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
시노하라 마사티케
목 차
한국어판 저자 서문
프롤로그 『인류세의 철학』은 어떻게 탄생했나?
해제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서론
제1장 인간과 자연의 관계
· 인공물과 자연 · 인공물로서의 경계
· 인간의 세계·경계·자연과의 만남 · 인간의 세계와 그 붕괴
· 인간세계의 한계로서의 경계 · ‘아우라의 붕괴’에서의 양의성(兩義性)
· 자연 이해의 어려움 · 세계의 사물성
· 상호연관의 펼쳐짐
제2장 인간세계의 이탈
· 인간이 아닌 것의 세계 · 인류세
·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조건 · 인간의 조건의 사물성
· 이탈하는 인간세계 · 인간세계를 교란시키는 자연
제3장 인간세계의 취약함
· 인간세계의 과학기술화 · 지구로부터의 인간 이탈
· 인간의 조건의 붕괴 · 환경 위기와 인간 소멸
· 무용해지는 기분과 인공세계의 구축 · 생태적 현실로
제4장 생태적 세계
· 데이터로 본 현실의 충격 · 데이터가 제시하는 현실의 역설
·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 유체적(流體的) 사고에 대한 비판
· 인간은 자연 속에 살아 있다 · 인간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의 사이
· 취약성의 현실성
제5장 사물의 세계와 시적 언어의 가능성
· 사물과의 상호교섭 · 과학기술화 과정에서의 주체성 상실
· 시적으로 말하기 · 사물의 응시
· 정신의 극복 · 사물이 만나고 모이는 장소
· 과대 도시화와 공업화의 결말
제6장 생태적 공존
· 현전(現前)의 공간과 그곳으로부터의 제거
· 인간 아닌 것의 힘들과의 접촉 · 인간의 유한성
· 혼돈공간의 발생 · 확산에서의 연관
· 파편과 함께 있다는 것 · 빛과 어둠의 경계
·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된다
결론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
프롤로그, <<인류세의 철학>>은 어떻게 탄생했나?
ㅇ 동일본 대지진의 충격
이 책의 문제의식,
한나 아렌트가 1958년에 쓴 <<인간의 조건>>에서 제기한 문제를 오늘날 우리가 행성적 규모로 겪고 있는 생태위기 문제와 결부시켜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될까?
계기,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의 충격
이때 인간의 생존 조건이 자연에 의해 어이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 '인간의 조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9
한나 아렌트, "인간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인공물은 자연과 분리된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10
그런데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만든 인공 세계가 그것과 분리되었다고 여겨졌던 자연에 의해 간단히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0
ㅇ 인공 세계의 붕괴
'고도성장기', 인공에 의해 자연이 지워지던 시기, 근대화
ㅇ <<자연없는 생태학>>과의 만남
티모시 모튼 Timothy Morton의 책
<<자연없는 생태학>>
과거에는 자연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서 자연을 경험하고 생각해야 한다.
"자연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을 생각하자"
ㅇ 인간의 조건의 연약함
티모시 모튼의 책, <<거대한 사물 Hyperobjects>>
" 인간의 역사와 지질학적인 것의 일치"
'인류세' 문제
ㅇ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물음
Dipish Charkrabarty
예일대 강연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인간의 조건>>의 첫머리에서 "근대의 해방과 세속화가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인 지구를 무시하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14
한나 아렌트는 근대인이 지구를 무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운명적이다"라고 간주하고서 더 이상 깊게 천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크라바르티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지금 문제시 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15
ㅇ 행성과의 조우
차크라바르티는 이 이외에도 인간의 거주성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아렌트가 깊게 천착하지 않은 지구 소외 문제를 "인간이 지구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사유를 진행하고 있다. 15
"행성: 새롭게 부상한 인문학 범주"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
ㅇ 페허 위에서 만난 행성
일본의 사진 작가 가와우치 린코
사진집 <<빛과 그림자>>, 동일본 대지진의 페허 직후에 지진 현장에서 찍은 사진집
"페어가 되어 평형해진 대지와는 달리, 하늘은 이전보다 더 넓고 크게 보였다. 거기에 잠시 동안 서 있으니 내 존재가 작다고 생각되었다. 너무 작아서 한 줌의 바람에도 날아가 버릴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나의 몸이 여기에 서 있다는 현실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 18
자신의 왜소함과 세계의 거대함이야 말로 차크바라르티가 말하는 행성과 조유하는 감각이 아닐까?
가와우치의 사진은 인간 세계와 그것을 넘어선 곳에 있는 자연 세계의 대비와 상호침투를 테마로 하고 있다. 18
ㅇ 타자로서의 행성
<<행성 시대의 역사의 기후>>
여기에서 '타자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나는 그것이 "인위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근대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과거 일본에서 논의되었던 '근대의 초극' 개념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근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논의이기 때문이다. 19
ㅇ 근대와 자연
줄리아 토마스,
자연에 대한 이해 방식을 안티 모던, 즉 근대와 반대되거나 억압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연은 인간공동체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그것을 전복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위의 문제를 잘 숙고해야만 인류세 문제를 풀 수 있다. 근대와 같이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보아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예전 처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22
서론
프랑스 철학자 큉텡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인간이 사고하고 의식하고 의미를 형성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세계가 존재한다"는 입장.
단서, 과학적 데이터
. 우주의 기원, 지구의 형성, 지구상의 생명의 탄생, 인류의 탄생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간이 아닌 생명체는 인간이 존재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인간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곳에서 독립적으로 있다." 40
인간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간주관적인 공동세계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이와 무관한 곳에서 세계는 존재하고 있다.
-> "인간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와 세계 그 자체는 무관하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상과는 무관하게 세계는 존재한다. 그리고 세계는 인간의 생활을 둘러싸고 지탱하는 조건으로서 존재한다.
메이야수는 인간세계를 포함하는 이 세계는 인간이 아닌 것, 즉 동물, 식물, 광물 등을 포함하는 영역임을 논의하고 있다. 그 점에서 이러한 영역에서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아닌 것에 영향을 끼치며 살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41
이 책에서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시도한 고찰을 현대의 새로운 사상조류(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의 연관 속에서 재검토 하고자 한다.
인간의 조건이란 인간의 활동을 지탱하고 성립시키는 것인데, 아렌트는 이것을 인간의 내면성과는 독립된 세계, 즉 사물성이 있는 세계로 생각하고자 했다.
또한 아렌트는 근대 이후의 인간 생활의 문제를 '인간의 조건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린 문제'로 생각하고자 하였다. 인간의 영역인 공적 세계에 대한 고찰을 지구라는 행성, 즉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려 했다.
