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내 삶에 관해서는 말을 꺼내기는커녕 떠올리는 것조차 언제나 힘겨웠다. 어린 시절 나는 엄청난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 나 자신을 지키려고 그 고통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 일상을 버텨낼 수 있도록 의식 뒤편으로 고통을 숨겨둔 채 항상 앞만 바라보며 다음 질문, 다음 해답, 그 다음 지식과 지혜를 쫓아 수십년 동안 과학 연구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 정신적 외상 없이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그때 그 상처는 열세살 여자아이였던 나를 아일랜드 켈트 문화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인 코크주 리스 계곡의 디딤돌 위로 데려다 놓았다. 리쉬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붙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한 상태였다. 허물어져 가던 그 땅도 마찬가지였다. 수천년에 걸쳐 대대로 갈고닦으며 지켜온 드루이드*의 옛 지식과 브레혼**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나무의 치유력과 자연계의 신성한 본성 을 일러주는 그 지식은 사라지지 않고 내게로 넘어와, 지금껏 받아본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선물로 내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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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문화에서 사제, 판관, 과학자, 의료인 등의 역할을 맡았던 계층이다.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며 존경받는 집단이었지만, 광범위한 지식을 가문 내에서 구전으로만 익히고 전수했기 때문에 드루이 드에 관한 문자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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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일랜드 켈트 문화의 법체계인 브레혼법Brehon Laws을 관장하던 계층을 가리킨다. 브레혼법은 중앙집권적 주체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집단적 기억으로, 주로 구전을 통해 형성, 전수되었다. 브레혼은 이 법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중재자이자 음유 시인이었다. 2행의 '오래전 시와 함께 잠들었다네'라는 시구에서 '시' 는 브레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선물을 받는 대가는 단 하나, 혼자만 간직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후 50여년 동안 과학계에 종사하면서 내 견해와 연구 성과는 자유롭게 밝혀왔지만, 나에 관한 이야기는 나 자신도 온전히 알아 볼수 없을 만큼 조각내어 묻어두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특별한 시기를 맞이했다. 한편으로는 기후 변화라는 겪어본 적 없는 중대한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과제에 대처할 방안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준비해둔 상태다. 다만 그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한때 인류가 그랬듯이 자연 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성한 숲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 지 두루 살피고, 세상을 구할 방법이 그 안에 담겨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숲의 사람들이다. 나무들처럼 우리는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기억을 품고 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 나무의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숲에 들어서면 위대한 자연이 상상을 뛰어넘는 목소리로 우리를 부른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 내면에 있는 나무의 아이, 즉 우리 공동의 역사가 생생히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몇 단 혹은 몇 년이나 나무와 마주하지 않는다 해도 자연계와의 연결 고리는 우리 마음속에 남아 기억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살아온 삶과 그 삶을 촘촘히 휘감은 뿌리, 몸통, 껍질, 줄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바로 그 기억을 휘젓고 싶다. 숲은 단지 목재를 공급하는 곳이 아니라 훨씬 더 귀중한 존재임을 일깨우고 싶다. 숲은 우리 모두를 위한 약품 상자이다. 우리의 허파이다. 기후와 대양을 조절하는 체계다. 지구의 덮개이다. 뒤에 올 세대의 건강과 행복이다. 신성한 집이자 구원이다.
