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축의 시대 (2)

백_일홍 2023. 11. 22. 19:15

축의 시대 (6장~10장)

 

카렌 암스트롱

 

목 차

 

머리말 -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1장 축의 시대 문명 벨트(기원전 1600년∼900년경)
조로아스터, 선과 악의 대결
인도에 정착한 정복자 아리아인
요·순·우, 의로운 통치자의 시대
전쟁하는 신성한 신 야훼

2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기원전 900년∼800년경)
암흑의 400년을 견뎌낸 아테네
최초의 유일신 숭배자 엘리야
하늘의 도(道)를 따르는 지상의 삶
아트만, 내 안의 진정한 나

3장 자아의 발견(기원전 800년∼700년경)
분노하는 야훼의 대리자 이사야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 영웅들의 자기 중심주의
춘추시대,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숲으로 간 현자, 영적 탐구의 선구자들

4장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기원전 700년∼600년경)
인간 내면의 정복, 《우파니샤드》
로고스, 그리스 영웅 시대를 끝내다
혼란한 시대 삶의 모델, 군자(君子)
‘책의 종교’ 유대교의 탄생

5장 고난의 시대(기원전 600년∼530년경)
추방당한 자들의 트라우마
아테네의 솔론, 정치를 발명하다
상키아, 인류 최초의 무신론
흔들리는 예(禮), 무너지는 도(道)

6장 공감의 발견(기원전 530년∼450년경)
공자, 인(仁)의 나라를 찾아 떠나다
고난의 길에서 태어난 일신교
그리스 민주주의를 연 이성의 힘
자이나교, 비폭력과 불살생의 극한

7장 사유의 혁명(기원전 450년∼398년경)
에즈라의 닫힌 길, 요나의 열린 길
땅으로 내려온 철학, 삶을 정화하는 비극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혜를 가르친 앎의 교사
묵가, 급진적인 공감의 사상
고타마 싯다르타, 무아의 발견자, 마음의 혁명가

8장 철학의 모험(기원전 400년∼300년경)
혜자의 역설, 장자의 무위, 맹자의 자애
두려움에 떠는 전사들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동굴에서 나온 이데아의 탐구자, 플라톤
로고스의 건축가, 아리스토텔레스

9장 제국의 시대(기원전 300년∼220년경)
한비자·순자·노자의 도덕 군주론
헬레니즘, 문명을 만든 최초의 문명 충돌
《바가바드기타》, 축의 시대 마지막 위대한 노래

10장 축의 시대의 귀환(기원전 2세기~ )
천하 통일과 사상의 통합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
토라의 원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6장 공감의 발견

공자 인의 나라로 찿아 떠나다.

기원전 6세기말 노나라의 무정부상태에서 공자는 통차자들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유지하는 신성한 가치를 실현할수 없다면 자신있게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평민이 도를 세울수는 없었다.


공자는 정치적으로는 성공을 없었지만 실패했기에 공자는 생각할 시간을 얻었으며 영감이 넘치는 스승이 되었다.


공자는 외로운 금욕주의자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 이였다.


상아탑에 자신을 거두지 않고 다른사람과의 대화를 나누며 끊임없이 자신의 통찰을 발전시켰다.


공자는 축의시대의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하는일을 완전히 의식하기를 바라며 예의 수행은 어떤동작을 수행함에 아니라 심리적 영민함 감수성 상황에서 맞는 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예는 다른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라고 가르쳤다.
공자의 적은 매일  그대로 실천해야 할것이 있읍니까?
이마 배려일 것이다.
남이 나에게 하지를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마라.
예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발견하고 공자는 무슨일이  있어도 다른사람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것을 하지않음을 요구한다.


자신을 특별한 별도의 범주에 넣지않고 늘 자신의 경험을 타인의 경험과 연결시킬것을 요구한다
공자는 황금률은 초월적 가치였다.


예를 완벽하게  습득하면 그가 일이라 부른
것을 얻는길로 나아갈수 있었다.


공자의 새로운 평등은 오직 귀족이 예를 수행하였으나  누구라도 실행하면  모두 군자가 될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연 이성의 힘

아테네는 참주제를 폐지하고, 클레이스테네스를 시의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그는 재임기간(BC508~507년경)놀라운 민주주의 개혁을 했다.귀족지도자들의 권위를 악화 시키기 위해 고대부족체제를 완전히 재조직했다.


솔론의 400인회가 500인회로 불러났으며,구성원은 매년 중간계급(농민,장인,상인)에서 선출했으며,자기 시간의 1/10을 정치에 바치면서 새롭고,의미있는 방식으로 시민이 될 수 있었다. 500인회와 민회는 권력 남용에 이의를 제기 할 수 있었다.


 9명의 집정관은 상층계급에서 선출했고 아테네를 다스렸다.축제, 군대, 재판을 책임졌다. 귀족들의 원로회가 이들을 지휘했다.


아테네의 통치체제는 그때까지 고안된 가장 평등한 정체였다."이소노미아(평등한 질서)"라고 불렀다. 농부와 상인이 귀족과 좀 더 평등한 관계를 맺으면서 폴리스는 더욱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시기의 철학은 정치생활의 아곤(경쟁)적 특질뿐 아니라,평형과 조화에 대한 그리스인의 갈망도 반영했다.


최초의 상대주의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것이 맥락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불에 매료되었는데, 불은 경쟁하는 원소들 가운데 하나가 나머지 원소들을 지배하는 것으 f막아 질서를 유지하는 신성한 힘이다. 회의에서 의견 충돌이 폴리스의 평형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고, 변화와 안정은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을 하나라고 했다.


노파네스 철학자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가망없을 정도로 인간을 닮았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크세파네스 철학자는 신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위대한 하나의 신이 있으며,신은 모든 인간적 특질을 초월한다고 믿었다.


파르메니데스 철학자는 크세노파네스의 암울한 철학을 신성한 계시로 경험했다.


자신이 인류를 미망에서 해방시키는 가치있는 영적 봉사를 한다고 믿었다.우주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고,변하지 않고,창조되지도 않고, 불멸이라고 주장했다.그당시 사람들 다수는 파르메니데스 때문에 어떤 것도 건설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순수하고 단호한 실용적이고,효과적인 로고스는 BC5C초 해군 승리에 영감을 주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자 아레오파고스회의를 설득하여 함대를 건설하여 그의 전략으로 강력한 페르시아 함대를 물리쳤다. 이것이 살라미스해전이었고, 이 해전은 그리스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만일 아테네 시민이 오랜시간동안 논리적으로만 생각하고,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제거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테미스토클레스는 결코 아테네 시민들은 설득할 수 없었고, 전투에 이길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전략은 축의시대에 여러가지 가치를 보여 준다.


BC478년 100개 가 넘는 폴리스는 아테네의 지휘를 받아 동맹을 맺었고, 이동맹은 폴리스들 사이에 우애를 장려하려고 고안 된 것이었으나 진짜 목적은 아테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었고,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동맹의 유지의 의미가 없어졌고, 아테네는 계급들 사이에 새로운 마찰이 생기면서 다시 분열 도시가 되었다.


디오니 소스축제는 시민들의 자부심을 강력하게 과시하는 행사였다. 죄수들도 축데 기간에는 석방해 주었다. 축제 기간에 상영되는 연극은 축의 시대 자기 성찰을 반영하였다.축제는 공동체의 명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들의 문제와 곤경을 풀어 나갔다. 비극은 축의시대 영성의 특징인 제의의 내면화와 심화를 보여 주었다.한때 은밀했던 제의가 공개적으로 상연되었고, 제의는 민주화되었으며, 중심에 자리 잡았다.


비극 작가들은 폴리스보다 고통 받는 개인을 앞세우고 그사람의 고통을 분석하고,관객이 공감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축의시대 영성의 핵심에 이르렀다.그리스인들은 슬픔과 눈물을 함께 나누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귀중한 유대를 창조 한다고 믿었다. 개인들에게 그들의 슬픔에서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모든 인간이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타르시는 공감과 자비를 경험하는데서 얻을 수 있다.


그리스인은 종교는 여전히 그들 마음 속 더 깊고, 덜 합리적인 영역을 쥐고 흔들었다. 나름의 생명력을 지닌 신에게서 영향를 받는 독기에 사로 잡힐 수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종교를 경멸하고, 자신들이 폴리스의 합리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운명을  책임진다고 생각하며 오만이 새로운 독기를 만들었다.


그리스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자비로웠던 것은 아니다. 토론은 무례하고 공격적이었고, 법의 지배는 없었고, 시민이 판사와 배심원을 모두 맡았고, 피고와 원고의 투쟁이었다. 축의 시대 핵심 문제는 폭력이었다.


