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자연에 이름 붙이기

백_일홍 2023. 12. 10. 15:21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Prologue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사정

 

200년도 더 전에 과학자들은 생명 세계 전체(팩팩거리고, 획획 지나다 니고, 꽃을 피우고, 덩굴손로 감아 오르고, 잎을 내고, 털이 복슬복슬하고, 초록이고, 경이로운 그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려는 과업에 착수했다. 처음에 내가 이 책에 대해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바로 그 추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오늘날 분류학taxonomy 이나 계통학 Mematics이라고 불리는 그 유서 깊은 분류의 과학에 관해 이야기할 작정이었다. 과학자들이 생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모든 생명을 포괄하는 하나의 계층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동물과 식물 및 그 밖의 모든 생물을 나누고 무리 짓는 그 복잡미묘한 방식을 설명하고 싶었 다. 그리고 과학자들 외에도 중앙아메리카 마야인부터 중세 중국인,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사람, 미국의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여러 집단 이 생명의 세계를 체계화하는 특이하고 신기한 여러 방식에 관해서도 쓸 계획이었다. 흥미를 자아낼 이 특이한 분류법들이 귀퉁이에서 스며드는 한 줄기 빛처럼 재미있는 곁다리 정보를 더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분류법들은 적어도 과학과 다르다는 점에서는 틀렸다는 것을 나는 기정사실로 여겼다. 과학적 분류도 불완전할 수 있고 아직 많은 부분이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생명의 세계를 체계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실로 타당한 유일한 방법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명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일에서는 언제나 과학을 따라야 하며, 또한 한결같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과학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다 현역 과학자였다. 비 내리는 토요일이면 거실 바닥에서 아버지의 실험용 생쥐와 놀거나, 연방의 지원금을 받아 꾸린 실험실에서 어머니가 이 런저런 실험을 할 때면 그 곁에 붙어 재잘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사 춘기가 오기도 전에, 사랑이나 섹스, 멋진 헤어스타일의 힘을 알기도 전에, 나는 다양한 통계 기법(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한 건 카이제곱이었 다)의 힘에 빠삭해졌다. 결혼도 과학자와 했고, 친구들도 대부분 과학 자이며, 나 역시 과학자가 되었고 지난 20년의 대부분을 《뉴욕 타임 스)에 과학자들이 내놓은 신기하고 경이롭고 새로운 발견들에 관한 글을 쓰며 보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쓰던 도중에 과학이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고 명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유일하게 타당한 방법도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보시라. 내막을 들여다보지 생명의 분류와 명명은 오히려 훨씬 민주적인 일이며 심지어 과학의 지배력을 뒤집어엎는 일이고, 과학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이며 언제나 그래왔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급기야는 과학이 완벽하게 해내려고 애쓰고 있던 것, 바로 생명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과학 자체가 훼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더욱더 예상하지 못했던 깨달음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새로운 분류의 과학이 사실상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을 생명의 세계와 점점 더 단절되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거의 아무도 눈치채거나 크게 염려하지 않는 사이 세계 곳곳에서 여러 생물종이 차례로 사라져가는 현 상황을 초래한 비극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얼핏 부정확하게 보이는 그 수많은 비과학적 이름과 범주(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전 세계의 사람들이 각자 자기네 주변의 생명들을 기쁘게 기리며 만들어낸 질서의 체계)가 사실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이름과 범주는 각자 더없이 옳았으며, 그것들(그중 어느 하나든, 당신이 원한다면 그 모두든)을 되살리는 일이 이 모든 상황을 치유하는 열쇠였다. 21

 

이건 내가 도달하리라 예상했던 곳도 그러기를 원했던 곳도 아 니었다. 하지만 일이란 게 늘 계획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된 게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책을 쓰는 일은 여러 겹의 발 견들이 우당탕거리며 하나씩 펼쳐진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러는 사 이 생명의 분류에 관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이 수정되 거나 폐기되거나 아예 거꾸로 뒤집혔다. 그리고 소중히 품고 있던 예 전의 생각들이 밀려난 자리에서 나는 더 좋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 것은 생명의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에 질서와 이름을 짓는 사람들 (과학자들과 나머지 우리 모두)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었고, 그 관점 은 내가 상상으로도 그려볼 수 없었을 만큼 훨씬 더 흥미롭고 더 많은 약속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 책은 오래전, 우리집 뒤 숲속 어딘가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보스턴 외곽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았다. 우리 마음은 이 책은 오래전, 우리 집 뒤 숲속 어딘가에서 시작되었다. 얀 첨탑 교회와 작은 식료품점과 주유소가 있는 뉴잉글랜드의 대 작은 마을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절대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 집과 농장 뒤에는 환상적인 야생의 자연이 있었다. 나는 TV에서 화영화를 볼 때, 그리고 저녁을 만들거나 해부를 하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굴 때를 제외하면 항상 그 야생의 자연으로 가 뒷마당 바로 너머에 있는 숲속을 돌아다녔다. 거기 높이 우특수 아 있는 나무들 아래서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경이로운 것을 발견했 다. 거기엔 자전거 타이어만큼 통통하고 커다란 검정 뱀이 숲길을 가 로지르며 누워 있었다. 가느다란 뱀들도 있었는데, 언젠가는 그중 두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서로 얽혀 있는 모습도 보았고, 돌 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줄무늬 뱀들도 엄청나게 많이 봤다. 바닥에 쌓인 참나무 잎 밑에서는 난초가 뚫고 올라왔다. 습지에서는 반짝이는 분 홍색 가시들이 잎을 뒤덮은 작은 식물들이 자랐다. 소나무를 만지면 송진으로 손가락이 끈적끈적해졌고, 단풍나무는 쉬이 흩어지지 않는 달콤한 향기를 뿜어냈다. 폭격기처럼 급강하하는 까마귀, 시끄러운 미국박새chickadee, 물을 튕기는 살찐 청둥오리가 있었고, 연못과 호수 에는 개구리와 두꺼비와 거북이, 그리고 물고기, 물고기, 물고기가 있었다.

