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규범적 실체론_불교적 관점에서 여성주의/해체론 바라보기

백_일홍 2017. 6. 30. 10:27


6장, 불교적 관점에서 여성주의/해체론 바라보기

2. 규범적 실체론


버틀러에 대한 비판 : '(선악의) 규범성의 결여'

. '무엇을 근거로 무엇에 대해서 저항해야 하는가?'

  모든 해방담론이 공유하고 있는 상대주의에 대한 거부감, 해방의 당위성이 약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의 표현임.


규범의 근거가 사라진다는 점에서도 불교의 공사상에 대해서도 유사한 의문이 제기됨.

->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사성제가 성립한다. 

공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지..만일 그대가 사물에 자성이 있다고 본다면 이는 그 사물을 성립시키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보는 일이 된다. 인연에 의존해서 발생한 것을 공이라고 하고, 공에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가명으로서, 유무를 떠난 중도의 이치를 말한다. 


자아라는 것에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움직임, 변화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뜻함. 무아가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며 여성 주체 없이 어떻게 여성주의 정치학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 이렇게 제기되는 의문들은 모두 공을 있음의 반대인 없음으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 공을 없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을 실체로 인식하는 것. '공도 공하다.'


공의 실체화, 허무주의자, 악취공의 패해

. '나'라는 인식주체의 공성을 깨닫지 못한 채(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일체 모든 대상이 공하다고 할 경우(아유법공) -> 허무주의자, 막행막식. 여성주의 논의에서 우려하는 경우에 해당됨.

. 여성주의에서 중시하는 평등이나 정의, 보살핌 등의 가치가 공하다는 것은 그러한 가치들이 부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실체로 보는 태도가 시정된다는 의미. 의미를 추구하고 선한 결과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 공을 실체로 보지 말아야, 공을 자꾸만 실체로 인식하는 이유는 인식주체인 자기 자신의 공성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 무아에 대한 지식도 도움이 되지 않아. 왜냐하면 '내가 없다'는 또 하나의 생각이 대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 

-> 공성을 깨닫는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번뇌를 가라앉히는 일. 즉 인식주체 자신에 대한 성찰이 급선무임.


'공과 윤리' 4가지 형태

1) 나도 실재하고 세상도 실재한다(세속적 관점). 선행의 궁극적 의도는 사실상 자기를 위한 것.(위선적 윤리)

2) 무아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혹은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리는 과감한 윤리적 결단을 감행하지만) 지계라는 자정의 윤리를 행하지만, 그런 윤리적 덕목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면 그 선을 넘는 자에 대해 화를 내는 자기모순에 빠짐.(형식적인 소승윤리, 해방지향적 실천가들)

3) 아공은 되어 있지않으면서 법공만을 인식하는, 막행막식의 태도(비윤리적)

4)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아는 아공을 터득해서 자비심으로 충만해 있으면서도 모든 개념이 해체된 법공을 터득하였기에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분별을 내지 않음 (무주상적 대승윤리), 무주상적 보시, 보시를 했지만(세속적 관점) 보시를 한적이 없다(궁극적 진리의 관점). 윤리와 공성이 모순되지 않음.


자아에 대한 상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세상 만을 해체해버린 불완전한 공성 '아유법공'은 분명히 윤리를 파괴함. 이런 이유로 해체론이 불완전하게 진행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임.

어떻게 아유법공 -> 아공법공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 일인칭 주체의 수행이 요구됨

-> '실체와 속성'의 연기적 범주를 관하는 과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이루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