1957년 인공위성 발사 "인간이 지구에서 벗어난다"
인간 생활의 자족화와 고도화
메이야수 이후에 전개되고 확산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
-> 우리는 왜 인간세계를 포함하는 더 큰 세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왜 이런 범위의 세계에서 인간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이 세계에서 어떠한 이변의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 파울 그뤼천, "인류의 지질학"
"...현재 많은 점에서 인간이 우위에 있는 지질학적 시대에 '인류세'라는 말을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10,000년이나 12,000년 동안 지속된 온난한 시대인 홀로세를 대체한다" 44
인도 역사학자이자 사상사 연구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2009년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
"기후변동이 역사나 정치사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라고 묻다.
이 글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인류세를 둘러싼 인문학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류세를 둘러싼 논의가 던지는 물음은 인간이 인간만으로 자기완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살고 있는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45
인간의 활동으로 인간의 조건 자체를 사물성의 수준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활 영역 안에서 인간과 함게,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기에, 자신들의 활동이 인간 이외의 영역, 즉 인간을 넘어선 존재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거기에다 그 존재 방식마저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45
그렇다면 인간의 조건의 사물성을, 인간 이외의 영역에서 다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단지 인간에 의해서만 자기완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 너머의 것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도 어떤 초월적인 신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화된 세계보다 더 깊고 넓은 생태적인 영역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과 진지하게 대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46
1장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의 세계를 만드는 것은 자연을 개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49
아렌트, "... 인간이라는 인공물의 창조자는 지금까지 항상 자연의 파괴자였다."
아마도 1980년대 무렵에 이르면,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진행된 것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실은 자연적 지구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 즉 자연적 지구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각의 쇠퇴였다. 그리하여 자연은 잘 모르는 것, "(~이 아니라는) 부정의 표현으로만 제시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50
자연의 현실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 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쓰나미로 마을이 파괴되어 파면화되었을 때, 그것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와해되었다는 식으로만 이해할 뿐, 자연에 의한 와해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많은 사람들은 알 수 없게 되었다. 51
자연의 현실성이 어떠한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심신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의 세계에 의해 규정되고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51
1. 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
인간 생활의 영역
인공물
자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설정한 목적이나 수단과는 무관한 데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52
자연에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시내를 흐르는 하천과 같이 인간 생활을 지탱하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는 것도 있다.
인간은 양자(인공과 자연)가 접하고 연관되어 있는 곳에서 살고 있다. 53
인공물로서의 경계
인간 생황은 경계가 구분된 영역에서 영위되고 있다. 인간 생활의 영역에서의 경계 구분은, 공과 사, 나와 타인, 우리와 우리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될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영역 자체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과 구별해 나가는 지점에서도 성립한다. 54
세토구치 아키히사, "정적으로 작동하는 과학기술"
제방이나 내진 구조, 방조제와 같은 건축물, 수위계, 지진계와 같은 관측 장치도 포함된다. 인간 생활이 과학기술로 지탱되고 있다. 그것도 물리적인 인프라로 구현된 과학기술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경계의 기술이나 시스템
인간이 생활의 곳곳에 배치된 도구는 인간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나 생각과는 무관하게 단지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그 존재 방식에 의해 인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인간 생활의 존재방식을 근저에서 규정하며 좌우하고 있다.
기술로 지탱된 인간의 생활공간은 "자연의 압도적인 힘 앞에는 취약하다." 55
자연이 경계를 넘어서 인간 생활을 교란시키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일 뿐, 인간이 만들어 낸 경계는 언젠가 재구축되고, 재난의 기억은 망각되어 없던 일로 여겨진다.
인간의 세계.경계.자연과의 만남
<가설1>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과학기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기술권, 기술로 만들어진 생활권
기술권이 자연세계 위에 피부점막처럼 달라붙어 축적되고 있다. 혹은 자연세계 안에서 완성되고 있다. 57
<가설2> 인공세계와 자연세계 사이에는 두 종류의 경계가 있다.
제1경계는 인공세계가 자연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그곳을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확정하기 위한 경계이다. 모든 생물의 모체인 지구와의 치명적인 절연을 확정하고 불변의 사태를 유지하기 위해 구축되는 것이 제1경계이다.
인간세계를 3포함하고 있는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다른 존재와 서로 연합하는 가운데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려 할 때에 비로소 인간세계는 다른 존재의 세계와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제2의 의미에서의 경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오늘날 두드러지고 있는 모습은 행성 지구에서의 인간이라는 종의 생활 영역의 확장이다. 이 인간 세계의 확장은 인간과 자연을 격절시키면서, 인간과 자연의 뒤섞임을 저지하는 인공적인 경계(제1의 경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가 공존하는 조건으로서의 경계(제2의 경계)를 깨트리고 짓밟고 넘어가는 형태로 일어난다. 58
<가설3> 인간세계의 붕괴에 즈음하여 인간과 격절되고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자연세계와 새롭게 만난다. 59
2.자연 속에 있는 인간의 세계
인간의 세계와 그 붕괴
가와우치 린코,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인간 생활의 영역이 붕괴된 후에 남아 있는 사물들의 잔해가 담긴 사진들,
사진에서는 지진의 비참함 같은 과도한 의미는 희박하다. 붕괴된 사물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경쾌함, 투명감, 청정한 분위기, 적막함이 감도는 느낌이다. 어딘지 모르게 그때까지 성립하고 있던 인간세계의 족쇄로부터 해방된 듯한 자유로운 분위기마저 든다. 60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생활 영역을 감싸고 있는 '자연'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것은 인위의 산물이 무너져 사라져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자연에서 살고 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62
인위의 세계가 무너진 뒤에도 존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화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는, 거기에 감도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고 언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현상이 회복되고 일상이 재개될 때 사람들은 재난에서 일어난 것, 보게된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표현하고 언어화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재난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느끼고 사고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63
" 일상적으로 익숙해진 거리가 붕괴될 때 거기에서는 무엇이 붕괴되는가? 그리고 거리가 붕괴되어도 남는 것이 있고, 창조가 시작되는 곳이 있다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
결국 우리는 사물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붕괴 이전에 인간적인 세계로서 인공적으로 구축된 곳으로 편입된 것과, 붕괴되고 나서 인간적인 세계가 파탄된 이후에 흩어진 것은 그 존재 방식을 달리한다. 그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64
인간 세계의 한계로서의 경계
후지산 등반 경험,
'생명권'
삼림 한계선, 더 올라가면 산화철의 적색투성이.