 

숲속을 누비며 다니는 아이라면 누구나 아는 어떤 사실, 자기가 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아는 그 사실을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도 바로 그 숲에서였다. 그건 바로 생명의 세계란 아무렇게나 뒤죽 박죽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비슷한 것들끼리 무리를 이루는 식으 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야생의 세계가 다양한 종류의 것 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각 범주 안에는 또 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알아보았던 것에 이름이 있으며 그 이름이 몇 세기나 되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이름은 바로 '자연의 질서'였다. 태고부터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관찰하고 집착해 왔던 바로 그 자연의 질서. 그 사람들 대부분이 한 것처럼 내가 한 관 찰 역시 세밀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기회 만 생기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쉽게 자연탐구가naturalist *가 된다. 내게 그 숲에 있던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명백했고, 언제나 당연했으 며, 아주 실제적이고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떠올 리기만 하면 그 숲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까마귀의 깍깍거림이 들리 고, 내 발에 밟혀 나뭇가지가 부서지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건 그 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었고, 맑고 파란 하늘만큼 명백한 것이었다.

숲속을 누비며 다니던 많은 아이가 그렇듯 나도 생물학자가 됐 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그러면서 어릴 때 잡았던 여러 종류의 올챙 이나, 쫓아다녔던 여러 종류의 메뚜기, 해마다 봄이면 늪에 나타났지만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는 못했던 헤엄치는 괴상한 덩어리들 에 관해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몽매한 생각들은 치워버렸다. 그렇게 나는 진짜 과학적인 생명의 질서 짓기에 착수할 준비를 갖추었다. 한 껏 경탄할 준비도.

분류의 과학에서 내게 제일 먼저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생명 의 세계를 정확한 질서에 맞춰 분류하는 방법에 관해 과학자들의 생 각이 너무 심하게 그리고 너무 자주 엇갈려 보인다는 점이었다. 분류 학분야는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논쟁들로 악명이 높았다. 이 분야의 아버지인 카롤루스 린나이우스Carolus Linnaeus (칼 린네)의 주도 아래 분류의 과학이 갓 형성되기 시작한 18세기에도 이 미 식물학자들과 동물학자들은 새로이 발견되어 홍수처럼 쏟아져 들 어오던 식물과 동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두고 열 띤 논쟁을 벌였다. 2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인 1980년에도 분 류학자들은 여전히 그 논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자마자 알게 되었듯, 그 무렵의 싸움은 생명의 질서 짓기에 대해 각 자 나름 최선의 방법과 철학을 갖춘 여러 분류학 분파들간에 벌어지 는 일종의 부족 간 전쟁 같은 형식을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과학에 대한 내 믿음을 뒤흔들려면 겨우 2세기 동안의 의견 충돌로는 어림 없었고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할 터였다. 갈등이 진보의 특징임 을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과학적 분류가 명백한 진실로 보이는 것과 충돌했을 때도, 나는 과학의 우위에 대한 의심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런 경우를 볼 때 마다. 나머지 온 세계가 모르는 은밀한 정보를 과학자들은 알고 있으 니 분명 과학이 옳을 거라고 확신했다. 두 동물이 거의 똑같이 보일지라도(예를 들어 작은 갈색 도룡뇽 두 마리가 완전히 똑같아 보이더라도) 분자유전학적 분석을 통해 그 둘이 진화적으로 꽤 거리가 먼 중들이 라는 진실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또는 둘이(예컨대 콜리플라워와 게임 처럼) 완전히 달라 보이더라도 과학은 그 둘이 같은 종의 구성원들이 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왔다.

몇 년 뒤 젊은 대학원생 시절에 그런 충돌을 또 하나 마주했다. 그 충돌을 일으킨 건 얼마 전부터 떠오르고 있던 어떤 분류학자 무 리, 바로 분기학자들이라고 알려진 우악스럽고 제멋대로인 집단이었 다. 분기학자들은 진화적 유연성을 판단하는 방법, 다시 말해 각 생 물 분류군이 생명 진화의 계통수에서 각자 어느 가지에 자리하고 있 는지를 판단하는 새로운 방법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그래서 그들 을 가리키는 이름도 '가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klados를 가져다 만든 분기학자cladist가 되었다. 이들이 자기네 방법을 어찌나 열광적으로 주장하는지(게다가 당돌하고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적도 많았기에) 다 른 분류학자들은 그들을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 또는 악쓰는 분기학자, 심지어 발광하는 분기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두가 분기학자 들 이야기를 한 진짜 이유는 이 새로운 분류학 학파가 자기네 방법을 사용해 생명 분류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기학 자들은 엄청나고 자극적인 혁신으로 가장 탁월한 단계의 현대 과학 을 눈부시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따 를 수 있으니, 이 혁명으로 초반에 희생된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물고기였다.

