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축의 시대 (3)

백_일홍 2023. 11. 1. 08:32

10장 축의 시대의 귀환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축의 시대의 모든 종교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높은 이상에 맞추어 살지 못했다. 이 모든 종교에서 사람들은 배타성, 잔혹성, 미신, 심지어 잔혹 행위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축의 시대 종교들은 그 핵심에서 자비, 존중, 보편적 관심이라는 이상을 공유한다. 이 시대 현자들은 모두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폭력적 사회에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타고난 인간적 에너지를 활용하여 이 공격에 맞서는 영적 기술을 창조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야만적이고 압제적인 행동을 불법으로 만들고자 할 때 단지 외적인 명령만 내려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장자>>에서 예화로 든 이야기에서 안희가 유가의 고상한 원리를 설파하여 위나라의 제후를 개혁하려고 사도힌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통치자의 잔혹한 행동을 낳는 마음속의 무의식적 경향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660

 

어떤 사회에 전쟁과 테러가 만연하면, 이것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끼친다. 증오와 공포는 그들의 꿈, 관계, 욕망, 야망에 스며든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런 일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자아의 더 깊고, 덜 의식적인 수준에 뿌리를 둔 교육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쳤음에도 깊은 수준에서는 서로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발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각각각의 신학적 '믿음' -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은 이 현자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 - 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자신을 재교육하려고 훈련을 받고 노력을 기울이면 인간성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폭력의 주된 원인이 자기 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였으며, 황금률의 감정 이입적 영성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다른 수준의 인간 경험으로 안내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엑스터시스, 즉 습관적이고 자기에게 얿매인 의식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기'를 경험했으며, 이때 흔히 하느님, 니르바나, 브라만, 아트만, 도라고 부르는 실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먼저 발견한 다음, 자비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훈련된 자비의 실천 자체만으로도 초월을 맛볼 수 있었다.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 방어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동굴에서 산 이후로 동물이나 인간 약탈자의 위협을 받아왔다. 우리 자신의 공동체와 가족 내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이익을 해치고 자존감을 파괴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언어, 정신, 신체를 이용한 반격과 선제 공격을 준비한다. 하지만 현자들은 우리가 체계적으로 완전히 다른 심리적 태도를 계발하면, 다른 의식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축의 시대 현자들이 서로 의논한 것도 아닌데 일관되게 황금률로 돌아갔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구조에 관해 중요한 점을 이야기해준다. 661

 

예를들어 우리가 동료, 형제나 자매, 적국에 관하여 뭔가 적대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유혹을 느낄 때마다, 만일 남이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고 참는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선 것이다. 바로 초월의 순간이다.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면, 사람들은 항상적인 엑스타시스의 상태에서 살 수 있다. 오묘한 황홀경에 빠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살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프로그램은 모두 이런 태도를 장려했다. 랍비 힐렐이 지적했듯이, 그것이 종교의 핵심이었다. 유가의 '양보' 제의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고안된 것이다. 수행자는 요가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힘사, 즉 비폭력에 숙달되어야 했으며, 단 하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이것이 제2의 천성이 되기 전에는 구루로부터 명상을 진전시켜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무해함'을 얻는 과정에서 수행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한다고 텍스트들은 설명한다. 662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계발하는 것을 그들의 의제의 맨 위에 두었다. 그들에게 종교란 곧 황금률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초월해야 하는 대상 - 탐욕, 자기 중심주의, 증오, 폭력 - 에 집중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초월하여 이르게 되는 곳은 쉽게 규정할 수 잇는 장소나 삶이 아니라, 여전히 에고 원리(아항카라)의 함정에 갇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지복의 상태였다. 사람들이 초월하여 이르고자 하는 곳에 집중을 하고 그것에 관해 교조적이 되면, 공연히 캐묻기만 하며 삐걱댈 수 있었다. 불요 영오로 '해로운'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662

 

그렇다고 모든 신학을 없애야 한다거나, 신이나 궁극적인 것에 관한 관습적인 믿음들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런 믿음들은 진실 전체를 표현할 수 없다. 초월적 가치는 그 본성상 정의(define) - 원래의 의미가 '제한을 둔다'는 것이다 -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교조적 정통성을 매우 중시하며, 많은 기독교인이 종교를 상상할 때면 관습적인 믿음들을 떠올린다. 이것은  교조가 심오한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지 안 그런지 망라보는 시험으 ㄹ간단하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 - 세고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호전적이고, 편협하고, 불친절해진다면, 그것은 '유익한(쿠살라)'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념 때문에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낯선 사람을 존중한다면, 그것은 좋고, 도움이 되고, 건전한 것이다. 이것이 모든 주요 전통으이 진정한 종교성을 검증하는 잣대다. 663

