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이제설: 궁극의 진리와 경험적 진실(2)_진정한 이분법의 해체

백_일홍 2015. 11. 19. 11:25


2.진정한 이분법의 해체_이제설: 궁극의 진리와 경험적 진실(2)


2) 진리의 이중성


색즉시공 공즉시색


사람들이 '유'에 사로잡히다 

-> '색은 공이다'라고 했고, 

사람들이 '공'을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잘못 알기 십상이기에 

-> '공은 곧 색이다'라고 하는 것. 


불교의 약사: 인도에서 독자적인 영혼 즉 아트만을 믿자 석가는 무아를 강조했고 부처 이후 아비달마 불교가 법을 객관적인 실재로 상정하자 용수와 중관불교는 공을 강조하게 됨. 대다수의 사람이 공을 '없음'으로 이해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자 이후에 유식불교가 등장하여 모든 것은 오직 식 즉 마음이라고 설명하게 됨. 이에 대해 대행스님은 '한마음 주인공'이라는 표현을 통해 마음과 공성을 하나의 개념으로 종합하여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 있다. 


불교는 이분법을 넘어선 것이지만 그렇다고 일원론으로 통합한 것은 아님. 이분법이 이분법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 파도를 떠나서는 바다를 찾을 수 없듯이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를 발견할 수 없고 색을 떠나서 공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 


현상계는 엄정한 인과법칙으로 돌아가기에 "우주와 인간계는 하나의 꽉 짜여저 있는 그물이어서 업이라는 것은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어긋남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공의 자리에서는 업 붙을 자리도 없고 팔자운명 붙을 자리도 없다" 


인연과 업보, 윤회와 생사 등이 근본의 자리에서는 본래 있지 않지만, 공을 모르는 중생에게는 엄연한 현실로 체험될 수 밖에 없다는 점. 


자아에 집착하는 중생은 인과에 따라 행복한 노예가 되거나 불행한 노예가 되지만, 공성을 체득한 부처가 될 때 비로소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된다. (자아가 있다고 믿으며 나와 객관적 실재가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중생)


원인과 결과를 각기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생의 세계, 원인이 원인이 아니고 결과가 결과가 아님을 깨닫는 세계가 부처의 세계("인과는 인과가 아니라 그 이름이 인과이니라", 금강경) 

-> 원인과 결과가 실재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믿는 만큼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현상과 실체라는 서양철학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 현상즉본체의 비이원성. 


여성주의 논의들이 해체론을 오해하게 되는 이유 : 

현상적 차원의 표현과 본체(해체)적 차원의 표현을 혼동하기 때문. 해체(공성)에만 치우친 설명은 마치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들마저 부정하는 것인 양 오해하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