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_정화

제26구.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백_일홍 2020. 1. 18. 09:52

(법성게) 제26구.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집(불성)에 돌아가 분에 따라 자량을 얻네

 

근본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량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법계 전체에 보배를 

보내고 있는 것이고 그 보배로 일체 중생의

온 삶이 있는 것입니다.

 

(법계의 노래)

 

법을 알지 못하면

집에 있다고 해도 지친 나그네와 같고

안목이 열리면

나그네 길도 집이 되리니

 

돌아갈 집이란

마음이 빈만큼

생명의 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으로

평안함을 나누는 것이지만

 

갇힌 안목은 스스로조차 가두어

집도 집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어디에도

매임없는 발걸음이

스스로의 집이 되지 못한다면

아직 지친 나그네 수행자요

 

걸음마다 매임없는 인연이 될 때

무상을 벗으로 하는

지치지 않는 나그네이면서

해탈의 자량이 되려니

지친 나그네의 짐을 더는 분이 되지요

 

곧 수행자의 자량은

무상한 인연에

눈을 뜬 만큼 커지는

빈 공간

 

(강설)

지금 그대로 온전히 열림

 

화엄에서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해탈을 이루는것도 마음이요 중생계를 이루는 것도 또한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한 번도 결정된 제 모습을 갖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집착 없는 흐름과 결정된 제 모습을 갖지 않으면서 인연따라 모습을 나투면서 삶의 온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 불성으로 수행자의 집입니다. 

 

수행자가 돌아갈 집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빈 마음으로 온 생명을 살고 있는 인연의 흐름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수행자가 돌아갈 집입니다. 돌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가고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자리가 집입니다. 226

 

마음이란 뇌의 작용이 아닙니다. 온 우주법계의 열린 시공에서 시공의 차별없이 작용하면서도 낱낱에서는 차별적 시공을 이루고 있는 중중무진의 법계가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들의 마음 밖에 또 다시 법계를 이루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 자체가 법계이며, 그 생각의 작용은 단지 우리들의 뇌의 떨림이 아니라 법계의 떨림입니다. 

 

어떤 때는 적극적으로 서로의 모습을 일으키거나 사라지게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옆에서 지켜보듯 다른 모습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곧 빈 마음의 시공을 보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서로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공능의 상즉상입에서 제 모습을 띠면서도 무차별의 법계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자기의 분을 따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分이라고 해서 낱낱 중생마다 높고 낮은 차별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중생마다의 차별이란 그 자체로 법계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법계는 위아래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마다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이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공능만이 아니라, 바로 중중무진으로 겹쳐있는 시공에서 모든 중생들의 무차별 생명력에 따라 자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분分'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전체의 부분이라든가 상근기.하근기들로 구분한 말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일법계의 무차별로 겹쳐 있는 중중무진의 시공에서 낱낱의 모습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행자의 근본인 마음자리에서 나툰 그 모습 그대로 법계를 나타내는 분

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근본 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량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법계 전체에 보배를 보내고 있으며 그 보배로 일체 중생의 온 삶이 있습니다. 만일 이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량이 있다고 하면 집착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비록 자량을 얻는다고 했지만 자량 자체가 빈 마음이 빛으로 나툰 비로자나 부처님이기 때문에 얻으려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비로자나 부처님을 얻으려고 한다면 마음으로 마음을 보려고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앎의 대상이 될 때는 이미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다고 합니다. 

 

깨달음이란 전체가 그대로 마음이 되는 때입니다. 양경쌍조를 확실히 여는 것이 그때입니다. 228

 

본디 집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해도 중생들은 늘 집 밖에서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안이란 잃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무엇인가를 갖고서 잃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중생의 삶으로서 이를 집착이라고 했습니다. 집착이란 근본 실제가 빈 모습임을 알지 못하고서 허공을 움켜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집착이 있을 뿐 집착할 만한 대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집착을 놓을 때 모든 불안은 사라지고 법계의 맑고 빛나는 마음이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나타납니다. 온갖 시비분별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비분별을 가리는 말을 삼가고 삼가면서 그 장면을 지켜보기 시작하면 우리 업을 이루는 특성인 언어분별의 허구에서 점점 자유롭게 됩니다. 

 

침묵이 수행자의 큰 덕먹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 쉬어감이 익어가는 것을 자량을 얻는다고 합니다. 쉬고 쉰 마음의 작용이 켜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언어분별의 허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때 삶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고 그때 비로소 법계가 지금 그대로 온전히 열린 세계에서 깨달음의 빛을 나누고 있음을 알게됩니다.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