 

우리는 종교적 교리를 버리는 대신, 그 영적 핵심을 찾아보아야 한다. 종교적 가르침은 결코 단순한 객관적 사실의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 강령이다. 바울로가 필리피 사람들에게 초기 기독교 찬송가를 인용한 것은 성육신에 관한 율업을 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케노시스를 실천하라고 촉구하려는 것잉었다. 그리스도초럼 행동하면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믿음의 진실ㅇㅇ을 발견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마찬가지고 '삼위일체' 교리 또한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에게 하느님을 단순한 인격체로 생각할 수 없다는 점, 신의 본질은 그들의 이해 너머에 있다는 점을 잉ㄹ캐워주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관계나 공동체의 맥락에서 신을 보련느 시도로 여겼다.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의 핵심에서 케노시스를 분별해냈다. 그러나 이 교리의 목적은 명상과 윤리적 행동을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서기 14세게 그리스 정교신학자들은 축의 시대의 핵심과 바로 이어지는 신학 원리를 계발했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한 모든 진술에는 두 가지 특질이 잉ㅆ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그것은 역설적이어야 했다. 신과 관련된 것은 우리의 제한된 인간적 범주에 들어맞을 수 없다는 것ㅇ을 일깨워주어야 ㅎ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부정적이어야 했다. 우리가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적 논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에 관한 우리의 모든 의문에 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합에 나선 사람들을 말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브라모디아와 같아야 한다. 663

 

수백 년에 걸친 제도적, 정치적, 지적 발전은 종교에서 자비의 중요성을 흐릿하게 만든 경향이 있다. 공중의 담론을 지배해 온 종교는 제도적 자기 중심주의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신앙이 너의 신앙보다 낫다! 장자가 주목했듯이, 사람들은 신앙에 자신을 던져넣으면, 시비를 걸고, 간섭을 하고, 심지어 불친절해질 수도 있다. 자비는 인기 있는 덕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와 동일시하는 에고를 옆으로 밀어놓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비를 보이기보다는 옳은 쪽이 되는 것을 선호한다. 근본주의적 종교는 우리 시대의 폭력을 흡수하여 극단화된 전망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은 초기 조로아스터 교도처럼 인류를 두 적대적 진영으로 나누고, 신자들의 진영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낟고 본다.  우리가 많은 대가를 치르며 목격했듯이, 이런 태도는 곧바로 잔혹 행위로 이어지기 십상이ㅏㄷ. 이것은 도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도덕경>>이 지적햇듯이, 폭력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보통 폭력을 위두르는 자에게 되돌아간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실제로 강제 수단은 사람들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더 높다. 664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런 유형의 전투적 신앙의 분출을 목격해 왔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종교 자체가 불가피하게 폭력적이라거나 폭력과 편셥성은 특정 전통의 풍토병과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축의 시대 이야기를 그 반대임을 보여준다. 축의 시대의 종교적 탐구는 모두 자기 시대의 전례 없는 폭력으로부터 원칙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물러나는 데서 출발했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는 제의 개혁가들이 희생 경쟁에서 갈등과 공격성을 빼내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랑엘의 축의 시대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인이 바빌로니아로 강제 추방을 당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사제들이 화해와 아힘사라는 이상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ㅇ이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전국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 유가, 묵가, 도가는 모두 널리 퍼진 무법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성을 제어하는 방ㅇ법을 찿았다. 폴리스가 폭력을 제도화했던 그리스에서는 축의 시대의 이상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했지만 - 특히 비극의 영역에서 -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변화는 없었다. 665

 

