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의 철학_한자경

2부-8장.동서철학의 융합

백_일홍 2017. 10. 24. 11:00

8장. 동서철학의 융합
 
1.동서철학 융합의 지평을 찾아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양한 문화, 다양한 삶의 인간일지라도, 그들 인간 모두에게 내재된 동일한 보편적 본질을 상정하지 않고는 인간을 논할 수 없고, 철학을 논할 수 없으며, 따라서 동서철학의 융합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너 자신을 알라!"가 말하고 있듯이, 철학은 본래 인간의 자기 이해를 목표로 한 것이다. 동서철학의 융합은 바로 그 인간 본질이 해명되는 그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이 글의 핵심논제는 인간의 본질은 모든 자연적, 사회적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 다양성과 차별성을 넘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같음이나 보편의 주장이 지금 현상적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차별적인 것들 중의 어느 하나를 기준삼아 다른 일체를 그 하나 아래 종속시켜 단일화하려는 그런 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름을 융합할 수 있는 같음, 동서를 융합할 수 있는 같음은 서로 다른 양태로 전개되는 현상세계, 자연적 사회적 현상세계와는 다른 차원에서 구해질 수밖에 없다.
 
철학이 보편성을 획득하고 그 지평 위에서 동서를 융합하고자 한다면, 그 철학은 반드시 보편적 인간 본질을 논하는 형이상학일 수밖에 없다. 철학이 형이상학이기를 포기하는 것은 철학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현상적 존재, 사회정치적 동물로 추락할 뿐이다. 우리의 뜨거운 피와 살이 물리화학적 법칙 아래, 우리의 사유와 인격이 정치경제적 법칙 아래 놓이게 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매장하고 난 후라면, 우리 스스로 현실을 규정하는 자율적 인간 이념을 내던지고 난 후라면, 현실의 불평등구조에 따라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불평등하게 대우하거나 대우받게 될 때, 과연 무엇에 기대어 다시 우리의 평등한 인격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같음, 그 형이상학적 본질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현상을 넘어서야 하는가? 2차원의 지구표면은 아무리 가도 끝이 없다. 한계가 없는 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구를 한계를 가진 유한한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2차원 평면 위에서 3차원적 공간의 시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3차원 공간, 지구를 포함한 우주공간의 유한성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3차원 현상 속에 살면서 또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현상 초월적 4차원의 시선을 가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 4차원의 눈이 바로 자연과 사회의 3차원 현상을 넘어선 형이상의 정신, 이념의 정신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형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우리 자신의 다름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이란 본래 3차원의 서로 다른 풀벌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현상을 초월하여 4차원 허공을 나는 자유로운 붕새라는 자각이 없이는 얻어질 수 없다. 같음의 이념, 평등의 이념이란 바로 이러한 현상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인격의 동일성의 이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2.초월적 보편의 자각과 왜곡된 개체 의식 :서양 철학의 길
 
자본과 시장경제, 실증과 과학주의, 기술과 환경파괴 등 서양 근현대를 주도한 정신은 오히려 그와 같은 자유와 초월을 배제한 채 인간을 철저하게 현상적 존재, 즉 자연적 진화와 사회적 문화의 산물로 이해한다. 인간은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나머지 다른 부분과 대립투쟁의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과 자연, 자아와 타자가 서로 대립되는 이원론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가 직관한 형이상학적 정신은 개체 초월적인 보편적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3차원 현실을 사는 현상적 개체 안에서 의식된다. 이처럼 보편적인 초월적 자기의식이 개체적 자아의 의식 안에 출현하기에, 전자는 쉽게 후자로 읽혀지고 만다. 다시 말해 개체 안의 초월적 자기의식의 존재가 개체 안의 개체를 초월한 보편의식의 내재로 즉 유한한 인간 안의 무한한 보편정신의 내재로 해석되지 않고 오히려 보편성과 초월성이 결여된 유한한 개체적 자기의식으로 왜곡되고 마는 것이다. 데카르트 자신에게서 이런 왜곡이 발생하였다. 서양 근대의 정신은 보편과 초월이 배제된 개체적 자기의식, 즉 현상세계 내의 일부분으로서 다른 부분들과 대립 투쟁관계에 있는 개체적 자아의 자기의식이 된 것이다.
 
