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삶은 기적이다

백_일홍 2023. 12. 19. 17:50

삶은 기적이다,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윈델 베리


I. 알지 못함

어떠한 기준에 의거하든, 내가 보기에 세계를 피조물이 아니라 기계로 재분류하는 것은 복잡다단한 도덕적 사항들을 환원주의적으로 축소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피조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존경'에서 '인식'으로 바뀐 것도,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청지기에서 절대적 소유자, 관리자, 기술자로 바뀐 것도 도덕적 환원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함(holy)"을 "전체성(holistic)" 으로 바꾼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성을 지닌다. 18

시인이자 학자였던 캐슬린 레인은 '거룩함'과 마찬가지로 삶은 오로지 경험됨으로써만 알려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했는데, 그 말은 정곡을 찌른다. (The Inner Journey of the Poet, Braziller, 1982, 180-181쪽)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내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통받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삶을 기뻐하는 것이다. 고통받으면서, 또 있는 그대로 기뻐하면서 우리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서 우리는 생명을 이해했다는 누군가의 주장에 의해 생명이 소유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생명은 우리가 함유하는 것이지만, 우리 너머에 있다. 어떻게 해서, 왜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생명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지 못한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만들 수는 없다. 생명은 통제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통제는 환원주의와 함께 엄청난 파괴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생명은 거룩하다. 생명에 대해 달리 생각 하는 것은 생명을 노예화하는 것이며, 예견하건대, 인간이 아니라 생명의 어리석은 주인들이라는 소수의 인간 종자를 만들어 낼 뿐이다. 19

이제는 새로운 종류의 해방 선언이 필요하다. 특정한 인종이나 종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해방 선언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에드가가 한때 주제넘었으나 이제는 절망에 빠져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했던 일이다. 19


자비로운 신이시여, 당신이 뜻하실 때 제게서 숨을 거두 이 가십시오.

악한 영이 다시 저를 유혹하여 당신이 허락하시기도 전에 죽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 도록 해주소서.
(IV, vi, 213-215쪽)

이 기도에서 글로스터는 삶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린다. 마치 자신이 소유한 물건처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삶은 포기하고 기적과 신비로서의 삶을 돌려받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의 거듭남은 "아버지, 훌륭한 기도입니다(IV,vi, 215)라는 에드가의 반응을 통해 인정된다.

더욱 많은 정보나 더 나은 이론을 축적한다 해도, 더욱 정확한 예측가능성에 도달하고, 엄청난 주의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인간이 과학과 산업 활동에 생명을 이용하는 행위는 커다란 위험성을 내포하며, 이 위험성을 줄이거나 완화시킬 방법은 없 다. 생명을 기적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 21

인간의 문제 두 가지
1. 아마도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는 결코 무언가로 축소되거나 환원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지 가운데 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해진다.

 "진보"를 신뢰하거나 이른바 "천재"라는 사람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믿는 것은 나쁜 과학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나쁜 종교다.

2. 악이 존재하며, 그것은 늘 현재하고 살아 있는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언제나 악한 의도들이 원래 선한 의도로 시작되었던 수단들을 접수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농업을 산업화시키고 (매우 한정된 기준에서) 더 효과적이고 생산성 있는, 일하기 쉬운 산업으로 만들어주었던 기술적 수단들이 동시에 농업을 더욱 유독하고, 폭력적이며, 취약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가지 확실한 악은 우리 자신이 만들 수 없는 것, 가령 생명을 쉽게 파괴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우리의 수단이 대단히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불완전한 지식을 오만하고 위험한 행동의 근거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을 문화적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지적인 학문 자체가 가공할 위험이 될 것이다. 23


물론 내가 지금 과학이나 그의 다른 지적 학문분야의 폐기를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 그 기준과 목적의 변화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행동의 기준은 기술적인 능력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의 성격에 근거해야 한다. 무게중심을 생산성이 아니라 지역에 대한 적응성에, 기술혁신이 아니라 친 밀성에, 힘이 아니라 우아함에, 비용이 아니라 검소함에 두어 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건강과 관련해서 규모와 의도의 타당성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다시 우리는 절망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24


II. 타당성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서 타당성 문제를 제기하는 데 과학이나 예술, 종교가 점점더 무능 력해지고 있다는 데 대한 것이다.  

타당성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행위가 우리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주변 환경에, 그리고 우리의 희망에 적합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의 실질적인 맥락과 영향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맥락을 벗어나서 말하거나, 행동하거 나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불가피하게 다른 존재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다른 존재들의 삶 역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파괴할 수도 없는 기준에 의해 측정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기 준에 의해서, 그리고 유일하게 이 기준에 의해서만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위기가 왔음을 안다. 

자연 안에 있는 자신의 자원들을 모두 파괴하는 문명은 타당 성의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게 만든다.27

전문가주의, 지역성의 시험에 떨어지다.
이들은 정신의 우월함과 경력의 탁월함에 투항한다.(후자는 전자의 논리적 귀결이다.) 29

지역에 천착한 답변, 작은 답변 vs
큰 답변, 획일적이고 보펀적인 답변,
크기와 수에 의해 성공을 측정하려 한다. 

전문가주의, 산업주의적 방법, 경력주의, 이윤에 투항해버렸다. 30

이러한 현상은 전 영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지만, 과학이 모든 영역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범주이고, 점점 더 나머지 영역에 대한 일종의 규범을 제시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과학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오늘날 사회에서 과학은 중세에 교회가 했던 것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16쪽) 그렇다면 과학은 어떠한 종류의 종교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기능하는지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30

기상학자나 경제학자처럼 예측 능력 자체가 곧 그들의 존재 이유인데도 자주 잘못된 예측을 하는 "과학자들"로 인해 예측의 의미는 저널 리즘의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과학의 또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확신의 남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과학자가 아닌 우리들이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알지 못하는 것들에 직면했을 때 가지게 되는 입증되지 않은 확신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전문성의 위력과 또 유능한 과학자 개인의 설득력 때문에, 과학적 방법에 대한 이 정당한 확신은 모든 것을 알고 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의 힘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맹신으로 옮겨간 것 같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마치 복음전도자 같은 행세를 하고, 세상을 구원하려 는 듯이 나서게 되었다. 35

이런 일은 우리가 비판적 책무, 무엇보다도 자기비판적이 되어야 할 책임을 전반적으로 방기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35

어째서 과학 분야 안에서는 확고하고도 깊이있는 과학 비판 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한가지 이유는 그러한 자기비판, 특히 공적인 자기비판이 "비전문가적"이라고 간 주되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항상 "응용" 가능성을 염두 두고 있는 현대과학은 너무 돈벌이가 잘 되거나 잘 될 수 기 때문에 자기비판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35

오늘날 우리는 응용과학이 그러한 교정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실험의 규모는 엄청나게 확대되어서 오늘날 과학은 전세계적인 스케일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결국 그 결과가 체르노빌 방사선 누출 사고이며, 오존층 파괴이고, 생물학적 멸종의 증가, 그리고 전지구적인 환경오염 이라고 할 수 있다. 36

과학은 계속해서 재앙을 확산시키는 일로 분주하다. 그들은 지금은 기적으로 각광을 받지만 나중에는 재앙이 될 일을 일단 저질러놓는다. 그리고 병주고 약주는 식으로 자신들이 그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이러한 작당에 의해 이루어지는 진보라는 것이 사실상 계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아내려는 사람은 과문(寡聞)인지 몰라도 내가 알기에는 없다. 37



III. 에드워드 윌슨의 《통합》에 대하여

오늘날 "개발된" 세계 모든 곳에서 인간 공동체와 그들의 자 연적, 문화적 자원들은 파괴되고 있다. 그것도 자연재해나"하 느님의 개입", 또는 이민족의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 라고 알려진 일종의 합법적인 야만주의에 의해 파괴가 이루어 지고 있다. 오늘날 경제는 과학의 권위와 응용 가능한 지식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한다. 41