제우스법: 고난을 통해 배워라. 모든 삶이 사실 두카(괴로움, 불만족스런, 뒤틀려있는)다. 고통은 인간을 가르친다. 그래서 인간은 희망없는 것처럼 보이는 곤경을 넘어 설 수 있다.


교훈: 도시는 이 슬픔의 무게를 통합하고, 자기 내부에 드어와 받아 들이고, 폴리스의 신성한 핵심에서 그것을 존중하고,선을 위한 힘으로 만들어야 했다.

 

 

자이나교 비폭력과 불살생의 극한

야지나발키아 시대에는 논란이 되었던 카르마(행동)의 교리가 기원전 5C말 에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모두가 죽음과 재생의 끝없는 순환에 들어가 있다고 믿었다. 카르마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모습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것이 해피앤딩은 아니었다. 신조차도 유익한 카르마를 다쓰고 나면 지상에서 낮은 존재로 다시 태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관념이 자리 잡으면서 인도의 분위기는 변했고, 우울했다. 그들은 덧없는 삶을 계속 되풀이해야 하는 운명을 느꼈고, 좋은 카르마도 구원을 얻을 수 없었다.공동체를 둘러 보아도 고통과 고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우울한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사람들은 출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베다 제의는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베다 제의가 제시할수 있는 최선은 신들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만 고난과 죽음의무자비한 반복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것일 뿐  물질적 혜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라마나"의 제의학은 거부했고, "우파니샤드"는 최종적인 해방을 약속했지만 이 영성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베다 사상의 세세한 내용까지 꼼꼼히 잘안다는 전제였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요가는 모크샤(죽음과 재생에서 해방되는 것)을 제시했다. 요가 수행자는 전차를 모르는 사람이 훌륭한 말을 통제하듯이 정신과 감각을 통제 할 수 있다. 이런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주의 깊고 늘 순수하며, 죽음과 재생의 끝없는 순환으로 부터 해방된다 라고 했지만 요가는 모든 시간을 바쳐야해서 가장의 의무와 병행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해 대부분의 가장은 모크샤를 얻을 수없다고 생각해서 요가도 충분치 않다고 확신했다. 각 행동은 욕망으로 부터 일어났는데, 욕망없이는 아이도 낳을 수없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없이는 전쟁을 할 수도, 곡식을 기를 수도, 사업을 할 수도 없었다. 모든 행동은 의무를 낳았고, 이때문에 삼사라(윤회)의 냉혹한 순환에 묶였다. 해방을 찾는 유일한 길은 숲으로 나아가 의무가 전혀 없는 은자나 탁발승이 되는 것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출가자를 허약한 낙오자로 보지 않고, 용맹한 선구자로 존경했다.스스로 상당한 댓가를 치르면서 인류를 위한 영적 해법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이지역에 널리 퍼진 절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적 정복자인 지나(산스크리스토로'승리자')나 존재의 다른 영역으로 '깨어난' 붓다(산스크리스트로'깨달은 자')를 갈망했다.


인도 북부사람들은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정치 경제의 변화를 겪었고, 사회적 위기 때문에 영적 불안은 악화되었다.


BC6,5C되면서 영구적 공동체는 정착하여 진지하게 농업에 몰두했다.철기 기술이 도입되어 농부들은 부유해졌다. 정치적인 발전도 있었다. 군주제 통치와 오랜 씨족들의 원로 집합체 통치가 있었다. 이 통치는 토론에 의지하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흡사했다. 인도의 원로 집합체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새로운 나라들은 갠지스강 유역의 교역을 자극했다.


도로를 건설하고, 돈이 부의 상징이 되었으며 상인계급이 발달했다.


BC6C에 들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도시들이 갠지스 계곡 동쪽에 발달했고, 서쪽의 옛 베다 문명 중심지는 전체적으로 농촌이었다.권력은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베다 문명은 도시환경과 적합하지 않았으며, 이런 상황 전개로 타격을 받았다.왕은 사제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공화국은 브라민들을 무시했고, 전통적인 희생제에도 인색하게 굴었다. 동쪽 주민들은 교역과 농업의 개선이 베다의 제의 보다 훨씬 많은 부와 높은 지위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도시들은 전통에 순응하는 대신 개인의 창의와 혁신을 권장했다. 개인주의가 부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체성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부족적 정체성이 사라지자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빼앗기고, 허공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사회적 긴장은 도시화가 더 진전된 동부에서 특히 두드러졌으며, 바로 이지역에서 인도 축의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다.


도시거주자들은 농촌 사람들보다 변화의 속도를 더 의식하게 되었다.삶이 훨씬 더 덧없고 무상해 보였을것이고, 이것이 깊이 뿌리내린, 삶은 두카라는 믿음을 더 굳혀주었다. 전통적 가치는 무너져 내렸고, 새로운 길은 무섭고 낯설어 보였다. 삶은 공격적인 면이 훨씬 더 강해졌고, 공화국에서는 내분이 벌어졌다.왕국들은 능률적이고, 중앙집권화 되어 있었는데, 신민을 강제할수 있었고, 군대는 왕 한사람에게만 충성을 선언했다.왕이 백성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수 있다는 점이 혼란스러웠다. 탐욕은 경제 성장의 연료였다.베다 신앙은 당대의ㅣ 현실과 점점 멀어졌다. 불을 계속 피울 수도 없었고, 전통적인 가정 제의를 준수 할 수도 없었다. 농업과 교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가축의 희생제는 낭비이자 잔인한 행위로 여겨 졌다. 공적생활의 폭력성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다른 종교의 해법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출가자들을 돌아 보았다. 


이즈음 출가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숲에 동부 사회의내부에 BC6C에 학파들이 수도없이 등장했다. 자신의 다르마(가르침)가 죽음과 재생으로 부터 해방 시켜 줄것이라고 약속하는 스승 주위로 제자들이 몰렸다.제자들은 스승을 '붓다' '지나'라고 불렀을 것이다.인도는 구전사회였고, 기록된 경전이 없었다. 스승들은 시대의 경쟁적 분위기를 흡수하여 제자를 얻으려고 치열하게 다투었으며, 거리로 나아가 자신의 다르마를 설교했다.시장,시청,교외의 열대림이 무성한 공원에서는 사회의 모든 계급이 참여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새로 나타난 가르침에는 여러가지 공통요소가 있다.삶은 두카다. 자유로와지려면 금욕과 명상으로 행동에 이르는 욕망을 제거하라. 정교한 텍스트나 주석은 없었고, 다르마들은 어디까지나 실용적이었다. 길에서 만난 수도자들은 이렇게 물었다."지금 당신의 스승은 누구요? 요즘에는 어떤 다르마를 따르고 있소?"

마칼리 고살라는 스승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과묵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던 고살라는 종교적 숙명론을 설교했다. 고살라는 아지비카(삶의 길)라는 학파를 창립했다.옷을 입지 않고 음식을 구걸하고, 엄격한 식사규칙을 준수해서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기 몸에 강한 고통을 가했다. 등골 오싹한 다르마가 매우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이시기의 불안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말해준다. 고살라는 경쟁자들에게 격렬한 공격을 받았고, 왕들은 고살라에게 선물을 보내고, 아지비카 학파에게 땅을 기부했다. 아지비카 학파는 인도에서ad10c까지 살아 남았다.고살라는 특별히 효과적인 명상형식을 가르쳤는지도 모른다. 고살라의 스승은 지나트르푸트라였다. 이 스승은 옷을 입지않고, 금식했고, 잠이나 거처를  거부했다.

모크샤,해탈(죽음과 재생의 고통스런 순환에서 해방되는 것). 모크샤는 영적 생활의 목표이다. 제의의 실행이 아니라 내적인 앎에서 탐구로만 얻을 수 있다.

고살라는 지나트로푸트라와 여행을 떠난 뒤 6년 뒤에 모크샤를 얻었다고 선언하며 스스로 영적 정복자라고 불렀다. 고살라는 마하비라의 영적 우월성을 질투하기도 했지만 죽을때 마하비라가 진정한 스승이라고 인정했다.

마하비라는 초기에는 아지비카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가르침을 발전시켜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영혼(지바) 즉 내부에 살아있는 실체가 있는데, 이것은 빛이나고, 행복하고, 지혜롭다. 그러나 동물,식물, 물, 불, 공기 심지어 바위와 돌에게도 지바가 있다. 불살생을 특징으로 한다. 그들은 이전 삶에서 쌓은 카르마에 의해서 현재의 존재에 이른다. 인간은 자신과 같은 피조물을 해치지 않을때에만 모크샤를 얻을 수 있다.마히비라에게 해방은 비폭력적이다.

