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의 철학_한자경

지은이의 말

백_일홍 2018. 11. 19. 09:46

<일심의 철학> 출판일 2002년

5년전 내놓은 <자아의 탐색>과 연장선상에 있다.

 

자아를 찾아 나가는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일체의 것에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고 결국은 무아를 깨닫늗 순간, 그 깨달음이 곧 일심의 깨달음이다.

 

아와 법, 나와 너, 나와 세계를 구분짓는 일체의 경계가 무아의 깨달음 속에서 사라질 때, 그 경계, 무분별의 공의 성자신해, 허령자각이 바로 일심이다.

 

경계의 소멸 속에 그 바탕처럼 드러나는 공이기에, 그것은 경계지어진 오온 안의 것도 오온 밖의 것도 아니다. 하나의 일심이 무수한 유정 각각에게서 일심으로 자각되기에, 바로 이 점에서 일즉다 다즉일이 성립하며, 바로 이로부터 우리 삶의 원초적 고독을 견더 나가게 하는 하나됨의 신비한 느낌이 퍼져나간다.

 

일심은 그 안의 모든 차별적 경계를 넘어서서 나와 너를 포함하고 나와 세계를 아우루는 포괄적 무한자.

 

일심의 통찰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의 본질이다. 불교와 유가사상 뿐 아니라 서구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그러한 무한과 절대의 사유가 철학의 핵심이었다.

 

무아의 깨달음, 공의 자각은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자아를 지워 나가 영혼을 비울 때, 그 빈자리가 신에 의해 채워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체험일 것이다. 다만 공의 신묘한 허령자각을 신이라고 하고 지워야 할 자아의 영혼을 인간이라고 말한다면,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된다.

 

그 절대적 무한을 인간과 구분되는 신으로 이름하지 않고 일심이 이라고 부름으로써 불교는 이원론적 경계지움, 무한과 유한, 신과 인간의 절대적 분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부정될 아도 인정될 아도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를 주장한다. 있는 것은 오직 신이고 일심일 뿐이다. 인간 그 자체가 바로 일심인 것이다. 이는 누구나 일심으로 존재하기에, 모두가 동일한 하나이면서 또 동시에 각각의 다라는 것이 일심의 신비이고 생명의 신비이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그 나와 대면한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모두 일심 안에 그려진 그림 속의 나와 너, 무대 위에 펄쳐진 연극 속의 나와 너이다.

 

그림 속에 형태화된 나와 세계, 연극 속에 등장하는 나와 너를 정말 나 자체이고 세계 자체인 줄 생각하여 분별하고 집착하는것을 아집과 법집이라고 한다. 반면 그것이 그림 속의 분별이고 연극 속의 집착일 뿐, 본래 공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곧 아공과 법공의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 속에서 마음은 그림이나 연극 속의 경계지어진 나를 벗어나, 일체의 경계와 분별을 넘어서는 무경계의 공인 공무변처로, 그림이나 연극 너머의 무한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림이나 연극 너머로 나아간 그 자리, 그 공의 자리가 바로 그 곳으로부터 그림이나 연극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며 원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상을 움직이늗 부동의 동자이며, 그 자체 현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현상 전체를 조망하는 영원의 눈, 형이상학적 눈이다. 일체 현상의 분별적 경계들이 지워지면서 드러나는 무분별의 마음, 바로 일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