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인과로 구성된 마음의 활용_믿음의 정치학

백_일홍 2017. 7. 3. 11:09


8장. 믿음의 정치학

2. 인과로 구성된 마음의 활용


'점 하나를 찍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의 활용.


o '한마음 주인공'과 마음의 활용

대행스님, 한마음주인공(나의 근본이며, 나의 모든 것을 하며, 일체 모든 현상이 다 한마음 주인공의 나툼이다, 그 또한 공한 것임).

주인공은 생명에너지로서 인간은 삼합으로 이루어져있음 (정자와 난자의 물질, 자신의 억겁을 거쳐 온 마음 즉 업식, 영원한 생명 또는 불성)

나와 주인공은 나무와 보이지 않은 뿌리와 같은 관계, 

나와 너의 관계는 같은 나무의 잎과 잎의 관계, 나의 주인공과 너의 주인공이 따로 있는 거이 아님. 여기서 너는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 그리고 무정물까지도 포함. 


불성, 또는 마음의 전지전능함. 마음을 낸다 -> 간절히 한마음의 도리를 믿는데 있음. 


모든 존재는 각자의 마음의 수준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마음과 현실은 별개가 아니다. 마음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그것을 그대로 경험한다면, 마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 깨어있지 않는 의식은 무의식 중에 수많은 생각들을 특정 패턴에 따라 반복하는데 이것이 결국 업력 또는 원인으로서의 카르마로 작욜하게 됨.

   . 깨어있지 않는 의식은 집단무의식과 사회의 고정관념들에 그대로 지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 개인으로 하여그 자신의 무의식적인 생각의 패턴에 의해 고질적인 문제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함.


육도윤회, 육도란 우주에 별도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의미함.


살아생전과 죽은 후의 상태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됨.(*몸은 무엇인가?)

육신은 개인적 운명 차원의 일이지만, 마음내기는 '객관적인' 세상 그 자체에도 영향이 적용된다. 


업을 녹이기 위해서는 물을 부을 것이 아니라 '봄이 와야'한다. 즉 공한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동일한 불성, 즉 한마음이 있으며 그것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이므로 이를 자각하여 활용하라. 또한 마음과 현실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상능력은 그 자체로서 변혁적인 잠재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생각이 자석 처럼 해당내용을 끌어들임으로써 물질화한다.

-> 공성이 체득된 정도가 바로 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정도. 마음이 '비워진' 만큼 효율적으로 현실을 창조할 수 있음.


-> 여성주의적 논의에 적용하기.

o 기표의 재의미화로서의 마음내기 


의미의 불확정성은 사실 허무가 아니라 '창조적 공'이다. 

기호작용이 산출하는 의미가 현존이라는 허구를 구축하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그러한 현존을 탈 구축하는 작업은 용이해짐.


가부장제라는 '현존', 본래 비어있는 기표들의 차연의 효과로서 '존재'하는 것 처럼 경험된다

-> 탈가부장제 프로젝트, 기표들의 재의미화를 통해 가능함.


*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

젠더의 재의미화를 시도. 탈가부장제 프로젝트. 

여성이라는 젠더는 육체의 반독되는 양식화이라는 점에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 즉 수행적인 것이다.

젠더 표현들 배후에 젠더 정체성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젠더의 표현들이 오히려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

수행성, 반복과 재인용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담론적 효과'임.


드래그 만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젠더가 이미 패러디의 한 형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가담하는 '패러디'이다. 

-> 무의식적이고 순응적인 패러디가 아닌 전복적인 패러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행위성 agency 행위작인의 문제 : 

일반적 의미, 사회문화적 맥락으로부터 자율성을 갖고서 스스로에 대해 조정할 수 있는 능력. 

미리 존재하는 주체가 있음을 전제.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함.

주체가 담론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마치 담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 양 생각하여 행위성의 가능성이 사라진다고 보는 오유를 가져옴.

-> 의미화 작용이라는 것이 주체를 '결정'하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일련의 반복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함.

   행위성 문제는 의미화, 재의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함. 모든 의미화 작용은 반복하려는 충동의 쾌도 안에서 위치하기 때문에 행위성은 이러한 반복의 새로운 형태가 가능해지는 범위 내에서만 나타남. 즉 반복적인 의미화 작용의 실천 속에서만이 전복적인 정체성의 재구성이 가능해진다. 

-> 우리의 관제는 반복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반복하느냐의 문제다.

-> 그러나 우리가 옹호하고자 하는 권력과 저항하고자 하는 권력 간의 차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버틀러 : 

이성애적 정체성의 구성요소 : 금지와 억압

. 동성애적 욕망을 금지 -> 동성애겆 애착의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 허용되지 못함 -> 애도되지 않은 상실은 우울증적인 형식으로 자아에 합체되있음. -> 이러한 우울증은 긍정적인 전복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음.

. 저항적 행위는 ~ 일관성이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든 요구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우리를 부르는 그 용어(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용어)를 전복적으로 오인하는 것으로써 가능함.


