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동무론(1) 연대, 혹은 인문적 삶의 양식

백_일홍 2020. 1. 29. 10:12

3장. 동무론(1) 연대, 혹은 인문적 삶의 양식

 

1.친구/동무, 혹은 기호의 안팎

 

존재보다 빠르게 다가드는 기호들의 세상. 기호의 매끄러운 자의가 친구의 끈끈한 인연에 대한 알리바이로 작동하기 때문. '사람'이 없이도 삶의 가능한 지경의 입구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 오히려 역설적인 알리바이가 되기 때문.

 

역설적으로, "'사람'이 없이도 삶이 가능한 지경"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기억과 향수를 잊지 못한 채, 오히려 나태하고 부지런한 후기 자본주의적 일상 속에 정연하고 속편하게 복귀하고자 열망한다.

 

각종의 기계-사람들이 서서히 출현하고 있지만, 그래서, 그들의 질서가 기존 현실의 질서를 눈에 띄지 않게 따돌리고 있긴 하지만, 그 끈끈한 몸의 기억들, 그 공유된 접촉의 추억들은 완강하게 의식을 점유한다. 그래서, '친구'는 다시 그 전래의 흡인력을 부여받고 낡은 흡반으로 지상을 걷는다.

 

한 번도 제대로 '남'이 되어보지 못한 관계의 기억은 완악하고 집요하고 추접스럽다. 온갖 연줄로 얽혀든 사회 속의 우리는 '남'이 되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고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른다.

 

내 실천의 진정성을 담보해주던 그 완고한 사물의 질서는 꺼져내리고, 다만 기표들의 편차와 그 점증, 혹은 점감하는 시선들만이 나를 표시해주는 시대, 신화와 상징마저 전자화되는, 전자적 기호들의 유희가 절정에 달한 시대, 그 속에서 흔들리며 미끌어지는 낡은 주체는 그 낡은 '친구' 관계를 통해서, 그들이 나누고 있는 공통의 기억, 그 습도, 혹은 열기를 통해서 제자리, 혹은 그 죽을 자리를 잡는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어렵사리 복권하면서 제 스스로 죽을 자리에 찾아드는 것이다. 친구의 미소, 그 주름살, 그 걸음걸이와 뱃살, 그 술잔과 그 담배연기, 그 변치 않는 말버릇과 허장, 그 과도한 기대와 그 과소한 실천의 패턴 속에서 제자리, 혹은 죽을 자리 찾으며, 당신은 안심하고 안정하며 안돈하는 것이다.

 

당신이 익명의 포괄적인 코드로부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그 기호의 제국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겠다는 환상, 그 허위의 이름이 다름 아닌 '친구'다. 그리고 당신이 아는 한, 그 현실의 코드, 혹은 그 코드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소식은 '친구'밖에 아무것도 없다. 왜 '친구'밖에 없는가?

 

그것은 바로 당신이 '친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아니었고, 또 아닐 것이라고 주문하며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인간들이 소비자로 살아가는 이 '마지막 인간'(니체)의 시대에, 당신의(이라는) 친구는 그 소비자적 존재와 부질없이 대치하는 물신이기 때문이다. 끝내 당신의 공부도, 경험도, 연륜도, 종교도, 운명도, 당신을 바꾸지 못했기(하기) 때문이다.

 

2.친구/동무, 혹은 냉소의 안팎

새로운 인문적 실천과 그 실천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정투쟁과 냉소의 악순환, 그 진지한 불모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다만 그렇게 만나고, 그렇게 술마시고, 그렇게 애기하고, 그렇게 헤어지면서, 우리들은 임계를, 경계를, 한계를, 우리 자신들의 진면목을 피하고 다니는 것. 그러므로, 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도 반가운 내 친구여.

 

냉소는 해결도, 해체도, 해소도 아니다. 그것은 실로 아무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뒤집힌 허영과 모방욕망이거나 허무에 체한 탓으로 생기는 트림이거나 정신적 무기력을 무기력의 정신으로 손쉽게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자본제적 제제나 그 네트워크와 더불어 바빠지면서 사라져가는 친구의 부재와 그 결핍의 불만, 그 미숙한 혼돈의 징후에 불과하다.

