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그레타 가드
식물과 동물
"동물윤리학이 축산복합체에 대응해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식물의 도구화에 대응하는 '식물윤리학'이 필요한가?" (Adamson & Sandilands 2013)각주1)
각주1)
1. 이 질문은 2013년 문학과환경학회(ASLE) 학술대회에 조직된 예비회담 세미나 '식물의 생태비평주의'에서 발표할 참가자들을 모으는 공고에 적혀 있었다. 2013년부터 이 세미나의 공동조직자들은 이 주제에 관한 이론들을 꽤 유용한 방향으로 계속 발전시켰다. 업데이트 된 논문들을 첨부한 이메일을 여러차례 교환하면서 나와는 다른 자신들의 관점들을 명확히 설명해준 조니 애덤슨과 케이트 샌덜랜즈에게 특히 감사를 전한다. 나와 그들의 관점은 서로 달랐으며, 나는 여기에서 그들의 관점을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원주민 연구를 진행하면서 애덤슨은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라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 패러다임을 주장하는데, "코스모폴리틱스는 극적으로 상이한 생물종 내부의(intra- species) 관점들과 생물종 간의(inter-species) 관점들을 중재할 수 있는 개념이다. (Adamson 2014, 264면) 세미나의 공동조직자인 샌딜랜즈는 서구문화의 패러다임에 대해 연구하는 데, "식물과의 윤리적 관계"를 발전하는 데 있어서 "생명이나 정의에 관한 추상적 개념을 주장하고자 식물의 능력과 관심을 의인화하는 것은 분명히 부적절하다"라고 주장했다. 두 생태비평가 모두 '식물 생태비평주의'를 발전시켰지만, 산업화된 서구문화의 인간 사회적 관계와 종횡단적 관계들에 대한 환경적으로 정의로운 윤리와 실천을 아직 구체화하지 않았다. 이 장에서 설명하듯이 비판적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서구문화의 인종주의, 계급주의, 종차별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의 교차점에 주목하면서 정교화된 종횡단적 생태윤리에 특히 관심이 있다. (Pellow 2016 참조) /
언뜻 보면 이 질문은 동물윤리학과 연합하는 식물윤리운동을 제안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곧 일어날 잡식주의자의 반발backlash 일 수도 있다. 이 반발은 비건 채식인의 관점에 학문적 신뢰성을 더한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동물인 고로 나는 동물로 존재한다.』L'Animal que donc je suis, Éditions Galilée 2006로 시작된 동물연구가 지난 10년간 이룬 성공에 반대하는 움직임이다. 동물연구와 마찬가지로 식물연구도 이전부터 진행되었지만, 최근에 와서야 최첨단 학문 분야로 떠올랐다. 피터 톰 킨스와 크리스토퍼 버드가 쓴 『식물의 정신세계』는 피터 싱어Peter Singer 의 책 『동물 해방』 Animal Liberation에 비견될 수 있다. 이 두 저서는 후에 포스트휴머니즘 사상의 중요한 두 영역의 토대가 되는 저작이다. 하지만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는 데 인색한 학계의 풍토대로 싱어의 이론은 인권에 기반한 도덕적 확장주의로, 톰킨스와 버드의 이론은 '뉴에이지' 식의 비과학적 추측으로 크게 비판받았다. '비판적 식물연구' 분야와 「잡식동물의 딜레마: 네가지 음식의 자연사 The Omnivore's Dilemma: A Natural History of Four Meali의 저자이며 육식주의자이자 로컬푸드 애용자locavore인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을 언급하며, 조니 애덤슨 Joni Adamson과 케이 트 샌덜랜즈Cate Sandilands는 2013년 문학과환경학회ASLE 학술대회의 예비회담 세미나에서 '식물의 생태비평주의'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비판적 동물연구와 동물권 분야의 학자와 활동가들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우려를 표했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식물연구plant studies 학자들도 식물과 동물 사이에 비슷하게 그어진 정치적 경계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다. 즉 한편으로 식물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과 '비슷하게' 소통하고, 움직이고, 결정하고, 탈바꿈하고,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로 그려지고, 다른 한편으로 식물은 동물과는 완전히 달라서 관례적인 형이상학적 원칙들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존재로 그려진다.
"식물과 동물 사이에 비슷하게 그어진 정치적 경계선"이라는 문구는 동물연구animal studies 학자와 비판적 에코페미니스트 모두에게 경종을 울릴 만하다. 지금까지 꽤 많은 비건과 베지테리언 페미니즘 생태비평주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육식의 성정치: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The Sexual Politics of Meat: A Feminist-Vegetarian Critical Theory에서 캐럴 애덤스가 논의한 프랑켄슈타인의 베지테리언 괴물을 시작으로 수많은 비건과 베지테리언 페미니즘 생태 비평 저작들(예를 들어, Armbruster 1998: Chang 2009: Donovan 1990, 2009; Gaard 2000, 2002, 2013)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중에서 문학과환경학회의 주요학술지에 실린 싸이먼 에스톡의 글이 마침내 도전장을 내밀었다. 에스톡은 '에코포비아'ecophobia를 "자연세계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근거 없는 증오'로 정의하면서, "에코포비아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오만함과 종차별주의에 뿌리를 두고 의존하고 있어서 "로스트비프를 얹은 호밀 빵으로 배를 채우며 훌륭한 이론작업을 하는 생태비평가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 주장했다. (Estok 2009, 208, 216~17면) 에스톡이 육식을 하는 생태비평가가 내세우는 정당성을 비판한 지 4년이 지 난 후 랜디 래스트Randy Laist는 『식물과 문학: 비판적 식물연구』Plants and Literature: Essays in Critical Plants Studies, Rodopi 2013를 출간했다. 래스트는 이 책에서 동물연구 학자들과 비판적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식물연구의 발견과 주장을 고려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건/베지테리언 생태비 평가들도 곧 '식물 생태비평주의'에 응답해야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식물연구'란 무엇인가? 동물과 식물의 유사성을 주장하면서 비인간 동물이 실제로 경험하는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먹거리 선택을 육식주의2 문화에 적합한 도덕적 상대주의 영역에 두려는 것 인가? 아니면 이 움직임은 모든 물질의 생동성을 주장하는 신유물론의 논지를 불러일으키고, 후에 애덤슨(Adamson 2014)과 샌딜랜즈(Sandilands 2016)가 주장한 것처럼 행위자성을 가진 타자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책임을 탐구하게 할 것인가?
이 질문들의 중심에는 '고기'와 '생물종'이라는 핵심 용어가 있다.
