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연인과 타자

백_일홍 2020. 1. 29. 15:04

6장. 연인과 타자

1.문턱 : 연인과 친구의 사이


이 생각의 출발은 일상의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어떤 '체감'이다. 


자본주의적 욕망과 거래의 도식화된 풍경이 은폐하고 있는 일상의 관계들이 속속들이 훼파, 왜곡되었다는 진단과 근심, 혹은 공포다. 체계 속에서 새로운 교환의 방식을 알지못하는 동무들은 그 공포의 끝에서 하나 하나 괴물로, 어리석은 기계로 변해간다. 


가령, 자본제적 네트워킹이 편재를 은폐하거나 호동하는 

친구와 연인이라는 낭만주의는, 그 왜곡의 역사성을 잊은 채 존립하며 이곳저곳에서 언죽번죽 재생산된다. 연인과 친구라는 21세기의 낭만주의는 곧 낭만의 인공, 그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결국 친구라는 전래의 낭만주의도 그 낭만주의의 출처인 자아의 그림자일 뿐이며, 그 점에서는 연인도 대차가 없어 보인다. 직장과 가정으로 양분된 우리 사회의 자본제적 도식과 그 동선은 이 왜곡된 관계가 이기적으로 숨어들어가는 안이하고 안정된 체계적 단말기에 불과한 듯하다. 친구는 직장이라는 시스템의 외곽에서 웅성거리고, 연인은 가정이라는 시스템의 외곽에서 소곤거리는 것. 


물론 이것은 우리의 일상이, 체계적으로 반복되는 상처를 은폐한 채 인간적 교환의 전부를 '욕망하는 거래'에 일임해 버리는 현실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이 임계-체감에 달한 사실과 닿아있다. 


근대성은 그 자체로 거대하고 복합적/다면적인 성취와 상처의 겹-덩어리라는 인식 아래, 우리의 인문학과 철학은 그 상처에 대한 전면적인 접근과 지속적인 대처에 나서야 한다한다. 남한 지식인들의 미래적 태도는 우리의 상처, 그 역사와 구조에 대한 진솔하고 엄밀한 탐문에서 출발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일상을지배, 잠식하고 있는 상처의 치료, 그리고 그 상처의 일상적 반복이 만든 인간관계의 재구성에 그 많고 다양한 이론들이 동원되고 처방될 수 있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문제를 보다 실천적으로 정리해보면, 연인과 친구라는 가장 진부한 일상의 관계축에 주목하고, 그 관계들을 타자성의 지평 속에서 근원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이로써 새로운 인문적 삶의 양식과 연대이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그 조건과 한계를 보다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헤아리고 따지려는 것이다. 공도체든 체계든, 결정이든 증상이든, 정리든 합리든, 그 실천이 현실적으로 결절하면서 내려앉는 지점은 모두 인간관계라는 그 사소함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복은 무엇보다도 삶의 사소함에 대한 현명한 대응 양식 속에 자리하지 않던가? 


(비록 대안의 지평은 흐릿하고 버릇의 관성은 환강는 할지라도, 실천이 반복해서 주저앉는 자리를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길은 싹튼다. 실패와 무능의 자리 너머를 사유하는 이른바 '비사유의 사유'는 그 직시의 끝에서 자라며, 이것은 새로운 실천의 길을 뚫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시라는 것은 막힌 벽을 향한 시선의 밀도가 아니다.)


사소함에 목숨을 거는 열정은, 연인 사이의 관계에서 그 쉼없는 감가상각이 은폐되는 가장 낡은 방식이다. 그 사정의 사소함과 그 열정의 과중함 사이의 어긋남이야말로 사랑이 지닌 만고불변의 통속적인 다이내미즘이 거듭 부활하는 곳이다. 사랑의 실패 속에서 역설적으로 타자성의 지평을 체험하는 일은 그 어긋남의 끝에서 얻는 실천적인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일상을 극진히 대접하면 진리가 물러난다는 이치.


