(깊고 고요한 자)

 


제5장 고난의 시대

(기원전600년~530년경)


ㅇ 추방당한 자의 트라우마

1)시대적배경
요시아(유다16대국왕)의 때 이른 죽음 뒤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2세(느부갓네살, 기원전604~562년 재위)가 이 지역에서 논란의 여지 없는 주인이 되었다. 그 뒤로 20년 동안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가나안을 두고 이집트와 경쟁했다.


기원전 597년 유다왕국의 젊은 왕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에 항복하여, 백성8천명과 함께 자기땅에서 추방당했다.


기원전 587년에 시드키야가 반란을 꾀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자비를 보이지 않고, 성전을 부수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시드키야는 아들들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본 뒤에 눈이뽑혔고,5천명의 포로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엄청난 고난의 시기였다.

2) 이루어낸 성취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공허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기에 몇몇 사람은 슬픔, 상실, 모욕의 경험에서 새로운 전망을 창조 할수 있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겁이 난다고해도 모래에 머리를 박고 진실을 마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 역할을 할수 없었다.


적어도 70년은 포로생활을 해야 할것이니 정착을 해서 집을 짓고 부인을 얻고 자식을 낳아라. 무엇보다 포로생활을 한다고 해서 원한을 품지마라. 야훼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 나에게 쫓겨 사로잡혀 가 사는 그나라가 잘되도록 힘쓰며 잘되기를 나에게 빌어라. 그 나라가 잘되어야 너희가 잘될 것이다. ”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면으로 향했다. 각 개인은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그들은 축의 시대의 더 내적이고 직접적인 앎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욥기)== 만일 실제로 추방자 가운데 한 사람이 쓴것이라면, 공동체의 일부는 야훼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부는 파국에 창의적으로 대응하며, 완전히 새로운 종교적 전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추방의 트라우마는 <신명기>저자들이 그린 단정하고 합리적인 하느님을 부수어버렸다. 이제 야훼를 아브라함과 함께 식사를 하던 친구나 신들이 모임을 강력하게 이끄는 왕으로 보기는 불가능했다. 에스겔의 환상은 말이 되지 않았다. 완전히 초월적인 것,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에게 건네진 두루마리에선 <신명기>저자들이 율법의 시와는 달리 분명한 지침이 적셔 있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전혀 없고, 정리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의 외침뿐이었다.


에스겔은 나중에 야훼가 뒤에 남은 유다 사람들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때문에 자신의 도시에서 쫓겨난 것임을 알게된다.


개혁은 자신의 결점에 대한 객관적이고 분명한 검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p.303~304
싸움이나 죽임이 없었다.(폭력을 제거) 하느님은 그냥 명령만 한다. “ 빛이생겨라! 그러면 아무런 갈등없이 빛이 비추었다. 하느님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명령으로 세상의 질서를 잡는다. ~~중략
인도의 제의 전문가들이 전통적인 제의에서 폭력을 체계적으로 제거했듯이 P도 전통적인 우주 창조에서 폭력성을 꼼꼼하게 뽑아냈다. 이것은 놀라운 영적 업적이었다. 추방당한 사람들은 무수무시한 전쟁의 피해자들이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그들의 조국을 유린하고,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성전을 박살내고, 그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당한 그대로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갚아 주기을 원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P는 이렃게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p.309
고난의 경험은 다른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해준다. 스스로 슬픔을 겪으면 남들과 공감하는 법은 배우게된다. 그러나 p는 현실주의자였다. ‘사랑’이라는 계명은 사람들에게 늘 따뜻한 애정으로 가득한 상태가 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p는 감정에 관해 쓴게 아니었다.
‘사랑’이란 도움을 주고, 충성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하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모두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다.

p.312
p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은 세계를 환기하는 것은 추방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다. 무자비한 제국권력의 과시는 추방당한 사람들의 민족적 통일성을 훼손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방당한 사제와 예언자들은 원한과 복수에 기초한 믿음을 피하고, 모든 생명의 신성함을 인정하는 영성을 창조함으로써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ㅇ 아테네의 솔론, 정치를 발명하다

1) 시대적 배경 (p312)
기원전 6세기초 그리스 세계의 많은 폴리스를 무너뜨린 사회적 위기가 마침내 아테네에도 타격을 주었다. 아티케 시골지방의 농부들은 착취에 불만을 품고 단결하여 귀족들에게 대항했다. 내전은 불가피해 보였다. 귀족들은 약했다. 그들은 단결도 되지 않았으며, 군대나 경찰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반면 농부 가운데 다수는 훈련받은 중무장보병으로 무장을 했고 위험했다. 이 난국에서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은 대립하는 집단들을 공정하게 중재 할 수 있는 공정한 조정자를 찾는 것이었다. 아테네는 솔론(기원전 630?-560?)을 택하여 기원전 594년에 그를 도시의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제도개혁을 위임했다.