여기에 모든 충돌의 어머니가 있었다. 분기학자들은 생명의 질서를 진화적으로 올바르게 밝혀내면 '어류'라는 분류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영웅적인 연어, 곰살궂은 잉어, 점심으로 먹기 좋은 참치)은 여전히 아주 당연히 존재한다며 모두를 안심시켰다. 다만 다른 분류군과 분명히 구별되는 통합적인 하나의 분류군으로서 어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빨간 점이 있는 모든 동물을, 또는 시끄러운 모든 포유류를 통합적인 단일 분류군으로 묶을 수 없듯이, 어류도 그런 단일 분류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류가 없다고?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생각, 과학이라면 덮어놓고 믿는 사람의 마음마저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과학적 분류와 명백히 진실로 보이는 것(명백한 진실이란 게 과연 존재한다면)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결코 사실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에서 대대손손 물고기를 잡아온 어부들이 그런 생각을 가볍게 반박할 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 소속된 많은 이들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명백하고도 단순한, 물고기들이라는 실상이 가장 강력한 반증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26

 

그런데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그 생각, 그러니까 물고기의 죽 음은 알고 보면 과학으로도 논리로도 부인할 수 없다. 오래전 다윈 이 분류학자라면 무릇 그래야 한다고 천명한 대로 엄격히 진화적 유 연관계를 기준으로 생물을 분류하려면, 새롭고 매우 특수한 방식으 로 분류군을 만들고 정의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분류군으로서 타당성을 갖추려면 한 조상에서 유래한 모든 후손을 포함해야 하고 나 머지는 하나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Transitiones fro에서 유래한 모든 좋은 하나의 분류군에 넣어야 하며, 그 직계 후손이 아닌 모두는 그 분류군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어떤 조합을 만들든 그것은 진화적으로 불완전한 분류이거나, (안 좋기로는 이 경우도 매한가지인데 사실은 다른 분류군 들에 속하는 것들을 한데 모은 잡동사니 모둠일 것이다. 어느 경우든 분기학자들이 즐겨 하는 말로 '진짜' 분류군은 아닌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물고기들에게 일어난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어류라 불 려온 모든 종을 자세히 들여다본 분기학자들은 그 물고기들을 온전 한 하나의 분류군으로 뭉뚱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가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모든 생물을 하나 의 분류군에 집어넣는다고 해보자. 이것이 진짜 분류군으로서 성립 하려면, 우리는 (진화적 유연성이라는 우리의 규칙에 따라) 이 분류군에 들어가야 할 또 다른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물 고기를 낳은 물고기의 조상에게 또 다른 후손이 없는지 질문해야 한 다는 말이다. 그 답에는 놀랍게도 파충류라거나, 심지어 우리 인간처 럼 물고기와는 지극히 거리가 먼 생물을 포함하는 분류군인 포유류 에 이르기까지 무척 물고기스럽지 않은 것들이 다수 포함된다. 하지 만 우리의 엄격한 지침을 준수하려면 도마뱀, 거북이, 뱀, 곰, 호랑이, 토끼, 심지어 인간까지 그 모두를 다 물고기 무리에 집어넣어야 한 다. 이러면 갑자기 '어류'라는 분류군이 그리 어류 같지 않은 것이 된 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어류'라고 알고 있는 분류군은 그 새롭고 개 선된 질서 짓기의 규칙에 따르면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는 분류군인 것이다. 

 

이리하여 새롭게 등장한 그 혁명적인 분기학자들의 손에 의해 어류의 죽음은 더욱 엄격 히 진화에 근거한 명명과 분류의 새로운 방식이 가져온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희생된 것이 물고기만은 아니다.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동물인 얼룩말도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당했다. 버려진 물고기들과 아직 계속 발차기를 해대는 얼룩말들 더미 위 로 나방들도 내던져졌다. 그리고 또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류가 없다고? 얼룩말이 없다니? 나방도 없어? 이건 최첨단 과학과 단순한 현실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서 일어난 심각한 충돌이었고, 이에 비하면 콜리플라워와 케일이 가까운 친척 사이라는 말씀은 아무것도 아니 었다. 이건 우리 대부분이 괴상하다고 여기는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원 시절에도, 수년 뒤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그것이 가장 진보적인 최고의 과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선언들이 기괴하게 느껴질 수 있고, 숲속에서 보낸 유년기부터 생명의 세계에 대해 갖고 있던 나 자신의 감각과도 어긋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다른 무엇보다 과학을 신뢰해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는 분별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 터였다. 나는 물고기의 죽음이 옳고도 타당한 일 이라고 알고 있었다. 29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내가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다른 과학권들이 생명의 세계를 질서 있는 방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다. 나는 세계 곳곳에서 행해진 과학 이전의 분류와 비과학적 분류 의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양상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새와 박쥐를 구분하는 언어권으로는 어떤 언어권들이 있는지, 고대 사회 들은 나무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개념화했는 지와 같은 주제들을 누군가 언젠가는 연구한 적이 있겠거니 생각했 다. 금세 흥미로운 토막 정보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 인류학 연 구는 뉴기니의 몇몇 부족이 빼어난 자연탐구가들임에도 어떤 거대 한 새를 포유류로 분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연구를 보면 필리핀의 헤드헌터'들은 난초를 사람의 신체 부위로 여기는 듯했다. 당혹스러워하는 인류학자에게 그들은 여기서는 엄지가 나오고 저기 서는 팔꿈치가 자란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사람들이 생명을 분류하는 방식에 대해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 지(다시 말해 과학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니 이내 흥미가 동했다. 책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그 가능성의 모양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사람들 이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 귀여울 정도로 엉뚱한 방식에 관한 이야 기름, 그것을 명확히 정리해주는 현대 과학의 정확함을 배경으로 깔 고 풀어내는 방식이었다.