자이나교
마히비라는 크샤트라였다. 마히비라의 추종자들은 자이나 교도라고 알려졌다. 그의 다르마는 정복자의 길이 되었다.자이나교의 다르마는 비폭력에 헌신하면서  종종 군사적 이미지를 이용했다. 자이나교의 금욕주의는 자신의 호전적인 본증과 싸우고,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의 특징인 공격성이 불러오는  나쁜 결과를 막아내는 전사였다.금욕주의자는 아힘사의 삶을 통해 전장의 병사와 마찬가지로 자신,가족,교단에 영광을 안겨준다. 자이나 공동체는 '지아' 즉'부대'라고 불렀다. 자이나교도가 되려면 용기,결의,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태도가 필요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의 표시였다.마히비라 만큼 아힘사(불살생)라는 이상을 가차없이 일관되게 추구한 사람은 없었다. 아힘사가 없으면 다른 모든 윤리적 실천은 소용이 없었으며,아힘사는 자이나교도가 모든 피조물과 공감 할때에만 얻을 수 있었다. 자이나 교도는 겉으로 보기에 생명이 없는 존재도 영혼이 있으며,고통을 느낄 수 있고, 살아있는 피조물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은 수준에서 깨달아야 했다.자이나교도는 이런 진리를 의식해주는 고행 프로그램을 거쳤다.다르게 행동 함으로써 자신의 관점이 바뀐다는 것을 알았으며,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자이나교도는 만물을 향아여 적극적인 자비의 태도를 계발해야했다.자이나 교도는 거짓말을 안할 뿐 아니라 불친절이나 짜증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말도 신중하게 해야했다.자이나교의 맹세는 경계하고 주의하는 태도를 기르려고 고안되었고, 도둑질을 안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소유할 수가 없었다.모든 존재가 자기자신의 신성한 영혼,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불을 피우지도 못하고, 땅을 파지도 못하고, 쟁기를 갈지도 못했고,거른 물만 마셔야 했고, 걸음을 걸을때 마다 주위를 살펴야 했고, 생각없는 움직임은 피해야 했다.마히비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이나교도는 우선'세상의 지식'을 얻어야 했다 그래야 모든것에 신성한 생명력이 있음을 이해 할수 있었다.이렇게 세상의 지식을 얻으면  그다음에는 '세상에 자비'를 길러야 했다.그들은 자신들의 관행을 엄격하게 따르면 초월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경험 많은 자이나교도는 ;사마이카(평정);라는 명상의 상태 비슷한 것에 이를수 있으며이 상태에서는 지상의 모든 피조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자신의 온 정신으로 알았다.동시에 만물을 향하여 똑같은 호의를 느꼈다.


새로운 이상은 단지 폭력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가없는 친절과 자비를 키워 나가는 것이었다." 저는 모든 생물에게 용서를 구합니다.모든 피조물이 저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제가 모든 피조물과 우정을 나누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적의를 품지 않게 해주소서"그들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7장 사유의 혁명
기원전 450-398년경

"고통, 슬픔, 절망은 두카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에 어쩔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것도 괴로움이며, 사랑하는 일과 떨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고타마는 욕망들이 차례차례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차지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자신이 끊임없이 뭔가 다른 것이 되기를 갈밍하고, 어딘가 다른 곳에 가기를 갈망하고, 자기에게 없는뭔가를 얻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타마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의 본질은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뭔가 다른 것이 되려고 결정한다. 세상은 변화에 좌우된다.


세상은 변화의 과정에 사로잡혔을 때만 행복하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이런 사랑에는 두려움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두려움 자체가 두카다." 

에즈라의 닫힌 길, 요나의 열린 길 

이스라엘에서는 축의 시대가 끝이 나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예루살렘은 페르시아 제국의 눈에 띄지도 않는 모퉁이에 있는 망가진 작은 도시였다.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이 지역의 수도인 바빌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추방을 당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이제 세게사의 중심에 있기는 커녕 눈에 띄지도 않은 곳에서 살았다. 새로운 종교적 전망을 탐색하는 일보다는 생존 투쟁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419

사실 축의 시대의 종말을 알린 것은 완강하게 배타저거인 태도였다. 기원전 445년경 예루살렘에는 페르시아의 대리인인 새로운 총독, 느혜미아가 임명되었다. 

느혜미야, 시민들과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협력하여 불과 52일만에 새로운 성벽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귀환자들의 공동체인 '골라'와 이웃들의 관계가 몹시 악화되어 상당히 위험하기도 했다. 420

느혜미야는 기우너전 432년경 시작된 총독 2차 임기 때 골라 구성원이 현지 주민, 심지어 추방당하지 않은 이스라엘 주민과 결혼하는 것마저 금지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421

에즈라는 사람들에게 외국인 부인을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결국 부녀자들은 골라에서 추방을 당해 함 하아레츠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될 자격은 바빌로니아로 추방을 당했던 사람들의 후손과 예루살렘의 공식 법전인 토라에 복종할 각오가 된 사람들로 한정되었다. 

고난과 지배가 방어적인 배제를 낳은 셈인데,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 펼쳐지는 축의 시대 정신에 낯선 것이었다. 423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에 성경이 편찬되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더 포용적인 전통도 등장했다. 어떤 인간도 불결하지 않다고 주장한 P(사제 저자)의 전통이 모세오경의 앞쪽 세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을 지배했으며, 그 결과 <<신명기>> 저자들의 배타적인 전망을 제한했다. 

<<요나>>에는 야훼가 헤브라이의 한 예언자에게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 왕국을 파괴한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를 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다 나온다.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첫 단게가 끝이 났지만, 앞으로 마지막 장에서 보게 되듯이, 두번째 개화기, 랍비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 통찰에 기초를 두고, 황금률과 '양보', 공감,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는 영성에 기초한 신앙을 창조하는 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424


땅을 내려온 철학, 삶을 정화하는 비극

기원전 446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30년간 휴전을 하기로 하고, 둘이서 그리스 세계를 나누어 가졌다. .. 많은 아테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취약하다고 느꼇다. 피지배 폴리스들이 그들의 거만한 통치에 분개하고 있다는 냉옥한 현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과도하게 확장된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마라톤 전투 뒤에 태어난 이들은 쉬은 승리밖에 몰랐다.  이들은 기원전 430년대에 도시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새로운 사상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파르메니데스, 우리의 감각 증거에도 불구하고 만물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제자 제논의 날아가는 화살. 

시칠리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네 가지 원소(물, 불, 공기, 흙)은 실제로 변하지 않지만, 움직이면서 결합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아낙사고라스, 맨눈으로 볼 수 없지만 모든 물질에는 다른 모든 물질이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어떤 물질이든 존재하는 만물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얼마든지 다른 모든 것으로 바뀔 수 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 했다. 이것을 '누스(nous, 정신) 이라고 불렸다. 이 우주의 지성을 신성했지만 초자연적이지는 않았다. 물질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비인격적인 자연의 힘들이 나서서, 그 과정은 안내자 없이 계속 진행되었다. 

데모크리토스, 빈 공간을 질주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은 입자들을 상상했다. 이것을 '원자'라고 불렀다. 원자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존재 형태를 창조한다. 427 

엠페도클레스는 '사랑'과 '싸움'이라는 두 힘의 우주적 투쟁을 상상했는데, 이것은 전자기나 빅뱅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논리학자들은 상식을 무자비하게 부수어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과학은 이런 식으로 공중을 계속 혼란에 빠뜨렸다. 

아낙사고라스는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는 태양은 돌이고 달은 흙덩어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천체는 선이 아니라 붉게 달아오른 바위였다. 사람들은 천체를 섬기는 대신 피해야 했다. 이런 이야기는 아테네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아테네에는 새로운 지식인 그룹이 등장하여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철학을 세상과 더 관련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햇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과학자들 만큼이나 괴로움을 주는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소피스트('지혜로운 사람')라고 불렀다. 

절대적 진리는 절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생각이 주관적임을 깨달으면, 적어도 미망에 빠질 일은 없었다. 

소피스트들은 앎을 소수 엘리트의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해방을 향한 욕망, 자율성, 개인주의, 보통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 등 축의 시대의 여러 주제를 건드렸다. 그러나 기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지금가지 그리스인은 요가 수행자들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욕망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지닌 잠재력은 강하게 느겼지만, 이 잠재력을 실현했을 때 나타날 결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스인은 자신의 가능성보다는 현재의 존재에 집중했다.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주로 '테크네' 즉 지금 이곳에서 더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기술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소피스트들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테크네는 원치 않았다. 그저 제자들의 세속적 기술 수준을 높이기를 원할 뿐이었다. 