<포기>와 <오인> => <수용>과 <창조>로 이해해야

자신의 공한 본성을 자각하고, 한 생각을 잘 내는, 즉 선업을 짓는 마음내기에 해당함.


저항적 수단(포기, 거절, 오인) - 순종

참회 - 자기비난 각각을 어떻게 구부할 수 있는가? 


-> 그 차이는 바로 주어진 현실에 대한 <완전한 수용>이 가능했느냐 여부에 있음. 이때 연기적으로 가화합된 현상세계의 공성을 체득했느냐가 바로 완전한 수용의 기준임. 주체와 주체를 구성하는 법/권력이 불일불이의 관계, 상즉상입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버틀러의 행위성 개념은 '저항'으로 의미화되기 보다는 -> '창조'로 의미화되어야. 

. 이미 특정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배를 부두에 있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다른 이름으로 바꿔 명명할 수 없다는 것. 

. '구조적 제약'에 대한 인식문제.

. 고전 물리학적 세계가 반영하고 있는 영역에 대한 사례. 

-> 그러나 재의미화 혹은 마음내기는 보다 클 그림에 해당하는 현대물리학적 이해에 바탕을 둔 설명임.

   고전물리학=인과적 세계, 현대물리학 = 상호인과적 세계 후자는 결코 전자를 '배제'하지 않아.

   (세끼 손가락과 엄지손가락 - 손의 입장)

의식수준에 따라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은 달라짐. 

예) 모욕적인 언어 -> 상처를 받음(모욕적인 언어와 동일한 믿음체계)

                    -> 상처를 받지 않고 긍정적으로 재전유함(상위 차원의 믿음체계) 상위차원의 의식은 낮은 차원의 의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해하고 넘어섰을 뿐이다. 

* 어떤 사람의 모욕적인 발언에 대해 깊은 상처를 받는 경우는 대게 그것이 자기에게 (무의식적으로) 크게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 존중감이 그 보다 높아졌을 경우에는 오히려 모욕적인 발언을 한 상대가 어떤 심리적 두려움이나 불편함에서 그렇게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그래서 도리어 어떻게 그를 도와주어야 할지에 대해 고려하게 되기도 한다.


'생각 뒤에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의 핵심, 이중적 차원 : 

1)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은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인과적. <미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미운 생각>을 하고, <미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미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 현상계, 세속제

2) 근본적으로는 실체가 없으며 공하다. 실상에서는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생각>도 없다. -> 실상계, 제일의제


=>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미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고운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을까?)

모욕적인 발언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것은 모욕적인 발언에 실체가 없음을 알아차리는 , 공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이다. -> 이러한 자각을 하기 위한 노력이 곧 마음 수행인 것. 


버틀러의 행위성 개념, 전복적 실천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그의 전복성은 근본적으로 저항의 개념이어서 여전히 억압적인 것과 해방적인 것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관점을 내포함. 

. 전복적 실천과 수행적 실천의 차이. 전자가 억압적인 인식에 대한 대응, 후자는 '창조적 마음내기', 의식의 상위수준을 향하는 보다 연속적이고 광범위한 인식지평의 확대를 가져옴. 

=> 마음수행적 수행. 


저항마저도 창조의 한 양식임. <저항하는 것은 지속된다> 무언가 불만을 갖고 저항하는 일은 불만의 대상을 하나의 실체로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존재의 영역에서 창조하는 일임.


공의 관점에서는 주체도 없고 저항적 실천도 없지만, 현상계 차원에서는 진화와 발전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핵심은 저항(또는 창조)을 하느냐 순응을 하느냐 여부가 아니라 어떤 인식하에서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함. 마음과 짐가 동기.


달리 보는 보수와 진보 : 

. 목욕적인 발언에 대한 저항 심리는 사실상 상위차원의 창조를 이루어내기 보다는 동일한 선상에서의 경계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기존의 대립적 구도/권력을 유지시키는 보수적 역할을 함.

. 가장 수용적인 마음이 가장 창조성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공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가 가능하다는 뜻임. 무언가에 존재한 권리를 전적으로 허용할 때 그것은 마침내 스스로 소멸하여 다른 것에 자리를 내줄 수 있겠된다. 


* 수용적인 마음 이란? : 

.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발화자가 나의 외부에 있는 타자가 아니라 내 안에 합체되어 있는 나를 구성하는 타자, 즉 나의 무의식의 표현임을 인식하는 마음. 

. 타자를 나와 분리해서 보는 마음으로는 비록 그의 모욕적 발언을 재전유하고 재의미화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긴장된 싸움이며 나의 재의미화는 나에게는 해방적일지라도 상대에게는 또다시 모욕적이 될 것이다. 

안방에 있던 오물을 건넌방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저항'임. 오물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창조'임.


"의식이란 언제나 자아 의식이다. 그대가 어떤 것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대 자신의 의식이다" 


* 감정노동, 마음노동 :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현상계의 착각에 기반하고 있는, 경계를 해체하지 못한 채 창조적 능력을 발취하고자 할 때 그것은 마음내기가 아닌 마음노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