식물연구: 새로운 분야가 출현하다
식물연구는 다음과 같은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에서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 『양자』 Quanta (McGowan 2013), 『어머니 대지 뉴스 Mother Earth News"(
1970년부터 미국에서 격월간 발행된 환경잡지로, 신재생에너지, 리사이클링, 가족 뒷말 좋 은 농법과 식생활 등의 주제를 다룬다.), "예술계의 환상성』 Journal of the Fantastic in the arts (Miller 2012), "PAN 철학 실천 자연』PAN: Philosophy Activism Nature(Hall 2012), 『사회들 Societies(Gagliano 2013: Ryan 2012)이 있으며, 심지어 비판적 동물연구 Journal for critical Animal Studies (Houle 2011)도 포함된다. 그러나 식물연구가 대중문화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뉴요커』 The New Yorker에 폴란의 「지능적인 식물 Intelligent Plant이 실리면서부터다. 이 글에서 폴란은 분자, 세포, 식물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발견한 연구결과들을 보고했는데, 그것은 신유물론자들이 행위자성이라고 부르는 능력을 증명하고(Coole & Frost 2010), 동물의 능력에 대한 발견이 그랬듯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사한다.(표 2.1 참조)
이 분야에 적어도 두가지 이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정통 과학으로 인정받기 위해 애니미즘을 피하는 보수적인(소위 '엄격한 과학'hard science) 식물과학자들은 동물종과 식물종 간의 위계구조를 강화하는 인본주의적 방식으로 자료를 해석한다. 그들은 '식물의 신호 전달'을 '식물 커뮤니케이션'과 '식물 신경생물학'으로, 그리고 '적응' 을 '학습'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한다. (Pollan 2013) 그러나 좀더 진보적인(소위 '인문학'적인) 식물연구 학자들은 우리가 "식물을 의인화하는 것을 멈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식물처럼 생각하고, 자신을 식물화 phytomorphize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McGowan 2015) 모니까 갈리아노 Monica Gagliano는 진화론적 생물학에서 '적자생존'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연선택의 경쟁적인 진화과정에서도 협력이 이루어진다"고 결론짓는다. "협력과 경쟁은 공존할 수 있는 데, 그 이유는 식물들 간의 더욱 협력적인 "집단 단위의 연합이 생태적으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Gagliano 2013, 153면) 각주3)
각주3)
3. 이 책이 인쇄되고 있을 때 다음의 새로운 책 두권이 출간되었다. 하나는 식물의 행위자성과 생명정치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킨 다학제적 생태비평주의 저서인 '녹색 가닥: 식물 세계와 의 대화』(Vieira, Gagliano & Ryan 2016)이고, 다른 하나는 "식물 이론: 생명권력과 식물의 삶』(Nealon 2016)이다. 식물 이론』은 동물연구가 문화 자연 이원론을 변형하여 동물종들은 인간과 함께 서게 했지만 타자로서의 자연이라는 범주는 그대로 남겨놓는다고 비판한다./
캐런 하울 Karen Houle은 『비판적 동물연구』에서 "식물의 사유에 대한 생각은 동물의 사유에 대한 생각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우리를 이끈다"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생태학적으로 '올바른 분석 단위'는 개체나 쌍이 아니라 '배치'assemblage이기 때문이다." (Houle 2011, 111면)
(Houle, Karen L. F. "Animal, Vegetable, Mineral: Ethics as Extension or Becom- ing? The Case of Becoming-Plant." Journal for Critical Animal Studies 9:1/2(2011), 89-116)
하울의 주장은 명시적으로 퀴어연구에 기반을 두지는 않지만, 퀴어 방법론과 비교하기 좋은 포스트휴머니즘 방법론을 사용한다.(예를 들어, Browne & Nash 2010) 케리 울프Cary Wolfe가 설명한 것처럼(Wolfe 2009), 포스트휴머니즘은 내용과 방법 둘 다를 아우른다.
"하나의 학문 분과에서 인본주의적인 실천 또는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실천을 할 수 있다. (...) 역사가나 문학비평가가 비인간 동물에 관한 주제에 몰두한다고 해도 그가 특정한 도식과 그가 가진 지식에 의존하여 학문 내부의 관행을 실천한다면 익숙한 인본주의적 형태가 유지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의 외적인 학문적 성향이 비인간 존재의 존재성과 윤리적 이해관계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양상을 띨지라도(그런 의미에서 이 학문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에 문제를 제기한다), 내적인 학문적 성향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일 수 있다." (같은 글 572면)
에코페미니즘 방법론, 포스트휴머니즘 방법론, 퀴어 방법론, 트랜스' 방법론에서 정체성과 자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복수성을 갖는다고 보기 때문에 본질주의적이고 통일된 데까르트적 인간상을 거부한다. 식물연구에 대한 하울의 접근법은 이 방법론들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하울은 식물연구의 틀로서 상호주의 mutualism에서 나타나는 인본주의적이고 이성애 규범적인 헤게모니를 도발적으로 거부한다. 식물의 행위를 상호적 관계를 이루는 한쌍의 개체들 간의 '의사소통'으로 정의하는 개념적 제스처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만약 [식물 신호의] 방출자와 수신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공평하지 않고 상호적이지도 않다면, 식물행동에 대한 묘사는 '의사소통' 에서 '도청'으로 격하되고 "제3자는 '엿듣는 자'로 불리게 된다"(Houle 2011, 109면)라고 주장한다. 대신에 하울은 이런 의사소통을 "불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관대함과 선물의 행위로 (...) 자발적이고, 능력주의적이지 않은 (...) 넘쳐나는 과잉" (같은 글 109면)으로 의미화할 것을 제안한다. "모든 통신 기제에서 유기적이고 무기적인 제3자와 제4자의 영구적이고 다채로운 역할"(같은 글 110면)에 대해 지적하면서, 하울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따리의 '신성하지 않은 동맹' 개념을 호출하여 식물관계를 '급진적인 집단성'a radical collectivity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사회성과 친족을 "둘의 사이berween가 제시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좀더 넓은 의미인 "여럿의 사이among" (같은 글 111면)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울은 '식물-되기'를 옹호하는데, 그것은 "관계를 전략보다는 일시적인 동맹으로 봄으로써 관계에 대한 사고를 개방하는 방식"이며 "정체성과 친밀감의 획득을 철저하게 집단적인 성취로 인정하는 방식" (같은 글 112면)이다. 이런 주장은 퀴어 이론의 정체성과 섹슈얼리티와 공동체의 유동성fluidity 개념뿐 아니라 신유물론의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 (Alaimo 2010) 개념에도 잘 부합한다.