소피스트들은 소유를 포기하기는 커녕 돈을 버는 데 열심이었다. 일부는 수사학이나 설득의 기술도 가르쳤다. 

소피스트들은 불안이 깊어지는 시대에 체계적인 의심을 가르쳣다. 그들은 널리 여행을 했다. 그들은 다른 문화의 다른 관습 또한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결과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로타고라스, 
한 사람의 진리는 이웃의 진리와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오류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인식은 그 사람에게는 타당하다. 개인은 자신의 인간적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 초월적 권위는 없으며, 인류에게 자신의 과넘을 강요할 수 있는 최고신은 없다. 433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는 둘다 아테네에서 (불경죄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새로운 회의주의는 그대로 남아,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다. 이 비극들은 신에 관하여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선한가? 그러지 않다면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에우리피데스는 신을 와전히 배격한 것은 아니다. 고대의 이야기들에 무자비한 질문을 던져 새로운 신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우리 각자의 누스(nous, 마음)가 신이다." 라고 주장했다. 435

431년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이전의 영웅들과 달리 메데이아는 신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거서이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절발한 고로스에 따라 움직인다. 435

논리의 구사는 비극의 카타르시스(정화)에서 핵심이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대로 추론하는 능력'이 연민이라는 정화의 감정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시민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가' 다른 관점을 향해 움직이는 엑스타시를 배웠다. 청중은 이성 덕분에 자신의 공감을 얻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느끼게 되었다. 에우리피데스는 '타자', 심지어 이루말할 수 없는 행동을 한 메데이아나 헤라클레스 같은 사람들을 향해서도 감정적으로 손을 내미는 비극적 전통을 이어갔다. 436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혜를 가르친 앎의 교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질질 끌고 잔혹 행위가 잇따라 일어나던 기원전 420년대에 새로운 철학자가 아테네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앎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입관을 해체하고 그들이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진짜 앎은 간접적으로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전 자아가 관련되는 괴로운 투쟁끝에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 생활을 살펴 내부의 진실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441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로 묘사했다. 자신과 대화를 하는 사람 내부에서 진리가 태어나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철학적 탐구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도 대화 상대로부터 인간의 무지에 깃든 창조적 심오함을 제대로 인정하는 진리의 순간을 끌어 내려 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앎은 덕과 떼어놓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용기, 정의, 신앙, 우정 같은 것들이 비록 정의는 제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공허한 허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뭔가 진정하고 진짜인것, 그러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 바로 너머에 신비하게 놓여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확신했다. 

앎은 곧 도덕이었다. 선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올바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우주에 관한 심오하고 난해한 이론을 펄치는 것이 아니었다. 철학은 사는 방법을 배우는 문제였다. 세상에는 왜 그렇게 악이 많은가? 그것은 사람들이 삶과 도덕에 관하여 적절한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가 얼마나 깊은지 인식한다면, 행동하는 방법을 더 잘 알 수 있을 터였다. 443

소크라테스의 주된 관심은 선임을 알 수 있다. 이 '선' 개념은 공자의 '인'과 다르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로고스를 엄격하게 사용하여 인간 생활에 핵심적이라고 여기던 초월을 발견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각의 한계에 연거푸 마주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소피스트들은 이 무지로부터 실용적인 행동으로 피신햇던 반면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삶의 깊은 신비를 드러내는 엑스타시스로 경험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에 반드시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래야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진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고 그릇된 의견을 넘어서서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하게 해주는 완벽한 직관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었다. 

"검토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의미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soul)'(프시케)의 배반이었다. 프시케의 발견은 소크라테스와 플리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로 꼽을 만하다. 아트만과 달리 프시케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었다. 프시케는 개인의 탄쟁 이전부터 존재하며,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다. 영혼 덕분에 인간은 추론을 할 수 있고, 선을 찾을 수 있다. 영혼의 게발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우리는 보수를 해서도 안되고 상대가 어떤 악을 저질렀건 누구에게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복수를 신성한 명령으로 여기는 그리스 관습에서 극적으로 멀어지는 길이었다.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친구이건 적이건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게 행동하는 것이 영혼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445

모든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도취된 것은 아니었다. 이 불안과 전쟁의 시기에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깊은 곳까지 흔들리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과민하게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확실성을 원했다. 

기원전 423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이 희곡은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에 깊은 불편함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기존의 의견을 무자비하게 박살내는 것과 소피스트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사람들에게 제우스 대신 구름을 섬기라고 가르쳤다. 

이 무렵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에 직면했다. 이 임박한 파국이 철학자들의 반종교적 태도에 신들이 내린 벌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신성 모독으로 여겼다. 이제 불안은 히스테리로 바뀌어 갔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이 죽음. 
국가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신들을 도입하고, 젊은이들을 부패시킨 죄. 


묵가, 급진적인 공감의 사상

공자의 죽음이후, 중국은 혼랍스럽고 무시무시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결정적인 이해기였다. 기원전 453년 세 가문이 진의 제후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서, 진의 영토에 한, 위, 조의 세 나라(3진)를 만들었다. 이 순간부터 크고 강한 나라들이 중국의 독점적 지배를 위한 필사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남쪽의 초
서쪽 산시의 호전적인 국가, 진 
부유한 해양 왕국, 제 
북부 초원 지대, 연 

기원전 221년 진이 통일을 이루어 이런 투쟁이 끝이 났을 때, 중국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지적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455

이 실용주의 시대에 통치자들은 공자를 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점점 협객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전국시대에 협객 가운데 많은 수는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그들은 적절한 보상만 있으면 어느 부대에서라도 싸울 준비가 된 용병이었다. 좀더 귀족적인 유생들과는 달리 그들은 호전적인 행동형 인간들이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에 협객 가운데 한 명이 이런 호전성에 등을 돌리고 비폭력의 메시지를 설교했으니, 그가 묵자다. 묵자는 180명으로 이루어진, 엄격한 규율을 갖춘 공동체를 이끌었다. 종파외 비슷했다. 규칙이 엄격했으며, 매우 평등주의적인 윤리를 축했고, 구성원들은 농민이나 장인처럼 검은 옷을 입었다. 묵가 협객들은 용병으로 싸우는 대신 전쟁을 막으려고 개입했으며, 작고 약한 나라의 도시들을 방어했다. 

묵자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조정에서 조정으로 돌아다니면서 통치자들에게 매우 톡창적인 사상을 설파했다. 

묵자는 귀족이 위엄과 지위에 집착하는 것을 못 견더했다. 그는 지출의 균일한 통제, 사치와 억제, 지기 계급의 소박한 에토스를 반영한 사회를 원했다. 459

전쟁에 끌려나가 싸우고, 강제 노역에 동원되고, 중과세 때문에 궁핍해지는 농민들의 곤경에 심한 괴로움을 느꼈다. 집, 옷, 안전이라는 그들의 기본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중요했다. 묵자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지배 계급의 타도를 원하지 않았다. 

묵자의 메시지는 공리적이고 실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유토피아의 꿈을 키웠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철학을 꿰는 하나의 실은 인이었따. 그러나 묵자는 공자가 이 자비의 윤리를 가족에 한정하는 바람에 왜곡이 생겼다고 믿었다. 묵자의 관점ㅇ서 볼 때 귀족의 씨족 정신이야말로 가족 지상주의, 지위를 향한 경쟁, 복수, 엄청난 사치 등 당시 많은 문제의 뿌리였다. 묵자는 친족 이기주의를 전체를 향한 이타주의로 대체하고 싶었다. 

끔직한 전쟁에서 중국인이 서로 죽이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겸애를 실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겸애, 묵자는 중국인이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애정과 친절한 마음을 지니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감정보다 정의에 관심이 있었다. 애는 의도적으로 계발된 박애의 태도다. 모든 사람, 심지어 특히 자신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겸애는 공정, 공평한 감각과 모든 인간에 대한 예외 없는 불편부당한 관심에 기초를 둔다. 
통치자들이 겸애를 지니지 않으면 그들은 군대를 소집할 것이다 . "세상의 재난, 강탈, 원한, 증오가 일어나는 이유는 모두 겸애가 없기 때문이다."

묵자의 황금률은 공자의 것보다 더 급진적이다. 
공자(가족 안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 집단적 자기 중심주의로 타락할 수도 있어. 

