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산책 3

백_일홍 2020. 1. 28. 11:41

10장. 산책, 혹은 의도의 바깥으로 외출하기 

미로를 걷는 것으로서의 산책


상처, 특히 타인들과의 만남이 강박적으로 재생산하는 상처가 가리키거나 나타내는 지점은 대체 어디일까? 


'죄가 있거나 없는 사람은 단지 이동할 뿐이지만, 상처받는 사람은 걷는다'


물론 이 '걷기'에서 상처의 고유한 성격이 드러날 테지만, 그것은 죄와 달리 '방향'이나 목적지(메카)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경우에든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처는 방햐없이 걷게 할 뿐이다. 


자신의 의도와 자기정체성이 일치하는 행복하고 오만한 시절에는 결코 걷지 않는 법이다. 세속은 그 정의상 의도와 어긋날 수밖에 없고, 산책은 정의상 의도보다 앞서 걷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순례하거나, 이동하고, 등산하거나 여행하지만, 결코 '산책'은 하지 못한다. 고쳐 말하자면, 삶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임의로 확정하고 고집하는 그 모든 독단주의자들을 걷지 못한다. 산책의 상극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단주의이다. 알파와 오매가 사이, 시작과 끝 사이, 전주와 서울 사이를 오락가락할 뿐 산책을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처는 삶을 미로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는 자는 주행로/이동로가 아닌 미로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미로를 걷는 것으로서의 산책은 상처가 덧나는 원천인 의도와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산책은 상처입은 미로의 삶이 그 기억, 혹은 의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외출이며, 그 요연한 외도 체계, 앓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생활정치다. <동무론> 329


11장. 산책과 자본주의

산책, 혹은 자본제적 체계와의 생산적 불화


자본주의는 모든 것의 이동이며, 심지어 샤머니즘에까지 이른 원격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책은 이동이 아닌 걷기이다. 

산책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데, 바로 그 까닭에 그것은 내가 '동무'라고 불러왔던 무위와 부재의 부사적 사귐이 가능한 사이공간이 된다. 그렇기에 산책은 자본주의적 환경속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걷는가? 그것은 상처받은 사람이다. 조금 더 정확히는, 상처를 받은 탓에 세계가 세속이라는 미로로 바뀐 사람을 말한다. 


물론 이 상처는 자본제적 삶의 양식, 그 체계적 식민화의 그늘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상처를 매개로 산책과 자본주의는 창의적으로 싸우거나 우수꽝스레 사통한다. 


산책은 문명과 인간관계의 상처로부터 도피해 숨을 수 있는 루소류의 자연을 향한 낭만주의, 원시주의가 아니다. 


근대화 일반이나 자본주의는 상처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회피하거나 억압한 자리를 가리킨다. 술자리가 아니면 상처를 말하지 않는 회사 인간들 처럼, 자본주의의 단말기로 혹은 그 배달부로 기능하며 쉼없이 이동-하는/시키는 현대인들은 그 이동의 속도주의 속에서 상처를 외면한다. 


성처는 모른 체하면서도, 건강(보신)을 떠드는 꼴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산책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동선과 템포를 벗어난다. 그리고 인간의 상처를 다독이는 리름을 저절로 배우면서 자본제적 도시의 인력으로부터 몸을 끄-을-며 벗어난다. 그곳은 오직 없는 관계를 향한 부정적(부재적) 삶의 양식이 밝혀내는 새로운 가치들이 번득이는 결절점들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이동이면서 동시에 '교환'이라면, 산책의 탈자본주의적 창의성은 무엇보다도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자본제적 교환의 바깥으로 외출하도록 돕는 데 있다. 구름과 바람, 소리쟁이와 기생초, 다슬기와 꺽지, 금강송 너머의 황온 등은 당지 완상의 대상이거나 레저의 환경만이 아니다. 그것은 단번에, 그리고 총체적으로, 우리 삶의 원형적 모습이 등가적 교환의 외부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산책,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선 자본제적 체계와의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삶이다. <동무론>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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