에드워드 윌슨의 <통합(Consilience)》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내 연구를 한정시키겠다. 그것은 책 한권만 다루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윌슨의 가정은 그의 동료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고, 일간지 과학란을 읽는 보통 수준의 독자라면 웬만하면 소화할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윌슨은 자기가 우상파괴적인 일을 하고 있는 척하지만, 실제로 는 대중적인 과학 정통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그의 책은 과학은 전적으로 선하며, 무한한 진보로 인도하고, 모든 답변을 가지고 있다(또는 가지게 될 것이다)는 대중적 믿음에 부합해서 쓴 것으로 읽힌다. 42

나는 윌슨이 나처럼 환경보존론자이기 때문에 그의 책에 관심을 가졌다. 아마 몇가지 점들에서 우리는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들도 있는데, 이것이 내게는 더 심각하게 여겨지고, 훨씬더 중요하게 생각된다. (이 점은 앞으로 분명해질 것 이다.) 우리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그는 시종일관 대학에 속한 사람이었고, 나는 늘 학교 밖에 있을 때가 훨씬 속이 편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윌슨은 오늘날 대학의 세분화된 분과 학문체계, 전문화된 기준들, 기업의 후원을 받는 연구시스템, 그리고 논문발표 실적에 근거한 승진과 종신교수임명 제도 같은 것들에 만족해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것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런 것들이야말로 배움과 세계에 대해 해를 끼치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관 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더욱 중 요하게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태도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대단히 인습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의 태도는 산업주의의 가치나 심리학과 아주 잘 부합된다. 42

윌슨이 지식과 무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나는 여기서 책에 나타나는 그의 근본적인 편견들 가정들을 열거할 것이다. 

《통합》은 사실은 과학자의 신조이다. 43

1. 물질주의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우선 윌슨은 물질주의자다. 그는 세계는 '합법칙적인 물질세계"(8쪽)이며, 모든 법칙들은 경험적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고, 과학적 증명에 종속되어 있다고 본다. 그는 "별들의 탄생에서 사회제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물리적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는 물질적 진행과정에 근거한다"(266쪽)고 주장한다.

그는 과학자이며, 우리는 과학자에게 물질적으로 입증 가능한 진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신념으로서의 물질주의로 인해 그는 몇가지 골치아픈 문제에 말려든다. 이 문제들은 자연세계의 보존에 대한 그의 순수한 관심과도 명백히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좀 작은 문제를 언급하자면, 세계를 객관화시키는 물질주의
의 경향을 들 수 있다. 즉 연구자인 "객관적 관찰자"로부터 세 계를 분리시키는 경향 말이다. 이러한 객관화의 경향으로 인해 세계는 "환경"이 된다. 윌슨은 보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복 해서 이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그 안에 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 일부는 아닌 "주변세계"로서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러한 객관화의 과정과 그 언어로 인해 한가지 질문이 제기 된다. 그것은 자신이 이른바 '환경'을 먹고 마시고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지적인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객관적인 관 찰자에 의해 환경보존과 관련된 문제들이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윌슨의 경우처럼 엄격하게 원리화된 이론적 물질주의는 불가피하게 결정론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하는 일들, 행위들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고, 그것은 생물학적 법칙들에 의해 결정되며, 궁극적으로는 물리적 법칙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이 자유의지 개념과 직접적으로 대립된다는 사실을 안다. 자유의지는 그가 과학자로서도 쉽게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고, 또 환경보존론자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 딜레마를 아주 기이한 방식으로, 일관성 없게 해결하고자 한다.

우선 그는 우리에게는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이 있고, 또 필요하다(119쪽)고 말한다. 다음에 그는 이 환상이 "생물학적
적용현상"(120쪽)이라고 말한다. 그는 진화론적 측면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에 이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바보처럼 환상을 믿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주장은 확실히 낙관주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물질주의가 환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된다면, 그런 물질 주의를 대관절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자기 주장을 계속 고집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적응력"(97쪽)을 부여한 "자기기만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윌슨은 나중에 환경보존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는 "현명하게 선택" (297쪽) 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을 단 호하게 주장한다. 환상인 자유의지에 근거해서 어떻게 현명한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지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지만, 윌슨 역시 현명하게도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 기로 한 것 같다. 45

2. 물질주의와 신비

거기서 더 나가서 그는 물질주의를 작은 발판으로 삼아 그와 반대되는 것들을 낮춰 보고(그렇게 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선심 쓰듯 대한다. 그는 전투적인 물질주의자라서 어떠한 종류의 신비에 대해서든ㅡ아니 어떠한 종류의 모호함이나 불확실함에 대해서도 ㅡ거의 교조적일 정도로 참을 성이 없다. 그는 신비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 곧 무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신비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말을 과학의 미래와 관련해서 사용한다. 그의 공식에 따르면 알려지 지 않은 것=앞으로 알려질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다룰 과학의 미래는 신비다. 

신비 그 자체와 마주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으며, 이 때문에 인류가 신비 자체와 마주할 때마다 늘 배워온 가르침을 그는 전혀 배우지 못했 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의 책은 일종의 학문적 오만이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에게도 신비는 문젯거리이고,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신비는 인간의 무지로 인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인간의 무지는 늘 치유 가능하다. 그러므로 신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경배는 커녕 존중이나 경의도 아니고, 오로 지 "해답"을 추구하는 것만이 신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46

그러나 경험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신비에 한
해서만 그러한 추구는 과학적일 수 있다. 과학자가 자신이 풀 수 없는 신비를 부정하거나 얕잡아 볼 때 그들은 더이상 과학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47

윌슨은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현실에 대한 이처럼 편협한 정의를 고집함으로써 윌슨이 종교를 반박하지는 못한다. 단지 그는 종교를 오해할 뿐이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 그외 달리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을 아는 한가지 방법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를 이해하지 못한다.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는 종종 초월, 창조, 원형, 경외, 성스러움 같은 말들을 전유하고 남용한다. 48

그러나 물질주의는 <통합>이 깨닫지 못하는 한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설사 마지막에 경험주의자가 "손에 잡을 수 있는 모든 현상들을 물리적인 법칙들로 환원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동그란 원을 하나 그려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를 탄생시켰던 질문, 즉 이 물리적인 세계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물리학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윌슨이 주장하는 물질주의가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어도, 결국 그것 때문에 그는 객관적 증거와 통계적 검증의 차원을 벗어나버렸고,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50


3. 제국주의

윌슨의 과학적 "신앙"(그는 때때로 이렇게 말한다)은 궁극적 으로 모든 것을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앙이다. -다 시 말해 “사실들과 사실에 근거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설명을 위한 공통의 토대를 마련하고,”(8쪽) 모든 학문분야를 “통합"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것, 신비, 인간의 한계 같은 것들을 환상이나 무의미라고 간단히 밀어내버림으로써 현재의 모든 지식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모든 지식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까지도 과학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통합"이라는 개념은 명시적으로는 제국주의적이고, 암시 적으로는 전제주의적이다. 윌슨은 영역확보에 대한 야심을 전혀 감추지 않는다. 그는 모든 분과를 연결해서, 또는 통합해서 보고 싶어한다. - 그러나 엄격하게 그는 과학의 토대 위에서 그렇게 보고 싶어한다.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협상에 초대되지 않거나, 적어도 그들 자신의 언어를 쓰면서 참여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과학과 예술] 사이의 교류의 열쇠는...과학적 지식과 미래에 대해 과학이 지니는 올바른 감각에 의해 해석이 재활성화되는 것이다."(211쪽) 만일 현대과학과 윌슨의 주장이 내포하는 정치적, 경제적 함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긴다면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뇌 과학자들을 후원하는 정부나 민간 후원자는, 가령 지난 세기의 왕립 지리학위원회처럼 대단히 관대하다. 그들은 해안가의 땅을 한번 보기만 해도 역사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내륙으로는 처녀지가, 미래 제국의 자태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100쪽)

윌슨의 책은 정치의 존재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데, 아마도 거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과학이 아닌 모든 것은 과학이 되어야 하며 또 과학이 될 것이라는 윌슨의 확신은 그 자신이 대단히 소유욕이 강한 정신의 소유자이며, 지적으로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말해준다. 52

그의 입장은 논리가 분명하며, 그 논리는 나를 아주 불안하 게 만든다. 만일 사회이론이 (윌슨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일반 적이고, 통합적이며, 예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면, 어떤 사회이론이든 거의 불가피하게 전체주의적이 되지 않겠는가? 
 
