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_정화

제25구.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백_일홍 2020. 1. 16. 21:50

(법성게)제25구.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분별을 떠난 교묘한 방편으로 뜻대로 여의보배를 잡아

 

분별 없이 그저 지켜보는 수행으로

모든 것이 마음자리의 나툼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무연이라 합니다. 또한 마음 없는 데서

마음을 나투어 중생의 세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게 하니 방편이라고 합니다.

 

(법계의 노래)

 

뭇 생명은 인연에서 생명으로 있으나

인연이란

결정된 것도 아니며

전혀 관련 없는 것이

인연을 이루는 것도 아니니

 

인연이라고도 할 수 없고

인연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인연으로 있으면서

생명으로 서로를 생명으로 있게 하지요.

 

그러므로 하나의 생명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곧 아무런 결정성이 없는 없음無이야말로

인연의 장을 이룰 수 있으니

결정댔다면 인연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없다는 데에만 머물지도 않으므로

인연이 생명의 활동으로 나툴 수 있어

인연은 있음(유)으로 드러나지요.

 

그러므로 인연은

없음에도 걸리지 않고

있음에도 걸리지 않는 것

 

없음도 없음에 머물지 않고

없다는 것을 변주하면서 있음이 되고

있음도 있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변주하면서 없음이 되니

 

있음과 없음이

한 자리에 어울려 하나 된 것이

인연

 

그래서 하나의 인연은 모두를 담고 있고

인연의 법계는 뜻대로(如意) 세계를 이루니

 

전체도 하나의 전체가 아니라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전체가 되어

전체들이 전체로서 겹치면서

다시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것

 

그것은 인연도 없는 데서(無緣)

교묘한 방편으로(善巧)

스스로의 법계를 뜻대로(如意) 드러내는

화엄의 바다

 

(강설)

문득 한 마음 일어나니

 

마음은 인연따라 문득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일어났을 때는 있는 것 같지만 사라지고 나면 없습니다. 때문에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것으로, 마음 그 자체는 어떤 모습으로도 머물지 않습니다. 있는 데도 머물지 않고 없는 데도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모습에도 얽매임 없이 그저 인연따라 작용하고 있습니다. 작용만이 있을 뿐 작용 뒷면에 체성으로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문득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여실히 알아차려 수행이 익어갈 때, 의지 작용인 고정된 대상을 지향하는 중생심이 쉬게되고 마음이 모두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음은 지각능력이 아닙니다. 마음 조차 아닙니다. 제 스스로의 원인을 갖지 않고서도 능히 모든 것을 나투니 법계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쉬고 쉬면 마음이 없는 곳에서 모두가 마음으로 있고 법계는 생명을 열어갑니다. 법계의 생명은 마음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220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물질에 상대하는 하나의 실재로서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그대로 작용인 곳에서 연기가 현현하고 있는 연기는 마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야말로 연기법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아무런 억지 분별없이 그저 지켜보는 수행으로 모두가 마음자리의 나툼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무연無緣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연이란 '문득'라는 말과 통합니다.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원인이 되거나 그 자체 밖에 원인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에서 원인과 결과일 뿐, 어떤 것으로도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무어라고 결정하여 말할 수 없는 데서 일체가 존재하게 되니 불가사의라고 합니다. 221

 

물이면서 얼음이며 얼음이면서 물인 접면이 물과 얼음을 있게 하고, 그 접면을 공에 견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접면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사실은 이 접면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곧 공이 모두의 진실한 모습이며 공이기 때문에 생명활동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공이 일어나서 한 모습을 나투는 것을 잠깐 존재하는 가법이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습은 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인 접면의 인연에 따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과 가법이 중도인 까닭이 있습니다. 접면은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고서도 그 어느 것에도 존재하고 이것에 따라서만이 모든 법이 제 모습을 나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도인 공은 하나의 사건이나 사물들이 이루는 접면인 동시에 그 낱낱의 전체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과 가법과 중도가 연기실상인 인드라망의 법신인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나타내는 다른 이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중도의 참모습은 모든 중생의 제 모습입니다. 중생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서 부처님으로 제 모습을 갖는 것이 아니라 중생 그 모습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이것을 마음 없는 데서 마음을 나투어 중생의 세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게 하니 방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22

 

마음을 쉬고 쉬어 빈 마음이 될 때 그 마음 그대로 우주 법계가 됩니다. 마음 없는 데서 법계가 일어나고 법계는 빈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 없는 것이 법신이고 거기서 나타나는 법계가 화신이며 마음 없는 데서 모두를 이루는 공능이 보신입니다.

 

때문에 한 마음이 문득 일어나는 것은 단지 마음 하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삼신으로 온 법계를 이루는 순간입니다. 마음 쓰는 대로 삼신이며 법계의 창조입니다. 이것이 또한 여의보배입니다.

 

공은 연기법의 근본실제이고 중도는 수행자의 실천입니다. 모든 행위에서 접면인 공의 실천이 될 때 깨달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무심의 근본 마음자리, 일체를 이루고 있는 공인 접면에서 실천으로 빛을 나투어 모든 분별을 떠날 때, 미묘한 부처님의 방편을 제 스스로 쓰고 있고, 여의보배를 뜻대로 다루어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근본실제에 돌아와 있게 됩니다.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