경계의 존재를 산화철의 적색이라고 하는 적나라한 사물성과의 만남으로부터 느낀다.
"사람은 지구의 피부점막 부분에서만 살 수 있고, 그 외의 장소에는 아무런 근거도 가질 수 없다"
'아우라의 붕괴'에서의 양의성
사물과의 만남
인간에 의한 지표의 개변, 피막으로서의 생활 영역의 확장이 철저해지는 곳에서의 만남이다.
후지산은 "거대한 무기물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산을 단순히 무기물로 이해하는 것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붕괴' 즉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영성이나 신성함에 대한 감각이 붕괴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와 흡사하다.
모튼의 지적에도 있듯이, 산이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거기에 살지 않고 거기에서 동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도시인이다. 도시인에게 산은 그 거리로 인해 미적으로 감상된다. 69
벤야민에 의하면 아우라라는 영적인 것은 붕괴로 향하고 있다... 자신과 사물의 거리를 축소시키고 가깝게 하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사물의 복제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로 인해 과거에 사물에서 느꼈던 아우라가 붕괴되어 간다. 아우라의 붕괴는 사물에 대한 외경과 공포, 아우라를 느끼는 자세가 인간에게 상실되어감을 의미한다. 69
아우라의 붕괴와 함께, 거기에서 해방된 산이나 예술작품은 복제의 이미지 세계에 둘러싸여 사진이나 영상으로 증식되어 간다. 나아가서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산은 '신령한 봉우리'로서가 아니라 관광 세계의 형성을 위한 소재가 된다. 70
기 드볼 '스펙터클화'
벤야민의 논의는 아우라의 붕괴를 적극적인 것으로, 긍정적인 사태로 이해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70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가 사물에 대한 간격이 없는 감각을, 즉 사물을 동종의 것으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신성함도 영성도 없는 우연적인 상태로 조각내서, 그리고 평평하게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감각을 발달시키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였다. 71
인간은 사물을 대상으로서, 다시 말해 사물을 단지 거기에 있는 객체로서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우라의 붕괴를 받아들이면서도 스펙터클화로 빨려들어가지 않는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사물성을 향해 나갈 수가 있다. 71
자연 이해의 어려움
산에 대한 거리감의 붕괴 즉 아우라의 붕괴는 거기에 살고 있어도 일어날 수 있다. 인간이 거기에 삶으로써, 다시 말하면 그곳을 주거로 하는 동식물과 함께 사는 것을 통해서 산은 친밀한 것이 되고, 아우라라는 덮개로부터 해방되어 인간 생활을 조건지우는 사물로서 이해되게 된다. ,,, 인간의 생활을 둘러싸고 그것을 성립시키는 조건인 '사물성을 지닌 자연세계'로 파악되게 된다.
모튼이 시사하고 있듯이 자연은 파악하기 어렵다.
"자연은 신성한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다. 자연은 결코 '자연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마치 유렁처럼 사물들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것은 자연을 연상시키는 사물의 무한한 목록을 빠져나가 버린다." 73
자연은,
국민국가의 성립과 상관되는 것처럼, '네이션' 개념과 긴밀히 결부되게 됨.
낭만주의 시대, 사회적인 선의 기초
루소, 사회계약을 맺는 자들은 자연 상태로부터 출발했다.
인종적 성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법
자유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것
그리고 자연은 신성한 것과 사물 사이에서 위치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단순한 사물이라기보다는 모종의 숭고한 것을 구현한 실체로 파악된다. .... 숭고한 것을 둘러싼 논의.. 이것은 군주주의나 권위주의를 지탱하는 사고방식이다.
모튼은 이러한 자연관에 비판적이다.
"만약에 자연이라는 것이 단일하고 독립적이고 영속적인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자연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74
모튼이 비판하는 것은 자연을 숭고한 것, 즉 유기체론적으로 이해하는 자연관이다. 74
3. 자연세계란 무엇인가?
세계의 사물성
모튼, <<자연없는 생태학>>에서 "자연" 개념 자체가 생태학적 사고와 실천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생태학에서 유기체론적인 '자연'관념을 제거함으로써 생태학적 사유, 생태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를 다시 시도한다.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신비화된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둘러싸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것을 연관시켜 존재시키는 '둘러싸는 것'의 영역으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모튼의 사고는 그레이엄 하먼을 중심으로 하는 객체지향철학의 시도와 연동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철학 또한 "우리 인간과는 독립된 자율적 사물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75
의식의 철학이 언어론적 모델로 치환되어 감에 따라 인간은 "언어적인 의미 작용과 역사적인 투사의 네트워크로부터 완전히 도망갈 수 없는" 자율적이지 않은 존재로 생각되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간과된 것이 '무기물의 세계'이고, 거기에서 인간도 살고 있다는 현실이었다고 하먼은 말한다. 76
인간의 주관에서는 자신의 생활이 사물에 둘러싸여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이 의식화되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다. 그것이 의식화될 때에는 사물이 작동하지 않을 때, 즉 무너졌을 때이다. 77
하먼의 관심은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객체로서 이 사물 모델을 탐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각과는 관계 없는, 그것으로부터 자율적인 곳에 있는 것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하먼의 시도는, 인간을 '둘러싼 것'으로서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튼의 시도와 교차된다고 할 수 있다. 78
상호연관의 펼처짐
모튼과 하먼 둘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모튼이 환경을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행위, 감각, 사고와의 관계에서 환경을 어떤 것으로 파악하면 좋은가를 묻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인간 자체를 환경이라는 펼쳐짐 속에 있는 것으로 다시 파악하기 위해서다.
모톤은 환경을 "인간이 접한 흔적이 전혀 없는 때 묻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인간화할 수 있는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화되지 않을 여지, 인간에 의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여지가 있고, 그래서 인간의 의도와는 무관한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79
모튼은 무언가가 일어나는 곳으로서 환경을 다양한 것의 상호연관적인 만남이 일어나는 펼쳐짐의 영역으로 생가해 나간다. 80
'상호연관의 얽힘'
" 그것은 철저한 친밀성으로, 생명체이든 무엇이든 다른 존재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80
잘 모르는 것과의 만남이 일어나는 곳으로서 상호연관의 얽힘을 생각한다. 그리고 '잘 모르는 것의 잘 모름'을 '부정적 차이'라고 표현하면서, "거기에는 긍정적이면서 진짜 존재하고 있는 (독립적이고 단단한) 사물은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하먼과 모튼의 차이,
모튼은 "의식의 작용 없이 자기조직화된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비판한다. 하먼은 모튼의 논의가 결국 일종의 유심론적인 것 아닌가 비판한다.