"비판적 식물연구'로 생태비평주의의 식물에 관한 영역을 이끌고 있는 카트리오나 샌달랜즈(Sandilands 2014a)는 식물연구를 비판적 동물연구에서 태동하여 함께 가는 학문으로 이해한다. 『퀴어 생태주의: 성, 자 연, 정치, 욕망』Queer Ecologies: Sex, Nature, Politics, Desire에 실린 그의 연구는 도처에 있는 퀴어 동물들의 존재를 탐구한다.(Mortimer-Sandilands & Erick son 2010) 이 퀴어 동물들은 섹슈얼리티, 몸성embodiment, 정통성authenticity 에 부여된 이성애 규범적 가정들을 의미 있는 방향으로 복잡하게 만든 다. 동물연구에 퀴어의 관점을 접목시킨 모델을 따라서 샌딜랜즈(Sandilands 2014b)는 '식물학의 퀴어들'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 개념을 통해 그는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과 친족,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성애 규범적 (그리고 인본주의적) 이해를 복잡하게 만드는 잠재력을 가 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Sandilands, Catriona, "Queer Life? Ecocriticism After the Fire," 305-319 in Greg Garrard (ed.), The Oxford Handbook of Ecocriticism,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14b)
「꽃의 감각」Floral Sensations에서 샌딜랜즈는 "특정한 맥락에서 식물이 생명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식물이 특정한 생물사회적 공동체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려는 의지가 없다면 우 리는 식물과의 윤리적 관계를 고려할 수 없다" (Sandilands 2016, 235면)라고 주장한다.
(Sandilands, Catriona, "Floral Sensations: Plant Biopolitics." 226-237 in Teena Gabrielson et al (ed.), The Oxford Handbook of Environmental Political The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샌딜랜즈식의 비판적 식물연구는 인간 동물윤리학을 인간 중심주의적인 도덕적 확장주의 안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인간-동물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전략을 식물이 가진 완전히 다른 자아성 selfhood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 동물윤리학을 손상시키지 않고 내버려두는 접근법이다. 그러나 다른 접근법들은 좀더 공 격적이다.
예를 들어, 캐나다인 과학저술가 일레인 듀어Elaine Dewar는 "식물이 생각한다"라는 제안이 "비건 채식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일 것이라 고 추측하며 고소해하는 것 같다. (Dewar 2013) 화학교수 수전 머치Susan Murch가 상처 입은 식물이 내보내는 휘발성 화학신호를 '비명'이라고 표현한 후부터 듀어는 인간들이 "다음에 정원에서 당근을 뽑을 때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경고한다. T.S. 밀러T. S. Miller는 "어떤 유령이 동물연구에 출몰하고 있는데, 그것은 섬유소 유령" (Miller 2012, 460만)이 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중심주의만이 아니라 동물연구의 골칫거리인 동물중심주의 zoocentrism" (같은 금 463년)라고 주장하면서 동물연구의 인본주의적 방법론에 대해 적절하게 비판한다. 또한 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 매슈 홀Matthew Hall의 시각에 동의한다. 홀은 "동물중심주의는 식물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물보다 인간이 우월하다는 관념이 유지될 수 있게 한다. 이 관념으로 인해 식물은 열등한 존재로 묘사되고 인간이 지배하는 자연의 위계 구조에서 가장 하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동물중심주의는 이런 이원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Hall 2011, 6면)라고 말한다.
(Hall, Matthew. Plants as Persons: A Philosophical Botany. Albany, NY: SUNY Press, 2011.
ㅡed. Special Issue: "Plant Ethics." PAN: Philosophy Activism Nature 9, 2012.)
초기 식물연구 학자들(Wandersee & Schussler 2001)은 이러한 현상을 서구문화의 '식물무감성'plant-blindness 이라 올바르게 명명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면서 갈리아노는 "지구에 생명이 계속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역할인 식물들"을 무시하는 우리의 현재 상태를 '식물에 대한 묵살'vegetal disregard 이라며 비난한다.(Gagliano 2013, 149면)
(Gagliano, Monica, "Seeing Green: The Re-discovery of Plants and Nature's Wisdom. Societies 3 (2013), 147-157.)
밀러는 "인간 속에 있는 식물적인 요소를 숙고하고 대면할 때 우리는 위계구조를 전복하는 포스트휴머니즘적 프로젝트로 진전할 것이고 식물에 대한 인류의 도구주의적 지배의 뿌리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는 그래야만 우리가 "식물과 우리가 친족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식물 사용에 대한 우리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Miller 2012, 462면)이라고 믿는다.
동물연구가 포스트휴먼 연구와 연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연구에서 취하는 관점도 이 분야의 계보학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식물 연구에 존재하는 과학연구의 관점을 추적해보면 1983년의 "깜짝 놀랄 만한 발견'에서 출발하여 1984년의 "이론의 오류를 밝힌 결정적인 반론'을 거쳐 1990년의 “부활"로 이어진다. (McGowan 2013)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 세상을 보는 식물의 시선』The Botany of Desire: A Plant's-Eye View of the Word과 대니얼 샤모비츠Daniel Chamovits의 은밀하고 위대한 식물의 감각법: 식물은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기억할까?』 What A Plant Knows: A Field Guide to Senses, Scientific American 2012와 같이 좀더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책들이 출판되면서, 국제식물신호 및 행동연구협회 International Society of Plant Signaling and Behavior, ISPSB와 같은 전문가 조직들이 이 과학연구 분과를 학문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2013년 여름에 열린 ISPSB의 연례 학술대회에는 40여 개국의 학자들이 참석하여 식물연구의 등장을 성황리에 알리며 토론에 임했다. (Pollan 2013) 머치(천연물화학의 캐나다 연구위원 Canada Research Chair")와 샌딜랜즈(지속가능성과 문화의 캐나다 연구위원장)와 과학저술가 듀어, 그리고 바스크인 철학자 마이클 마더Michael Marder처럼 저명한 학자들이 각자 새로운 식물연구 논문을 출간했거나 출간 중에 있었다. 마더는 로도피 출판사가 출간하는 '비판적 식물연구: 철학, 문학, 문화' 시리즈의 편집장을 맡아 시리즈 첫번째 책 『식물과 문학을 출판했다. 마더는 자신의 책도 출간했는데, 식물의 사유: 식물의 삶의 철학 Plant-thinking: A Philosophy of Vegetal Lif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에서 신유물론의 행위자성 개념과 인간을 중심에 두는 관점에서 탈피하려는 포스트휴먼 연구의 시도를 다룬다. 이를 통해 비판적 식물연구에서 제시하는 생물종의 재정의를 발전시키는데, 생물종들은 차이보다 유사성을 지닌 존재로서 공동의 조상에서 갈라져 하나의 연속체상에 존재한 다고 정의한다.