계몽의 '새로운 자유를 칭송한다. "그것(계몽)은 모든 종류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자유로운 탐구의 윤리에 우선권을 부여한다."(37쪽)

윌슨의 "통합"이 지시하는 방향은 죽은 확실성이라는 경험주의적 교리다. 그것이 "설명을 위한 공통의 토대이며, 그 언어들은 경험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배제해 버린다. 나머지는 허울뿐인 “인도주의"가 맡는다. 무엇이 참인지 확실하게 안다면, 진리를 행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만일 정말로 모든 것을 특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이 주장에 대해서도 논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 게도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있는, 그리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과학은 인간적인 과학이다. 과학은 인간적 한계를 지니며, 늘 인간의 무지와 오류를 포함한다. 과학이 발명해내거나 발견해낸 해결책들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또 그 자체가 새로운 문젯거리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특정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핵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발견해냈지만, 핵의 사용은 우 리 모두에게 대단히 위험하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핵폐기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54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이해의 한계 안에 한정되어 있다. 윌슨은 흡족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예측한다. "그러므로 세계는 종합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올바른 정보를 올바른 시점에 한데 모아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현명하게 중요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269쪽) 종합은 "전체성(holism)"이라고 그는 말한다. 윌슨은 자신이 말하는 종합이 전체적이지도, 거룩하지도 않으 며, 단지 우리 자신이 부분으로 쪼개서 우리 방식대로 이해했 다가("우리는 분해하기에 앞서 살해한다") 다시 우리가 이해하 는 방식대로 한데 끼워 맞춘 가공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 정하지 않는다.

인간 사고체계의 오류가능성은 늘 불완전성의 결과다. 무언가를 포함시키기 위해 우리는 늘 무언가를 제외한다. 모든 것 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함시킬 수도 없다. 우리를 포함하는 것을 우리가 포함시킬 수는 없다. 체계의 불완전성은 그 체계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나 그로부터 혜택을 입는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체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체계의 불완전성이 아주 명확하게 보인다. 윌슨은 전혀 괘념치 않지만, 현재의 체계가 지니는 한가지 중요한 약점은 그것이 인간 영혼의 생애를 비롯하여 불가해하고 형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제외시킨다는 점이다.

윌슨이 신경을 쓰는 한가지 약점은 오늘날의 체계가 생태학적 건강의 원칙, 또는 표준을 도외시한다는 점이다. 과학-기 술-산업은 우리로 하여금 극단적으로 미세하고 근접한 사물 이나 극단적으로 크고 멀리 있는 사물들을 (외견상) 아주 정 확하게 기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와 공동체에 대해 적절하게 기술하는 일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아마도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원자나 분자, 유전자, 또는 은하수와 위성, 별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또 생태학적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과학자가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58

그러나 그의 책에서 가장 비과학적이면서 동시에 문제가 되는 것은 윌슨이 무엇이든 알려지지 않은 것을 전유하려 한다는 점
이다. 그는 ~까지 (until)"나 "아직 (not yet)"이라는 말을 번갈아 연구에 사용하면서 그렇게 한다. 과학자들도 모르는 것이 있다고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과학자들이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다른 것이 알려지기까지는 이것 역시 알려질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반복해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 "과학을 넘어서 배움의 수많은 분과들을 가로지르는 통합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은 아직은 과학이 아니다...그것은 제1원리로부터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도 없고, 일련의 확고한 경험적 실험에 토대를 둔 것 도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것으로는 그렇다."(9쪽) 여기 나오는 "아직 (과학이) 아니"라는 말이야말로 '신비'를 '미래의 지식으로 전유하기 위한 도구다. 

이렇게 해서 제 딴에는 생명을 설명하고 이용하겠다는 사람들이 생명과, 또 미래의 생명까지도 자신의 소유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신비는 해결하려고 들면, 더이상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문젯거리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환원 가운데 가장 폭압적인 환원이 이루어진다. 자신을 극대화한 과학이 "미래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게 된 것 이다.

이러한 언어의 실질적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도덕적 맹목성 이다.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고 있지 못하다는 식의 주장에 근거해서는 규모와 행위의 타당성 문제에 관해 건전한 사고를 해나갈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규모와 행위에 제한을 두
어야 한다는 주장은 간단히 묵살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한계 ㅡ주로 우리가 가진 지식과 인식능력의 한계ㅡ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자연의 한계 문제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을 넘어서 배움의 수많은 분과들을 가로지르는 통합의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어째서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얕은 물을 건너고 있다면, 보이지는 않지만 물 밑 에 돌 징검다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물을 건너도 괜찮다. 실제 로는 돌 징검다리가 없다 해도, 얕은 물에서는 건너다 익사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물이 깊고 물살이 빠른 경우라면, 그런 징검다리가 확실히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예 건너지 말아야 한다.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서 엄청난 양의 핵폐기물을 계속 축적하는 것은 어리석다. 만일 핵 과학자들이 그냥 "우리는 모른다" 고 겸손하고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훨씬더 자신있게 미래를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61

분명 우리에게는 한계가 필요하다. 우리가 실제로 '알지 못 하는 것은 존재하며, 그것은 결코 '앞으로 계속 연구해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앞으로 연구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둔갑시키는 것을 그만두 어야 한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도 양심적인 정 신이라면,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주 고백해야 하고, 또한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오래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야 한다. 어쨌든 (통합)은 물살은 무섭게 빨리 흐르는데 그것은 보지 못한 채 추측상으로만 있는 징검다리 돌 하나에서 다음 돌로 뛰어넘어 가면서 미친 듯이 기뻐 날뛰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1


4.환원주의 

자연은 다른 모든 법칙과 원칙이 궁극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물리적 법칙들에 의해 유지된 다."(55쪽) 62

그러나 환원주의에는 대단히 중요한 내적 한계가 존재하며, 그것은 추상화의 문제다. 환원주의는 구체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에 흡수시키거나, 구체적인 것에 일반적인 것을 덧씌우는 경 향이 있다. 전혀 물질성을 지니지 않은 채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통계적 평균 같은 것이 추상화의 일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이 실은 물질세계에 대한 과학의 경험적 지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과학의 역설이다. 경험적 으로 말하자면 평균도 없고, 유형도 없다. 관념적인 종과 표본들 속에서 구체적인 피조물 자체, 즉 개별 피조물은 실종된다. 분류, 해부, 설명하는 행위에 의해 결과적으로 피조물 그 자체는 사라지고 종류와 해부학, 해설만 남는다. 추상화 과정에서는 피조물(혹은 피조물의 거주지) 자체와 그에 대한 형식화된 지식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63

개체 피조물의 독특성은 신체나 행태의 변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 자체에 고유하게 내장되어 있다. 개체의 생명은 수태에서 번식,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 종 구성원들의 전형적인 사이클, 즉 그 "생명사"가 아니다. 개체 피조물의 생명은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다. 개체 피조물의 전체성은 생리학이나 생물학이 아니라, 그 생명 안에 고유하게 존재한다. 피조물과 장소들의 이러한 전체성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인데 머무르는 냉철한 지성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애정과 친숙함 속에서만 스스로를 드러낸다.

현대 (과학-기술-산업) 의학에서는 환자 개인을 그들의 삶 으로부터 분리해서 나이와 성, 병력, 경제적 상태 등 어느 특정한 범주의 대표자나 표본으로 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환자에 대한 모욕이다. 환자를 "상대하는" 전문의는 아마 과거에 한번도 그 환자를 본 적이 없고, 환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다시 보지도 않을 것이지만, 환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정확히 아는 척할 것이다. 똑같은 종류의 모욕이 오늘날 정치 분야에서도 자주 일어나는데, 거기서는 개인을 인종이나 성, 지리적·경제적 이념적 특징의 다양한 범주들과 관련해서 전형적인 장점과 단점, 불만사항을 가진 인물로 규정한다.

