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이 세상이 착각임을 증명하는 논리(1)_2.진정한 이분법의 해체

백_일홍 2015. 11. 18. 12:03


2.진정한 이분법의 해체_이 세상이 착각임을 증명하는 논리(1)


1) 중관논리 

중도에 대한 관. 

연기법의 원리에 관한 요약으로서 8불 : 

발생하지 않으며 소멸되지 않는다. 상주하지 않으며 단절되지 않는다. 동일하지 않으며 다르지 않다.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며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일반논리학을 전면적으로 비판, 부정. 일반논리학은 우리의 사유를 개념, 판단, 추론의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 

개념에는 실체가 있다. -> 모든 개념은 연기한 것이기에 공하다. 

판단은 사실과 일치한다. -> 판단은 사실과 무관하다.

추론은 타당하다 -> 어떤 추론이든 상반된 추론이 가능하다.

판단의 사실성에 대한 비판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주어와 서술어가 결합되는 일 자체가 정말로 진실이 될 수 있는가? 


2) 연기적 관계의 의미


< 행위자와 행위 >


'철수가 간다' : 철수란 무엇인가? 수많은 다양한 모습의 철수를 하나의 추상화된 존재로 실체화하는 오류. 실제로는 철수라는 추상화된 개념이 가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다. 철수가 간다라고 했을 때의 철수는 '누워있는 철수'도 아니고 '앉아 있는 철수'도 아니고 '가는 철수'이다. <'가는 철수'가 간다>가 된다. 중복의 오류. 철수와 간다는 동일하지 않다.(불일) 또한 철수와 가는 작용을 별개의 다른 것이라고 설정할 경우, 이 두가지를 분리된 실체로 본다는 것으로, 철수가 아니라 미애가 가는 작용을 해도 옳을 것이고, 철수가 가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눞는 작용을 해도 옳을 것일 것. '미애가 가는 철수의 가는 작용을 한다', '가는 철수가 눞는 행위를 한다'는 의미가 생성되어 명백히 모순이 된다. 따라서 철수와 간다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다른 개념이 아니다(불이)

 

-> 행위자와 행위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철수라는 개념, 가는 작용이라는 개념이 실체로 설정되었을 때에는 모순에 빠진다. 두 개념이 독자적인 자성을 갖는 실체로 인식되는 한, 양자 간의 관계는 성립이 안 되는 것. 가는 철수 없이 가는 작용이 있을 수 없고 가는 작용 없이 가는 철수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다. 


-> 자신의 존립의 근거가 타자에게 있을 때 그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타자가 또 다시 자신에게 의존하여 존재한다면 이러한 논리적 악순환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철수도 실체가 없고 가는 작용도 실체가 없다.

주어와 동사는 상호의존적으로 성립하므로 동사가 아직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주어라는 것이 있어서 주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동사라는 것을 취할 수 없다. -> 주어와 동사이 결합으로 이루어진 '판단'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


불이를 두드러지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예.

눈과 사물.

" 이 눈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기자신(=눈)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 


추상적인 눈은 존재하지 않는다. 컵을 보는 눈, 나무를 보는 눈 등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의 눈이 있을 뿐.

'컵을 보는 눈'과 '보이는 컵'간의 연기적 관계.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은 상호의존적. 


보는 기관은 무엇인가 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때에 한하여 보는 기관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눈이 대상(및 작용)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할 경우에는 보이는 대상(및 보는 작용) 없이도 존재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때 자기 스스로라도 볼 수 있다면 보는 기관으로서의 기능적 정의에 위배되지 않는다. 문제는 눈이 대상없이 홀로 있을 때에 자기 스스로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보는 기관으로서의 자격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자성을 가진 실체로서의 '보는 눈'도 없고 '보이는 사물'이나 '보는 작용'이라는 독자적인 실체가 없다는 뜻.


반야심경, 무안이비설신의.= 안이비설신의가 없다. ->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불이적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