다양한 집단의 분류를 더 알아내는 것은 보물찾기 같은 일이겠 거니 생각했다. 이런저런 기이한 정보 조각들을 끌어모으고, 잘 알려 지지 않은 어떤 언어에서 '덤불'을 가리키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 지 알아내고, 또 다른 언어의 사전을 뒤져 '개'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 아내는 일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이 어엿한 한 학문 분야의 연구 대상일을 알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명의 세계를 어떻게 분류하는지 연구하는 민속 분류학olk taxonomy 이라는 분야였다.

칼라하리 사막의 생산족, 베트남인, 프랑스인 등등 사람들은 너 나없이 실제로 생명의 세계에서 질서를 찾고 분류하기 때문에, 민속 분류학은 아주 방대하고도 번창하는 분야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결 코아무렇게나 분류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생물의 외양, 그러니까 모습과 냄새, 소리, 행동에서 보이는 비슷한 접과 다른 점을 기준으로 생물들의 계층적 질서 체계를 만들어낸다. 전문적인 과학적 분류학자들이 처음부터 추구해온 것과 똑같은 종류 의 분류학인 셈이다. 게다가 집단에 따라 자신들이 그 생물들을 어떻 사용하는지 혹은 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와 같은 요인들을 기준으로 또 다른 추가적 분류법을 만들기도 한다. 일례로 내가 속한 언어권의 민속 분류학에서는 동물을 가축과 반려동물과 야생동물로 나누고, 식물은 잡초와 우리가 좋아하는 화초로 나눈다. 하지만 그런 추가적 분류를 아무리 많이 만들어낸다고 해도, 외양을 기반으로 하 는 기본적 분류는 모두 다 공통적이다. 여기에 풍부한 정보의 광산이 있었다.

나는 자유분방하고도 이국적인 각종 질서 체계를, 아니 사실은 잘못된 질서 체계를 잔뜩 발견하리라 예상하며 조사에 착수했다. 연 구들은 실제로 이국적인 것들과 이상한 동물과 더 이상한 식물로 가 득했고, 내가 알게 된 분류 체계들은 매혹적일 정도로 생소한 개념으 로 가득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두가 무질서와 혼돈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반대였다. 모든 집단이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했을 뿐 아니라,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전 세계의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있든, 어떤 언어로 말하든, 심지어 어떤 동물과 식물을 분류하 든 상관없이 자기네 주변의 생물들을 서로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실 지어 판에 박힌 방식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무수히 다양한 민속 분류 학들은 밑바탕을 보면 모두 한 주제에 대한 변주들이었다. 그 주제란 오래전 숲속에서 나도 알아보았던, 별 노력 없이도 알게 되는 바로 그 기본적인 자연의 질서였고, 알고 보니 그건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알 아보는 자연의 질서였다. 세상 사람들이 생명을 분류하는 방식이 어 찌나 정형화되고 한결같았는지, 인류학자들은 사람들이 생명을 분류 할 때 무의식적으로 따른다고 여겨지는 실제적 규칙들까지 구체적으 로 열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사실에 생물학으로 단련된 나의 턱은 거의 땅바닥까지 떨어질 뻔했다. 여기서부터 팀북투Timbuktu "까지 모 든 민속 분류학 사이에 일관성이 존재한다고? 생명 분류의 규칙? 이 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늘 전문적 과학이라고 생각해왔던 분류학이 무언가 다른 것, 휠 씬 더 깊이 자리한 무엇처럼 보이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깊이가 어 느 정도인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적어도 내가 분류학이라는 과학에 서 더욱 멀리 벗어나 매우 특수한 부류의 뇌 손상 환자들에 관한 심 리학 연구를 접할 때까지는 그랬다. 여러 연구 논문에서 과학자들 은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보통 다른 것들은 다 알아보는데도 생물(동 물과 식물 모두)의 분류와 이름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에 관 해 기술했다. 일례로 1984년에 런던 국립 신경과 및 신경외과 병원의 연구자들은 'J. B. R'이라고 칭한 어느 젊은 대학생의 사례를 보 고했다. 그들은 J. B. R.이 단순포진 바이러스로 인한 뇌부종에서 회 북한 뒤 무생물 대상들은 알아볼 수 있지만(손전등, 나침반, 주전자, 카 누는 뭔지 아주 잘 알아보았다) 살아 있는 것은 까맣게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주 정상적인 대학생이었던 J. B. R.이 이제는 캥거루와 버섯, 미나리아재비가 뭔지 몰랐다. 하물며 앵무새가 뭔지도 말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연구자들이 낸 또 다른 보고 논문은 한때 생물학 전공자였던 로마에 사는 56세의 주부 L. A.가 뇌사에서 깨어난 후 생 물들을 식별하려 할 때 역시나 도통 감을 잡지 못했던 사례를 이야기 한다. L. A.는 귀뚜라미를 사자라 부르고, 고양이를 개, 물고기를 새 라고 불렀다. 그건 L. A.와 J. B. R.만의 일이 아니었고, 연구자들이 파고들수록 그런 환자들은 더 많이 발견되었다. 세계 각지의 심리학 자들은 텔레비전과 탱크, 의자와 굴뚝은 구별할 줄 알지만 귤과 토마 토, 닭과 쪽파는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들은 자연의 질서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뿐 아니라 또 다른 연 구들은 그러한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뇌의 특정한 한 부분에 손상 이 생긴 경우가 많음을 시사했다. 일부 과학자(인류학자와 심리학자 포 함)들은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특화된 뇌 영역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견까지 제시했다. 이 과학자들은 분류학이 하는 일 이 어떤 면에서는 선천적인 행위일지 모른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것 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궁금증이 동했다.