오히려 모튼은 상호연관적인 얽힘 속에 있을 때에 인간의 의식은 사물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82
제2장 인간세계의 이탈
자연은 인공세계에 편입된 뒤에도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 성장과 쇠퇴라는 자연사적 시간을 인간세계에 도입시키고 만다. 이것이 인간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런데 아렌트에 의하면, 사물이 인간을 위한 세계로 구축되는 곳에서는 확실한 현실성이 생기지만, 인간을 위한 세계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세계가 아닌 것이 된다. 즉 거기에는 "인간 생활을 조건지우고 인간 존재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에서의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인간을 위한 세계로 구축되기를 멈춘 사물의 집적으로서의 잔해더미나 가옥이 철거된 후에 방치된 빈터에 우거지는 잡초에는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성이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독특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88
1.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연관
인간이 아닌 것의 세계
현대사상(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는 인간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사물성 내지는 객체성이 있다'
사물의 세계가 붕괴되지 않고 우연히 성립하는 기묘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세계는 인간의 사고나 예측과는 무관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간의 앎이나 의식과는 무관하게 세계가 갑자기 무너질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것으로변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철학적 논증을 시도했다.
메이야수와 같은 철학이 21세기에 등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는?
모튼, "인간의 역사가 지질학적 역사와 일치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인간세계가 자연세계의 영향을 받기 쉬워진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 썩인 의식
->
모튼 자신과 허먼, 메이야수의 철학
모튼이 "사물에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라고 주장했던 것은 인공과 자연이 은밀하게 만나는 곳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인간 생활에서는 사물의 기묘함을 대체로 의식하지 못한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에 사는 데 익숙해지게 됨에 따라, 그 이외의 세계, 즉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세계는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가 아닌 것'으로 지각되고, 거기에서 감각이 닫히고 사고도 멈추기 때문이다. 91
인간 생활의 영역을 자연과는 무관한 정교한 인공세계로 생각하는 상상력을 제아무리 끌어 올린다고 한들, 인간 생활의 영역은 자연세계 위에 축적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사물성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91
지진, 쓰나미, 원전사고
자연의 야만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과의 관계로 인해 생기는 '어쩔 수 없음' 즉 '자유로울 수 없음'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다. 91
지금까지 논의 된 인간의 자유 개념,
자연에 관한 담론,
자연과의 조화, 자연 친화적 생활, 자연이 여성성과 결부되고, 자연이 녹색이나 매혹적인 향기 같은 것들이 상품화되어 갔다(상품 이미지의 자연화).
이 경우의 자연은 자연에 대해 인간이 품고 있는 유기체적이고 조화로운 이미지에 종속되어 있다. 93
2011년 대지진은 인간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것을 촉구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 그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물음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껏 인간의 존재방식은 자연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고의 습관 혹은 사고의 심층을 규정하는 이미지가 바뀌지 않은 한, ...
인류세
파울 크뤼천과 유진 F. 스토머
"지구와 대기에 대한 인간 활동의 영향력 상승"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94
... 그 영향력은 대략 10,000년 전에 시작된 '홀로세'라는 지질학적 시대구분을 끝낼 정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 활동이 지구의 존재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주장이다. 크뤼천 등은 이러한 현상들의 주요 요인으로 "과학기술의 발전, 급격한 인구 중가, 자원 소비의 증대"를 들고 있다.
크뤼천 등에 의하면 인류세는 18세기 후반에 시작된다.
1784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
1945년, 뉴멕시코 핵실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인간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묻기를 요구함.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조건
크뤼천과 같은 과학자들은 인간이 자연을 공학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세의 문제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통제할 수 없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다시 생각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 인문학의 활동이 요청된다.
차크라바르티,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 선구적 논문이다.
이러한 위기가 '과거-현재-미래'라는 방식으로 선형적으로 지속하고 진보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던 인간사회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점의 특징은 인간이.... 온갖 동물을 멸종시키고 있는 것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존재론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지구와 대기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차크라바르티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선이 무너져 가는 문제로 이해한다. 그는 인간이 자연과 구별되면서 상호의존적이고 친화적인 관계에 있는 일체성의 회복을 몽상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지질학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힘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지점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그는 인간이 지구에 가하는 힘을 기르는 사이에 인간 자체가 지질학적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을 갈라 놓은 경계가 무너짐에 따라 인간은 자연 안으로 스며들어 간다. 거기에서 자연만 개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그 존재방식의 깊은 곳에서 개변되고 있다.
차크라바르티는 지구 온난화가 행성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과 관련된 문제라고 보았다. 즉 인간 생활의 존속 조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농업혁명에서 산업혁명을 거쳐 현대로 이어지는 인간 생활의 조건은 대기와 토양, 바다와 하천과 같은 물질적인 것과 연관된 곳에서 형성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차크라바르티는 "인간적인 삶(bios)과 그 외부에 펼쳐지는 생(zoe)의 구분에 기초한 아렌트적인 인간의 조건을 다시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98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나온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이 경계선이 불가피하게 무너져 가고 있다. 공적 세계와 자연 세계를 구별해 온 경계의 붕괴는 공적 세계의 이념을 견지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다. 99
2.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상호연관적 교란
인간 조건의 사물성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세 가지 수준에서 생각한다.
첫째, 인간의 세계이다.
복수의 인간들이 행위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드러남의 공간이다.
둘째, 사물의 세계이다.
인간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형성되는 세계이다. 따라서 인간 활동과 무관한 대지 그 자체, 하천 그 자체와는 구별된다.
사물의 세계는 그것을 형성한 인간보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질을 아렌트는 유형성, 물상성, 세계성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그녀의 논의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질이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만들어가는 활동과 함께 생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셋째, 세계 그 자체이다.
인류세의 문제 설정을 고려해 볼 때, 세계 그 자체란 인간세계와 사물세계가 형성되는 것보다 앞선 지구, 행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행성으로서의 세계 그 자체에 사물의 세계가 쌓이고, 거기에 인간의 세계 - 간주관적으로 공유되는 의미의 세계, 허구적인 세계 - 가 형성되어 간다. 102
아렌트의 논의가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연관을 일관되지 않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유했기 때문이다. ...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연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연을 '세계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요구되지만, 그 이탈은 인간 생활의 조건인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이기도 한 것이다. 104
인간세계를 교란시키는 자연
차크라바르티,
".... 이 조건들(행성을 존재시킨 기후의 권역)은 정치, 경제 제도의 역사보다 오랫동안 안정적이었고, 그 덕분에 인간 존재가 지구에서 우세한 종족이 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우리 자신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어,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한계적 조건들을 교란시키게 되었다." 105
이러한 그의 견해는 아렌트가 논의한 틀 바깥에서 현실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향하고 있다. 아렌트는 인간의 행위가 두 가지로, 즉 드러남의 공간에서의 복수적인 '상호적 행위'와 드러남의 공간을 건설하는 '제작적 행위'로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지질학적 행위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점점 알게 되었다.
