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주의 인식론_고미송

믿음이 곧 현실이다_맺음말

백_일홍 2017. 7. 3. 16:56


제 4부 맺음말

11장. 믿음이 곧 현실이다.


지배권력, 자신만의 안위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만의 안위를 생각, 이들의 이분법으로 사회(구성원)는 분열되고 고통받는다.

-> 대항세력이 형성됨. 이 대항세력은 독자적으로 세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배권력의 이분법에 의해 창조된다. 억압작용 -> 해방을 위한 반약용을 낳기 마련임.


반작용으로서의 해방담론의 한계 : 이분법에 대한 비판이자 투쟁이어서 자기 스스로도 이분법에 말려들어감. 다만 뒤집어진 이분법에 불과함. 해방세력의 이분법은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이분법. 

이 이분법은 필요악인가? 

악과 싸우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은 정당방위인가? 

독립을 위해, 평등을 위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투쟁은 '올바른' 이분법 아닐까? 

의로운 분노는 소중한 것이 아닐까?


물질적 세상은 이미 동시에 정신적 파동이기도 하다.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현대물리학의 발견들이 제시해주는 통찰들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객관적 실재란 없으며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인과율이란 인간의 경험적 현실에서만 지각되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 경험 속에서는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현상이 벌어지지만, 태양의 실상에서 본다면 태양은 뜬 적도 없고 진 적도 없다. 


인간은 자신의 심리적 현실을 고전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생산하고 또 재생산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어진 현실에 단순히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메모리에 저장된 고정관념의 프로그램들에 의해 조건지워진 반응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카르마의 지배를 받는 삶이다. 이 것이 현상계의 인과법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실상의 세계는 고정된 카르마 혹은 고정된 인과가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로운 현상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양자도약.


현상계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특정 원인에 의해 특정 결과가 주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관찰자들이 갖고 있는 공동의 고정관념들이 그러한 결과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 원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것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원인으로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기적의 합리성에 대한 이해. -> 실상의 세계의 합리성에 대한 이해를 말해줌. 

거울에 비춰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상. -> 실상의 세계는 거울임. 

: 자동차 운전자의 부주의가 원인, 결과로서 나는 놀라고 심리적 피해를 받음. 나의 불쾌함은 자동화된 반응이자 마음의 패턴, 거울 속에 나타난 일들은 모두 과거에 입력된 정보의 출력이라는 점에서 인과가 정확하게 나타남. 거울에 비친 상 자체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상들은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바뀔 수 있는 것들임. 여기서의 마음이란 '나'의 마음이 아니라 한마음의 마음, 거울의 마음이다. 그러나 거울은 누구인가? 바로 내가 아닌가? 

-> 마음은 자신이 가설로 만든 인물을 '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거울처럼 온 세상을 비추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 속에 있는 작은 한 개체와 동일시하고 있을 뿐. 

->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어떻게 해야 '근본적으로' 해방될 수 있을까? 

'나'라는 상은 이미 거울이기에 원론적으로 보면 이미 해방되어 있다. 색즉공


상상을 일으키는 데는 어떤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님. 상상은 디지털적이고 이것이 바로 양자도약의 실상이자 거울의 속성임. 그러나 마음에 입력된 관념들은 이것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끼 때문에 보다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이 기꺼이 좋은 것을 상상한다. 그러한 고정관념 조차 거울에 비춰진 상이라 한 순간에 전환될 수 있다. 


인과의 속박에서 익숙한 사람은 공성의 자유(거울)를 믿으려면 이분법적 사유방식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습관을 놓아버리는 작업이 곧 수행이기도 함.


변화의 진정한 원리는 변화 없이 변화한다는 데 있음. 마음에 점 하나를 찍는 데에는 아무런 원리가 필요없음. = 양자도약, 한생각을 내는 일.


디지털적인 마음의 원리를 다각도록 활용함, <끌어 당김의 법칙> 


현실을 변하시키는 방법론에 있어서 탈근대적 해방전략이 어느 정도 구사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이르렀음. 


1) 현대물리학에 의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사회변혁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는 작업에 대한 고민이 요구됨.