만일 과학이 제대로 분류작업을 하고, 알고 있는 것을 잘 끼워 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다면, 그때 과학은 고유하게 추상이나 추상적 범주들과 관련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주 과학자는 "세포"나 "유기체", "유전자", "생태계"에 대해 말 하면서 충분히 말했다고(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정확한 과학적 분류를 하고, 명칭을 부여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이것은 착각이다. 그러한 것들은 지나치게 확장된 언어이며, 잘못된 기술이고 정확성을 가장한 언어일 뿐이다. 그러한 언어는 결코 추상이나 추상의 차가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과학자들조차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한 여성", "한 남성", "한 아이", "한 사례"와 같은 범주적 언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정을 느낄 때 우 리는 추상과 추상화의 범주들을 깨부수고, 고유한 생명과 장소 를 지닌 피조물 그 자체와 대면하고 싶어한다. 윌슨이 (그리고 내가) 내세우는 환경보존을 위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사물은 범주로서가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개체 피조물로서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66

사람들은 그냥 가치 있다고 결론내린 것들은 착취하고 수탈 하지만,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옹호하고 방어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를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구체화하는 언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아는 것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추상적이고 "객관적이며", 비인격적이고 비열정 적인 과학의 언어는 사실 특정한 사물을 알고, 또 확실하게 알 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가령 그것은 종과 종 다양성의 가치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보호하는 것은 친숙함과 경외, 애정 같은 언어 인데, 과학의 언어가 그런 언어를 대체할 수도 없고, 또 그런 언어가 될 수도 없다.

산업과 상업의 추상화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교환 가능하며,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은 너무 쉽게 산업과 상업의 추상화에 동화되는 경향이 있다. 가격이 같으면 가치도 같고, 이윤이나 유행 면에서 대체가 가능하다면, 실제 로도 같은 것이라는 일종의 균등주의가 존재하는 것 같다. 숲과 들과 주차장은 같다. 개조 비용에 문제가 없다면, 그 차이에 대해 뭐라고 토를 달 이유가 없다. 이 장소나 저 장소나 마찬가지고, 이걸 쓰나 저걸 쓰나 마찬가지며, 이 생명체나 저 생명체나 같다.   - 가격만 괜찮다면 말이다. 그래서 옳고 그름 또는 좋고 싫음에 대한 정치적 감수성이 상업적 무차별주의, 내지는 상업적 공격성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상업적 호환성의 교리이며, 우리는 그것이 마치 세계의 보편적인 법칙인 양 아무 장소나 동식물, 그리고 동료 인간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적용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과학을 흉내내어 천국이나 지상에 대해서는 말할 줄 모르고 오로지 개념들만을 말할 뿐인 균등한 언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구체적 사물에 대한 사랑은 고사하고 열정적인 관심조차 허락하지 않는 뿌리뽑힌 수사학이다. 67

개별적인 삶과 장소의 소중함에 대한 사상은 이러한 환원주의, 혹은 추상화와 정반대된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전통에서 나온다. 그것은 평등주의적인 어떤 개 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거기서 나올 수도 없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면,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다. (그리고 피조물의 개별성을 좋아하는 이 옛부터 내려온 전통은 오늘날 우리가 "개인주의"라 칭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겠다. 그것은 개인주의와는 정반대다. 개인주의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개인이 다른 개인들을 무시한 채 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 를 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개발하는 사람이 한 곳을 보존하는 대신 다른 곳을 망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일종의 "개발지역 교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과학은 상업과 똑같은 방식으로 냉정하게 면적을 재고 균형을 맞춘다. 이러한 거래에 연루되어 있는 개 발업자들은 어김없이 생태주의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정들어 떠나기 힘들다는 한가지 점을 제외하면, 한 장소를 다른 장소와 교환 못할 이유가 없다. 만일 그곳에 살고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장소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할 수 없다.

애정이나 열정과는 상관없이 단순한 연구 대상에 불과한 동 식물이나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삶과 연루되어 있고, 자기를 투신했던 생물이나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를 열정적으로 바칠 사람 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나는 물론 많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종류의 헌신을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68

나는 전 생애에 걸쳐 이 장소를 알고 있다. 나는 이곳과 이곳에 속한 피조물들 을 보호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37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일해 왔고,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바쳤다.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곳을 보호하려면, 모든 종류의 범주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 이곳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소가 현존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
나는 최소한 몇가지 범주들을 알고 있으며, 그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때로는 그 범주들이 유용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 나 자신의 삶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지 백인 미국 남성의 대표자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는 새나 동물, 식물도 특정한 성이나 종의 대표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고유한 우리 자신의 방식과 형태, 습관을 가지고 있다. 70

이곳의 삶은 언제나 기대나 예견, 유형화를 넘어서는 것으로 내게 나타나며, 특이하고 매분마다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것으로 세상에 선사 된다. 그리고 다음에 나는 이 삶이 하나의 기적이며, 절대적으로 누릴 만한 가치가 있고, 절대적으로 간직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71

우리는 신비 안에서, 기적에 의해 살아 있다. 에르빈 샤르가프는 "삶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Heraclitean Fire, The Rockefeller University Press, 1978, 20쪽)이 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알고 있다. 언어의 구조물(사고의 구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 경험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지, 경험이 언어의 구조물 안에 있는 것이아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은 컴퓨터화와 이론을 넘어서듯 언어도 넘어선다. 과학의 언어가 다른 언어들보다 덜 제한된 언어라고 볼 이유는 없다. 아마도 우리는 환원의 과정 후에 과학자들이 종합과 전체성이 아니라, 피조물과 애정으로 가득 찬 세계로, 우리가 살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세계로, 모든 과정들에 앞서면서 동시에 그 뒤에도 살아남는 세계로 돌아오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5. 기계로서의 피조물

인간은 유기체적 기계

가장 크고 분명한 차이만을 말하자 면, 기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인 반면, 세계나 유기체는 그 렇지 않다. 73

뇌는 기계
정신은 활동하는 뇌, 정신=뇌=기계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이론적 가능성을 가정하면서 문제의 요점을 피하고 있다. 왜냐하면 몸이 없는 뇌가 있을 수 없고, (오랫동안) 친숙한 터전이 없는 몸 역시 있을 수 없기 때 문이다.

 정신=뇌+몸+세계+지역의 거주지+공동체+역사. 여 기서 "역사"는 자료화된 사건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언어, 기억, 도구, 기술을 아우르는 전체 유산을 의미한다. 76

정신은 고향을 떠나 얼마나 멀리까지 가도 여전히 정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마 어떠한 과학자도 아직까지 이것을 계산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있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정신은 고향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 있을 수 없다. 기계는 고향을 떠나 얼마나 멀리까지 가도 여전히 기계일 수 있을까? 이론상, 기계는 파괴되지 않는 한 끝없이 멀리까지 갈 수 있다. 77

정치와 환경보존에서, 함의
. 기계적 효율성, 노예제, 가장 부유한 자만 살아남는다. 경제 전체주의 
. 우리는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며, 또 거기서 유래했다. 보전은 그러한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질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 기계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다. 아마 기계로서의 피조물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82

확실하게 내가 반대하는 것은 기계와 기계적 관념이 피조물의 삶의 조건과 상황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우리의 대책 없음에 관한 것이다. 적어도 2세기 동안이나 우리는 기계의 지배가 점증하는 것을 허용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것은 다른 피조물과 우리 자신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다.