 

그것은, '가득 찬 침묵'의 생산성이나 '생산적 권위'의 가득 참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방적 욕망과 피상적 잡담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냉소는 흔히 실천의 편에서 실천을 방해하고 흠집 내며, 연대의 편에서 연대를 방해하고 금가게 한다. 대체로 허영의 균열음에 불과한 그 냉소는 사정의 삼투를 발판으로 삼아 '친구 사이'의 그 축축한 사이에서 메마르게, 힘없이, 무료하게, 평화롭게 서식한다.

 

술은 내내 이 분위기의 알리바이, 혹은 그와 관련된 모든 알리바이의 분위기로 기능한다. 술은 자본제적 피로와 힘겹게 싸우거나 통정하는 그 모든 친구들의 판타지인 것. 술은 체계와 공생한다.

 

술은 비판과 실천의 동무 사이를 공감과 주정/주정의 친구 사이로 환원시키고, 부패시키고, 발효시키고, 속물화시킨다.

 

전일하게 다양해진 자본주의, 매로그게 신체화된 상업주의 속에서 부패하고 속물화한 인정투쟁의 양식으로서의 '친구'들은 90년대 이후 급속히 파급된 냉소주의의 야뉴스와 같은 원자적 존재들이다.

 

이 '친구'들은 그 가차 없고 삭막한 부가가치의 계단을 쫓아 스스로를 파편화, 분열화, 원자화시키면서 인정투쟁과 신분상승의 꿈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실과 연고, 인맥과 학맥, 그리고 지역과 출신의 그늘을 쫓아다니면서 '친구'로서의 연대와 실천을 공고히 하고 그 오래된 의리를 충량하게 지킨다.

 

물론, '음주'는 이 친구의 연대와 실천을 따스하고 축축하게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장치이자 그 뒷풀이, 그래서 결국 그 뒷막음인 셈이다.

 

시장이 '가치'를 도외시한 채 '값'만을 재촉할 때, 친구들은 스스로 물화의 과정 속에 투신하고, '기계-남자'나 '도구-여자'로 자신들을 변신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자본의 스케일 위에 환원, 환산한다. 그들이 잠시 그 '스케일'을 버리고 환등 속의 어둠과 술의 주변에서 따스하고 축축한 '친구'로 환생할 때에도 그 자본과 기계는 여지없이, 끈질기게 그들의 뼛속까지 따라다닌다.

 

주류의 속진과 결별을 고하려는 아웃사이더들이 새로운 기치와 기상과 기세를 보이긴 하더라도, 그 '정신'이 특정한 생활양식이나 이를 매개하는 구체적인 매체들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필경 그 정신은 '다만 정신일 뿐이라는 사실'의 자가당착에 갇히진 않을까? 새로운 귀족주의 역시 체계와 관계와 매체의 문제를 끌질기고 이드거니 통과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삶의 양식이나 인간관계의 성격에서 근보적인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면, 탁구 치면서 어울리는 소위들과 골프 치면서 어울리는 장군들을 변별해주는 '다른' 실천이란 대체 무엇일까?

 

자폐적으로 퇴각하며 세상을 향해서 냉소하는 몸짓은 자본제적 삶의 물신화와 속물화에 내몰린 그 모든 인문주이자들의 배수진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 역시 결국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냉소란 대체로 일종의 '부산물'이며, '생각'처럼 공부의 본령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은 대체로 갖은 형식의 인정투쟁에서 밀리거나 처지는 징후이기 쉽다.

 

구원은 무슨 통각이나 몰록 깨침(돈오)이나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은총이 아니라 결국 삶의 양식과 '버릇'의 문제로 집약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일상의 만남/사귐의 구태를 번연히 고수한 채 새 이름의 기치 아래 재집결해서 서푼어치 인식의 확장을 꾀하거나 각오를 다진다고 대체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인가?

 

인문적 삶과 실천의 기본양식, 그 세세한 버릇의 양태를 바꾸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모든 진보는 헛손질이며 헛힘이며 헛구역질이다. 자본과 권력 사이를 줄달음치는 속물적 인정투쟁은 물론이거니와 그 한시적 반문화로서의 냉소(주의)를 경계하는 이유도 필경 그 제스처들이 인문적 삶의 양식으로, 그 무늬로, '산책'으로 내려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5

 

3.친구/동무, 혹은 '듣기'의 전후

 

'듣기'의 (값이 아닌) '가치'다.