아렌트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드러남의 공간 그 자체)와 자연세계 그 자체를 구별하고, 인간의 행위가 미치는 범위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여기에는 정치경제의 제도나 과학기술 시스템도 포함된다)에 한정된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차크라바르티는 인간의 행위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 아닌 것'으로까지, 즉 아렌트가 자연의 영역이라고 간주한 것에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106
그리고 아렌트는 인공무로서의 세계 형성을 지구 자체로부터의 이탈과 연관시켜 생각했다. '이탈'은 인간 세계가 형성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세계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구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차크라바르티는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었으며, 인간이 자연세계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지질학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이 인간 존재를 지탱해 주는 조건 그 자체를 교란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교란은 분리시킨 줄로 알았던 자연세계가 사실은 인간세계를 따라다니고 있으며, 때로는 경계를 뚫고 인간세계에 침입하여 인간세계의 존재 방식을 뒤흔들고, 때로는 붕괴시키기도 한다는 인류세적 상황을 발생시킨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인간은 인간세계가 자연으로부터 발려 나가서 자기완결적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두 세계가 서로 맞닿아 연관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106
제3장 인간세계의 취약함
테주 콜, 핵실험 영상과 대지진 이후의 사진을 보면서, 인간성이 끝나 가고 있음을 환기하게 만들었다.
" 세게에 대한 우리의 경험 방식을 항구적으로 바꾸고, 새롭게 사물을 보는 기각을, 새로운 슬픔의 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인간의 조건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이야수, 칸트가 말하는 시공의 형식 자체보다 앞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초월론적 주관(초월론적 시공간 형식을 구현한)은 그러한 주관이 '장을 가진다=생긴다'는 조건에서만 있을 수 있다" '장을 가진다'는 것은 "세계 속에서 장을 가진다"는 것이고, 이는 곧 "세계 속에서 위치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단지 세계에서 발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육화되고 구체화되는 것이 요구된다. 즉 인간이 부재했던 세계에서 인간이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활동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시공간 형식은 인간 신체가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공간과 시간의 붕괴는 오히려 존재론적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존재하기 위한 장소에 대한 불안감.
1. 전대미문의 사태에 대한 의식
- 과학기술화. 지구로부터의 이탈. 인간 조건의 붕괴
야스퍼스, '전대미문의 사태에 대한 의식'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따라다니게 된 의식.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충분한 자각 상태에서 자기들의 세계를 연구하고, 그것을 자기 목적에 맞추기 위해 변화시킨다. 인간은 '자연의 인과성'에 간섭하는 방법을 배웠다." 115
그 귀결이 바로 '인류세'라고 하는, 인간이 자연에 대한 간섭을 심화시킨 끝에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황이라고할 수 있다.
차크라바르티는 야스퍼스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생존 조건을 바꾸려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과학기술이 인간 생활에 끼치는 영향의 논리적 귀결에 대해 철학적 사고를 시도한 점이 중요하였다고 차크라바르티는 생각한다. 116
차크라바르티는 야스퍼스 등의 통찰을 인간 소외를 일으키는 과학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게 된 현실을 냉정하게 생각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파악한다. 즉 이러한 통찰을 수용하여 한층 더 깊은 질문들을 던지고자 한 것이다.
"인간이 순수하게 기술적인 관계들 속에서 살게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기술적인 관계들로 규율되어 가는 세계란 어떤 것인가? 앞으로 어떤 생활양식이 등장하게 될까?" 118
지구로부터의 인간 이탈
차르라바르티, NASA가 1968년에 촬영한 '지구돋이earthrise'
"세계란 우리 인간이 우연히 살고 있는 행성이다"라는 즉물적인 현실을 우리에게 인식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상의 제시는 인간이 인공위성에 탑승하여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이동하여, 지구를 직시하고 촬영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118
"인간이 생활하는 곳은 지구라를 객체적 물체이다"라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아렌트의 경우 지구로부터의 이탈은 '뿌리 없는 풀 되기'와 '인간 본성의 상실'과는 다른 시각에서 보았다. 아렌트는 지구의 발견이 인간 생활 영역의 확장과 연동된다고 주장한다. 119
사람들은 지구의 표면, 즉 지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지고, 인간이 스스로 확장시키는 드넓은 영역 내부에서 자기 완결적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강화된다. 120
2.인간세계의 한계와 생태적 현실과의 만남
환경 위기와 인간 소멸
"인간이라는 종의 확장으로 우리가 수많은 다른 생명 형태에 압력을 가하는 가장 지배적인 종이 되었다" 는 인식.
<<슬픈 미나마타>>의 저자 이시무레 미치코,
가 생각했던 것도 이러하다.
하지만 이시무레는,
"내 고향에서 아직도 해매고 있는 사령이나 생령의 말을 계급이 원어로 여기는 나는 나의 애니미즘과 프리애니미즘을 조합하고 근대에 대한 주술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126
이 말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이시무레는 생명의 근원을 신비적으로 파악하고,, 나아가서 근대 산업을 저주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녀에게는 아렌트나 차크라바르티와 같은 냉철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126
사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은 기업만이 아니다. 플라스틱을 이용하고 에어컨과 같은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소비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행성에 가하는 압력은 유기수은과 같은 물질에 의한 행양오염만이 아니다. 온난화, 해면 상승과 같은 사태를 일으켜서 연안 지역을 침수시킨다. 126
무용해지는 기분과 인공세계의 구축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지적한 바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에서 만연하다가 나치의 대두로 인해 더욱 고조된 것은 '무용 혹은 불필요'하다는 기분이었다. 즉 자기 자신이 세계에서 무용해지고 불필요해진다는 느낌이다.