자연세계와 나의 개체적 의식 간의 간격을 매울 길이 없으므로, 그 둘의 공통 근거로서 신을 도입하는 스피노노자의 시도 역시 잃어버린 보편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가장 손쉬운 길이었을 것이다.
 
개체적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근거까지 내려가 보고는 결국 개체적 자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 서양 철학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서양 이성은 죽었다. 주체는 죽었다"는 해체적 선언은 개체에서 출발한 서양철학의 최종 결론인 셈이다. 이러한 서구 근현대 철학의 결론은 그대로 서구 근현대 물리학의 결론과 일치한다. 궁극적으로 하나의 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 장을 형성하는 에너지의 파동은 무한히 번져나가기에 일체의 존재는 하나로 연관지어져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
 
3. 일체 존재의 상호의존성과 내적 초월의 자각: 동양철학의 길
 
사물의 핵은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단단한 알맹이, 입자, 실체, 극미가 아니다. 그런 것은 실유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시설된 가유, 개념적 설정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궁극 실체가 없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상세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연기론이다.
 
유가철학의 리와 기론 : 개체가 실체적 입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전 우주적 에너지 흐름의 표면적인 일시적 결집체, 기의 상관관계 또는 상호교감의 산물에 니자지 않는다는 것. 즉 개체란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치에 따라 그 리로부터 산출된 유동적 기가 압축적으로 모였다가 다시 완전하게 흩어지는 즉 기의 취산을 통해 형성되었다가 다시 해체되는 그러한 표면적 현상인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도 태어나 성장하다 씨를 남기고 그 껍데기는 다시 기로 흩어져 원상태로 복귀하고 마는 그런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일체의 개별적 존재는 그러한 전체적 우주적 기의 운행 속에서 뭉쳤다 풀어지고, 다시 다른 형태로 또 뭉쳤다가 다시 풀어지는 그런 끊임없는 매듭짓기 현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철학에 있어 인간, 자아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 자아의 자기의식 역시 우주적인 전체적 기의 흐름에 의해 규정된 일시적인 부분현상일 뿐인가? 한 송이 장미꽃은 그 장미나무를 포함한 주변환경의 산물이다. 그 환경이 한국, 지구 그리고 전 우주로까지 확장될 수 있으므로 그 한 송이 장미꽃은 궁극적으로 전 우주적 기의 산물이 된다. 그렇듯 인간 역시 전세계와 우주를 포함한 자연 내지 사회환경에 의해 규정된 환경의 산물인가? 인간을 광물이나 식물의 차원으로 보면, 우주적 기에 의해 형성되고 규정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돌멩이나 장미와 다를 바가 없다. 동물의 차원에서 보면 또 마찬가지로 우주적 기의 형성물이라는 점에서 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광물, 식물,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인간이 단순히 기의 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을 넘어선 우주 전체에 대한 자각을 가진다는 점이다. 동물의 자기의식은 우주적 기의 부분적 결과물로서의 자기 자신만을 자각할 뿐이지, 그 개체적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우주 전체롤 조망하는 초월적 정신이 되지 못한다. 인간 정신은 자기 자신이 전체 힘의 관계 안에서 규정되는 현상적 존재라는 것, 인연화합의 산물이며 우주적 기의 형성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일시적 현상 안에서 개체적 자아라고 할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할 줄 안다.
 
현상존재 전체의 자각이 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간 역시 현상적 존재로서 그 시간 속에, 강물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인간은 결국 고정된 실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바뀐다는 사실을 자각할 것이다. 단지 시간 또는 강물의 흐름에 의해 규정된 존재라면 즉 온전히 강물 속 존재라면 자신을 포함하여 일체가 흘러서 바뀐다는 사실을 과연 알 수 있겠는가? 그 자신이 강물 흐름 바깥의 초월적 한 시점을 얻지 않은 채, 강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과연 알아낼 수가 있겠는가? 자신을 상대적이고 유한한 존재로서 자각할 때, 그 자각의 주체는 이미 상대적이고 유한한 규정을 넘어서는 초월적 정신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초월적 정신, 현상 규정성을 넘어선 자유의 정신을 인간의 절대적 본질로서 규명하고 해명하고자 한 것이 불교와 유가철학의 핵심이다. 무아와 연기의 깨달음은 인과의 규정성, 업의 세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본래적 성품인 불성의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업과 윤회를 벗어난 해탈을 말하는 것이다. 해탈이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차원의 변경이다. 3차원 현상에서 4차원 정신으로의 초월인 것이다. 인간본성, 즉 초월적 형이상학적 본성의 자각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이기에 '견성성불'이라고 한다.
 