약물 내성을 막는 데에서 지구 온도 상승을 멈추는 데까지, 나무는 인류가 직면한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을 일러준다. 심지어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들으려 하지 않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한때 우리는 나무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그 기술을 반드시 기억해내야 한다. 13
식물에는 세로토닌에 해당하는 자당 sucrose이 작용분자working 로서 존재한다. 자당은 나무에 들어 있는 수용성 화합물로 세로토닌처럼 신경을 자극해 세포가 원활히 작동하게 한다. 나는 나무에 트립토판 트립타민 경로가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나무도 우리 뇌에 있는 것과 똑같은 화합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나무에는 생각이나 의식을 갖는 데 필요한 모든 구성 요소가 담겨 있다. 즉, 나무도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신경 능력을 갖고 있다. 내가 증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숲이 생각할 수 있고, 꿈도 꿀수 있을 지 모른다는 것. 과학계에서는 새로운 지식이었다. 이런 연결고리가 당시에는 밝혀지거나 알려지지 않았다. 141
엉뚱한 시기에 씨앗을 뿌렸으니 당연히 싹이 나지 않았고, 땅에서는 그 어떤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도를 통해 나라는 한 사람에게 반응하는 살아 움직이는 세계를 갖고 싶다는 바람이 싹이 푸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통해 내 노력을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욕구는 마치 또 하나의 심장박동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동반자 크리스천과 함께 캐나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세계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땅을 찾아냈다. 148
나무 쪼개기
1982년에 오타와대학교의 일자리를 그만두었다. 정착한지 8년에서 9년 정도 되던 그즈음. 농장은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고 우리집도 적당히 살만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3만 2300제곱 미터까지 늘어난 정원이 점차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 과수원에서는 본격적으로 과실이 맺히기 시작했다. 우리는 집 앞을 빙 둘러 흑호두나무가 늘어선 산책로를 조성했다. 정원과 발 둘레에 심은 산울타리에 맺히는 꽃물과 꽃가루의 양이 늘면서 새와 곤충이 몰려들었다. 우리는 휴면오일 유황 뿌리기, 석회로 덮기 같은 기법을 활용해 약 64만 7500제곱미터에 달하는 땅 전체를 유기농법으로 관리했는데, 지역 내 모든 농부의 밭이 살충제로 절여지던 당시 만 해도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나는 평생토록 자연을 향한 날것 그 대로의 사랑과 푸르게 자라나는 생명체들에 둘러싸이고픈 욕구를 끌어왔다. 이 땅은 내가 사랑하는 식물의 왕국을 매일매일 연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167
죽은 나무를 베어 장작더미가 되도록 쪼개는 과정을 반복해보 아야 한다. 두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아야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볼 수 있다. 애초에 내가 땅을 갖고 싶어 했던 그 깊은 욕구에는 그런 몰입감을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었다. 몰입을 통해 얻은 관찰 결과와 내 눈에 뜨인 작은 존재들 그리고 그것들이 왜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알고자 하는 욕구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정원과 들판, 숲으로 나갈 때마다 나와 동행하는 것들이 있었다. 우선 관찰한 것을 측정하고 해석하는 데 쓰는 지식과 기술의 기초가 되어준, 그동안 내가 받은 모든 과학 교육 과정이 있었다. 기관에서 벗어날 자유,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외부의 간섭 없이 내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쫓을 여유도 있었다. 내게 놀라운 힘의 원천이 되어준 크리스천과 우리 딸 에리카가 보내주는 사랑과 믿음, 지지가 있었다. 소외된 존재로서 느끼는 고독과 절박함, 그저 날것의 본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게 만드는 무섭고 고통스럽기도한 감정들 또한 있었다. 이성으로 성취하는 질서 정연한 사고 못지않게 확실한 발견으로 나를 이끄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화가의 안목이 있었다. 그리고 리스의 오래된 지식과 그 지식이 내게 선사한, 자연을 우리 자신과 지구를 지탱하 는데 필요한 모든 것의 신성한 원천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 170
진행 중인 기후변화를 멈추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근래 연구에 의하면 2019년을 기준으로 지구 기온 상승을 멈출 수 있는 기한이 1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더 오래 방치하면 그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자연계가 불안정해지면 인류가 이룩한 제도도 혼란에 빠질 것이며 나무가 우리에게 준 엄청난 선물이 허공으로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삶과 일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만큼 끔찍하고 손쓸 수 없는 일이란 없으며 자연계가 지닌 재생력과 회복력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지금까지 몇 쪽에 걸쳐 전 세계의 숲과 우리의 행성 그리고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 방안은 복잡하지 않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지키고, 해마다 한 그루의 6년 동안 토착종 나무를 심는 간단한 일이다. 우리는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뿐더러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뒤에 오는 모든 어린이를 위해 그 일을 해내야 한다. 나는 그 미래 세대를 위한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었을 때 우리는 건강하고 안정적인 기후를 지키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광범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자연에는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신이 있다. 큰 숲이든 작은 숲이 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은 들어갈 때보다 더 차분해진 상태로 나오게 된다. 그 위엄을 경험하고 나면 절대 예전의 상태로 돌아 가지 않는다. 거기서 나오면 자기에게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 신성한 경험을 과학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숲에서는 실제로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면역 체계를 통해 뇌에 영향을 미치는 알파 및 베타 피넨pinene 이라는 성분이 생성된다. 그 피넨이 나무에서 빠져나와 공기 중에 떠돌다 우리 몸에 흡수된다. 우리를 전체에 속하는 일부로서 단단히 결합시키고, 경건한 태도로 주위를 바라보게 해준다. 가볍게 숲을 거닐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상상력과 창의력이 피어오른다. 나는 이것이 기적이며 자연계에는 우리가 발견할 또 다른 기적이 무수히 남아 있다고 생각 한다.
우리는 그 기적에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숲과 우리의 행성을 지킬 것이다. 숲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우리 늘 그저 듣고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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