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자비와 용서의 패러다임
2. 용서의 가능성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자발적 용서와 돌봄에 관해 심리적 장애, 거부감을 느낌.
의무적으로 강제된 돌봄, 서비스는 여성에겐 단지 노동일 뿐.
용서와 친절을 배푸는 수행의 일은 여성과 남성에게 다르게 경험됨.
남성: 독립적, 분리적 자아, 여성: 관계적, 의존적 자아,.
조승미, "여성들의 억압된 분노는 여성수행에 있어서 자기비난화된 참회의 형태로 나타났다. 자기비난과 혼동된 참회수행은 오히려 여성의 진실한 참회수행을 가로막고, 여성들을 분노로부터 진정 벗어나게 하는 길을 은폐시키게 만들었다"
참회와 자기비난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 차이는 무엇일까?
자기비난 : 외부로 향하던 분노가 퇴각하면서 내부로 방향성을 바꾸는 것,
참회 : 분노가 실질적으로 사라지는 것, + 그 분노가 기반했던 주객분리의 인식론이 자타불이의 자각으로 전환되었을 때 나타나는 '하나됨'이다. 이러한 참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수용과 용서가 먼저 이류어져야 함.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의 일부임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도 학대하기 마련.)
->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비난/거부하는 관념에서 놓여나야하며, 타자(가해자)가 남이 아님을 느낌으로서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참회하고 스스로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는 내적인 힘은 사회의 지배담론이 바뀌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생겨남.
사회적 지배담론이 바뀌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가? 불평등한 사회적 맥락이 나의 행위를 구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주어진 조건이 먼저 바뀌어야 만이 나의 행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 이 지점이 바로 인식론적 전환이 일어나야 할 핵심지점이다.
나의 행위(용서/친절)는 그 행위가 일어나는 맥락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데 문제는 그 맥락을 누가 인식하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나 자신이다. 나의 행위와 그것의 사회적 맥락의 관계가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수행의 효과임.
. 기존의 선형적 인과의 관점 : 사회적 맥락이 나의 행위를 의미화 시키는 원인으로 존재함. 그 맥락 속에서 나는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 맥락이 강요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예, 특정방식의 친절행위는 곧 굴욕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 의미화될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질 수 있음. 상대가 사과를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결코 내가 먼저 상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여겨질 것임.
. 상호적 인과의 관점 : '사화적 맥락'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나와 무관하지 않아. 나의 행위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지만, 나의 행위는 그 자체가 사회적 맥락을 특정방식으로 읽어내는 일의 효과이기 때문에 양자는 상호적으로 기원하는 관계임.
여기서 어려운 점은 사회적 맥락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느껴진다는 데에 있음.-> 사회적 맥락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와의 관계 하에서만 존재함.
여성운동이 가부장적 체계를 실체로 여기며 그것을 무너뜨리려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동반한다. 그것이 바로 백래쉬. 완전한 동의와 완전한 공감을 얻지 못한 승복은 어떤 형태로든 반격으로 이어지기 때문.
여성주의 정치학의 주체가 인식한 가부장적 억압체계는 여성주의적 관점과 상호의존적인 불가분의 관계.
. 스스로를 온전히 긍정하는 여성과 가부장적인 사회는 양립할 수 없다.
. 여성주의,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 그 반대의 논리도 성립가능.
. 가부장적 체계들이 여성들이 스스로를 부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보는 관점은 선형적인 인과론으로서 한계를 갖는다.
-> 여성주의자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현실은 바로 '자신의' 즉 자기가 읽어내고 있고 인식하고 있는 바로 그 사회적 맥락이라는 점. 인식대상의 범위나 규모가 커질 수록 그것은 인식주체와 상호의존적이라기 보다는 독자적인 실재성이 있다고 착각되는 경향이 있음.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인식하고 있다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인식하고 있는가? 결국은 나의 인식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어떤 대상이 자신의 통제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그 것이 객관적인 실재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집에 있다. 집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우주는 어디에 있는가? 우주의 상대개념이 있다. 우주가 있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는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결론. 우주와 나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상호의존적 관계, 실체성이 없다. 공성을 다시 한번 확인.