[우리가 처한 파괴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의 기술적 능력을 경제적 삶의 준거점이나 표준으로 사용하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대신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생태계와 인간 공동체의 건강을 우리 경제의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84


6.독창성과 "두개의 문화"

현대과학의 신, 두 모형
. 셜록홈즈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선구적 항해사, 발견자

"새로운 영토"
"어머니 광맥"
"처녀 토양"
"처녀지"
"전진"
"최첨단"

예를 들어 멕시코를 침략한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자 헤르난 코르테즈와 그에게 처절하게 패배당한 아즈텍 문명의 지도자 몬테주마가 신대륙 발견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85

윌슨은 "처녀지"를 찾아 나서고 "제국의 미래의 윤곽을 그리는 것은 "인간 본성에 본래적"(100쪽)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정한 몇몇 사람들의 본성에 대해서만 그런 것 같고, 그들 중에는 최악의 인간들이 있다. 그것은 낭만적 개인주의와 자기과시적인 작품들, 가령 테니슨의 <율리시즈> 같은 작품들에 의해 문화적으로 정당화된다. 이 작품에서 (단테의 "인페르노", 즉 지옥으로부터 복귀한) 영웅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동경하고,

지는 별처럼 지식을 추구하고 
인간 사유의 마지막 경계를 넘어서고자

갈망한다. 테니슨은 말하지 않았지만, 단테는 율리시즈가 지옥 의 사악한 조언자들(Evil Counsellors)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 한다. 우리는 그와 동일한 영웅적 야망을 문화적 이상으로 삼고 그 안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좋은 점만을 보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사춘기의 환상과 성인의 과대망상, 지적 속물근성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지, 끊임없이 지속되는 제국주 의, 식민주의의 역사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 해서는 외면하려 한다. 87

오늘날 대학의 전문가들은 [공동체의] '건강'이라는 주제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정신과 공동체의 삶의 극단적인 파편화와 해체를 향해 가고 있다. 92

나는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 언제 어디서나 거의 배타적으로 독창성과 혁신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그것은 삶보다 일을 선택할 것을 강요하며 개인적 희생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향해서도 큰 희생을 요구한다. 93

대학이 정한 삶의 통제 방식, 시간=일=최초의 발견=출세에 복종해야 한다. 
고도의 생산성과 영구혁신이라는 산업주의 경제의 이상에 대한 복종이다. 95

내가 반대하는 것은 학교를 공장으로 만들고, 독창성이나 혁신을 그 많은 노력의 유일한 목적이자 척도로 삼는 데 대한 것이다. 사실 윌슨은 젊은이에 대한 충고를 통해 환경 보전론자로서 그가 그 효과에 대해 그토록 마땅찮게 여기는 경제체제의 요구들에 정확히 일치하는 교육제도를 영속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95

일주일에 80시간을 "아주 중요한 연구"에 매진하는 젊은 박사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건강에 자신의 연구가 끼칠 수 있는 영향으로 인해 놀라기는커녕 자기 공동체를 알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97

그는 현대과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계몽주의 이전에는 어떠한 역사도 중요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이 "과학 이전의 문화"에 대해 그는 아주 짧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언제나 잘못된 것이었다." 그들은 "실제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기상천외한 사변이나 신화를 꾸며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도구들과 지식축적이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ㅡ 없었다면, 인간은 인식의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깊고 어두운 풀장에 지성을 가지고 태어난 물고기들에 비유될 수 있을 것 이다."(45쪽)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냉혹한지, 왜냐하면 이로 인해 그는 대부분의 인간 역사와 인간의 삶, 그리고 대부분의 문화적 유산을 밀어내버리기 때문이다-혹은 그 경우 그에게 남겨진 세계가 얼마나 협소하고 답답한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종교와 신화의 지적 감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물질주의와 환원주의적 인식의 감옥에 자신을 맡겼다. 99


그는 내심 겉으로 드러나는 다수 대중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들은 계속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데이터에 근거한 새로운 지식이 오래된 지식보다 필연적으로 나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을 대체하고 무효화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미래로 가는 철로는 유전적(또는 기술적, 경제적) 결정론에 의해 놓일 것이고, 앞을 향해 전진함에 따라 우리는 정당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과거의 철로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일 그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손실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강력하고 쉬우며 확실한 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2

과학이 지금까지와 같이 계속 발전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으리라고 확신 있게 예언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과학-기술-산업의 진보가 시작된 소위 산업혁명시대부터 있었지만, 괴로워하는 사람들 역시 그 때부터 있었다. ... 이 괴 로워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지성적으로 뛰어나고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단순한 향수나 반동적 태도, 미신적 공포 때문이 아니라, 지식과 견실한 사유, 문화적 자극에 근거해서 발언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들 안에 "깊이 뿌리박 힌 역겨움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무엇에 대해 괴로워했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은 냉혹한 획일주의에 의해 모든 것이 단순화되고 생명이 파괴되는 데 대해 예외 없이 두려워하고 역겨움을 느꼈다. 그들은 피조물과 장소들, 공동체, 문화, 그
리고 인간 영혼의 살아 있는 통전성이 파괴되는 데 대해 두려 움을 느꼈다. 또한 그들은 인간은 신적 본성과 동물적 본성에 모두 참여하지만 신도, 동물도 아니라는 인간에 대한 오래된 규범적 정의가 사라져가는 데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 이 애통해했던 것은 진보에 의한 지구의 죽음이었다. 113


"우리는 핵의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 나는 그때 그가 과학적 지성이 아니라 본능적 지혜를 말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의 말을 기억 한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직감, 즉 인간에게는 금지되어 멀리해야 하는 것이 있으며, 생각할 수 없는, 낮 선, 고유하게 생소한 것이 있다는 직감을 말했던 것이다. 

소수의 과학자들이 (핵의)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은 모든 사람을 대표해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탐구의 자유"는 즉각 기업 그리고/또는 정부가 제멋 대로 착취할 수 있는 자유로 바뀐다. 그리고 창시자들과 착취 자들의 자유는 실제로는 나머지 우리 전부를 유괴하고 감금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114

신의 가능성과 영향력은 실제적인 것이고, 거기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야만 한다는 스미스의 주장에 동의한다.

과학과 삶의 관계가 그렇듯이 나는 예술과 삶의 관계 역시 궁극적으로, 아니면 상당히 만족할 정도로 해결될 수 없으리라 고 본다. 우리는 예술과 과학의 산물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살아 있는 세계에 합류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지하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며 왜소하기 때문에 늘 뭔가 과오를 범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성취해놓은 일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에, 예술과 과학은 늘 자유롭게 그 토대를 바꾸고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세계와 서로에 대한 정의 (Justice)의 문제는 결코 끝나지 않고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자유에 대한 요구는 더 커질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제대로 사용되었을 때만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22

친밀하고 비밀스러우며 성적이고 사적인, 관능적인 부분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결코 상상력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언급된 말이거나 제시된 그림일 뿐이다. 예술성은 친밀한 감정들을 함께 하는 삶의 사건들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한 예술성이 빠진 채 욕망이나 슬픔 같은 삶의 내밀한 부분을 묘 사한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잘못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학 교와 전문가의 "객관성"이라는 것인데, 이를 통해 대학이나 기 업은 공동체를ㅡ 그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ㅡ 안개 속의 먼 풍 경을 바라보듯이 본다. 이러한 종류의 객관성은 과학에서와 똑 같이 예술에서도 나타난다. 그러한 객관성은 예술을 통해 자비 와 연민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며, 피조물과 장소의 구체성을 흐리게 만든다. 두 경우 모두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저널리즘과 전자매체에서는 친밀한 감정들을 호 기심의 대상으로 제시하거나, 그저 흥미로운 얘깃거리, 예술적, 혹은 저널리즘적 용기의 증거로 제시하고 폭로하는 일이 아주 일상화되어 있다. 보도 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린다는 기업 들이 끊임없이 하고 있는 일은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 위로 카메라나 마이크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이 냉정하게 다른 사람의 사진을 찍는 것과 사진기자가 냉정하게 시체나 울고 있는 과부의 사진을 찍는 것 사이에 무 슨 질적 차이가 있겠는가? 그것은 상상력의 실패라는 동일한 질병의 두가지 증상이 아닐까? 연민을 느끼고 공동체적 삶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폭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키지도 못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우리 모두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의 잔인성을 증대시킬 뿐이다. 127

글쓰기의 주제는 늘 변함없이 우리 공동의 삶, 이웃의 삶일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다른 인간 주
체들에게 가하게 되는 상처에 대해 무감각한 것은 글쓰기의 주제 자체에 대한 배신이며, 상상력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그러한 무감각은 과학-산업 분야에서 착취나 실험으로 인해 동물이나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은 "나는 상관 안해. 전혀 상관 안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비롭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상상력과 자비 사이의 근원적 동속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배신행위를 하면서 진리를 알고 예술을 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세계와 그 안의 이웃들, 자연과 인간이 결코 수동적으로 과 학-산업-기술의 주제가 될 수 없듯이, 수동적으로 예술의 주 제가 될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반응한다. 세계가 단순히 연구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글쓰기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 니다. 그것은 인간의 활동 이전에도, 이후에도 실제적으로 존 재한다. 글쓰기는 궁극적으로 글쓰는 대상의 건강함에 의해 평 가된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 128