유가, 도가 모두 초점은 그러한 우주적 현상의 진리를 자각하는 바로 그 인간 정신의 존재론적 위상, 즉 인간의 현상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본질을 확인하는 것에 놓여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흔히 동양의 철학은 인식론이나 존재론이기 보다는 도덕론이나 실천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와 같은 수행 실천론의 근거는 바로 인간의 본질이 현상에 의해 제약된 특수한 개체적 의식이 아니라, 그 개체적 우연성과 특수성을 초월하여 보편적 관점에서 사유하고 결단할 수 있는 초월적 형이상학적 자유에 있다는 통찰이 놓여 있는 것이다.
 
결국 동서철학의 융합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동서와 고금의 현상적 차별성을 넘어선 자유롭고 평등한 형이상학적 존재로 자각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자각 위에서만 전체 인류가 하나의 평등한 인간 이념 아래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개체와 전체,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으로 나타나는 현상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대화나 융합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차별적 현상을 넘어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 자신으로 가야 한다. 우리 안의 현상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본질로, 우리가 그 안에서 영원한 하나임을 느끼게 되는 그 지점으로 말이다.
 
5.주체의 부할: 형이상학의 회복을 꿈꾸며

보편이나 같음의 주장은 지금 다르게 나타나는 차별적인 것들 중 어느 하나를 기준 삼아서 보편화하고 획일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현상적인 것들은 당연히 차별적이다. 그 차별적인 것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조절할 것인가, 우리의 현상 무대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 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바로 그 안에 배치될 우리들 자신의 본질적 평등성을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현상의 차별성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존재라는 것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형이상학적 본질에 있어 인간은 누구나 동일하며 하나라는 그 같음의 이념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연적 사회적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 차이와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현실적 불평평등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인간은 진화 또는 문화의 산물이다'라는 말 처럼 인간의 자율적 정신을 말살시켜 인간을 현실에 굴복케 하는 비인간적, 아니 반인간적 주장이 또 있겠는가?

물론 인간의 하나됨, 그 형이상학적 본질은 내용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동양인과 서양인, 흑인과 백인, 여자와 남자, 테레사 수녀와 돈주앙, 순교자와 살인자, 그 둘의 삶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겠는가? 각각의 삶의 현상이 그렇게 다른데 도대체 무엇이 같단말인가? 그러므로 현상적으로는 달라도 그 본질이 서로 같다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유한한 3차원적 현상계 너머의 4차원적 존재라는 것, 인간이 단지 서로 비교 가능한 높낮이로 퍼덕거리는 풀벌레가 아니라 그 형이상학적 본질에 있어 누구나 모든 현상적 차별상을 넘어 구만리 높이로 비상하는 붕새라는 것이 먼저 확립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다름의 철학자는 같음과 하나에 반발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꽃밭의 꽃들은 획일적으로 모두 같은 꽃이기보다 서로 다른 다양한 꽃일 때 오히려 그 조화가 더 아름답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어찌하여 동일성이나 보편성, 같음을 주장하는가? 그들이 두려워하는 같음은 꽃밭의 다른 꽃들을 모두 뽑아 내고 하나의 같은 꽃으로 통일하고자 하는 같음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같음은 다양한 꽃임에도 결국은 모두 꽃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형식적 동일성의 같음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획일적 동일성이나 형식적 동일성과 구분하여 여기서 말하고자 한 인간의 같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인간은 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꽃으로 비유되는 순간에도 인간은 단순히 조화를 이루며 피어있는 한 송이 꽃에 그치는 것일 수는 없다. 여러 다른 꽃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듯이 여러 다른 인간들도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겠지만, 인간의 인간다운 점은 꽃이 갖지 못한 바로 그 조화의 의식, 전체의 자각에 있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개체의 한계를 벗어나 전체를 자각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꽃과 다르고, 바로 그 개체 초월적 자기의식, 현상 초월적 보편의식에 있어 인간은 누구나 다 같은 것이다. 즉 현상적으로는 누구나 서로 다른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지만, 본질적으로는 누구나 꽃밭 전체를 바라보며 그 조화를 의식하는 정신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인간 안에 내재된 그러한 현상 초월적 정신을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본질로, 인간 안의 신성과 불성으로 밝혀 보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