식물연구라는 새로운 분야를 소개하는 논문들에서 제시된 식물연구에서 그 목적과 지배적 관점 둘 다는 압도적으로 인본주의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것 같다. 식물연구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식물을 도구로 이용하거나 인간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식물을 이론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폴란(Pollan 2013)은 남성 과학자들을 훨씬 더 많이 인용한다.(인용한 27명의 학자 중에서 여성은 7명뿐이다.) 그리고 식물연구 과학을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서 피렌체대학교 국제 식물 신경 생물학 연구소의 '시인 겸 철학자' 스테파노 만쿠소 Stefano Mancuso의 연구를 특히 중시한다. 만쿠소에 따르면 식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이유는 "가치 있는 것을 배우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도 "더 나은 컴퓨터나 로봇이나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거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작업에 식물을 활용하거나 다른 행성을 탐사 할 때 식물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식물과학의 남성우월주의적 관점은 제한적이며 궁극적으로 인본주의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생태학자 리처드 카번Richard Karban과 마틴 헤일Martin Heil은 휘발성 화학물질의 방출을 통한 '식물 간의 의사소통'을 관찰하면서 "왜 식물은 자신의 경쟁자에게 위험에 관한 단서를 주느라 에너지를 낭비해야 할까?" 하고 궁금해한다. 그들은 "식물의 의사소통은 부정확한 용어"이며 "식물 도청"이나 "독백"으로 불러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McGowan 2013)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제시된 식물연구의 계보는 동물연구가 발전시키거나 누락해온 것에 조용하는 유럽의 남성중심적 학계의 전통이다.(Fraiman 2012: Gaard 2012) 마치 이 분야가 최근에서야 등장한 것처럼 제시되었기에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Carson 1951, 1962)과 노벨상 수상자 바버라 매클린톡Barbara McClintock의 방법론과 그들이 발견한 지식을 지워버렸을 뿐 아니라(Keller 1983), 여성 정원사와 과학삽화가, 동물작가, 그리고 생태예술가들이 탐구한 인간과 식물의 관계에 관한 두세기 동안의 연구 또한 지워버렸다. (Norwood 1993: Nor- wood & Monk 1987; Anderson 1991; Anderson & Edwards 2002; Gates 1998)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식물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계보에는 원주민의 비서구적 관점이 대부분 누락된다는 점이다. 현재 생태운동 가이자 작가인 위노나 라듀크 Winona LaDuke, 톰 골드투스Tom Goldtooth,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úa, 치코 멘데스Chico Mendez, 켄 사로-위 와Ken Saro-Wiwa와 다른 많은 작가들이 빠져 있다. 이들의 문화에서는 결코 인간을 나머지 생명으로부터 떨어뜨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각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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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는 조니 애덤슨의 원주민 코스모폴리틱스(Adamson 2014) 이론과 잘 부합하는 비판이다. 내 연구에서는 서구 유럽의 식물연구를 주로 언급하는데, 서구 유럽의 이론들이 원주민과 비서구의 관점이 가진 통찰력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적으로 맥락화된 윤리는 반인종주의적이고 반식민주의적인 에코페미니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식물과 동물, 생태에 관해 이들이 쓴 글에는 우리의 모든 관계들(LaDuke 1999,LaDuke, Winona, All Our Relations. Native Struggles for Land and Life. Cam-bridge: South End Press, 1999.)을 명시하기 위해 "횡단신체성"(Alaimo 2010)이나 "자연문화" (Haraway 2003)와 같은 최근에 다시 부상하는 유물 론적 페미니즘에서 제시하는 개념을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현제 원주민의 관점에 주목하며 인문학적으로 식물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인류학(Kohn 2013. Viveiros de Castro 2004), 생태비평주의 (Adamson 2014), 철학(Hall 2011: Marder 2013), 젠더와 문화연구(Plumwood 200, 2003, 2012: Sandilands 201-42, 2016) 분야에서 활동한다.
(Adamson, Joni. Source of life: Avatar, amazonia, and an Ecology of Selves: Mate- rial Ecocriticism, Bloomington, I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4.
and Cate Sandilands, "Vegetal Ecocriticism: The Question of "The Plant." Preconference Seminar for the 2013 Conference of ASLE: As- sociation for the Study of Literature and Environment. University of Kansas, Lawrence, KS. May 28, 2013. Accessed at http://asleku.edu/Pre- conference/adamson-sandilands.php on 1/5/2017.)
항상 그래 왔듯이 환경연구에서는 환경과학에 관한 중요한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사실 왜곡된 전제와 목적과 가설에 따라 연구되고 있는 것 같다. 환경인문학에 필요한 맥락적이고 철학적이며 정치적인 성찰성이 부족하다. 페미니즘 동물연구는 원주민성과 베지테리어니즘에 관한 플럼우드의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연구와 홀의 철학적 식물학, 그리고 홀, 갈리아노, 샌딜랜즈의 퀴어/포스트휴 머니즘/페미니즘의 접근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페미니즘 동물 연구가 주목받게 하려면 인간과 동물과 식물, 그리고 생태적 관계들에 관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런 관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 '생물종'과 '고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이 넓어 진다.107
'생물종'과 '고기' 정의하기
현재의 식물연구도 표면상으로는 식물복지에 헌신할 수 있다. 식물 연구는 동물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이룩한) 학문적 성과가 도덕적 고려 의 '선을 조금 이동했을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생물종'과 '고기'에 대 한 정의定義에 도전한다. 그리고 동물연구가 다른 동물종만 도덕적 고 려의 범주 안에 포함하고 식물은 그 밖으로 밀어내버리는 인본주의적 인 도덕적 확장주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동물연구는 식물을 고기처 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하울은 동물연구에서 식물은 "배경으로 밀려난 다"(Houle 2011, 91~92면)라고 주장하고, 홀(Hall 2011)도 플럼우드의 마스 터 모델 이론(Plumwood 1993)을 언급하면서 이 말에 동의한다. 마스터 모 델은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하는 후경화, 과잉분리, 병합, 도구주의, 그 리고 고정관념화라는 5단계의 연결된 가정을 통해 작동하는 주인의 정 체성과 지배논리의 구성에 관한 이론이다.(Warren 1990) 요약하자면, 동 물연구는 동물에게는 해방일 수 있지만 식물에게는 억압적이어서 인본 주의를 영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the Species, 1859에서 공통조상 이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 뒤로 식물은 동물의 '친족'일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의 속성 모두를 모호하게 드 러내는 식충식물, 초식동물, 말미잘, 조류藻類, 균류의 존재로 인해(Tsing2012) 동물과 식물로 구분되는 '생물종'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동식물 생물종 간의 이러한 급진적 연속성과 횡단신체성, 그리고 친족 관계는 몇가지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첫째, 페미니즘 방법론에서 묻듯 이 우리는 식물연구가 식물에게 이로운지 질문할 수 있다. 둘째, 퀴어 페미니즘 동물연구와 포스트휴머니즘 동물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 데모든 가능한 '먹거리'가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sentient 존재라는 사실 에 비추어 우리는 도덕적 주변부를 만들지 않으면서 어떻게 윤리적으 로 먹거리를 선택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식물연구의 학문적 발견과 합의에 반응하여 비판적 동물연구를 확장하면서, 식물과 인간과 동물 들이 처한 상태와 종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개선하기 위해 페미니즘 방 법론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을 고려할 때, 비판적 동물연구와 에코페미니즘 학자들이 지지하고자 하는 주장과 반박하고자 하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식물 신경생물학자인 만쿠소는 "식물은 예민하고 지능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식물을 어느 정도 존중할 의무가 있으며, 이 말은 "식물의 서식지를 보존하고 "유전자조작, 단일(종) 경작, 그리고 분재와 같은 재배를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믿는다. (Pollan 2013) 이 관점은 페미니즘 동물연구의 주장과 페미니즘 방법론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식물을 섭취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만쿠소는 식물에게는 대체할 수 없는 장기와 분자구조가 없으므로 "식물은 먹히도록 진화해왔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다른 생물종(동물)의 삶의 궁극적 목적telos(즉 그들은 "먹힐 운명이다")을 인간의 동물 포식과 연결시켜 정당화하는 주장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같은 정당화는 (동물 혹은 인간의) 생물학, 문화, 또는 필요 중 어느 것에 기반하든지 마찬가지 결과를 갖는다.