심리학자들이 수년 동안 유아를 포함해 어린아이들이 하는 생 물 분류를 연구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상황은 더욱 흥미로 워졌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아직 걷거나 말하게 되기도 전부터 생명의 세계를, 그것도 돼 능숙하게 분류한다는 것을 상당히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사실 우리는 아기들을 포함해서 람이라면 누구나 생명의 분류에 관한 한 석학처럼 막힘없는 능력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다.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아기가 '개나 고양 이'를 겨우 몇 마리만 보고도 개나 고양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매우 놀라운 사실에 우리가 그리 놀라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개들도 종류가 많고 형태와 크기도 다양하 므로, 고양이나 소, 염소처럼 다리가 넷이고 털로 덮인 그 많은 동물 과 개를 어떻게 한눈에 구별하는지 설명하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 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어린아이든 다른 누구든, 백색증에 걸린 낮 선 흰색 호랑이든, 심지어 돌연변이로 머리가 둘이거나, 다리 하나 를 절단해 다리가 세 개뿐인 호랑이도 호랑이로 알아본다는 사실에 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건 우리가 전혀 신기해하지 않는 신기한 일. 바로 '플라톤의 딜레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적은 것을 바탕으로 그렇게 많이 아는 걸까? 별 노력이나 생각 없이도 우리는 생명의 세 계에 관해 놀랍도록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한 생물이 무엇인지 (특히 그것이 거대한 자연의 질서에서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아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놀랍도록 수월하다. 너무 쉬워서 우리의 무의식에도 깔끔하게 맞아들어갈 정도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이 일에 매우 능 숙해 보일 뿐 아니라, 생명의 질서, 생물의 이름과 분류와 조직에 관해 배우는 일에 일찌감치 그리고 아주 깊이 끌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분류학이 상당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견고한 과학의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본능적인 것, 마치 희망처럼 새로 태어 나는 모든 아이에게서 영원히 새로 샘솟는 무엇 같아 보였다.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는 일, 자연의 질서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감지하는 일은 오늘날 축소된 형태의 분류학, 즉 추상적인 실험실 과학보다는 훨씬 더 큰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존재함, 살아 있음에 따르는 필수적인 기능이면서, 최소한 삶의 초기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능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이치에 맞는 얘기였다. 우리는 정확히 이런 식으로 진화했어야 마땅하다. 왜 아니겠는가? 바로 그렇게 미리 장착된 것처럼 판에 박힌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고 체계화 하게끔 진화했어야 했다. 생명의 자연적 질서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한 가지 시각을 갖게 되는 일을 우리가 왜 마다했겠는가? 다른 무엇 보다 먼저, 동굴에서 살았던 지저분하고 털이 북슬북슬한 우리의 조 상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과 싸워야 했을 것이며, 무엇에 대처할 채 비를 갖추고, 무엇을 분류하고, 체계화하고, 기억하고, 이름 붙이고, 식별하고, 무엇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아야 했을까? '그들이 먹는 것' 과 '그들을 먹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바로 생명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자 대학 시절에 벌들에 빠져 있던 어느 교수님의 동물행동학 수업에서 배웠던 뭔가가 기억났다. 교수님은 생물학자들이 '움벨트umwelt'라 부르는 것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움벨트는 글자 그대로 '환경' 또는 '주변 세계'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지만,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그 단어로 더 구체적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 생물학자들에게 움벨트란 지각된 세계, 즉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한다. 각 종이 지닌 특수한 감각 및 인지 능력에 의해 키워지고, 그 종에게 결핍된 부분에 의해 제한된 결과 그 종이 특유하 게 지니게 된 시각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이 용어는 익숙하지 않만, 그 개념은 아주 익숙하다. 우리는 개들이 색깔을 볼 수 없어서 색채가 아니라 냄새로 그려진 우주에서 산다는 걸 안다. 멍멍이가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기둥과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 콩콩대며 냄새를 맡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 교수님이 애지중지하던 벌들은 다면적인 구조의 눈으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외선을 볼 수 있 다. 그 때문에 벌들은 꽃에서 꿀이 있는 위치로 정확히 날아갈 수 있 다. 꽃에 자외선으로 그려진 띠와 줄 패턴이 벌들을 그 자리로 안내 한다. 하지만 움벨트는 개와 벌뿐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 심지어 인간에게도 있다. 우리는 그걸 '실제'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우리를 둘러싼 생명의 세계에 대해 우리 특유의 감각이 그려낸 그림이다. 그런게 바로 움벨트다. 그리고 거기에 답이 있었다.36