아 사랑일진대, 누구든 그 사소함과 하찮음의 광기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사소함의 재해석, 그리고 그 실천적 재배치는 연인, 혹은 친구 사이의 낭만적 자명화와 자본주의적 교환충동/물화의 오해와 폐해를 고쳐나가는 데 필수적이다. 연인, 그것은 요컨대,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일치라는 영원한 시대착오에 얹혀 기식한다. 나아가 그 일치가 야누스의 얼굴처럼 품은 모순 속에서 내재화의 폭력은 피할 수 없다. 


친구라면 그것은 요컨대, '말이 필요없는 관계'다. 사적 의리에 기대고 추억으로 회귀하는 정서적 일치의 패거리가 된 채 설명과 재서술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관계의 덧이다. 


과제는, 동무라는 낮선 타자성의 관계 속에 길을 내는 일이다. 없는 관계, 무능의 급진성을 통해서만 점근선적으로 드러나는 부사적 관계의 길을 뚫어내는 일이다. 그것은 동무라는 관계 속에서 가능해지는 새로운 타자성의 (질적으로 변화된) 시간 체험에 동참하는 길이기도 하다. 257


2. 문제: 동무, 길 없는 길

인식과 대화는 물론이거니와 호의와 연정조차 그 우선적 과제는 자기동일화, 혹은 자기차이화의 거울방을 깨고 나오는 일이다. 문제는 그 거울을 깨고 나아가는 일이며, 그 탑의 경계를 가로질러 가는 일이다. 그래서 무한한 낯섬의 지평 속에서 두렵게 개시되는 새 관계들의 실천이 '이드거니' 지속되어야만 배운 만큼 세상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자아의 지옥, 인식의 감옥에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 혹은 개념적 사유의 내재화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내 몸은 어떻게 내 문제에 앞설 수 있는가? 

목숨을 건 도약의 삶과 그 관계를 어떻게 일상화할 수 있는가? 

성숙의 댓가는 무엇인가? 

내 거울방, 그 상상적 동일시의 중력에서 벗어날 때 얻는 상흔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 

사랑하면서 어리석지 않을 수 있는가? 

사랑하지 않고 아낄 수 있고, 진리를 모른 체하며 극진할 수 있는가? 

새로운 성/사랑의 문화를 정치적으로 재배치하려는 노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노동-체계의 금기와 사랑-축제의 위반을 조화시키는 삶의 양식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연인도 친구도 타인도 아닌 동무의 길, 길 없는 그 길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3.배경과 현장 : 세속

세속이라는 개념은 

우선 의도와 실천 사이에서

심중과 인간관계 사이에서

호의와 신뢰 사이에서

공동체와 사회 사이에서

자아의 거울방과 타자들의 벽 사이에서

나와 너 사이에서 어긋나고 미끌어지는 틈새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틈새, 혹은 그 틈의 심연이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오해와 상처의 구조를 가리킨다. 

내내 구 구조들을 체감하면서도 그 구조의 기계성과 객체성에 휘말려 들어가는 자가당착을 말한다. 


의도의 비극적인 불모성, 내 진실은 내 의도 속에 없다는 사실, 그 사실들의 불모가 얶어내는 인간관계의 페허가 곧 세속이다. 


의도가 부서지는 외상적 경험들로부터 쉼없이 퇴각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안정화가 다시 그같은 의도들을 복제해낼 뿐인, 그러한 세속.


세속은 그 호의와 선의가 사회성/타자성의 관계 지평 속에서 신뢰를 얻지 못한 채 그 심연 속에 꺼꾸러지면서, 또, 필요한 경우에 필요한 도약에 내내 실패한 채 끝없이 어긋나고 미끌어지면서, 쉼없이 욕망하며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그 완악한 호의, 선의의 구조를 가리킨다. 


세속은 호의와 선의로 포장된 지옥의 사건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우리의 관계적 현실을 가리킨다. 그 빛나는 선의아 매끈둥한 호의로 덧칠된 거울방의 완악한 자폐성을 말한다. 호의/선의가 어쨋든 그 물질적 조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호의/선의는 결국 부재하는 중심과 같고, 그것은 마치 점묘화처럼 주변의 물질과 행위를 통해서만 그 부재하는 중심을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과정에서 가장 초보적인 접근에 해당한다. 