겸애는 바로 비폭력으로 이어진다. 묵자는 '비공'이라는 제목이 붙은 장에서 전쟁의 해택과 비용의 차이를 세심하게 따져본다. 묵자는 자기 방어를 위한 전쟁은 허용했다. 그러나 묵자 자신은 엄격한 평화주의자였을 것이다. 그는 모든 폭력에 반대했으며 대평원의 모든 나라를 삼키기 시작한 전쟁의 순환을 깨도록 통치자들을 설득하려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녔다. 463

묵자는 자신의 전망을 열 개의 테제로 요약했다. ... 사람들의 행동은 운명에 의해 결정될까? 
-> 아무도 '운명'을 본적이 없다. 따라서 유가로 하여금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게 만들었던 결정론은 현자에게는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 464


고타마 싯다르타, 
무아의 발견자, 마음이 혁명가

고타마는 처음에 바이샬리에서 당대 최고의 요가 수행자 가운데 두명인 알라라 칼라마와 아달라카 라마푸타와 함께 공부했다. 고타마는 곧 황홀경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스승들은 기뼈했다. 그러나 고타마는 그들이 이런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상키아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일단 정신이 이런 최고 경지에 들어가면 푸루샤(자아)를 자연의 굴레에서 해방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고타마는 평생 형이상학적 교의에는 회의적이었다. 이런 황홀경은 자신의 힘으로, 요가의 전문 지식에 따라 만들어낸 것임을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것이 절대적이고 스스로 존재하는 푸루샤일 수 있겠는가? 나아가 자시 자신으로 돌아가보니 진정한 변화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탐욕을 느기고, 갈망하는 자아였다. 니르바나는 일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470

인도의 다른 현자나 신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붓다도 인격화된 신이라는 발상은 너무 제한적이라고 생각햇다. 붓다는 늘 지고의 존재를 부정했다. 감독하는 권위적인 신 또한 깨달음을 방해하는 도 다른 버팀목이나 족쇄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79

니르바나를 얻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아나타('무아')라는 독특한 불교 교리에 관한 명상이었다. 붓다는 영원한 자아(아트말, 푸루샤)가 최고의 실재라고 믿지 않았다. 482

붓다에게는 세계 창조나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이론이 없다. 붓다는 그와 관련된 토론을 거부했다. 왜? "... 평화와 니르바나에 대한 직접적 지식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우주에 관한 문제로 계속 그를 귀찮게 하면서 요가와 윤리적 실천을 제대로 하지 않는 한 수도승에게 그가 부상을 입고도 자기에게 활을 쏜 사람의 이름과 출신지를 알기 전에는 치료를 받지 않으려는 사람과 같다고 말했다. 485

붓다는 소크라테스와 공자와 마찬가지로 가를 야스퍼스가 '인격의 모범'이라고 부른 사람이되었다. 488

붓다는 인간 본성의 새로운 잠재력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 고통의 세계에서도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물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이 자기 중심주의의 뿌리를 잘라버리면, 자신의 능력의 정점에서 살고, 자신의 존재 가운데 평소에는 잠들어 있던 부분을 움직일 수 있다. 489


8장 철학의 모험

기원전400년~300년경

1.혜자의역설, 장자의 무위,맹자의 자애-중국


1) 중국의 시대적 배경
기원전4세기에 중국의 경제와 정치는 놀라운 속도로 변화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제후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원정에 들어갈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상업경제를 장려했다.


기원전5세기에 중국인은 철을 주조하는 법을 발견했으며, 강력한 철제도구로 방대한 삼림지대를 개간할 수 있었다. 기원전 4세기 말에도 웨이허 계곡, 청두분지, 중원은 계속 개간되었다.


수확량이 늘고, 전쟁 중에서도 인구는 증가했다.
경제의 호황은 불평등을 심화하고 심각한 사회적 분열을 일으켰다.


P496 기원전 4세기 중반에 철학이 나오는데 이를 양자에게서 나왔다고 말했다

2) 양가
양자는 유가와 묵가에 직접적이고 곤혹스러운 도전을 했다.


양가는 인(仁)즉“모든사람에 대한관심‘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은 ’모든 사람은 각자라는 것이다‘ 양가의 철학은 유가가 보기에는 터무니 없이 이기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양가는 다른 사람의 일이나 제도에 개입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주장했다. 최고의 의무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일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양가는 인간본성에 관여하지 말고 하늘이 세워놓은 도만 따라야 했다.

3)혜자(묵가)
유가에 반하는 이러한 양가의 주장에 대해 꾸준한 질문과 토론이 이루어짐(변증법)
중국인들은 자기 성찰을 발견했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자신들 나름의 명상법을 개발했다.
중국명상은 기의 관리에 기초를 둔다.


P498
기는 서양어로 번역이 어려운데 삶의 원료이며, 삶의 기초에너지이고, 삶의 원초적 정신이다.
기는 모든 존재에 생명을 주며, 만물에 독특한 모양과 형식을 부여한다. 실재의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토대인 기는 데모트리토스의 원자와 다르지 않으나, 다만 더 신비할 뿐이다. 궁극적인 제어력인 도의 인도를 받아 기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조합으로 축적되어 바위, 식물, 인간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런 피조물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 결국 기는 흩어진다. 사람이나 식물은 죽고, 바위는 해체된다. 그러나 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기는 쉼 없는 변화의 솥 안에서 계속 넘실거리며, 결국 다시 모여서 또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따라서 우주 만물은 강도는 달라도 똑같은 생명을 공유하게 된다.

p499 초기의 변증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혜자(기원전370~309?) 본명은 혜시였다.


p500 혜자는 말은 사물이 영속적이고 견고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p500~501)

p502
4) 장자
장자는 변증법이 너무 편협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혜자는 묵가였다. 그러나 유가도 옳을수 없는가? 장자의 관점에서 볼 때 철학자들이 말다툼을 하고 점수를 따는 것은 순전한 자기중심주의의 발로였다. 도(道)는 옳고 그름, 참과 거짓에 관한 인간의 제한된 관념 너머에 있었다.


장자는 ’다스리지 않음(無爲之治)을 믿었다. 사람들에게 인간이 만든 법칙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일이었다. 그것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서 짧게 줄이거나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거나, 소의 코를 뚫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p503
장자는 이제 양가의 신조가 착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양자가 가르친 대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는 파괴하고 파괴를 당하고, 먹고 먹히는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파괴와 사멸이라는 무한한 과정에 적응하지 않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p504
모든 것이 유동적이며 늘 다른 뭔가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동결시켜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천도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다. 생명은 무한한 변화로부터 차단되어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것이 되려는 시도는 우주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어긋나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완전히 파악한 뒤 환희와 더불어 자유를 느꼈다. 그는 이제 죽음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무한히 보전하려는 노력은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은 낮과 밤처럼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죽어서 ‘장자’이기를 그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늘 본질적으로 자신이었던 상태-우주의 가없이 변하는 매트릭스의 아주 작은 한 부분-를 유지할 터였다.


p511
장자의 깨달음은 붓다의 깨달음과 달랐다. 그 깨달음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자는 영원한 황홀경에 사로잡혀 걸어 다닐 수 없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사물을 분석하고 구별을 할 수박에 없을 때도 있었다.~중략


p512
그는 구태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위하는 길을 찾는다. 큰 앎을 가졌다는 것은 이미 자의식 없이 자비를 베푸는 기술을 획득한 셈이기 때문이다.

6)맹자
p515
전국시대의 군주들은 요순 같은 특별한 재능은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이타주의는 모방할 수 있었고 모방해야 했다. 공자는 인을 정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맹자는 거기에 분명하게 좁은 의미를 부여했다. ‘자애’였다. 그는 묵자의 ‘모든 사람을 향한 관심’을 불신했다. 이런 일반화된 호의는 사회의 핵심을 이루는 가족의 유대를 훼손할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심이 가족에 머물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맹자는 선왕에게 그의 가족 가운데 나이 든 구성원들을 정중하게 대하는데서 시작하라고 말했다. 이런 존경의 습관을 익히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다른 가족의 나이 든 사람들에게로 확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자신의 모든 백성을 자애심으로 대하고 백성을 기쁜 마음으로 그의 통치에 복종할 터였다.


2. 두려움에 떠는 전사들의 서사시(마하바라타)--인도--
1) 배경
중국에서는 축의시대가 늦게 출발했지만, 다른지역에서는 쇠퇴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이 점은 인도의 위대한 서사시<마하바라타>에서 분명하게 볼수 있다.


