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16장. 무능의 급진성(1) 인문의 오래된 미래

백_일홍 2020. 1. 22. 11:09

1.책이 아닌 책

 

인문의 그 낡고 고유한 급진성:

체계가 기승을 부릴 때, 인문학도 개인의 생활양식은 향용 처지는 듯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엉뚱해 뵈는 잉여이거나 혹은 막막한 부재로 느껴진다.

인문의 급진성 운운은, 이 잉여나 부재 속에 은폐된 오래된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것.

 

인문의 그 낡고 고유한 급진성을 내 생활 속에 전유하려고 할 때, 전일화된 자본주의 속을 가로지르는 내 타협의 양식은 무엇일까? 그 타협이 고민 속에서 내가 상시로 행하는 책읽기와 글쓰기의 실천적 가치는 무엇일까?

 

인간 실존의 아우라

인간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흔적

 

학인 각자의 몫으로 배당되는 문제는 오히려 수입된 인식의 체계가 생략한 실존적, 역사적 비용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체계를 거스르면서도 이드거니 걸어갈 수 있는가? 혹은 이미 내 세계관과 버릇과 체질까지 삼투당한 체계의 윤동력과 창의적으로 불화할 수 있는가, 내 개인 실존에 관한 자아의 서사를 세계화한 체계에 능동적으로 관련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이다. 아래에서 논의하게 될 '부재의 사치' 욕심없는 의욕, 산책, 무능의 급진성은 모두 이 창의적 불화의 방식으로 내 스스로 실천하는 가운데 수확한 사유의 작은 결실들이다.

 

새로운, 지속가능한,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인문의 기별을 어떻게 알릴 수 있는가?

그 새로운 기별은 어디에서, 어떻게 올까?

 

가령, 그것은 어려운 시대를 겪었던 벤야민이나 레비나스의 상식이 될 수는 없다. 서구의 혁명들은 대체로 종교적 상징에 그 젗줄을 대고 있긴 하지만 우리 현재는 경우가 다르며, 더구나 적은 고정점이 분명한 야만적 폭력과 억압이 아니다. 오웰의 문학적 사례와 알튀세나 부르디외의 이론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오히려 적은 피지배자의 동의, 체질,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낱낱의 버릇과 취향을 통해 '강박적으로'(각주: 외상적 강박은 이벤트성의 극적인 위기만을 그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일상적 억압과 상처에 반복해서 노출되는 경험 역시 그 피해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사태에 응답하면서 성찰적으로, 그리고 통합적으로 자아의 서사를 재서술, 재구성하는 대신) 유사한 사태들에 강박적으로, 기계적으로 응대하도록 만든다. 나는 우리의 삶터인 자본주의적 체계야말로 '기업사회' 속의 기업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 반복해서 노출되는 일상적 억압과 상처의 가장 일반적인 출처라고 본다. 따라서 체계 속의 개인은 갖은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이와 동시에 바로 그 체계를 앓으면서 외상성 강박행동의 기계적 반복을 통해 도구적 합리성의 교환 경쟁체계에 순치되거나 힘겹게 적응한다. 체계의 오이디푸스에 점점이 망가지는 현대인의 불안이 반드시 섹슈얼리티(라이히, 마르쿠제)로 환원될 수도 없거니와 '의사소통적 합리성(하버마스)'으로 처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계급이나 성차, 즉 분배의 문제만으로 다 끌어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근대적 합리성의 전범이었던 체계(베버)를 일상적으로 삼켜야 하는 외상적 체험의 대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으리라고 본다.) 재생산된다. <동무론> 444

 

신매체의 공간도 아니고, 종이책의 구실존도 아니라면,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등극한 기술주의적 문화와 더불어 걸어갈 미래 인문학, 혹은 예술과 종교의 자리는 어디일까?

우선, 이 시대 인문학도들의 과제는, 부실의 혼만잡착한 나무였을 뿐인 한국 현대 인문학의 종언과 그 종언 이후를 사유하는 것이다. 445

 

2.욕심 없는 의욕

 

전일화된 자본주의적 세계회의 와류 속에서 인문의 사정을 살피고 새롭게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최종심급의 잣대는 삶의 양식이다. 개인의 진실은 삶의 일관된 양식의 '충실성'으로써 증명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완벽한 진리란 결국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인 것.

 

낭만적 허영과 소설적 충(진)실

 

중세적 궁정이 동력은 허영화 교만, 자본주의적 시장의 동기를 탐심으로 나눈바 있다. 흔히 사랑과 종교를 나르시시즘의 일종으로 보듯이 중세는 나르시시즘의 증여-공간이었으며, 근세는 에고이즘, 그것도 윤리적, 종교적으로 정당화된 합리적 에고이즘의 교환-공간이었다.