무용해지는 기분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즉 세계에 속하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때, 사람은 자신이 무용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128
인간이 자기만의 완결적 세계를 구축한 것은 자기를 둘러싼 광대한 영역으로서의 지구로부터 이탈이자 동시에 지구라는 고향을 잃고, 그곳과의 연관 속에서 만들어진 생활양식을 상실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이탈로 인해 뿌리 없는 풀이 되었다는 불안이 생긴다. 129
행성적인 세계의 개변과 파괴는 인간이 뿌리없는 풀이 되어 가는 것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 130
인공 세계에서 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설령 인공세계 안에서 뿌리 없는 풀과 같은 기분을 느끼더라도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행성적인 세계의 개변이나 파괴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뿌리 없는 풀이 되는 것과는 다른 기분, 즉 이 행성적인 세계의 개변과 파괴로 인해 어떤 기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무용화나 불필요화는 이러한 행성적인 세계의 개변과 파괴라는 의미에서 거처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뿌리없는 풀이 되는 것보다 무용화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 130
우리 자신이 속한 인공세계가 붕괴되었을 때 우리는 완전히 무용한 상태가 되어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근원적 무용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인공세계가 한층 고도화되고 견고해지기를 바라고, 거기에 과도할 정도로 통합되기를 원한다. 130
인공세계의 구축은 폭력적인 것이 된다. 131
자신들의 세계가 자기 완결적이라는 믿음을 위협하는 불안 요인을 추방하고, 그것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경계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폭력젹이라고 모튼은 말한다.
"왜 폭력이 행사되는가? 구멍투성이의 경계들과 서로 연결된 고리들로 이루어진 (생태학적) 현실의 결에 반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공적 생활공간의 자기완결성은 그것을 둘러싼 생태학적 현실의 다공성의 상호연관성 자체를 삭제하고 무시함으로써 달성된다는 것이다. 132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유용한 것으로서 언제나 눈앞에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모튼은 인간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서 세계의 사물을, 나아가서는 세계 자체를 생각해 나갔다. 이와 유사하게 차크라바르티도 "세계-지구는 단지 우리의 거주지로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인식은 '행성 자체의 타자성"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모튼과 차크라바르티는 우리의 생존 영역을 지탱하고 둘러싸는 곳을 타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완결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생활 영역에는 그 안에 다 들어오지 못하고 삐져나오고 새어 나오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고자 한다. 134
인간의 생존 조건은 인간화되지 않고 인간의 접근을 넘어서는 곳에 있지만, 인간의 생존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해 주기 때문에, 단지 쓸모 없고 난잡한 사물들의 축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사물은 '유용한가 무용한가'라는 인간이 정한 틀을 떠난 곳에서 단지 존재하고 있다.
제4장 생태적 세계
1.생태적인 것의 현실
데이터로 본 현실의 충격
산업혁명부터 2000년대 초에 이르는 인간활동의 발전에 관한 몇 가지 지표들. 1950년 무렵부터 인간 활동의 모든 지표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음.
인구, 실질국내총생산, 외국인 직접투자, 댐건설, 물사용, 비료소비, 도시인구, 종이소비, 맥도널드체인점, 교통(자동차), 통신(전화), 해외관광
기후위기 논쟁, 인류세라는 개념은, "... 그것은 증거와 설명에 관한 과학적 논쟁이라기보다는 신념과 가치관에 의해, 때로는 냉소적인 자기 이익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된 규범적 논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크뤼천 등이 시사하는 신념의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가 자연의 존재방식을 개변할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생존 조건을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인간세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자, 인간의 존재 방식이 자연과 교차되고 연관되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들만으로 자기 완결된 세게에서 살고 있다는 신념으로 뒷받침된 근대적 세계관과 사회이론들의 무의미함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41
신념과 관련된 문제 이외에도 인류세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데이터로 제시되는 현실상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141
데이터가 제시하는 현실의 역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대부분의 사고를 인포스피어 안에서 진행시켜 왔다. 그런데 이 책은 인간 생활이 영위되는 조건인 사물성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생활의 조건인 사물성에 대한 이해를 정보적 사고와 함께 진행시킨다는 역설적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142
우리가 샇고 있는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이 역설적인 시도를 철저히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모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임박한 생태적 위기와 가상현실의 대두 사이에는 놀라운 연관성이 있다. 이 연관성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관련되며, 인식론의 문제를 던진다. 즉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역설적인 사태를 경험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상 세계의 존재 방식을 거리를 둔 상태에서 설명해주는 안정적인 언어와 사상, 즉 인류세 이전의 사상이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때문에 현실에서 살아가는 상황 그 자체가 과연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바깥에서 인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는 가운데 손으로 더듬어 가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고 글로 옮길 때에도 외부에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모튼은 사적 혹은 주관적 인상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44
현실 세계의 사물성의 현실성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튼이 여러 번 말했듯이 "사물의 현실성이 다양한 의미를 지닌 어떤 미스테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고 여기는 것이 요구된다.145
2.생태적 시대의 리얼리즘 부활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생태적 세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마누엘 데란다,
오늘날 왜 리얼리즘 철학이 사람들에게 중요해질까?
"...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물질적인 문제들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경험을 벗어나 있는데, 그런 문제들의 긴급성 때문에 리얼리즘이 부활하게 되었을 것이다." 146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을 마음과는 독립된 물질적 현실로서 사유하는 리얼리즘 입장.