듣기가 없으면 인정이 없고, 인정이 없으면 인식도 없으며, 인식이 없다면 다시 듣기는 원천 무효일 수밖에 없다.

 

동무론이라는 매우 실천적인 인문연대의 기획과 관련해서 내게 중요하게 다가드는 데마는, 이 '듣기'의 형태와 사람사이의 관계가 서로 어떻게 이어지며, 특히 상호영향의 자장 속에서 듣기의 실천적인 기능과 효과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듣기'로써 '사람'을,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그 '관계'를 바꾸(려)는 노력과 그 성과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화결핍증후군

 

'연인'이 그 정의상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라고 했듯이, '친구'는 무엇보다도 '듣지'않는 관계를 가리킨다. 잡담, 고백, 수다,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회집, 추억을 채색하지만 응당 괄목상대해야 할 그 친구들의 외부성과 타자성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 동아리의 낡은 어휘와 판박이처럼 굳은 표정과 체계화된 공통의 희망만을 고집할 뿐, 변화한 시숙의 무늬와 그 가파름에 별 관심이 없다.

 

현 단계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에 대한 새로운 감성과 더불어 그 말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긴절한 침묵', 즉 듣기의 환경과 제도일 것이다. '말이 듣(기)는' 사회.

 

잡담, 수다, 고백, 소문이 결코 적은 곳이 아님. 소통의 부재.

인문의 미래적 연대에서 말의 감성이 놓일 자리.

 

상대의 말에서 습관처럼 타자성을 제거하거나 그것에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는 체계화된 사회의 무능력.

 

듣기라나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귀기울여 잘 듣는 태도, 그 긴밀한 수동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뜻하는 '듣기'는 극히 능동적, 생산적, 창조적인 것이다. 이 듣기가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이유는, 단적으로, 그것이 그간 은폐되거나 억압된 것, 놓쳤거나 흘린 것들까지 집요하고 부드럽게 끌어내어 말하게 하는 현실적 계기와 동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듣기는, 화자의몸을 깨우고, 그 정신을 섭동하게 하고, 그 무의식을 해방시켜서 자기 '아닌' 자기, 자기보다 '큰' 자기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이 듣기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한 입가가지가 아니다. '동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듣기'는 그 동무의 종재 자체를 살피고 키운다. '듣는' 내 앞에서 말하라, 내 동무들이여-네가 누구인지 알게 하리라!

 

섬세하고도 서늘한 '듣기', 그 '버텨듣기'를 생략해버린 그 표준화한 관료적 관계, 그 축축하고 눅눅하게 사사화된 뒷풀이식의 관계, 그 사이비 직관과 통찰의 관계, '애국심'과 같은 집중된 편사, 오만, 그리고 이기심 만으로 구성된 관계, 그 한가한 속물들의 가부장적 관계, 그 순박한 일차원적 휴머니즘의 관계, 그 속에서 동무의 꿈, 그 지속가능한 실천적 삶의 양식은 바로 그 양식화된 삶에 의해서 부스러지고 만다.

 

삿된 추억의 자본주의적 기생과 어눌한 다변의 반복에 불과한 친구관계를 어떻게 넘어서는가? 그 길의 처음은 오히려 '듣기'라는 극히 비근한 행위의 근본적 재구성 속에 있을 것이다. 듣지 않고 말하는 친구들 앞에서 말하지 않고 듣는 동무가 되는 길 속에 새로운 실천과 연대의 원초적 가능성이 생성될 수 있다.

 

'듣기'로서 섬세한 비판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친구로 떨어져 내리는 그들을 동무로 다시 끌어올리는 이 미혹한 우리 시대의 생활 정치성! 212

 

4. 동무:뫼르소와 고캉탱의 사이

현대의 똑똑함은 우아하고 심오하게 공전하는 '자기피폐'의 모습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 똑똑함은 결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 현명함이 아니다.