 

허영의 나르시시즘도 아니고 욕심의 에고이즘도 아니라면, 미래적 인문주의의 사적 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욕심없는 의욕

수동적 긴장

 

출세간은 이윽고 세간과의 창의적 긴장을 놓치게 되고, 상급의 도는 살림이나 시전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터에서 구해야 한다.

 

의욕은 욕심과 금욕의 사이를 지르되지만 지며리 나아가는 오래된 삶의 지혜다. 심리주의에서 가없이 벗어난, 삶의 양식이라는 약속의 충실성으로서의 지혜로운 근기. 욕심의 영도에서 다시금 얻는 하아얀 욕심'으로서의 의욕

 

3.부재의 사치

 

"이성의 빛이 아니라 존재의 빈터"(하이데거)

 

인문적 가치, 사치와 잉여

소비자본주의적 사치

 

기실, 사랑(에로티즘)과 종교, 예술과 문화 일반은 모두 사치의 형식이다. 사치의 기질, 형이상학적 욕망

 

소비자본주의적 삶과 불화하는 미래 인문주의의 한 형식을 '부재의 사치'라고 불러왔다.

 

축적과 낭비로서의 사치가 아니라 비움과 나눔으로서의 사치는 그간 내내 불화해온 종교와 인문학이 가장 낮게 접속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본제적 코드들을 속으로부터 뒤집는 부재의 사치는 무엇보다도 결락이 아니며,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 쉽없이 복제하는 결락의 욕망도 아니다. 결락이 아닌 부재, 어눌이 아닌 침묵, 무관심한 관심, 욕심이 없는 의욕, 번득이는 잉여, 이 같은 빈 중심의 역설적 생산성을 생활 속에 내려 앉히며, 자본제적 교환과 물화가 끊어진 자리에서 인문의 울림과 떨림을 살펴낸다.

 

4. 산책과 동무

 

산책은 (자본주의가 우리 현실의 전부인 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데, 바로 그 까닭에 그것은 무위와 부재의 부사적 사귐이 가능한 사이공간이 된다. (부사는 근본적으로 잉여이며 따라서 부재의 가능성이다. 자본의 외부가 없듯이 붓도 문장의 외부는 아니지만, 부사의 강도와 그 물매는 문장 전체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 '가능성의 중심'이 된다)

 

누가 산책에 나서는가? 물론, 그것은 상처받은 자들이다. 상처의 성격은 우선 체계적이다. 그것은 산문적 근기를 지니고 상처의 기억과 그 의도보다 앞서 걸어나가는 삶의 양식을 가리킨다. (요컨대, 체계 앞에서 불모일 수밖에 없는 의도의 저편에서 재구성하는 삶의 양식의 생산적 충실성!)

 

상처받은 자들, 그리고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려는 자들만이 그 상처와 불화의 급진성 속에서 동무가 되어 걷고, 동무를 부른다. 그래서 상처와 불화를 매개로 산책은 고독하지만 생산적인, 여리지만 진득한 싸움을 자본제적 체계에 건다.

 

산책자는 어디로 가는가?

결국 체계의 관념적 단말기에 불과할 뿐인, 의도의 고정점에 박힌 대의나 기능적 자기정체성보다 앞서 갈 뿐이며, 상처의 기억에 대한 회고적-자서전적 시선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향한 연극적 실천의 일관성으로 향해 있을 뿐이다.

과거를 향한 나르시시적 동일성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연극적 섭동과 연대다.

 

오직 아직 도래하지 않은 관계(동무)를 향한 부정적-부재적-부사적 연대의 사이길을 실험하고 있을 뿐.

 

5.무능의 급진성

 

앞의 모든 일들이 내 삶의 구체적인 양식과 어떻게 접속할까? 창의적인 불화, 불화하는 생산이 겉보기에 이르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무능'이라는, 어떤 색다른 생산성이다.

 

자본주의적 유능이 기존 체제의 기능적 단말기로 안전하게 배치될 때, 그 모든 기계기술들이 관료제와 일치할 때 바로 이 무능은 역설에 근거한 새로운 인문의 운신 원리를 ,그 빈 중심의 가능성을 소환한다.

 

"패자의 위치에 떨어진 자로서 개인은 다시금 진리의 파수꾼이 된다" 그러나 한층 더 근본적으로 말해야 한다. 인문-종교-예술은 워낙 더 떨어질 곳이 없는 자리에서 운신하며, 그 낮은 빈 자리를 급진화시키는 방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미래완료적으로) 증명한다.

 

지는 방식, 혹은 무능의 어떤 것 속에서 인문은 오히려 타락한 현재의 공시와 세속의 통시를 고스란히, 힘없이 그러나 미증유의 비판적 풍경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 타락한 세속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희생양(예수, 소크라테스 등)들의 속적없는 죽음과 그 무능은, 역사귀류법적 진실이 되어 그 모든 희생된 가치의 비판적 무게로써 자본주의적 유능을 내리치게 될 것이기 때문.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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