그럼에도 폭력과 신성한 것 사이의 관련을 지적하는 종교 비판자들의 말을 옳다. 호모 렐리키오수스(종교적 인간 homo religiosus)는 늘 삶의 잔혹성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고대의 보편적 관행이었던 동물 희생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공격성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화려하고 폭력적인 행위다. 이것은 어쩌면 구석기 시대의 사냥꾼들이 같은 인간을 학살할 때 경험하던 죄책감에 뚜리를 두고 있는 것이니도 모른다. 종교 경전들은 자신이 등장했던 아곤적인 맥락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살인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통 전체로부터 떼어놓곡 본다면, 예를 들어 헤브라이 성경, 신약, <<쿠란>>의 개별 텍스스들은 비도덕적인 폭력과 잔혹성을 승인하는 데 쉽게 이용될 수 있다. 실제로 경전들은 늘 이런 식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대부분의 종교 전통이 과거에 수치스러운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우리 시대에도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영감에 기초한 데러리즘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때때로 공포, 절망, 좌절에 내모로린다. 때로는 축의 시대의 이사아을 완전히 훼손하는 증오와 분노에 내몰리기도 한다. 그 결과 종교는 최근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에피소드 몇 가지와 관련을 맺기도 했다. 665

 

우리의 대응은 어때야 하는가? 축의 시대 현자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조언을 했다. 첬재로, 자기 비판이 ㅇ있어야 한다. 그냥 '다른 쪽'을 야단치는 대신, 먼저 자신읭 행동을 사펴야 한다. 이 점에서 유대의 예언자들이 특히 강력한 모범을 보였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제국들의 윙협에 시달리던 시절, 아모스, 호세야, 예레미아는 모두 자신의 행도을 정밀하게 검토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위험한 독선을 부추기는 대신, 미족의 에고를 무너뜨리려 했다. 하느님이 무조건 우리 편이고 우리의 적과 맛서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성숙한 종교적 태도가 아니였다. 아모스는 신성한 전사 야훼가 아시리아를 자신의 도구로 삼아 이스랑엘 왕국이 저지른 체계적인 불의와 사회적 무책임을 벌한다고 보았다. 에스겔은 유다 사람드리 국가의 심각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바빌로니아로 추방당한 뒤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폭력적 행동을 살펴보라고 강조했다. 예수는 나중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눈의 들보는 무시하고 이웃의 눈의 티를 비난하지 말라고 말했다. 666

 

축의 시대의 믿음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인도의 카르마 교리를 우리의 모든 행동이 장기적이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우리 자신의 결점이 참담한 상황을 만드는 데 어떻게 일조하는지 살피지 않고 남을 비난하는 것은 '해롭고' , 비현실적이고, 비종교적인 태도였다. 따랏 축의 시대 현다들이 지금 우리가 놓인 이 곤란한 상황을 본다면, 아마 우리에게 개력은 집에서 시자가되어야 한다고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종교에서 깨듯한 행도을 하라고 시끄럽게 떠들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전통, 경전, 역사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행동을 고쳐야 한다. 우리 자신을 개혁하기 전에는 남의 개혁을 바랄 수 없다.종교를 거부하는 세속주의자들 또한 세속적 근본주의의 조짐들을 살펴야 한다. 이런 근본주의는 종교의 근본주의가 세속주의를 두고 그렇듯이 종교를 두고 시끄럽고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세속주의 또한 짧은 역사에서 그 나름의 참사를 빚어냈다. 히틀러, 스탈린, 사담 후세인은 호전적이 ㄴ태도로 공공 정책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것이 전투적 믿음에 기초한 십자군만큼이나 치명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667 

 

둘째로, 우리는 축읭 시대 현자들의 본을 다라 씰천적이고 효과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에서 공격성과 마주했을 때 그런 것이 없는 척하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바꾸려고 힘껏 노력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제의왕 경전을 다시 쓰고 다시 정비했다. 인도의 제의 개혁가들은 희생제에서 아곤(경쟁)을 제거했다. 공자는 예를 왜곡시킨 전투적인 자기 중심주의를 빼내려 했다. 사제 저자 P는 고대 창조 이야기들에서 공격성을 제거하고, 야훼가 모든 피조물 - 오래된 이야기에서는 야훼가 죽인 것으로 되어 있는 베비아단을 포함하여 - 을 축복하는 우주 창조론을 만들어냈다. 667

 