호의 속의 실체가 악의라는 뜻이 아니라, 호의의 구조적 실체 그 자체가 악의로 미끄러진다는 것. 


만일, 우리 모두의 호의/선의가 자의적으로 집결, 착종함으로써 돋을새김하는, 그 부재하는 중심이 악이라면? 

엄마, 아빠, 누가, 형의 호의/선의가 자의적으로 집결, 착종함으로써 돋을새김하는, 그 부재하는 중심이 오해와 상처라는 가족이라면? 


세속 속에는 은유라는 상처의 형식, 그리고 환유라는 욕망의 형식이 조합을 이루면서 만드는 근본적 우연성이 자연스러움의 더께를 이룰 뿐이다. 


마주침과 우연성의 유물론이 우리 의도의 외부에서 끝없이 연기의 네트워크를 흔들고 있을 뿐. 


마찬가지로 사랑의 본질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상처가 상처를 호출하며, 욕망이 욕망을 약속하는 은유와 환유의 형식적 네트워크 뿐이다.

거미줄의 나비처럼, 사랑은 흔히 스스로의 몸부림가 나르시시즘이 만드는 그 네트워크상의 진동에 대한 오인과 착각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오히려 연정의 무근거와 우연, 그 반복과 모방을 알면서 모른 체하고 말과 살로써 극진히 공대하면서 그 여인 속이 타자성의 지평을 찾아가는 데에 미래적 사랑의 실천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연인들 사이에 놓인 심연의 사실과 도약의 요청이 철저하게 망각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바로 이 사실의 안이함 속에 연인들이 사는 세속의 본질이 있다. 


이처럼, 세속은 오늘도 타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써 쉼없이 연인들을 재생산하고 있다. 어리석게 사랑하는 것, 사랑하다가 더 어리석어 지는 것, 필시 그것이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세속을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의 운명일 것이다. 


세속이 슬픈 이유는 악 때문이 아니다. 전두환의 폭압이나 내 돈을 떼먹고 달아나는 악덕 상인이 세속을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을 '아프게'할 뿐 슬프게 만들진 못한다. 정착 슬픈 것은 아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픔의 그늘 아래 피해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오해와 상처의 착종이다. 마치 부모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부모의 유산을 놓고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리는 자식들의 욕심과 그 상처가 슬프듯. 


슬픔은 적들의 횔포 탓이라기 보다 오히려 친구들의 선의아 그 무모함에, 연인들의 호의와 그 어리석음에, 가족들의 애착과 그 타성에 얹혀 생긴다. 그리고 그 호의/선의가 내재적으로 동반하는 구조적, 반복강박적 상처와 욕망, 그 근원적 오해와 자의 속에 우리네 세속의 본질과 슬픔이 내내 잠복하고 있다. 


호의가 에고이즘과 사통하고 선의가 나르시시즘의 미끼로 전략하는 그 속절없는 무능 속에 세속의 본질은 옹글게 똬리를 틀고 있다. 


4.호감/호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


호의는 기본적으로 사적 정서다. 

사랑한다고 믿거나 느끼는 것은 아직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적 정서의 어떤 결절을 자평하는 것일 뿐으로, 사랑이라는 그 관계적 현실 속의 타자성에 접근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자아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체로 거듭나고, 세계상을 통으로 굽어보는 자의식이 되면서 얻은 가장 큰 병증은 내가 '심리학주의'라고 일컫는 태도다. 그것은 일종의 데카르트주의로서, 자기가 자기 생각과 의도의 구심체로 존재한다고 믿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기껏 그것은 키르케로르가 말한 '절망의 형식'(자기 자신에 절망하면서도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의 상태)에 가까울 뿐이다. 


호의와 호감으로서의 연정은 사회적 신뢰의 지평에 이르지 못하는 독아론인 셈. 혹은 호의/호감은 세상을 자신의 심리 속에 내재화하는 방식의 초기증상과 같다. 문제는 그 호의와 호감이 실질적으로 사랑과 무관하다는 것이며, 현명하지 못한 호의와 호감은 필연적으로 오해와 상처를 낳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사적 정서의 응결, 사적 규칙의 남용으로서의 호감/호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낭만적, 심리적으로 타자와의 사이비 일치를 전제하는 것이다. 신뢰가 아니라 정서에 따라 움직일 때, '우리we'는 곧 동물농장식의 우리로 바뀌며, 그 우리의 안팎으로 오해와 상처는 피할 수 없다. 