(변화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물리적인 투쟁을 강행하는 방식은 부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일이어서 긍정성으로 무장한 세력을 당해내기가 점점 힘들어짐. 마음이 가진 자체적인 희망창조능력을 강조하는 맥락이 빠진 진보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의연한 활동으로 비춰진다. 일체가 거울의 이미지임을 안다면 무언가에 대항해서 싸울 필요가 없이 오로지 새로운 것을 상상해서 만들어내면 된다. 과거와 싸운다는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허상을 실체로 다시 만들어 내는 일이다.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나, 부당하다는 생각도 모두 거울에 새로운 정보로 입력이 되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 탈 근대적 해방전략은 과거의 한(부정의)을 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이 없는 상태를 창조하는 일이어야 함.


2) 주체 스스로의 수행에 관한 관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 인식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의 배양)

거을 전체가 진정한 나라는 것을 이해했다면, 비록 견성하여 그것을 체득하지 못했더라도 우선 다음과 같은 생각의 전환이 이러워 질 수 있다. 

. '나'라는 캐랙터와 자동차 운전자는 모두 거울에 나타난 이미지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과거에 입력된 정보들이 출력된 것이다. 따라서 내가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내 거울에 이러한 현상을 나타나게 해준 과거의 원인들이 있었음을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이제 앞으로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 낼 것인가이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나 이외에도 다른 행인들이 그 자동차로부터 피해를 받아다고 보일 때이다. -> 의로운 분노가 생김. 이것이 함정이다. 전체가 하나의 거울임을 망각한다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악순환 게임에 빠짐. -> 마음에서 일어난 경계들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삼가는 수행이 중요함.


찰나적으로 새로운 상을 비추는 거울은 오직 새로이 비출 뿐이지, 과거의 상을 다른 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는 원리는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느끼고 아는 방법이 유일한 원리이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원리는 내가 내 안에서 원하는 바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느끼는 일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믿음이 어려운 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영역으로 자신을 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개인적 차원의 행위라면 사회변혁 운동은 집단적인 차원의 기도라 할 수 있음. 그것의 핵심은 보다 나은 세상을 창조하는 데에 있다. 방법론상에 있어서 노력(투쟁)을 통해서 원하는 결과에 대한 믿음을 낼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결과에 대한 믿음 속으로 곧바로 들어 갈 것인가, 이 두가지 방법이 있음.


자기가 자신의 믿음으로 자기 병을 낫게 하는 것인데 다만 그 믿음을 위해 예수가 필요했던 것임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 혹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하지 않고서도 믿음을 내는 실천을 할 수 있을 것.


그러나 믿음을 내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자꾸만 객관적 실재라는 덪에 빠져버리기 때문이고 오감을 통해 경험되는 물질적 현실이 마음과 독립적으로 거기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 경험되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도 그것의 실체성에 빠지지 않고 허상임을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의 오감으로 경험되는 객관적 현실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이해에 바탕을 둔 지헤와,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 결과 억압이 허상임을 이해할 때에는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에 에너지를 덜 쏟을 수 있으며, 문제를 일으키는 주체를 실체로 보지 않고 연기적으로 발생한 한마음의 나툼으로 볼 수 있기에 모두가 무관하지 않으며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라는 인식 하에 적대성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됨.-> 우리가 원하는 다른 종류의 현상에 마음의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게 됨. <반응>의 수준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공성에 대한 이해는 문제가 되는 현실을 믿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함. 

공성에 대한 인식은 자유에 대한 인식이고 공성을 활용한 실천은 원하는 현실을 자유롭게 장조하는 실천인 것이다. 

-> 진정한 사회변혁이론은 공성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연습과 믿음을 통해 원하는 세상을 이루어나가는 속에서 그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과거의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특정 여성들이 분노할 수 있었던 것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유포시켰던 여성에 대한 관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들이 다시 여성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원하는 현실에 대한 믿음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소위 억압의 주체에 대해서도 이것을 동일하게 적용하여, 그들의 현재의 모습을 믿지 않으면서 우리가 바라는 변화된 모습을 믿을 수 있는 끈질긴 마음이 필요하다. 


결론, 지금까지는 간절한 노력(투쟁)으로 (믿음의) 창조를 이룩하는 고전적인 방법만이 있어왔으나, 이제는 믿음을 통해 곧바로 창조하는 탈근대적 길도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그 길을 탐색할 때가 되었다. 


이 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현실을 '믿지 않는' 실천을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래야만 가볍게 한 생각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본성(한마음, 불성)을 얼마나 믿을 것인가, 오직 이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