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수행자적 태도의 실천적 의미_이분법적이지 않은 사회적 실천

백_일홍 2017. 7. 3. 14:57


9장. 이분법적이지 않은 사회적 실천

2, 수행자적 태도의 실천적 의미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성불, 깨달음. -> 이것이 바로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다.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부적절한 대안이기도 함.

-> 해답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다만 어렵다는 이유로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업다. 


전세계적으로 횡행하는 성의 살품화가 완전히 근절되기를 희망하는 일이 깨달음 프로젝트보다 더 수월한 것만도 아닐 것. 


불교는 정의의 윤리가 아닌 덕의 윤리. : 

원칙에 의거해서 모든 주체들에 의해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변화의 정도에 따라 다만 실현될 수 있을 뿐. 윤리적 행위의 수준은 주체의 의식수준에 따라 달리 나타나게 마련, 이러한 차이의 존중이 사회적으로 수용됨.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이분법적 관점 -> 의식수준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해되어야. 

타인의 무지와 어리석음은 <악>이 아니라 다만 미성숙함이라는 것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처벌과 타도의 대상을 도움이 필요한 나의 '구성적 외부'로서 포용할 수 있게 됨.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과 상처에서 회복되는 과정에ㅔ서 '제2의 화살'을 스스로 쏘지 않을 수 있는 '대상 분리적이지 않은' 즉 불이적 인식론의 체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근본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의 문제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인식론에 대한 장기적인 치유과정으로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지침을 요구하는 보편적 규범주의로서 여성주의를 수행해나가는 작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사회운동적 습관. 연대의 개념이 해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보편화작용의 자기기만적, 교주주의적(즉 실체화시키는)적 병폐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비난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부인된 무의식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비난해야 할 적이 사라짐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업인 줄 모르고 악순환(윤회)하는 반복되는 고통을 안타까워해야 함.


불교 보다는 현대물리학, 신과학을 여성주의에 접목하는 것이 유의미할 지도 몰라.

고전물리학  - 현대물리학

색은 공과 다르다 - 공은 색을 부정하지 않다

이분법적 관점 - 탈이분법적 관점(이분법이 허상임을 깨닫는 것, 이분법을 떠나 별개의 그 무엇이 아님)


중요한 점은 해체와 깨달음이 개인적 수행을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기에 진실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것.

the public, the political


나와 세상이 보다 살만 한 곳이 되게 하기 위한 노력은 삶의 논리 속에서는 포기될 수 없는 작업임. 그 노력이 보다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수행자적 자세가 요구됨. 이것은 결고 세상의 문제들을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변화할 수 있도록 현상 자체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함을 의미함.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도 그것이 인과에 이해 연기적으로 발생한 것이기에 현상계에 존재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수행자적 태도 : 모든 경계가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돌릴 줄 아는 자세.(=책임의식)

공동의 책임의식의 극대화, 인식론적 평등 -> 사회개혁을 투쟁이 아닌 창조로 이끌어줄 수 있는 전제가 됨


절대적 무의미, 공의 발견은 의미 창조자로서의 자신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 될 수 있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당신의 책임"이다. , 책임=자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유로운 능력

보살: 세상에 대한 무한책임의 정신을 갖는일.


여성주의는 궁극적으로 사랑과 보살정신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한다.

불이가 곧 사랑이다.

여성주의는 이미 사랑이다.

  : 사랑없이는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다. 피해의 경험을 한 여성이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기비하가 아닌 자기긍정의 여성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고통받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회구조적 차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랑이 이분법에 대한 집착을 얼마나 벗어냐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짐.

이분법이 남아 있는 정도가 곧 책임을 지지 않는 정도와 같기 때문. 


안티페미니스트 담론, 백래쉬를 접할 때 이것의 책임을 '어리석은 저들'의 문제로 보며 '선량한 우리 여성주의 주체'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게됨 -> 대립과 투쟁의 관점이 악순환

여성주의적 투쟁으이 정당함 - 가부장적 억압의 부당함은 불이적 관계, 상호의존적임을 아는 지혜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