비거니즘의 주장을 검토하면 식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몇가지 주장을 발견하게 된다.
1. 그들은 먹히길 원치 않는다. 셀 수 없이 많은 동물연구 분야의 글에서 동물이 먹히길 원치 않는다는 것을 확증한다. 동물은 행동을 통해 그들의 욕망을 표현하는데, 예를 들어 사냥꾼으로부터 도망가고, 다른 포식자들에 대항하여 싸우고, 동물원이나 덫, 과학실험과 어떤 형태의 감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말한다. (Hribal 2011) 식물은 동물이 자신의 번식을 돕도록 향기와 색으로 그런 동물들을 유혹하여 몸의 특정 부위가 먹히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식물의 특정한 행동을 살펴보면 몸의 다른 부위가 먹히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물은 벌레에게 공격당할 때, 다른 식물들에게 경고할 때, 그리고 가끔은 포식성 곤충을 자극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생물을 잡아먹도록 하기 위해 화학적 신호를 방출한다. 식물은 또한 독소를 생성하여 잎의 맛이나 식감을 바꾸고, 초식동물의 입맛에 안 맞고 소화하기 어렵게 만든다. (Angier 2013: Pollan 2013)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 이론에서 기본적인 고려사항은 동의다. 즉 모든 당사자가 특정 행동이나 관계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러한 동의의 결여는 잠재적으로 착취나 억압, 또는 윤리적으로 모호한 노동관계를 암시한다.
2. 그들은 고통을 느낀다. 동물은 고통스러워하고 통증을 느낀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수십년 동안 싱어의 공리주 의적 주장 덕분에 동물권은 성장했다. 톰 레건Tom Regan이 주장하듯 이 동물은 분명 생명의 주체이기도 하다. 동물은 고통과 감정을 느끼고 그들의 본질적 가치를 주장하며 도덕적 권리를 갖게 하는 자아 존재감이 있다. 그러므로 동물은 다른 존재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아야 한다.(Regan 1983) 식물연구에 따르면 식물은 공격을 받으면 휘발성 화학신호를 방출하는데, 이는 식물이 식물 차원의 공포와 고통을 경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식물은 뇌와 신경계가 없지만 식물행동의 기록을 보면 현재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식물 지능과 식물 의사소통의 수준이 있음을 암시한다. 정보 부족이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그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다고 해도 말이다), 동의 없이 두려움과 고통을 유발할 근거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3. 그들은 의식이 있다. 대부분의 동물종의 의식은 개체, 가족, 생물종 기반, 그리고 관계적인 자아에 대한 감각과 관련된다. 반면에 식물 연구에 의하면 식물은 환경정보에 기반하여 행동을 바꾸고, 다른 식물과 곤충들과 소통(또는 '신호')하고, 영양분을 공유하고, 자손을 양육한다는 점에서 역시 의식이 있다.
비거니즘의 기반으로서 자주 호출되는 네가지 요소인 환경, 인간의 건강, 세계적 기아, 동물의 고통을 식물연구와 인간의 식습관에 관한 질문에 적용하고, 또한 딘 커틴(Curtin 1991)의 맥락에 따른 도덕적 베지테리어니즘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위의 주장들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커틴이 간단명료하게 주장하듯이 "도덕적 베지테리어니즘'을 실천하는 이유는 지역, 성별, 계급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맥락에 따른 도덕적 베지테리언"으로서 커틴은 "모든 상황에서 육식을 금지하는 절대적 도덕규칙은 있을수 없다"(같은 글 69면)라고 믿는다. "맥락주의 윤리학의 요정은 마치 어떤 집단도 서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것처럼 모든 이해 관계를 동등하게 취급할 필요가 없다"(같은 글 70년)라는 점이다. 그래서 커틴은 기아나 위험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는 다른 동물(인간을 포함한 어떤 종이든)을 죽이는 것이 윤리적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커틴은 비건/베지테리언 식습관이 없는 문화의 예를 들면서, 이런 사회에서는 음식윤리가 동물과 생태와의 특정한 관계성을 고려한 맥락에 따라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커틴은 인간의 농업활동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죽임을 당하는 동물에 경의를 표하는 문화들(일본의 신 또오神道사상)과 먹이사슬에 인간을 포함시켜 인간의 몸을 다른 동물에게 먹이로 돌려주는 문화들(티베트 문화)을 언급한다. 커틴은 서양인의 포식문화에 대해 변명하려고 다른 문화권의 음식관행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그는 "도덕적 베지테리어니즘이 생태적 돌봄윤리의 표현으로 온전히 설득력을 갖는 경우는 기술적으로 발전된 국가들의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맥락에서뿐"(같은 글 70면)이라고 강조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제1세계의 농업과 소비가 제1세계와 지구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 축산업이 인류의 기아를 악화시키는 데 담당하는 역할, 양계산업과 낙농업에서 이루어지는 암컷 동물의 착취, 그리고 제 1세계 소비자들이 고통을 영속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생산되는 다양한 음식의 선택지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료로 제시한다. 커틴은 "가능 하다면 불필요한 고통은 모두 제거해야 하는 것이 도덕적이고 정치적 인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글 70면) 그의 논의는 유엔식량농업기구의 보고서 『가축이 남긴 긴 그림자』(Steinfeld et al. 2006)와 옥스퍼드대학교 마틴스쿨의 연구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었다. 이 두 연구는 공장식 축산이 생태적으로 유해하며 기후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하고 생태를 살리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 대안이란 많은 사람들이 채식 위주의 식단을 실천할 때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탄소배출을 63퍼센트까지 낮출 수 있으며, 사람들도 더 건강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Harvey 2016) 이와 같은 발견은 「고기에 대한 불편한 진실 Meat the Truth, 2008, 「비프 핀란드 Beef Finland, 2012, 「카우스피라시」와 같은 다큐멘터리영화에서 다루어지면서 대중화되었다. 동물을 음식으로 생산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식물, 물, 토양, 그리고 다른 동물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물을 먹는 것은 지구를 먹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많다. (Pimentel & Pimentel 2003) 또한 끔찍한 작업환경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이 착취당해야만 하고(Schlosser 2001), 인간 건강에 파괴적인 영향을 준다. (Robbins 1987: Campbell & Campbell 2006) 나아가 환경정의 이론가들에 따르면 종차별주 의와 인종차별주의는 서로 강화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들은 생물종을 넘어선 윤리학을 분석의 중심에 두는 환경정의 윤리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Pellow 2016) 윤리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포식자와 피식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포식자-피식자 환경에 관한 문제 며, 여기에서 환경은 생태적, 사회문화적, 경제적인 측면을 모두 의미 한다.