데란다, <존재론적 관여>에서 "마음과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공동체나 도시와 같은 것에 마음으로부터 독립된 실재성을 인정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객관적이지만 인간의 마음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내적 역학"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재성이다. 즉 공동체나 도시는 인간의 제작물로 정해져 있는 한,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역학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작용을 통해 만들어 내는 과정을 거쳐 생긴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산이나 행성과 같은 형태로 인간의 마음과 독립해서 생긴 것과는 다르다. 148
하지만 공동체나 도시가 산이나 행성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유체적 사고에 대한 비판
3. 생태적 세계를 수용하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아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개변, 나아가서 인간의 생활 조건의 개변은 테이터적인 현실상을 통해 객관화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모튼이 말하듯이, 자연의 개변은 인간이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곳"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맹목성 때문에 자연이 개변되는 현실상은 인간의 일상적인 의식의 범위에 들어오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그뤼천 등의 논문은 개변되고 있는 지구의 현살상을 데이터를 통헤 제시하고 있다. 153
아렌트, 사물의 두 가지 상태
하나는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인공적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단지 생물학적인 생물로 속해 있는 자연 환경이다. 아렌트는 이 중에서 후자의 자연환경을 인간세계를 위협하는 사나운 것으로 간주하여 기피한다. 자연은 야만적이고 불안정하며 인간 생활의 안정적 기반을 위협하고 붕괴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 생활이 인공물로서의 인간의 조건에서 영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조건 자체를 뒷받침하고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서도 현실적으로 영위되고 있다는 생각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야만적이고 불안정하며 불길한 자연에서도 살아가고 있다. 다만 이 사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자연을 단지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기피하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인간에게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아렌트의 사유도 그 '무엇'에 사로잡혀 있다. 154
인간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 사이
모튼,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물들과,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고차원의 위상 공간에서 진행되는 대규모로 분포된 존재의 현실적인 행위들, 즉 기후변화 사이에 현실에서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모튼은 인간적인 영역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광대한 영역 중에서 그 어느쪽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광대한 영역에 대한 사유는 단지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에서 실제로 생활하는 가운데 가능해진다. 이 광대한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모튼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물리적으로 영향 받아 온 비인간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메이야수,
"세계의 데이터와 명백히 관련되어 있는 과학적 명제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과학적 명제는 인간의 공동주관적인 의식, 간주관성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그 무언가가 인간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제시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메이야수는 물은 것이다. 156
모튼,
"인간의 활동이 비인간의 영역에서 현실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의 영역에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기묘함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
더욱 요구되는 점은 이 데이터적 현실상을 실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인간적인 세계에 의미있는 사태라는 것 - 공동주관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상이 아니어도 의미가 있는 것 - 을 언어로 논의하기 위한 인문학적 사고이다. 157
취약성의 현실성
취약하지 않은 사물은 없다. 모든 사물은 항상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와 '세계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사유방식과는 상관없이, 사물은 단지 취약한 것으로 무너져 가는 과정 속에 존재하고 있다. 159
사물이 불변하는, 늘 그렇게 나타나 있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부서지고 사라지는 과정, 즉 소멸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우연'이라는 존재 방식은, 인간적인 영역과 간극을 둔 상태에서 접해 있으면서, 인간적인 영역 안에 완전히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감싸고 있는 광대한 영역에 속해 있다고 하는, 사물의 기묘한 성질 때문이라는 것이다. 159
모튼은 인간이 떠올리는 공간이나 세계와 같은 표상과는 상관없이, 사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물에 구비된 성질이 공간이나 시간을 생성한다고 말한다. 159
모튼은 이후의 저서인 <<리얼리스트 매직>>에서 사물에 있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성질을 '취약성' 혹은 '사라져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사물의 실재성을 '취약성' 혹은 '사라져 가는 것'으로 감지하고, 그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논의로 이해할 수 있다. 160
가외우치 린코, 잔해더미가 쌓여 있는 장소를 '단지 고요한 것'으로 느끼고, 그 고요함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거기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현실성을 실감했다고 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물은,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 아닌 영역으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그것을 둘러싼 생태적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61
제5장 사물의 세계와 시적 언어의 가능성
모튼의 <<자연없는 생태학>>의 시도는 중요하다. 이 책은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유기체론적 자연 관념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사물성을 의식화하고, 거기에 기초한 사고, 감각, 행동 원리를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165
벤야민, 고도의 공업 발달을 조건으로 하는 기술복제시대에는 감성, 사고, 언어의 존재 방식이 '아우라'라고 하는 영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되었다.
현대 세계에서 아우라의 붕괴는 인터넷의 침투와 맞물려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사물과 관계하며 그 현실성을 느끼면서 자신의 감성, 사고,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 조건의 사물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165
1.사물의 현실성과 시적 언어
사물과의 상호교섭
'신품문화' 사회
기성품, "자연적 재질과의 연결을 완전히 배앗긴 것" 그 때문에 사물은 "완결된 현재형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166
지금 여기에 있는 수많은 사물들의 집적인 이 세계는, 과거부터 사용된 사물들이 미래에도 다시 사용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주입되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우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기성품은 그 자기완결성으로 인해 시간적인 연관이, 즉 과거와 미래의 우연적인 연관이 단절되어 있다.
사물과의 상호교섭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주체적 활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169
오노의 시는 사물을 응시한 곳에서 발화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오노는 인간도 새도 거주할 수 없는 세계의 도래를 예견하면서도 공업을 긍정하고 있다. '인간 소외 극복'이나 '자연호보'와 같이 관념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슬로건을 내세우지 않고, 공업의 '악'을 응시하면서 이를 긍정해 버린다. 176
이러한 긍정은 어떠한 긍정인가? 왜 오노는 심각한 불안을 느끼면서도 공업을 긍정하였을까?
" '낡아빠진 꿈' 보다는 새로운 '공업의 악'을 취하겠다는 태도는 리얼리스트 다운 엄격함을 내면에 간직한 채, 현대에 대한 적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메마른 감촉을 선호하는 곳에서 단가적 서정을 부정한 근대주의자다운 오노의 정서적 바탕을 엿볼 수 있다." 177
꿈, 유기체론적인 전근대적인 공동체주의일 것.
모튼의 표현을 빌리면, 오노의 시는 "인간이 구축한 장소보다 훨씬 더 거대한 장소에 우리가 있음을 발견한" 시로 읽을 수 있다. 거대한 장소에 있을 때 인간은 바람과 연기를 느끼며, 풀과 광물의 현실성을 느낀다. 이 드넓은 펼쳐짐 속에 들어감으로써, 인간이 문화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장소가 협소하고 제한적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환영이나 정신으로 가득 찬 번화가와는 다른 '갈대밭'이라고 하는 변경의 정적 속에 몸을 두는 것이 요청된다. 182
오노는 물질의 형상으로 "온 지평을 메우고 싶다"고 하였다. 그의 시는 우리 자신의 '물질에 대한 감도'를 높이기 위해서, 즉 우리가 사물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감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시이다. 장소의 사물성은 정신의 덮개가 벗겨진 곳에서 감지된다. 우리는 걷고 듣고 냄새 맡는 것과 같은 신체 활동을 통해 장소의 사물성을 감지한다. 오노의 시어는 신체적 활동과 직결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장소의 사물성에 대한 신체의 감도를 자극하고 일깨운다. 182
그리고 사물성이 감지되는 장소는 인간의 생활과 조화된다고 여겨지는 유기체론의 전체와는 다르다. 장소에는 정신으로 표상되는 유기체론적 전체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막연함'이 있기 때문이다. 오노는 이 막연함을 '혹독함'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182
오노의 독자성은 공업화와 과대도시화를 전원이나 농촌, 다운타운이나 소비도시라는 모종의 정서와 함께 이야기되고 묘사되는 도시와는 다른 수준에서, 즉 공업화와 과대도시화를 '압도적인 힘'에 의해 촉구되듯이 진전되는 사태로 생각하려고 한 점에 있다. 게다가 그는 이 힘에 의해 촉구되는 상황이 어쩌면 인간의 인위적인 통제마저도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185
인간은 공업화 속에서 정신성이라는 인간다움의 일부를 상실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자연이라는 세계 속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향토적인 언어로 그려지는 온화한 자연과는 전혀 다른 혹독한 자연과의 만남이자, 그 혹독함에서 자연의 물질성과의 만남이다. 186
제6장 생태적 공존
이 책은,
메이야수가 개척하고 모튼이 전개한 생태 사상, 그중에서도 객체지향적 생태 사상의 성과를 흡수하여 고찰을 진행해 왔다.