이 서사시는 크샤트리아 전사계급의 에토스를 반영한다. 축의 시대의 종교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왕이나 전사는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하여 싸우거나 죽여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이행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아힘사(불살생)이라는 이상을 존중할 수 있는가?

p528
서사시 내내 유디슈티라는 필사적으로 외친다. ”크샤트리아의 다르마보다 더 악한 것은 없다.“ 전쟁은 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피의 희생제가 아니었다. 잔혹한 행위였다. 이 서사시의 이야기는 폭력이 더 큰 목력을 낳으며, 불명예스러운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p530
유디슈티라는 15년 동안 다스렸지만 그의 삶에서는 빛이 사라졌다. 그는 크샤트리아에게 주어진 폭력의 소명을 자신의 마음에서 발견한 아힘사나 동정심의 다르마와 도저히 일치 시킬 수 가 없었다. < 마하바라타>에서는 전사의 소명을 옹호하고 싸움과 죽임을 기뻐하는 구절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의심은 남아 있다. 이서사시는 축의 시대의 영성이 인도의 보통사람들을 불안하게 뒤흔든 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림보로 밀려들어간 느끼믈 받았다. 그들은 세상의 다르마에 묶여 있기 때문에 출가자나 요가수행자들에게 가담 할수 없었다. 그러나 낡은 베다 신앙은 자신을 지탱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3. 동국에서 나온 이데아의 탐구자, 플라톤-그리이스-

p532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플라톤은 공자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자가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공적인 정책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믿었다. 이상적으로 보자면 철학자는 사람들을 직접 다스려야 한다. 플라톤은 붓다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아고라로 돌아가 그곳에서 인류의 개선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536
플라톤은 독특한 주장을 하여 소크라테스의 길에서 벗어났다. 그는 덕이 일상생활에서 행동의 사례들을 축적하여 구축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덕은 독립된 실체였다. 물질 세계보다 높은 수준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였다. 선, 정의,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다. 그것은 보거나 듣거나 만줄수 없다. 다만, 모든 인간의 영혼(프리케)에 존재하는 추론의 힘으로 파악할수 있다. 우리의 물질 세계의 모든 것에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형상(이데아)이 있다. 용기,정의 크다는 느낌, 심지어 탁자도 마찬가지다. 강둑에 서 있을 때 우리 앞에 있는 물을 웅덩이나 바다가 아니라 강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에 강의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은 그 나름의 고정된 존재 또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와 관계가 없고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나 본질하고만 관계가 있다. 이런 존재나 본질은 본래 그들 자신의 것이다.”

p541
우리 현대인은 생각을 무언가 우리가 하는 릴로서 경험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생각을 정신에 일어나는 일로 보았다. 사고의 대상은 그것을 보게된 사람의 프시케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잴재였다. 이런 아름다움의 비전은 단지 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일단 그것을 경험하면, 아주 깊은 정신적 변화를 겪어 초라하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더는 살수 없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앎을 얻은 사람은 “단지 선의 반영된 이미지가 아니라 진정한 선을 낳는다. 반영된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접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엇다. ” 진정한 선을 낳고 양육했기 때문에 신의 사랑을 받는 특권을 누릴 것이며,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라면, 그 자신이 불멸이 될 것이다. 플라톤의 아름다움 묘사는 다른사람들이 신이나 도라고 불렀던것과 매우 유사하나.

p550
플라톤은 이렇게 오래된 종교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종교가 철학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5. 로고스의 건축가,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념의 세계과 물질 세계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어떤 것은 진실로 영원하고 신성했으며, 소멸하는 대상들보다 우월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기은 매우 어려웠다. 우리의 감각 너머에 존재하기 땜분이었다. 따라서 식물이나 동물의 구조처럼 우리가 파악할수 있는것에 집중하는 평이 더 나았다.

p554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eidos)“이란 감각의 영역 너머에 있는 영원한 질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각 물질 내부에 내재하는 구조였으며, 그 물질이 성숙해질때까지 진화를 통제했다. 각 사람이나 사물은 그것이 그 형상으로 성장하도록 추동하는 디나미스(dynamis)를 가지고 있었다. 도토리가 그 안에 떡갈나무가 될 ’잠재려‘을 갖추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변화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었다. 그것은 완성을 향한 보편적 노력을 상징했다.

p555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노에토(noeton,‘생각’)이 존재의 최고형태였던 것은 분명하다. 노에시스 노에세오스(noesis noeseos,‘생각하기에 관하여 생각하기)’야 말로 존재 그 자체였다. 그것은 만물의 기원이 었으며, 신의 감추어진 삶의 특징이었다.

p556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자(Unmoved Mover)’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다른 어떤 것의 작용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ㅆ다. 별을 비롯한 천체들이 변함없이 지구 둘레를 돌게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의 운동을 시작하게 만들었건 극 자체는 움직이지 않을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을 움직이게 한 더 높은 존재를 또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과의 사슬이 하나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을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신비한 직관을 통해 파악한 실재라기보다는 그의 우주론이 낳은 논리적 결과였다.


p557
철학자들의 신은 결국 더 분별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우스오티오수스(게으른신, 물러난 신 정도의 의미)로 여겨졌으며 영적인 탐구에는 쓸모가 없었다.

 

9장 제국의시대
기원전300년~220년경

한비자.순자.노자의 도덕군주론

기원전3세기가 시작되면서 
중국에서는 축의시대가 꽃을피웠다.
중국은 그리스인을 매혹시켰던 과학적.형이상학적.논리적문제들에 관심이없었다. 정치상황이 워낙심각해 그런쟁점들은 하찮아보였다.
그들이급하게 여긴것은 법과질서를 회복하는것이었다.


중국의철학자.도학자.신비주의자들은 그런목적을위해 통치의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했다.

法家
기원전4세기말에 道를 생각하는대신 이득과사치를 향한 욕망을 생각했으며 모든것을 돈이나 계약의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통치자들은 정치과학자들 ^^방법을가진자들^^에게 의지했다.


중국역사가들은 이들을 집단적으로 法家라고부른다.


기준.모델을뜻한다.


法은 벌을 뜻하는 刑 이라는 말과 짝을이룬다.개혁하기위해 엄한 벌을 주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법가는 법의구조를 저울에 비교하기를좋아했다.
사람들은 저울을 쓰려하지않는다.무게를 속일수없어 이익이되지않으니

한비자
(기원전280~233)
법가의 가장뛰어난 학자
흠없는도덕성을 갖추고 군주의최고의 이익을위해 흔들림없이 몸을바쳐야했다.


한비는 왕이 도덕의 모범이 되는것은 거의 불가능한일  임을 알았지만 효율적인체계를 세워 보통사람이 유능한통치자가 되도록 돕고싶었다.


군주는 공평하고 이기적이지 않아야하며 필요하다면 친구와친족을 벌하고 적에게 상 을주어야한다.

순자
(기원전300?~230?)
한비의 스승
정열적이고 시적이면서도 매우 합리적인사상가
다른 철학자들의 통찰을 자신의 유가적 전망속에 통합하여 강력한 종합적사상을 이루어내려했다.


도교사상에서 깊은영향을 받았다.


자비심있는 왕 만이 평화와질서를 회복할수있다고믿었다.


순자는 행동주의자였다.
조정의직책을 갈망했으나
질시와모함으로 제나라를 떠나
기원전255년에 주나라로옮겨갔고
재상이. 지방수령으로 임명했으나
재상이 암살을당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 죽을때까지 자신의학설을 정리하는데 힘을 쏟았다.


순자는 맹자와달리 인간본성은 善이아니라 惡 이라고 믿었다 


모든사람은 질투와 증오의감정을 품고태어나며 그런감정에 빠져들면 폭력과 범죄로 나아가고 충성과믿음은 모두사라진다.


善은 의식적인 노력의결과이다.
교육.의중요함
존경.예의.양보.의 禮를 만들었다.

텅비고 한결같고
통일되고 고요한정신을 강조한
순자는 장자와 일치한다.

노자의 도덕경
무명과 무욕을 주제로 글을 쓴저자 노자에관해 알려진바가없다.


어쩌면 그가 바라던것이었는지모른다.
노자는
숭고한것에는 이름이 없다고 말하고 이름이있는것과 이름없는것이 같은출처에서 나왔다고말한다.

^큰 괴로움이 있는 이유는 나에게 자기가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자기가 없으면  무슨 괴로움이 있겠는가?
따라서 세상을 자기처럼 존중하는사람에게 맡겨질것이며 세상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넘겨질것이다.

헬레니즘,
문명을 만든 최초의 문명충돌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333년에 
페르시아제국을 정복했다.
폭력과 무자비함으로 그의 제국은 공포에기초를 두었지만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통일의 비전을 품었다.


323년에 바빌로니아에서 요절후
그의제국은 무너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정복한것아니라
실제로 거기에도착했듯이 인도사람들에게 거의영향을 주지못했다.