2) 이루어낸 성취
솔론은 디스노미아(무질서)에서 에우노미아(올바른질서)를 수립하는것이었다.


디스노미아상태에 대해서는 시민 모두가 어느정도 책임을 져야했다.


디스노미아는 천벌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의 결과이며, 따라서 오직 일치된 정치적 노력으로만 평화와 안정을 복원할 수 있었다. 신들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상황을 개선할 신성한 법을 드러내지 않을 터였다. 이것은 축의시대다운 돌파였다. 솔론은 단숨에 정치를 세속화 했다.


p.315
단기적으로 보자면 솔론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아직 그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에 폭넓은 관심이 쏟아진 덕분에 그때까지 다른 폴리스에 뒤처져 있던 아테네는 진보의 선두에 나설 수 있었다. 솔론이 참주정치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이상적 시민의 새로운 기준을 정립하는 효과도 얻었다. 이상적인 시민은 개인적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하며, 보통사람들보다 위에 서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p.317
엘레우시스는 데메테르여신이 하데스에게 납치된 딸 페르세포네를 찾는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진다. ~중략~ 딸을 잃은 데메테르의 고통, 비애, 절망, 공포 격분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데메테르의 고통에 참여하고, 마침내 페르세포네와 재결합하는 기쁨을 누린 뒤 일부 입문자들은 이제 어둠의 속을 들여다보았으므로 전처럼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스타이는 이틀 동안 굶었다. 그들은 바다에 서서 페르세포네를 기려 새끼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그런 뒤에 큰 무리를 이루어 엘레우시스까지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금식으로 몸이 약해졌으며, 마음도 불안했다. 그들의 행동은 위협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궁중은 최면에 걸린 듯 운율에 맞추어 변화의신 디오니소스를 부르며, 광적인 흥분상태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엘레우시스에 도착했을 때 미스타이는 지치고, 겁에 질리고, 동시에 들떠있었다. ~~중략
엘레우시스에서 입문자들은 엑스타시스를 얻었다. 정상적인 일상의 자아‘ 바깥으로 걸어 나가’ 새로운 통찰을 얻은 것이다.

p.321
소수의 그리스인이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난 두 가지 주변운동에 세계 다른 지역에 등장한 축의시대의 전망을 향해 나갔다.


첫째 폴리스의 호전적인 에토스를 거부하고 비폭력이라는 이상을 끌어안은 오르페우스 종파였다. 오르페우스교는 심지어 의례적인 동물 희생도 하지 않고 엄격한 채식주의를 채택했다.


두 번째 운동은 사모스 출신의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시작했다. 그가 세운 신비주의 종파가 고기를 멀리하여 몸을 정화했고, 희생제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과학과 수학공부로 깨달음을 구했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기원전 6세기에는 완전히 새로운 합리주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p.323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610~546)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철학자가 제1의 실체를 찾아내려면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더 근본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우주의 기본질료는 전혀‘ 규정할 수 없다’(아페이론)고 주장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너머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 특질은 없지만, 그럼에도 처음에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페이론은 신성했지만, 신들을 넘어섰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무궁무진한 근원이었다.

p.324
창조신화는 우리가 지상의 생명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에 관한 근본적 통찰을 드러내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혼돈에서 질서를 끄집어내려고 신이 괴물과 싸운다는 이야기는 생명의 핵심에 자리 잡은 근본적으로 아곤(‘경쟁’)적인 투쟁을 드러냈다. 생명은 늘 다른 존재의 죽음이나 파멸에 의존했다. 최초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들은 진정한 창조성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내줄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p는 추방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들던 시기에 창조이야기에서 세상 만물이 선하다고 주장했다.

 

ㅇ 상키아 인류최초의 무신론


1) 시대적 배경
p.325
인도에서는 (우파이샤드)와 완전히 다르고 베다경전에도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는 새로운 철학이 나타났다. 이 철학은 ‘상키아(분별)’라고 부른다. 상키아 체계에서 최고실재는 푸루사(인간 또는 자아)였다.