모튼,
"생태학에는 우리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상상하는 모든 방법이 들어 있다. 생태학은 철저하게 공존에 관한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공존하는 것이다." 189
그런데 '생태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을 넘어선 곳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인간이 자연과 조화되고 자연과 통합되어, 하나인 것 속에 포괄되면서 함께 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태학이라는 용어에 무언가 자연적인 함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순수무구한 자연'과 같은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무리가 없는 느슨하고 온유한 것 같은 분위기와 관계된 것이다.
무리 없음(비고, 경직성, 폐쇄성)
모튼은 생태적 공존을 드넓게 펼쳐진 전체성과의 관련 속에서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레비나스와 이리가라이 사상에서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주석: 이리가라이의 <<사랑의 길>>)
드넓게 펼쳐진 전체성의 감촉
여전히 동류의 인간만으로 자기 완결적으로 살 수 있다는 통념이 우세하고,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형성되는 동일성에 뿌리를 둔 집단의 부흥이 고조되고 있다. 191
1. 자기 완결적 세계의 논리와 무리
현전의 공간과 그곳으로부터의 제거
인간만으로 자기 완결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통념이 되고 있다. 이 통념은 단지 현실적으로 무언가가 일어나면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념의 근거에 있는 사고의 전제가 무엇인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이 통념의 전제로, 모튼은
'농경사회의 성립'이라고 주장한다. 즉 고매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시작되어 봉건제, 자본주의, 소비에트 경제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온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정주적 생활방식.
(비교: 수렵인의 이동 생활)
이 생활 방식의 전제에는 어떤 사고 양식이 있는가?
"... 농지는 동일한 농지이고 나의 농지이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항상 눈 앞에 있는(현전) 그 상태로 있다. '항상 눈 앞에 있다'는 사상은 절대적인 공리주의와 합치되고, 이에 따라 나는 나와 같은 생명체가 좀 더 많이 존재하고 좀 더 오래 존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모튼이 문제시하는 것은 '나' 내지는 '우리'만이 눈 앞에 있을 수 있는, 즉 현전 가능한 곳으로서 경계가 확정되고, 정지되어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점이다.
농지가 발단이 되어, 근대형 도시를 구성하는 것도 주택지, 공장지대, 유원지, 쇼핑몰과 같이, 주위가 둘러싸여 정지된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공간의 성립은 '나', '우리', '우리와 같은 인간'과 같이, 한정된 집단의 동일성 형성과 연동되어 있다.
이 현전의 공간에 나타날 여지를 빼앗긴 인간 내지는 사물들도 이 현전의 공간과는 무관한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현전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의 공간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은 현전하지 않는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94
인간 아닌 것의 힘들과의 접촉
인간의 유한성
인간은 인간 이외의 힘들과 접촉함으로써 유한성으로 하강해 나가다. 들뢰즈가 제시한 견해는, 최근에 온난화를 비롯한 인류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는 행성 규모의 변동을 둘러싼 역사나 사상에 관한 논의에서 중심 문제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차크라바르티의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행성의 온난화가 위협하고 있는 것은 지질학적인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홀로세의 시기에 발전한, 인간 생활의 생존이 의존하는, 생물학적이자 지질학적이기도 한 조건 그 자체이다."
정주적 생활양식에 기반한 농업과 공업적 생산 양식이 일으키는 행성 규모의 변화가 인간 생활의 생존 조건을 붕괴시키는 것 처럼,
지질학적 행위자로서의 인간
만약 들뢰즈라면, 지질학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표상의 힘을 벗어난, 인간 이외의 힘들에 열려 있고, 이 힘들과의 만남과 연관 속에서 구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차크라바르티의 논의에서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 종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아닌 종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유한성의 의미에 대해서도 견해는 서로 다르다. 들뢰즈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 있고, 그것으로 열려 나가는 가운데 자각되는 것으로 유한성을 생각한다. 반면에 차크라바르티는 인간이 스스로 형성하고 발전시킨 생활 양식 자체를 유지, 존속시킬 수 없다는 곤란 내지는 한계라는 의미에서 유한성을 생각하고 있다. 200
2. 공존공간이란 무엇인가?
혼돈공간의 발생
세토구치 아키히사, <사람의 시간, 인간의 시간>
먼저 환경사 연구에는 두 가지 접근이 있다고 말한다.
" 하나는 자연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여, 인간도 그 일부라고 간주하는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접근이다."
인류세를 이 두 가지 접근의 "경계를 뒤흔드는 개념"으로 파악한다.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도식"에 매료된 사고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하고, "오히려 사람은 동적으로 변화하는 지구 시스템의 일부이다"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으로 파악한다. 201
차크라바르티의 사고와는 다르다. 그의 접근은 세토구치가 말하는 "인간의 태도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접근"의 하나이다.
세토구치가 인간을 "자연현상의 하나로서의 사람"으로 간주하는 근저에는 "인간적인 의미를 넘어선 자연의 물질성, 절대적 시간은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견해가 깔려 있다.
먼저 자연의 물질성이 인간적인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은 곧 인간에게 통제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자연의 물질성이 있다는 것이다.
세토구치의 인식의 독자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의 일치가 아니라 분리를, 그것도 자연에는 인간에 의한 의미 부여를 거부하는 타자성이 있다는 생각을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요켠대 자연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203
세토쿠치의 이러한 인식이 2011년 3월 11일 이후 원전사고를 둘러싼 정세를 거치면서 명확해졌다고 밝혔다. 원전사고가 제가한 문제는 과학기술 시스템의 통제 불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일반적으로 기술의 실패로 이해되어 왔다.
세토구치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는, "인공물과 자연의 운동, 휘말리는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사태를 볼 것을 제안한다.
워전 사고에서는 인공물과 자연의 경계가 무너지고, 양자가 혼재된 혼돈의 공간의 열리기 때문. 그리고 인간은 이 혼돈의 공간 속에 휘말리고 있다. 인공물 쪽에 즉 자연을 제어하는 쪽에 있어야 할 인간은, 인간만으로 자기완결된 공간 밖으로 나가 버린다. 게다가 그곳은 이른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다. 인공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경계의 균열에서 분출되는 혼돈 공간이다.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