그렇다면 예술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은 과학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과 똑같다. 자신보다 더 큰 관심사들에 대해 스스로 복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문가적 기준보다 더 높고 더 포괄적인 기준에 의해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타당성의 문제다. 모든 예술가나 과학자가 마치 자신이 하는 일이 유일하고 지배적인 것이기나 한 듯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하는 일이 원인들과 영향들 이라는 보다 크고, 궁극적으로는 신비한 유형 안에서 이루어지 고 있다고 보는 것이 여전히 가능한가? 만일 우리 자신이 서로에 대해, 그리고 "세계"라 불리는 자연과 인간의 이웃들 하나 하나에 대해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과학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 사이에, 예술과 삶의 예술 사이에 책임 있는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 해할 수 있을 것이다. 130


7. 뺄셈 없는 진보

월슨 그 역시 진부한 과학의 수동적 소비자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진보에 대한 그의 관념은 완강할 정도로 결정론 적이며(그것은 "진화론적인" "톱니바퀴"이다), 한가하달 정도로 낭만적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과학은, "만일 우리가 꿈을 꾸고, 발견과 설명을 위해 밀어붙이고, 또 다시 꿈을 꾼다면, 그럼으 로써 반복적으로 새로운 영역 안으로 뛰어든다면,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해지며, 우리는 우주의 진정한 낯설음을 파악 할 수 있다는 믿음에 의해 움직여진다. 그리고 그 낯설음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입증될 것이다."(12쪽) 131

 "지식은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계속해서 전지구적으로 확대된다"고 그는 말한다. (236쪽) 그러나 지식이 전지구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지역적으로는 상실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세계적으로 농촌 지역이 겪고 있는 현대사는 그러한 진리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토지 사용 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포함한다. 현대인은 일반적으로 그 본성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 역사에 대해서도 잊어버린 채 장소들을 이용한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무지하며, 필연적으로 자신들이 이용하는 것을 남용한다. 만일 과학이 엄청난 지식뿐 아니라 엄청난 폭력을 양산하는 데에도 기여했다면, 얻은 것이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우주의 진정한 낯설음을 파악하고도
농사짓는 법을 잊어버린다면 얻은 것이 무엇인가? 133

진지하게 이러한 질문을 하고 지성적으로 거기에 답변한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직접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러나 <통합>에서는 그러한 가능성이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윌슨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는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지성적이거나 비지성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그 미래에 대해 영향을 끼치는 장소가 아니다. 그에게 세계는 유전학적으 로 가장 선호되고 가장 많은 보조금을 지원받는 과학자들이 각자 "새로운 영토"에 대한 고립된 환상 속에서, 옛 영토에 대한 떨치기 어려운 애정을 각자 멀리하고 "앞을 향해 뛰쳐나감 으로써" 미래를 결정하는 장소이다. 133



IV. 환원주의와 종교

과학과 예술이 서로 다른 "두개의 문화"로 분리된 것은 분명 좋지 않다. 과학자들이 문화적 전통에 대한 의무감 없이 일하게된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이 문화적 산물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의무감 없이 일하게 된 것도 좋지 않다. 이 두 문화 모두가 지역에 대한 애정이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 없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속되고 의무감을 느껴야 하는 영원한 질서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이 엄격하게 "전문가적 기준"에 따라서만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 역시안 좋은 일이다. 137

과학과 인문학의 통합,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적 환원주의를 종교나 예술 같은 문화의 영역에 강요하게 되는데, 이 영역들은 원래 환원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어떠한 종류의 환원주의에 대해서건 드러내놓고 저항한 경우들이 빈번히 있었기 때문이다. 윌슨에 의하면 통합은 "학문분과들을 넘어서서 사실들과 사실에 근거한 이론을 연결시킴으로써 공동의 설명을 위한 기초를 만들고, 문자 그대로 지식이 '함께 도약하는 것이다."(8쪽) 그리고 "통합을 이루거나 반박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자연과학에서 발전된 방 법론들이다. 과학자들의 노력이나 수학적 추상화의 얼어붙은 방법론이 아니라, 물질적 우주를 탐구하는 데에서 그 효과가
입증된 사고의 습관에 충실해야 한다."(9쪽) 그렇다면 통합의 프로젝트는 과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학을 위한 것이다.

과학과 종교, 예술이 "공동의 설명을 위한 기초" 위에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 여부는 다음의 질문에 달려 있다. 종교와 예술이 과학과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니 종교와 예술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이것은 보다 중요한 다음의 질문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식의 정의상, 지식이라는 것 자체가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달리 말해, 설명 불가능한 지식은 없는가? 

지식과 설명(혹은 검증, 입증) 가능성의 문제 140


"아마도 ... 결국은 그것은 유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뇌의 회로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261쪽)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종교가 경합주의보다 쉽기 때문에 종교를 추종한다. (262쪽) 십자가보다는 실험실이 감당하기 더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경험주의자다. 종교에 관한 한 나는 이신론적 경향에 기울어 있지만, 대부분 그 증거는 천체물리학과 관련된 문제라고 본다. 우주를 창조한 우주론적 신(이신론이 제시하는 신)의 존재는 가능하다. 그리고 아마도 아직은 상상하지 못하는 물질적 증거의 형태로 궁극적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물질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반대로... 유기체의 진화의 방향을 설정하고 인간사에 개입하는 생물학적 신(유신론이 제시하는 신)의 존재는 점점더 생물학과 뇌과학 연구에 의해 반박될 것이다."(240-241) 나는 그의 생각이 갖는 극도의 잠정성에 주의를 환기시키 고자 강조점을 두었다. 같은 부분에서 윌슨은 한발 물러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한발 물러남이야말로 통합을 통해 해결하려는 그의 주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 낸다. 그가 틀렸다는 사실이 어떻게 "입증될" 수 있겠는가? 경험주의적 이신론자의 신앙은 천체물리학에 의해 입증되거나 아니면 반증될 때까지 아마도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마도 생물학과 뇌과학의 증거들이 "점점더" 쌓여서 유신론을 경험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 때까지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143

나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간의 실질적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 자기 능력의 범위 안에 머무른다면 서로 우호와 평화의 관계 속에서 공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믿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다시 말해 종교는 과학이 실제로 입증한 것에 대해 논박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과학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과학은 이론과 지식을 혼동해서는 안되며,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부 정해서도 안된다.

이 둘은 윌슨이 말하는 통합에 의해서는 화해할 수 없다. 왜 냐하면 그가 말하는 통합은 경험주의를 지배적인 교의, 혹은 정통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경험적으로 입증이 불가능 한 어떠한 생각에 대해서도 결코 고려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제안하는 통합은 환원주의적 과학의 방법과 가치들을 예술과 종교에 강요함으로써 본래 통합을 통해 치유하고자 했던 불연속성과 분열을 더욱 강화시킬 따름이다. 마치 나이브한 정치가처럼 윌슨은 두개의 측면을 화해시킬 수 있는 길을 자 신이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두 측면 중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144

이러한 종류의 화해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20세기의 정치가 여주듯이, 종교를 무효화시키거나 폐기하려는 시도는 늘 실제 로는 자기 자신이 종교의 위치에 오르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통합이 아주 노골적으로 제안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로서의 과학은 자유에 대한 잠재적 위험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진정한 과학을 위태롭게 한다. 과학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비과학적인 주장을 할 때만 종교로서 기능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과학은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145

종교는 경험주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실재를 다루며, 145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세계의 벽에는 구멍이 많다. 꿈과 상상, 영감, 환상, 계시 같은 것들이 그 구멍이고 그것들을 통해 소통이 된다. 확대경을 가지고 이것들을 들여다보아야 소용이 없다. 지상의 모든 이유를 넘어서, 우리는 필요보다 더 많은 아름다움을 경험하며, 분노보다 더 큰 정의를 경험하고, 정의보다 더 큰 자비를 경험하며, 우리에게 합당하고 우리가 이룬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경험한다.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악,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악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셀 수 없는 자비와 용서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윌슨이 말하는 "종교"나 "윤리"가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146