오늘날 극단주의자들은 자비와 다른 사람들의 신성한 권리 존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해 온 호전적 요소들을 강조하여 축의시대 전통들을 왜곡해 왔다. 이들과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되찾으려면 규울 잡힌 창조적 연구, 토론, 사유, 행동의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 제도의 '완결성'을 보존하려면 불편한 경전과 역사적 참사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학자, 성직자, 일반 신도가 어려운 텍스트를 공부하고, 탐색하는 질문을 던지고, 과거의 결함들을 분석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 모두 자비로운 전망을 회복하고 그것을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방식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축의 시대 현자들이 했던 일이기도 하다. 668

 

이것은 순수하게 지적인 운동이 아니다. 정신적인 과정이기도 해야 한다.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축의 시대 현자들이 지칠 줄 모르고 설명했듯이 종교적인 이해는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현자들이 기록된 경전이라는 관념에 반대한다. 그것이 통속적이고 피상적인 앎을 낳을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우고 자비롭고 비폭력젹인 생활 방식도 텍스트 연구만큼이나 중요했다. 인드라조차도 호전적인 생활 방식을 ㅂ바꾸고 겸손하게 베다를 공부하고 나서야 전통의 가장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시간도 많이 걸렸다. 우리는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사회에 살기 때문에, 종교도 즉각적으로이해하고 싶어하며, 그것을 즉시 파악하지 못하면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축의 시대 현자들은 진정한 앎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꾸준히 설명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무리 엄격하게 논리적이라 해도, 진실의 어떤 측면은 을 우리를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합리적인 그리스인들에게 일깨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해는 지적인 케노시스 뒤에양, 즉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우리의 마음에서 이미 잗아들였던 관념들이 '비워졌을' 대에야 찾아온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과감하게 근본적인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직면해있는 만큼, 늘 새로운 생각에 마음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 668

 

우리는 큰 공포와 고통의 시기에 살고 있다. 축의 시대는 우리에게 일간 삶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고난과 직면하라고 가르쳤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이전 어떤 세대보다 고난의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잉ㅆ다. 전쟁, 자연 재해, 기근, 궁핍, 질병이 매일 밤 우리 거실에 비친다. 삶은 진실로 두카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 참사로부터 물러나고, 그것이 웅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부정하고,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모두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계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것은 대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싫은 고난을 부정하고 타조처럼 모래에 머리를 박는 사람들은 '거짓 예어자들"이다. 사방에서 밀려 들어와 우리 의식을 공격하는 슬픔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탐구를 시작할 수 없다. 국제적인 테러의 시대에는 붓다의 숲에서 살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보호를 받는 제1세계 사회에서도, 고난은 조만간 모두의 삶에 영향을 줄 것이다. 669

 

축의 시대 현자들이라면 이런 사실에 분개하는 대신 이것을 종교적 기회로 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고통이 곪아서 폭력, 불관용, 증오로 터지도록 놓아두는 대신, 그것을 건설적으로 이용하려는 영웅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한 말에 따르면, 그 비결은 원한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었다. 복수는 답이 아니었다. 사제 저자는 추방당한 유대인에게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그네였으니 그들 가운데 있는 나그네를 존중하라고 말했다. 과거의 고통의 기억을 바탕으로 우리는 황금률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우리 자신의 고통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적의 괴로움도 마찬가지다.(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리스인은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무대에 올려, 아테네 관객잉 불과 몇 년 전에 그들의 도시를 유린했던 페르시아인에게 공감할 수 있게 했다. 비극에서 합창은 늘 관객에게, 정상적인 경우라면 혐오감을 느낄 만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위해 울라고 말했다. 이들은 비극을 부정할 수 없었다. 비극은 바로 도시의 신성한 핵심 안에 놓여야 했으며 영원한 힘이 되어야 했다. <<오레스테이아>>의 끝에 복수심에 불타는 에리니에스가 '마음씨 공운 사람들'인 에우메니데스로 변하여, 아크로폴리스에 신전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미워하고 해진 사람들과 함께 느껴야 한다. <<일리아스>> 마지막에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분노와 독기 서린 원한은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ㄷ들 수 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그에게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서 잃었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670

 

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직한 상황에서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늘 일깨워야 한다. 그들은 상아탑에서 명상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무시무시한 사회, 오랜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 살았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허와 심연을 의식했다. 이 현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많은 수가 정치와 정부에 몰두했다. 그들은 공감이 단지 유익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자비와 모든 이에 대한 관심은 최선의 정책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의 본질에 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그들은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암 치료법을 찾아내는 데 쏟아붓는 것만큼이나 많은 창조적 에너질를 인류의 영적 불안의 치료법을 찾는 데 솓아부었다. 물론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축의 시대는 영적 천재들의 시대였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천재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영성은 미발달 상태인 경우가 많다. 671