 

인간의 움벨트에는 내내 드러나지 않고 있던 중요한 의미 하나가 들어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생물의 체계적 질서를 감지하는 방식, 처음부터 내장돼 있으며 판에 박힌 그 방식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 바로 움벨트(우리가 공통적으로 지각하는 세계)라는 깨달음이었다. 하버드대학교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이 제안한 바이오필리아(생명이 있는 세계에 대한 인류의 사랑)가 사람이 생물들에 게 그토록 자주 매료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면(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생명의 세계와 그 속 자연의 질서를 우리가 늘 바라봐왔던 그 방식으로 바라보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움벨트(그 별스러운 특징들과 강점 및 약점, 그리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점 자체를 포함하여 그에 관한 다른 모든 것까지)일 것이다.36


내가 맞추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퍼즐의 작은 조각 들이 제자리로 맞아들어갔다. 아프리카부터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까지 언어와 문화, 사회, 살아가는 장소가 서로 다름에도 사람들이 비슷한 분류를 하는 이유를 바로 움벨트가 설명해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똑같은 움벨트를 갖고 있으니, 우리가 똑같은 자연의 질서를 알아보고, 똑같은 종류의 민속 분류학을 거듭 되풀이해서 구축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움벨트는 또한 심리학자들이 뇌손상 환자들을 연구하는 동안 줄곧 추적하던 것이기도 했다. 생물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은 그 가련한 영혼들의 뇌에서 사라졌거나 고장난 것이 바로 움벨트였다. 아직 혼자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작고 앙증맞은 아기들에게 생명의 세계란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역시 움벨트였다.

내가 전에는 분류학과 관련지어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아주 많은 것의 원인이 움벨트임이 분명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서나 움벨트가 우리에게 질서를 보게 하고, 또한 그 질서에 근거해 행동하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인간 을 포함해 한 종 안에서도 또 질서를 매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분류하고, 그들이 우리의 자연 질서 안에서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그 러니까 흑인인지 백인인지 아시아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 지등을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의료를 처방하고, 적합한 화장실을 고르며, 장학금과 기회를, 심지어 사랑을 나눠주는 데까지 그 분류법을 활용한다. 그리고 이 모두를 우리의 움벨트라는 렌즈를 통해 행한다. 37

그러자 비로소 가장 큰 퍼즐 조각이 맞아들어갔다. 인간에게 움벨트가 존재한다는 것, 즉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인간 특유의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류학의 역사(처음 탄생한 때부터 논쟁 과 다툼으로 점철된 험난한 몇 세기까지 포함해)가 내가 늘 생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라는 것이었고, 이 깨달음은 내게 약간의 충격을 안겼다. 분류학의 역사는 2세기에 걸쳐 인간의 움벨트에 맞서 워온 역사였다.

나는 늘 분류학이라는 과학의 역사가 일련의 가지안하고 손차적인 통찰과 실험실의 야근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고, 또한 그런 것들이 모든 타당한 과학의 진보를 이끄는 것이라 배웠다. 그런데 분류학은 철저한 이성에서 태어나 명쾌한 실험을 통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일반적인 과학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움벨트에서 받은 충동으로 태고부터 해왔던 일(생명의 집짓기와 이름 짓기) 에서 파생된 과학이었다. 하지만 움벤트는 금세 분류학 분야의 크고도 끈질긴 약점이 되었다. 생명에 대한 움벨트의 시각은 과학의 토대가 되기에는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38

움벨트와 과학은 왜 그렇게 철저히 상반되는 것일까? 움벨트는 어느 모로 보나 우리 인간 종이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시절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굴에서 살던 사람들이 걸어서 탐험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세계의 한 조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움벨트이니, 전체 지구의 종들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의 과학자가 해야 하 는 일에는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 방해가 된다. 그리고 움벨트는 생명 과 자연의 질서를 명쾌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 시각은 객관성이나 기나긴 세월에 걸친 진화적 변화, 과학적 엄밀함이나 가설 검증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알지도 못한다. 사실 자연 의 질서에 대한 음벨트의 시각은 과학의 진화적 생물 분류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움벨트는 철저하게 감각적이며 극도로 주관적이다. 뉴기니의 수렵채집인 부족이 거대한 새를 포유류로 보게 하고, 필리핀의 헤드헌터가 난초를 엄지손가락처럼 보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움벨트다. 그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경이로움이 자 완벽하게 말이 되는 의미이며, 영원히 올리는 하나의 주제 선율에 대한 눈부시고 향기로우며 유쾌한 변주들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과학은 절대 아니다. 39

