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인과의 구조에 대한 해체의 시작_1.여성주의와 이분법

백_일홍 2015. 11. 14. 17:18

1.여성주의와 이분법_인과의 구조에 대한 해체의 시작


여성주의 역사, " 그 동안 여성주의는 억압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론들로 나뉘어졌었으나 점차로 기원에 대한 논쟁은 사라지고 현실의 다양한 억압체계들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의 개념은 분명히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을 억압으로 해석하는 한 이분법을 비판하기 위해 여전히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모순이 지적될 수 있다. " 이는 제3의 물결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제3의 물결에서는 '여성주의' 자체가 논쟁적인 개념이 되고 있다 : 이분법은 억압적인 가부장적 권력에만 속한 악덕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적 사유방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패턴으로서 인식주체의 매커니즘의 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분법은 실상에 있어서는 분리될 수 없는 현실의 삶, 진실 그 자체를 특정 개념들로 실체화하여 모든 인식작용을 통틀어서 지칭하는 것이다. 주체의 사유과정, 인식과정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도 모와질 필요가 있으며 바로 그런 맥락에서 불교적 인식론과 만날 수 밖에 없다. 


근대적 이분법의 다른 이름이 바로 선형적 인과성이라면, 불교적 인식론의 핵심인 연기법은 곧 선형적 인과성에 대한 진정한 해체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형식적으로는 상호적 인과성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공성이다. 여성주의와 해체론에서 이분법은 불완전하게 해체된다.  


여성주의 내에서 선형적 인과성에 대한 비판 : 

. 토대주의 foundationalism : 특정 원인에 근거하여 특정 결과가 발생한다는 주장. 여기서 '원인'은 의심되지 않으며 당연하고 객관적인 실재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굳건한 토대가 된다. 버틀러, 우리가 '자연'으로 이해하고 있던 생물학적 몸 조차 사회문화적으로 해석된 기호임을 보여줌.

섹스가 원인이 되어 젠더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니라 젠더를 정당화하기 위해 근대적 의미의 섹스가 만들어졌다. 

. 섹스와 젠더의 구분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를 반대 방향으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일 방향의 관계를 상호적인 관계로 재규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두 개의 생물학적 성 <->결과 & 효과 < -> 두 개의 젠더로 설정된 것,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일종의 악순환이 되어 각각의 항목은 독자적인 진정성 혹은 실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 : 일직선적인 시간 개념, 과거와 현재는 선형적인 인과관계. 


. 현대물리학의 패러다임 : 상호적인 인과관계. 과거에 의존해서 성립한다고만 생각했던 현재는 동시에 과거를 만들어내고 있음. 

 현재에 인식되는 과거는 거짓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유의미한 내용이며, 근본적으로는 진실성 혹은 실체성을 갖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다. 실체가 없는 허구이지만 현재에 구성된 것으로서의 진실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진짜 사실'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허구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즉 '구성된 정체성'과 구별되는 본래의 '자연적 정체성'이 없듯이... 


상호의존적인 두 항목은 서로를 지시하기에 실체가 아닌 허상이지만, 이 허상성은 진실의 반대인 거짓의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진실이라고 할 수 없지만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공의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버틀러, 주체가 스스로의 출발점일 수 없다. 

. 주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홀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또는 담론/정치학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 존재성을 띠기 때문이다.

. 주체가 정치학에 앞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지점이 가장 정치적인 지점이다. 왜냐하면 정치학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주어진 주체가 있다는 생각은 주체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주체는 언제나 배제를 통해서 구성된다. 

. 주체와 주체의 권리에 대한 기존의 이해방식의 한계 : 근대사회의 인간은 고유한 권리를 지닌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의 권리가 다양한 권력관계들에 의해 억압되거나 박탈당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법에 호소하게 되는 데 이러한 논리는 한계적. 인간에게 어떤 본래적인 본성이 있어서 그것을 근거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권리를 주장하는 일 자체가 곧 그러한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 예. 낙태문제를 권리차원에서 접근했을 때 해결되지 않는 점. 


토대주의를 비판하는 여성주의 논의들 : 원인 혹은 토대에 해당하는 바를 분석하여 그 절대성/실체성의 허구를 드러냄. 이는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형식을 보면 결국 선형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이었음. 

. 탈근대성 담론, 니체(도덕), 푸코(지식), 데리다(언어), 버틀러(젠더).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선형적 인과관계를 해체한다는 점.

.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해체가 현재 여성주의 내에서 통용되고 있지 않음. 

. 해체론의 문제의식이 여성주의 내 수용되는 과정 : 여성들은 '같으면서도 다르다'라는 관점, 'and의 패러다임'

(비고 : 불교의 'nor패러다임', 공사상은 실체성이 허구임을 포현하기 위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해체론이 제시하는 차이의 패러다임 : 

단순히 알갱이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기보다는 알갱이 자체가 사실상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로 표현된다.

. 정체성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의 과정에 있다는 관점에서 여성 주체를 '있음'의 차원에 여전히 고정시키고 연대의 실천을 확보하고자 한다. 주체가 자신과 분리된 대상(억압적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주체들과 연대함으로써 정치적 실천을 해야 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기존의 주체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정체성의 정치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여성들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대한다는 사유방식은 해체론의 차이개념을 이론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정체성의 정치학이 전제하는 실체적 자아개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탈근대성의 논리가 해체시키고 있는 것은 비단 주체만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세상 전반을 포함한다.

. 물리적, 육체적, 생물학적 자연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바뀔 수 밖에 없다. 

. 버틀러의 해체론에 대한 오해 : '물리적 자연'을 담론으로 환원하다는 식의 오해. 해체를 '제거' 혹은 '삭제'로 오해. 그 자체가 실체론적 관점에서 나온 판단이다. A에 대한 해체는 not A가 아니라 A와 not A의 이분법이 구성된 것임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 생물학적 성(섹스)가 사회적 성(젠더) 만틈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은 섹스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곧 생물학적 자연에 대한 소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순수한 생물학적 자연이라고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 월경, '생물학적 사실'로 경험되지만 이러한 경험 자체는 이미 남성중심적인 성문화 속에서 '해석된' 경험이다. 만일 여성중심적 사회체제에서라면 월경의 의미 자체가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 아마도 월경의 이름과 그 이름에 포함된 인식이 전혀 다른 뉴앙스를 띠었을 것이기 때문에, 월경의 경험이 의미하는 바는 이미 별개의 '생물학적 사실'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 연기법은 인과성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중부정의 차원으로 표현된다. 현상적으로는 인과가 나타나지만 그것에는 어떠한 실체성도 없기에 공하다고 한다. 

. 여성에 대한 순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처녀막은 물리적 실재로 인식된다. -> 본래 처녀라는 것도 없고 처녀막이라는 것도 없다. 즉 처녀막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은 다만 그렇게 의미화된 개념에 불과하다. 처녀막은 또 하나의 젠더인 것. 이러한 이해방식을 두고서 해체론이 처녀막이라는 자연을 제거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남성비하적 사회에서 첫몽정의 흔적은 하나의 생물학적 사실로 증거가 될 것. 특정한 용어 XYZ로 상징화되면서.  

 

해체란 사실상 이분법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 자체의 공한 특성을 드러내는 일. 이분법이 허상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이분법의 해체이므로 해체는 분법을 떠나 있는 별개의 그 무엇이 아니며 일원론도 아니다. 

 

여성주의 논의들은 .... 물리적 자연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관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해체론의 주장이 경험적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주체의 해체가 여성주의 정치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주체와 행위(정치학)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