 

축의 시대에는 인류가 사회적, 심리적 도약을 했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각 사람이 유일무이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집단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체 정신을 장려했던 예전의 부족 윤리는 새로운 개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축의 시대 영성의 아주 많은 부분이 자기의 발견에 몰입했던 것이다. 출가자는 상인과 마찬가지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현자들은 각자가 자의식을 갖고, 자신이 하는 일을 의식하라고 요구했다.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 각자가  제의를 떠맡아야 했다. 개인은 자기 행동에 책잉을 져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비약적인 도약을 하고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세계화딘 사회를 만들었으며, 이 사회는 전자, 군사, 경제, 정치 등 모든 면에서 서로 과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세계화된 의식을 계발해야 한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우리는 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가 축의 시대 현자들의 문제와 다르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들은 엣 종교의 통찰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심화하고 확대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축의 시대 통찰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671

 

현자들은 우리보다 먼저 공감잉 우리 자신의 집단에만 한정될 수 없음을 인식했다. 우리는 불교에서 '가없는' 전망이라고 부르는 것, 그 관심의 반경에서 어떤 생물도 바뜨리지 않고 지구 끝까지 뻗어나가는 전망을 계발해야 한다. 황금률은 축의 시대에 막 태어난 개인들에게 내가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듯잉 타인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내가 만일 나의 개별적 자아를 절대적 가치로 만들어버리면, 인간 사회는 유지가 불가능해지므로, 우리는 모두 서로 '양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이런 통찰을 발전시켜, 여기에 전 지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성결 법전에서사제 저자는 살아 있는 생물은 어떤 것도 불결하지 않으며, 모두가 - 심지어 노예도 - 독립적인 자유를 누린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미 보았듯이 사제 저자는 우리가 모든 사람에 대한 감정적인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으이 율법적 용어에서 '사랑'이란 웅리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의리를 지키고,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행성의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묵자는 자기 시대의 군주들에게 겸애, 즉 의도적이고 불편부당한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을 계발하는 것이 실용적으로도 얼마든지 의미가 있는 일ㅇ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ㅇ이제 그 말이 사실임임을 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잉ㄹ은 어떤 식응로든 내밀 런던이나 워싱턴에 영향을 줄 것이다. 결국 '사랑'과 '관심'은 이기적인 또는 근시안적인 정책보다 모두에게 더 이롭다. 672

 

에우리피데스는 <<바코스 여신도들>>에서 '나그네'를 물리치는 것이 위험한 일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낮설고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 세계관의 중심에서 자기를 치우려면 진지한 노력잉 필요하다. 불교는 다른 심리를 계발하기 위해 '가없는 것'에 관한 명상을 권한다. 그러나 요가를 할 시간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은 붓다의 시 <만물이 행복하게 하라>를 되폴이해 암송할 수도 있다. 이것은 신학적이거나 종파적인 믿음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기도다. 유가 또한 자기 계발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제의는 군자, 즉 남을 부주의하게, 의례적으로, 이기적으로 대하지 않는 성숙하고 완전히 발달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의는 제의가 관심으 ㄹ기울이는 대상인 사람을 바꾸어 그의 유일무이한 신성함을 끌어내기도 한다. 타자에 대한 존중을 실용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평화로운 지구 사회를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며, 어쩌면 악당 구가를 '개혁'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조중은 진실해한다. <<도덕경>>이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늘 우리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가 이기심 때문에 자신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비위를 맞추면 금방 알아챌 것이다. 673

 

고난은 말끔하고 합리적인 신학을 박살낸다. 에스겔의 무시무시하고 혼라느러운 환상은 <<신명기>> 저자들의 매끈한 이념과 매우 달랐다. 아유슈비츠, 보스니아, 세계무역센터 파괴는 인간 마음의 어둠을 드러냈다. 오늘날 우리는 비극적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인이 알고 있었듯이, 여기에는 간단한 답이 있을 수 없다. 비극이라는 장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한다. 종ㅇ교가 우리의 부서진 세계에 빛을 가져오게 하려면, 맹자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사라진 마음, 우리의 모든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자비의 정신을 찾으러 나서야 한다.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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