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적대적 대립을 넘어서기_이분법적이지 않은 사회적 실천

백_일홍 2017. 7. 3. 12:54


9장. 이분법적이지 않은 사회적 실천

1. 적대적 대립을 넘어서기


이분법적이지 않은 사회적 실천이란 무엇이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 

. 주체의 피해자적 관점을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 이것은 여성이 가담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만이 가능함.

. 인간중심주의와 동물해방의 문제를 사례로 봄.


불이적 관점에서는 소위 가해자가 되어도 문제가 안되고, 피해자가 되어도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이분법적 관점에서는 가해자가 되어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죄의식에 의한 과보를 받게 되고, 피해자가 되어도 분노와 피해의식으로 인한 악업을 짓게 되는 것. 


개고기 반대운동, 처음에는 고토앋는 개를 위한 것에서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개고기를 반대합니다'라는 구호.-> 비판하고자 했던 대상들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관점을 바꿀 필요성이 느겨졌음을 알 수 있어.

동물 고통의 가해자는 특정 인간들이 아닌 국민/인류 전체임.

-> 비로소 운동은 이분법적인 공격성에서 탈피할 필요를 느끼게 됨. 

-> 대립적이지 않은 평화적인 인식론에 입각한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어. 

-> 모든 종류의 고통과 갈등에 대한 인식론적 지형을 바꾸어서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사회에서 일어나는 극악한 범죄조차, 특정 범죄자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아. 사형을 통한 처벌이 근본적 대책이 되지 못함.

-> 가해자 혹은 문제의 원인을 실체로서 규정하는 일은 임시적인 자기위안(혹은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음. 

-> 불교적 관점,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님. 업의 상속에 의한 문제의 반복이 미래에 지속될 것이므로 '오물을 주고 받는 일'에서 탈피하여 '오물을 없애는 일'에 착수해야 함.


번뇌가 '있음'에서 '없음'으로 전환하라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지 않음을 관하는 일처럼 개인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그 문제를 인식하는 주체가 자신의 인식행위의 공성을 자각하는 일임. -> 현상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현상의 실체가 없음을 앎으로써 집착이 사라지는 것을 말함. 


개혁을 위한 움직임에 뒤이어 백래쉬가 발생하는 것은 그 간의 운동이 진정한 성과를 보지 못했다는 증거. 

소수자 집단은 분리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기존의 변혁운동의 패러다임임. 소수자 집단을 계속 재생산된다. 즉 윤회한다. 

올바름에 대한 실체화, 교조주의, 주체의 심리적 경계의 지형을 더 협소하게 만듬 :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를 반대하고 그것을 실체화했을 때 인류 절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일이 됨, 

인간중심적 동물착취에 반대하고 그것을 실체호했을 때 세상의 99%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일이 됨. 


중요한 것, 붓다의 무상정등각에서 비롯된 가르침과 통찰력을 어떻게 현재 우리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활용할 것인가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

'온갖 상을 여윈 이를 부처'라 한다.


.....


불교적 수행이란 결국 개인적 차원의 구원과 사회적 차원의 개혁운동의 이분법조차 허구임을 아는 수행을 말함.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제아무리 나와 동떨어져있는, 다른 주체들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이며 모순이라 느껴질지라도 그 모든 일들은 나의 인식행위와 분리된 채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아. '마음 밖의 세사이 없다'고 할 때 마음은 내 에고(표면의식)의 마음이 아니라 내무의식이기도 하며 이것은 다른 타자들의 무의식이기도 함. 


사회온동은 표면의식이 영역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표면에서 겉도는 것이 사회운동의 현 주소. 


사회는 개인들이 구성해서 생겨난 것. 각각의 개인이 자기자신을 알지 못한 채 외부세상을 변화시키려할 경우 효과가 떨어질 수 밖에.  


의식수준에 따라 문제가 문제가 아닐 수 있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 변화되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