윌슨은 꿈에 대해 전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꿈은 일종의 광기이며,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환상이고, 대체로 현실과 연결되지 않으며, ...내용이 제멋대로이고, ...뇌의 기억창고 속에서 정보를 재조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이다."(75쪽) 당연히 그는 영감이나 상상, 아름다움, 정의, 자비,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할 것이다. - <통합>은 이것들을 단순히 우리 유전자 안에 내장된 생존전략으로 이해하라고 요구한다. 147

근대의 자연파괴에 대한 책임이 성서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 람들은 성서가 피조물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찬미하고 기뻐하며, 또한 피조물 하나하나가 거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
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하는 무차별적 추상화에 비한다면, 이러한 기쁨은ㅡ 가령 욥기의 마지막 장들이나 시편 104편- (자연의) 보존을 위한 이유로서 훨씬더 설득력이 있다. 경험주의자들은 종교적 언어가 (여기서 내가 뜻하는 것은 강단에서 외치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앞에서 인용했던 것과 같은 언어들이다) 어떻게 비경험적 실재에 대해 말하고 지식을 전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견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가르 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법이 시민에게 그 위치를 부여하듯이, 경외는 피조물과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설 자리를 부여한다. 세상에는 특정한 빛 아래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계 안에 있는 신의 현존을 보지 못 한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Guy Davenport, Herakleitos and Diogenes. Grey Fox, 1979. 지식을 단순히 경험적인 것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앞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것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제 우리는 역설적인 진실과 마주하고 있다. 윌슨의 물질주 의는 이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통합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 렇듯이 "연합"(8쪽)을 지향한다. 반면, 믿는 사람들은 늘 하느님 안에서 진리의 하나됨을 믿지만, 그분이 하는 일은 끝없이,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윌슨은 간단히 인간이 고정적이고 최종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윌슨이 말하는 지식의 이론적 통합과 인간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진리의 하나됨 사이에는 차이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랄 만큼 다르다.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의 신비를 받아들이면, 그가 하는 일들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찬미하게 된다. 반면, 과학에 의한 인지적 통합이라는 윌슨의 목표는 추상과 환원주의로 이끈다. 그리고 추상과 환원의 반대는 결코 종합이 아니다. 환원주의에 반대되는 원리는ㅡ 필요할 경우, 환원주의에 대한 충분한 답은ㅡ 모든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개별적인 사물 하나하나를 그것이 속한 범 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환원주의와 반대되는 것이다. 151



V.환원주의와 예술

생존욕구와 삶의 욕구는 두개의 다른 욕구이다. 그리고 후자가 전자보다 더 의식적이고, 의도적이며, 교육과 문화적 선택의 문제와 관련 된다.

윌슨은 인간 본성이 오로지 천부적이기만 한 것처럼, 오로지 진화의 산물이기만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예술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통합을 제안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그가 잘못한 것은 예술작품을 유기체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연의 산물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환원주의적 공식을 이렇게 확장시킨다. 예술작품=유기 체=기계) 그는 예술작품이 가르치고 배우는 인간의 예술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artifacts)이 아니라 "재능(talent)"의 산물이라고 본다. 213쪽에서 윌슨은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해 "탁월한 지식"과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지식과 기술이 계속 살아서 전해질 수 있게 만드는 문화적 연속성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말하지 않는다.
162

만일 인간 본성이 (가령 예술 같은 그 표현들이) 단순히 자연적이고 생래적인데 머무른다면, 그저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을 뿐, 판단의 기준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만일 인간 본성이 배움의 산물이기도 하다면,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예술에 의해 형성된다면, 비판적 판단은 가능하며 동시에 필요하고, 우리는 의지와 선택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 가령 우리가 하는 문화적, 예술적 선택이 자연세계에 대해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기꺼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순수", 혹은 "창작" 예술을 실천적, 혹은 경제적 예술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잘못임을 알 수 있다.163
کو
과학과 예술이 "설명을 위한 공동의 토대"에 의해 "연결"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로 예술을 설명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가
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결정할 것이다. 윌슨의 통합 계획은
예술작품은 "해석"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은 다시 생물학적
법칙, 궁극적으로는 물리학의 법칙과 연속선상에서 말할 수 있
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예술작품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 본다. 나아
가서 해석이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164

만일 예술작품이 의미나 원칙, 법칙들을 추출해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면, 물론 그것도 괜찮겠다. 그런데 문제는 예술 작품이 그렇게 생겨먹지를 않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점에서 예술작품은 유기체와 아주 비슷하다. 박새가 박새인 것은 해부학의 원리나 공기역학의 법칙, 또는 그 종의 생활사를 체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박새로부터 그러한 원리나 법칙을 추출해냈다 해도 박새가 설명된 것은 아니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인가? 실험, 개념, 유형, 인과관계, 정혜진 한계 내에 있는 연관관계들, 계산할 수 있고 그래프를 만들 수 있고, 도표화할 수 있는 것들이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일단 설명 가능한 무엇인가로 설명되고 나면 달라진다. 설명은 포괄하지 않고 환원한다. 무언가를 설명하고 났을 때, 대개의 경우 설명되지 않은 나머지를 발견하게 된다. 설명은 양동이에 담는 것이지. 우물처럼 샘 솟는 것이 아니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들인가? 나는 피조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 역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나라고 생각한다. 피조물이나 삶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이야기하고, 노래하거나 춤출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림이나 이야기, 노래나 춤 역시 설명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없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예술이야말로 설명과 거의 정반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윌슨은 예술을 환원주의에 예속시키려 하지만, 예술은 체질 적으로 환원주의를 싫어한다. 환원주의에 대한 예술의 저항은 두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예술의 주제가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 즉 예술의 객체가 본래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은 개별화하는 힘이며, 이처럼 개별화하는 경향 자 체가 개인과 개체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다. 168

정말로 예술이 지향하는 바는 주제를 고양시키는 것이지, 환 원하는 것이 아니다.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최고의 예술은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Complete Writings, 431쪽)

이와 반대로 윌슨이 말하는 과학은 모래 한일에서 세계를 볼 수 없다. 그것은 모래알을 분류하고 이름지으며 (주어진 한계 안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작은 부분들로 나눈다. 이런 일이 칭찬할 만하지 못하다거나 가치가 없다거나 쓸모가 없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과학이 윌리엄 블레이크가 지녔던 상상력과 동일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대체 할 수도 없다고 말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블레이크의 글은 삶의 기적적인 성격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 새로운 소식은 우리가 가진 오랜 전통 속에서 세월을 거듭하여 우 리에게 전해졌다. 그것은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169


VI.  학교 밖에서의 대화

학문분야들 사이의 협력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려면 먼저 "두 개의 문화"가 지금처럼 존재하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한다. "두 개의 문화"는 분열과 뿌리뽑히기, 대립과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에 속하며, 그것은 결국 식민주의와 산업주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두개의 문화는 바로 이 식민주의와 산업주의 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분리되어 존재한다. 이 문화로 인해 개인과 지역, 국가는 지속적으로 더 큰 규모의 집단적 경제에 의존하며 살아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서로를 상대로 점점더 파괴적이고 야비한 약육강식의 경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우주적 경쟁상황은 세계를 아(我)와 비아(非我)가 서로 적대하는 대립상태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곳의 -즉 가정과 농장, 공동체, 지역, 국가의 - 자족성을 파괴한다. 나아가서 그것은 세계의 자족성마저도 파괴한다. 178


일단 관습적인 학문의 외피를 벗어버리고 나면, "과학"은 앎을 뜻하고, "예술은 행위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둘 다 다른 하나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학교 밖의 세계에서는 이 둘이 공통적으로 서로를 포함하며, 알면서 동시에 행동하는 동일한 한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협력한다.- 예를 들어 농부도 그렇고 목수도 그렇다. 알기만 하고 행동하 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행동하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한다. 과학과 예술을 둘 다 사용할 줄 모르는 농부란 상상 할 수 없다. 180


3. 우리가 일한 방식은 때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지만, 씨름한 주제는 동일한 한가지였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땅과 사람들을 파괴하는 농업문화와 체제를 그 둘을 보존하는 문화와 체제로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83



