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경제와 도덕이 모두 건강하면서 사회적으로 괴로움을 덜 받으며 살 수 있을까?
원효가 사유한 길을 다시 음미한다.
그의 사유는 철학적으로 이중부정과 이중긍정의 길을 현시한다.
이것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택일의 사유가 지니는 분별적 지성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현실주의는 이/해의 대립에서 늘 전자를, 이상주의는 선/악의 대결에서 늘 전자를 선택하도록 종용한다.
경제적 이익은 나에게 좋은 것이고, 도덕적 선은 내가 속한 사회에 좋은 것이다.
경제적 이익의 분별이 사회생활에 갈등을 빚는다. 얼음장수와 우산장수의 예. 이것이 이익세계의 본질이다.
도덕적 선은 이와 달리 사회적 일치의 화음을 낳는다고 그 동안 인류는 착각해 왔다.
현실주의에 비하여 이상주의는 늘 그 공상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명분에서 우위를 뽐내고 잘난 체했다.
택일적 경제주의는 이기적 아집을 낳고, 택일적 도덕주의는 위선적 법집을 낳는다.
위선적 법집이란 사회적으로 순수하게 선할 수 없는데, 도덕주의로 순수한 선인 것처럼 위장하기에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이 사회를 행복하게 하는 절대적 진리라고 우기는 고집이 결국 법집을 낳는다. 그 법집은 아집보다 훨씬 더 고약하다. 왜냐하면 정의와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기심과 다른 대의명분에 따라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때문이다.
원효는 아집과 법집을 탈출하는 길로서 이중긍정의 사유를 제시한다.
. 이익과 손해는 교대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이익과 손해는 없다.
. 도덕도 마찬가지, 선과 불선, 불선은 선의 이면에 은닉되어 있기에 불선은 선의 배설물과 같다. 자신의 선행이 절대적일 수 없고 이미 불선의 역기능을 세상에 뿌렸다.
이러한 이중긍정이 실제로 성립하기 위해서 먼저 이중부정의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이중부정은 이중긍정이 이원성duality으로 빠지지 않고 이중성duplicity으로 인식되게 하는 방식이다.
선/불선/, 악/불악, 각 변이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서로 상대방이 있기에 자기도 성립하는 상대방의 흔적이다.(즉 연기적 관계) => 모두 공하다.
-> 모든 색(물질)의 이중긍정적 구조 즉 이중성(선/불선)은 자기 것이 없는 이중부정의 공과 같다.
세상사를 이중긍정적인 포괄법(이중성)으로 읽으라. 호오와 선악이란 택일법으로 보지 말아라.
이중부정의 초탈법(공성)으로 읽으라. 세상사 일체가 모두 인연법에서 생긴 환영이므로 이익과 선 앞에서 좋아 흥분하지 말고, 손해와 불선 앞에서 좌절하지 말아라.
지성으로 사회생활의 기준을 삼으면 인간은 호오의 선택에 갇힌다.
철학의 종말은 지성의 종말과 같다.
과학에 지성을 맡기고, 철학은 세상사가 환영임을 깨닫게 하면서 본성의 길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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