인도에서 2년간 보내면서 축의시대 의 많은 현자들처럼. 늘 더많은것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는 알렉산드로를 사제와 학자를 죽이고 신성한 불을 수도없이짓밟아 그는 저주받은자 적대적인 영혼으로 기억한다.

코스모폴리스(세계도시)
그리스인은 상인.용병.대사로서 세계여행자가 되었다.


많은사람들은 근동에 새 폴리스를세웠다.
알렉사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인을 사메리나에정착 시켰으며 나중에 그리스이주민은 시리아에도 도착하여 가자.셰켐.마리사.암만등의 고대도시들을 헬레니즘 적모델을 따르는. 폴리스로 바꾸었다.


그리스어를말하고 쓰는법을 배운지역민 또한 헬레네스가되어 군대와 행정부의 하위직에  진입하는것이 허용되니 이렇게해서 문명의 충돌이 생겨났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지적성취가 정점에 이르렀을때 제국을 이뤘다.


그리스이주자와 식민지 개척자가 새로운영토에 정착하면서 그리스문명은 동방의문화와 융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학자들은 이런융합을 헬레니즘(Hellenism)이라 불렀다.

에피쿠로스(기원전341~270)
아타락시아(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에피쿠로스 학파는 모든 정신적 혼란을 피했다.
폴리스생활은 워낙긴장되고 예측불가능했기에 마음이맞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삶을 누려야했다.


변덕스러운  신들에 대한 미신적인믿음.번민을일으키는 모든것을 피하고자했다.


죽을운명이 마음의 독이 되는것을 용납하지말아야 했다.


^^우리가 존재할때 죽음은 존재하지않으며 죽음이 존재할때 우리는 존재하지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했다.

제논.피론.
교조적으로 자기주장을 펴는사랑은 불행해질수밖에없다.  명예롭거나 비열한것.정의롭거나 불의한것은 없다.


최초의 회의주의 저자 섹스토스엠피리코스 는 피론과 그의제자들도 마음의평화를 얻기위해 진실을 찿으려고노력했다고 설명한다.


이 헬레니즘 철학자들에게 축의시대는완전히 끝이 난 상태였다.
헬레니즘 철학자들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초점을 맞췄다.


붓다나 소크라테스는 달랐다.
붓다와 소크라테스는 늘 자신의 대화상대가 실제로있는곳에서 시작했지 그들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곳에서 시작한것이 아니었다.


축의시대  많은 사상가들우 순수한 로고스와 이성을 불신했다.


하지만 헬레니즘 철학자들은 직관보다는 과학에 기반을두었다.


그들은 혁명가 는 아니었어도 지속적인영향력을 확보했으며 많은면에서 막 등장하던 서양정신의 축도 역활을했다.


서양은 신비한깨달음을 얻는대신 세속적인계몽에 더 열중했다.


서양의과학적 소질은 결국세계를 바꾸며 16세기 과학혁명은  새로운 축의 시대를 출범시켰다.

 


<<바가바드기타 >>축의 시대  마지막 위대한 노래

인도의 마가다왕국
1.아소카의 칙령은
축의 시대의 자비심과  아힘사의 덕이 단단히 뿌리를내렸다는것을 보여준다.
2.불교를 강요하지 않고 모든 종파 고행자와 평신도 똑같이 존중하고 인정함.화합권장

인도의 암흑기~굽타왕조

힌두교.이국적인 신상숭배.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
-금욕주의 학파인 상키아-요가학파의 가르침  영향을 받았지만 브라만 즉 절대적 실재는 인격화된 신 루드라/시바와 동일시됨 리그베다에서  루드라는 주변적인 신이었으나 이제 토착의 신  시바와 합쳐졌다.


-여기서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
재생과 모크사라는 개념.옴을 읇조리는 관행이 생겼다
-신을 향하여 가장 깊은 사랑 바크티(중심행동은 자기버리기 )를 품고 스승을 향하여 똑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에게서만 빛이 날것 .

그들의 삶에 어울리는 영성을 발견.
신자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의식하면서 신이 자신을 도와줄것을 믿었다.

<<바그다드기타>>(주님의 노래)
암흑시대에 등장한 힌두영성에 깊은 영향을 줌
최고의 전사인 아르주나와 크리슈나가 주고받는 대화의 형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다른 종류의 요가,즉 카르마-요가를 시행할것을 제안
개인적 이익을 얻고자하는 욕망을 비울것 .거리두기와 무관심.있는 그대로 보기.는 신과 결합하기 위한 첫걸음이며 신은 삶의 고난으로부터 인간을 구할수 있었다.

-바그다드 기타는 만인을 위한 종교.
축의 시대 영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크리슈나는 나에게 의지한다면 누구나 신을 사랑하고 모방할수 있으며 일상생활의 일반적 의무를 이행하면서도 자기중심주의를 넘어 설수 있다고 했다.(카르마-요가)


-크리슈나는 이 위대한 현현뒤에  물질세계 전체가 인간들의 깨달음을 얻고자 투쟁하는 전장이며 그 무기는 초연한 태도.겸손.비폭력.정직성.자제라고 설명했다.


10장 축의 시대의 귀환

 

천하통일과 사상의통합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이주.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하나의 제국이 망하고 다른 제국이 일어서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의 축의 시대
주 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마침내  시작되었으며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끝을 맺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
하라파 문명(인더스  문명)이  해체된 후에 일어나 마우리아  제국과 더불어  끝을 맺었다.


그리스 축의 시대
미케네  왕국과 마케도니아제국 사이에
이루어졌다.

축의시대 현자들은  정박지에서 떨어져  나와 떠도는 사회에 살았다.


카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했다.

축의시대는 큰 두 제국  사이의 공백기  자유를 위한 휴식.가장 명료한 의식을 가져다주는 깊은 숨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자 세계는  안정되었다


축의 시대 후에 학립된  제국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통일을  긍정하는  정신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중국의 진나라
기원전 221년에 중앙  집권적  제국을 수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안도했을 것.
진의 승리는 곧 법가의 큰 승리이기도 했다.
왕 스스로  자신을 첫번째  황제(시황)라고 불렀다.
새로운 시대였기 때문에 황제는 천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전통과 단절하고 중국 축의 시대에 아무런 역활을 하지  않았던 철학자들의 학파에 의지했다.

음양가
음양이라는  개념은 아마 중국의  농민 공동체에서 시작.
목적은 인간과 자연 현상 사이의  일치점을 찿는 것
사건들이 더 큰 우주 법칙에 의해  예측과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

분서갱유
진의 역사 기록을  제외한 모든 역사 기록,백가의글,박사관에 보관한것이나 농업.의학.약학.점술.농사에  관한 일부 서적을  제외햐 다른  문헌을 몰수 불살라야 한다.고 조언.
이렇게 해서 엄청난 책을 불살랐을 뿐 아니라 학자 460 명을 처형했다.

중국 축의시대 교훈
어떤 학파도  진리를 독점 할수 없다는 사실 도는 초월적이고 말로 표현할수 없기 때문 한나라 황제늘은 의식과예의 중요성을 파악.

중국의 포괄적 정신
P630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방(보살)
인도에서 기원전 231년 아소카왕이 죽은 뒤에 마우리아 제국이 급속하게 해체되었다.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200년 사이에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는 불교와 자이나교였을 것이다.
불교는 스리랑카.일본.동남아시아.중국에 뿌리를  내렸다.

바크티 
온 마음으로  주를 열정적으로  갈망하는 것.


바크티혁명
브라민과 출가자의 엄격한  종교를 일반 사람들에게 맞게 고치려 했다.


바크티는 마음에서 자기 중심주의와공격성을 비우는 하나의  방법.


바크티 신앙
모든 사람의 집중력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

바크티의 신 비슈누
바크티의 신 시바

불교는 두 학파로 나눔.
소승불교: 엄격하고 운둔적인 경향.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고독 속에서 깨달음을 구함


대승불교: 더 민주적이었으며 자비심이 라는 덕을 강조.


1세기에  대승불교에서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가 탄생.


보디사트바는 자비우 새로운 모델이었으며 축의 시대의 오래된 이상을 새로운 형식으로 번역한 존재였다.