커틴은 도덕적 목적지는 없을 수 있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음식으로 간주하는 결정을 내릴 때 따를 도덕적 방향은 있다고 단언한다. 내가 이 통찰력이 "친절하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잡식주의자가 비건을 대할 때 취하는 평가하는 듯한 태도를 거부하기 때문이고, 모든 먹거리 생산이 죽음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로리 그루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살면서 살생을 피할 수 없다. 내 생각에 비거니즘 문헌에서 이 점이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다. (...) 우리는 식량 생산의 모든 측면 에서 (인간과 비인간) 타자들에게 해를 끼친다. 땅이 농업용으로 전환될 때 많은 이들이 추방당한다. 그들 중에는 많은 종류의 '비건'가 공식품의 첨가성분인 팜유를 생산하기 위한 파괴적 행위들의 결과로 멸종위기에 처한 오랑우탄과 같은 동물도 있다. 8(Gruen 2014, 132~33년)"
맥락에 따른 도덕적 베지테리어니즘은 제1세계의 소비자들에게 도덕적 소비를 장려하지만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동식물 타자들 sentient others 중 일부를 죽이고 소비하는 것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이 타자들은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에 더 가까운 동물과 식물 친족들이다.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맥락에 따른 도덕적 베지테리어니즘은 식물과 여타 생태적 존재들의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능력sentience을 인정하고, 인간이 다양한 맥락에서 먹이사슬의 포식자이면서 동시에 피식자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모든 존재들, 즉 산업사회와 비산업사회, 농촌사회, 그리고 원주민사회에 속하는 모든 인간과 동물, 식물, 그리고 생태적 존재들의 고통은 최소화하고 돌봄은 최대화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맥락이 고려된 도덕적 방향을 지향하게 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사회정의와 환경에 관한 관심 둘 다를 아우르는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인간을 항상 특수하고 다양한 환경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 여겨왔다. 그러나 현대 식물연구와 신유물론 학자들이 발전시킨 행위자성 개념과 횡단신체성 개념을 통해 우리는 환경 윤리와 먹거리윤리에서 식물의 위치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패러다임을 깨는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상호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인데, 즉 인간은 고통과 쾌락을 느끼고 지능이 있는 비인간 생물종 친족들과 맺은 관계망으로부터 지원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플럼우드는 '생태적 동물주의'(Plumwood 2012) 나 '애니미즘 물질주의'(Plumwod 2009), 또는 '비판적 페미니즘-사회주의 에콜로지'(Plumwood 2000, 285민)와 '비판적 생태주의 페미니즘'(같은 글 289년) 이론에서 이 전환을 이루자고 주장한다.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이라는 용어는 플럼우드의 이론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동물연구와 식물연구, 페미니즘과 생태학, 제1세계와 원주민의 관점을 연결하는 좀더 최근의 연구들로 발전해나간다. 이 최근의 연구들은 플럼우드의 이론이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백인 특권에 대한 도전에 헌신해온 강력한 반인종주의자 동지인 플럼우드는 비건 페미니스트인 애덤스와 킬이 호주 원주민의 윤리와 세계관을 가치절하했다고 오해했다. 다른 원주민사회와 마찬가지로 호주 원주민사회의 음식문화는 주변 환경과 더불어 발전해왔고 따라서 음식재료에 그들이 친족으로 여기는 식물과 동물이 포함된다. 자신의 '생태적 동물주의' 이론에서 플럼우드는 "맥락을 고려하는 반베지테리어니즘 입장"을 옹호했으며, 공장식 농장 에는 반대하지만 생계를 위해서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동물 도살은 반대하지 않았다. (Plumwood 2003) 플럼우드는 그의 이론에서 "인간의 생명은 생태적 조건에 위치시키고 비인간의 생명은 윤리적 조건에 위치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이론에는 다양한 식물종과 동물 종을 모두 아우르는 행위자성과 횡단신체성에 응답하는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측면이 있다.