알고 보니 움벨트는 그간 보이지 않았고 인지되지 않았던 과학의 적수였고, 맞서 싸우기에 더없이 힘겨운 상대였다. 어찌나 버거운 적수였는지 그 때문에 분류학자들은 그 싸움을 2세기가 넘도록 계속 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과학이 승리를 거두었고, 움벨트를 내버리고 생명에 대한 그 비과학적이고 비진화론적인 시각에서 탈출했다. 우연히도 나는 이 일이 벌어지는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어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기학자들의 선언은 단순히 분류학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혁명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선언은 과학이 움벨트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최종적으로 폐기하는 행위 였다. 그것은 분류의 과학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그 태곳적에 지각된 시각(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던 시각!)에 대해 진화와 과학의 관점이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야 마침내 이뤄낸 승리였다. 분기학자들의 손에 어류가 죽어나간 그 일은 분류학이 진정으로 현대적인 과학으로서 태어나는 순간으로 기록됐다.

움벨트는 과학의 문제가 끝나는 곳이 어디인지 드러내면서도(어류의 죽음), 동시에 나머지 우리의 문제가 시작된 곳도 드러냈다. 왜냐하면 항상 과학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바로 그 움벤트는 동시에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인류의 우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움벨트를 믿지 못할 것으로 만만들어패기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지만, 알고 보니 그 승리는 우리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비극이었다. 그 비극 아주 이상한 장소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사람이 지독하고 극심하게 생명의 세계와 단절되어버린
아주 이상한 장소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과학을 태동시키기 훨씬 전부터 움벨트는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과학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인류가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나누는 가장 좋은 연결이자 가장 내밀한 연결이 었다. 움벨트는 단순히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맥락이며, 이는 언제나 그래왔다. 움벨트는 우리에게 자연의 한 질서를 보여줌으로써 사실상 뭐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 선포한다. 또한 현실 자체의 경계선을 정하며, 그 세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포함해 생명의 세계 안 존재들의 위치를 결정한다. 움벨트를 잃어버린 사람들, 뇌 손상으로 생물의 자연적 질서를 인지할 수 없게 된 환자들이 바로 그 살아 있는 증거다. 40

이 사람들에게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도통 감을 잡지 못해 어리둥절해한다는 것이다. 농산물 코너에서 채소의 종류를 알아보는 거나, 사람들이 올라타고 달리는 것이 고양이가 아니라 말임을 아는 따위의 정말 단순하고 일상적인 생활 과제를 처리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살아 있는 존재는 무엇이든 끊임없는 수수께끼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자연(우리에게 음식과 옷과 거처를, 그리고 많은 즐거움을 주는)의 질서를 인지하는 능력이 생존과 번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이고도 비극적인 점은 이 사람들이 슈퍼마켓에서 혼란에 빠졌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낯설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달도 없이, 깊고 사무치게 길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잃은 것은 사서처럼 만물을 분류하는 능력, 브로콜리와 곰을, 당나귀와 민들레를 구분하는 능력 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를 인지하는 능력을 잃은 이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었고, 그 결과 그 세상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도 잃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움벨트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그 이해가 의식적 차원의 것은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이 점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12세기 독일의 수녀원장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린나이우스, 찰스 다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 움벨트의 시각에 집착하며 움벨트로 드러나는 자연의 질서를 정의하고 기술하며 오랜 세월을 보낸 이유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생각의 기록은 문자로 된 동물원이자 움벨트에서 얻은 단상들의 정원이라 할 만하다. 기원전 2000년경의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 알려진 비문은 정부의 포고문이나 연애편지, 귀한 요리법이 아니라 동물 종들의 목록 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최초로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하느님은 아담 앞으로 동물들이 줄지어 지나가게 했고, 성경 최초의 박물학자인 아담은 지상의 동물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가 우리 인간 종이 한 말들을 보존하기도 전에, 우리 종은 우리 움벨트의 비전을 보존했다. 유럽부터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대륙까지 무엇이 동굴 벽화의 소리 없는 세계를 지배하는가? 바로 움벨트에서 가져온 존재들, 매머드와 순록, 말, 들소, 늑대의 모습에 관한 멋진 표현들이었다.


다윈도 알았고, 린나이우스도 알았으며, 나무 그늘에서 꽃을 모으고 풀밭에서 개미와 벌레를 따라다니는 아이들도 모두 아는 것을 아담도 알았다. 그건 바로 움벨트와 그것이 드러내는 자연의 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마저 잊어버렸다. 현대 세계의 시민들은 우리의 움벨트를, 생명의 질서에 대한 아주 오래된 시각을 버렸으면서도 자기들이 그렇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비전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생명 세계의 현실이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더 큰 뭔가가 있으며, 무엇이 맞았고 무엇이 틀렸는지 판단할 권한을 일상적으로 그 다른 무엇에게 위임한다. 그렇다면 지금 생명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건 과학이다.

나는 이게 최근 몇십 년 사이 휴대용 자연도감의 출판과 구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만 해마다 족히 50만 부는 넘게 팔린다. 우리가 자연도감에 의지하는 이유는 단순히 살아 있는 자연을 이해하고 싶어서만이 아니다. 자기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듣고 즐겼음에도, 우리가 본 게 정말로 무엇인지 과학으로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걸 제대로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다. 자료해석관interpretive"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도 우리가 판단을 과학에 다 맡기고 자신은 불신하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생명도 누군가가 대신 해석해줘야 한다고 느낀다. 정말로 혼자서는 생명을 보거나 듣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생물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타당한 방식이 과학 말고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 역시 정확히 그런 상태였다.

