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향모를 땋으며

향모를 땋으며(1)_하늘 여인 떨어지다

백_일홍 2024. 7. 25. 13:06

하늘 여인 떨어지다 Skywoman Falling

태초에 하늘 세상이 있었다.
여인은 단풍나무 씨앗처럼 가을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졌다. 하늘세상의 구멍에서 빛기둥이 내려와 어둠 속에서 여인의 길을 밝혔다. 여인은 한참을 떨어졌다.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희망 때문이었는지 여인은 꾸러미를 꽉 붙들었다.

추락하는 여인에게 보이는 것은 아래쪽의 시커먼 물뿐이었다. 하지만 그 공허 속에서 많은 눈이 난데없이 빛줄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물체로 보였다. 빛살 속의 먼지 알갱이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물체는 점점 커지더니 이제 여자로 보였다. 팔을 활짝 벌린 채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펄럭거리며 그들을 향해 맴돌며 떨어지는.

기러기들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러기의 노래'가 물결치는 가운데 물 위로 솟구쳤다. 여인은 추락하는 자신을 받아주려고 날아 오른 기러기들의 날갯짓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알던 유일한 집에서 아득히 멀어진 채, 여인은 자신을 살며시 내려주는 기러기들의 보송보송한 깃털에 포근하게 안긴 채 숨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기러기들은 여인을 물 위에 오랫동안 띄워둘 수 없었기에 대책을 마련하려고 회를 소집했다. 여인은 기러기들의 날개에 앉은 채 아비, 수달, 고니, 비버, 온갖 물고기가 모여드는 광장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거북 한 마리가 무리 한가운데를 가르며 헤엄쳐 오더니 여인에게 등을 내밀었다. 여인은 고마워하며 기러기 날개에서 거북 등딱지로 발을 내렸다. 짐승들은 여인이 보금자리로 삼을 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논의했다. 물속 깊이 잠수할 수 있는 짐승들이 물 바닥에 진흙이 있다는 애기를 듣고서 찾으러 가기로 했다.

아비님이 맨 먼저 뛰어들었지만 수심히 하도 깊어서 한참 뒤에 빈손으로 올라오고 말았다. 수달님 비버님 철갑상어님 등 다른 짐승들도 하나씩 나섰지만 수심과 어둠과 수압은 아무리 헤엄을 잘 치는 이에게도 버거웠다. 다들 머리가 띵하고 숨이 찬 채로 돌아왔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수 짐승 중에서 가장 약꼴인 꼬마 사향뒤쥐님만 남았다. 그가 내려가겠다고 나서자 다른 짐승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사향뒤쥐님은 작은 다리를 바동대며 아래로 헤엄치더니 아주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까봐 걱정하며 사향뒤쥐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머지 않아 보글거리는 거품과 함께 작고 흐느적거리는 몸뚱이가 올아왔다. 이 무력한 인간을 도우려다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그때 다른 이들이 사향뒤쥐님의 주둥이가 꽉 다물려 있는 것을 보았다. 주둥이를 열자 진흙 한 줌이 들어있었다. 거북이 말했다.

"진흙이 쏟아지지 않게 내 등에 얹어줘"
하늘여인이 몸을 숙여 진흙을 거북 등딱지에 펴 발랐다. 여인은 짐승들의 특별한 선물에 감동받아 감사의 노래를 부른 뒤에 발로 흙을 어루만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인이 감사의 춤을 추는 동안 거북님 등딱지의 한 줌 진흙이 점점 커지더니 온 대지가 창조되었다. 하늘여인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뭇 짐승의 선물과 그녀의 깊은 감사가 어우러진 연금술의 결과였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거북섬(북아메리카 대륙을 가리킴)으로 알려진 우리 보금자리가 생겨났다.

여느 반가운 손님처럼 하늘여인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여인은 그때까지도 꾸러미를 꽉 쥐고 있었다. 하늘세상 구멍에서 떨어질 때 그곳에서 자라는 생명 나무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여인의 손에 잡힌 것은 온갖 식물의 열매와 씨앗이 달린 가지였다. 여인은 열매와 씨앗을 새 땅에 뿌리고 하나씩 정성스레 돌봤다. 이윽고 세상은 갈색에서 초록으로 물들었다. 하늘세상 구멍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려와 씨앗을 무럭무럭 자라게 했다. 들풀, 꽃, 나무, 약초가 온 사방에 퍼졌다. 먹이가 많아지자 많은 짐승이 거북섬에 찾아와 여인과 더불어 살았다. 18

모든 식물 중에서 윙가슈크라고 하는 향모가 대지에서 가장 먼저 자랐다고 한다. 우리 부족은 향모를 네 가지 성스러운 식물 중 하나로 떠받는다. 중요한 제의용 식물. 향모의 가치는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우리는 향모를 어머님 대지님의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라고 부른다. 날 때부터 하늘여인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은 인간과 대지 사이에 책임이 흐르고 있음을 뼛속까지 안다. 하늘여인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뿐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Bruce King, "Moment in Flight" 하늘여인의 초상화