 

신과 포근한 형이상학(들)이 떠나고 남은 빈 자리를 채우려는 노력과 함께 근(현)대의 고독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근대는 그야말로 고독의 자유와 고독의 후유증을 동시에 앓는다. 이 명석한 현대의 고독은 주로 신고 갖은 형이상학과의 결별 이후에 가능해진 집단적 사태다. 이 근(현)대의 고독 속에는 실재의 바닥과 그 허무가 드러나는 심연이 차마 끔찍하다. 20세기에 흔히 접하게 된 허무주의와 냉소나 나르시시즘으로의 후퇴는 결국 모두이 심연을 마주보거나 회피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사람' 즉 역사를 보는 존재라고 하거나 인간이 곧 '사이존재'라고 하듯이, 자신의 내면에 골몰할 수록 오히려 그 존재의 이유는 실종된다. 키르케로르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그저 죽음에 이르는 병의 일종일 뿐이다. 그 똑똑한 피폐의 공전 속에서 자의식은 발광, 이윽고 발광의 징후까지 보이고,

 

무릇 근대 이후의 똑똑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명랑하고 이드거니 연대하면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이 '내면의 골몰'을 슬기롭게 극복해 내는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 즉 "명석하면서도 명랑한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은, 이론들을 뚫어내며 삶의 양식으로 몸을 끄-을-고 일상의 낮은 자리로 내려앉는 일이다.

 

이런 뜻에서도, 지식은 늘 양가적이다.

그 자의식의 발광, 혹은 발광 이후에, 다시 숯불 같은, 혹은 별빛 같은 성성적적의 정중동, 혹은 동중정을 유지할 수 있는 길 속에 이 똑똑함, 그 사변의 피폐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실천의 암호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 골몰과 피폐의 연쇄구도를 뚫어내지 못하면 실천의 연대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일인칭 관념의 감가상각'만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정신적 자폐는 이 '관념의 감가상각' 혹은 자가증폭이 돌이킬 수 없는 중증을 보이는 경우다.

 

내가 '생각은 악마'라고 했을 대의 그 생각은 '자기골몰' '낭만적 허영' '자기차이화' '스펙너클의 나르시스' '자기반영적 관계' '자신의 내부만을 걸어다니는 이기주의의 미로' '늘 동일한 것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적 선택' 그리고 그 헛똑똑함의 자기중력에 의한 내부 침시기을 가리킨다.

 

5.친구/동무, 섭동의 전후

사귐은

비밀번호를 나누어 확인하고, 이심으로 전심하며, 특정한 문법과 어휘를 나누어 쓰고, 관념의 궤도와 코드를 다시 잇는 재미로 깨가 쏟아지는, 일종의 정신적 가족주의가 아니다.

 

정리가 합리를 갉아먹고, 사감이 공의를 훼손시키고, 선사에 후공하고 당동으로 벌이하고, 동지의 견강으로 동무의 유연을 꺾고, 자폐의 경화 위에 체제의 기치를 꽂는 것이 우리의 사귐이 될 수 없으며, 그 새로운 실천의 터전이 될 수 없다.

 

동무의 한 측은 말 그대로, "같은 것이 없는" 관계와 같은 것. 그것이, 임계와 경계와 한계를 걷는 삶과 더불어 위험한, 서늘한 관계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동무를 사귀는 일은 그 위험한, 없는, 미래적인 존재양식에 나를 견주며 겹치는 일이며, 그래서 나를 재조정하고 재구성하는 계속적인 과정, 그 끝없는 고쳐말하기 고쳐던지기 그 섭동의 실존적 조형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같은 관습에 몸을 의탁하는 짓으로써 상식과 도덕의 알리바이를 내세우지 않는 관계, 이념과 진보를 빌미로 같은 언어와 사정 아래 결집하지 않는 관계를 뜻한다.

 

동무는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통해 '위험한 삶'을 일상화하고, 그 위험이 유혹하는 전염으 자장 속, 그 열린 동무의 지평 앞으로 나를 호출해서 내 삶의 양식을 그 근간에서 뒤흔들어보는 재조합, 재구성의 실험이며, 해체와 갱생의 경험이다.

 

그래서 동무로서의 나는 끝없이 '넘어가는 존재' '전염시키는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표준화한 위성들을, 그들의 백귀야행하는 인정투쟁과 냉소와 가족주의를 '섭동시키는 존재'로 부름 받는다.

 

시간은... 자기동일성의 미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모든 섭동의 근원이다. 그래서 동무들을 내 "시간처럼" 대접해야 한다는 것은, 그 관계 속에서 내 스스로 섭동의 진원지이기를 실천하며, 또 그들에게 나를 흔들어 깨우는 섭동의 또 다른 진원지들이기를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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