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수행이 결여된 불완전한 해체_불교적 관점에서 여성주의/해체론 바라보기

백_일홍 2017. 6. 30. 10:31


6장.불교적 관점에서 여성주의/해체론 바라보기

3. 수행이 결여된 불완전한 해체


서구의 해체론 : 

. 법공을 철학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

. 철학이 삶 속의 수행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 그것은 여전히 인식대상에 대한 철학적 논의로 머무를 수 밖에.


공을 실제로 체득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대상화될 수 없는 지점인 '나와 나의 것(고통)'에 대한 설찰이 요구됨.

(즉 '실체와 속성'의 연기적 범주를 1인칭으로 적용해야 한다)


아비달마 불교, 아공법유

. 아공이 또 하나의 법(객관적 인식대상)으로 대상회되고 있음.

-> 객관적 사물의 실체성이 궁극적으로 부정된다면 주관적 정신의 실체성도 존재할 수 없다.

. 자아가 없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불교수행자의 오류 : 

자아라는 관념은 허상이지만 세상의 모든 물리적 현실은 명백히 실재한다고 믿거나 자아가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는 윤회가 없으며 모든 것이 끝난다는 식의 주장을 함. 

세상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분별심을 갖고 있다. , 헌신과 이타심을 강조하는 사회변혁가들도 가치를 절대시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임. 


해체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학자층의 오류 : 

모은 것이 공하다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굳게 믿지만 그렇게 믿고 있는 주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함.

전위적 예술이나 자유주의적 성향의 삶을 중시하는 경우, 윤리적 고정관념을 깬다는 명분으로 에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을 무의식 중에 합리화하게 됨.


데리다의 해체론과 불교

" 실체를 해체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데리다의 해체기호론은 공을 허무로 해석하고 불교의 비유무무의 창조적 공으로 인식한다는 차이가 있음."


해체의 철학을 수용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악취공의 문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보기는 힘들어. 그것은 아공법공, 불교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체득될 수 있기 때문.

공성의 체득은 견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결코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지적인 이해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분리시킴으로써만 획득되는 과정이지만 공성이란 인식과 대상의 불일불이에 대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해체의 한계가 불교의 중도와 공관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임. 


불교: 

특정부분을 전체로 여겨 실체화하는(코끼리를 만진 장님들이 코끼리를 코라고만, 또 꼬리라고만 할 경우)잘못을 부정함(쌍차) neither-nor 

'코끼리는 코이기도 하고 꼬리이기도 하다'라고 모두를 긍정하는 것(쌍조) both-and

-> 쌍차는 두 가지 지적이 둘이 아닌 무분별의 전체로 융합하는 쌍조가 그 목표임. 본성이 공하지만 현상은 다 인정된다는 뜻임. 


데리다: 

쌍차는 똑같이 행하고 있지만 쌍조는 '동시에 ~이거나 ~이거나'(simultaneously either-or)임. 동시에는 둘을 합친다는 뜻이고 ~이거나~이거나는 융합했던 것을 다시 분리하는 일임. 결합과 분리가 동시에 일어나는 동시적 양자택일임. 여성주의 논의들이 여성들 간의 같음과 다름을 동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도 나타남. '같으면서도 다르다'


불교는 가짜 매듭을 풀고나서 진짜 전체의 매듭을 다시 맺는 반면, 데리다는 진짜 매듭을 맺자마자 금방 풀어버린다.

후기구조주의, 해체와 반복, 여기서 반복이란 해체를 무한히 계속한다는 것, 


불교와 데리다는 모두 흐르지 않는 실제적 시간을 흐르는 무실체적 시간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데리다는흐르는 시간이 정지된 시간으로 바뀌지 않도록 "시간의 3상(과거, 현재, 미래) 사이에 '간'(사이)을 만드는데 여념이 엇다. 데리다의 해결은 정지된 시간으로부터의 해탈. 불교의 해결은 흐르는 시간으로부터의 해탈, 즉 열반임.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데리다는 시간의 강가에 서서 현재로 흘러오는 미래의 강물을 쳐다보는 '관찰자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불교는 시간의 강으로 '몸을 던져' 시간과 하나가 됨으로써 '현재'가 해체되었기 때문. 불교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공은 열반경험에 이르기 위한 방편 가설인 뗏목임에도 불구하고 그 땟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해체이다.


왜 공이 실체화될 수 밖에 없는가? 공이 대상화되었기 때문, 대상화화는 인식주체가 '있기'때문.


진보진영이 스스로에게 철저하지 못할 때 그것은 필히 기득권에 안주하는 보수화 과정을 거치게 마련임. 그 매커니즘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함. 모든 것을 해체해도 인식주체가 해체되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해야 강물에 몸을 던질 수 있는가?

-> 1일칭 주체와 속성의 연기적 관계가 해체되어 공성으로 거듭나야.

'나'와 쉽게 분리되지 않는 '나의 속성' : 나의 감정, 생각, 신념들.

양자의 상호의존성이 실질적으로 자각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관하는) 수행임. 무의식적 동일시에서 탈피하는 일.


철학에서 수행으로의 전환.


여성들이 '같으면서도 다르다'로 규정하는 방식.

데리다의 쌍조의 방식으로 불교의 불일불이와는 구별됨. 그것은 한순간도 마음 놓고 경계를 풀 수 없는 첨예한 해체의 작업을 요구하는 일, 여성 주체가 해체되었다고 아무리 주장을 해도 일인칭 여성/주체가 여전히 투명한 실체로서 '숨어있기' 때문에 억압과 해방의 이분법을 내포하고 있을 수 밖에 없고 다양한 입장들 간의 궁극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일을 수 밖에 없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무한히 책임을 지는 것이 데리다의 쌍조 방식임.


(*불교, 불일불이, 쌍차쌍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본성은 공하지만 현상은 다 인정한다. 

여성은 흑인만이라 하거나, 

여성은 백인만이라 하거나, 

여성은 이성애자만이라 하거나

여성은 피해자만이라 하거나

여성은 비장애인만이라 하거나....

-> 여성은 흑인만도 아니고, 백인만도 아니고 이성애자만도 아니고....(불일, 쌍차, 부정, 왜냐하면 여성의 부분만을 여성전체라 말하는 주장을 부정함, 더 나아가 본래 여성이란 실체는 없다 인연에 따른 것이며, 그 이름이 여성일 뿐-> 여성주체의 해체

-> 모든 부분들이 다 여성임을 긍정하는 것이 쌍조. 모든 부분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혹은 인연에 따라 생기는) 상대적인 현상적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