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타자

백_일홍 2020. 1. 30. 09:33

8.타자

 

타자의 지평은 나를 '우리' 위에 포갠 후 다시 그 우리 속에 너를 포획하는 독아론이 아니다.

독아론은 내성의 기원주의이자, 우선 감치의 나르시시즘이다.

 

임의로 확장된 나(=우리) 속에 심리적, 관념적으로 너를 우겨 넣으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감정이입의 자동성에 의해 삼투되는 것이 아니라 힘겹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니체)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수잔 손택)

마음(내성)의 이름 아래 추구되는 의도된 화해는 그 모든 자기차이화의 변증법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상이다.

 

독아론에서 벗어나는 길은,

일종의 '유물론적 마주침의 외상'을 겪는 수밖에 없다. (김영민, "비평, 혹은 위기론")

그것은 내 기질과 버릇을 털어내면서, 내 몸을 끄-을-고 너를 향해 끈질기게 나아가는 지난한 마찰의 반복을 통해서 조금씩 극복된다.

심리적인 동일시의 환상을 벗어나 무한하게 개방된 '현실'로 나아가려는 태도다.

라캉의 상상적 에고처럼 체계적으로 오인된 의존에 근거한 고착의 형식을 뚫어내려는 사회적 실행의 노력이다.

칸트나 후설의 선험적 주관, 즉 '나'가 나르시스적으로 '우리'로 증폭되는 독아론적 주관과의 실존적 대치이다.

무한으로 열린, 무한이라는 부재를 향해 몸을 질질 끄-을-며 자신의 외부를 향해서 쉼없이 걸어나가려는 태도를 말한다.

 

타자를 만나는 일은,

내 자아의 내면적 풍경을 장식하던 이미지들과 개념들이 자아의 텍스트를 내부에서 변주하는 문변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 문변의 자기차이화가 만드는 세계의 근원적 동일성을 문제시해야 하며, 그 세계 속의 인식이 자아의 구성적 조건과 한계 속에 자리잡은 방식을 물어야 한다.

 

이론과 문변으로 미봉된 자아의 거울방, 그 자기차이화의 다양성을 깨고 나가는 외부성의 모험과 더불어, 거꾸로, 자아의 구성적 실체가 이미 타자라는 헤겔류의 명제를 보다 섬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생각과 의도로써 집중적으로 관리되는 자아는 한갓 나르시스의 거울방이면서도, 이와 동시에 타자의 개입이 없는 자아만의 공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겹의 진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로써, 나와 타자가 만나고 헤어지거나 섞이고 해소되는 지점과 방식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이 앎을 죽이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실천적 노력인 셈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아직 앎이 아니다. 앎은 의심이라는 교차/교통의 마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성에서 출발함으로써 타자를 말살하는 폐단을 원천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이다.

 

내정적 표상의 자명성과 자연성이 결국 특정한 역사와 형식, 그 생성적 한계와 조건을 통해 재구성, 재서술된 것임을 보임으로써 거꾸로 타자를 주제화하는 계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이성과 인식의 독아론적 구조

 

타자와 연인(계속)

 

이처럼, 타자로서의 연인은 그 여인의 시간성 속에 겹쳐져 있는 타자성을 가장 연인스러운 것으로 공대하는 아이러니이 실천적 생산성 속에서 느리게, 힘들게, 지며리 태동한다. 결국 부재가 매력의 근원이듯이, 낮섬이 사람의 기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합일이 그리고 낭만적 감치가 저질의 이데올로기인 점은 재론할 가치도 없다.

 

사랑의 감동은 없다. 감동의 그 완벽한 부재를 응연히 바라보고 극진하게 응대하는 역설의 생산성, 그것만이 (없는) 사랑의 흔적이며 그 감동일 뿐이다.

 

내 모든 호의와 의도가 하얗게 질리는 그 부재의 지평, 그 심리적 영도, 그 영원히 낮설 부끄러움 속을 함께 걷는 것, 사랑은 그 짧은 환상이며, 그 환상의 비용으로 얻은 더 짧은 세속 속의 구원이다.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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