VII. 기준 바꾸기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책임있는 공동체 구성원이 되고, 문화 적으로 살며, 심지어는 유용하게 되는 것마저도 전문가 중심주 의로 대체해버렸다. 전문교육은 전문가적 능력과 전문가적 기 준에 입각해서 진행된다. 이것은 교육에서 헌신과 선행, 시민 의식, 공동체성이라는 이상이 단순한 "직업훈련"이나 "출세를 위한 준비"로 퇴락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문가주의는 지역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출세를 그 장으로 삼고 있으며, 이 것이 현대 "사회의 이동" 현상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로부터 수많은 악이 파생된다. 전문가주의가 믿는 종교는 발전이다. 이것은 전문가주의가 말로는 실천과 현실주의를 부르짖지만, 사실은 현재하지도, 실천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과거와 현재를 배반하고 있음을 뜻한다. 전문가주의는 늘 과거와 현재를 미래를 위한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 눈에서 눈물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미래는 한번도 온 적이 없다. 190

한탕주의 과학과 한탕주의 기업정신이 협력한 결과 이제 지 구상의 모든 피조물은(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팔려갈 물건처 럼 제 몸에 가격이 매겨지는 신세로 전락했고, 사실상 경제 전 체주의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경제 전체주의에서는 모든 물 질과 피조물, 생각들이 상품화되어 교환 가능하고 써서 없애버 릴 수 있는 것이 된다. 사람들도 다른 것들과 함께 상품이 된 다. 오직 그러한 경제만이 풍요로움과 피조물의 다양성으로 가 득 찬 세계에 기술주의적 독재와 유전학적 획일 문화를 덮어 씌우려 한다. 그러한 경제 전체주의 체제에서만 "삶의 형태들 이 특허대상이 되고, 자연과 문화의 재생가능성이 파괴된다. 
예. 몬산토의 "터미네이터 유전자" 193

예술과 인문학은 이러한 정복주의적 경제체제와 공모하고 있다.193

7. 지금, 여기 살아 있는 피조물들 한가운데 있는 우리 삶을 표현하는 데 환원주의적 사고의 추상적 범주들이 얼마나 불충 분한지 깨달아야 한다. 분류에 저항하라! 만일 추상적 사유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고에 일관성도 없고, 사고를 이 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예 사고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 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언어라는 중요한 주제로 돌아가게 된다. 198

오늘날 공적 대화에서는 그 의미를 잃은 채 추상적 제스처 만 남은 말들이 떠돌아다닌다. 가령 "애국심", "평등", "권리", "자연", "인간성", "야성", "지속가능성" 같은 말들이 그렇다. 이 목록은 아주 길어질 수 있는데,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편 에 서고 싶은지 과시하기 위해 아무 생각이나 느낌 없이 이런 단어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단순한 슬로건이나 수사에 머무르지 않는 언어가 필요하다. 의미관련성이 있으며, 구체적이고, 정확하며, 다듬어진 언어가 필요하다. - 경험과 구체적인 예로부터 멀어지지 않은 언어가 필요하다. 위대한 시 인들의 작품에서는 천상과 지상이 추상적 관념에 머물지 않고 현존한다. 그러한 시인들의 언어는 전체적이면서 동시에 구체 적이다. 천상을 잊음으로써 지상적 지식을 증대시킬 수 있다거 나, 단테를 포기함으로써, 또는 밀턴에 동의함으로써 보다 지 성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중간 입장에서 정 치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는 전문가주의의 언어는 존경과 친근 함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머리도 없고 발도 없으며 사랑도 없는, 소속이 없는 언어다. 199

나는 이처럼 전체적이고 생동적이며 구체화하는 언어가 예 술이나 인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절실하게 필요하 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인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며, 소중히 함으로써만 알 수 있는 것들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안의 수많은 장소들과 피조물들을 보호하려면, 개념적으로만이 아니라 상상력에 찬 마음으로도 그것들을 알아야 한다. 장소와 피조물들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 기억 속에 그려져야 한다. 애정을 가지고, "마음으로" 그것들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그것들을 보고 기억하는 행위 속에서 마음이 "노 래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잘 알고 있는 구체적
인 장소나 피조물들 하나하나마다 꼭 맞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여기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어조'가 공자에게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기억한다. (Ezra Pound. Confucius, 31, 47쪽) 상상력에 찬 마음으로 안다는 것은 좀더 친근하게, 구체적으로, 세부적으로, 감사하고 존경하면서, 애정을 가지고 아는 것이다. 200

《통합》에서 윌슨은 "오늘날 우리는 전 지구를 홈그라운드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233쪽) 그러나 이것은 개념적 기술일 뿐 매우 의심스러운 말이다. 전 지구에 대한 상상은 고사하고 어떤 인간도 전 지구를 알았던 적이 없다. 이 "세계여행"의 시 대에도 전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은 너무 커진 이동성 때문에 점점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털어놓는 대로) 어디서도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친밀하게,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애정을 가지고 알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한 장소에 오래 살아야 한다. 수많은 구체적인 장소들과 사람들, 피조물, 그리고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농업 인구의 경제적 파괴로 인해 생겨난 가장 큰 손실은 각 지역의 기억과 역사, 이름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들", "뒷들" 같이 밋밋한 들판 이름들조차도 한 문화의 살아 있는 표징이 될 수 있다. 만일 예술과 과학이 전문화된 학술의 포로상태에서 깨어나기만 한다면, 비록 그동안 그들이 더럽히는 데 일조하기는 했지만,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그 역사를 재구성하고 이름을 기억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1


8. 친숙함을 혁신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한다. 한탕주의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가보지 않은 곳을 (이 를테면) 발견하고 싶어한다. 붙박이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장소를 알고 싶어한다. 친숙함이 혁신 못지 않게 중요하고 필요하며 흥미로운 목적이어서는 안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나는 친숙함이 훨씬더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 한다. 확실히 그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다. 사실은 친숙함의 경계가 훨씬더 넓다. 혁신은 언제나 인간의 재능과 수단에 의해 한정되지만, 친숙함은 삶의 한계에 의해서만 한정된다. 경험은 친숙함에 의해 무한히 확대된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좁은 한 지역에서 수십년을 살면서 그곳을 세심하게 연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끊 임없이 나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고, 나의 이해보다 넘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있고, 결코 예측가능하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하루 도 똑같은 날이 없고,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러한 차이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우리는 날마다 한 장소에 살고 일하면서 계속해서 그 장소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수정하고, 그 장소에 대해 경탄하기도 하고 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설령 그 장소가 변하지 않은 채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나이를 먹고, 기억과 경험이 자라기 때문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늘 특정한 한계 안에서만 우리가 사는 장소에 대해 알며, 그 한계는 장소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정신의 한계다. 이것은 시간 안에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오늘날처럼 우리가 파괴하지 않는 한 장소는 소진되지 않는다. 장소는 결코 전부 알려지지도, 보여지지도, 이해되지도, 파악되지도 않는다. 202

내가 거의 40년 동안 희망과 위로를 정의하고 내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것은 프랑스의 곤충학자인 앙리 파브르에 관한 이야기다. 너무 가난해서 여행을 할 수 없었던 그 는 그의 생애 마지막 30여년을 세리낭 가까이에 있는 아르마라는 곳에서 "사방 벽으로 둘러싸인 자갈밭 한뙈기" 안에 있는 곤충들과 그밖의 동물들을 연구하면서 보냈다. (Edwin The Insect World of J. Henri Fabre, 2쪽) 확실히 그는 실험실이 아니라 제 둥지에ㅡ그리고 그의 집에 ㅡ거주하는 살아 있는 피조물을 연구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세월 지치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2

그러나 이전에 쓴 《생명사랑(Biophilia)》이라는 책에서 윌슨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었고, 분명히 그는 지금 이 결론을 반박하지만, 나는 긍정하고 싶다. "자연주의자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그 모든 의도와 목적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 마젤란적인 항해에서는 한그루 나무 그루터기 옆을 서성이면서 전 생애를 보낼 수도 있다."(22쪽)

나무 한그루라니? 삶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어느 곳이나 끝없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지성과 관심을 잘 감시하고 연마하며, 우리의 욕망과 자존심을 잘 다스리고, 조심성 있게 일하며, 믿음을 가진다면 나무 한그루만 으로도 족할 것이다. 아마도 예술가들과 과학자들 둘다에게서 그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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