내 몸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내가 인식한 사회적 맥락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내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함.
나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사실상 나의 '일부'임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 적대감이 사라진다.
2.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순수한 탐구심이 일어남.(피해의식 -> 책임의식)
엄청난 인식론적 전화 : 적대성의 무화
나의 용서행위를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맥락을 규명하는 일은 여전히 주어진 과제이지만 그 과제는 더 이상 투쟁의 형식을 빌지 않아도 되는 보다 고요한 탐구로 전환되는 것.
폭력적인 남편을 떠나버려도 '피해자적 의식'은 그에 상응하는 또 다른 새로운 '폭력적 현실'과 만나게 될 것이다.
-> 피해자적 의식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o '불가능한 용서'로서의 자비
데리다, 상처있는 자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하다.
끔찍한 피해를 입은 사람은 피해자로서의 상처와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이 용서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 피해자가 용서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만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용서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 삶 속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가해자를 용서하는 놀라운 사람들을 간 혹 볼 수 있다. 경험적 차원에서는 가능하지만 논리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함.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 기존의 선형적 인과와 그것에 기반한 우리의 세상은 실상의 세계와 무곤한 형이상학으로서 오로지 실체화시키는 관념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 나는 너를 용서한다>, 나, 너, 용서하기 등은 모두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화한 상에 불과하다.
나(피해자), 너(가해자)가 분리된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서행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님을 안다는 것은 곧 용서할 게 사실상 없음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피해자의 경험마자도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걸어가다가 왼발이 오른발을 실수로 찼을 때 오른 발이 왼발을 다시 공격하지도 않고 따로 또, '용서'하지도 않는다. 오른발의 통증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함. 그 고통을 심리적 고통으로 확대발전시키거나 억압받았다는 인식으로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
자아가 '있다"라는 관념
-> 일차적 장애 : 타자가 '있다'는 관념에서 비롯되는 경험의 실체화. 타자가 나에게 행한 짓이 하나의 딱딱한 덩어리로 인식된다는 것.
-> 두번째 장애 : 자아의 경험이 '주어진'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가능성의 제약이라는 점에서 선택가능한 길의 도식화를 초래함. 그러나 일단 선택가능한 길이 어디로든 가는 곳이 바로 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주체의 자유도 이에 따른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 다르게 인식하는 선업을 통해서 보다 만족스러운 결과 즉 선한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자아의 경험이 사회적 매락으로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임을 알아차릴 때 그것은 다시 새롭게 재구성해내는 주체의 행위작인(agency)이 강조될 수 있다.
=> 불교적 관점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악업(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인식)에 의해 악한 과보(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결과)를 받는 것 보다 선업에 의한 선한 과보를 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업도 '업'이라는 실체론적 관점(실체론적 관점에서 용서는 불가피하게 자아의 주권을 내세우는 일이 된다. 이 경우에는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그것은 이미 용서가 아니게 됨)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궁극적으로는 선업도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함을 말해준다. 용서를 안하는 것 보다는 용서를 하는 것이 낫지만, 사실은 용서가 불가능함을 즉 용서할 게 없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용서가 될 것이다.
=> '나'와 '너'가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용서 못하는 고통>도 있고 <용서하는 평화>도 있지만, 나와 너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용서가 불가능하기에 <'불가능한 용서'로서의 자비>가 있을 뿐이다.
자비, 용서가 없음을 아는 공성, 이원성이 더 이상 성립되지 안는 공성의 한 표현.
깨달음에 이르지 않은 사회에서는 자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만 용서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치유적 효과를 의도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논의를 가능케 할 것임.
'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과로 구성된 마음의 활용_믿음의 정치학 (0) | 2017.07.03 |
---|---|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을 넘어서_믿음의 정치학 (0) | 2017.07.01 |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서_자비와 용서의 패러다임 (0) | 2017.06.30 |
수행이 결여된 불완전한 해체_불교적 관점에서 여성주의/해체론 바라보기 (0) | 2017.06.30 |
규범적 실체론_불교적 관점에서 여성주의/해체론 바라보기 (0) | 2017.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