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인정투쟁과 냉소 사이

백_일홍 2020. 1. 21. 09:58

인정투쟁과 냉소의 사이

 

인정투쟁, 이를 통해 문화적 진보나 사회적 성취가 가능해진다는 것.

 

그러나 문화나 사회의 거시적 매커니즘과 달리, 교우와 병치될 경우의 인정투쟁은 일종의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형식적으로, 교우가 비록 상호인정에 근거하더라도 (인정)'투쟁'의 에너지는 그 자체로 '동무'가 말하는 동정적 혜안이나 화이부동, 그리고 존재론적 측은지심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정투쟁이 지닌 자가당착적 요소들을 쉼없이 재구성, 재분배함으로써 그 독성을 희석, 휘발시키는 사회적, 문화적 체계는 이른바 '발생적 소음'을 비대칭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 넉넉한 편이다.

 

이와 달리,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귐이라는 미시 사회의 경우, 인정투쟁의 역학은 곧 과부하의 장애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인정투쟁이라는 사회진화론적 메커니즘을 교우에 적용시키는 짓은, 우리시대 인문학이 결연히, 새롭게 강조하고 접근해야 마땅할 '상처'(각주: 인간의 문제, 곧 인간관계의 문제에서 그 모든 개선과 변혁은 상처의 문제에 대한 전면적, 근본적, 지속적 관심과 처방이 없이는 필경 사상누각의 운명에 놓인다. 상처의 역사를 은폐한 채 이루어진 그 모든 문화와 제도의 풍경은 반쪽의 진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의 근현대철학사조차도 상처라는 중층모순의 프리즘을 통해서 솔직하게 재서술될 날이 와야 할 것이다.)의 문제에 맹목적인 탓으로 보인다.

 

생산주의와 진화론적 틀로써 인간관계를 체계 속으로 전유하려는 태도는 늘 상처의 문제가 둔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무'는 무엇보다 그 상처의 속도를 무력화시키는 실천적 현명함을 가리킨다.

 

인정투쟁이라는 뜨거운 매체의 저편에는 '냉소'라는 차가운 매체가 발도 없이 굴러다닌다. 동무론의 요체가 '듣기'와 듣기 이상의 동정적 (존재론적) 혜안을 갖추기 위한 간단없는 실천이라면, 냉소는 실로 그 기원의 무기력과 무능을 감추면서 가능해진 풍경의 매너리즘일 뿐이다.

 

냉소는 해결도 해체도 해소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일적 네트워크의 체제에 특징적인 '과잉-소통', '과잉-정보', 스펙터클이라는 환상적 인간관계의 돌림병, '파노라마'라는 문화병, '분열병적 자본주의 체계' 속의 체질화한 '피로', 그리고 거울사회의 나르시시즘(동무론 15장 참고) 속에서 늘어나는 대화와 사귐의 결락, 소통과 산책의 결핍이자 그 만성적 징후인 것이다.

 

냉소는 흔히 실천의 편에서 실천을 방해하고 흠집내며, 연대의 편에서 연대를 방해하고 금가게 한다. .. 냉소는 어떤 '자기-생각'의 덩어리인데, 스스로의 지식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가능한 '지혜'마저 놓친다. '생각'의 바깥은 우선 '대화'다. '서늘한 열정'과 '명랑한 긴장'을 대리보충적으로 재서술해왔던 동무론의 지형 속에서 냉소는 시대의 요청을 읽지 못하는 다만 '외설'일 뿐이다. 그러므로 냉소란 무엇인가? 진정한 적도 동무도 없는 시대, 지혜가 아닌 숙오(숙성하여 영리함, 어릴때부터 영리함)를 뒤집어 쓴 지성의 하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