2) 이루어낸 성취
p.326
모든 인간에게는 개별적이고 영원한 푸루샤가 있으며, 이것은 죽음과 재생의 쉼 없는 순환인 삼사라에 말려들지 않고,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했다. 아트만과 마찬가지로 푸루샤 또한 규정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특질이 없기 때문이다. 푸루샤는 인간의 본질이지만 ’영혼‘은 아니다. 푸루샤는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지성이 없으며, 욕망도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태초에 푸루샤는 프라크르티 즉 ’자연‘과 엉키게 되었다. 프라크르티는 마음, 지성, 또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들이 자신의 가장 영적인 부분으로 여기는 정신-심리적 경험까지 포함한다. 프라크프티의 영역 안에 머무는 한 우리는 우리 인간성의 영원한 영역에 무지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푸루샤와 프라크르티가 적대관계인 것은 아니다.

p.327
상키아의 관념들은 <우파니샤드>의 영성에 만족하지 않는 출가자 집단에서 나온 것이 거의 분명하다. 삶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주 분명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이런 불행한 상황이 생겨났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명상하는 가운데 희미하게나마 어떤 내적인 빛을 보았다. 그 빛은 그들에게 또 다른 더 절대적인 자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그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지저분한 미망과 욕망으로부터 그 자아를 분리해내야 했다.


p.328
상키아 학파는 자연에 세 가지 서로 다른 가닥(구나)이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우주 전체에서나 한 개인에게서나 똑같이 분별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 사트바-’지혜‘ 푸루샤에 가장 가깝다
.라자스-’열정‘신체적 또는 정신적 에너지
. 타마스-’타성‘ 가닥가운데 가장 저급한 수준

p.329
우리의 푸루샤, 영원하고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푸루샤는 해방되기를 갈망한다. 자연도 여기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삶의 고통과 좌절을 넘어서고 싶다면, 에고가 우리의 진짜자아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강렬한 인식행위를 통해 이 구원의 지식에 이르면, 우리는 모크샤(해방)를 달성하게 된다. 무지는 우리가 나아가지 못하게 붙들다. 우리는 자연이라는 미망에 갇혀 있기 때문에 푸루샤와 우리의 일상적인 정신-심리적 삶을 혼동한다. 자신의 생각, 욕망, 감정이 인간성의 가장 높고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잘못에 기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출가자는 명상과 연구를 거쳐 이런 무지를 교정해야 한다.


p.333
요가는 인도의 최고의 성취로 꼽히며, 가장 진화된 형식은 푸루샤를 자연과 엉켜있는 상태에서 풀어내기 위해 상키아학파에서 처음 고안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


p.334
‘요가’라는 말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멍에를 맨다는 뜻이다.


p.339
요가수행자는 황홀경의 상태에 들어가면 일련의 정신적 단계를 거쳐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사마디‘ 즉 순수한 의식의 상태도 그런 상태의 하나였다. 이 상태에서는 ’나‘와 ’나의것‘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상태를 역설적으로 밖에 묘사하지 못했다. 부재인 동시에 존재하는 것, 풍요로운 텅 빈 상태, 영원한 현재, 죽음속의 삶에 대한 느낌들이 그런 묘사다. 요가 수행자들은 이런 경험을 ’무‘ 라고 불렀다. 달리 묘사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을 방에 들어갔다가 그냥 텅 빈 상태, 허공, 자유만 발견했을 때의 느낌에 비유했다.

p.340
그러나 요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을 제쳐두고 매달려야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훗날 다른 현자들은 속인들도 깨달음을 맛 볼수 있는 요가를 발전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ㅇ 흔들리는 예, 무너지 도

1) 사회적 배경
p.340~341
중국은 위기에 처했다. 초나라가 기원전 597년에 동맹군을 물리치자, 이 지역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폭력에 휩싸여버렸다. 기원전593년에 장기간 포위공격을 받을 때 송나라 사람들은 자기자식을 먹기까지 했다. 기원전 6세기에 제, 진, 초는 모두 만성적인 내전 때문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졌다. 중국은 무정부 상태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더 깊은 변화의 표시였다. 자신의 제후에 반역하는 귀족들은 물론 탐욕과 야망에 따라 움직였지만, 동시에 오랜 가문들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은 이제까지 도전을 받지 않았던 세습 제후들의 통치를 무너뜨릴 수 있는 더 평등한 정체를 향해 고통스럽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2) 변화의 모습
정나라에서는 주술사가 재상 자산에게 접근하여 하늘을 달래기 위한 특별희생제를 드릴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산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이 있으니 천도에는 미칠 수 없다. 우리에게 그것을 알 수단이 어디 있는가“? 하늘은 우리의 시야 너머에 있으니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었다.

공자가 출현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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