 


토라의 원리,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서기 70년,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불태웠다.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이 재난에 대비해 자신들의 정화된 공동체가 영혼의 새로운 성전이 될것이라 믿었다.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진보적인 유대인은 바리사이파로서 그들은 축의 시대에서 가장 표용력있고 진보적인 영성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사제들의 신성한 나라로 불러야 하며, 신은 성 전만이 아니라 가장 초라한 집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은 일상 생활의 아주 작고 세밀한 것들 속에 존재하며, 유대인은 정교한 제의 없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동물 희생보다는 자비의 행동으로 죄를 씻을 수 있었다. 자선은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었다. 아마 바리사이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바빌로니아에서 팔레스타인 으로 이주한 랍비 힐렐(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일 것이다. 그의 관점 에서 볼 때 토라의 본질은 율법의 글자가 아니라 그 정신이었다. 힐렐 은 그것을 황금률로 요약했다.  "당신 자신에게 가증스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 시오. 그게 토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그 주석일 뿐이오. 가서 그것을 공부하시오"

성전이 파괴된 뒤 야브네는 유대종교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유대의 축의 시대는 랍비 유대교(바리시아파 랍비들이 발전시킨 율법적 형태의 유대교.이 유대교는 탈무드안에 있는 법률문서와 주석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예배양식과 생활원칙을 세웠다)에서 성년에 이르게 되었다

황금률 .동정심,사랑.환대는 이 새로운 유대교의 중심을 이루었다.

기독교는 서기 30년경 로마인에게 십 자가형을 당한 갈릴리의 한 신앙 요법사의 삶과 죽음이 중심이 되었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의도가 없었고 뿌리깊은 유대교도 였다.예수도 힐렐처럼 온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토라의  가장 훌륭한 계율이라고 믿었다.

기독교를 이방인의 종교로 만든 사람은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 바울로였다. 그는 예수가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어로 크리스 토스Christos)이기도 했다고 믿었고 기독교를 이방인의 종교로 만들었다.  바리사이파 출신인 바울로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글 을 썼다. 그는 두 세계를 연결하면서 자신이 비유대인(고임), 즉 외국에 사명이 있다고 확신했다. 예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 이기도 했다. 바울로는 축의 시대의 보편적인 '가없는'전망을 가 졌다. 하느님은 '만인에게 관심'이 있었다. 바울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 활이 인류 전체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했다고 확신했다.


   예수는 삼위일체나 원죄같은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고 훗날 기독교인처럼 종교를 믿음(정통성 .올바른 가르침의 수용 중시)과 동일시 하지 않았다.종교의 핵심은 케노시스와 사랑이라고 본 바울로(사도 바울)처럼 예수는 묵자의 겸애(모든이에 대한 관심),붓다의 가없는 마음(무량심)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 마저 주어라 처럼 모든 증오를 금지하여 아힘사를 실천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역설에는 새로운 통찰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케노시스 (자기비움 )가 필요하고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없이 자비를 베풀라는 무주상보시와 같은 의미로 볼수 있다.

652.축의 시대의 마지막 개화는 서기 7세기 아라비아에서 이루어졌다. 예언자 무함마드(서기 530?~632)가 신성한 영감을 받은 경전 《쿠란>을 히자즈 사람들에게 가져온 것이다. 물론 <쿠란>은 새로 운 계시라고 주장하지 않고, 그저 인류의 아버지이자 첫 번째 예언자인 아담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다시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 무 함마드가 과거의 예언자들을 대신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토라와 복음이 나오기 전, 그러니까 하느님의 종교들이 서로 싸우는 종파들로 갈라 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원시신앙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쿠란의 기본 메시지는 교의가 아니라 자비심을 실천하라는 명령이다.부를 공정하게 나누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존중받는 정의롭고 품위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훌륭한 일이다.

서기 610년경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았을 때 많은 아라비아인은 그들의 만신전의 최고신 알라'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하느님과 똑같 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아라비아인 기독교도는 이교도와 함께 보통 매카의 알라 성전으로 간주되는 카바로 하지 순례를 갔다. 무함마드의 첫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도시였 으며, 이제 그들의 하느님을 아라비아인도 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함마드의 종교는 '이슬람'('내어놓다')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슬람교도( 무슬림)'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삶을 존재론적으로 내어놓 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바로 축의 시대의 핵심과 이어진다. 무함마드가 그의 개종자들에게 하루에 몇 번씩 기도(살라트)를 하며 엎드리라고 했 을 때, 이것은 아라비아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군주제를 인정 하지 않았으며, 노예처럼 땅에 엎드리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을 구부려 엎드리는 것은 그들에게 이슬람이 요구하는 것을 이성적인 수준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가르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즉 날뛰고, 우쭐하고, 젠체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관 심을 끌려고 하는 에고를 넘어서라는 것이었다. 


이슬람 교도는 또 자신의 수입 가운데 일정한 비율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한다.이 자카트(정화)는 그들의 마음에 뿌리박은 이기심을 씻어낸다.


이슬람교도는 자기 방어가 아니면 싸우는 것이 금지되었다.복수는 엄격하게 균형이 맞아야 했다.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피해야했고 나무는 벨수 없었다.건물을 태울수도 없었다.


무함마드는 하지순례로 메카 성지에 들어가 이슬람교도에게 앉아서 평화의 자세를 보여주게 했다.무함마드는 불리한 조건에 합의함으로써 하느님에게 완전히 내어주는 행동으로 이교도 메카인과 완전히 구별되고 축의 시대의 종교라고 부르게 되는 것과 연결되었다.쿠란에 따르면 평화의 정신은 그들을 토라나 복음과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659.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폭력의 주된 원인인 자기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것이었으며 황금률의 감정이입적 영성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엑스타시스.
즉 습관적이고 자기에게 얽매인 의식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기를 경험했으며, 이때 흔히 하느님, 니르바나, 브라만, 아트만, 도(道)라고 부르는 실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먼저 발견한 다음에 자비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훈련된 자비의 실천 자체만으로  초월을 맛볼수 있었다.
1.자기중심주의의 한계를 넘다.
2.아힘사.비폭력에 숙달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
3.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계발하는 것.

 

그들에게 종교란 곧 황금률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초월해야 하는 대상-탐욕, 자기 중심주의, 증오, 폭력에 집중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초월하여 이르게 되는 곳은  지복의 상태였다. 

4.초월적 가치는 본성상 정의 할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교리를 버리는 대신 그 영적핵심을 찾아야한다.종교적 가르침은 행동강령이고 스스로 케노시스를 실천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근본주의적 종교는 우리 시대의 폭력을 흡수하여 극단화된 전망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근 본주의자들은 초기 조로아스터 교도처럼 인류를 두 적대적 진영으로 나누고, 신자들의 진영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고 본다. 우리가 많은 대가를 치르며 목격했듯이, 이런 태도는 곧바로 잔혹 행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것은 또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도덕경>이 지적했듯이, 폭력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보통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되돌아간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실제로 강제 수단은 사람들을 반 대 방향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더 높다.

축의 시대의 종교적 탐 구는 모두 자기 시대의 전례 없는 폭력으로부터 원칙적으로 또 본능적 으로 물러나는 데서 출발했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는 제의 개혁가들이 희생 경쟁에서 갈등과 공격성을 빼내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축 의 시대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인이 바빌로니아로 강제 추방을당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사제들이 화해 와 아힘사라는 이상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축의 시 대는 전국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 유가, 묵가, 도가는 모두 널 리 퍼진 무법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성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았다. 폴리 스가 폭력을 제도화했던 그리스에서는 축의 시대의 이상에 주목할 만한 기여 를 했지만 -특히 비극의 영역에서-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변화는 없었다.

우리시대에도 종교적인 영감에 기초한 테러리즘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의 대응은 어떠해야하는지 축의 시대 현자들은 조언을 했다.


1.자기비판이 있어야한다.먼저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


2.축의 시대 현자들의 본을 따라 실천적이고 효과적인 행동을 해야한다.


그들은 공격성과 마주했을때 그들의 종교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사제 제자 P는 고대 창조이야기들에서 공격성을 제거하고 야훼가 모든 피조물 -오래된 이야기에서는 야훼가 죽인것으로 되어있는 레비아단을 포함하여-을 축복하는 우주창조론을 만들어냈다.


3. 이해는 지적인 케노시스 뒤에야, 즉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우리의 마음에서 이미 받아들였던 관념 들이 '비워졌을 때에야 찾아온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과감하게 근본 적인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만큼, 늘 새로운 생각에 마음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

4.우리는 큰 공포와 고통의 시기에 살고 있다. 축의 시대는 우리에게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고난과 직면하라고 가르쳤다. 우리 자 신의 고통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진실로 두카다.

5.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늘 일깨워야 한다. 그들은 상아탑에서 명상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무시무시한 사회 오랜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 살았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허와 심연을 의식했다. 이 현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많은 수가 정치와 정부에 몰두했다. 그들은 공감이 단지 유익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자비와 모든 이에 대한 관심은 최선의 정책이었다.


6.공감.황금률.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한다.
축의 시대 통찰을 발전시켜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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