이는 생물에 대한 이해에만 국한된 듯한 기이한 현상이다. 이를 테면 공기 중에서 공이 어떤 식으로 이동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물리 학자가 훨씬 더 잘 알겠지만, 우리는 아치를 그리며 골대로 날아가도록 농구공을 던질 때 물리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다른 누구보다 마찰의 역학을 더 잘 이해하겠지만, 우리는 브레이크를 얼마나 세게 밟아야 할지 판단하려고 그들을 불러와야 한다 고 느끼지는 않는다. 해석을 위한 표지판은 필요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흥미로운 식물이나 동물을 볼 때 우리는 그 앞에서 주저한다. '가만있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문가가 있어야겠는걸'이 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과학자들도 나머지 우리를 믿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생명의 분류는 전문가들만 아는 난해하고 고립된 분야이지만 한때는 훨씬 더 민주적인 일이었다. 예를 들어 18세기와 19세기 초만 해도 오늘날이라면 아마추어라 할 사람들이 야생으로 들어가 관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한 다음, 모임에서 그 생각을 발표하고 당대에 가장 존경받던 식물학자나 동물학자와 나란히 출판까지 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몇 세기 전에는 당대 가장 존경받는 식물학자와 동물학자 중에 아마추어들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보통 사람이 높은 단계의 과학적 활동에 참여하는 일이 간혹 허용된다한들 아주 드물다. 가장 민주적인 매체인 인터넷마저 우리에게 생명을 이해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되살려주지 못했는데, 그래도 우리 모두 너무나도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과학적 분류체계에 더 쉽고 신속하게 접근할 수단은 제공해주었다.

해야 할 분류 작업이 무엇이든 간에 전부 과학자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더 수월하겠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맡겨 두는 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의 생명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게 됐다. 수많은 야생의 생물들이 자기 좀 보라는 듯는 눈에 띄는 모습으로 끈덕지게 우리 앞에 나타날 때도(예컨대 매들이 주차장 상공을 날아 이동하거나, 한밤에 다채로운 색깔의 나방들이 유리창에 와서 몸을 부딪치거나 이런 일은 항상 있다) 우리는 그 존재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모두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일 가운 데 우리가 생명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하는 일 바로 '먹기'를 할 때조차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사실은 생명의 세계임을 점점 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고기가 콧김을 품어대는 덩치 큰 포유동물에서 잘라낸 살덩어리가 아니라 스티로폼 접시에 놓인 새빨간 타원형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세계는 항상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만 우리는 그걸 모두 놓치고 있다.

우리가 치를 대가는 그보다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 중 가장 큰 것을, 바로 야생의 자연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데, 우리는 생명과 너무 심하게 단절된 탓에 그에 대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조 차 어려워한다. 심지어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도 없다. 매년 플로리다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우림이 파괴되고 있다고?" 아하함, 하품이 나네 종들이 멸종하는 속도가 인류가 끼어들기 전에 비해 100배 내지 1000배나 빨라졌다고? 하암, 하아암, 우리는 도무지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정도로 각성하지 못하며, 생명의 세계는 우리와 너무 멀어졌고 너무나 무관해 보인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그리고 이 지경에 와 있음을 깨달은 지금, 어떻게 여기서 탈출해야 할까? 이 책은 이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는 나의 시도다. 이 책에는 우리가(과학자들과 나머지 사람들 모두)이 낯선 장소에 도달한 여정의 이야기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지도가 담겨 있다.

우선 나는 내 물고기들을 되찾고 싶다. 알고 보니 나는 뱀들과 새들과 물방울을 튕기는 매혹적인 물고기들로 가득한 세계를 내게 보여줬던 유년기의 숲에서 마음껏 활개치는 움벨트와 함께하던 그 시절, 처음부터 올바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비록 과학을 대단히 존경하는 사람이기는 해도 나는 물고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야겠다. 우리가 과학을 아무리 많이 필요로 하더라도(실제로 우리는 과학을 많이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물고기도, 아마 모두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끌미끌하고 반짝거리며 물속을 헤엄치는 그 동물들은(자연탐구가들이 기나긴 세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알아보았던 다른 모든 생물과 함께) 우리와 생명의 세계를 연결하는 중심 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제 터무니없게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이 이상한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다놓은 여정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야기는 분류 과학의 초창기, 그러니까 움벨트가 내쫓기기 오래전, 현재 우리가 빠져 있는 냉담한 분리 상태가 생기기 한참 전, 사람들이 생명의 세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던 시절에서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아마 제일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 있던 인물, 당대 지성계의 가장 거대한 문제인 생명의 세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뛰어들었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이야기에 시동을 건 인물에서 시작한다. 바로 과학적 분류의 아버지가 된 카롤루스 린나이우스다. 그는 물고기와 얼룩말, 나방, 그리고 수정처럼 맑고 파란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우리가 오랫동안 알아보았던 다른 모든 것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었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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