마치 어슐러 하이제Ursula Heise가 '생태세계시민주의'ecocomopolitan(생태세계시민주의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미치고 그들에게 미치는 환경적 영향은 지역 공간적 범주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이루어진다고 보고, 우리 모두 자신의 삶이 자신의 지역만이 아니라 지구 환경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행동하고 살아가 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념을 주장하며(Heise 2008) 인본주의를 비판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플럼우드는 "[비건이건 잡식이건 상관없이]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지구 전체에서 취하는 '생물권 인간'biosphere person"에 반대 한다. "필수 영양분은 세계시장이 소비자에게 제공한 선택지 안에서만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물권 인간의 라이프스타일은 "파괴적이고 생태적으로 무책임하다" (Plumwood 2003)라고 주장한다. 그 대신에 플럼우드는 '비판적 생물지역주의' 개념을 발전시킨다. (Plumwood 2008) 비판적 생물지역주의는 "소비하는 자아를 위한 그림자 장소"를 가시화하는데, 그곳은 우리가 생산한 오염물질과 해로운 쓰레기를 처리하느라 자신들의 생식력이 고갈되는 곳이며, 우리가 먹을 식량을 생산하느라 토착민과 비인간들이 파괴되는 지역을 의미한다. 에코페미니즘과 식물 연구의 퀴어화를 즐겁게 기대하며 플럼우드는 "일부일처제의 이상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좀더 다면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한다. 그는 이를 '책임 요건'이라고 표현하는데, "다른 지역을 파괴하거나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지역을 소중히 여기고 돌볼 것을 명령"하는 것이 다. 여기서 다른 지역이란 다른 인간집단의 지역뿐 아니라 다른 생물종의 지역도 포함한다. 플럼우드는 "우리 주변에 있는 인간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는 창조성과 행위자성을 보려고 노력하라" (Plumwood 2003)고 촉구함과 동시에 "모든 육화된 존재는 먹거리면서 먹거리 이상"이지만, "인간이건 비인간이건 어떤 존재도 존재 자체가 고기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Mummoned 2009)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지를 펼치며 플립우드는 먹이사슬에서 인간이 포식자이자 피식자의 위치에 있음을 받아들이 맥락화된 윤리관을 발전시킨다. 이 윤리관은 생대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 뿌리내린 인간의 상호정체성에 기반한다.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과 죽은 후 언제나 다른 동물종의 잠재적 먹잇감이라는 사실을 인 정하는 것이 바로 플린우드의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이다.(humwood 1995, 2002)
서구인들은 비인간 동물과 식물, 그리고 바위, 물, 토양과 같은 생태적 존재들이 고통과 쾌락을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친족이기도 하다는 원주민의 관점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이 관점은 애니미즘으로 여겨져서 환경과학보다는 인류학과 비교종교학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식물연구와 기초 생태비평주의(Adamson 2014: Cohen 2010) 분야에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이론에서는 생태적 타자들에게 유사한 생동성과 행위자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생태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Viveiros de Castro 2004)와 에두아르도 콘(Kohn 2013)은 아마존 원주민 문화의 생태적 세계관과 연결된 자아정체성에 대해 서술한다. 이 세계관과 정체성에서는 인간과 동물 간의 비분화nondifferentiation, 상호 소통 능력, 그리고 자아와 타자가 상호 침투하는 상태를 강조한다. 비베 이루스 지카스트루가 설명하듯이 "경작된 식물은 그들을 돌보는 여성의 혈족으로 간주될 수 있고, 수렵 짐승들은 사냥꾼의 친척으로, 주술사는 동물과 식물 영혼의 동료나 적이 될 수 있다." (Viveiros de Castro 2004, 466면) 이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은 죽음과 섭식의 결과로 상대방으로 변신하는 상호변환이 가능하다. 서양인들은 친족을 먹는 것을 카니발리즘cannibalism'으로 여긴다. 실제로 일부 비건/베지테리언 활동가들은 다른 동물종을 먹는 것을 일종의 카니발리즘으로 간주한다.10 그러나 만약 식물도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친족이라면 무엇을 먹든 친족을 먹는 것이며, 따라서 서구인에게는 모든 먹는 행위가 중요한 윤리적 난제가 된다.
플럽우드는 공포영화가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는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타자의 포식자로서 우리는 절대로 그들에게 먹힐 수 없거나 우리 자신을 먹거리로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취하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존재"라고 비판한다. (Plumwood 2003) 이러한 반생태적인 인간우월주의를 거부하면서 플럼우드는 "인간이 잘 살려면 먹거리가 되는 우리의 친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음식을 얻어야만 하고, 우리 모두가 먹거리 이상의 존재라는 점을 잊지 않으며, 호혜적 관계로서 타자의 먹거리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 라고 주장한다. (같은 글) 그러나 랄프 아캄포라Ralph Acampora가 주장하듯 이 생태적 네트워크나 시스템상에서 작동하는 이 호혜성은 먹히는 개체에게 직접적으로 보답하지는 않는다. (Acampora 2014) 아캄포라는 아날 리아 빌라그라Analia Villagra의 연구 「동물연구에서 카니발리즘, 섭식, 그리고 친족 Cannibalism, Consumption, and Kinship in Animal Studies, Michigan State University Press, 2011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아캄포라에 의하면, 빌라그라는 원주민의 세계관에서 "동료 동물을 먹는 관습은 그 동물이 인간과 친족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동료 동물이기 때문에 허용된다"라고 설명하면서, 따라서 "동족 포식자가 되기"를 제안한다.(같은 약 50, 52만) 그러나 아캄포라가 밝히듯이, 빌라그라는 원주민 카니발리즘을 확대 친족extended kinship에 속하는 다른 생물종에만 적용하고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풍습은 권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빌라그라 가정문에서 "나의 맛있는 반려동물"이라고 말하면서 원주민의 세계관을 사용하여 도덕적 상대주의로 나아간 반면에, 아캄포라는 빌라그라가 논한 원주민의 세계관에는 친족관계의 거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먹고, 함께 살고, 영혼을 나누는 이런 맥락적이고 관계적인 관행들에 도덕적 방향과 목적이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보편적 무해함이라는 도덕적 목적지에는 절대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를 존중할 수 있고, 모든 생물종과 생물지역권의 고통을 줄이려는 도덕적 방향으로 여전히 나아갈 수 있다.
고기를 넘어서, 생물종을 넘어서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할까? 채식은 인간들로 하여금 덜 소비하게 한다. 채식을 하면 식물과 동물을 덜 먹게 되고, 식물과 동물, 생태계, 그리고 다른 인간들에게 고통을 덜 입히게 된다. 채식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가 먹고 번성하는 데 좀더 넓은 땅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채식은 기후변화에 제동을 건다.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은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의 영향을 받은 비판적 동물연구와 식물연구가 페미니즘의 이론적 시각을 통해 서로 대화하게 한다. 따라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은 육식주의 문화의 장악과 헤게모니를 해제하려면 거부에서 세심한 경청으로, 소외에서 공감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시간에서 계절적 시간으로, 이성애 규범적 보편주의 heteronormative Versalism에서 퀴어 멀티버설리즘queer multiversalism(멀티버설리즘은 모든 보편주의(universalism) 신념체계가 검증할 수 없는 가정, 논리적 모순. 제한된 관점으로 얽힌 불완전하고 이해할 수 없음을 비판하며 나온 개념이다.)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채식을 통해 자아는 합리주의적 개인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물론적 횡단신체성에 의해 재형상화된다. 즉 멈추지 않는 생산에 기반한, 내재화된 자본주의적 자아 가치로부터 벗어나 계절의 성장과 쇠퇴의 순환에 적절히 대응하고 상호작용하는 자아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채식은 우리의 죽음을 이런 순환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생태계의 관계들만큼 개체들의 삶에도 가치를 두는 맥락에 따른 도덕적 비거니즘을 촉발하며, 먹이사슬 안에서 포식자와 피식자로 위치하게 한다. 또한 지속가능성을 촉진하고 포식자-피식자-생태계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먹거리를 선택하게 한다.