일심동체의 이데올로기 혹은 

감정이입empathy이라는 혼란은 타자의 지평으로 나아갈 때 흔히 만나는 혜살이다. 


낭만주의적 감정이입은 과학적 이성의 도구주의를 대체할 능력이 없다. 

동무의 신뢰로 가는 길의 첫걸음은 곧 감정이입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사이비 감정이입의 안이한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 사적 규칙이 심리적 전능성이라는 미숙아적 태도 속에서는 관계라는 객관성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자기환상의 동력으로 쉽없이 재생산되는 화해와 일치의 낭만주의야말로 역지사지의 실천을 방해하고 '동정적 혜안'을 그르치는 주범이다. 


호의와 호감도 권력의지의 일종. 

아이들과 여자들의 착함은 약하기에 착해 보이는 상태일 뿐. 


호의와 호감의 늪 속에서 자의적으로 번성하는 사적 준칙들이 결국 스스로를 타자의 지평으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사실, 이로써, 신뢰라는 사회성의 건축에 치명적인 결함을 노정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호의와 신뢰를 구별하는 것은 현명한 인간관계를 건사하기 위해 극히 요긴한 실천적 지혜다. 이 작고 흐릿한 구별짓기를 이드거니 실천해가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적지 않은 어리석음과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이를 준별하기 위한 훈련이 첫째는 호의와 호감에 관습적으로 얹혀 있는 도덕주의적, 낭만주의적, 종교적, 그리고 나르시스적 선입견을 걷어내고 찬찬히 그 실제의 기동과 효과에 주목하는 것이다. 서서히 드러나는 사실은 호감과 호의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신뢰아 책임의 사회적 관계에 이르지 못하는 비관계의 관계라는 말. 게다가 그 심리의 상태는 아침 안개처럼 허망하게 악감과 악의로 돌변할 수 있는 유동적 나르시시즘의 변형태에 불과하다. 결국 개인이 나르시스적 구심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는 중성적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 


호의와 호감이 지속적, 생산적인 인간관계 속의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배치되고 활용되는가 하는 게 요점이다. 


성숙하지 못한 호감과 그 호감이 재생산하는 나르시스적 열정은 상처의 공장이다. 


호감이나 호의를 알면서도 모른 체한 뒤, 그렇게 모른 체한 뒤에 생기고 응집된 실천의 결기를 우리 일상과 관계 속의 어느 자리에 배치하고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5. 연정


6. 신뢰

신뢰는 사회성의 가치, 사적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객관성이 가치를 가리킨다. 

동일시의 심리적 내재화로부터 서늘한 거리를 둘 수 있는 인문적 성숙의 가치를 말한다. 

기분과 심리주의적 직관을 포함해서 사적 원칙에 기인한 갖은 기대를 접어둘 수 있는 능력, 혹은 실천적 지혜를 말한다. 

비약의 이치, 타자를 향해 자신의 몸을 끄-을-며 나아가는 사회적 비약의 이치. 

그것은 나와 너 사이의 심연을 사회적 실천의 새로운 버릇으로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건축이다. 


신뢰는 개인의 심리적 충실도나 선량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충량함을 서늘하게 모른 체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지경이 객관성이다. 

신뢰는 심리나 기분, 직관이나 추억이 회귀하는 내성적 근거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타자와 미래를 향해서 도약할 수 있는 실천적 가능성을 말한다. 그것은 천길 낭떠러지에서 발을 '앞(미래/타자)으로' 내밀기와 같다. 


신뢰는 나와 타자 사이이 심연을 공대하는 방식에 다름아니다. 


7. 사회성, 그리고 비평

신뢰는 역설적이다. 

신뢰는 인간 실존과 실존 사이의 심연 속에서 무한을 체감하고 그 무한에 실존적, 실천적으로 응대하려는 삶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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