세상의 한쪽에는 뭇 생명의 행복을 위해 텃밭을 만든 하늘여인을 통해 생명의 세계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또 다른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도 텃밭과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열매를 맛보려다 텃밭에서 쫓겨났으며 그녀의 뒤로 철컹 하고 문이 닫혔다. 이 인류의 어머니는 예전에는 가지가 휠 정도로 매달린 달콤하고 촉촉한 열매로 입안을 채울 수 있었으나 이제는 황무지를 돌아다니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녀는 배를 채우려면 황무지를 정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사람도 같고 대지도 같았지만 이야기는 달랐다. 창조 이야기는 우리에게 정체성의 원천이자 세상을 대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창조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세상의 너그러운 품에 안기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그 세상에서 추방된다. 한 여인은 우리 농부의 조상이요. 후손의 보금자리가 될 선한 초록 세상의 공동 창조자다. 다른 여인은 추방당한 자로,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낮선 세상을 통과할 뿐 그녀의 진짜 보금자리는 하늘에 있다.

그러다 하늘여인의 후손과 이브의 후손이 만났다. 우리 주위의 땅에는 그 만남의 흉터, 우리 이야기의 메아리가 남아 있다. 괄시받는 여인의 노여움은 지옥보다 더하다고들 말한다. 하늘여인이 이브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매여, 어쩌다 그런 일을 겪게 되었나요..."

하늘여인 이야기는 오대호 전역의 토착민들에게 전파되었으며, 우리가 으뜸명령이라 부르는 가르침의 별무리에 단단히 자리 잡은 항성이다. 하지만 으뜸명령은 십계명 같은 '명령'이나 규칙이 아니다. 지도가 아니라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에 가깝다. 살아 있는 존재의 임무는 스스로 지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으뜸명령을 따르는 방법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하늘여인의 첫 사람들은 으뜸명령을 자신들이 이해한 대로 지키며 살았다. 그들의 으뜸명령은 존중이 깃든 사냥, 가족생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제의 등을 규정하는 윤리적 지침이었다. 하지만 이런 돌봄의 방식은 오늘날 도시 생활에는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그린은 초원이 아니라 광고 문구를 뜻하니 말이다. 버팔로는 사라졌고 세상은 앞으로 나아갔다. 연어를 강에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

첫 인간을 환대하던 시절, 대지는 새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낡아버렸다. 우리가 으뜸명령을 내팽개치면서 환대의 효력이 다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의 첫 시작부터 나머지 종들은 인간의 구명정이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구명정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를 이끌어줄 이야기는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진다. 오늘날 그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하늘여인이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거북 등 위의 세상이라는 선물의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고.

첫 여인 또한 이민자였음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여인은 하늘세상의 보금자리를 멀러 떠나오면서 자신을 알던, 자신을 아끼던 모든 이와 이별했다. 1492년 이후로 이 곳에 살던 사람들도 대부분 이민자다.

하늘여인의 이야기가 잋히지 않는 이유는 우리 또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은 개인적 삶과 집단적 삶 둘 다 그녀의 궤적을 따른다. 우리가 도약하든 밀려나든, 아니면 우리가 아는 세상의 모서리가 우리 발치에서 부서지든, 우리가 빙글빙글 돌며 새롭고 예상 못할 어딘가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은 두렵지만 세상의 선물이 우리를 잡아주려고 기다린다.

이 명령들을 생각할 때 명심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늘여인이 이곳에 왔을 때 홀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면 손자 손녀가 세상을 물려받을 것임을 알았기에 여인은 자신의 풍요를 위해서만 일하지 않았다. ... 어떤 장소에 토박이가 된다는 것은 자녀들의 미래가 여기에 달린 것처럼 살아가는 것, 우리의 물질적, 정신적 삶이 여기 달린 것처럼 땅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24

에덴에서 쫓겨난 가련한 이브의 유산을 보라. 땅은 착취적 관계로 멍들어 있다. 부서진 것은 땅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와 땅의 관계가 부서졌다는 사실이다. 게리 냅핸Gary Nahban 말마따나 우리는 '다시 이야기하기re-story-ation'없이는 회복을, 의미 있는 치유를 해나갈 수 없다. 말하자면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땅과의 관계를 치유할 수 없다. 하지만 누가 이야기를 둘려줄까? 25

서구 전통에서는 모든 존재가 서열이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진화의 정점이자 창조의 총아인 인간이 꼭대기에 있고 식물은 밑바닥에 있다. 하지만 토박이 지식에서는 인간을 곧잘 '창조의 동생'으로 일컫는다. 우리는 말한다. 인간은 삶의 경험이 가장 적기 때문에 배울 것이 가장 많다고. 우리는 다른 종들에게서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청해야 한다. 그들의 지혜는 살아가는 방식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들은 본보기로 우리를 가르친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대지에 머물렀으며 세상을 파악할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땅 위와 아래에서 살며 하늘세상을 대지와 연결한다. 식물은 빛과 물로 식량과 약을 만드는 법을 알며 그렇게 만든 것을 대가 없이 내어준다.

나는 하늘여인이 거북섬에 씨앗을 뿌리면서 몸뿐 아니라 마음과 정서와 영혼의 양식을 준비했다고 상상하고 싶다. 우리에게 스승을 남겨두었다고. 식물은 우리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우리는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