철학자와 생태인류학자, 생태비평가, 그리고 서구문화권 학자들은 우리가 상속받은 도구들을 비인간 동물, 식물, 광물, 다른 지구의 생명 체들을 포함하는 타자들에 관한 이해를 이론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드리 로드Audre Lorde가 썼듯이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Lorde 1984) 플럼우드가 "재사유하기re-think" 를 제안했듯이(Plumwood 2009) 우리에게는 개념적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관점들을 다시 위치시킴으로써 비서구 문화와 비인간 동물, 그리고 식물의 입장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이 전환을 이루려면 페미니즘 동물연구 학자들(Donovan 1990, 2006)과 식물연구 학자들이 제안하는 주의 깊은 듣기를 실천해야 한다. 경청을 실천하려면 다른 언어로 표현되는 물성과 행동과 냄새, 그리고 내적 활동 intractivity을 배워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인간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는 창의성과 행위자성" (Plumwood 2009)을 보기 위한 전략으로서 서구인들은 동물과 식물, 그리고 원주민들의 투쟁과 삶에 연대할 수 있다. 우리는 인도에서 유래했으나 많은 분화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수행과 다르마 dharma 철학의 무신론적 원리로부터 파생한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다.
서구인들은 플라톤과 데까르뜨에게서 "인간정체성의 근본으로서 몸성보다는 의식을 고려하라" (Plumwood 2004, 46면)고 배웠다. 그러나 이 존재 요소들은 행위자성의 뗄 수 없는 내적 활동의 요소들로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의 흐름과 상호 연결되어 있다. 동물연구가 인본주의에 사로잡힌 서구인들을 그 결박에서 풀어준 것처럼, 이제는 식물연구가 식물에 기초한 근본적인 생태비평주의와 같은 추가적인 도구들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마이클 마더는 "식물의 사유에서 식물의 세계를 식물의 관점에서 탐구할 것을 제안한다. 계절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존재의 순환적 특성을 통해 명백해진 식물생명의 의미를 주의 깊게 밝히 는 방식으로 실천할 것을 제안한다. 이런 주의 깊은 태도를 구축하기 위해 플럼우드는 탈식민지화하는 텃밭 가꾸기 실천을 옹호한다. (Plumwood 2005,"Decolonising Australian Gardens: Gardening and the Ethics of Place." Australian Humanities Review #36 (July 2005), Accessed
https://australianhumanitiesreview.org/2005/07/01/decolonising-australian-gardens-gardening-and-the-ethics-of-place/) 즉 "텃밭 가꾸기는 자연과 접촉하고 협력하게 하고, 지구와 계절의 리듬, 생명체가 경험하는 성장과정과 생사의 순환에 민감해지게 하는 건강한 지향'을 의미한다. 식물의 자유를 논의할 때 마더는 식물의 무관심, 개체화된 자아의식의 결여와 자기보존에 대한 관심의 결여가 식물로 하여금 놀이의 자유를 가질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식용에 주의를 기울이면 식물의 해방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해방에도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식과 사유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유 이전의 사유" (Plumwood 205, 154년)로 이해될 때, 풍요롭고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식물의 개체화된 자아의식의 결여는 불교의 무아anata 개념을 반영하는데, 무아란 상호정체성에 찬성하고 개별적이고 자율적인 자아 개념을 거부한다. 또한 무아는 비영구성에 대한 자각anicca과 의존적인 발생paticcasamuppada에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존재와 사건이 함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식물은 자기보존에 관심이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식물이 공격을 감지할 때 휘발성 냄새를 방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적으로 정확한 주장도 아니지만, 식물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불교 개념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집착tanha은 고통 dukkha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불교 관점에서 볼 때, 암석과 다른 광물들에 귀속된 무관심처럼 우리에게 알려진 식물의 무관심이라는 속성은 평정심으로 받아들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평정심이란 생명이 태동하는 데 조건을 두지 않고 생명 그 자체로 존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에코페미니즘 이론에서 워런의 작업은 어떻게 지배의 논리가 식물과 암석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는지 보여준다. (Warren 1990, 128~29면) 워런은 자신의 암벽등반 이야기를 통해 광물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 서구 인의 실천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서구의 인간 지배논리를 반박한다. (Cohen 2010: Gaard 2007 참조)
• 산스크리트어 'anarta'는 불교의 무아(無我), 'anicca'는 무상(無常), 'paticcasamuppăda'는 연기(緣), 'tanha'는 갈애(愛), 'dukkha'는 고(苦)의 개념과 연결된다.
나는 눈을 감고 손으로 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균열들과 갈라진 틈들, 솟아난 지의류와 이끼들, 내가 등반하기 시작했을 때 내 손가락과 발가락을 지탱해주었지만 잘 알아차리지 못했던 덩어리들, 평온함에 감싸인 그 순간에 (...) 나는 [그 바위]가 내게 준 것에 형언할 수 없이 큰 감사를 느꼈다. 그 바위가 내게 준 것은 나 자신과 바위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와 작은 꽃이 바위 표면의 더 작은 틈새에서 자라는 뜻밖의 기적에 감사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자연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마치 그 바위와 내가 오랜 우정을 나누며 침묵의 대화를 해온 동반자인 것처럼 느껴졌다.(Warren 1990, 134민)
여기서 워런의 에코페미니즘 윤리학은 자아나 타자의 상대적 가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느끼는 관심과 돌봄과 관계의 질에 달려 있다. 동물과 식물, 광물, 그리고 지구상의 다른 생명을 다루는 에코페미니즘의 횡단종transspecies 윤리학은 개인주의적인 자아정체성이나 다양한 타자들의 권리가 아니라 관계에 근거하는 관계적 윤리다.
식물연구의 출현으로 우리는 원주민 문화들과 불교, 그리고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에 이미 식물에 대한 고려가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서구의 한 관점인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은 사회정의, 환경정의, 기후정의, 종간정의를 함께 묶는다. 에코페미니즘의 맥락에 따른 도덕적 비거니즘은 인간과 식물과 동물을 위해 어떻게 윤리적으로 먹을 것 인지 결정하는 데 유용한 전략을 제공한다. 그것의 맥락적 측면은 도덕적 상대주의의 형태가 아니며 보편적인 규칙도 아니다.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은 우리의 사고와 존재를 전환하라고 촉구한다. 이 전환을 이루려면 인본주의적 지배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구행성의 생명순환에 인간을 재배치하는 상호성과 호혜성의 관계를 인식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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